第五首 탁탑천왕(托塔天王)
-단서가 드러나다.
귀역의 마법(魔法)은 또 다른 전설을 불러내다.
쏴- 쏴아아-
빗줄기가 점점 더 거세졌다.
빗속을 뚫고 그들이 달려간 곳은 그 자리에서 다시 십여 리를 달려간 곳이었다. 산자락이 은은히 바라보이는 둔덕에 면한 숲.
거기에는 오래된 사당 하나가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정말로 겨우 형체만 갖춘…….
그 안에 들어서자 한효월은 바로 바닥에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잠시만 호법을 부탁한다."
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
어둡고 깊은 밤, 가끔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들릴 뿐. 주변은 쥐 죽은 듯 고요하다.
이미 하늘은 비가 거의 그친 상태.
심소옥은 한효월의 옆에서 손으로 턱을 괸 채로 운기조식 중인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보고 있자니 느낌이 묘하다.
부서진 벽으로 비쳐 드는 달빛에 드러난 그의 얼굴은 마치 관옥(冠玉)처럼 수려했다. 절세의 미남인지는 모르겠으되, 단아하고 그윽하여 여자의 심금(心琴)을 울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제법 잘생겼는데?'
그녀의 눈빛이 묘하게 반짝인다.
달빛에 얼굴의 굴곡이 신비롭게 그늘진다.
그런데 그 우뚝한 한효월의 콧날을 보고 있던 그녀의 눈빛이 돌연 굳어졌다.
그의 코에서 희미한 백기가 아지랑이와 같이 흘러나왔다가 들어갔다가 하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숨결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맙소사, 진기가 유형화(有形化)될 정도의 고수란 건가? 설마…….'
그녀는 한 생각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한효월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창백했던 한효월의 안색은 빠른 속도로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의 무공을 생각한다면 검상(劒傷)을 입었다 할지라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터이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가 있고 난 다음에 입은 검상,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운기조식을 끝내기 전에 옥형성주를 쫓아내기 위하여 무리하게 진기를 운용했다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서 다시…….
그런 문제로 그는 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제법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가 운기조식을 끝내고 눈을 떴을 때는 한 시진이나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눈을 뜬 그는 우물우물 뭔가를 씹으면서 호로를 기울이고 있는 심소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술 냄새가 나는 게 허리에 매달렸던 그 호로는 술을 담았던 모양이다.
"마실 거야?"
그가 눈을 뜬 걸 보자 심소옥이 불쑥 호로를 내밀었다.
역시 주향(酒香)이 코를 찌른다.
물끄러미 그 내민 호로를 보던 한효월이 조금 굳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자가 맞긴 한가?"
"아닌 거 같아?"
묻는 그녀의 눈이 웃음 짓는다.
때 묻은 얼굴에 눈빛은 장난스레 초롱하다. 정면에서 바라보니 의외로 앳된 얼굴이었다. 열여섯, 일곱쯤?
"그 나이의 여자라면 가릴 게 있을 것 같은데, 아직 어리긴 하지만……."
한효월의 말에 심소옥이 피식 웃었다.
"내가 어리다구? 우리 여기서 한번 시험해 볼까? 내가 애를 낳을 수 있는지 없는지?"
그리곤 대뜸 눈앞으로 대드는 얼굴.
초롱초롱한 눈빛이 영롱하다.
천하의 한효월도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무림이 개방된 곳이라지만 남녀가 유별한 시절이다. 거지라고 할지라도 심하다.
그의 멀뚱해진 얼굴을 보고 심소옥은 깔깔 배를 잡고 웃어댔다.
"그 정도를 가지고 쩔쩔매면서 누굴 타이르려고 해? 그런데 당신이 정말 맹주부에 나타났다는…… 그 무림맹주의 사제가 맞아?"
그녀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되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한효월도 되물었다.
"제천교는 은밀히 움직여. 그놈들은 꼬리를 드러내지 않아. 정말 지독한 놈들이지! 그런데 그런 놈들이 그처럼 대대적으로 쫓을 만한 적이라면 범위가 많이 좁혀진단 말이거든. 하지만 당신은 내가 알던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았어. 그럼…… 새로 나타난 인간일 수밖에."
말이야 험악하지만 논리는 정연하다.
한효월은 그녀를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말이 없자 심소옥은 눈을 반짝였다.
"흐음…… 그런데 왜 그놈들에게 그렇게 죽어라 쫓긴 거지? 아니, 거긴 왜 간 거구? 혹시 그 귀신을 쫓아간 건가?"
"귀신?"
"그 시체를 몰던 늙다리 귀신 말이야. 그놈은 귀도사(鬼導師)라구 부르는데 무림 중에 유명한 귀역칠수 가운데 하나…… 뭐야? 그럼 그 늙다리 귀신을 쫓아온 게 아니란 말인가?"
혼자 종알거리던 심소옥이 입을 다물며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한효월도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우연히 그곳에 있던 것이 아니었다.
우연히 그곳에 간 것은 한효월이었고, 그녀는 그곳에서 사흘 간이나 그 노인을 기다린 터였다. 일단 입을 열자 그녀는 마치 빨래판에다 물을 쏟듯이 거침이 없었다.
"무림고수들의 시체?"
한효월의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온 거였군……. 난 또 뭐 아는 게 많은 줄 알았네."
그의 반응에 심소옥이 심드렁히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은 간단한 의미가 아니었다.
얼마 전부터 무림 중에는 묘한 일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그것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아니, 신경을 쓰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럴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도 안 되는 일은 점점 실체로써 드러나게 되었다.
시신(屍身)이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죽은 사람의 시신을 파가는 일…….
그것도 죽은 지 일주일이 지나지 않은 시신. 거기에 더해서 반드시 무림고수의 시신이라는 단서가 있었다.
"무림고수의 시신이란 말인가……."
한효월이 다시 중얼거렸다.
얼마 전에 만났던 요동권왕과의 조우(遭遇)가 뇌리를 스쳐 간다.
청룡장에서 보았던 일들.
"그 와중에 독고 맹주의 변고가 전해진 데다가 그 시신마저 도난당하는 일이 일어났으니, 이거야말로 필유곡절이지!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니잖아?"
심소옥의 음성이 빛을 뿜었다.
게다가 그녀는 우연히 시체를 몰고 가는 괴노인을 만나게 된다. 살아 있는 사람도 아닌 시체를 몰고 가는 구시술(驅屍術)이란 건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늙다리 귀신은 그 도관에서 머물면서 시체를 훔치고 있었거든. 오늘이면 숫자가 채워져서 목적지로 간다고 했었는데 그 망할 놈 땜에……."
문득 그녀가 이를 갈았다.
뽀도독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가는데 제법 살기가 등등하다.
"목적지를 아나?"
"알면 내가 왜 이를 갈아?"
투덜거리던 그녀는 가볍게 혀를 차면서 한효월을 건너 보았다.
"듣건대, 당신의 능력은 지난날 독고 맹주가 강호에 나타났을 때보다 더 하다고 하더니…… 오늘 보니 뭐 그렇지도 않은 거 같네?"
한효월은 그녀의 말에 희미하게 웃었다.
"나와 같은 후생소배(後生少輩)를 어찌 그분과 같은 반열에 놓고 논할 수가 있겠나?"
말과 함께 한효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려구?"
심소옥의 눈이 커졌다.
"돌아가야지."
"더 있다 가는 게 좋을걸? 근래에 들어 낙양성에는 풍운이 운집(雲集)하여 고수기인(高手奇人)이 하루가 멀다 하고 출몰하는데 그 몸으로 그들과 만나거나 재수가 없어서 제천교 딱가리들하고 만나봐? 뼈도 못 추릴걸? 더더구나 그 장보(藏寶)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상황은 더 나쁘지."
"장보?"
한효월이 다시 물었다.
"뭐야? 아니, 낙양성이 떠들썩…… 아니, 전 무림이 시끄러워지고 있는 판에 맹주의 사제라는 사람이 그것도 모르고 있단 말이야?"
어이가 없다는 빛의 심소옥.
한효월은 그런 그녀를 향해 미소했다.
"나는 산속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는 게 별로 없으니, 강호의 선배인 네가 잘 지도해 주면 좋겠다."
"지도하는 거야 어려울 거 없지만, 당신은 왜 말끝마다 숙녀에게 반말이야? 내가 거지라서 얕잡아본다는 거야 뭐야?"
심소옥이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척하니, 허리에다 손까지 올려놓는다. 여차하면 한판 붙어보겠다는 태도.
난데없는 그녀의 말에 한효월은 얼떨떨해서 그녀를 보다가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나는 스물이 넘었다. 네 나이는 아무리 많아봐도 열여섯, 일곱을 넘기 힘들 것 같은데……."
"그게 어때서? 남녀 사이는 궁합만 맞으면 열 살 스무 살도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거야. 열 살 차이도 안 나는데 함부로 말을……."
신나게 주워섬기던 그녀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한효월이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묘했다.
그 웃음은…….
"그러는 너는 왜 반말을 하는 거지?"
그리고 뒤를 잇는 한효월의 물음에 심소옥은 문득 말문이 막혀 버렸다.
"열 살 차이도 안 나서 더 나이 든 사람에게 반말인가?"
잠시 멈칫했던 심소옥은 문득 머리가 가려워진 듯 심하게 머리를 긁적거리며 투덜거렸다.
"까짓거 그만두지, 그만두면 될 거 아냐!"
"이렇게 하지."
한효월이 말했다.
"……?"
심소옥이 멀뚱히 그를 보았다.
"난 너를 동생으로 생각할 테니 너는 나를 오빠[哥哥]로 부르는 거다. 하고 싶다면 반말을 해도 좋다. 좋지?"
"싫은데? 내가 왜 당신 동생이 되겠어?"
메롱, 심소옥이 난데없이 고개를 들이밀면서 혀를 쑥 내밀었다.
한효월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처음 볼 때는 교활하고도 영리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순수한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린 것 같기도 했다. 어떤 것이 본 모습인지 알기 힘들었다. 려산(廬山)의 진면목은 알기 힘들다더니…….
그런데 그때였다.
"좋아, 오빠라구 해주지! 무림맹주의 사제를 오빠라구 불러서 손해날 거야 없겠지 뭐."
말과 함께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호리병을 거꾸로 입에다 처박았다. 벌컥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고 목젖이 움직이는 게 아주 선명하다. 그러고 보니 의외로 목이 길고 깨끗하다.
"목을 자주 닦나 보구나?"
"캑!"
한효월의 말에 심소옥은 마시던 술을 반쯤 토해내고 말았다. 캑캑거리며 쩔쩔매던 그녀는 한효월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더니 불쑥 손에 든 호리병을 내밀었다.
"한잔 받아. 우리가 이렇게 알게 된 기념으로!"
한효월이 망설이지 않고 그녀가 건네준 호리병을 받아 마시는 걸 눈빛을 반짝이며 보고 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장보에 관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어. 굳이 따져 보자면…… 그래, 독고 맹주가 죽기 얼마 전부터 조금씩 말이 있다가 그의 사후부터 구체화되었지 아마?"
"그 장보가 어떤 것에 관한 것이지?"
"그건……."
그녀가 채 답을 하기 전이었다.
"크핫하하하…… 네놈이 또 무슨 재간이 있는지 어디 다 부려보아라!"
어둠을 뚫고 분노에 찬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뜻밖의 사태에 한효월과 심소옥은 입을 다물었다.
펑펑!
격렬한 폭음이 뒤를 이어 은은히 들렸다.
"노괴(老怪)! 이까짓 시체 나부랭이로 나를 겁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랬다면 꿈을 깨는 게 좋을 게다. 어림도 없을 테니까!"
다시 예의 웃음소리가 어둠을 떨어울렸다. 고막을 울리는 힘은 평범한 고수가 아님을 알고도 남음이 있게 한다.
어둠이 짙은 바깥.
비가 온 다음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비가 아직 완전히 그친 것은 아니었다. 땀방울처럼 나뭇잎에서 빗물이 떨어지고 있는 상태.
짙은 어둠은 빗방울인지 안개인지 모를 뿌연 기운에 휘감겨 희미하게 고개를 내민 달빛에 괴기(怪奇)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거기 펼쳐진 광경은 그보다 더욱 공포스럽게 섬뜩했다.
숲에 자리한 그 낡은 사당의 바깥은 이제 보니 공동묘지였다. 여우가 파헤친 것인지 귀신이 기어나온 것인지 알 수 없도록 훼손된 무덤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성한 무덤이라 할지라도 규모가 큰 것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숲 전체가 무덤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공포스러운 것은 그 무덤 사이를 훌쩍훌쩍 뛰어다니고 있는 검은 그림자였다.
하나, 둘…… 엇갈리고 있는 검은 그림자의 숫자는 금세 헤아리기 곤란했지만 열은 충분히 넘었다.
그들의 전신에 걸친 것은 너덜너덜한 검은빛 장포(長袍). 어둠 탓에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인광(燐光)처럼 푸른빛으로 번뜩이는 두 눈빛은 공포스럽기에 족했다. 더더구나 훌쩍훌쩍 뛰는 모습이란.
"강시로군!"
고개를 빼밀었던 심소옥이 나직이 탄성을 질렀다.
그들이 도관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시체들이 그렇게 훌쩍훌쩍 뛰면서 한 사람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도관의 시체들과는 전혀 다르게 신속하다는 것. 움직임마다 날카로운 바람이 일고 바닥에 고였던 물이 튀며 무덤에 무성한 풀들이 물방울을 튀기며 으스러져 갔다.
"물러가랏! 감히……."
그 강시들에 둘러싸여 있던 대한이 고리눈을 부릅뜨면서 호통쳤다.
대단한 덩치였다.
그 신체를 의미하듯 힘도 맹렬하여 그가 한주먹을 쳐내자 거기에 격중된 시체 하나가 괴이한 소리와 함께 구겨지듯 날아가 무덤에 처박혔다. 무덤이 반쯤 무너질 정도였다.
"켈켈켈…… 산서 관가(關家)의 이산권력(移山拳力)이 무림독보라고 하더니 과연 대단하군! 하지만 그것으로 이 자리를 벗어나진 못할 게다."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괴이한 방울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그 귀신인가 보네?"
심소옥이 한효월을 돌아다보았다.
그 얼굴에는 이게 웬 횡재냐는 빛이 만면하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더니 여기서 다시 만나는군 그래!"
금방이라도 팔을 걷어붙이고 쫓아 나갈 기세다. 도무지 겁이라는 게 없다.
쾅! 쾅…….
폭음이 일며 흑포강시들이 이리저리 날아갔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다시 날아들었고 거한(巨漢)은 타격을 받았는지 나직한 신음과 함께 두어 걸음을 물러났다.
"이것들이 정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켈켈켈…… 그렇지 않아도 간방(艮方)을 담당할 물건이 모자랐는데, 굳이 돌아다닐 필요 없이 너를 죽여 그 자리를 담당시키면 되겠구나?"
괴이한 웃음소리와 함께 그 방울 소리가 급촉하게 들려왔다.
그러자 흑포강시들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귀역무간진(鬼域無間陣)?"
중얼거린 거한이 크게 숨을 들이키더니 지금까지와는 달리 신중하게 일 권 일 권을 쳐내기 시작했다. 신중하다고는 하지만 그 일 권 일 권은 마치 철퇴를 내려치는 것 같았고, 그 위력만큼 속도도 비할 바 없이 빨랐다.
펑! 펑……!
그 일격에 격중된 흑포강시들이 허수아비처럼 날아가 거꾸러졌다.
"붕권(崩拳)?"
놀란 외침이 어둠 속에서 터져 나왔다.
대한의 체구는 8척에 가깝고 일견해도 위맹스럽게 짝이 없는 모습이다. 저래가지고서는 힘을 쓰지 못할래야 못할 수가 없는 일. 그런 그가 전력을 깃든 일 권 일 권을 격출할 때마다 가공할 권력이 쏟아져 나가며 그 일권에 격중된 흑포강시는 전신이 으스러져 널브러졌다. 거의 몸 반신이 함몰되어 버리는 것이다.
"머, 멈춰라!"
다급한 외침과 동시에 흑포강시들이 일제히 뒤로 후퇴했다. 모두 20여 구에 이르던 그 강시들은 어느새 열두 구로 줄어들어 있었다.
강시들이 물러나자 거한은 고리눈으로 2, 3장가량 떨어진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좋아, 이제 보니 거기 숨어 있었군?"
그곳에는 검은 어둠을 너울처럼 뒤집어쓴 채로 무덤에 앉아 있는 흑포노인 한 사람이 있었다.
키가 훌쩍 크다. 앉아 있음에도 5척은 됨직한 키니 그 키가 얼마나 되는지 알 만하다. 그런데 정말 참혹할 정도로 말라 허수아비에다 옷을 걸쳐 놓은 것만 같다.
그 가운데 자리한 눈빛은 어둠 속에서 음침하게 빛나고 있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숨어 있다? 흥……."
냉소를 친 흑포괴인은 그의 주위로 돌아와 둘러서는 강시들에게서 눈을 돌려 거한을 보았다.
"너와 노부는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귀찮게 따라다니는 것이냐?"
"아무런 원한? 이 개 같은 늙은이! 감히 내 친구의 시신을 훔쳐 가고도 모르는 일이라? 네놈 때문에 나는 두 달 간이나 네 뒤를 개처럼 따라다녀야 했다!"
"친구의 시신이라니?"
"구강룡(九江龍) 곽시우(郭施雨)가 내 친구다! 네놈이 시신을 훔쳐 가는 바람에 그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다. 타지에서 비명횡사한 것도 서러운 판에 그 집에서 시체까지 훔쳐 가고도 모른다고 할 작정이냐?"
거한이 노해 부르짖었다.
호통 소리에 나뭇잎들이 놀라 떨면서 머금고 있던 빗방울들을 떨어냈다.
"이런 제미랄! 어차피 썩을 거 장례까지 치른 시체 빌려온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산서에서 여기까지 쫓아오는겨?"
흑포괴인은 투덜거리더니 음산하게 소리쳤다.
"산서 관가의 체면을 봐서 놔줄 테니 그만 사라져라.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네놈도 산송장으로 만들어 버릴 테다."
"해봐라! 이 개 같은 늙은 놈아! 그런 협박이 두려웠다면 나 관패(關覇)가 여기까지 쫓아오지도 않았다!"
말과 함께 그는 다시 예의 일권을 격출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흑포괴인이 앉아 있던 봉분이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다.
하지만 흑포괴인은 이미 허공 중에 떠올라 있었다.
그 순간, 음산한 살기가 관패의 배후를 엄습해 왔다.
"어떤 놈이냐?"
관패가 노해 고함치면서 빙글 신형을 돌렸다.
그의 주먹에서는 막강한 권세가 다시 폭출되었다. 그러나 신형을 틀었던 그는 코끝에 향기가 스침을 경각했다. 동시에 정신이 아찔해 오는 게 아닌가!
"암습?"
그가 주춤 뒤로 물러나는 순간, 하늘과 땅이 온통 뒤흔들린다.
도무지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버텨보려고 안간힘을 다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연신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서는 게 고작이었다.
"크크크크…… 맛이 어떠냐? 그게 귀역표향(鬼域飄香)이란 것이다. 향기가 마음에 들면 얼마든지 마셔도 좋다."
사악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관패는 그 웃음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려 했지만 초점이 잡히지 않는다.
그의 뒤에 있는 것은 도관에 나타났던 5척 단구의 노인이었다. 그가 뒤에서 암습을 한 것이다.
'저 귀신까지 나타났는데 보고만 있을 거야?'
그 광경에 심소옥이 한효월을 보며 전음으로 소리쳤다.
관패의 무공은 발군이었다.
그러나 그는 암습을 당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했다. 강건한 그의 체질이 아니었다면 이미 쓰러졌을 터이다.
'조금 더 기다려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이 마당에 무슨…….'
그 광경을 보면서 한효월이 하는 말에 못마땅한 표정이었던 심소옥은 말을 멈추었다.
"네놈이 그 자리에서 한 걸음만 더 다가가면 대가리통을 으깨놓고 말겠다."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던 것이다.
5척 단구의 노인, 심소옥이 귀도사라고 부르던 그 노인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 음성이 바로 그의 뒤에서 들려왔던 까닭이다. 대경실색한 그는 황급히 뒤로 돌아섰다.
그의 눈앞에는 고대(高大)한 체구를 가진 노인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5척 단구인 그의 입장에서 보면 가히 고목나무에 매미가 붙었다 할 정도로 그의 체구는 압도적이었다.
"탁탑천왕(托塔天王)……."
부지중에 귀도사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감히 네놈이 내 아들에게 암수를 써?"
금포노인이 왕방울 같은 눈을 부릅떴다.
"그, 그건……."
주춤 귀도사가 뒤로 물러났다.
"노괴! 너도 당해봐라!"
그런데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껄껄 방성대소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순간에 강렬한 힘이 그를 후려쳤다.
비명과 함께 귀도사는 훌쩍 날아 3, 4장 밖의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엉금엉금 기어 일어나는 그의 모습은 낭패하기 이를 데 없었다. 비가 온 다음이라 흙탕물에 나뒹군 꼴이었기 때문이다.
"제법 뼈다귀가 단단하군 그래?"
한주먹으로 그를 날려 보낸 관패가 껄껄 웃었다.
"뭐야? 당한 게 아니었더냐?"
금포노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핫하하하…… 천하제일 탁탑천왕의 아들이 이까짓 귀신들의 노름에 놀아날 리가 있습니까? 한번 놀려주려고 한 일이었죠!"
거한, 관패의 말에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대나무 꼬챙이처럼 마른 흑포노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늙은이가 직접 나타날 줄이야…….'
나타난 사람은 탁탑천왕이라고 불리는 산서 관가의 가주 관웅(關雄)이었다. 천생신력을 바탕으로 한 그의 이산권(移山拳)은 산을 옮길 정도의 위력으로 세상에 이름 높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10년 간이나 강호상에 출입을 하지 않았었는데 그가 여기에 나타날 것은 누구도 짐작치 못한 일이었다.
"네가 유명귀수냐?"
탁탑천왕 관웅이 흑포노인을 보면서 물었다.
"……."
흑포노인은 음산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좋아, 좋아…… 답하기 싫다면 답하게 만들어주지!"
탁탑천왕 관웅은 코웃음을 치더니 성큼성큼 그를 향해 다가갔다. 도무지 거칠 것이 없는 태도.
"돌려주지."
문득 음침한 음성이 흑포노인에게서 흘러나왔다.
"……?"
탁탑천왕 관웅이 멈칫 그를 보았다.
"당신이 여기까지 직접 온 체면을 봐서 빌려온 시체를 돌려주겠다. 그 시체가 당신과 연관이 있음을 알았다면 처음부터 건드리지 않았을 텐데……."
"그런가? 좋다. 시신은 어디 있나?"
"그놈의 시체를 돌려줘라!"
흑포노인의 외침에 낭패한 몰골의 귀도사가 잡아먹을 듯 탁탑천왕 관웅을 노려보다가 손을 저었다.
그러자 예의 방울 소리가 일며 어둠 속에서 시신 십여 구가 나타났다.
"좋아, 성의가 가상하니 이 정도로 해두지. 하지만 한 가지 대답을 해줘야겠다."
탁탑천왕 관웅이 입을 열었다.
휙휙-
세찬 바람이 일었다.
하늘을 가득 메웠던 검은 구름들이 빠르게 어둔 하늘을 달려갔다. 층층으로 겹겹한 구름들이 하늘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음산함을 더한다.
우우우…….
어디선가 늑대가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음악(陰惡)한 어둠의 그늘 아래에서 흑포노인과 탁탑천왕 관웅은 노려보고 있었다.
"왜 말을 하지 않는 게냐? 왜 시체를 훔치는 건지…… 누가 시켜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탁탑천왕 관웅이 고리눈을 부릅뜬 채로 흑포노인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음산한, 참으로 음산한 웃음이 흑포노인의 얼굴, 그 입가의 나뭇등걸 같은 주름을 타고 흘렀다.
"요구가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전혀."
"그런가? 큭큭큭…… 세상에는 분수를 모르는 미친놈들이 많다더니, 권주(勸酒)는 싫다 하고 벌주(罰酒)를 찾는 그런 미친놈이 여기도 과연 있군 그래……."
흑포노인이 싸늘히 웃었다.
"으왓핫하하하…… 네놈이 감히!"
탁탑천왕 관웅은 방성대소하면서 흑포노인을 향해서 한주먹을 질러냈다.
쾅!
폭음과 함께 흑포노인이 서 있던 자리에 있던 무덤이 평지로 화해 사라졌다. 흙 무더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가공할 위세의 세찬 경풍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탁탑천왕 관웅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디로 도망가느냐?"
"흥!"
대나무 꼬챙이와 같이 마른 흑포노인의 키는 서 있자 무려 8척에 이르렀다. 키만 따지면 그도 탁탑천왕에 못지 않을 정도였지만 너무 말라서 보기에도 위태스러울 정도.
그러나 그는 코웃음을 치면서 양손을 휘둘러 탁탑천왕의 이산권을 막아갔다. 그의 장세는 음유(陰柔)하여 탁탑천왕의 양강(陽剛)한 이산권과는 전혀 달랐다.
팍!
그가 탁탑천왕의 권세와 맞서자 폭음 대신 괴이한 음향이 터졌고 휘청거리는 가운데 흑포노인은 연신 뒤로 밀려났다.
"난 또 뭔가 있는 줄 알았더니 이건 순전히 대나무 꼬챙이에 불과하구나?"
탁탑천왕이 코웃음 치면서 쏜살같이 앞으로 덮쳐 갔다. 그 거대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법은 바람과 같았다.
그때, 옆에서 음산한 경풍이 휘몰아쳐 왔다.
"흥! 그럴 줄 알았다."
탁탑천왕 관웅은 양손을 나누어 좌우로 뻗어냈다.
펑펑!
폭음이 터지며 옆에서 그를 공격해 오던 검은 그림자들이 한 방에 날아가 버렸다. 가히 만 사람이 있어도 막을 수 없다는 만부막적(萬夫莫敵)의 가공할 위세.
한 방에 날아든 검은 그림자들을 날려 보낸 그는 여전한 기세로 흑포노인을 쫓았다.
그러나 그 순간에 그는 눈앞에 있는 무덤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검은 그림자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이 일제히 그를 공격하고 있음을.
잇달은 폭음과 함께 그 검은 그림자들도 모조리 탁탑천왕 관웅의 권력에 나뭇잎처럼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으하하하…… 그까짓 시체 나부랭이로 감히 우리 아버님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소패왕(少覇王)이라 불리는 관패가 팔짱을 낀 채로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순간, 탁탑천왕 관웅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그의 일격에 나가떨어졌던 검은 그림자들은 전부 시체였었다. 그런데 그 시체들이 꿈틀거리면서 다시 일어나고 있음을 발견한 까닭이다. 하나가 아니었다. 시체는 자꾸 불어나고 있었다.
"염부(閻浮)의 혼령(魂靈)들아, 모두 일어서라……. 여기 너희들의 잠을 방해하는 자가 있으니 모두 일어나 징벌하라. 죽은 다음에도 너희를 쉬지 못하게 하는 침입자에게 복수하라…… 복수하라. 모두 일어나 복수하라."
음산한 중얼거림과 괴기한 방울 소리가 음습한 바람을 타고 흘렀다.
"이게 무슨 귀신놀음이냐? 이까짓 시체를 가지고 감히 나를 상대하겠다는 것이냐?"
탁탑천왕 관웅은 코웃음을 치곤 앞으로 가로막는 시체들을 한 방에 날려 버렸다.
그의 탁탑천왕이란 외호는 그냥 붙여진 것이 아니었다.
일 권 일 권이 격출될 때마다 흐느적거리며 그의 앞을 가로막던 시체들은 반항도 하지 못하고 반쯤 으스러진 채로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그 시체들을 처리하면서 그가 앞으로 전진하고 있음에도 흑포노인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시체들이 점점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달빛이 희미하게 구름 속으로 숨어들었다.
어둠 속에서 소패왕 관패의 눈에도 경악이 떠올랐다.
"맙소사……."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덤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풀풀…… 무덤을 덮고 있는 흙들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백골만 남은 손이 올라왔다. 저쪽 무덤에서는 그 무덤을 헤치고서 썩다 남은 살이 붙어 있는 시신이 기어나오고 있었다.
그 엽기적(獵奇的)인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던 관패는 문득 무엇인가가 자신의 발목을 잡는 것을 깨달았다.
내려다보니 윽, 이게 뭔가?
백골.
그나마 머리 반쪽이 으스러진 백골이 바닥에서 기며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좀 전에 아버지 탁탑천왕의 일격에 나가떨어진 시신의 잔해였다.
간담이 커 평생 무서움이 뭔지 모르고 살았던 그였다. 그러나 그런 그도 모골이 송연해져 왔다.
그는 부지중에 고함치면서 일권을 질러냈다.
쾅!
폭음이 일고 흙바닥이 뒤집어지는 가운데 그 백골이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으스러져 버렸다.
펑! 펑…….
하지만 그 순간에 관패는 강력한 힘이 자신의 등을 후려치는 것을 깨달았다.
눈앞에 별똥이 튄다.
"이놈이!"
그는 고함치면서 신형을 돌리며 뒤를 향해 일권을 질러냈다.
폭음이 일면서 그의 뒤에서 그를 공격했던 시신이 주춤 밀려났다. 그러나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그 시신은 주춤 밀려났을 뿐, 이내 바람처럼 재차 달려들었다. 뿐만 아니라 옆에서 무수한 시체들이 달려들고 있지 않은가.
그 시신에 정신이 팔렸던 그는 다시 등판에 충격을 받았다.
정신이 번쩍 난 그는 고함을 치면서 잇달아 삼 권을 쳐내 뒤에서 그를 공격하던 시체들을 날려 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생각일 뿐이었다.
그의 등 뒤에서 그를 공격하던 시신들 십여 구 중 그의 일격에 나가떨어져 버린 것은 칠팔 구에 불과했다. 나머지 서너 구는 오히려 그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넘기고는 더욱 빠른 속도로 그를 공격해 왔다.
펑, 펑!
폭음이 다시 일고 관패는 부지간에 신음을 흘리면서 뒤로 물러나야 했다.
"패아야!"
그 광경을 보고 탁탑천왕 관웅이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그 순간, 그도 시체의 일격을 얻어맞아야 했다. 우습게 볼 타격이 아니었다.
쳐 죽였다고 생각했던 시체들이 계속해서 일어나 그를 공격하고 있었다. 더더구나 그중 몇은 그의 공격에도 밀리지 않고 오히려 그를 공격하는 것도 있었다.
"세상에……."
그 광경을 보고 그처럼 당차던 심소옥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중얼거렸다.
정말 세상에였다.
음산한 바람이 이는 가운데 구름이 달을 가렸다.
어둠이 자욱한 공동묘지.
그 묘지 곳곳에서 시체들이 비틀거리며 일어난다.
공포스러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괴이한 주문(呪文) 소리에 겸해 고막을 치듯 울리는 구리 방울 소리는 저승길을 재촉하는 듯 그렇게 끊임없이 일대를 배회한다.
탁탑천왕 부자는 그 시체에 둘러싸여 있었다.
가공할 위세는 여전했지만 죽여도 죽지 않는 시체와의 싸움은 누구라도 쉬울 리가 없었다. 더구나 그 시체 중 몇은 가공할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백골호혼대진(白骨呼魂大陣)이로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한효월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저게 뭔지 알아?"
심소옥은 한효월의 중얼거림에 그를 돌아보았다.
"죽은 자의 혼을 불러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거지만 진언(眞言)이 사라져 현세에서는 그것을 제대로 구사하는 자가 없다. 저것도 겉보기만 백골호혼대진으로 실제로 저 진세를 이루는 축(軸)은 그들이 평소 연제한 시체들이지. 무덤에서 기어나온 시체들은 그저 깃발을 흔들면서 상대의 눈을 흐리게 하는 역할일 뿐이야."
과연 달라 보인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시체들의 움직임이 달랐다.
탁탑천왕 부자는 하도 정신없이 시체들이 달려드니 아직은 그것을 모르는 듯했다.
"흠, 별걸 다 아네? 저걸 깨려면 어케 하면 되는지도 알아?"
그녀는 말하다가 한효월의 대답없음을 경각한다.
의아하여 고개를 돌려보니 한효월이 미미하게 웃으면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왜 봐? 숙녀 얼굴을 왜 훔쳐보냐구?"
"넌 숙녀가 아니다. 내 동생이지. 그리고 오라버니에게 좀 공손해지면 안 되겠니?"
"그건 첨부터 약속이 안 그……."
그녀가 핏대를 세우면서 입을 열자 한효월이 입을 열어 그 말을 막았다.
"탁탑천왕의 사람됨은 어떠냐?"
"정사 중간이라 할 수 있지. 누가 뭐라건 상관하지 않고 자기 기분대로 사는 사람이니까. 뭐…… 쉽게 말해서 노괴물이지. 이놈이나 저놈이나 마음에 안 들긴 마찬가지지 뭐."
심소옥이 툴툴거렸다.
그때, 장중에 변화가 일어났다.
까닭 모르게 시신들의 움직임이 둔해지는가 싶더니 호통 소리가 잇달아 터지면서 수십 수백 구에 이르던 시신들이 폭풍에 휘감긴 가랑잎과 같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천둥 같은 소리가 그곳에서 울려 퍼졌다.
"붕권…… 힘으로 깨는군. 대단하다."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정말 대단했다.
잠시 주춤거렸던 탁탑천왕 관웅이 진기의 소모를 무릅쓰고서 가공할 위력을 지닌 붕권을 쏟아내어 자신을 향해 덤비던 시신들을 일거에 쓸어버렸던 것이다.
그 위세는 요동권왕에 못지 않아 보였다.
그 앞에는 놀란 표정의 흑포노인이 서 있었다.
밤바람이 세차게 그의 흑포를 뒤흔들었다.
"과연 탁탑천왕의 명성은 명불허전이군. 감탄했다…… 하지만 나를 이길 순 없지."
흑포노인이 음산히 중얼거렸다.
"유명귀수가 귀역칠수의 하나라는 이야기는 들었다. 핫하…… 일곱 귀신이 한꺼번에 덤벼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텐데 너 혼자 말이냐?"
탁탑천왕이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혼자라고 누가 그러더냐?"
음산한 중얼거림이 어디선가 들려왔다.
언제 나타난 것일까?
흐느적거리는 수백의 시체 가운데 한 사람이 말라비틀어진, 죽은 고목의 그늘 아래 우뚝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푸른 눈빛만이 인광(燐光)처럼 빛을 뿜고 있어 섬뜩했다.
"이건 또 어떤 귀신인가?"
탁탑천왕이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의 음성은 조금 굳어 있었다.
나타난 자는 거친 마포를 걸쳤다. 산발이 된 긴 머리카락은 마(麻)로 꼰 끈을 질끈 동였는데 그 머리카락에는 각종 부적이 매달려 바람에 흔들거렸고, 머리카락 사이로 번뜩이는 눈빛은 인광을 흘리고 있어서 공포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탁탑천왕의 이름이 산서 구석에서나 통하지, 여기에서까지 통할 것 같은가?"
마포노인이 음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찡그린 채 마포의 노인을 쳐다보고 있던 탁탑천왕이 문득 주위를 둘러보면서 중얼거렸다.
"귀역칠수 중에 우두머리가 있어 귀수라고 한다더니…… 그게 네놈인 게로구나."
"아는 게 적지 않군."
마포노인의 말에 탁탑천왕은 미간을 찡그렸다.
"흥! 귀역의 일곱 마귀가 설사 여기 한자리에 모여 있다 할지라도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어디 있는 대로 다 불러내 봐라. 과연 어떤 귀신들이 더 기어나올는지 봐주마."
그의 말에 귀수라 불린 마포노인은 음산히 웃었다.
"으흐흐…… 황천길이 눈앞에 있는데도 큰소리만 치는군."
휘잉! 휘이잉…….
음악(陰惡)한 바람이 그의 웃음에 따라 일었다.
탁탑천왕은 미간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일권에 나가떨어졌던 시체들이 다시 꿈틀거리면서 일어나 그를 향해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무덤에서 기어나와서 아예 박살이 난 시체를 제외하고는 수십 구, 얼핏 봐도 거의 백 구는 넘어 보이는 시체들이 건들거리면서 물결처럼 천천히 밀려오는 광경은 결코 간단히 봐 넘길 일은 아니었다.
"이제 보니 네놈들의 소굴이 이 북망산에 있는 모양이로구나?"
소패왕 관패가 문득 소리쳤다.
"큭큭…… 그걸 알았다면 살아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알겠군? 쳐라……."
음산한 웃음소리가 묘한 여운을 끌면서 일었다.
그때였다.
"귀수! 대가리를 내놓아라!"
탁탑천왕이 천둥처럼 고함치면서 그 거대한 신형을 날렸다. 움직이지 않을 때는 몰라도 일단 움직이자 그 신형은 태풍이 몰아치듯, 거대한 붕새가 날아가듯이 귀수를 향해 4장여의 거리를 일순간에 가로질렀다.
거대한 경기가 귀수를 향해 날았고, 그 경기에 휩쓸린 시체들이 가랑잎처럼 튕겨져 나갔다.
그가 이처럼 빠르게 달려들 것은 상상치도 못했던 귀수는 뒤로 물러나면서 양손을 교차시키면서 괴이무쌍한 일장을 쳐냈다.
쾅!
폭음이 일며 흙먼지가 뒤집어지면서 일었다.
세찬 경기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탁탑천왕의 놀란 음성이 들려왔다.
"풍도귀공? 설마 네가 풍도귀왕과 관계가 있단 말이냐?"
"큭큭큭…… 그것은 염라대왕에게 가서 물어보도록 해라…… 곧 알 수 있게 될 것이니……."
귀수의 음성이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심소옥이 놀라 중얼거렸다.
"맙소사! 그럼 저자들 귀역칠수가 풍도귀왕의 수하였단 거야? 맞아, 맞아…… 그가 아니라면 누가 저런 자들을 수하로 거느리고 시체를 모아가겠어?"
"풍도귀왕이라면?"
한효월의 안색도 달라졌다.
풍도귀왕이라면 그도 아는 이름이다.
천하십왕 중 하나인 이름이기에. 다시 천하십왕 중 한 명이 나타난 것이다. 실제로 본인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 의미는 간단치 않았다.
더더구나 시신을 도적질하는 것이 그라면…….
그때 천둥 같은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흥! 풍도귀왕 본인이 직접 왔다 할지라도 본 천왕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인데, 네깟 졸개들이 감히 본 천왕을 넘보겠단거냐? 이따위 시체 나부랭이로? 모조리 꺼지지 못할까!"
악전(惡戰)이었다.
공포의 대결, 시체와의 그 결전은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일이었다. 탁탑천왕이란 이름에 걸맞게 관웅과 그 아들 관패는 가공할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힘이란 한계가 있는 법.
"도와주는 게 좋겠다."
한효월이 말했다.
"도와줘? 어떻게? 설마 그 몸으로 저 귀신들 하고 싸우자고…… 응?"
묻던 심소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를 가리켰다.
"먼 소리야? 설마 나더러 나가보란 말이야?"
그녀는 한효월의 얼굴에 미미한 웃음이 떠오른 걸 보자 이내 머리가 떨어져 나가라고 흔들어댔다.
"싫어! 왜 내가……."
"백골호혼대진의 위력은 막강하다. 하지만 지금의 진은 겉보기만 그럴듯하지, 실제로는 진세의 축을 이루고 있는 서방(西方)을 치면 진세는 단숨에 무너져 버리고 말게 된다. 그럼 끝이지."
"서방이라면 윽? 저, 저…… 귀수란 늙은이가 있는 곳이네? 시, 싫어!"
심소옥이 다시금 머리를 흔들었다.
"가, 저들은 이미 진세에 빠졌다. 내가 도와줄게."
한효월이 심소옥의 등을 밀었다.
"왜 밀어? 엇다 숙녀의 몸에다 더러운 손을……."
말을 하던 그녀는 말이 좀 이상함을 느끼게 되었다.
한효월의 손은 말 그대로 백옥처럼 깨끗한데 자신의 옷은 누더기에다(그래도 멋을 내느라 색깔있는 천으로 깁기는 했다) 이것저것 묻어서 말이 맞지 않음을 이내 경각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쓸데없는 소리 마. 난 네 오라버니란 걸 잊지 마라. 가봐."
"망할! 내가 어쩌다가…… 미쳤지!"
심소옥은 엉거주춤 앞으로 밀려나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어댔다.
그런 그녀를 향해 한효월은 희미하게 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