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八首 천하십왕(天下十王) (10/113)

第八首  천하십왕(天下十王)

-전설이 드러나다.

절대고수 십 인이 있어 천하를 위진(威震)하다.

 맹주부.

 언제 폭우가 쏟아졌느냐는 듯 하늘은 맑다.

 그러나 하늘 곳곳에는 아직도 거뭇거뭇 검은 구름이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어서 분을 못다 푼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라도 한바탕 다시 난리를 칠 수도 있어 보인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멀리서 은은히 뇌성이 들리기도 한다.

 그 멀리 울리는 뇌성을 들으며 한효월은 미간을 찡그린다.

 그의 성정(性情)은 조용한 편이다.

 고요함을 좋아하기도 했다.

 조용한 사람은 생각을 많이 한다. 그리고 생각이 깊을 수밖에 없고 모든 것에서 신중하여 실수가 별로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가 젊은이라는 점까지 달라질 수는 없었다.

 그의 눈 아래에는 눈부신 미모의 여인이 눈을 감은 채 잠들어 있었다. 얼음을 빚어 만든 듯한 미모를 자랑하는 그녀는 말 그대로 아름다웠다.

 독고경, 그녀다.

 비록 사질녀(師姪女)라곤 해도 실제로는 나이 차이가 별로 없는 미녀를 앞에 두고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은 또 평범한 일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린 듯 아름다운 얼굴.

 하지만 어딘가 창백한 그늘이 진 얼굴.

 한효월은 세상 모르고 잠든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신형을 돌렸다.

 밖에는 초조히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감천형이다.

 "어떻습니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감천형이 물었다.

 "다행히 별 이상은 없는 듯, 잠시 쉬고 나면 회복될 수 있을 것 같다. 기혈이 불순하지만 이것은 과도한 진력의 소모로 충격을 받은 것 같으니 걱정할 상태는 아니다."

 "정말 다른 이상은 없겠습니까?"

 감천형이 다시 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진력 아니라, 진력 할아버지를 소모해서 탈진이 되었다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공격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한효월의 말속에는 어딘가 숨긴 것이 있는 듯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물었던 것이다.

 "잘 조리하면…… 하지만 혹 모르니 그녀의 동정을 신경 써서 살피도록 하는 게 좋을 듯."

 한효월은 그렇게 말을 맺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어딘가 더욱 깊은 여운을 담고 있는 듯했다.

 달이 어둠 가운데 고개를 내밀었다.

 검은 구름들이 빠르게 이곳저곳으로 힘차게 달려갔다.

 "내가 그곳에 간 것은 홍 낭랑에 관하여 미리 조사를 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였는데……."

 한효월이 말했다.

 그들은 화경루를 바라보는 곳에 서 있었다.

 가산(假山).

 화경루의 앞에는 정원이 있고, 그 정원에는 가산이 조성되어 있었다. 당연히 연못도 하나 거기에 자리했다.

 두 사람은 그 가산에서 화경루를 바라보면서 말을 나누는 중이었다. 한효월의 신분은 아직까지는 맹주부 내에서도 극비였고, 그가 여기에 온 것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화경루에는 불이 밝혀져 있었다.

 시비들이 혼수상태인 독고경을 보살피고 있으리라.

 "거기에는 뜻밖에도 홍 낭랑은 없고 일단의 신비인들만 출몰하고 있어 그 내정(內情)을 탐모(探摸)하던 중, 그들이 사형의 시신 증발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음을 알아내게 되었다……."

 한효월은 화경루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들이 말입니까? 그럼 그자들이 사부님의 죽음과 관계가 있는 게 아닙니까? 그들이 사부님의 존체를 가져간 게 아니란 말입니까?"

 감천형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심중의 경악을 말해 주듯 그의 얼굴은 온통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도 그 일로 인해서 대단히 곤혹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상황으로 볼 때, 그들과 시신의 증발은 관계가 없는 게 확실한 듯하다."

 한효월은 문득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사형을 공격한 자들, 최소한 시신을 맹주부로 보낸 자들은 그들이 확실하다."

 "그들을 제천교라고 부릅니까?"

 묻는 감천형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맞다. 그 흑의녀는 요광성주(瑤光星主)라고 불리더군. 상당한 지위로 보였고……."

 "요광이라면 같은 지위가 일곱 있다는 뜻이로군요."

 "그렇겠지."

 한효월이 고개를 끄떡였다.

 요광이란 북두칠성 중의 일곱 번째 별을 이름이다. 그러니 나머지 여섯 명이 더 있으리라 감천형이 미루어 짐작한 것이다.

 …….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감천형이 물었다.

 "그들과 홍 낭랑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아십니까?"

 "내가 조사한 바로는 그들은 빈집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간단히 말하면 그들은 그 집이 비어 있므로 썼다는 것인데, 이 부분은 조금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다. 한마디로 단정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의심을 면할 수도 없겠지."

 "음……."

 감천형이 침음했다.

 적아난분(敵我難分).

 도무지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느닷없는 사부의 죽음 이후에 모든 것이 다 미궁으로 빠져 버린 것만 같았다.

 생각에 잠겨 있던 감천형은 문득 미간을 찡그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어린 사숙에게 뭔가 기대고 있음을 경각하였던 것이기에. 평소의 그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이 나이 어린 사숙은 말을 하면 할수록 뭐든 다 아는 사람처럼 보여서 믿고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게 만드는 그런 힘이 있었다.

 부지중에 다시 한 번 한효월을 쳐다본 감천형이 입을 열었다.

 "사모님께서 사숙을 뵙자고 하십니다."

 한효월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분이 내가 온 걸 알고 계신가?"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음……."

 "제가, 잘못했습니까?"

 "글쎄, 꼭 잘못했다고 할 수야 없겠지만 당분간 내가 온 것은 널리 알리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서."

 한효월은 그렇게 말을 맺었다.

 그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에는 다 의미가 있었다.

 마지막 말에도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은 당연했다.

*   *   *

 자면성모 봉설란의 모습은 초췌했다.

 천하를 주름잡던 무림맹주의 아내이되, 무림의 사람이 아닌 지방 명문가의 딸. 말 그대로 규방의 규수로서 자라난 그녀는 그 기품으로 무림맹 사람들에게 신망을 얻었다.

 "이렇듯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봉설란이 한효월을 맞았다.

 하늘 같았던 위대한 남편.

 그가 주검으로서 돌아왔다.

 가히 청천벽력. 하지만 맹주부의 안주인으로서 아랫사람들에게 흐트러짐을 보일 수 없으니, 슬픔조차 안으로 삭여야 하는 처지.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에는 처연(悽然)한 기색이 완연하다.

 "……."

 한효월은 자신을 맞는 봉설란에게 말없이 포권하면서 머리를 숙였다.

 "감 대행에게서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고 말씀들었습니다. 부디 선부의 유체를 찾는 것을 도와주십시오."

 "능력은 무슨…… 하지만 제가 능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봉설란은 길게 탄식했다.

 "너무 뜻밖의 변고라, 그분을 믿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할는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점은 아마 감 대행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부의 사제가 되시는 분이 세상에 나오셨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 아닌가 합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한효월은 그녀에게 다시 포권하였다.

 …….

 미망인은 고요히 앉아 있다.

 말 그대로 한 폭의 미인도이다.

 그러나 홀로 앉은 그녀의 얼굴에는 묘한 빛이 어려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방금 한효월과 감천형이 나간 문.

 "너무 젊다…… 이 난국을 헤쳐 나가기에는."

 그렇게 말한 그녀의 얼굴에는 기이한 빛이 서려 있었다. 웃음인 듯도 하고 난감한 듯 보이기도 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보이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라는 것.

 "무림명문이 아니란 말이군."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그렇습니다. 무공도 모르는 분입니다. 하지만 맹주부의 누구도 저분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상하고 좋은 분이니까요."

 "그런가……."

 한효월은 조용히 머리를 끄떡이며 방금 그들이 나온 아취소축을 바라보았다.

 감천형은 그런 사숙을 보았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도무지 뭘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떤 때는 활발한 것 같기도 한데 또 보면 전혀 아니다. 나쁘게 말하면 애늙은이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과는 전혀 느낌이 또 다르다.

 분명한 것은 그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

 문득 감천형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앞에 사제 좌백이 나타난 것이다.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감천형에게 말한 좌백이 한효월에게 가볍게 허리를 굽혀 보였다. 그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예의상 어긋난 점은 보이지 않았지만 단순히 사숙이라는 것만으로는 그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

 "같이 가시겠습니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내가 가지 않아도 대신 설명을 해줄 사람이 올 것 같으니까."

 "대신 말입니까? 누가……."

 그의 물음에 한효월은 희미하게 웃었다.

 "가보면 알게 될 거야. 아직까지는 내가 굳이 전면으로 나설 필요까지는 없어 보이는군. 그럼."

 한효월은 묘하게 말을 맺고는 앞서 나갔다.

 잠시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감천형이 좌백을 향해 말했다.

 "가자."

*   *   *

 취의청에는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을 비롯, 많은 사람들이 모여 감천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밤에 그들을 소집한 이유가 궁금한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이렇게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만은 없는 그들이었다. 뭔가 새로운 사실이 없다면, 어떤 방향으로든 간에 결정을 내릴 때였다. 그것을 그들 모두는 알고 있었다.

 "돌아갈 준비라고 했소?"

 화산의 화산우사 육기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감천형이 고개를 끄떡였다.

 "적들이 우리를 이렇게 모아놓고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결국,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뿐이지요."

 "그게 뭐요?"

 감천형의 말에 초미노인이 되물었다.

 "조호이산(調虎移山), 일망타진(一網打盡)!"

 "음."

 "으음……."

 감천형의 말에 좌중에 무거운 신음이 흘렀다.

 호랑이를 산에서 떠나게 한다. 그리고 한꺼번에 모두를 잡는다…….

 감천형의 말은 그들의 심중을 대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가 아니고 두 가지란 말이오?"

 말은 연결되어 한 가지일 것 같다. 그런데 감천형이 분명히 두 가지라고 한 것을 상기한 화산우사 육기가 되물었다.

 "조호이산의 뜻은 각 파에서 여러분을 떠나게 하고 그 허를 노려 본산(本山)을 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일망타진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 이렇게 모인 여러분을 한꺼번에 모조리 쓸어버리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미친……."

 어이가 없는 듯 곤륜의 운룡대협 고진추가 입을 벌렸다.

 구대문파의 정예 고수, 그 수뇌들이 모인 이곳이다. 그 힘의 막강함은 말할 것도 없다. 손을 쓰려면 그들이 길을 오는 도중에 각개격파했어야만 했다. 그런데 한데 모아놓고 손을 쓴다니…….

 "느낌의 차이입니다."

 감천형이 그의 말을 잘랐다.

 "맹주님의 죽음과 동시에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의 죽음이 맹주부에서…… 각개격파가 아니라, 아예 한군데 모아놓고 힘으로 무너뜨렸다면 아마 그 파장은 경천동지의 위력을 가지게 될 겁니다."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보시오?"

 천외유자 곽도광이 물었다.

 "불가능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게요?"

 "맹룡과강(猛龍過江)! 힘이 없다면, 노리는 바가 없다면 이렇게 힘들여 여러분을 맹주부로 모았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지난 며칠 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것은 사부님의 존체가 사라진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게 무슨 소리요?"

 "아니, 그럼 맹주의 시신을 훔쳐 간 것이 보낸 자들과 다른 자들이란 말이오?"

 놀람이 일었다.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의심 가는 바는 있습니다. 그건……."

 감천형이 말을 끊었다.

 "누가 엿보는 게냐?"

 그것과 함께 천외유자 곽도광이 노성을 터뜨렸다.

 군웅들이 분분히 떨쳐 일어났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 누구도 하수가 아닌지라,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으핫하하……."

 동시에 걸걸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면서 한 사람이 창문을 통해서 안으로 날아들었다.

 "이렇게 통보도 없이 불쑥 찾아들어서 죄송하오. 원래 거지란 것이 배운 바가 없어서 예의에 어두우니 용서하시오."

 나타난 사람이 사람들을 향해서 연신 포권을 해 보이면서 싯누런 이를 드러내고서 웃음을 보였다.

 등에는 커다란 호로(葫蘆)를 지고, 옷은 그야말로 누더기다. 깁고 또 기워서 원래의 천이 무엇인지 모르게 너덜거리는 옷에다 손에는 푸른빛이 감도는 대나무 지팡이 하나를 들었다.

 붉은빛이 도는 얼굴에 주먹코. 백발이었을 그 머리는 온통 까치집이라 언제 머리를 감았는지 알 수 없었고, 그것을 증명하듯이 그가 나타나자 주위에 괴이한 냄새가 진동했다.

 "독행신개?"

 그를 알아본 천외유자 곽도광이 중얼거렸다.

 "핫하…… 아직까지 이 노화자(老化子)를 잊지 않았군! 당신은 여전히 고고한 모습이구려."

 천외유자를 보고 나타난 거지노인이 껄껄 웃었다.

 …….

 놀람이 좌중에 번져 갔다.

 개방이 강호상에서 명목적인 활동을 중지한 것이 이미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까닭이다. 더구나 독행신개라면 천외유자 곽도광과 거의 같은 배분인 강호의 원로다.

 "어서 오십시오."

 감천형이 그를 맞았다.

 "절차를 갖추지 않고 불쑥 찾아들어서 죄송하오. 하지만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서……."

 감천형을 보자 독행신개가 정색을 했다.

 필유곡절(必有曲折).

 아연 긴장이 좌중에 감돈다.

 그가 이 밤에 이렇게 불쑥 찾아온 것은 누가 봐도 심상한 일일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

 "아, 갑자기 머리가 가렵군!"

 독행신개가 돌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머리에서 누룽지와 같은 비듬이 눈 오듯이 펄펄 날렸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기름기가 번지르해진 손에 잔뜩 묻은 비듬을 인상을 찡그리고 쳐다본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훅! 그 손에 묻은 것을 불었다.

 그 사정권 내에 있던 사람들이 모조리 혼비백산해서 소매를 털었다.

 "윽! 이 거지가?"

 초미노인이 발연대로하여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그의 앞에 놓여 있던 찻잔에 비듬이 설탕처럼 떨어져 둥둥 떠오르는 것을 본 것이다.

 그때다.

 "그들이 맹주부로 독고 맹주의 시신을 보낸 것은 강호상의 안녕을 깨뜨리기 위함이오."

 갑자기 독행신개가 정색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이……!"

 막 욕을 하려던 초미노인은 벌린 입을 어떻게 하지를 못해서 눈만 희번덕거렸다. 성질대로면 그대로 덤빌 것이지만 망할! 상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은 것이다.

 '시시한 말이기만 해봐라…….'

 속으로 이를 갈면서 초미노인이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찻잔 속의 찻물에는 비듬이 여전히 빛난다. 그것이 눈에 띄자 초미노인의 얼굴은 다시금 노기로 인해 일그러진다. 차마 발작은 하지 못하고 이를 가는 그 모습은 심히 괴이할 정도.

 "맹주가 죽었으며, 그 주검이 누군지도 모르는 자의 손에 의해 맹주부로 돌아왔다……. 그런 소문은 이미 강호를 뒤흔들고 있소."

 "그 소문이 강호에 흘러나갔단 말이오?"

 화산우사 육기가 놀라 물었다.

 독행신개가 혀를 찼다.

 "그럼 저들이 시신만 보내고 그냥 있을 걸로 알았단 말이오? 설마, 무림맹에서는 그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오?"

 "……."

 실제로 모르고 있었으므로 모두의 입이 얼어붙었다.

 그러했다. 강호상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 일어날 혼란을 우려하여 보안에만 신경을 썼지, 정작 원흉이 비밀을 지킬 리가 없다는 것을 간과했었던 것이다.

 말이 안 되는 실수인지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바로 그러한 혼란이겠고 그 의도는 이미 성공했소. 다만 그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시신이 사라져 버린 점이오."

 경악이 찾아들었다.

 "설마, 그럼…… 맹주의 시신을 가져간 것이 놈들이 아니란 말이오?"

 "아니오."

 "그럼 그게 누구요?"

 "나도 모르오. 다만 놈들이 그 시신을 가져간 것이 누군지 혈안이 되어 찾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소. 그것 때문에 놈들은 여러분을 이곳에 모아두고서도 발동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오."

 "그런……."

 사람들이 신음한다.

 감천형은 굳은 얼굴로 독행신개를 보고 있었다.

 그의 말은 한효월이 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느닷없이 나타난 독행신개.

 그의 말은 좌중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발동? 놈들이 우리를 여기다 모아놓고 일망타진이라도 할 작정이었단 말이오?"

 "아마 그럴 거요."

 독행신개의 말에 초미노인이 코웃음을 쳤다.

 "흥! 미친놈들. 무림맹의 전력에다가 구대문파의 힘을 보태놓고서 싸우겠다니, 그런 닭대가리들이 무슨 일을……."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독행신개가 걸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 닭대가리들이 독고 맹주를 해친 걸 잊지 마시오."

 그 말에 초미노인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독행신개는 말을 하다가 답답한 듯이 문득 머리를 벅벅 긁었다.

 당연히 비듬이 풀풀 날리고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를 탓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 낙양 방면으로는 일단의 고수들이 계속해서 출몰하고 있으며, 그 정체도 제대로 알아내기 힘든 상황이니, 대비를 하는 게 좋을 거요. 본 방의 방주도 이미 개봉(開封) 총단을 떠났소."

 "개방의 용두방주(龍頭幇主)가 말이오?"

 좌중에 놀람이 일었다.

 독행신개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놈들이 발동하기 전에 여러분은 속히 자파로 돌아가 집안 단속을 하는 게 좋을 것이오. 설마 놈들이 빈집을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테니까……."

 그의 말에 군웅들의 안색이 달라졌다.

 가뜩이나 감천형의 말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던 터, 다시 그러한 말을 듣자 가슴이 섬뜩해진 것이다.

 "그럼 이만 가보겠소."

 "잠시만!"

 그가 몸을 돌리자, 감천형이 그를 불렀다.

 "그날……."

 감천형이 말을 하기 전에 독행신개가 말했다.

 "이미 낙양 땅에서 천하무림맹은 터줏대감이 아니고, 누가 호랑이고 용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간과하지 말게."

 일진 미풍과 함께 그가 사라졌다.

 "……."

 감천형은 굳은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문득 추위가 느껴진다.

 한 번도 이런 기분은 느낀 적이 없었다. 사부가 살아 계실 때, 천하무림맹은 천하무적이었다. 누구도 그것을 부인하지 못했으며 그 어떤 사람도 천하무림맹을 무시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그 한 사람이 빠졌다고 해서, 사부가 없다고 해서 이렇게 변한다는 것인가.

 그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굳어 있었다.

*   *   *

 "어떻게 아셨습니까?"

 감천형은 회의가 파한 다음에 한효월에게 묻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효월이 비록 그의 사숙이라 할지라도 중조산 산골에서 책을 벗삼던 서생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그렇지, 독행신개가 그 자리에 나타날 것까지 예측한다는 것은 상식을 초월했다.

 하지만 한효월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할 뿐이다.

 "일에는 흐름이란 것이 있고, 몇 가지의 흐름을 짚게 되면 앞일도 조금쯤 예측할 수 있으니 별로 신기할 것도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지."

 이 마당에 다시 묻기도 뭣하다.

 그저 속을 끓일밖에.

 그의 내심을 짐작한 듯 한효월은 그를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주로 공부한 학문은 무공이 아니라 신기학(神機學)이라고 하는 것인데, 굳이 말하자면 갖가지 경우의 수를 유추하여 앞일을 예측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놀람이 감천형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런 학문도 있습니까?"

 "굳이 명칭을 붙이지 않아서 그렇지, 오래전부터 이러한 학문은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었다. 귀곡(鬼谷) 일문이 그러했고, 제갈무후가 공부한 학문도 그 계통이었지."

 감천형은 한효월의 설명에 안색이 달라졌다.

 "그럼 사숙께서는……."

 그가 말을 하기 전에 한효월이 피식, 웃었다.

 "내 배움이 어찌 제갈무후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까? 그렇다는 것뿐이지."

 말과 함께 그는 정색을 했다.

 "구대문파의 사람들이 출발하면 무엇을 할 작정인가?"

 "내일이 홍 낭랑과 만나기로 한 날입니다. 그녀를 만나러 가야지요. 다만……."

 감천형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녀가 그 집에 있을는지 모르겠군요."

 "그거야 가보면 알겠지."

 한효월이 간단히 대답했다.

 참으로 묘한 일이다.

 그의 말을 듣자 감천형은 마음이 조금 놓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그렇게 대답한 이상, 무엇인가 대책이 마련되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침이 되었다.

 구대문파의 고수들은 이미 어젯밤부터 하나둘 떠났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침까지 기다리지 않았던 것이기도 했고, 어떤 의미로는 적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는 아침보다 밤이 좋다는 것이기도 했다.

 그 어떤 것이든 전이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당한 구대문파의 장문인과 장로들이 남의 눈을 피해서 움직이다니…….

 하긴, 건곤무적 독고해의 죽음과 함께 그들의 움직임은 이미 전과 다르긴 했었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은 의미가 달랐다.

 대낮이 되자 한 대의 마차가 맹주부의 뒷문을 나섰다. 10여 명의 시위들이 호위를 한 마차는 조용히 맹주부를 떠나 낙양성 외곽으로 향했다.

 마차의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창문까지 휘장이 드리워서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차가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저잣거리에 이르렀을 때였다.

 사람들의 틈에서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오면서 마차를 덮쳤다.

 그것은 하나가 아니었다.

 채소를 팔고 있던 자와 점을 치고 있던 점장이까지 세 명이 갑자기 튀어나와 습격을 하는 바람에 허를 찔린 마차는 호위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그중 채소 장사의 손에 들린 철추(鐵鎚)에 의해 반쯤 부서진 다음이었다.

 비명과 소란.

 그 일격으로 목적 달성을 한 것인지 습격을 한 자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했다.

 호위 몇이 혼비백산 마차로 달려갔고 나머지는 고함 소리와 함께 자객들을 쫓아갔다.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객들이 그 사람들 틈으로 비집고 들자 사방으로 사람들이 흩어지면서 엉겨 호위들은 제대로 그 뒤를 쫓을 수가 없었다. 자객도 호위들도 사람들의 물결에 묻혀 사라졌고 마차를 둘러싼 호위들의 당황한 눈만 경악으로 굳어 있을 뿐이다.

 호위 두 사람은 자객을 쫓아 골목으로 들어섰다.

 자객이 담을 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들도 담을 넘어서 자객을 추격했다.

 그들이 담을 넘자 그 담장 아래에는 그들과 꼭 같은 차림의 호위 두 사람이 대기하고 있다가 자객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담을 넘은 두 사람의 호위는 방금까지와는 달리 등을 벽에 붙인 채 침착한 모습으로 겉에 입고 있던 옷을 벗어버리고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한효월과 감천형이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감천형이 입을 열었다.

 "우리들의 움직임을 놓치면 그들이 과연 어떻게 반응할는지 한번쯤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한효월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뭔가 달라진 것은 확실했다.

 출입 한 번에 이런 식으로 머리를 쓴다는 것은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그간 나름대로 행적을 감춘다고 시도는 했었지만 한 번도 이처럼 치밀한 안배 하에 움직인 적은 없었다.

 어쩌면 그랬으므로 적의 눈을 피하지 못하고, 일거일동이 모두 적의 감시 하에 놓였었는지도 몰랐다.

 "가지. 그들이 이상한 걸 느끼기 전에."

 한효월이 눈을 꿈벅이고 있는 감천형에게 말했다.

 그가 이끄는 방향을 본 감천형은 의아한 빛으로 한효월을 보았다.

 "냉운장으로 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전에 먼저 한군데 들러보는 게 좋을 거 같군. 망외(望外)의 소득이 있을런지도 모르니까."

 한효월이 다시 웃었다.

 "……."

 감천형은 묻는 것을 포기했다.

 분명히 그는 머리가 나쁘지 않았었다.

 누구나가 그를 일러 뛰어나다고 했었다.

 그런데, 이 나이 어린 사숙의 앞에 서자 망망대해에 빠진 듯 그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추측을 하고 있어도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갈 것인지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로소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사조는 사부가 실패할 때를 대비하여 이 소사숙(少師叔)을 안배해 놓은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를 감천형이 따를 수 없음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터이다. 사부 건곤무적 독고해가 실패할 때를 대비한 안배로써 이 어린 사숙이 준비된 존재였다면.

*   *   *

 그들이 당도한 곳은 북망산이었다.

 바로 천기선생이 은거하고 있는 피진거였다.

 천기선생은 감천형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지난날에는 들어갈 수 있었던 진도(陣圖)가 지금은 아니었다. 완전히 문호(門戶)를 닫고 있어서 입을 닫은 조개와 같았다.

 "제가 안에다 통보를 해보겠습니다."

 한효월을 이곳까지 안내한 감천형의 말에 한효월은 머리를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어차피 사람을 만나지 않기 위해서 문을 닫은 분이니, 통보를 한다고 만나주지 않을 거야. 실례를 무릅쓰고서 나중에 사과를 드릴밖에. 가지."

 말과 함께 한효월은 앞장섰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속으로 중얼거린 감천형은 그가 진도로 들어섬을 보고 급히 뒤를 따랐다. 따라오긴 했지만 그가 왜 이곳으로 찾아온 것인지는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평소에는 그처럼 예의에 깍듯한 그가 지금은 이처럼 서두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진세에 들어선 감천형은 갑자기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원래 이 송림에 펼쳐진 수림기문진(樹林奇門陣)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시야가 돌변하는 것이 아닌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자욱한 안개가 깔려 사위를 전혀 분간할 수가 없다. 평범한 안개라면 이처럼 짙을 수가 없을 터이다. 눈앞 두 자 이상을 볼 수가 없어 손을 뻗으면 손가락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한효월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모습뿐만 아니라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왼쪽으로 비스듬히 두 걸음 나서게."

 그 순간, 앞에서 한효월의 음성이 들려왔다.

 말대로 사선으로 두 걸음을 나서자 바로 앞에 한효월이 그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감천형은 이 수림진의 위력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도기문팔괘진(顚倒奇門八卦陣)인 것 같군. 겉보기로는 전형적인 형태의 팔괘진처럼 보이지만 일단 발동하면 제대로 아는 사람도 생문을 찾아 나가기가 쉽지 않은 것이 이 진의 특징……."

 담담하게 중얼거리면서 한효월이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진세에 들어서 한 걸음을 자칫 잘못 내딛으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은 기본이다. 감천형은 한효월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기문둔갑(奇門遁甲)이라는 말은 어원은 제법 오래다.

 중국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전설 중의 황제(黃帝)가 치우(蚩尤)와 탁록에서 싸울 때, 꿈에서 천신에게서 부적을 얻어 그것으로 풍후(風后)를 불러 기문을 설(設)하였으니, 그것이 둔갑(遁甲)의 시작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제요(帝堯)가 우왕(禹王)에게 명하여 치수(治水)를 할 때에 구천현녀(九天玄女)로부터 비법을 전수하니, 그것이 후일 전하는 기문(奇門)의 유래다.

 그러한 기문진은 예로부터 싸움터에서 사람들로 구성되어 위력을 발휘하였지만 사람이 아닌 목석(木石)으로서 그 기문진을 처음 기록에 남긴 사람은 저 유명한 제갈무후(제갈량)이다.

 그는 석진(石陣)을 펼쳐서 유비를 쫓던 오의 육손(陸遜)을 혼비백산케 했다.

 그것이 아직 그 흔적이 남아 있다는 팔진도(八陣圖)이다.

 휴(休)·생(生)·상(傷)·두(杜)·경(景)·사(死)·경(驚)·개(開)의 여덟 문호로 이루어진 팔진도는 후세 병법가들의 귀감(龜鑑)이며 그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밤잠을 잊어야 했었다.

 한효월은 그가 전도기문팔괘진이라고 이름한 그 진세를 거침없이 전진하고 있었다.

 웬만하면 가다가 생각이라도 할 만하건만 이미 알고 있는 길을 가듯 조금도 거리낌없이 성큼성큼 걸어 진세를 뚫고 들어가고 있다.

 진이 아무리 넓다 해도 그렇게 전진하니 금세 끝이 날 수밖에 없다.

 어느 순간, 진세가 걷혔다.

 아니, 안개가 걷히고 시야가 트였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눈에 익은 경치가 드러났다.

 "아니, 저 애는?"

 진세를 벗어난 감천형은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앞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아는 아이인가?"

 "사백의 시중을 드는 아이입니다."

 감천형이 한효월의 물음에 답했다.

 그의 앞에는 그 맹랑한 도동이 쓰러져 있었다.

 그가 쓰러져 있다는 것은 무슨 변고가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혈도를 짚였을 뿐, 큰 상처를 입은 것 같지는 않군. 일단 들어가 보지. 누가 우리보다 먼저 힘으로 밀고 들어온 모양이니까."

 한효월은 말과 함께 다시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서두르는 것이 없는 걸음걸이.

 그러고 보면 그는 이런 상황을 미리 알았기에 안에다 통보를 하지 않았던 거 같다. 이런 마당이니 감천형은 홀린 듯 그를 따를 수밖에.

 모옥은 여전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었다.

 모옥의 앞에는 한 채의 가마가 놓여 있었다. 사인교자에는 휘장이 드리워 있지만 사람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기척을 죽이도록.'

 한효월의 전음지성(傳音之聲)이 들려왔다.

 감천형이 한효월과 같이 모옥 주위에 접근해서 살펴보니 모옥의 문은 힘으로 파괴가 되어 있었다.

 '저건…….'

 그가 막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이다.

 "흥! 당신이 고집을 피운다고 일이 해결될 줄 알아요?"

 앙칼진 꾸짖음 소리가 들려왔다.

 저렇게 말하는 남자는 없다.

 "하아,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잊어버린 사람이오. 당신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마오."

 길게 탄식하는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저 음성이 천기선생의 것인가?'

 한효월이 그를 보면서 전음으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럼 저 여인의 음성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겠나?'

 한효월의 물음에 감천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건…… 저 음성만으로 생각하면 분명히 홍 낭랑의 것인 듯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어떻게 여기를 찾아온 것인지 알 수가 없군요.'

 말을 마친 감천형은 괴이한 빛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그때,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발뺌한다고 해서 일이 끝날 줄 알아요?"

 뭔가를 두드리는 듯 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차갑게 꾸짖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잘난 당신들 때문에 오늘날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그래도……."

 "소군(昭君). 대체 날더러 더 이상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그 때문에 내가 여기에 은거한 채로 세상일에 상관하지 않고 있는 게 아니오?"

 "흥! 그런다고 죽은 독고해가 살아와요?"

 …….

 갑자기 침묵이 찾아들었다.

 "당신은 독고 아우의 죽음이 마치 내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구려……."

 "당연! 당신이 지난날 봉황문(鳳凰門)을 해체하고 여기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 않았다면 그가 어찌 그토록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외롭게 죽어갔겠어요?"

 여인이 날카롭게 질타하자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일장의 호겁(浩劫)은 이미 천기상에 노정(露呈)되어 있는 것이오. 어찌 그것이 나의…… 아아, 그만둡시다. 굳이 변명해 무엇 하겠소?"

 잠시 사이를 두었던 천기선생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소군,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마시오. 나는 그때 이후, 세속을 떠나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니……."

 "도학자 같은 소리만 하고 있군요. 누가 당신의 그 따위 소리를 듣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온 줄 알아요? 일이 이 지경인데도 자신의 안일만을 위하여 그가 평생 걸려서 이룩한 모든 것들이 그의 죽음과 함께 사상누각이 되는 것을 당신은 그냥 보고만 있겠다는 건가요?"

 "강호상의 인물이 어찌 하나둘이겠소? 나의 존재야말로 미미한 것이지. 더구나 독고 아우의 대제자인 감천형은 능히 일을 감당할 만한 그릇이오."

 "흥, 그가 장래에는 그럴 수 있을는지 몰라도 지금은 어림도 없어요. 사부인 독고해가 막지 못한 일을 그가 어떻게 해요? 당금의 상황 타개에는 당연히 역부족인 걸 설마 모른다고 할 건가요?"

 …….

 다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는 탄식이 들려왔다.

 "당신은 지금의 내가 강호상의 시비에 상관하지 않고 있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런데도 굳이 나를 찾아와 이렇게 괴롭히는 이유가 무엇이오?"

 그것은 듣는 두 사람도 같이 가진 의문이다.

 그 궁금함을 잘 알고 있는 듯 여인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좋아요!"

 그녀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당신이 굳이 그렇게 고집을 피우겠다면 어쩔 수 없죠. 봉황령(鳳凰令)을 내게 넘겨줘요!"

 순간, 나직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당신은……?"

 "왜? 너무 무리한 요구인가요?"

 천기선생은 길게 탄식했다.

 "아니오, 아니오……. 당신이 원한다면 당연히 당신의 뜻을 따라야겠지. 하지만 봉황령은 지금 내 수중에 없소."

 "없다고? 흥! 그 따위 교언(巧言)으로 나를 속일 생각을 하다니…… 오늘날까지 나를 바보로 생각하는 건가요?"

 여인이 노해서 날카롭게 소리쳤다.

 "아니오. 아니오…… 그런 것이 아니오. 정말 봉황령은 이미 내 것이 아니오."

 "내 것이 아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설마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었다는 건가요?"

 "그렇소."

 천기선생의 가라앉은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그것도 오래된 일이오. 내가 은거하기 직전에 넘겨준 것이니……."

 "그게 누구예요?"

 여인이 따져 물었다.

 여인은 기세가 등등하다.

 그에 반해서 천기선생은 심하게 몰리면 탄식을 할 뿐, 반격의 기미는 찾아볼 수가 없다. 서로 간에 뭔가 있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

 '아마, 지난날 뭔가 마음의 빚이 있었던 모양이군.'

 한효월은 내심 생각을 굴렸다.

 그것도 애정(愛情)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천기선생 같은 사람이 저렇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그건 말할 수 없소!"

 이제까지와는 달리, 강한 어조의 음성이 들려왔다.

 "말할 수 없다고? 오호호호……."

 웃음소리가 날카롭게 터져 나왔다.

 "그렇게 해서 일이 해결될 거 같아요? 내가 그 말을 믿고 순순히 물러날 걸로 생각한다는 건가요? 그래요? 아직도 이 홍소군이 지난날의 그 순진했던 어린애로 보인단 말이지?"

 여인이 노해서 차갑게 소리쳤다.

 그때였다.

 감천형은 문득 놀란 얼굴로 한효월을 보았다.

 그가 자신의 옆구리를 쿡, 찔렀기 때문이다.

 "……?"

 감천형이 그를 보자 한효월이 머리를 저었다.

 감천형은 둔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즉시 한효월이 지금의 대화를 중단시키라는 뜻을 알아채고는 이내 목청을 높였다.

 "천형이 사백을 뵈러 찾아왔습니다!"

 그 순간, 모옥에서의 음성이 뚝 끊어졌다.

 그리고 그가 앞으로 나서자 한효월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모옥에 이르자 돌연 휙휙, 하는 바람 소리가 일며 십여 명의 대한이 나타나 그들을 포위했다. 역시 사인교자만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홍 낭랑을 호위해 온 자들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비록 검을 뽑은 것은 아니되, 자세를 낮추고 허리의 검에 손을 대고 있는 모습은 언제라도 발검이 가능한 준비 태세.

 '진세(陣勢)를 형성하고 있군.'

 그들의 모습을 보고 감천형은 내심 미간을 찡그렸다. 일단 발동하면 간단한 자들이 아닐 것임을 짐작한 것이다.

 "그들을 막지 마라."

 안에서 냉랭한 음성이 날아든 것은 그때다.

 앞을 막아섰던 대한들은 그 소리가 들리자 즉각 좌우로 갈라져 길을 내주었다.

 감천형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들을 스쳐 지나 모옥 안으로 들어섰다.

 밖에서 듣던 것과는 달리 모옥 안은 의외에도 평온한 분위기였다.

 천기선생은 여전한 그 모습 그대로 윤의에 앉아 있었고, 그 맞은편 탁자에는 홍 낭랑이 예의 타는 듯 붉은 옷을 입은 채로 앉아 있음이 보인다.

 "사백을 뵙습니다."

 천기선생을 향해 감천형이 예를 갖추자, 천기선생은 묵묵히 고개만 끄떡일 따름이다.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천기선생에게 예를 갖춘 감천형은 홍 낭랑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

 하지만 감천형은 홍 낭랑이 입을 열 기회를 주지 않고서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데, 낭랑께서는 그간 냉운장에 있지 않았었습니까?"

 말과 함께 그는 정광(精光)이 빛나는 눈으로 암중에 세심히 홍 낭랑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의 얼굴은 태연하여 아무것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요. 이 몸은 잠시 장을 비웠었으니 그대가 약속한 시간 이전에 장을 찾았다면 아무도 만날 수 없었을 거예요."

 "아무도 없는 게 아니더군요."

 감천형의 말에 침착하던 홍 낭랑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게 무슨 의미죠?"

 "그곳은 신비 집단의 은신처가 되어 있었습니다."

 "신비 집단이라니?"

 홍 낭랑이 놀라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냉운장에 다른 자들이 있더란 이야기인가요?"

 홍 낭랑의 격렬한 반응에 감천형이 오히려 놀랄 차례. 하지만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한 감천형은 정색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생은 낭랑이 그들과 관련된 혐의를 벗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

 홍 낭랑은 어이가 없는지 그의 말에 가타부타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얼음처럼 찬 안색을 일그러뜨리며 이를 갈았다.

 "감히 그자들이 냉운장까지 침범한단 말이지?"

 그녀의 어조는 심히 기이하여 감천형은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과연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집어내어 말하기 힘들었지만…….

 "낭랑은 그들과의 관련 혐의를 부인할 생각입니까?"

 감천형의 물음에 홍 낭랑은 냉소를 터뜨렸다.

 "그 대답은 나 대신 당신의 사백이라는 저분에게 들어보는 게 좋겠군."

 이렇게 되면 시선이 천기선생에게로 가는 게 당연하다.

 감천형의 시선을 받은 천기선생은 침중하게 말했다.

 "그녀는 어제 아침부터 이곳에서 나와 같이 있었다."

 "……?"

 뜻밖의 말에 감천형은 어리둥절하여 그를 보았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그의 의중에 완전히 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말의 의미는 홍 낭랑이 그곳을 비운 사이에 그곳을 다른 사람이 사용했다는 의미에 다름이 아니다.

 그래도 남는 의문.

 "하지만 그래도 집을 지키는 사람도 없었단 말입니까?"

 "물론, 거기에는……."

 말을 하던 홍 낭랑의 안색이 갑자기 돌변했다.

 "설마 그가? 그럴 리가……."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의 의미는 자못 명백하다.

 결론은 그녀의 아랫사람이 적과 내통했다는 것.

 "당신도 그들의 감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모양이군……."

 천기선생이 씁쓸하게 웃었다.

 홍 낭랑은 가슴속에서 찬바람이 이는 것을 실감한다.

 '그들이 감히 나까지 넘보다니…….'

 갑자기 그녀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일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당신은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여 모든 것을 나 몰라라 할 작정인가요?"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평소의 그 얼음 같던 얼굴까지 붉어지는 듯했다.

 천기선생이 나직이 탄식을 흘렸다.

 "나의 이런 몸으로 설사 강호에 나선다 한들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소?"

 "흥!"

 홍 낭랑이 야멸차게 코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사람 앞에서라면 몰라도 내 앞에서는 그런 소리가 통하지 않을 거예요. 누구보다도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잘 아니까."

 "……."

 감천형은 굳은 얼굴로 그들의 다툼을 본다.

 또다시 미궁이다.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짐작조차 가지를 않았다.

 뭔가 짚이는 게 있어야 밑그림을 그리고 전체적인 구도를 이해할 수가 있을 텐데, 지금의 이 사태는 너무도 복잡하고도 안개에 묻혀 있어서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손을 대어야 할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참을 수 없어진 감천형은 입을 열었다.

 "제천교의 행사는 신비롭기 이를 데 없어서 사부님의 죽음 이후, 당금 강호에 형성된 국면은 대단히 복잡할 뿐더러 사람으로 하여금 미궁을 헤매게 합니다. 그들의 정체를 알지 못하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사백께서는 그들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감천형의 질문에 천기선생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것을 산골에 묻혀 사는 내가 어찌 알겠느냐?"

 "죄송하지만 지난번 하신 말씀으로 미루어보아 사백께서는 그들에 대해서 무엇인가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무엇이라도 좋습니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는 적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없습니다."

 "……."

 천기선생은 그의 말을 들었음에도 무거운 얼굴로 길게 한숨을 내쉴 따름이다.

 무거운 공기가 좌중을 짓누른다.

 잔뜩 긴장된 공기는 조금만 건드려도 퍼져 심장을 찔러올 것만 같다. 그 충격을 겁내는 듯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감천형도 입을 다문 천기선생을 쳐다보고 있을 따름이다.

 "예컨대……."

 그것을 깨뜨린 사람은 여태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던 한효월이었다.

 깨끗한 기품의 그였지만 감천형보다 나이도 어리고 그의 뒤에서 입 한번 떼지 않으니, 누구도 그를 주의해 보지는 않았던 터였다.

 "오늘날 이러한 국면(局面)의 조성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인즉, 이러한 국면을 조성해 낼 수 있는 사람. 당금 천하에서 그러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누구누구인지 말씀해 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길지 않으나, 그의 이 말은 말 그대로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다.

 듣자면 쉽지만 실제로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니다. 쉽게 말해서 아무나 할 수 없는 질문이라는 뜻이다.

 천기선생이 어떤 사람인데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겠는가.

 경황 중에 한효월의 존재를 간과했던 그는 새삼 한효월을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보니 다르다.

 눈은 샛별과 같아 튀지 않으면서도 깊이가 있고 날카롭지 않으면서도 지혜롭다. 심기가 깊되, 침착하고 온유함을 그 속에서 엿볼 수 있다.

 그가 묘한 눈길로 한효월을 바라볼 때, 감천형이 소개를 했다.

 "그러고 보니 소개를 드리지 못했군요. 죄송합니다. 이분은 사부님의 사제이신 한 자, 효 자, 월 자를 쓰시는 분입니다. 제 사숙이시지요."

 말소리는 크지 않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천기선생과 홍 낭랑의 얼굴에는 경악의 빛이 지나쳐 악연실색(愕然失色)의 빛이 완연하다.

 "미처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한효월이라고 합니다."

 한효월이 의연히 포권하자 실성이 홍 낭랑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사제라니? 독고 맹주의…… 사제라는 건가요?"

 그것은 천기선생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 말은…… 독고 아우에게 사제가 있다는 말은 나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한효월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당연히 설명의 몫은 감천형의 것.

 감천형은 원래 말이 많지 않았던 사람이다. 말없이 모든 것을 처리해 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한효월을 만나고 나서는 이렇게 별 의미 없는 설명만 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던가?"

 부지중에 중얼거린 천기선생은 길게 한숨 쉬었다.

 "내가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니, 이젠 나도 늙었나 보군."

 "흥! 말마다 늙고 병들었다고 하더니,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이로군요?"

 놓치지 않고 홍 낭랑이 쏘아대자 천기선생은 쓴웃음을 머금고는 말머리를 돌렸다.

 "당금 천하에서 오늘날과 같은 국면을 조성해 낼 만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실제로, 오늘날과 같은 국면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이미 20여 년 전부터라네."

 "20년이나 되었다는 겁니까?"

 놀란 감천형의 되물음에 천기선생은 머리를 끄떡였다.

 "그렇다. 음모의 태동은 그렇게 오래되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때 나는 이미 강호상에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지금에 이르러서는 실상, 당시의 사정을 명확하게 짚어서 이야기할 수는 없는 형편이구나."

 그는 감회가 깊은지, 목이 마른지 탁자에 놓인 식은 찻잔을 가져다 한 모금 마시며 눈을 감았다.

 뭔가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말은 별것이 아닌 듯하지만 실제로 그의 말에 깃든 것은 비할 바 없이 강한 자부심이었다. 그가 강호상에서 물러나 있지 않다면 어떤 것도 그의 눈을 속일 수 없었을 것이라는 말과 같았던 것이다.

 한효월이 물었다.

 "당시 상황만으로 본다면, 당금에 이르러 제천교와 같은 세력을 움직여 이러한 국면을 조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의 질문에 천기선생은 감았던 눈을 뜨고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 깊은 곳에 물든 것은 놀람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말은 얼핏 들으면 자랑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새겨들으면 또한 나는 그 이후로 손을 떼고 강호의 일에 상관하지 않아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게 물어도 소용없다……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내면의 숨은 뜻을 짐작하더라도 대화는 거기에서 끝이 남이 순서다.

 하지만 한효월은 그의 말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 말은 실로 교묘하여 천기선생은 말하기 싫어도 아는 것은 말해야만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화법(話法)은 듣기에는 별것이 아닌 듯하지만 실제로는 고심하기 이를 데 없어서 아무나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천기선생이 놀란 눈으로 새삼 그를 살펴봄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잠시 한효월을 쳐다보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당연히 천하십왕(天下十王)을 꼽을 수 있겠지."

 "천하십왕이란 말씀입니까?"

 "알고 있느냐?"

 감천형의 되물음에 천기선생이 물었다.

 "아닙니다. 언제인가 얼핏 사부님께서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하신 듯하기도 한데……."

 "천하십왕의 능력은 각기 고금독보(古今獨步)라 할 만하다. 하지만 그들의 명호는 의외에도 강호상에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가능한 일이다. 네가 나를 찾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도 조용히 청수(淸修)를 누리고 있었을 것처럼……."

 "죄송합니다."

 감천형이 무색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능력이 그처럼 불가일세(不可一世)하면서도 세상에 그 이름이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천하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기 한 지역의 절대자(絶對者)들이다. 그렇게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영역 밖으로 나간 적이 없는 것이 세상이 그들을 모르는 이유이기도 하지……."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당연히 가능하다. 그들 중 한 사람은 너도 익히 아는 사람이니까……."

 "그게 누굽니까?"

 "바로 네 사부인 독고해다."

 "아-!"

 경악한 외침이 감천형의 입을 저절로 비집고 새어 나온다.

 천기선생은 옛일을 생각하는 듯 창밖의 푸른 하늘에 눈을 돌렸다.

 "독고 아우는 지난날 천하십왕 중 가장 어린 나이로서 중원무왕(中原武王)이라는 존호(尊號)를 받았다."

 그 말에 감천형은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 그렇습니까?"

 "그렇다. 그는 다른 아홉 명에 비해서 배분을 따지자면 거의 한 배분이나 차이가 난다. 하지만 그는 본신의 능력으로써 그들과 동배를 이루었지."

 "그렇군요……."

 감천형은 나직이 신음한다.

 위대한 사부였다.

 사부는 죽어서도 위대하였다.

 그런데, 그 제자인 자신. 스스로 수제자라고 자부했던 자신은 대체 어떤 존재인가.

 "하지만 천하십왕은 지난 4, 50년 간 거의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들 중 가장 최근까지 활동을 한 사람은 북해빙왕(北海氷王) 냉천추(冷千秋)인데, 그도 20여 년 전부터 소식이 끊겼다."

 움직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인가.

 침묵이 흐른다.

 그리고 그 침묵은 천기선생을 재촉하고 있다.

 "사실…… 천하십왕이란 이름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 사람씩 각 지역의 최강자, 절대자를 추존(推尊)하면서 이룩된 것이기 때문이지. 그러니, 이 이름을 강호상에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렇군요."

 감천형은 머리를 끄떡였다.

 그렇다면 이해가 되는 말이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저절로 이룩된 명호.

 그것은 누가 일부러 만든 것이 아니라, 오로지 본신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것일 터이다. 그 의미는 그들이 진정한 강자라는 것.

 "그들 중 누구에게 혐의가 있다고 보십니까?"

 한효월의 물음에 천기선생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건 한마디로 단정하기 어려운 질문이군……."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굴리던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단언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남해용왕(南海龍王)과 서역법왕(西域法王), 그리고 북해빙왕에게 가장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겠지."

 '남해용왕과 서역법왕, 그리고 북해빙왕이란 말인가?'

 감천형은 미간을 찡그렸다.

 범위가 너무 컸다.

 남해만 하더라도 천리만리 떨어진 바다이며, 서역 또한 멀고도 멀다. 북해는 또 어떤가.

 그곳을 다 조사하려면…….

 그때였다.

 담담한 한효월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쩌면 전혀 의외의 인물이 가능성도 있겠지요?"

 그의 물음에 천기선생은 문득 빙그레 웃음을 보였다.

 "그렇겠지. 세상사, 모든 일이 어찌 사람의 생각대로만 되겠나? 무엇이든 단정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닐 터이니……."

 그 순간, 밖에서 소란스러움이 일었다.

 "누가 또 온 모양이로군요."

 감천형이 바깥을 바라보았다.

 천기선생이 암연히 탄식을 흘렸다.

 "강호상의 시비를 피해 이곳에서 지난 20년 간을 은거했었건만, 오늘날 이런 지경에 빠지고 말았군."

 그가 머리를 연신 흔드는 것을 보자 감천형은 부지중에 미안하여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때, 한효월이 입을 열었다.

 "오늘이 낭랑께서 우리 감 사질에게 무엇인가 알려주신다고 한 날짜인 것을 압니다. 상황이 조금 복잡해지긴 했습니다만, 괜찮으시다면 하교(下敎)를 부탁드립니다."

 입을 다물고 있던 홍 낭랑은 그의 물음에 문득 미소를 떠올렸다.

 "독고 맹주는 좋은 사제를 두었군요. 그는 아마도 지하에서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과찬이십니다."

 "오늘 밤, 이경 말쯤, 청룡장(靑龍莊)으로 가보세요. 뜻밖의 단서를 얻을 수 있을런지도 모르니까요."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그 이상은 나도 알지 못해요. 가보면 알게 되겠지요."

 이 마당에 더 이상 묻기도 힘들다. 하지만 그녀가 더 이상 말하기 싫어함은 분명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감천형은 답답하기 이를 데 없어 속이 부글거렸다.

 늘 속시원히 드러난 것은 없다.

 그저 일러주는 말이라는 것이 어디로 가면 뭘 찾을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라니…….

 그때, 한효월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선배께서는 천하경륜의 학(學)을 흉중에 품고 계십니다. 세상을 위해서 그 재화(才華)를 써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신다면 저와 같은 사람들이 이렇게 동서남북으로 헤매고 다니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그의 말에 천기선생은 길게 탄식했다.

 "내 마음은 이미 재가 되었네. 다행히 소형제와 같은 기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 또한 다행. 나와 같은 폐물이 이제 더 무슨 일을 하겠는가? 나 대신 소형제가 힘을 써주게나."

 "과분한 말씀을, 소생은……."

 그의 말은 천기선생이 안으로 가서 작은 목합(木盒) 하나를 꺼내와 내미는 것 때문에 중단되었다.

 "이것은 내 작은 성의니 받아두도록 하게."

 엉겁결에 받아 들기는 했지만 평범한 물건이 아님은 분명하다. 은행나무로 된 목합은 대단히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매우 얇고 너비만 조금 넓어 가로 한 자, 세로 여섯 치 정도라 특별하게 만들어진 것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당신을 매우 좋게 본 모양이군요. 그가 목숨처럼 아끼며 내놓지 않던 천기단서(天機丹書)를 그렇게 선뜻 내놓다니……."

 홍 낭랑이 낮게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 음성에 깃든 은은한 놀람의 빛은 그 목합 속에 들었다는 것이 평범하지 않음을 웅변하고도 남는다.

 "그 천기단서에는 내가 배웠던 것들이 담겨 있으니 차후, 강호행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거네."

 말과 함께 그는 문득 손을 휘저었다.

 "모두 여기서 나가주시오. 오늘부로 이곳은 폐쇄하겠소."

 "그럼 당신은……?"

 "소군. 나는 이제 강호와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오.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시오."

 천기선생은 홍 낭랑이 더 이상 말을 하기 전에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신이 말한 것은 당신이 잘 생각해 보면 생각해 낼 수 있을 거요.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 전부요."

 그 말과 함께 천기선생은 완강하게 입을 다물었다.

 "……."

 홍 낭랑은 입술을 물고서 그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천기선생은 눈까지 내리깔고서 그녀를 쳐다보지 않는다.

 그가 입을 열지 않겠다고 생각한다면 천하의 어떤 것으로도 그의 입을 열 수 없음을 잘 아는 그녀였다.

 그녀는 문득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심중의 답답함을 토해내려는 듯이.

 중인들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가도 그는 눈을 뜨지 않았고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밖으로 나온 홍 낭랑은 한효월을 일별하고는 미련없이 수하들과 함께 그 자리를 떠나고자 했다.

 "잠시만."

 감천형이 그녀를 막았다.

 "냉운장으로 가면 다시 뵐 수 있겠습니까?"

 감천형의 물음에 그녀는 잠시 그를 보다가 말했다.

 "잠시 동안은 그곳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우린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을 거예요……."

 그 말을 남기고 홍 낭랑은 떠났다.

 혈도가 풀린 도동이 퉁퉁 부운 얼굴로 돌아다니는 것을 뒤로하고 한효월과 감천형도 피진거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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