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二首 만부막적(萬夫莫敵) (14/113)

第二首  만부막적(萬夫莫敵)

-천하를 위진하다.

일 검에 산하(山河)가 떨고, 이 검에 천하가 떨다.

 "크으윽!"

 초미노인이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의 눈은 경악과 불신으로 튀어나올 듯했다.

 입에서, 코에서 심지어는 눈과 귀에서까지 피가 흘러나온다.

 이른바 칠공(七孔).

 쓰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그는 결국 앞으로 거꾸러지고 말았다.

 "구 노제!"

 천외유자 곽도광이 초미노인이 쓰러짐을 보고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성미는 급하지만 더없이 사람이 좋았던 그와 이 맹주부 내에서 형제와 같이 지냈던 그인 까닭이다.

 "흐흐흐…… 다른 곳까지 돌아볼 여가가 있던가?"

 음산한 웃음이 천외유자의 귀를 때렸다.

 검광이 날아들었다.

 급히 신형을 틀었다.

 그러나 섬뜩한 느낌이 왼쪽을 엄습했다.

 피가 튀었다. 그것이 자신의 왼팔이 그대로 잘려 나가는 것임을 경각할 틈도 없이 천외유자 곽도광은 그 순간에 오른손을 휘둘러 적을 쳤다.

 파팡!

 타격을 받았는지 그를 공격해 오던 홍포인은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이며 천외유자 곽도광은 자신을 향해서 다시 날아드는 그 홍포괴인의 기형검을 볼 수 있었다.

 왼손을 들어 그 기형검을 막으려는 순간에 곽도광은 자신의 왼손이 자신의 팔에 붙어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절망이 그의 눈에서 피어났다.

 "멈춰!"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터진 것은 그 순간이다.

 동시에 서릿발 같은 검광 한줄기가 무서운 빛으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기형검은 이미 곽도광의 가슴을 꿰뚫고 있었다. 천애유자 곽도광은 이를 악물면서 자신의 가슴을 꿰뚫은 검을 손으로 움켜잡았다.

 "이런……!"

 홍포괴인의 눈에 경악이 튀어 올랐다.

 "감히……!"

 나타난 것은 독고경이었다.

 그간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녀가 상황이 위급함을 보고는 검을 들고 달려나온 것이다.

 어린아이일 때 수염을 잡아당기면서 놀던 할아버지와 같던 천외유자 곽도광이다. 그의 참혹한 모습에 독고경은 치를 떨었다.

 급박한 순간에 홍포괴인은 검을 놓고 물러났다.

 그는 쌍검을 썼으므로 물러나면서 왼손에 든 기형검으로 독고경을 후려왔다. 그 검로(劒路)는 괴이하여 비스듬히 독고경의 가슴을 노린다. 무림 중에서 여자와의 결투에서는 금기시되는 것이 있다. 가슴과 치부를 노리는 것이다.

 하지만 홍포괴인은 전혀 그런 것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후안무치한……!"

 그녀가 노해서 검을 쳐 나가는 순간, 홍포괴인은 다시 옆으로 비켜 나가면서 그녀의 검세를 피해냈다. 그리곤 검을 휘둘러 자신의 검을 잡고 있는 천외유자 곽도광의 팔을 끊어버렸다.

 동시에 그는 그 검의 손잡이를 다시 잡아 그 검으로 독고경을 쳐왔다.

 붉은 피가 뿌려지면서 곽도광의 손이 매달린 그 기형검이 독고경에게로 날아들자 독고경은 기겁을 하면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으흐흐흐…… 젖비린내 나는 계집년 같으니, 올 때는 몰라도 갈 때는 마음대로 안 되지?"

 음침한 웃음소리.

 기형검이 폭포수처럼 피를 떨어 뿌리면서 독고경에게로 날아들었다.

 쾌속하기 이를 데 없는 검세(劒勢)!

 선기를 놓친 독고경은 손쓸 사이도 없이 잇달아 뒤로 물러나야 했다.

 비로소 그녀는 맹주부가 피에 잠긴 까닭을 알았다.

 상대는 정말 막강했던 것이다.

 찰나간에 그녀의 어깨에서 피가 스치듯 피어났다.

 "큭큭큭…… 젖퉁이를 잘라주랴? 아니면 가랭이를 찢어주랴?"

 홍포괴인이 쌍검을 풍차와 같이 휘둘러 그녀를 몰아세우며 야유했다. 검이 가슴을 스치며 지나 옷자락이 벌어져 우윳빛 속살이 드러났다.

 "이 더러운……."

 독고경의 눈에서 살기가 치밀었다.

 격렬한 금속성이 그들의 뒤쪽에서 인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으악!"

 그리고 한소리, 외마디의 비명이 터졌다.

 우우우∼!

 천공을 떨어울리는 장소성.

 무서운 기세가 자신의 뒤쪽에서 엄습해 오고 있음을 홍포괴인은 직감했다.

 '누가 이런……?'

 그는 경악하여 독고경에게서 후퇴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흰 그림자 하나가 폭풍과도 같이 장내에 들이닥치고 있었다. 그의 움직임은 놀랍도록 쾌속하여 홍포괴인이 신형을 돌렸을 때는 이미 그의 앞에 도달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홍포괴인은 흰 그림자가 자신을 향해서 일장을 쳐오고 있음을 보았다.

 놀란 그는 물러날 여가도 없이 수중의 기형검으로 귀호신읍(鬼呼神泣), 신귀개경(神鬼皆驚) 등의 절초를 펼쳐 내어 유성이 떨어지는 듯 신쾌한 검세로써 그 흰 그림자의 일장을 저지하며 오히려 그를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아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상대의 일장은 기오(奇奧)한 데다 막강하기 짝이 없어서 그의 기형검이 제대로 검세의 변화를 일으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검이 경력을 이기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이 붕붕 소리를 내면서 전신을 떨었다.

 물러날 수도 없었다.

 땅!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홍포괴인의 기형검이 마침내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두 동강이 나버렸다.

 "으악!"

 동시에 홍포괴인의 입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세상에!'

 독고경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녀의 눈앞에서 방금까지 그처럼 위세당당했던 그 홍포괴인이 피분수를 뿜어내면서 허공 중을 유영(遊泳)하듯이 그렇게 둥둥 떠서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콰쾅!

 그가 7, 8장이나 날아가서 마침 거기에 있던 담장을 부수며 처박히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찰나간이었다.

 "괜찮으냐?"

 단 일 장으로 그처럼 무서운 홍포괴인을 날려 보낸 백의인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

 아침 햇살이 찬란하게 그의 뒤에서 빛난다.

 그의 단아한 얼굴은 그 햇살보다 더 강렬했다.

 햇살이 눈에 들어온 듯 가볍게 눈살을 찡그리는 독고경의 눈에 비치는 어딘지 창백하고도 영준한 그 모습은 그녀의 가슴을 두드리기에 족했다.

 뭐라고 할까?

 가슴속에서 종이 울리는 것 같았다.

 맑고도 드높은 종소리. 처음 그를 본 순간부터 묘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것이 무슨 느낌인지는 그 순간에는 알지 못했었다.

 이제 그녀는 알게 되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예, 사숙……."

 정신을 차린 그녀가 당황하여 급히 말꼬리를 흐렸다.

 "조심하도록!"

 짧은 말.

 그것과 함께 한효월은 발로 땅을 굴렀다.

 그 진동에 의한 것일까?

 쳐든 그의 손으로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장검 한 자루가 날아들었다.

 쏴아앙!

 장검이 그의 손에서 무서운 음향을 일으키면서 뛰쳐나갔다. 그것과 함께 한효월의 신형은 이미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그 검을 날려 위사들을 쳐 죽이고 있던 회의인을 공격했고 그가 놀라 뒤로 물러서는 순간에 다시 일검을 가했다. 신음과 함께 회의인이 혼비백산 담장을 넘어 사라졌다.

 한효월의 신형도 그 뒤를 따라 담을 넘었다.

 "……."

 독고경은 마치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 그의 모습이 사라짐을 보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뒤에서 노한 외침이 들려왔다.

 감천형과 천무가 이를 갈면서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참혹했다.

 지난 세월 그처럼 당당했던 천하무림의 맹주부. 천하무림맹의 총타가 피에 잠겼다.

 흑의인의 뒤를 따라 담을 넘은 한효월은 사방에 널린 시신을 보고 얼굴이 굳어졌다. 그도 이미 이곳의 지리를 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저곳이 바로 맹주 부인의 거처인 아취소축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널린 저 시신들…….

 뿐인가?

 자신이 쫓아온 흑의인이 아닌 흑의경장을 한 30대 초반의 사나이는 한 자루의 검을 질풍처럼 휘둘러 맹주부의 위사들을 쓰러뜨리고 있는데 그 일검을 제대로 받아내는 사람이 없었다.

 거의 일방적인 도살.

 한효월은 길게 장소성(長嘯聲)을 터뜨리면서 그 흑의검수(黑衣劒手)에게로 자신이 들었던 검을 던져 냈다.

 쏴아앙!

 가공할 음향이 검에서 일었다.

 동시에 검이 살아 있는 듯 한 마리의 백룡(白龍)으로 화해서 무서운 음향을 끌면서 흑의검수를 향해 날아갔다.

 이미 철적신검 호천성을 쓰러뜨리고 무인지경으로 위사들을 도륙(屠戮)하고 있던 흑의검수는 심상치 않은 사태가 일어났음을 짐작하고 주위를 살피던 중이었다. 동료 흑의인이 나타나고 그의 뒤를 따라 나타난 백의유생이 수중의 검을 던져 낸 것을 보고 그는 안색이 돌변했다.

 쫓기던 흑의인이 기겁을 하고 바닥에 넙죽 엎드리자 한효월이 날린 검광이 그의 머리 위를 지나 찰나간에 그를 엄습해 왔던 것이다.

 "어검술?!"

 그가 대경실색, 경호성을 질렀다.

 찰나간에 검은 이미 눈앞에 도달해 있었다.

 흑의검수의 안색이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고함과 함께 그는 검을 쳐들어 순식간에 연속 칠검을 격출해 냈다.

 땅! 따다다당…….

 고막을 두드리는 음향이 단속적으로 일었다.

 파파팍!

 흑의검수의 발 밑에서 돌이 깨어지면서 흙먼지가 피어 올랐다. 그는 한효월의 어검술을 검을 들어 막아내면서 연달아 뒤로 물러나 그 힘을 해소시키고 있는 것이다.

 "네 신분이 무엇이냐?"

 한효월이 검을 거두며 물었다.

 어검술을 막아낼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이미 경지에 이른 고수임을 뜻한다.

 한효월의 나이는 누가 봐도 흑의검수보다 적다.

 하지만 그의 음성에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리고 방금의 그 한 수로 누구도 감히 그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음이 증명된 다음이다. 무림이란 그런 곳이다. 배분(輩分)과 나이가 존중되지만 그에 따라 무공의 고하가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짓게 된다. 젊다 하더라도 상계(商界)에서는 거부(巨富)의 앞에서 칠순의 시골 상인이 감히 허리를 펴기 힘든 것과 같은 이치.

 "그렇군…… 네가 한효월인가?"

 그를 바라본 흑의검수의 안색이 굳어졌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유명인이 된 것 같군……."

 한효월이 담담히 중얼거렸다.

 말투는 담담하고 어딘지 모르게 조금쯤은 창백해 보이는 얼굴의 표정에도 미동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가 말과 함께 흑의검수를 향해 한 걸음을 옮겨놓자, 그것을 본 흑의검수의 안색은 돌변했다.

 한효월은 수중의 검을 그를 향해 겨누지도 않았다. 그저 그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을 뿐이다.

 "제천교의 칠성검주(七星劒主) 가운데 한 사람인가?"

 그가 물으며 다시 한 걸음을 다가서자 흑의검수는 급급히 한 걸음을 뒤로 물러났다.

 고수는 어떠한 경우에도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기세에서 밀리게 되어 상대와 맞서기 힘들게 된다. 뿐만 아니라 뒤로 물러나게 되면 자세를 제대로 잡을 수가 없어서 감당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흑의검수는 고수였다.

 그것을 몰라서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표현하기 힘든 어떤 기운.

 그 기세가 한효월이 다가오는 순간에 형성됨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고수이기에 단숨에 느낄 수 있는 그런 것.

 뒤로 물러나는 것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하지만 감히 발동할 수가 없었다.

 한효월의 저 조용한 눈은 말할 수 없는 무게로써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이대로 물러난다면 종내에는 감당할 수 없는 기세가 형성되어 그로서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릎을 꿇어야 할 것임을…….

 '저 나이에 이런 기도(氣度)라니……!'

 흑의검수는 신음을 흘렸다.

 입 안이 바짝 말라왔다.

 한순간, 찰나의 틈이 보이지 않는다면 건곤일척(乾坤一擲). 모험을 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 순간이다.

 "이 개자식들, 그냥 두지 않겠다!"

 한효월이 한 걸음을 다시 다가서는 순간에 그의 뒤에서 천둥 같은 분노를 담은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이 천무의 것임은 돌아보지 않아도 안다.

 하지만 그 순간에 한효월의 집중된 기세에는 미세한 틈이 생겼다.

 "타아앗!"

 흑의검수의 입에서 기합이 터졌다.

 그리고 그의 검이 발동했다.

 가공하리만큼 빠른 검세였다. 번갯불이 하늘을 가르며 내리꽂히는 것 같은 쾌검이었다.

 쨍!

 불똥과 함께 날카로운 불꽃이 일었다.

 흑의검수의 일검은 단순한 일검이 아니었다.

 그의 검은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검끝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그 검끝의 향방이 어디인지는 그 검끝이 도달한 다음이라야 비로소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흑의검수의 검은 심한 변화를 품고 있었다. 그의 검을 단순한 쾌검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이었다. 빠른 가운데 극심한 변화를 품고 있기에 그의 검은 무서웠다.

 한효월은 첫눈에 그것을 알아보고 그의 검이 발동될 틈을 주지 않고 그를 기세로써 몰아붙였던 것이다.

 찰나간의 틈을 노리고 흑의검수의 검이 날아들자 한효월은 검을 비스듬히 후려 그의 검세를 받아내면서 검을 휘몰아 앞으로 찔러갔다.

 검이 서로 부딪치면 대개는 조금 물러나면서 다시 새로운 초식이 연결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한효월의 검세는 그렇지 않았다.

 검이 부딪치는 순간에 그의 검은 이미 상대의 검을 타고 상대를 향해 무찔러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속도의 변화는 실로 무쌍(無雙)하여 처음부터 검이 상대를 찔러가는 듯한 착각을 줄 정도였다.

 그러나 흑의검수는 처음부터 한효월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는 한효월과 검이 부딪치는 순간에 검을 거두고 옆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한효월이다.

 그 또한 상대가 그럴 것을 짐작이라도 했던 것처럼 그대로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상대를 쫓는 것이 아니라, 아취소축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둘이 그렇게 하기로 약속이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저런……?"

 장내에 도달한 천무가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장내에 도달한 순간에는 흑의검수의 신형은 담장을 넘어 사라지고 있었고, 한효월 또한 아취소축으로 사라지고 있었던 까닭이다.

 마치 서로 놀라 반대쪽으로 도주하는 것 같은 상황.

 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천무가 아는 데는 별로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   *

 변고가 일어났음은 확실하다.

 하지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 집 안에서 알 수는 없는 일.

 좌백과 흑의인은 부지중에 바깥을 쳐다보았다.

 고수들은 고개를 움직이지 않는다.

 가능한 한 움직임을 줄여 그런 경우에도 눈동자가 움직일 따름이다.

 그 순간이다.

 "욱?!"

 고통에 찬 신음이 터져 나왔다.

 "……!"

 좌백이 놀라 눈을 크게 부릅떴다.

 믿기지 않은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흑의인이 튕겨나듯이 물러나고 있는데 맑은 빛을 뿌리는 옥비녀[玉?]가 그의 손목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개 같은 년이!"

 욕설과 함께 흑의인이 왼손을 휘둘러 의자에 앉아 있는 봉설란을 쳐갔다.

 "멈춰!"

 좌백이 고함치며 몸을 날렸다.

 팡!

 반사적인 흑의인의 일격에 봉설란이 앉아 있던 의자가 산산조각이 났다.

 동시에 좌백은 그 자리에 당도하면서 흑의인을 공격했다. 그는 이미 몸을 날리면서 암기를 폭포수처럼 쏟아낸 상태였다. 분노한 그였던지라 전신의 모든 암기는 다 쏟아내는 것만 같았고 그의 외호가 왜 천수단혼인가를 증명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이……!"

 흑의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원래 좌백이 날린 독문암기(獨門暗器)에 맞은 상태였었다. 그 회선표는 그의 왼쪽 어깨를 맞춰 오른손을 비녀에 꿰뚫린 그는 양손을 거의 쓰지 못할 지경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 찰나간에 생사가 결정된다.

 흑의인은 극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옥비녀에 꿰뚫린 손을 들어 맹렬한 일장을 후려냈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땅을 박찼다.

 와장창!

 창문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나갔다.

 흑의인이 일장을 내질러 냄과 동시에 창문을 부수며 뛰쳐나가 버린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다.

 "으악!"

 흑의인이 뛰쳐나간 창문 밖에서 참혹한 비명이 일었다. 필시 그의 손에 죄없는 위사가 목숨을 잃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인영 하나가 창문으로 다시 날아들었다.

 "감히 다시 온단 말이냐?"

 좌백이 노호를 터뜨리면서 전력을 다해서 일장을 때려냈다.

 "좌 사질, 나다!"

 나타난 인영이 소리쳤다.

 "사숙?!"

 그를 알아본 좌백이 놀라 소리치면서 손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뿐이었다.

 연달아 악전을 치른 그였다. 이미 몸과 마음이 지친 데다가 쌍방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전력을 경주한 일격을 거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원래 무공이란 거둠[收]이 쏟아냄[發]보다 어려운 법이다. 수발을 조절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다면 그것으로 고수의 반열에 오르고 남음이 있는 것이다.

 나타난 것은 한효월이었다.

 그는 좌백의 공세를 손을 들어 슬쩍 옆으로 밀어냈다.

 쾅!

 그의 손짓에 따라 좌백이 발출한 경기가 비틀어지면서 그를 스쳐 벽을 쳤다.

 벽이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터져 나갔다.

 그의 능력이라면 좌백이 발출한 경기를 해소할 수도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그는 무슨 까닭인지 그 경기의 방향을 틀었을 따름이다. 힘을 아끼려는 것이었을까?

 "사모님!"

 좌백은 나타난 것이 한효월임을 확인한 순간에 황급히 옆으로 달려갔다.

 봉설란!

 그녀가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좌백이 부축한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입가에는 석류처럼 붉디붉은 선지피가 희디흰 목덜미를 적시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좌백에게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난 괜찮다. 괜찮아……."

 그녀가 버둥거리며 몸을 일으켜 앉자 좌백은 내심 가슴을 쓸어 내릴 수가 있었다. 조금 상처를 입은 듯하긴 하지만 중한 상처가 아님은 분명했던 것이다.

 좌백이 그녀를 침상으로 부축해 앉히는 것을 본 한효월은 그녀에게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저 때문에 죄없는 아이들이 횡액을 당했으니……."

 봉설란이 창백한 얼굴에 괴로운 빛을 떠올리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입구 쪽 구석에는 그녀의 시녀 둘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이 와중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음은 그녀가 자면성모라고 불리는 이유를 짐작케 하고도 남음이 있다.

 "제 잘못입니다. 하마터면 죽어서라도 사부님을 뵐 면목이 없을 뻔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녀를 침상에 부축한 좌백이 그녀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거라, 네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음!"

 좌백을 부축하려던 봉설란은 미간을 찡그렸다.

 "사모님?"

 좌백이 놀라 몸을 일으켰다.

 "괜찮다. 그자의 장경(掌勁)이 스친 것뿐이니 잠시 쉬면 좋아질 것이다."

 봉설란이 창백한 얼굴로 가슴을 눌렀다.

 밭은기침이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온다. 전형적인 내상의 조짐이다.

 그러나 한효월은 그녀의 내상이 무거운 것이 아님을 그녀의 안색에서 알아볼 수가 있었다.

 "좌 사질, 여기를 부탁하마."

 한마디를 남긴 그는 망설임없이 방금 그가 날아들었던 창문으로 날아 나갔다.

 "후우……."

 그의 신형이 사라지자 좌백은 부지중에 길게 한숨 쉬었다.

 그처럼 참혹하게 맹주부를 휘감았던 전율과 공포가 이제 잦아들고 있음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싸움 소리가 멎고 있었다.

 귀에 익은 천무의 고함 소리가 들림은 그들이 돌아온 것을 의미한다.

 "……."

 봉설란도 그가 사라진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한효월은 감천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뒤를 따르던 천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금방 목소리가 들렸음에도…….

 "어떻게 되었느냐?"

 "적은 모두 퇴각했습니다."

 감천형이 침통한 얼굴로 대답했다.

 "피해 상황은? 아직 알 수 없겠지?"

 "예,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로도 참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장로원의 공봉들께서 변을 당하셨고 위대도 거의 반은 절멸(絶滅)된 듯합니다. 각 당의 피해도 믿을 수 없을 정도……."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단번에 피가 배어 나왔다.

 "믿기지 않습니다. 적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어떻게 불과 십여 명이 공격해 왔다고 해서 이토록 처참하게 당할 수가?"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저었다.

 "천 사질은?"

 "적을 쫓아갔습니다."

 "돌아오도록 하지. 지금 적을 쫓아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는 드러나 있고 우리는 적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공연히 함정에 빠지면……."

 "알겠습니다."

*   *   *

 밤이 찾아왔다.

 늘 당당하게 열려 있던 맹주부의 문은 굳게 닫혔다.

 인적마저도 끊어졌다.

 그렇듯 처참한 비명이 꼬리를 물었고 그렇게 사람들이 죽어 넘어졌다. 바깥에서 모를 리가 없다. 관아에서도 당연히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이다. 나중에 형식적인 조사가 나오는 것으로 대신할 터이다. 그들도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를 잘 알고 있기에.

 언제나 그러한 법이다.

 힘이 있는 자리는 법(法)을 초월한다.

 사방에는 횃불이 대낮과 같이 밝혀졌다.

 취의청에도 불이 밝혀졌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그 취의청 앞뜰.

 그 자리에는 한효월과 좌백 등이 무거운 얼굴로 서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백포가 널려 있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열 개, 스무 개…… 그 백포는 무려 육십두 구의 시신을 덮고 있었다. 그것이 오늘 천하무림맹에서 죽은 시신의 숫자였다.

 부상자의 숫자는 이루 말할 수도 없다.

 "참으로 믿기질 않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떻게 이런 일이……."

 좌백이 신음을 흘린다.

 "감 사질은?"

 "사부님의 영소(靈所)에 가 있습니다."

 "그런가? 가보자."

 한효월이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늘에는 달조차 희미했다.

 구름이 세차게 바람에 쫓겨서 달빛도 별빛도 뒤덮어가고 있었다.

 촛농이 눈물처럼 흐른다.

 눈물.

 그 촛농보다 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 옛날, 사부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으면서 한 번 울었었다. 그리고는 울지 않았었다. 이미 그렇게 지난 10년 세월.

 그런데 지금 감천형은 울고 있었다.

 억제할 수 없는 눈물.

 그는 시신마저 사라진 사부의 영소에 홀로 꿇어앉아 그렇게 울먹이고 있었다. 분했다. 이렇게 분할 수가 없었다. 사부가 사라졌다고 이렇게 능멸을 당해야 한다는 것인가!

 이렇듯 못난 꼴을 보여야 한다는 말인가.

 우두둑, 움켜쥔 주먹에서 뼈마디가 마주치는 소리가 울린다. 뚝뚝…… 그 주먹 아래 눌린 마룻바닥이 비명을 지른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그 바닥에도 아직 붉은빛이 남아 있다.

 적은 이곳까지도 침범했었다.

 그 붉은빛은 바로 핏자국.

 소리없이 그의 어깨에 손 하나가 올려진다.

 "자책하지 말아."

 조용한 음성.

 감천형은 주먹으로 눈을 비볐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들자 그의 눈앞에는 한효월이 서 있다.

 "분합니다, 사숙!"

 감천형이 입을 열었다.

 피를 토하는 듯한 음성이다.

 "이렇듯 속수무책 당하기만 합니까? 사부님이 살아 계실 때는 이렇지 않았었습니다. 저는, 저는…… 사부님이 살아 계실 때는 스스로가 잘난 줄 알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용렬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로군요. 맹주 대행은 오늘 부로 그만두겠습니다. 사숙께서 맡아주십시오."

 "내게 자격이 있는 것 같은가?"

 "있습니다. 최소한 저보다는 낫습니다. 저는 그간 사숙을 지켜봤습니다. 사숙께서는……."

 "세상은, 하늘은 사람을 크게 쓰기 위해서는 늘 시련을 준다고 하더군. 그 시련이 크고 강할수록 후일의 쓰임은 크게 되겠지.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시련과 좌절을 딛고 일어설 용기와 끈기를 누가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닐까?"

 한효월은 그를 향해 미미하게 웃었다.

 묘한 일이다.

 그의 나이는 이제 약관을 넘었다.

 그럼에도 저 웃음에 저렇듯 푸근한 감정이 녹아 있다니, 믿을 수는 없지만 마치 세월의 무게와 같은 저 웃음을 보면서 감천형은 그처럼 격하던 가슴이 안정됨을 느낀다.

 "나는 감 사질을 믿어, 감 사질이 잘해 나갈 수 있을 거야. 적이 비록 강하지만 그들을 어둠 속에서 끌어낼 수만 있다면 상대 못할 존재도 아니지. 별로 많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들은 이미 적지 않은 사실들을 알아내지 않았나?"

 한효월은 감천형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암중의 적이 하독함을 미리 알고 방비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지. 독이란 것이 방비를 해도 막아낸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니……."

 "정말 맹주부 전체가 중독되었습니까?"

 "분명히."

 중독.

 무림맹의 고수들 거의가 중독되어 본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적이 강하다 할지라도 그렇게 허무하게 당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허약했다면 어찌 천하무림맹의 존재 가치가 있었을 것인가.

 한효월의 말에 감천형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해하기가 곤란합니다. 스스로가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중독이 되는 독이 있다니…… 더구나 그렇게 구하기 힘든 독이라면, 그렇게 어렵게 독을 쓰느니 차라리 극독을 풀어 몰살을……."

 감천형은 말이 지나치다 싶은지 말끝을 흐렸다.

 "사질의 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적은 그보다 더 큰 것을 노리고 있었어."

 "어떤……?"

 "소수의 인원으로 맹주 전체를 몰살시키는 힘을 가진 단체…… 그들의 존재가 알려지면 과연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전시 효과를 노렸다는 겁니까?"

 "그렇게 보여. 최소한 그들이 뭔가 획책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분명한 듯하고……."

 한효월은 말끝을 흐렸다.

 -상대하기 어려운 적!

 분명히 그러했다.

 꼬리만 드러나고 실체가 어떻게 되는지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상대하기 어려운 것은 분명했다.

 당금 강호상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였던, 그래서 중원무왕이라고까지 불렸던 건곤무적 독고해까지 해친 그들.

 과연 그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강호의 석권이 그들의 목적이라면 이미 발동했어야 했다. 오늘 보여주었듯이 그렇게 막강한 힘을 가졌다면, 이제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보일 때가 되었다.

 그런데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가.

*   *   *

 달이 밝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

 구름을 헤치고 솟아난 달 아래에서 한효월은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세상에 드문 재지(才智)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사부인 경월선인은 그의 재지를 일러 절세(絶世)라 하였을 정도였다. 나이 셋에 사서삼경을 읽을 뿐 아니라 아예 외어버린다는 천재의 범주에 들었을 뿐 아니라, 냉철하고도 단호한 결단력까지 갖추었다.

 왕자지재(王者之才).

 경월선인은 그를 그렇게 평했다.

 그럼에도 그는 세상에 뜻을 두지 않았었다.

 그는 나이답지 않게 초속(超俗)한 성품을 지녀 온건하고도 침착했다. 그러한 성품은 사부와 그 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한 가지 사실에서 연유하였지만 아직까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런가?"

 문득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그렇다는 말인가? 어딘가 억제력이 존재하는 건가……."

 그의 깊은 눈빛이 흔들린다. 그 눈 속에서 달이 고요히 일렁이며 빛을 뿜는다.

 "그걸 찾아야겠군. 그들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놈들을 쳐야 할 테고……."

 한효월의 입매에 선 하나가 한일 자로 그어졌다.

 뭔가 결심이 선 듯했다.

 바로 그 순간이다.

 한효월의 눈에 작은 흔들림이 일었다.

 달빛.

 그 흐르는 달빛이 그의 뒤쪽에서 길게 그림자 하나를 끌어내고 있었다.

 하늘거리는 나삼(羅衫).

 깎은 듯 차고 아름다운 얼굴.

 독고경이 붉은빛의 배자(褙子)를 댄 백색의 나삼을 입고 조용히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한효월이 그녀를 돌아보자 독고경은 그를 향해서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었다.

 사숙과 사질녀의 사이이니 당연한 일이다.

 "놀랐을 텐데, 왜 쉬지 않고 나왔느냐?"

 독고경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에 든 한효월의 모습은 여전히 탈속한 기품이 있다. 당당하고도 고요하다. 그 단아한 얼굴에 서린 희미한 웃음은 여인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족했다.

 "한 가지 여쭙고 싶어서……."

 "무슨 일이지?"

 그녀가 문득 음성을 차갑게 해 입을 열어 물었다.

 "계모가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

 한효월은 그윽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맞습니까?"

 "사형께서 호신용으로 전수하셨다고 들었다."

 싸늘한 코웃음이 독고경에게서 터져 나왔다.

 "흥! 호신용? 세상 모두를 다 속이고 있다가 말인가요?"

 "네 아버님께서 세상에 드문 고수였음을 잊지 마라. 사형께서 가르친 무공이라면 세간의 필부라도 고수가 될 수 있다. 형수님은 사형께서 생전에 전수한 것은 굳이 익히려 들지 않아 배움이 보잘것없다고 하셨지만……."

 한효월의 음성이 고요히 울린다.

 그러했다.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달리 자면성모 봉설란은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절대로 그 흑의인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었다. 일개 아낙이 남자의 손을 비녀로, 그것도 흑의인과 같은 고수의 손에다 비녀를 박아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그녀는 그에게 제압당해 있었다.

 아무리 그녀를 우습게 보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본신의 공력이 없다면, 낮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사숙께선 그 말을 믿습니까?"

 "무슨 뜻이냐?"

 "아버님은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아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마음대로……."

 "……."

 한효월은 물끄러미 그녀를 보았다.

 "무엇을 의심하고 있는 건지 내게 알려주겠나?"

 "난……."

 독고경은 입술을 물었다.

 가슴속 가득 할 말이 차 있는 것 같지만 막상 무슨 말을 해야 할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많이 어려울 때지. 서로 믿는 게 중요할 것 같아. 공연한 의심은 모두에게 득이 되지 않는 시기지."

 "내가 모함이라도 하고 있다는 건가요?"

 독고경이 발칵, 고개를 들었다.

 당장이라도 덤벼들 듯한 몸짓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녀를 맞이한 것은 한효월의 조용한 웃음이었다.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은 이상, 확인되지 않은 일을 입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말했을 뿐이지."

 말문이 막혔다.

 …….

 그녀는 그렇게 한효월이 그녀를 배웅하고 떠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가슴이 답답해 왔다.

 화가 났다.

 이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이런 말을 하고자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할 말이 많았었는데…….

 하지만 그를 본 순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사숙이다.

 사숙…….

 "그게 어쨌다는 거야?"

 갑자기 그녀가 발작하듯 소리치면서 발을 굴렀다.

 발 밑에서 흙먼지가 풀썩 이는 순간 그녀의 신형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남은 것은 무심한 달빛뿐…….

 화원에는 사람의 기척이 끊어졌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이 있었다.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나무 그늘에 우뚝 선 채로 조용히 바라보는 그림자 하나.

 천무.

 독고경의 뒷모습을 쫓는 그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어둠에 완전히 묻혀 버린 다음에도 그는 석상과 같이 그 자리에 서서 그녀의 모습을 하염없이 눈으로 쫓으며 서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었다.

 두 사람의 나이 차는 일곱 살이나 된다.

 빽빽 우는 갓난아이 적부터의 독고경을 아는 그였다.

 하지만 커 나가면서 계집아이로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자 열 살이 넘어가면서 그는 사매(師妹)로서가 아니라, 여인으로서 그녀를 보게 되었다.

 나이답지 않게 조숙한 아름다움을 지닌 그녀였기에.

 아니, 그보다는 그녀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그녀를 업고 돌아다니면서 길을 잃어보기도 하고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그녀를 안고 늑대 떼와 싸운 것들이 그녀를 더욱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세간에서는 그를 일러 무공광이라 했다.

 그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좀 더 강해져야 했기에 그는 미친 듯 무공에 몰두했을 터이다. 늑대 떼에 포위되었을 때, 때마침 대사형이 와주지 않았다면 그는 물론이고 사매까지 그 폭우 속에서 늑대 밥이 되고 말았을 것이기에.

 으아앙!

 울음을 터뜨리면서 대사형의 목에 매달리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면서 그는 입을 열지 못했다.

 그 뒤로도 경아에게는 말을 붙이지 못했었다.

 그녀가 졸라서 나갔던 나들이였음에도.

 그리고 그녀는 남해로 떠났다.

 그날 이후, 그는 과묵해졌고 미친 듯 무공에 몰두했다. 다시 그녀를 보았을 때는 그녀를 지켜줄 수 있기 위하여.

 한마디도 말을 붙이지 못한 채 그저 바라만 보았었다. 그것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영원히 그렇게 바라보고만 말지도 몰랐다. 다시 만나면 그녀를 덮을 수 있는 거대한 그늘을 가진 거목이 되어 있고자 했었다.

 그런데.

 "후우……!"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터벅터벅 그는 무거운 걸음을 옮겨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가 서 있던 큰 소나무, 수백 년의 세월을 살아온 그 소나무의 그림자가 그가 사라진 자리를 소리없이 덮었다.

 암울하게.

*   *   *

 한효월은 굵은 대황초 아래에서 책 하나를 펼쳐 놓고 있었다.

 천기단서.

 그렇게 이름하는 그 책은 천기선생이 죽기 전에 그에게 남긴 것이었다.

 천기단서는 그리 두텁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으로 만든 것인지 종이가 매우 얇아 두께에 비해서는 의외로 내용이 많았다. 그리고 거기에 실린 내용은 정말 박대정심(博大精深)이라 불릴 만한 것이었다.

 무공에 관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책략(策略), 심기(心機), 진도(陣圖), 건축(建築), 매복(埋伏), 용독(用毒)…….

 언급된 분야는 정말 방대하다고 할 수 있었고 일반인이라면 그 천기단서를 얻는다 할지라도 별 소용이 없을 것이었다. 모든 것들이 너무 함축되어 있어서 말 자체로는 도무지 그 내용을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한효월이 아니라면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해도 옳았다.

 그러나 지금의 그를 놀라게 한 것은 그 가운데 끼어 있는 얇게 접힌 종잇조각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내용이었고, 그 내용으로 유추하자면 그것이 상당히 오래전에 쓰여졌으리라는 점이다.

 <다른 사람이 이 글을 본다면 아마도 나는 세상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 의미는 당금의 천하를 지탱하고 있던 독고 아우 또한 변을 당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이 독고 아우를 죽였다면 나 또한 그냥 둘 리가 없기 때문이다…….>

 내용은 놀라웠다.

 천기선생은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고 있었다.

 <이 일에 얽힌 인과는 참으로 복잡하며, 대겁(大劫)이 발동한 이상 누구도 그 피의 수레바퀴를 멈출 수는 없을 것이다. 하늘이 돕는다면 몰라도…….>

 그 내용을 읽는 한효월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거기에 적힌 내용이 너무도 뜻밖의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자칫 그 내용이 강호상에 유포되면 독고해의 일세영명(一世英名)은 물에 떠내려가고 말 수도 있었다. 죽기 전까지 천하를 지키고자 했던 영웅, 그의 명예가 한순간에 진흙탕에 쑤셔 박힐 수도 있었다.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천기선생의 유서를 읽던 한효월은 그 유서를 촛불에다 갖다 댔다.

 유서가 불붙어 재로 화했다.

 어둠이 방 안을 누르고 있다.

 한효월은 침상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운기조식을 하는 듯했다.

 운기조식이란 기(氣)를 움직이고 숨[息]을 고른다는 뜻이다.

 기라는 글자는 무공에 있어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 기에는 기(氣)와 기(タ), 그리고 기(ッ)가 있다. 통칭으로 음도 같고 뜻도 같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엄연히 구분된다.

 기(氣)라고 하는 것은 보이지는 않지만 겉으로 표현되는 것, 이를테면 사람의 기질(氣質)이나 정기(正氣) 등으로 쓰이고. 기(タ)는 보통 기(氣)의 약자로 쓰이지만, 원래는 공기와 같은 물리학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ッ)라고 하는 것은 생리학적인 의미를 가지며 무공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인체 내의 원기(元ッ)나 진기(眞ッ), 선천의 기(ッ) 등이 다 여기에 포함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氣)와 기(タ)가 무공의 수련에 전혀 연관이 없다고 한다면 여전히 하급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을 터이다.

 외공(外功)이 힘을 단련하고 근육을 강하게 하는 공부(功夫)라면, 내공이라 함은 바로 그러한 기를 수련하는 공부이다.

 내공이 경지에 오르면 잠을 자지 않아도 잠을 잔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바로 운기조식이라는 것을 통하여. 뿐만 아니라 피로를 풀 수도 있으며 인체 내의 병이나 상처도 치유할 수 있다.

 한효월과 같은 고수라면 잠시의 운기조식으로도 충분히 피로를 회복할 수 있었고 어쩌면 그것이 더 빠를 수도 있었다.

 오늘 그는 쉼없는 격전을 벌였다.

 더구나 어검술과 같이 격심한 내력의 소모를 요구하는 상승의 내가검(內家劒)을 시전했으므로 기력의 보충은 절실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의외에도 그의 운기조식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에서는 맑은 정광(精光)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서 그가 이미 내력을 회복했음을 말해 주는 듯했다.

 뿐만 아니라 그 유현(幽玄)한 빛은 묘하게도 그의 내력이 더 깊어졌음을 의미하는 듯하기도 하였다.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일이었다.

 …….

 어둠 속에서 눈을 뜬 그는 조용히 앉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 순간인가.

 어둠 속에서 낮은 기척이 일었다.

 그리고 창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는가 싶더니 이내 닫혔다. 마치 산들바람처럼 기척도 없이 인영 하나가 이미 방 안으로 날아든 다음이다.

 그 인영은 낮은 자세에서 신속하게 방 안을 쓸어보았다.

 한효월이 침상에 단정히 앉아 있음을 발견한 인영은 바닥을 짚고서 소리도 없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인영은 일직선으로 어둠을 가르며 한효월을 향해서 날아들었다.

 그 손에 들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비스듬히 들린 손은 한효월의 목젖 후결(喉結)을 노리고 있어 스치기만 해도 목뼈가 부러지고도 남음이 있었다.

 "고약한 놈. 점점 장난이 심해지는구나."

 문득 어둠 속에서 나직한 꾸짖음이 인다.

 동시에 한효월이 손을 내밀어 날아드는 수도(手刀)를 눌러갔다.

 "하하……."

 맑은 웃음소리.

 나지막한 그 웃음소리와 함께 그림자는 손을 거두고 물러섰다.

 "이젠 안심이 되는군요. 주의를 게을리 하고 계시지 않으니…… 하하, 저는 공자께서 제가 보살펴 드리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해서 아주 골머리를 앓았었죠! 좌불안석……."

 "녀석, 그 수다는 밖으로 나와도 여전하구나."

 한효월의 말에 인영이 낮게 웃었다.

 "밖으로 나온다고 안에서 새던 바가지가 별수있겠습니까? 그래 봐야 깨진 바가지죠!"

 나타난 인영.

 어둠 속에서 한효월의 앞에 선 그 인영의 모습은 눈에 익었다.

 유성(柳星)이라 불리는 소년.

 바로 한효월과 함께 무우곡을 떠나온, 그 초동이었다. 감천형 등이 만났던…….

 무우곡을 떠난 이래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그 초동이 갑자기 이 밤에 한효월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가 그 초동임을 짐작하기는 쉽지 않을 터였다. 날렵한 흑의경장(黑衣輕裝)에 얼굴도 두건을 써 눈만 드러나 있었다. 전형적인 야행인(夜行人)의 복장.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두고, 같던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한효월의 질책에도 유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어 보였다.

 "제가 누굽니까? 그까짓 거야 간단한……."

 "어디냐?"

 한효월이 말을 가로채자 유성은 입맛을 다셨다.

 "쩝쩝…… 여기서 별로 멀지 않습니다."

 "멀지 않다? 낙양성 내에 있더란 말이냐?"

 "그게…… 뜻밖에도 절이더군요."

 "절? 사찰(寺刹)이란 말이냐?"

 "백마사(白馬寺)입니다."

 그 말에 한효월은 입을 벌렸다.

 "백마사란 말이냐?"

 "예, 놈들은 교활하게도 백마사 후원에 있는 암자를 근거지로 하고 있더군요. 백마사의 중놈 하나를 끼고……."

 "음……."

 한효월은 나직이 신음했다.

 백마사라면 유수한 명찰(名刹)이다.

 낙양의 동쪽에 있는 이 백마사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가운데 하나로써 명소(名所) 중의 명소였다.

 그런데 거기가 근거지라는 것인가?

 "과연 절묘하군."

 한효월은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본 유성이 짙은 검미를 찌푸렸다.

 "어쩌시려는 겁니까?"

 "가자."

 "지금…… 말입니까?"

 유성이 입을 벌렸다.

 답은 없다.

 한효월은 이미 밖으로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가 꼴을 못 보지…… 내가 좀 쉬면 어디 종기 나는 줄 아시는 게야."

 "계속 거기 있을 거냐?"

 한효월의 음성이 또렷하게 그의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큰 음성은 아니지만 진기전성(眞氣傳聲)이라 귀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는 듯했다.

 "가, 갑니다! 당연히 가죠!"

 동시의 그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 찰나간의 틈에 그는 한효월의 침상을 살짝 만져서 침상에 사람이 자고 있는 듯 만들어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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