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一首 혈침무맹(血沈武盟)
-피에 잠긴 맹주부
보이는 것이 시체요, 선혈(鮮血)이라.
청천벽력과 같았다.
감천형은 청룡장으로 출동하면서 맹주부 위사의 절반가량을 투입했었다.
그런 맹주부가 적의 공격을 받았다는 것인가?
간단한 일이라면 옥면무영이 이렇듯 일부러 달려오지는 않았으리라. 이 마당에 그런 일을 하나하나 캐묻고 있을 만큼 어리석은 감천형이 아니었다.
"즉각 귀환한다! 모두 출발하라!"
명령을 내린 감천형은 한효월을 돌아보았다.
"사숙께서는?"
"먼저 출발하지."
"알겠습니다."
감천형은 천무와 함께 급거 길을 떠났다.
한효월은 그들이 떠남을 보자 요동권왕 막풍을 바라보았다.
"소생은 먼저 돌아가야겠습니다. 선배께서는 어떻게 하실 예정이십니까?"
"나야 당연히 이자들의 종적을 계속 추적해야지. 하늘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놈들을 찾아낼 걸세."
"혹, 무슨 발견을 하시면 꼭 연락을 주십시오."
"그러지."
답을 한 요동권왕 막풍은 문득 한효월을 쳐다보고는 그의 손을 잡았다.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겠네. 피곤해 보이는군."
"……!"
그의 말에 한효월의 눈빛이 흔들렸다.
"감사합니다."
의미 모를 말을 한효월이 하는 순간, 요동권왕 막풍은 그 솥뚜껑처럼 큰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소형제를 만나게 되어 반가웠네."
그는 한효월의 눈을 보면서 할아버지와 같은 웃음을 머금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푸근한 얼굴이었다. 강호상의 전설이 아니라 이웃집 할아버지와 같은 소탈한 모습.
* * *
한효월은 신법을 전개하여 치달리고 있었다.
그의 경공은 유연하고도 절도가 있어 빠르면서도 깨끗했다. 백삼(白衫) 자락을 펄럭이며 달리는 모습은 멋지기까지 했다.
유성추(流星追)의 그 신법은 한효월이 사문의 신법을 개선, 독창한 것으로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빠른 속도로 계속하여 달릴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우리가 맹주부를 떠난 직후에 기습을 했다는 것은 적이 이미 우리의 움직임을 읽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적이 준비를 해서 맹주부를 공격했다는 의미이기도 했고, 그만큼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내심 다급해진 한효월은 진기를 더 끌어올려 속도를 높였다.
한데 그 순간이다.
그의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앞쪽 길에 가마[轎子] 한 대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사인교(四人轎)인 그 가마는 검은색 일색.
어느 누구도 가마를 저런 색으로 칠하지는 않는다.
어둠이 내린 일대.
어둠에 잠긴 길도 그 좌우로 우거진 숲도 모두 검은색으로 물든 밤이다. 그 가운데 땅에서 솟아난 듯 놓여 있는 검은색 가마는 정말 기괴(奇怪)하기 이를 데가 없다.
누가 가져다 놓은 것일까?
하지만 한효월은 그 가마를 일별하였을 뿐, 가마를 보지 못한 듯 그 가마를 비켜 지나가려고 했다.
하나 그 순간, 가마가 마치 누가 밀어낸 듯이 미끄러지면서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누가 장난을 치는 게요?"
한효월이 걸음을 멈추며 입을 열었다.
"귀하가 한효월, 한 공자(寒公子)이시오?"
지체없이 차고 영롱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음성은 놀랍게도 가마가 아니라 가마의 반대 편에 있는 숲 속에서 흘러나왔다.
그 음성을 들은 한효월은 문득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흐음…… 이 목소리는 별로 낯설지 않군?"
그가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자 예의 음성은 다시 싸늘히 웃었다.
"과연 공자의 기억력은 찬탄을 금할 수가 없군요?"
웃음소리와 함께 숲 속의 어둠을 뚫고서 흑의몽면을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옷을 입고 숲 속에 은신하고 있으니 어떤 누구라도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는 찾아내기 힘드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본 한효월은 오히려 웃음을 떠올린다.
"우리가 만난 지 이제 겨우 하루이니, 어찌 그새 잊어버릴 리가 있겠소?"
그의 앞에 나타난 흑의몽면녀.
그녀야말로 냉운장에서 만났던 제천교의 요광성주인 것이다.
한효월은 그녀를 바라보면서 웃음기 어린 어조로 말을 계속하였다.
"우리는 이미 구면이고, 소저의 옥용(玉容)은 내 이미 견식한 바 있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도 굳이 그 답답한 몽면을 쓰고 있어야 하겠소?"
그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낭랑히 웃었다.
"복면을 벗고 한번 크게 숨을 들이켜 보시오. 그럼 세상이 얼마나 깨끗하며, 이 밤 공기가 얼마나 시원한가를 알게 될 것이오. 소저의 꽃다운 나이는 시(詩)를 논하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바쁠 텐데, 이런 밤중에 길 가는 외간 남자의 앞길을 막는 것은 실로 바람직하지 못하오."
간만에 그는 길게 말을 했다.
불어오는 밤바람이 그의 백삼을 멋들어지게 펄럭인다.
임풍옥수(臨風玉樹)라고 하는 말이 있다.
그 말이 지금의 한효월을 두고 한 말임을 부인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흑의몽면녀는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정말 멋이 있었다.
사내라도 반할 만큼.
요광성주의 눈빛이 몽면 속에서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입술을 터져라 깨물었다. 그날 밤, 그 자리에서의 치욕이 생각났던 것이다. 자존심 강한 그녀로서는 용납하지 못할 일이었다.
단 일 수에 몽면이 벗겨지다니…….
"흥! 그건……."
그녀에게서 싸늘한 냉소가 터져 나왔다.
그때였다.
그녀가 막 입을 여는 순간 바람을 타고 은은히 격투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한효월의 안색이 싹 달라졌다.
"나 말고도 또 우리를 접대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로군."
말과 함께 그는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앞서 출발한 감천형 일행이 강적을 만났음을 직감한 것이다.
"한 공자는 잠시 우리와 함께 있는 게 좋겠군요?"
싸늘한 요광성주의 말.
찰나, 일진 미풍과 함께 가마의 좌우에서 검은 그림자 십여 명이 날아들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한효월은 그들을 바라본 채로 미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이들로서 그런 능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오?"
요광성주는 자신만만하게 코웃음을 쳤다.
"당신의 능력이 대단한 것은 인정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본 교에 통용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에요. 본 교에는 귀하와 같은 능력을 지닌 사람이 수도 없이 많으니까."
한효월은 낭랑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나는 오늘 꼼짝없이 여기에 묶이고 만 것 같군?"
말은 그렇게 한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의 신형은 조금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처음과 같은 속도였다.
그들과의 거리가 얼마나 되랴.
순식간에 그들과의 거리가 지척으로 가까워졌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들의 공격은 매우 특이했다.
한 사람씩 달려드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들 모두가 한꺼번에 달려드는 것도 아니다. 그들 열둘이 분명히 하나씩 달려드는 데에도 불구하고 마치 줄에 꿰인 엽전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것만 같았다.
하나가 둘이고 둘이 넷이 되는 특이한 공세.
"대라십이연환진(大羅十二連環陣)이로군."
그들의 움직임을 본 한효월은 가벼운 탄성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의 신형은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그들의 공세 속으로 오히려 뛰어들고 있었다.
"이얍!"
"으아앗!"
일진 호통과 비명이 어우러지면서 사람의 그림자가 흩어졌다.
'저럴 수가?'
그 광경을 본 요광성주의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그처럼 철벽과 같다고 알려진 대라십이연환진이다. 열두 사람의 움직임이 하나로 연결되어 열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열둘이라서 상대하기가 힘들다는 그 대라십이연환진이 채 삼 합이 지나지 않아 그대로 무너져 버림을 목도한 까닭이다.
'힘도 들이지 않고 저렇게 쉽게 진을 깨뜨리다니, 어떻게 저런 일이…….'
아무리 고강한 공력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있다면, 한효월이 시전자보다 진세의 변화를 더 잘 알고 있다는 가정뿐.
단숨에 진세를 깨뜨린 한효월은 그녀를 슬쩍 돌아보는 것 같다. 언뜻 미소가 보인다. 어둠 속에서 흰 이가 드러난다.
"다시 봅시다."
그의 신형이 하늘로 솟구쳤다.
"흥! 누구 마음대로? 그렇게 쉽게 생각했다면 본 교를 너무 간단히 본 거지……."
요광성주가 코웃음을 치는 순간.
쾅!
길을 가로막고 있던 교자가 산산조각으로 폭발하듯 부서졌다.
동시에 그 속에서 인영 하나가 빛살과도 같이 치솟아올라 그 위를 지나던 한효월을 공격했다.
그것은 너무도 쾌속한 데다 너무도 의외였다.
"핫하하하…… 최후의 한 수가 남아 있을 것 당연히 짐작했었다!"
낭랑한 웃음소리가 한효월에게서 터져 나왔다.
찰나, 경미한 신음과 함께 날아오르던 인영이 화살을 맞은 기러기처럼 뚝 떨어졌다.
그것과 함께 한효월의 신형은 마치 하늘을 나는 천마(天馬)와 같이 허공을 타고 사라져 버렸다.
"여인의 아름다움은 여인다울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법. 우리 다음에는 이런 식으로 만나지 않기를……!"
그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는데, 그의 음성은 멍청히 서 있는 요광성주에게 낭랑히 들려왔다.
요광성주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렸다.
"믿을 수 없어! 일부러 데려온 천마무영(天魔無影)의 살수(殺手)를 단 일 격에 즉사시킨단 말인가?"
그녀의 앞쪽에는 일신에 검은 옷을 걸친 자 하나가 땅바닥에 엎어져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무공에 조금이라도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이미 즉사한 다음임을 알 수 있을 자세.
"그의 무공은 그날 만났을 때보다 더 고강(高强)한 것 같다. 대체 그의 무공 수준은 어느 정도라는 것이지? 설마 하니 정말 독고해와 비슷하기라도 하단 말인가?"
믿기지 않는 듯 중얼거리던 그녀는 문득 머리를 흔들며 다급히 소리쳤다.
"신호를 올려라! 그가 가고 있다고."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울렸다.
호각 소리는 살아 있는 듯 멀리 갔고, 그 소리가 잦아들기도 전에 다시 호응하듯 저 멀리에서 은은히 호각 소리가 꼬리를 물었다.
"……."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요광성주는 한효월이 사라진 쪽을 묵묵히 바라보면서 서 있다.
무심한 바람이 그녀의 옷자락을 펄럭였다.
* * *
감천형 등의 움직임은 극비리였다.
외부는 물론, 내부인들조차도 그들이 맹주부를 나선 것을 아는 사람이 적다. 그럼에도 적이 그것을 알고 습격했다면 상황은 간단치 않음이 분명했다.
무림맹은 허수아비가 아니었다.
비록 군림을 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지난 20년이란 세월을 강호의 시비를 가리고 분쟁을 조정하는 일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런 존재라면 구대문파가 주축이 된 세력일 수도 없었다.
그런 그들은 그들대로의 연락 방법이 있었고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그런데, 그 비상 연락망이 전혀 아무런 구실도 하지 못했고 개방의 인사가 달려와 알려주었다 함은 이미 그 연락망이 무너졌음을 뜻한다.
다급해진 감천형은 전력을 다해 앞서 몸을 날렸고 천무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도 심정은 마찬가지였다.
앞선 감천형이 처음 마주친 것은 길을 가로막고 있는 낡은 마차 한 대였다. 비루먹은 노새 한 마리가 반쯤 졸고 있는데, 모는 사람조차 없다. 밤중에 그런 마차가 길을 막고 서 있다면 바보가 아니라면 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일.
그리고 그 예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감천형이 그 마차의 앞에 도달했을 때, 좌우에서 흑의인들이 날아들었다.
싸움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무차별한 공격.
전후좌우에서 흑의인들이 공격해 왔다.
그들의 공격 전에 감천형 일행은 어둠 속에서 날아든 암기(暗器)에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비도(飛刀)나 수리전(袖裏箭) 따위의 암기라면 크기가 커서 방비라도 쉬웠겠지만 쇠털처럼 가는 독침(毒針)이 어둠 속에서 날아들자 30명가량의 위사들 중 절반이 싸우기도 전에 쓰러져야 했다.
하지만 그 30명의 위사 중 절반 이상은 구대문파의 고수급 인물들.
결코 만만한 전력이 아니다.
적의 숫자는 30명이 조금 넘어 보이지만 압도적으로 밀릴 정도는 분명히 아니었다.
그런데도, 감천형와 천무가 전력을 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세는커녕, 사방에서 쓰러지고 있는 것은 저들이 아니라 맹주부의 고수들이다.
적들 개개인이 고수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들 중에 뛰어난 고수가 다섯 명이나 있기 때문이었다.
치렁한 백발을 휘날린다.
어둠 속에서 독사와 같은 눈빛이 빛나고 녹포장삼이 펄럭이는 가운데 그들은 검을 휘두르고, 칼[刀]을 휘두른다. 오행간과 응조(鷹爪)가 피바람을 불렀다. 다양한 무기를 쓰는 그들 다섯 노인들의 무공은 변화막측(變化莫測)한 데다가 기궤(奇詭)하기 이를 데 없어서 제대로 방비도 하기 전에 순식간에 7, 8명의 고수들이 피를 뿌렸다.
감천형과 천무는 노하여 잇달아 서너 명의 적을 쓰러뜨렸지만 그들 다섯 녹포노인들은 천무와 감천형은 본 척도 하지 않고 미꾸라지처럼 맹주부의 휘하 고수들만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이 일각만 더 계속되었다면 아마도 장중에 살아남았을 사람은 감천형과 천무뿐이었을 터이다.
우우우…….
밤 공기를 뒤흔들며 멀리서 장소성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 소리의 여운이 끝나기도 전에 흰 그림자 하나가 무서운 속도로 장내에 들이닥쳤으며, 그가 옴을 알리기라도 하듯이 날카로운 호각성이 울려 퍼졌다.
"으악!"
날아든 백영(白影)은 장내에 날아들면서 자신을 공격해 오던 흑의인 한 사람을 단 일 거수에 날려 보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쳐냈던 손을 거두는 사이에 상대의 손에서 한 자루 장검을 낚아챘다.
바로 한효월이었다.
한효월은 검을 손에 쥐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전진하면서 수중의 검을 휘둘렀다.
"으악……!"
비명과 함께 피보라가 일었다.
그가 나타나자마자 잇달아 서너 명의 고수를 짚단처럼 베어넘기자 장중에는 일대 변화가 일었다.
"네놈이 감히 어디서!"
다섯 명 녹포노인 중 하나가 노성을 터뜨리면서 수중의 섭혼도(攝魂刀)를 휘둘러 한효월의 옆에서 그를 쳐갔다.
고막을 찢어발기는 듯한 괴이한 음향이 그의 일도(一刀)에서 일어났다. 그 소리는 사람의 가슴을 떨어울리는 괴기한 위력이 있는 듯했다.
"사숙! 조심하십시오! 그자는 20년 전에 사라졌던 기련오마(祁連五魔) 중의 섭혼마도(攝魂魔刀) 종귀(鐘貴)라는 자입니다. 그의 섭혼도는……!"
한효월을 보고 소리치던 감천형은 놀라 입을 딱 벌렸다.
미처 자세를 가다듬지 못한 한효월은 섭혼마도의 일도가 날아듦을 보고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어깨를 비트는 사이에 섭혼마도의 도세(刀勢)가 가지는 예리함을 비켜 보냈다.
검이나 칼에는 그 흐름이 이어지는 노수(路數)라고 하는 것이 있다. 일컬어 검로(劒路)라고 하는 것들이다. 검을 휘둘러 그 영향이 미치는 길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한효월의 미미한 움직임은 바로 그 길의 정면을 피해 버리는 효과가 있었다.
동시에 그는 수중의 검을 불쑥 앞으로 찔러냈다.
"이런 미친……!"
한효월을 공격했던 섭혼마도 종귀는 놀랍고도 당황하여 수중의 섭혼마도를 부르르 떠는 가운데 찰나간에 이미 그가 자랑하는 섭혼삼령(攝魂三鈴)을 펼쳐 한효월의 전신을 덮어갔다.
때릉! 쏴아악-
괴이한 바람 소리가 그의 도세를 따라 심혼(心魂)을 울리면서 일었다.
"가라."
한효월의 입에서 차가운 호통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막 섭혼마도와 마주치려던 그의 검에서 새파란 불꽃과도 같은 검광이 치솟았다.
"검강?!"
섭혼마도의 입에서 경악이 튀어나왔다.
캉!
"으악!"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리는 가운데 섭혼마도 종규의 섭혼도는 두 동강이 나버렸다.
동시에 그의 가슴도 두 쪽이 났다.
피보라가 흩뿌려지는 가운데 그가 나가떨어졌고 한효월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쓰러지는 그를 스쳐 지나가 그 다음에 있던 흑의인 하나를 베어넘겼다.
그러한 위세는 가히 신위라고 불리어도 손색이 없어 일순간에 장내의 격전은 멈추고 말았다.
"감히 네놈이 넷째를?"
"으흐흐흐……."
노한 외침이 일며 한효월의 좌우에서 녹포노인들이 달려들었다.
"조심하십시오. 기련오마 중 나머지 괴물들입니다!"
감천형이 소리치면서 달려왔다.
한효월의 무공이 아무리 놀라워도 기련오마 중 넷이 협공을 한다면 쉽지 않으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 만큼 그들은 위협적인 존재에 분명했다.
"여기는 나에게 맡기고 어서 가라!"
한효월이 낭랑히 소리치면서 기련오마를 맞아갔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은 분명히 평범한 청강검(靑鋼劒)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 들린 순간부터 그 검은 가공할 위력을 가진 신검(神劒)으로 화한 듯 검광을 뿌려대고 있었다. 그가 나타난 이래 누구도 그의 일검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것은 기련오마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섭혼마도가 피바다 속에 쓰러진 다음, 마조(魔爪) 공손주(公孫週)도 한효월의 일검에 한 팔을 잃어버리고 혼비백산 곤두박질치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 와중에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다시 들려왔고 기련오마를 비롯한 흑의인들은 마치 썰물이 빠지듯이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
"누구 맘대로 가느냐?"
천무가 이를 갈면서 그들을 쫓았다.
그때였다.
쒸아앙-!
고막을 울리는 굉음이 밤 공기를 찢었다.
강렬한 빛줄기가 어둠을 뚫고서 빛살처럼 날았다.
"으악!"
어둠 속으로 묻혀들던 기련오마 중 하나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요란한 굉음이 일며 비명이 터져 나온 곳에서 서너 그루의 나무가 한꺼번에 무너지듯 넘어졌다. 마치 거대한 도끼가 밑동을 찍어낸 듯이.
천무는 그 광경에 놀라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쫓지 마라! 지금은 놈들을 쫓을 때가 아니야."
한효월이 자세를 바로하면서 말했다.
감천형은 경악한 눈빛으로 한효월을 쳐다보았다.
방금 그 무서운 빛이 바로 한효월의 수중에서 날아간 검광임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검술(馭劒術)…….'
감천형은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분명히 기어검(氣馭劒)이었다.
단순한 탈수비검(脫手飛劒)이 아니었다.
차이가 있었다. 단순히 수중의 검을 진기를 실어 던졌다고 해서 저런 결과가 나타나지는 않는다. 아무리 막강한 공력을 실어 보냈다고 할지라도 몇 그루의 나무를 찰나간에 베어내면서 그 나무 뒤로 숨는 자를 해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일은 오직 어검술만이 할 수 있었다.
검을 만지는 사람들이 평생을 두고 바라는 검의 최고 경지.
그것이 바로 어검술이다.
검을 비롯한 무기(武技)를 수련하는 사람들이 꿈꾸는 것은 자신의 무기(武器)와 하나[一體]가 되는 것이다. 검을 수련하는 사람은 당연히 검과 하나가 되는 것을 꿈꾼다.
그렇게 내가 검이며, 검이 내가 되는 경지를 일러 신검합일(身劒合一)이라 한다.
검화(劒花)를 피워 검강을 만들어내는 경지도 바로 이즈음에서 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그러한 신검합일이란 지고(至高)한 검도 또한 어검술의 입문(入門)에 불과하니, 어검술이란 그렇듯 지난(至難)한 검도의 최상승공부였다. 그 어검술도 어검(馭劒)과 어검(御劒)으로 다시 나뉘게 되니 그 고심한 도리는 이제 고수들이 속출하는 가운데에서 자연히 보게 될 터이다.
그런데 한효월의 나이에 이미 어검술을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인가.
'내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일이로구나!'
감천형은 내심 머리를 저었다.
하지만 더 이상 머뭇거리고 있을 여가가 없었다.
한효월이 이미 앞서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 * *
휙휙!
무섭게 바람이 스쳐 간다.
옷자락이 찢어질 듯 펄럭이고 얼굴에 와 부딪는 바람이 세차다 못해서 따가울 정도. 그러나 한효월은 더욱더 급박하게 몸을 날렸다.
밤하늘을 밝히는 화광(火光)이 충천하고 있음을 본 까닭이다. 그것이 맹주부가 있는 방향임을 안 그이기에 감히 망설일 수가 없었다.
과연 맹주부가 불타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그 맹주부에서는 간간이 고함 소리와 비명이 들려왔으며, 날카로운 금철(金鐵)이 부딪는 소리가 끊이지 않아 흉험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음은 분명했다.
맹주부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원래 정문은 닫혀 있고 좌우의 측문을 이용하며 그 측문에는 지키는 위사들이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훌훌…… 한효월이 허공을 가로질러 맹주부로 날아들었다.
주위를 훑어본 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살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여기저기에 쓰러진 것은 모두 맹주부의 위사 차림을 한 사람들. 그들의 주검은 문 앞에서부터 안쪽으로 널려 있어서 강적이 뚫고 들어갔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왔다.
"이런 빌어먹을!"
천수단혼 좌백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적은 교활하게도 구대문파의 고수들이 떠나고 감천형마저 고수들을 이끌고 맹주부를 비운 사이에 습격해 왔다.
그렇지 않아도 연일 계속되는 변고에 긴장의 연속, 정신적으로 피로할 대로 피로해 있던 맹주부는 허를 찔려 그야말로 허무하게 무너졌다.
그러나 그것은 허무한 것이 아니었다.
적은 그러한 일을 가능케 할 만큼 충분히 강했다.
많은 고수들이 흩어져 있다고는 할지라도 아직 맹주부 내에는 많은 인원이 남아 있었다. 잡일을 하는 사람을 뺀다고 할지라도 근 백 명에 가까운 무림고수들이 남아 있으니 그 실력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적은 맹주부를 무인지경처럼 유린하고 있었다.
떼로 몰려온 것도 아니었다.
좌백이 본 것은 불과 다섯 명의 적뿐이었다.
처음 그와 상대한 젊은 청년은 충분히 상대할 만했다.
하지만 뒤이어 나타난 붉은빛 장포인의 손에 들린 두 자루의 기형검(奇形劒)은 정말 상대하기가 거북해서 연달아 암기를 발출하고서야 겨우 버틸 수가 있었다.
그런 고수 다섯이 한꺼번에 날아들자 일반 무사들이 백 명 있어도 의미가 없었다. 천 마리의 양 떼 속에서는 한 마리의 호랑이만 있어도 그 위력은 빛을 발하는 법이다.
"으악……."
갑자기 뒤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좌백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이미 견딜 수 없어서 전원(前院)은 버리고 후원으로 후퇴한 마당이었다. 여기서 무너지면 맹주 부인의 거처인 아취소축과 독고경의 화경루가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린다.
죽어도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를 비롯한 맹주부 내에 남아 있는 천외유자 등의 장로가 사력을 다해서 후원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뒤에서 비명 소리라니?
"또 있었다는 말인가?"
좌백이 신음을 흘렸다.
"흐흐흐…… 이까짓 맹주부를 무너뜨리는 거야 우리 다섯으로도 충분하지! 더 이상 무슨 인원이 더 필요할까?"
홍포인이 음산하게 웃어댔다.
말이야 웃는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손은 조금도 쉬지 않았다.
두 개의 손이 하나인 듯 움직이면서 실제로는 백 개 천 개가 된 듯이 그렇게 무섭도록 빠르게 움직여 뱀의 몸체와도 같이 꼬인 검신(劒身)에서 검광을 뿌려 좌백을 핍박한다.
별똥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좌 당주! 안으로 들어가 부인을 지키게!"
천외유자 곽도광이 날아들었다.
그처럼 위엄있고 당당하던 그였다.
하지만 그도 이미 부상을 입어 어깨에서 가슴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양할 계제가 아니었다.
맹주부 내에서 돌아가신 사부의 부인인 사모(師母)님을 지키지 못한다면 죽어서라도 사부의 낯을 어떻게 볼 것인가.
좌백은 땅을 박차고 솟구침과 동시에 신형을 틀어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안쪽에서 비명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담장 안으로 넘어서자 후원을 지키고 있던 위사들 중 이미 십여 명이 피를 뿌리고 쓰러져 있음이 눈에 들어온다. 그중에는 그가 믿는 순찰당의 제이부당주인 비룡객 나곤의 모습도 있었다.
담장을 다시 하나 넘자 아취소축으로 이르는 정원에서 2, 30명가량의 사람들이 한데 엉겨 혈전을 벌이고 있음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이 마지막 남은 맹주부의 위사들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들을 이끌고 있는 것은 호맹위대의 수장인 철적신검 호천성이었다.
그는 이미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데, 그가 상대하고 있는 흑의경장을 한 자의 검은 무섭도록 쾌속(快速)하여 철적신검은 거의 저항조차 하기 힘든 상태로 연신 물러나고만 있었다.
"손을 멈추지 못할까?"
좌백은 또 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저지선을 뚫고서 아취소축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고함치면서 손을 휘둘렀다.
고막을 찌르는 날카로운 음향이 일면서 푸른빛이 그의 손에서 쏜살같이 그 인영에게로 날아갔다.
그 위세는 범상치 않아 막 아취소축으로 들어가려던 인영은 슬쩍 몸을 움직여 그 빛을 피해냈다.
파파팡!
새파란 불꽃이 일면서 기둥에 3개의 수리검이 차례를 두고 틀어박혔다.
"호, 이게 천수단혼인가? 가소롭군……."
좌백이 자신의 앞으로 날아 내림을 보자 흑의인이 코웃음 쳤다.
나이는 오십이 될까 말까.
눈은 음침하다. 얼굴은 광대뼈가 튀어나왔고 매부리코에 얄팍한 입술. 게다가 대머리다. 누가 봐도 좋은 인상일 수가 없는 그 얼굴의 흑의인은 말과 동시에 막 내려서는 좌백의 가슴을 향해 일장을 쳐왔다.
그것을 본 좌백의 안색이 달라졌다.
고수는 한 수만 보면 상대의 수준을 알 수 있다.
냉막한 흑의인의 일격은 얼핏 보면 별것이 아닌 듯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일격은 무섭게 빨라서 일장을 쳐오는가 싶은 순간에 이미 좌백의 가슴에 그 세력이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단혼일뢰(斷魂一雷)?"
놀란 외침과 함께 좌백은 빙글 몸을 돌리면서 반 걸음 옆으로 몸을 틀어 그 기세를 빌어 손을 수도로 만들어 상대의 손목을 끊어갔다.
유성이 떨어지는 것 같은 속도였다.
흑의인은 그의 반격에 놀란 듯 어, 하는 소리를 흘려내더니 이미 그 순간에 공세를 거두고 신형을 틀어서 그 탄력으로 1장 밖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가 물러난 것은 뒤가 아니라 옆이었다. 그렇게 옆으로 물러난 그는 무서운 속도로 땅을 박차고 아취소축의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와장창!
3장가량의 거리를 찰나간에 가로지른 그는 아취소축의 문짝을 간단히 부수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셈이 된 좌백은 다급한 외침을 터뜨리면서 그의 등을 향해서 일장을 쳐내면서 뒤를 따랐다.
그런데 그 순간 흑의인이 몸을 틀었고 그것과 동시에 검광이 좌백에게로 날아드는 것이다.
또 속았음을 깨달은 좌백은 노해서 대갈일성, 고함침과 동시에 소천성(小天星)의 공력을 운용하여 적을 공격했다.
"아악!"
그런데 뜻밖에도 적은 그의 일장을 그대로 가슴에 맞고는 단말마의 비명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으윽? 넌?"
그 얼굴을 본 좌백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믿기지 않게도 그의 일장에 가슴이 으스러진 상대는 흑의인이 아니라, 자면성모의 옆을 지키는 두 사람의 검비(劒婢) 중 하나인 소옥(小玉)이었던 것이다.
원래, 검비 둘은 사태가 급박해지자 문 뒤에 숨어 있다가 흑의인이 날아들자 그를 공격했었다. 하지만 실력 차이가 너무 나서 흑의인은 오히려 그녀를 잡아서 좌백의 공세에다 밀어버렸던 것이었다.
상황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소옥의 가슴을 친 좌백은 그 순간에 흑의인의 일장이 자신의 가슴을 치는 것을 봐야 했다.
파앙!
철퇴가 가슴을 치는 충격.
"우욱!"
눈앞에서 별똥이 튄다.
상대는 너무도 교활하고도 막강했다. 그의 일장은 또다시 좌백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절망이다.
평소라면 이렇듯 당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사모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돌보지 않고 서두른 것이 화를 자초했다.
하지만 그는 건곤무적이라고 불리던 독고해의 제자다. 건곤(乾坤)이라 함은 하늘과 땅을 일컫는다. 하늘과 땅을 통틀어 무적이라고 이름하였던 사람의 제자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찰나의 순간, 좌백은 상대가 자신의 가슴을 친 세력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그 힘에 전신을 맡겨 버렸다. 반발력이 없는 물체는 한쪽으로 힘을 받으면 그 반대쪽으로 넘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좌백의 신형도 그러했다.
그는 뒤로 넘어졌고 그 힘을 이용하여 한쪽 발로 땅을 차듯 밀었다. 뒤로 넘어지던 신형이 핑글, 옆으로 돌았다. 그 일련의 동작은 자연스럽기 이를 데 없어 위기일발의 순간에 좌백은 상대의 일격을 피해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넘어지면서 손을 흔들었다.
파파팟!
그의 소매 속에서 새파란 빛이 그물처럼 폭출되어 흑의인을 공격해갔다.
흑의인의 눈에 놀람이 치밀었다.
그러나 비명이 터진 것은 흑의인에게서가 아니라 그의 손에 잡힌 검비 소옥에게서였다. 이미 좌백의 일격에 빈사지경인 그녀를 방패로 이용하여 좌백이 발출한 암기를 막아낸 것이다.
2층 누각인 아취소축은 독고해의 부인인 봉설란의 뜻에 의해서 호화롭지도 그렇다고 그렇게 큰 것도 아니었다. 그 내부 또한 당연히 클 리가 없다. 아래는 대청이 있고, 그 대청은 객청(客廳)으로 사용된다. 후전에 몇 개의 방이 있고, 그 가운데 있는 통로를 통하여 2층 봉설란의 침실로 통하게 된다.
좌백이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때 흑의인은 이미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를 비웃듯 흑의인은 아취소축의 내부로 진입을 하고 있었다.
"아악!"
또다시 구슬픈 비명이 터져 나왔다.
두 명의 검비 중 하나인 소령(小鈴)이 사력을 다해 그 흑의인을 막다가 쓰러지는 소리.
흑의인은 소령의 가냘픈 목을 움켜쥔 채로 힐끗 좌백을 쳐다보았다. 그 눈은 사악하게 웃고 있었다.
소령은 혀를 빼물고서 고개를 떨군 상태.
좌백과 그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 그는 소령을 좌백을 향해 집어 던졌다.
동시에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가 2층으로 올라감은 보나마나.
좌백은 격노하여 몸을 날렸다.
이미 소령이 죽었음은 자명하다. 그녀를 돌볼 틈이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맹주 부인인 봉설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는 죽어서라도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무슨 낯으로 사부를 볼 것인가?
슈파팟!
그의 소매 속에서 다시금 괴이한 음향이 일며 서너 줄기의 한광(寒光)이 폭사되어 날아갔다.
그것은 호선(弧線)을 그리면서 통로를 사라졌다.
"윽!"
나직한 신음이 통로 안쪽에서 들려왔다.
계단.
아무도 없다.
좌백의 신형이 계단을 밟지 않고 그대로 치솟았다.
심중은 불에 타는 듯 다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2층 객층의 문이 부서져 있었던 것이다.
"으음……!"
그가 신음을 흘렸다.
흑의인이 사악하게 웃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봉설란이 창백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음이 보인다. 그리고 그 흑의인은 봉설란의 옆에서 그녀의 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사악한 웃음으로 문 앞에 선 좌백을 조롱하면서…….
"이제 오나?"
그가 교활하게 웃었다.
"어디서 그 더러운 손을…… 비키지 못하겠느냐?"
좌백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길로 신음하듯 내뱉으며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오오, 저런…… 한 걸음만 더 다가와 봐라."
흑의인이 이를 드러내 놓고 하얗게 웃었다.
동시에 그는 봉설란의 목을 움켜쥐었다.
봉설란의 창백한 얼굴이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아까의 계집도 앙탈하긴 했지만 아주 간단히 목이 부러지더군. 어디 맹주 부인의 목은 얼마나 단단한지 시험해 보겠나? 좌 당주
나으리?"
흑의인이 냉소를 터뜨렸다.
좌백은 그 자리에 못 박혔다.
감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정말 자신의 머리를 부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판단 잘못이다. 외곽을 방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그것이 뚫릴 가능성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사모를 경동시키지 않기 위해서 아취소축 안에는 고수들을 배치하지 않았었는데…….
그것이 이런 결과를 낳을 줄이야.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다.
우우우∼!
바깥에서 용음(龍吟)과도 같은 긴 장소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비명이 이는가 싶더니 갑자기 맹주부 전체를 휩쓸던 비명 소리가 마치 장터에 물을 뿌린 듯 일순 조용해졌다.
이것은 실로 괴이한 일이라 좌백뿐 아니라 흑의인의 얼굴도 달라졌다.
보기 드문 고수가 나타났음은 불문가지인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시선이 문 쪽으로 향함은 인지상정일까.
그때, 목줄을 움켜쥐어 사색인 봉설란.
거의 혼절 직전인 것으로 보이던 그녀의 눈에서 싸늘한 빛이 임을 흑의인은 물론 좌백조차도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