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九首 봉황지미(鳳凰之迷) (11/113)

第九首  봉황지미(鳳凰之迷)

-큰 별이 떨어지다.

새로운 의혹만 끊임없이 일어나다.

 피진거를 떠난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서 일단의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굳은 얼굴로 앞서 달려오고 있는 것은 뜻밖에도 감천형의 사제이자 무림맹 순찰당주인 천수단혼 좌백이었다.

 "사형?"

 감천형을 본 천수단혼 좌백이 멀뚱한 얼굴이 되었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묻던 감천형은 갑자기 안색이 달라졌다.

 "설마 맹주부에 무슨 일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천수단혼 좌백은 무림맹 경내를 순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던 중 정체 불명의 인영 하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는 앞을 가로막는 맹주부의 위사를 연달아 세 명이나 살해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맹주부의 위사는 일반 강호의 무사가 아니다. 쉽게 말해서 바지저고리와는 다른 존재인 것이다.

 그런 그들을 간단히 처리하고 달아난 그를 쫓아 천수단혼 좌백은 여기에 이르렀다.

 "그자가 이리 왔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이 부근까지 와서 놓치고 말아 지금 위사들을 풀어서 수색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형께서는 어떻게 여기에? 설마, 여기가 천기 사백의?"

 천수단혼 좌백은 의아한 얼굴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여기에 천기선생이 은거하고 있음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린 방금 이 계곡을 벗어났는데, 그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으로 오지는 않은 것 같구나."

 감천형의 말에 천수단혼 좌백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럼 놓쳤다는 말인가……."

 "가면서 이야기하지."

 한효월이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은 늘 무게가 있고 허튼소리가 없어서 감천형 등은 그대로 따랐다. 수색은 계속되었고, 한효월과 감천형, 그리고 좌백은 그 자리를 떠났다.

 산길이 그들의 앞에 놓인다.

 "천하십왕이 그렇게 가공할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그런 존재들이 강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일이로군요……."

 그 길을 걸으며 좌백이 중얼거렸다.

 그는 방금까지 감천형으로부터 천기선생이 한 말을 전해 들은 것이다.

 "사숙께서는 그들 중 누가 더 혐의가 큰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좌백에게 설명을 마친 감천형이 한효월을 보면서 물었다.

 "천하십왕이 군림하고 있을 때는 그들에 대한 평가가 강호상에 유전(流傳)된 적이 없고, 그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지난 세월 동안 한 번도 서로 만나본 적이 없었지. 이렇게 외부에 알려진 천하십왕의 행적으로 미루어보자면…… 만약 그들이, 개개인이 천하군림(天下君臨)의 능력을 지녔다는 그들 중 단 몇 사람이라도 서로 만났다면, 그래서 힘을 합할 수가 있었다면 오늘의 국면은 충분히 조성할 수가 있었겠지."

 감천형의 물음에 입을 연 한효월은 문득 미간을 찡그렸다.

 계곡을 돌아 나오면서 눈으로 쏘아 들어온 햇살이 눈부신 것일까.

 주변을 잠시 돌아본 그는 말을 이었다.

 "내가 그들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제아무리 그들이라고 할지라도 혼자서는 오늘날의 국면을 조성해 낼 수 없을 것 같아."

 "몇 사람이 연합을 했을 거라는 말씀입니까?"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지."

 감천형의 물음에 한효월은 다시 미간을 찡그렸다. 뭔가 생각을 할 때 가진 습관인 듯했다.

 "왜냐하면, 독고 사형을 해한 것이 제천교라면…… 객관적으로 이미 천하십왕 중 일개인의 힘을 넘어서는 것이니까."

 그의 말은 자못 자명하다.

 건곤무적, 중원무왕이라고까지 일컬어졌던 독고해는 이미 그 개인이 아니었다. 천하무림맹의 맹주였던 그였다. 그런 그가 쓰러졌다면 그를 쓰러뜨린 힘은 더욱 거대하고 크다고 봐야만 할 것이었다.

 "……."

 무거운 침묵.

 그들은 잠시 말없이 걷기만 했다.

 뿅! 뿅! 뾰르르…….

 새소리가 청랑(晴朗)하다.

 코끝을 스치는 푸른 풀 내음도 자못 싱그럽다.

 그 소리 외에는 흙을 밟는 미약한 소리만이 그들의 뒤를 따른다.

 그러던 중, 문득 감천형이 한효월을 보았다.

 "혹시, 사숙께서는 천하십왕에 대해서 미리 알고 계셨던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보이나?"

 한효월은 감천형의 물음에 희미하게 웃어 보이고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잠시 쉬어갈까? 경치가 좋군."

 그리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갑자기 전혀 엉뚱한 소리를 했다.

 감천형 등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산길에 있는 바위에 가볍게 걸터앉은 한효월은 옛이야기를 하는 할아버지와 같이 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천하는 넓고 넓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기인이사(奇人異士)가 모래알처럼 많으니 어찌 그 범위를 단순히 몇몇 사람에게만 국한시킬 수 있을까? 어차피 당금의 국면은 무공만으로 조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닌즉,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우리가 아는 사람 중에도 그런 능력자는 있을 수 있겠지."

 그의 말에 감천형이 놀라 중얼거렸다.

 "우리가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결코 둔한 사람이 아니다.

 다음 순간, 좌백이 안색이 돌변하여 소리쳤다.

 "설마, 사숙께서는 사백을 의심하는 건……?"

 한효월은 태연하다.

 그것뿐만 아니라, 왜 아니냐는 듯 희미하게 미소까지 짓는다.

 "의심함은 옳지 않으나, 경계함으로써 손해볼 것은 없지 않을까?"

 "아무리 그런 일까지는……."

 감천형이 신음을 흘렸다.

 꿈에서라도 생각지도 못해본 일이다.

 하지만, 막상 생각을 하니 사백에 대해서 그가 아는 것은 너무도 없었다.

 이래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갑자기 알던 모든 것이 모호해지는 느낌이다.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우리가 아는 사람 중에는 그런 사람이 또 있지."

 한효월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그게 누굽니까?"

 평소 말이 없던 좌백마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봉황문주(鳳凰門主)."

 한효월이 말했다.

 "봉황문주라면 설마 그……."

 감천형의 경악이 뒤를 잇는다.

 "맞아. 천기선생이 창건했다는 그 봉황문. 봉황문을 천기선생이 창건했다면 분명히 간단한 문파는 아니라고 봐야겠지? 그렇다면, 지난 20년의 세월 동안 봉황문의 힘은 괄목할 만한 것이 되었을 것이고…… 물론, 이것은 천기선생이 봉황문을 맡길 만한 사람이라면 간단한 능력을 가지지 않았으리라는 전제 하에서 가능한 일이라는 단서는 붙지만."

 잠시 말을 끊었던 그는 문득 미간을 찡그린다.

 "어쩌면 상황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할 수도 있겠지……."

 말끝을 흐린 한효월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잠시 천색(天色)을 살핀 그는 시선을 돌려 감천형과 좌백에게 말했다.

 "때가 된 듯하군. 이만 가볼까?"

 어디로 가자는 것인지 미처 생각지 못한 그들은 때라는 말에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효월을 따라나섰다. 하지만 두어 걸음을 가지 않아서 그들의 얼굴은 묘하게 변했다.

 한효월이 가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숙, 이 길은……."

 감천형이 입을 열자, 한효월이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피진거로 돌아가는 거야."

 그는 감천형을 보면서 싱긋 웃었다.

 "봉황문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으니, 늦기 전에 피진거로 돌아가서 그에 대해서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과 함께 그는 걸음을 빨리했다.

*   *   *

 "저, 저건?!"

 발길을 돌리던 감천형의 안색이 갑자기 돌변했다.

 "맙소사! 저건 피진거가 있는 쪽이로군요!"

 옆에서 좌백이 부르짖었다.

 소리는 늦고 행동은 빨랐다.

 감천형이 가장 먼저 몸을 날렸고, 한효월과 좌백이 거의 동시에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향하는 피진거, 그곳에서는 검은 연기가 무럭무럭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만큼 떨어진 곳에서 보인다면 작은 규모의 불길은 아닐 터이다.

 감천형은 굳은 얼굴로 진세를 통과했다.

 진세는 이미 파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진세를 통과하기 전에 부근을 수색하고 있던 맹주부의 위사 둘이 그 앞에서 피살체로 발견된 다음이다. 얼굴이 펴질 리 없었다.

 "……!"

 진세를 통과하자마자 감천형의 얼굴은 경악으로 다시 굳어진다.

 넘실거리는 불길이 피진거를, 좀 전까지 천기선생이 있던 그 모옥(茅屋)을 온통 휘감고 있었다. 모옥이라는 것은 지붕을 풀로 이은 집이니, 쉽게 말해서 초가다. 일단 불이 붙으면 걷잡을 수 없음이 당연하다.

 한달음에 모옥 앞의 화원을 가로질러 모옥에 당도한 감천형은 그 앞에 전신의 피를 모조리 다 쏟아낸 듯 피를 흘리며 쓰러져 죽은 도동을 발견하고는 또다시 경악했다.

 "탓!"

 그는 한입 진기를 거세게 들이마시고는 망설이지 않고 그 불바다가 된 모옥 안으로 뛰어들었다.

 "사형!"

 뒤에서 좌백의 놀란 외침이 들려왔다.

 화르르르-

 세찬 불길이 단숨에 그의 전신을 감아온다.

 감천형은 전신의 진기를 끌어올려서 호신벽(護身壁)을 이루게 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이 온통 불길이었고 이미 바닥까지 불길로 덮였다. 잠시라도 그 자리에 서 있다면 바로 불길이 그를 휘감아 버릴 터이다.

 펑!

 반쯤 부서져 있던 문짝이 감천형의 일장에 벽과 함께 터져 나갔다.

 "사숙!"

 감천형이 소리쳤다.

 대청에 이어진 방.

 침대가 놓인 그 방도 훨훨 타오르는 불길에 휘감긴 지 오래였다.

 하지만 감천형을 놀라게 한 것은 그 가운데 놓인 윤의(輪倚)다. 바로 조금 전까지 천기선생이 타고 있었던 그 윤의에는 한 사람이 죽어 있었다. 가슴에는 칼이 박혀 있었고 침대와 함께 타오르는 불길에 이미 사람의 형상이 아닌 그…….

 그가 누구인지를 묻는다는 것은 무의미했다.

 쿠콰콰아…….

 바로 그 순간에 지붕이 통째로 무너졌다.

 "사형!"

 좌백이 놀라 고함쳤다.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간 감천형이 소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붕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불덩어리가 폭발하듯 그 가운데에서 튀어나왔다.

 "사형……."

 좌백이 신음했다.

 머리가 온통 그슬린 모습으로 감천형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불바다로 화해 완전히 무너져 버린 모옥을 본다.

 "사백께서 돌아가셨다……."

 감천형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사백이 말씀입니까?"

 좌백이 놀라 불구덩이로 화한 모옥을 봤다.

 "……."

 감천형은 답을 하지 않았다. 시신이라도 구해 나올까 했었는데 그도 못했다. 대체 누가 그사이에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그런데 사숙은 어디로 가신 거지?"

 좌백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놀라 감천형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이다.

 그들과 거의 함께 달려왔던 한효월의 모습이 보이지를 않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불타는 모옥의 뒤에서 일진 격투음이 들려왔다.

 바람이 일면서 감천형과 좌백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번개처럼 사라졌다.

 감천형은 이미 여러 번 이곳에 왔었지만 한 번도 모옥의 뒤편으로 돌아가 본 적은 없었다.

 모옥의 뒤편도 화원이었다.

 정성 들여 가꾼 것이 역력한 화원. 거기에는 보기 드문 약용 식물들이 가득했다. 아마도 천기선생은 이 약초들로 연단(練丹)을 했을 터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들도 엉망으로 박살이다.

 그리고 그 엉망이 된 화초밭에 흑의인 두 명이 쓰러져 있었다.

 그 두 명의 흑의인이 쓰러진 가운데 한효월이 백의 유삼 자락을 펄럭이면서 우뚝 서 있는데, 안색이 침중하다 못해 창백해 보였다.

 "사숙님!"

 먼저 당도한 좌백이 다급히 소리쳤다.

 독고해의 세 제자 중 그의 경공이 가장 뛰어났다. 암기가 전문인 그는 암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경공에 심혈을 기울여 감천형보다 경공 방면에서는 더 높은 성취를 이룬 것이다.

 "건드리지 마라, 사숙께선 내상을 입으셨다!"

 그의 뒤를 따라 당도한 감천형이 그를 말렸다.

 그 순간, 한효월이 길게 한숨 쉬면서 천천히 눈을 떴다.

 "지독한 음한지기(陰寒之氣)로군……."

 "사숙! 괜찮으십니까?"

 그의 중얼거림에 감천형과 좌백이 일제히 소리쳤다.

 "난 괜찮다."

 한효월은 눈길을 돌려 그들을 바라보면서 쓴웃음을 머금었다.

 "기습을 당할 줄은…… 내가 너무 적을 얕보았다. 이런 우(愚)를 범하다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한효월이 괜찮은 듯함을 보자 감천형이 물었다.

 원래 한효월은 감천형과 좌백이 앞서감을 보자 그들을 따르지 않고 우회하여 적이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달려갔었다. 그는 이미 피진거에 왔을 때 지세를 살펴두었었으므로, 피진거를 공격한 자들이 있다면 그들이 돌아갈 만한 퇴로를 수색해 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헛되지 않아서 그는 과연 암중에 숨어서 불타는 모옥을 감시하고 있는 이 흑의인들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들을 제압하는 순간에 옆에서 기습이 있을 것임은 천하의 한효월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만에 하나, 그의 무공이 조금만 낮았더라도 상황은 전혀 다르게 전개될 수도 있었다.

 "적은?"

 "그쪽도 쉽게 가지는 못했겠지……."

 상대도 타격을 입었을 것이라는 이야기.

 좌백은 이미 쓰러진 흑의인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다운 기민함이었다.

 감천형은 한효월에게 다시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 그런 판단을 하기 어려울 것인데, 그 모든 것을 읽고 있었다는 듯이,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적을 잡아내다니…… 도대체 누가 그를 산속에서 글이나 읽던 일개 백면서생(白面書生)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사숙께서는 이런 상황을 이미 짐작……?"

 "한 놈은 살아 있군요!"

 감천형이 한효월에게 묻는 순간에 좌백이 소리쳤다.

 하나는 즉사했지만 하나는 살아 있었다. 혈도가 짚이긴 했지만 무사한 것을 보니 한효월이 그를 제압해 둔 듯했다.

 단서가 생긴 것이다.

 흑의인의 나이는 30대 후반쯤으로 보였다.

 날카로운 생김에 강인한 턱을 가졌고 양쪽 태양혈이 불룩한 것으로 보아 이미 내공도 상당한 수준이 분명했다. 다만 눈꼬리가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것으로 보아 성정(性情)이 사나울 것은 분명할 듯.

 "너는 누구냐? 무엇 때문에 이곳을 이렇게 만들었지? 천기선생을 죽인 자는 누구냐?"

 좌백이 그를 다그쳤다.

 "……."

 흑의인은 눈을 뜨지 않았고, 입을 열지도 않았다.

 그러자 좌백은 코웃음 쳤다.

 "흥! 쉽게 대답하는 것이 좋을걸? 난 아직까지 내 손에 걸려서 입을 열지 않는 자는 본 적이 없다."

 말과 함께 좌백은 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우둑!

 흑의인의 견갑골이 그의 손길에 따라 뒤로 물러났다. 흑의인의 얼굴에서 금세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입술을 세차게 물고 있지만 고통의 빛이 역력했다.

 "착골(錯骨)은 기본이지. 하지만 분근(分筋)의 고통이 더해져서 분근착골(分筋錯骨) 하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한번 볼까?"

 좌백이 코웃음을 치면서 손에 힘을 가했다.

 흑의인의 전신이 고통으로 덜덜 떨렸다.

 바로 그 순간이다.

 당! 따당!!

 고막을 찌르는 강렬한 금음(琴音) 한줄기가 들려왔다.

 "으악!"

 흑의인의 주위에서 흙먼지가 풀썩, 일어나는가 싶더니 흑의인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의 칠공에서 붉은 피가 쏟아졌다.

 "누구냐?"

 감천형과 좌백이 대노하여 좌우로 흩어졌다.

 금음이 들려온 곳으로 덮쳐 가는 것이다.

 하지만 한효월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얼굴을 굳힌 채로 흑의인의 입에다 귀를 바짝대고 있었다.

 "나, 나는…… 봉(鳳)……."

 흑의인은 그 말을 남겨두고 숨을 끊었다.

 누구도 그의 입을 열 수는 없을 것이었다.

 "봉이라…… 봉황문이라는 건가?"

 한효월은 미간을 찡그린 채 중얼거렸다.

 그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감천형과 좌백이 돌아왔다.

 "아무것도……."

 한효월이 그들을 돌아보자, 감천형이 입맛을 다셨다. 도무지 면목이 없었던 것이다. 전에는 이렇지 않았었는데 이 어린 사숙을 만난 다음부터는 정말 되는 일이 없었다.

 "결국 우리가 한발 늦게 온 셈이 되었군. 이걸로 봉황문에 대하여 알 수 있는 단서가 끊어진 셈인가?"

 한효월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중얼거렸다.

 모옥은 이제 불길에 휩싸이다 못해서 아예 재로 화해가고 있었다. 천기선생의 시신은 그 불로 인해서 자동으로 화장을 하는 셈이었다.

 '그간 살펴본 바로는 이 사숙의 지혜는 정말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하다. 천기 사백에 비해서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천기 사백도 그것을 알아보았기에 처음 본 그에게 자신이 아끼던 천기단서를 내주었겠지. 그런 사숙이…… 봉황문에 대해서 빠뜨리고 갔다가 다시 돌아올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에 잠겨 있던 감천형은 새삼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사숙께서는 지금의 이 사태를 예측……!"

 그가 막 입을 여는 순간이다.

 "귀하의 능력은 정말 뜻밖이로군……."

 어디선지 메아리와 같은 여운을 담은 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웅웅 산곡을 타고 메아리치기는 하지만 맑고 높은 것이 여인의 것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손을 떼는 게 당신을 위해 좋을 것이오. 더 이상 관여한다면 호호호…… 그때는 정말 당신의 목은 온전하기 힘들걸?"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계곡을 메아리치면서 다시 들려왔다.

 '어디서 들리는 거지?'

 감천형은 사나운 눈길로 주위를 쓸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어디에서 그 소리가 들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좌백도 그것은 마찬가지인 듯했다.

 "회음전성(廻音傳聲)이로군."

 나직이 중얼거린 한효월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쪽을 바라보면서 낭랑히 웃음을 터뜨렸다.

 "아름다운 음성이로군. 그런 능력이 있다면 언제라도 와서 가져갈 수 있지. 지금이라도 드릴 수 있는데 가져갈 의향이 있소?"

 그의 대꾸가 뜻밖이었는지 음성은 다시 들리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던 한효월은 검미를 슬쩍, 찌푸렸다.

 "교활하군. 그새 내가 추적한 것을 알았다는 건가."

 그의 얼굴이 굳어짐을 보고 감천형이 물었다.

 "사숙, 음성이 들려온 곳을 알아내셨습니까?"

 "놓쳤어. 내가 추적하는 것을 알고는 자리를 옮겨 버린 것 같군."

 한효월의 말에 좌백이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회음전성이라는 것은 소리를 발출하여 다른 물체에 메아리를 치게 만들어 상대에게 전달하는 방법이다. 특정한 대상에게 전달하기보다는 메아리처럼 넓게 퍼지는 데다가 소리가 난 곳이 반사되면서 감추어지기 때문에 그 발원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그것을 추적했다는 건가?

 감천형과는 달리 좌백은 한효월과 같이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그의 능력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하는 터라 그 놀람은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매케한 연기는 아직도 검게 피어 오르고 있었다.

*   *   *

 불타고 남은 재 속에서도 발견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천기선생으로 짐작되는 시신 한 구. 감천형이 보았던 그 시신 외에는 철저하게 모든 것이 불타 버렸다.

 단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누가, 왜 천기선생을 죽였는지조차.

 맹주부로 돌아오면서 한효월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맹주부로 돌아온 그들을 맞이한 것은 천무였다.

 그는 감천형에게 은밀히 독고경을 보살피도록 당부받은 바 있었다.

 "사매가 깨어나긴 했습니다만, 아무도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직접 가마."

 감천형이 나섰지만 허사였다.

 시녀가 고개를 짤짤 흔들었던 것이다.

 "아무도 만나지 않으시겠답니다."

 그때 나선 것이 한효월이다.

 "가서 전하거라. 내가 만나자 한다고."

 "예."

 시비 운아는 황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독고경이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그녀를 돌본 사람이 그임을 알고 있었고 감천형 등이 깍듯하게 그를 받드는 것을 본 다음이라서 거역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의외에도 독고경은 한효월을 바로 맞아들였다.

 그녀의 거처인 화경루에도 낙조(落照)가 드리웠다. 방 안은 온통 붉은빛을 띤 금빛으로 가득 찼다. 그 가운데에서 독고경은 창백한 안색으로 그를 맞았다. 원래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이었지만 그 얼굴이 노을 빛을 받자 그녀의 아름다움은 말 그대로 냉염지미(冷艶之美)라 일컬을 만했다.

 "사숙이시다."

 따라 들어온 감천형이 한효월을 소개했다.

 "독고경이 사숙을 뵙습니다."

 한효월을 본 그녀는 일순, 멈칫하는 얼굴이더니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그녀는 아직 침상에 그대로 앉아 있었고 옷매무새는 깔끔했지만 아래는 이불로 덮은 상태라 그 형상은 심히 미묘하였다.

 "몸이 불편하여 예를 갖추지 못함을 양해하여 주시길……."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아마도 사숙이기는 하지만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으니 일부러 말끝을 흐림은 쉬 알 수 있었다.

 "괜찮다."

 한효월은 그녀의 의중을 알고는 조금도 망설임없이 말을 놓았다.

 조금은 미묘한 공기.

 그것을 깨뜨린 것은 감천형이었다.

 "사매, 어제 일은 어떻게 된 것인지 말해 주겠느냐?"

 그 말에 독고경은 미간을 찡그리고서 그를 보았다.

 "어제 일이라니요?"

 "기억나지 않는단 말이냐? 네가 무엇 때문에 냉월장에 갔으며, 왜 나를 공격한 것인지……."

 "제가 사형을 공격했다는 건가요?"

 무슨 소리냐는 듯한 그녀의 표정에 오히려 감천형이 멍청해지고 말았다.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설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겠지?"

 "……."

 독고경은 침묵한다.

 아미가 짙게 찡그려졌다.

 생각을 하려는 듯, 생각을 더듬는 듯했지만 그녀는 이내 눈살을 찡그리며 머리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모르다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생각하려고 하면 할수록 머리가 깨지는 듯 아파오기만 하고……."

 그녀는 괴로운 듯 머리를 움켜잡았다.

 정말 고통스러운 표정.

 "……?"

 괴이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로 감천형은 한효월을 바라봤다. 언제인가부터 그는 어려운 일에 부딪히면 이 어린 사숙을 쳐다보게 되었다.

 한효월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내가 몇 가지 물어봐도 되겠느냐?"

 한효월은 이미 독고경에게 묻고 있었다.

 "……."

 독고경은 머리에서 손을 떼고 한효월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어딘가 이상했다. 고통스러워한다기보다는 뭔지 망연해 보인다고 할까.

 한효월은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차분했다.

 조용하고도 고요한 눈빛.

 그의 눈은 마치 깊은 바다를 보는 듯했다. 깊고도 유현(幽玄)한 안정감.

 그의 눈을 바라보던 그녀는 고개를 끄떡였다.

 "어제 밖으로 나갈 때의 일이 기억나는지 한번 생각해 보아라. 왜 밖으로 나간 것인지……."

 독고경은 그의 말에 다시 한 번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다가 문득 미간을 찡그렸다.

 순간적으로 격한 고통의 빛이 떠올랐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생각해라. 급하지 않다. 편한 마음으로……."

 옆에서 한효월의 말을 듣고 있던 감천형은 그의 말소리에 마음이 안정됨을 느끼고 불현듯 그와 독고경을 다시 보았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도가(道家)의 청정심법(淸淨心法)이라는 것인가?'

 그 실체를 깨달은 감천형은 악연 한효월을 다시 보았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효과는 없는 모양이었다.

 "모르겠어요. 왜 나갔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독고경은 고통스러운 빛으로 다시 머리를 움켜쥐었다.

 "다만……."

 "다만? 다만 무엇이지?"

 "누군가가 나를 불러낸 것 같아요……."

 "그게 누구지?"

 한효월의 물음에 독고경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건 모르겠어요. 생각이 날 것 같다가…… 다시 돌이켜 보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요."

 그녀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래요. 그냥…… 그냥 나가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뒤의 일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요."

 "뭘 했는지도 말인가?"

 "예……."

 "……."

 한효월은 입을 닫았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다니…….

 감천형은 저게 무슨 소리냐는 듯 한효월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효월은 여전히 독고경에게 물었다.

 "근래에 들어서 누구를 만난 사람이 있느냐?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던지……."

 "그런 사람은 없어요."

 그녀가 꿈꾸듯 답했다.

 눈빛이 몽롱히 가라앉고 있었다.

 "쉬는 게 좋겠다."

 한효월이 손을 들자 독고경은 스르르 뒤로 넘어졌다.

 그녀의 수혈(睡穴)을 짚은 것이다.

 그녀를 쉬게 한 한효월과 감천형은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의 얼굴은 바위처럼 굳었다.

 "사숙께서는 지금 사매의 상태를 어떻게 보십니까?"

 "글쎄, 지금 당장 뭐라고 하기는…… 하지만……."

 그가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본 감천형은 그가 뭔가 이미 짐작 가는 것이 있음을 느끼고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다른 사람이 아닌 사매의 일이다.

 "하지만 뭡니까?"

 "……."

 한효월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하늘을 보았다. 천색(天色)을 가늠한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은 듯하니, 잠시 더 두고 보기로 하지."

 그리고 그는 감천형을 보았다.

 "듣자니 사질녀는 남해 관음초의 절진 신니의 제자로 있다가 돌아온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던데, 언제 온 거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한 3개월 정도……."

 "돌아온 후, 그녀의 행동은?"

 "별로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다. 원래 사매의 성정이 조금 쌀쌀한 편이라서 사람들과의 왕래가 별로 없었습니다. 사매의 시비인 운아를 불러서 물어볼까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고개를 젓던 한효월의 눈에 문득 괴이한 빛이 스쳤다.

 2층.

 방금 그들이 내려온 화경루의 그 2층, 정확히 말하자면 독고경이 수혈을 짚여 잠들고 있을 그 방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눈빛이 마주쳤다.

 창문 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그 눈은 그와 눈을 마주치게 되자 급히 사라졌다.

 하지만 천부적인 기억력을 가진 한효월은 그 눈빛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독고경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수혈을 짚어서 잠들게 했었는데…… 그런데 그녀 스스로 해혈(解穴)했다는 것인가?'

 믿기지 않는 일에 한효월은 부지중에 다시 2층 독고경의 침실을 쳐다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창문을 가린 휘장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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