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首 강호출도(江湖出道)
-세상에 나오다.
출세(出世)한 잠룡은 구름을 타고 오르다.
감천형은 어둠이 내릴 무렵, 혼자서 조용히 맹주부로 돌아왔다.
천무는 그와 같이 행동했지만 낙양에 들어서기 전에 헤어졌다. 그의 체구가 남달라 남의 눈에 띄기 쉽기 때문에 맹주부에 가까이 오자 길을 나눈 것이다. 게다가 그는 변장을 했기 때문에 더 더욱 남의 눈에 띄지 않았다.
사숙 한효월은 그와 같이 무우곡을 나섰지만 몇 가지 미리 알아볼 일이 있다면서 그와 헤어졌다.
강호초행인 사람.
나이도 많지 않다.
그가 자신과 같은 배분이 아닌 사숙이긴 하지만,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다 하더라도 경험이 없는 그가 자칫 실수라도 할까 걱정이 되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사문의 존장인지라 강하게 말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그가 과연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작용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실제로 모든 게 너무 막막했던 것이다.
사부가 그의 옆에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었다.
모든 것에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사부가 너무도 황당하게 무너지고 나자, 그처럼 굳건했던 모든 것들이 그야말로 사상누각(砂上樓閣)과 같이 흔들리고 말았다.
그의 마음을 대변하듯, 낮부터 흐리던 날씨는 아예 먹구름이 가득 끼어 저녁 무렵임에도 한밤을 방불케 했다.
대외적으로 그는 잠시 폐관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더욱 조용히 돌아올 필요가 있기도 했다.
맹주부로 돌아온 그가 가장 먼저 만난 것은 그의 사제인 좌백이었다.
"아무 일 없었느냐?"
"다행히 별일은 없었습니다만, 아무런 변화의 조짐도 알아내지 못하고 이렇게 웅크리고 있으니 정말 선사를 뵐 면목이 없습니다."
좌백이 고개를 떨구었다.
늘 냉철하고 말이 없는 가운데 자신의 일을 빈틈없이 처리해 나가던 그였다.
그의 말은 현재 맹주부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잠시 망설이던 좌백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
"사매가 조금 이상해 보입니다."
"이상? 어디가 말이냐?"
감천형이 안색을 굳히고 물었다.
사부가 남겨놓은 하나뿐인 혈육이다.
그녀에게 이상이 생긴다면 정말 죽어도 그 죄를 씻을 수 없으리라. 어떻게 그를 대할 것인가.
"딱 잘라서 말하긴 뭣합니다만…… 전과 좀 다릅니다. 그간 만나지 못한 게 너무 오래라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어딘가……."
좌백이 말끝을 흐린다.
그는 빈틈없는 사람이다.
그가 그렇게 느꼈다면 알아봐야 했다.
"알겠다."
감천형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좌백이 물었다.
"사매에게 가시렵니까?"
"음, 지금 어디 있느냐?"
"거처에 있는 걸로 압니다."
번쩍!
쿠쿠쿠…… 콰콰쾅!
어둠이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어느새인가 모르게 비가 내리더니 천둥벼락과 함께 빗줄기가 굵어졌다. 바람까지 불기 시작하니 악천후가 따로 없다.
화경루의 모습은 여전했다.
감천형이 거기에 도달한 것은 이경이나 되어서였다. 나오는 길에 원로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느라 늦은 것이다. 독고경의 시비가 황급히 그를 맞았다.
"내가 온 것을 알리거라."
그의 말에 시비, 운아(雲兒)가 황급히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언제 나갔는지도 모른단 말이냐?"
감천형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모, 모르겠어요. 소비(小婢)는 아가씨께서 나가시는 걸 뵙질 못했는데…… 그래서 계신 줄만 알았습니다."
시비 운아는 당황해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독고경이 없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사라진 것이다.
'이 비 오는 날에 어딜 간 거란 말인가?'
감천형은 굳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평소라면 산책이라도 나갔겠거니 하겠지만 지금은 비상시였다.
공연히 가슴이 섬뜩해진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운아를 앞세워 독고경의 규방에까지 들어갔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남녀 간의 규범보다는 사매의 안전이 먼저였다.
의외로 방 안은 단정했다.
마음이 조금 놓였다.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은 최소한 납치는 아닐 터이다.
운아를 시켜서 침상까지 살펴보게 했지만 여전히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이상하군……. 이 밤에 바람이라도 쐬러간 거란 말인가?'
"아가씨가 돌아오면 내게 연락하도록 해라."
잠시 생각을 굴린 그는 운아에게 당부해 놓고 화경루를 빠져나왔다.
쏴아아…….
밖으로 나오자 빗줄기가 시원스러웠다. 집 안에서 본다면 좋을 터이지만 막상 밖으로 나와서는 앞을 분간키 어려웠다.
바람까지 불어대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은 빗줄기가 조금 가늘어진 것.
감천형은 사모의 거처인 아취소축으로 향했다.
얼마 가지 않아 눈앞에 아담한 2층 누각 하나가 나타났다. 백송(白松)이 주위를 두르고 매화가 경치를 꾸며 평범하지 않은 분위기. 이곳이 바로 무림맹주부의 안주인이 거처하는 아취소축(雅聚小築)이다.
그녀는 무림세가의 딸이 아니었다.
그래서 늘 조용한 것을 좋아했고, 성품도 그와 같아서 모든 사람들의 아낌을 받았다. 하기야 오죽하면 자면성모라는 이름까지 얻었을까.
감천형도 그녀를 좋아했다.
그러하기에, 어디든지 다녀오면 꼭 그녀를 찾아보는 습성이 있었다. 지금도 그간 그녀가 어떻게 지냈는지 주위를 둘러보고 그녀가 잠들지 않았다면 문후(問候)라도 여쭈어볼까 하는 생각에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상이 없는지 위사들의 상태를 암중에 점검한 감천형이 아취소축의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번쩍!
번갯불이 어둠을 찢었다.
찰나간에 일대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그 순간에 감천형의 전신이 굳어졌다.
아취소축의 담을 넘는 그림자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번개가 치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정도로 그 인영의 신법은 영교(靈巧)하고도 은밀했다.
'이 밤에 사모님의 거처에서…….'
더 이상 생각을 굴릴 여가가 없었다.
번개처럼 생각을 굴리고 판단을 내린 감천형은 주위를 경동시키지 않고 조용히 신법을 전개하여 그 인영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인영은 복면을 했는데, 맹주부 내의 사정을 매우 잘 아는 듯 매복이 있는 곳을 피해서 후원을 가로질러서 맹주부를 빠져나갔다.
콰콰아앙!
뇌성대작(雷聲大作).
굵어진 빗줄기 속에서 뇌성이 크게 울린다.
맹주부를 벗어난 인영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질주했다. 급한 일이 있는 듯 전력을 다하는 것처럼 보였다. 비가 쏟아지고 바람마저 세차 조금만 잘못하면 인영을 놓칠 판이다.
감천형도 전력을 다해 인영의 뒤를 따랐다.
얼마가 지나자 인영이 낙양 외곽에 자리한 한 장원에 이르렀다.
"여긴?"
감천형의 눈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냉운장(冷雲莊).
거기에 붙은 현판은 너무도 뜻밖이다.
사모의 거처인 아취소축을 빠져나온 인영이 설마 냉운장으로 올 줄이야.
인영은 냉운장에 도달하자 망설이지 않고서 냉운장의 담을 넘어 들어갔다.
너무 뜻밖의 일에 잠시 멈칫했던 감천형은 인영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놀라 황급히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도 바람처럼 냉운장의 담을 넘었다.
하지만 그 찰나간의 틈에 앞서가던 인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어떤 기척이라도 찾아낼 텐데, 이처럼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지는 판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더구나 그가 본 냉운장이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있는 곳이 아닌 바에야.
그러나 더욱 이상한 일은 그 다음이었다.
쏴아아…….
요란하게 쏟아지는 빗소리뿐.
어디에서도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단순히 밤이라서, 폭우가 쏟아져서 조용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다.
그런 빈집에서만 느껴지는 고적함.
그런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괴괴한 침묵.
갑자기 괴이한 느낌이 감천형의 전신으로 부딪혀 왔다.
'설마 빈집이란 말인가?'
감천형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와 이 냉운장의 주인인 홍 낭랑은 3일 후에 만나기로 했었다.
예상보다 그가 빨리 돌아오는 바람에 약속은 내일이지만, 이 집에 아무도 없다면 그건 문제였다. 더더구나 이렇게 집이 비도록 감시하는 맹주부의 사람들이 아무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면…….
감천형은 문득 자신이 이곳으로 들어오면서도 맹주부의 감시를 보지 못했음을 상기한다.
가슴이 답답해 왔다.
'도대체 이 집에 있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러나 그가 길게 생각을 굴릴 만한 시간은 없었다.
"아아-악!"
느닷없이 어둠을 찢고 들려오는 비명.
그 비명은 빗소리 가운데 처량하고도 날카롭게 터져 나와서 귀신이 호곡하는 듯 공포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감천형은 그것이 눈앞에 있는 대청에서 들렸음을 알았다.
그 대청은 그가 이미 가본 적이 있는 곳이다.
그의 신형이 빗속을 뚫고 날았다.
이 마당에 더 이상 모습을 숨기고 말고 할 것이 없었다.
힘껏 문을 밀었다.
문은 닫혀 있지 않았다.
대청의 문이 활짝 열어젖혀지자, 대청의 중앙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번쩍, 콰콰쾅!
바로 곁, 어디엔가 벼락이 떨어진 모양이다.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주위가 찰나간이나마 대낮처럼 밝아진 것은 당연한 일.
순간 감천형은 그것이 그가 쫓아왔던 인영임을 알 수 있었다.
번개처럼 대청 안을 둘러본 감천형은 바람처럼 3장여를 가로질러서 인영을 뒤집었다.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복면의 인영은 눈을 부릅뜨고서 죽어 있었다.
꺾어지듯 힘없이 늘어진 목에서는 피가 아직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긴 그 찰나적인 순간에 피가 멎었을 리 없다.
'한칼에 목의 동맥이 찔렸군. 즉사다.'
간단한 솜씨가 아니었다.
감천형은 인영이 쓰고 있던 복면을 벗기려고 그 복면에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이었다.
음산한 빛이 소리도 없이 감천형의 배후에서 그를 무찔러왔다.
날아든 것은 한 자루의 검이었다.
검이되, 기척도 없고 검기조차 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비할 바 없이 빨랐다. 감천형이 그 기척을 느꼈을 무렵에 그 검세는 이미 그와 일 척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도달해 있었다.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천둥벼락에다가 빗소리까지 요란하니 제아무리 이목이 영민(英敏)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평소와 같을 수가 없었다. 인영의 복면을 벗기기 위해서 손을 내밀었던 감천형은 발끝에 힘을 주면서 그대로 앞으로 몸을 내던졌다.
그의 신형이 마치 엎어지듯이 앞으로 돌진했다.
찰나간에 그의 신형은 반 장 앞으로 튀어나갔다.
하지만 검세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쫓아왔다.
오히려 더욱 빨라진 것 같았다.
검이 이르기 전에 날카로운 검기가 느껴졌다. 상대가 이미 검기를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정도라면 검이 한 치 이내에 이르게 되면 살이 갈라지고 피가 튀게 되리라.
심상치 않음을 느낀 감천형은 앞으로 날린 몸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대로 엎어져 버렸다.
그리고 바닥에서 반 바퀴를 그 여세로 구르게 되자 그는 비로소 어둠 속에서 자신을 향해 날아들고 있는 검의 실체를 볼 수 있었다.
그의 패도를 든 손이 반원을 그리며 검날에 부딪쳐 갔다.
쨍!
패도를 미처 뽑을 여가가 없었던 감천형은 패도를 도갑(刀匣)째로 쳐내어 상대의 검을 막았다.
보통이라면 일단 숨을 돌릴 틈을 얻은 셈이다.
하지만 상대의 검세는 신랄무쌍(辛辣無雙)한 데다, 그 솜씨 또한 기고(奇高)하여 검과 도갑이 부딪치는 순간에 검신을 미묘하게 비틀었다.
그러자 검이 그의 도갑에 부딪히고 튕겨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맞닥뜨리는 찰나에 슬쩍 미끄러지면서 오히려 도갑을 타고서 무서운 속도로 감천형의 손목을 향해 돌진했다.
검광이 어둠 속에서 유성과 같이 일며 날아들었다.
감천형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굳어졌다.
상대의 검술이 이처럼 기묘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건곤무적이라던 독고해의 대제자였다. 그가 능력이 없었다면 구대문파에서 그에게 맹주 대행의 자리를 맡길 리가 없었을 터였다.
감천형이 슬쩍 손을 비틀자 도갑이 빙그르르 회전했다.
거기에 붙어서 달려들던 검이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었다.
순간, 감천형의 손에 들려 있던 패도가 도갑째로 상대에게로 불쑥!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그의 손은 패도의 손잡이를 잡았다.
째애앵…….
섬광이 번쩍이는가 싶은 순간에 용이 신음하고,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한 음향과 함께 패도가 그의 도갑을 벗어났다.
상대의 가슴을 향해서 도갑을 던져 버리고, 그 서슬을 이용하여 패도를 뽑아낸 감천형은 일성 고함과 함께 벼락치듯이 패도를 휘둘러 상대를 공격해 갔다.
어둠 속에서 도광(刀光)이 세차게 일었다.
"검을 놓아라!"
감천형이 꾸짖듯 소리쳤다.
"흥!"
하지만 상대는 냉소를 터뜨림과 동시에 오히려 앞으로 질풍처럼 전진하면서 검을 찔러왔다. 버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듯한 움직임.
감천형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대의 검법이 날카롭기 이를 데 없는 데다가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은 듯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이다.
번쩍! 꽝 꽈르르…….
번갯불과 함께 뇌성이 작렬했다.
찰나간에 대청 안이 밝아졌다.
"너는?"
순간, 상대를 알아본 감천형의 눈에서 경악이 튀어 올랐다.
너무도 뜻밖이었다.
상대는 어둠 속에서도 쉽게 눈에 띌 수 있는 백의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백의를 입은 사람은 몸집이 왜소했다.
여자였다.
여자일 뿐만 아니라, 감천형이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사매?!"
감천형이 어이없는 듯 신음을 흘리며 패도를 거두었다.
어둠 속에서 그를 공격했던 사람은 정말 어이없게도 그의 사매인 독고경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뜻밖인 일은 그 다음에 발생했다.
그가 검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독고경이 차갑게 코웃음 치면서 그대로 검을 찔러오는 것이 아닌가?
"사매!"
감천형이 다급히 소리쳤다.
정말 다급하게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고서도 공격해 올 것은 상상치도 못한 일이었기에.
스파앗!
그의 어깨에서 혈화가 피어났다.
감천형이 신형을 트는 것이 조금만 늦었다면 스치는 것이 아니라 팔이 하나 날아갔으리라.
장난이 아니었다.
가슴이 섬뜩해진 그는 휘청 몸을 뒤로 젖혀 그 검세를 피하며 수중의 패도를 앞으로 질러냈다.
어차피 공력에서는 그가 우위였다.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그녀의 공세는 멈출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러나 그녀의 검세는 전혀 거리낌이 없다.
감천형이 아슬아슬하게 검세를 피하자 그녀는 검신을 가볍게 비틀었다. 그러자 검끝에서 불꽃이 튀듯이 검화(劒花)가 피어 올랐다. 하나둘이 아니라 한꺼번에 다섯 개가 일었다.
"항마법화(降魔法華)! 무슨 짓이냐? 사매! 나란 말이다! 나……!"
그 검세를 본 감천형이 대경하여 고함쳤다.
검은 백병지왕(百兵之王)이다.
누구나 쓸 수 있지만, 또한 경지에 이르기에 가장 어려운 것이 검이라고 하였다.
그러한 검을 쓰면서 손에 익고 법(法)을 수련하여 검으로써 술(術)을 조화할 수 있게 되면 검을 따라서 바람이 인다. 그것을 검풍(劒風)이라 한다.
아무나 검을 휘둘러 이는 바람은 검풍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이 검을 휘둘러 일어나는 바람은 그저 바람일 뿐이다. 상대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고수의 검에서 이는 바람[劒風]은 생사를 결(決)하는 위력이 있다.
그렇게 검풍을 일으킬 능력을 가지게 되면 검꽃[劒花]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검이 빛에 반사된 것은 검광(劒光)이다.
그러한 검광을 형체를 갖추어서 상대에게 정말 위협이 되도록 만들어낸 것이 바로 검화, 검의 꽃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검화는 검을 통해서 자신의 진력(眞力)을 토해내는 것이고, 또한 검광이 그대로 잔상을 유지할 수 있도록 검을 대단히 빠르게 움직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위협적일 수밖에 없다.
검을 휘둘러 자유자재로 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은 그가 검도고수(劒道高手)임을 의미한다.
그러한 검화로써 이루어진 검법은 당연히 상승의 검법이고, 지금 독고경이 펼친 항마법화는 절진 신니가 세상에 자랑하는 72수 항마연화검법(降魔蓮花劒法) 중의 절초(絶招)였다.
매섭지 않을 수가 없었고, 감천형도 허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사매 독고경임을 알아본 이상, 마음 놓고 그녀를 공격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사정을 보지 않고 그를 죽일 듯이 공격해 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이 살기로써 번뜩였다.
찰나간에 독고경은 숨 쉴 틈도 없이 칠팔 검을 공격했고 감천형은 막다른 곳까지 몰렸다.
"사매! 손을 멈추지 않으면……!"
소리치던 감천형의 눈에 빛이 일었다.
그처럼 무섭던 사매의 검세에 파탄이 이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고수는 틈을 놓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고수라고 불릴 자격이 없을 터이다.
감천형은 사매의 검세에 빈틈이 이는 것을 발견하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수중의 패도를 쓸어냈다.
쨍! 쨍그렁…….
그처럼 영교(靈巧)하게 감천형의 패도를 피하며 날아들던 검세가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그대로 감천형의 패도와 맞닥뜨렸다.
어이가 없었다.
그처럼 강력했던 그녀의 검세.
그렇게 강했던 그녀의 검세가 감천형의 일도와 마주치자 거기에 실린 힘을 견디지 못하고 검을 놓치고 만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나직한 신음과 함께 그녀가 뒤로 비틀거리면서 물러나는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했다.
"사매!"
그것을 보고 감천형이 놀라 소리쳤다.
그는 기회가 찾아오자 그녀를 물리치기 위해서 패도에 진력을 실어 사용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상황을 반전시킬 수 없도록 그녀의 공세는 험악하고도 무서웠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일격에 그녀가 검을 떨어뜨리고 저렇게 물러날 줄이야.
당황한 감천형이 그녀를 부축하려고 할 때였다.
"흥!"
독고경이 싸늘히 웃으면서 어둠 속에서 그의 가슴을 쳐왔다.
그것은 또 한 번의 기습이었지만 한번 당한 바 있었던 감천형은 이미 암중에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신형을 흔들어 그녀의 공격을 슬쩍 피하면서 왼손으로 그녀의 일장을 그대로 받아넘겼다.
팍!
파공음과 함께 나직한 신음이 일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독고경은 그와 일장을 마주치자 마치 허수아비처럼 쓰러져 버리고 만 것이다.
"사매……."
감천형이 그녀를 불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쓰러진 그녀는 그의 부름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백의를 입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쓰러져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문득 불길한 느낌이 든 그는 엎어진 그녀의 마혈을 짚으면서 손목을 잡았다.
맥을 보려는 것이다.
'이럴 수가?'
그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녀의 맥은 정말 미약했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맙소사! 사매!"
그는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다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급한 김에 방금 진력을 뿜어냈었다. 그런데 그녀가 이처럼 심한 타격을 받을 줄이야.
그러나 그녀를 안아 일으킨 그는 그녀의 전신이 피투성이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대청 안이 너무 어둡고, 상황이 급박하여 알아보지를 못했을 뿐이었다.
"사매! 정신 차려라. 사매……."
그녀가 혼수상태임을 본 감천형이 다급히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죽은 듯 늘어져 있을 따름이다.
괴이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여기 있던 홍 낭랑을 비롯한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그녀가 여기에 있는 것일까?
그녀는 무엇 때문에 왜, 여기에 온 것일까?
의문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백의를 온통 선혈로 물들이고 있는 이 상처는 대체 어디에서 입은 거란 말인가…….
하지만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감천형의 안색이 문득 굳어졌다.
"누구냐?"
그가 소리쳤다.
동시에 대청이 밝아졌다.
대청안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야말로 자신의 손가락을 내밀어도 제대로 볼 수 없는 그 어둠으로 인해, 감천형은 독고경에게 기습을 당했었다.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고도 왜 그처럼 자신을 공격했는지, 어디서 이렇게 심한 상처를 입은 것인지 의문에 잠긴 그가 인기척을 느낀 순간, 불이 밝혀졌다.
한 사람이 대청 탁자에 마련된 초에다 불을 붙이고 있었다.
비록 촛불 한 자루였지만, 그 빛은 감천형과 같은 고수에게는 가히 대낮과 같은 밝기로써 다가왔다.
흑의에 경장을 했다.
그리고 얼굴은 몽면(蒙面)이라 알아볼 수가 없다.
체형으로 보아 여자인 것은 분명했다. 그녀는 감천형은 쳐다보지도 않고 침착한 태도로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녀가 대체 언제부터 이 대청에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한 복장으로 어둠 속에 숨어 있었다면 쉽게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 당연했다.
"당신은 누구요?"
감천형이 물었다.
"……."
흑의여인은 대답없이 얼굴을 들어 감천형을 보았다.
몽면을 하고 있어서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다. 옆에서 촛불이 일렁이며 그녀의 모습을 어둠 속에서 흔들어대니 기괴하기조차 했다. 복면(覆面)이란 것은 얼굴의 일부분이 드러난다. 하지만 몽면이란 것은 면사(面紗) 같은 것으로 눈조차 보이지 않도록 감싸는 것을 의미한다.
아예 얼굴이 없는 사람이 쳐다보고 있는 듯하니 괴이할 수밖에 없다.
"홍 낭랑은 어디 있나?"
그녀를 보고 있던 감천형이 다시 물었다.
"그건 알 필요 없소. 귀하의 사매나 내려놓고 이곳을 떠나시오."
그 말에 대한 상대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다.
게다가 목소리 또한 청아하여 나이가 별로 많지 않은 듯했다.
"나를 아나?"
감천형이 흑의몽면녀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그녀가 사매를 내려놓고 가라는 말은 그가 누구인지 안다는 것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귀하가 누군지 알 필요는 없소. 귀하는 조용히 이곳을 떠나기만 하면 되오."
흑의몽면녀가 여전히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의 말에 감천형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네게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 말에 흑의몽면녀는 날카롭게 웃었다.
"독고해의 대제자라는 당신의 신분이 지금에 와서도 당신을 지켜줄 것 같은가?"
과연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감천형은 흠칫, 했다가 이내 방성대소(放聲大笑)했다. 그 웃음소리에는 은은히 노기가 깃들어 있었다.
"좋아, 좋아……. 오늘 감 모(甘某)는 오랜만에 임자를 만난 것 같군?"
웃음을 그친 그는 신광이 형형한 눈빛으로 흑의몽면녀를 쏘아보았다.
"어디 무엇이 이 감 모를 곤란케 할 수 있는지 볼까?"
"흥! 사부의 시신조차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주제에 큰소리는……."
뒤를 잇는 흑의몽면녀의 비웃음에 감천형의 안색은 돌변하고 말았다.
맹주의 죽음은 당세무림의 비밀 중 하나다.
그리고 그 시신이 사라진 일은 더 더욱 깊이 감추어진 일이었다.
그런데 상대가 그것을 안다는 것인가?
"너는 누구냐?"
감천형이 물었다.
단순한 물음이 아니었다.
냉엄한 물음과 함께 그가 한 걸음을 옮겨놓자, 가공할 무형의 기세가 일어났다. 주위의 공기가 파동칠 정도의 기세였다.
'과연 독고해는 대단했구나! 그의 제자조차 이런 정도라니…….'
무형의 기세가 자신을 향해 거대한 담장이 무너지듯이 밀려옴을 느끼자 흑의몽면녀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그녀의 태도에서는 조금도 흔들림이 보이지 않는다.
"당신에겐 아직 자격이 없지……."
그녀는 냉랭히 말하면서 흰 손을 들어서 짝! 하고 손뼉을 쳤다.
그것이 무슨 신호임은 삼척동자도 알 일.
…….
그러나 괴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가 손뼉을 치자, 감천형은 암중에 긴장을 했지만 실제로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사람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무슨 변화가 인 것도 아니었다.
흑의몽면녀의 눈에 괴이한 빛이 일었다.
당황일까?
그녀는 다시 손을 들어 짝짝! 두 번 손뼉을 쳤다.
그 순간이었다.
짝짝짝…….
마치 호응하듯이 대청 안에서 손뼉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뒤를 잇는 낭랑한 웃음소리.
"핫하하하…… 비 오는 밤에 미녀의 손뼉 소리는 이제 보니 또 다른 정취가 있군 그래."
"……!"
흑의몽면녀의 눈에 경악이 드러났다.
대청 바깥도 아니고 내전 쪽에서 웃음소리의 여운을 담고서 백의의 인영이 서서히 걸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은한 촛불의 불빛에 드러난 백의인의 모습은 탈속(脫俗)한 기품이 있어 묘한 느낌이었다. 절세의 미남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절세(絶世)라는 말을 붙이는 데는 부족함이 없는 모습.
백의유생은 흑의몽면녀가 놀란 빛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자 씨익, 미소를 지었다.
"소저의 눈은 매우 크고 아름답군. 그 보기 싫은 몽면만 없으면 더욱 좋을 것 같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흑의몽면녀가 싸늘하게 소리쳤다.
"닥쳐! 그들을 어떻게 한 거냐?"
"그들?"
짐짓 눈을 크게 떴던 백의유생은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아, 난 또…… 저 대청 밖에서 자고 있는 사람들 말인 게로군. 그들은 너무 단잠에 빠져 있어서 내가 보기에는 내일 아침까지는 깨어나기 힘들 것 같던데?"
흑의몽면녀의 몽면 속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로서는 단 한 번도 저런 사람을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바로 그때였다.
"사, 사숙?"
나타난 사람을 바라본 감천형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사숙이라고?"
그 말을 들은 흑의몽면녀의 가슴이 일진 진동을 일으켰다.
사숙이라니…….
저 백의유생이 패왕신도 감천형의 사숙이란 건가?
그녀의 놀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백의유생은 감천형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머금고서 가볍게 고개를 끄떡여 아는 척을 했다.
그 사람이야말로 중조산 무우곡을 나서면서 헤어졌던 감천형의 사숙인 한효월이었다.
한효월은 마치 떠나 있었던 집에 돌아온 듯 태연한 태도로 흑의몽면녀를 보았다.
"왜, 당신은 믿어지지 않소?"
"……."
흑의몽면녀는 잠시 말없이 묵묵히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군……. 당신이 바로 감천형이 독고해의 유명(遺命)을 받고 모셔온다던 그 사문의 어른인 모양이로군."
그녀의 말은 실로 놀라웠다.
감천형이 중조산으로 사조를 만나러 가는 것은 무림맹 내에서도 극비에 속한 일이었다.
그런데 대체 이 흑의몽면녀의 신분이 무엇이길래 그것까지 안다는 것인가?
'도대체…….'
감천형은 기가 막혔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더했다.
"당신은 아직 중조산에 있는 것으로 알았었는데……."
나직이 신음을 흘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본 교가 당신을 과소평가했군."
차갑게 중얼거리던 그녀의 말은 한효월의 태연한 음성에 끊어지고 말았다.
"과연 제천교(齊天敎). 이목이 대단하군!"
그의 말에 흑의몽면녀의 전신은 벼락을 맞은 듯 크게 떨렸다.
"당신이…… 어떻게 본 교를?"
그녀의 놀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효월은 피식, 웃었다.
"제천교의 행사가 신비롭기는 하지만, 이미 활동을 시작한 이상 언제까지나 꼬리를 감추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지. 이제 서론을 끝낼 때가 된 것 같군."
말과 함께 그는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그의 몸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는 흑의몽면녀는 날카롭게 한소리 외치면서 한효월을 향해서 손을 쳐들었다.
미미한 파공음이 일었다.
그것과 함께 그녀는 한효월은 쳐다보지도 않고 대청 문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감천형이 어이없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보자보자 하니, 네가 나를 만만하게 본 모양이로구나!"
그는 아직도 독고경을 부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쪽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고 있었던 그는 오른손의 패도를 휘둘러서 그녀를 공격했다. 얼핏, 부자연스러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기다리고나 있었던 듯이 날카롭고도 강력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가 휘두르는 칼은 패도(覇刀)라고 불린다.
그 의미는 그만큼 강력한 위력이 있다는 뜻이다.
"치잇!"
묘한 소리와 함께 흑의몽면녀가 빙글 몸을 돌려서 그 패도의 기세를 피하면서 여전히 밖으로 달려나가려고 했다.
그녀의 경공은 정말 뛰어났다.
원래부터 그녀는 퇴로를 보아둔 듯, 감천형의 움직임과 동시에 옆으로 몸을 날려 그대로라면 독고경을 부축하고 있는 감천형으로서는 그녀를 잡기가 힘들 것 같았다.
그러나, 세상일은 종종 뜻대로 되지 않는다.
흑의몽면녀는 한 가닥 질풍이 자신의 앞에서 날아듦을 알고는 안색이 돌변했다.
백영(白影).
바로 한효월이었다.
그는 언제 나타난 것인지 이미 그녀의 앞에서 그녀를 향해 손을 쓰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그를 향해서 달려간 꼴이다.
뒤에서 그가 쫓아올 것은 미루어 충분히 짐작한 일이다.
그의 나이가 젊다 해도 최소한 감천형의 사숙인 이상, 그녀의 암기 공격에는 쓰러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아예 처음부터 그를 공격한 척하고 감천형 쪽으로 몸을 날린 그녀였다.
그런데, 뒤가 아니고 앞에 있다는 건가?
대체 언제 그가 앞으로 나타난 것인지 알지도 못했던 그녀는 안색이 돌변해 손을 흔들었다.
검은 소매가 너울처럼 펄럭이는 가운데 다시금 파공음과 함께 빛이 일었다.
"고약하군! 손만 쓰면 암기인가?"
한효월이 미간을 찡그렸다.
순간, 그의 모습이 흑의몽면녀의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
동시에 그녀는 세찬 바람이 자신의 얼굴을 향해서 날아듦을 느꼈다.
"하하…… 과연 어떤 얼굴이기에 그처럼 독심(毒心)인지 봐야겠군!"
한효월의 웃음소리가 낭랑히 들렸다.
"앗?"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흑의몽면녀가 급급히 물러나고 있었다.
한효월.
그의 손에는 방금까지 그녀가 쓰고 있던 몽면이 들려 있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 몽면 중 얼굴 부분이 찢겨진 것이었지만.
어둠 속에서 희디흰 얼굴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시였다.
놀란 외침과 함께 주춤 물러났던 흑의몽면녀, 아니, 이젠 흑의미녀가 된 그녀가 마치 놀란 기러기와 같이 몸을 날려 대청을 벗어났던 것이다.
한효월은 무슨 까닭인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 그녀를 쫓지 않았다.
"감히 어딜!"
감천형이 노해서 그녀를 뒤쫓으려고 했다.
그러자 한효월이 태연히 말했다.
"우리가 쫓지 않아도 쫓을 사람이 있을 테니 급히 쫓아갈 필요는 없어."
그 순간, 밖에서 일진 격돌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뒤를 잇는 억눌린 신음 소리.
그와 함께 방성대소가 어둠을 뒤흔들며 터져 나왔다.
"우와아핫하하- 그 녀석 귀신 뱃속까지도 들여다볼 놈이로군 그래."
돌변하는 사태에 감천형이 놀라 밖으로 뛰쳐나갔다.
밖으로 나온 그는 담장을 넘어가는 흑영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쫓아서 두 팔을 벌리고 날아가는 거대한 붕새와 같은 인영을 발견했다.
방금의 웃음소리는 그의 것인 듯하였다.
비는 이미 거의 그친 상태였다.
사방은 어둡긴 했지만 하늘을 날아 발끝으로 담장을 찍고는 사라지는 그 모습이 너덜너덜한 걸레와 같은 옷을 입고 등 뒤로 커다란 호로를 매달고 있음은 충분히 알아볼 만했다.
"독행신개?"
그를 본 감천형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가 개방의 사람인가?"
"그렇습니다.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가 맞을 겁니다. 그는 당금 개방 방주의 사숙이며 그간 강호상에서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는데…… 난데없이 여기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정말 뜻밖이로군요."
말끝을 흐리는 패왕신도 감천형.
그는 정말 머리가 복잡해졌다.
상황이 점점 더 복잡하고 어려워지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거지가 없는 곳은 없다.
거지가 없을 만큼 풍족한 세상은 찾아온 적이 없으니 그것은 당연했다.
그러므로 거지들의 모임인 개방은 세상에서 가장 큰 세력 범위를 가지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방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개방은 지난 날 일진의 위난(危難)을 겪은 적이 있었다. 그 타격은 정말 커서 그 이후로 개방은 강호상에서의 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개방이 갑자기 여기에 나타났다는 것인가? 감천형이 본 사람이 정말 일개 개방의 거지가 아닌 독행신개라면 단순한 우연일 수만은 없을 터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면 개방은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일까.
천하무림맹이 전력을 기울이고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데 그들은 안다는 것인가.
지난 수십 년 간 강호상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던 그들이…… 그렇다면 그들은 단순히 숨을 죽이고 있기만 했던 것은 아니라는 말인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수많은 생각을 뇌리에서 스쳐 보냈던 감천형은 문득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한효월을 경각하고는 멈칫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사숙께서는 어떻게 여기에?"
한효월은 희미하게 웃었다. 처음 볼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그의 저 웃음은 묘하게 신비롭다.
"사전에 조금 알아볼 것이 있어서……."
말끝을 슬쩍 흐린 그는 아예 말을 돌려 버렸다.
"아직은 확실한 게 없으니 우리도 일단은 돌아가도록 하지."
상대는 사숙이다.
그가 이렇게 말을 하는데 더 이상 캐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감천형은 문득 다시 묻는다.
"그 초동…… 아니, 아성은 어디로 갔습니까?"
"잠시 시킨 게 있다."
더 이상 물을 수는 없었다.
그의 품에는 정신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진 사매가 안겨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