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四首 망산지현(邙山之賢)
-현자를 찾아가다.
사부가 남겨놓은 단서(端緖)를 발견하다.
낙양에서 바라보이는 산 하나가 있다.
북쪽을 가로막는 병풍과 같은 그 산의 이름은 망산(邙山)이다. 낙양의 북쪽에 있다 하여 북망산이라 불리게 된 이 산이 죽음의 대명사로 알려진 것은 동한(東漢) 이래로 성탕(成湯), 한(漢)의 광무제 등 제왕(帝王)에서 왕후장상까지 너도나도 묘를 쓰면서부터이지만 이곳의 산수가 나빴다면 묘를 쓸 리가 없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그 옛날 백이와 숙제가 굶어 죽었다는 수양산(首陽山)이 바로 이 망산의 정상이다.
어쨌거나 낙양에서 보게 되면 이 망산은 온통 공동묘지임에 분명하다. 묘를 쓴 곳이 주로 산의 남쪽인 까닭이다.
귀신이 호곡하고 금방이라도 도깨비가 방망이를 휘두르며 뛰쳐나올 듯한 안개…… 자칫 한 발을 잘못 디디면 발 밑에서 사람의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릴 것 같다.
밤에 망산으로 올라가면 사방에서 귀신이 춤을 출 것 같지만 어디나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감천형은 은밀히 맹주부를 빠져나온 후, 전력으로 망산을 향했다.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오직 하나, 그의 삼 사제인 거령신권 천무 한 사람뿐이었다. 그나마도 혼자 간다는 것을 좌백이 결사반대하여 딸려보낸 터이다.
그가 망산에 들어선 다음에도 쉬지 않고 달려감을 보자 뒤를 따르던 천무가 물었다.
"아직 멀었습니까?"
"멀지 않아, 이곳만 빠져나가면 된다."
그럴듯했던 산세는 점점 음침해지고 있었다.
으스름한 안개가 스멀거리는 가운데 인광(燐光)이 귀신의 웃음처럼 빛을 발하며 여기저기에서 명멸하고 그 가운데로 무덤이 겹겹이 쌓이듯 널려 있었고 간혹 파헤쳐진 무덤에서는 흰 백골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음이 보인다.
우우우∼
새벽이 멀지 않았음에도 어디선가 들리는 늑대의 울음소리가 머리끝이 곤두서게끔 분위기를 더한다.
자리가 좋은 곳에는 힘있는 사람들이 묘를 쓰고 힘없는 사람들은 이처럼 뒤쪽으로 밀려나 묘를 쓰다 못해서 나중에는 아예 시체만 끌어다 놓는 사람까지 생겨났으니 묻히지 않은 시체를 보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고, 그 시체를 뜯어먹으러 오는 짐승들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까.
안개가 점점 짙어지는가 싶더니 문득 어디선가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맑은 물이 흘러가는 계곡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를 더 달려가니 경색이 일변했다.
송림이 하늘을 찌를 듯 울창한 가운데 계곡의 끝이 드러난 것이다.
"이젠 어디로 갑니까?"
감천형이 아직 멈출 기색이 없자 거령신권 천무는 의아하여 입을 열었다. 그는 원래 무공에 미치다시피 한 사람이라 무공 외에는 관심이 없어 자연히 말수도 적었다. 그럼에도 그가 자꾸 입을 열 만큼 주위 정경은 어딘지 기이하였다.
"이 송림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안으로요? 계곡이 끝난 것 같은데요?"
"겉보기만 그렇게 보인다. 나도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었으니까. 사백은 외부인을 접견하기를 즐기지 않으니 이런 안배를 펼쳐 놓은 게지."
"음…… 그럼 이 송림에 무슨 기진(奇陣)이라도 펼쳐져 있는 모양이로군요."
천무는 눈을 반짝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시간이 이르긴 하다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우선 실례를 무릅쓸 수밖에 없구나."
말을 마친 감천형은 송림의 안쪽에다 소리쳤다.
"천형이 사백을 뵈러 찾아왔습니다!"
그의 외침이 메아리를 끌면서 주위를 맴돌았다.
그의 외침은 진기전성(眞氣傳聲)의 방법으로 방출된 것이라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송림 안으로 전달되어 자다가라도 들을 수 있었다.
푸드득!
그것을 증명하듯이 송림에서 밤새[夜鳥]가 놀라 날아올랐다.
하지만 시간이 제법 흘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럼에도 묵묵히 서 있기만 하던 감천형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들어가 봐야겠다."
"더 불러보지 않고 말입니까?"
"음, 계속 소리를 친다면 공연히 주위를 경동시킬 우려도 있고 우선은 실례를 무릅쓰고서라도 안으로 들어가서 사백을 뵙고서 용서를 청해야겠다."
말과 함께 감천형은 앞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가 가는 길을 떨어지지 말고 따라오너라. 사부님의 말씀을 따르면 이 송림은 사백의 손에 의해 구궁연환(九宮連環)에 오행(五行)을 더하여 한 걸음을 잘못 디디면 영원히 헤어날 수 없다 하셨다."
그들이 채 열 걸음을 들어가기 전이다.
"서시오!"
날카로운 음성이 날아들었다.
그 음성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그들의 앞에는 한 사람이 나타났다.
나타난 사람은 뜻밖에도 나이가 열두엇 정도에 불과한 소년이었다. 푸른 도복을 입은 소년의 얼굴은 나이답지 않게 싸늘했다.
그가 나타남을 본 감천형은 미소를 떠올렸다.
"사제, 오랜만이구나."
"……."
도동(道童)은 말없이 그를 향해 머리를 살짝 숙여 아는 체 예를 표할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니 사제가 사백께 말씀을 좀 전해주겠느냐? 천형이 급히 사백을 뵙고자 한다고……."
"사부님께서는 폐관(閉關)에 드셔서 하인(何人)을 막론하고 일체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죄송하지만 돌아가 주십시오."
도동은 앳된 얼굴에 전혀 표정을 떠올리지 않고서 간단히 머리를 저었다.
그가 이처럼 간단히 거절을 할 줄은 천만뜻밖인지라 일순 멍청해졌던 감천형은 어색한 웃음을 떠올렸다.
"나는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 사백을 반드시 만나뵈어야만 한다. 만나고 아니고는 사백님께서 결정하실 터이니 사제는 말씀만 좀 드려다오."
"죄송합니다. 돌아가십시오."
말만 하는 것이 아니다.
몸을 돌려서 송림 속으로 사라지려는 도동을 보자 감천형의 안색이 달라졌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일진 바람이 이는 순간에 자신의 앞에 태산과 같은 거구의 천무가 나타나 길을 가로막고 있음을 본 도동이 미간을 찡그리고서 차갑게 꾸짖었다.
"내가 보기에는 네가 버르장머리가 없구나. 해서, 사백을 만나뵙고서 죄를 청하더라도 우선 너를 혼내주어 세상 넓은 것을 알게 해주어야겠다."
말과 함께 천무는 불쑥 손을 내밀어 그를 잡으려 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이런 행패를!"
도동이 노해 차갑게 부르짖으면서 고사리 손을 들어 식중이지를 꼿꼿이 세운 채로 그 거대한 천무의 손바닥을 찔러갔다.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두 손은 실로 엄청나게 차이가 나서 천무의 손에 잡히면 그 도동의 손은 아예 보이지도 않을 것인데도 이 도동은 도무지 겁을 모르는 듯 정면으로 그를 공격해 갔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천무는 달랐다.
냉소와 함께 도동을 잡아가던 그는 도동의 일식을 보고는 안색이 싹 달라졌다.
"설마, 적성지(摘星指)인가?"
그는 한소리를 흘려내면서 도동을 잡아가던 손바닥을 슬쩍 뒤집어 후퇴함과 동시에 몸을 빙글 돌리면서 발로 도동의 아랫도리를 쓸어갔다. 그 기세가 얼마나 놀라운지 그 발길질을 따라 흙먼지가 구름처럼 일어났다.
쏴아악-
발길질이 마치 거대한 노를 휘저은 듯이 닥쳐오자 어지간한 도동도 안색이 달라졌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물러나지 않고 찔러가던 손가락을 변화시키지 않고 이번에는 아래를 향해 튕겨냈다.
쐐앵!
칼끝처럼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일며 그의 손가락 끝에서 인 지풍(指風)이 천무의 오른발 발등에 있는 충양(衝陽)을 찍어갔다.
충양혈은 족궐음간경의 요혈인지라 감히 태만할 수가 없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천무는 도동의 무공이 예사롭지 않자 놀라 탄성을 토해냈다.
"정말 제법 하는구나!"
한소리 고함과 함께 그는 쓸어내던 발을 옆으로 옮기는 기세를 빌어 몸을 이동하면서 도동을 향해서 일권을 질러냈다.
산악을 무너뜨릴 듯한 권풍이 일었다.
하지만 도동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영교(靈巧)한 신법으로 그의 일권을 피해내고는 여전히 그 날카로운 지력으로 반격을 가해왔다.
"좋아, 좋아! 오늘 이 천무가 적수를 만났구나."
천무가 도동의 반격을 보고는 껄껄 웃었다.
그는 무공을 밥 먹기보다 좋아하는 터라 이 도동의 무공이 예상을 초월하여 이미 강호일류에 근접해 있음을 보고는 흥미가 동한 듯했다.
그 광경에 감천형은 기가 막힌 듯 머리를 젓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자 도동은 다급하여 소리쳤다.
"멈춰요! 어딜 가는 건가요!"
도동이 감천형의 길을 막으려고 하자 천무가 다시 천둥처럼 웃었다.
"이런이런, 넌 나를 정말 바지저고리로 생각하는 게냐? 네 상대는 여기 있지 않느냐?"
원래 그의 의도는 여기에 있었다.
그는 사백이란 천기선생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무례를 범하더라도 나중에 용서를 빌면 그만일 터이고 그사이에 감천형은 당연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그때였다.
"홍수(洪秀)야, 그들을 들어오도록 해라."
맑은 음성이 송림 안쪽에서 들려왔다.
그 음성은 별로 크지 않았지만 마치 누가 귀에다 대고 말한 듯이 낭랑하고도 또렷하게 들렸다.
송림을 벗어나자 경색은 정말로 일변했다.
막힌 듯 보였던 계곡은 끝이 아니었다.
송림의 안쪽으로는 아담한 계곡이 존재했고, 그 계곡의 가운데에는 한 간의 모옥(茅屋)이 그림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내심 분을 참지 못해서 얼굴이 붉어져 있는 도동에게 그들이 안내된 곳은 그 모옥의 대청이었다.
대청이라고 해서 뭐 그리 큰 것은 아니고 겨우 사방 서너 간 정도인, 가운데 나무 탁자가 놓인 곳에 불과했다. 별다른 장식도 없고 벽에는 손수 그린 듯한 묵화 한 점이 걸려 있는 것이 다였다.
한마디로 정갈한 분위기.
그들이 의자에 앉아 잠시 기다리고 있자 도동이 다시 나왔다.
"사부님께서 곧 나오실 겁니다."
"폐를 끼쳐서 죄송하구나."
감천형의 말에 도동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쪽문으로 사라졌다.
그것을 보고 천무가 씨익, 웃었다.
다시 조금 시간이 지나자 끼익끼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쪽문이 열리면서 도동이 윤의(輪倚) 하나를 밀면서 나타났다. 조금 특이한 생김의 의자, 양쪽에 큰 바퀴가 달렸고 그 위에는 동파건(東坡巾)을 쓰고 소매가 넓은 유삼(儒衫)을 입은 50대 후반인 노인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조금 말랐고 눈꼬리가 조금 올라간 눈빛은 깊었고 전신에서는 선비 특유의 맑은 기품이 느껴졌다.
"천형이 사백을 뵙습니다."
그가 나타나자 감천형은 그를 향해서 길게 읍했고, 천무 또한 그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산속.
깊은 숲임을 의미하듯 공기가 틀렸다.
이따금 아침을 노래하는 새들의 소리가 들린다. 안개가 자욱히 깔린 가운데, 모옥에는 그야말로 정적이 흘렀다.
감천형의 무거운 음성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나마도 그 음성이 멎은 다음, 들리는 것은 정말 새소리뿐이었다.
감천형과 천무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고 있는 천기선생을 바라보면서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길게 탄식을 하면서 눈을 떴다.
"바보 같은…… 그렇게 말렸건만 기어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 만단 말인가?"
감천형의 설명을 듣고 한참 동안이나 침묵하던 그가 한 말이다.
"사백께서는 사부님이 무엇을 하셨는지 알고 계셨었습니까?"
"네 사부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더냐?"
되묻던 천기선생은 머리를 끄떡였다.
"하긴…… 말해 무엇 할까. 알아도 소용없는 일은 모르는 것이 옳겠지."
"대체 그것이 무엇입니까? 무슨 일이기에……."
감천형의 말은 끝나지 못했다.
"돌아가거라."
천기선생이 머리를 저으며 그의 말을 막았기 때문이다. 말과 함께 그는 윤의를 돌려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사백!"
감천형이 소리쳤다.
지붕이 들썩거릴 정도로 강한 음성이었다.
"적은 우리를 압니다. 그런데 저는 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대로 간다면 천하무림은 하루아침에 패망의 길로 떨어질런지도 모릅니다. 지난 30년 간…… 사부님께서 그처럼 힘들여 이루어놓은 무림의 평화가 단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외면을 하시겠습니까?"
감천형의 음성은 피를 토하는 듯했다.
그의 태도가 뜻밖인 듯 천기선생은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세상에는 용기만으로 될 수 없는 일들이 있는 법이다. 네 사부가 하지 못한 일…… 어찌 내가 할 수 있겠느냐? 나로서는 네게 도움을 줄 수가 없구나. 돌아가거라."
어조는 조용했지만 거기에 담긴 뜻은 완강했다. 그리고 그는 윤의를 돌렸다.
"죄송하지만 이대로 갈 수는 없습니다. 사백께 그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사부님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사백! 부디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쿵, 소리가 나도록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
천기선생은 등을 보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암암리에 탄식을 흘리면서 윤의 손잡이를 쳤다.
그러자 윤의는 저절로 굴러 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일진 미풍이 일며 그 앞으로 거대한 체구의 사람 하나가 막아섰기 때문이다. 천무였다.
"무슨 짓이냐, 사제!"
감천형이 소리쳤다.
천무는 감천형을 쳐다보지도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천기선생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고함치듯이 말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하늘과 같은 사부를 잃고, 그도 모자라 시신마저 도둑맞았습니다. 이러고서야 제자 된 몸으로 어찌 하늘을 볼 수 있겠습니까? 능력이 되지 못하여 피를 쏟으며 쓰러져 죽는다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 그러나 죽을 때 죽더라도 싸우다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놈들과 맞설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던 천기선생의 얼굴에 문득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아우는 제자들을 잘 두었으니 죽어서라도 그리 섭하지는 않겠군……. 좋다. 내일 저녁 무렵, 다시 오너라."
"아니, 내일 오라는 건 또 무슨 소립니까? 한시가 급한 판에……."
천무가 투덜거렸다.
그들은 이미 피진거(避塵居)라 이름하는 그 천기선생의 모옥을 나와 송림진(松林陣)을 벗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갑작스러운 일이니 뭔가 생각을 정리하고 상황을 알아볼 시간이 필요하신 거겠지……."
"하루 만에 상황을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저 꼬마 하나만 데리고 사시는, 몸도 불편하신 분이……."
아무래도 미심쩍다는 듯 천무가 다시 토를 달았다.
"의심스러우냐?"
"꼭 그렇다고 할 수야 없지만 아무리 지난날 천하를 주름잡던 분이라도 그간 세상과 담을 쌓고 사셨는데, 믿기 힘든 일이지요……. 제 생각에는 대충 정리를 하시고 내일 우리와 함께 맹주부로 나오시겠다는 뜻이 아닐까 합니다."
그의 말에 감천형은 쓴웃음을 떠올렸다.
"사백은 절대로 하산하지 않으신다."
"그건……."
"물론 하산하셔서 우릴 도와주신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그분은 지난날 크게 상심하신 일이 있어서 다시는 강호에 나오지 않을 거라고 사부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다."
천무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럼 내일 오라는 건……."
"뭔가 알아보고 우리에게 단서를 제공해 주시겠다는 뜻 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여기서 사시는 분이…… 말입니까?"
천무의 말에 감천형은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넌 그분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않아야 한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그분이 크게 상심하여 세상을 등지지 않았다면 지금 천하무림의 판도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라고 사부께서는 말씀하셨었다."
"사백이 여기 은거하신 지가 몇 년이나 되십니까?"
"잘은 모르지만 10년은 넘으셨겠지."
"몸이 불편하셔서 홀로 거동하기 힘드시고 세상과 등진 지 10년이나 된 분이 하루 만에……."
천무가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는 듯했다.
"의심스러우면 내일 와보면 알겠지?"
감천형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 또한 확신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너무 막막하여 혹시나 하여 그를 찾아왔던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
지금의 감천형이 바로 그러했다.
* * *
독고경이 감천형을 찾은 것은 그날 저녁 무렵이었다.
그가 맹주부로 다시 돌아온 것은 그날 오전.
일단 돌아온 다음, 그는 내일 다시 길을 나서야 하므로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사매 독고경이 그가 없는 사이에 돌아와 있다는 것 정도, 그녀가 돌아왔음을 알면서도 그는 일이 바빠서 그녀를 찾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녀가 그를 먼저 찾은 것이다.
아버지와 달리 그녀는 성정(性情)이 조금 찬 편이었다. 그런 가운데 성격은 급한 편이었는데, 그런 그녀가 전한 전갈은 매우 뜻밖이었다.
굳이 밤에 혼자 오라고 명시를 한 것이다.
그녀의 성미로 자신을 바로 찾아오지 않은 것도 이상한데 밤에 홀로 오라니?
* * *
화경루(花鏡樓).
독고경의 거처다.
내원(內院)에 마련된 그녀의 거처는 외원인 무림맹 총타와는 달리 화원 가운데 있는데, 얼핏 생각할 때는 호화로울 것 같지만 실제로는 호화롭기보다는 정갈한 분위기였다.
독고해는 사치를 싫어했다.
무인(武人)이 사치를 하면 정신이 흐려지고, 정신이 흐려진 무인은 이미 무인이 아니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한 그의 생각은 무림맹의 건축에서부터 이미 반영되어 무림맹주부는 웅장하되, 사치스럽지 않아 더욱 당당하다고 알려진 건축물이었다.
독고경은 2층 그녀의 침실에서 시비(侍婢)조차 물리치고서 그를 맞았다.
"무슨 일이냐?"
시비가 차를 놓고서 물러나자 감천형이 물었다.
그녀의 안색이 어딘지 모르게 상기되어 있음을 보았기에 묻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침실, 규방(閨房)에 들어온 것이 처음이라 의아하기도 했다.
"혹시 밖에 나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그녀는 대답없이 경사(輕紗) 휘장이 드리워진 자신의 침상으로 가서 뭔가를 가져다 탁자 위에다 놓았다.
작은 금합(金盒)이었다.
손바닥 안에 들어갈 듯 작은 그 금합은 매우 정교한 생김을 가졌는데 그 금합을 탁자에 내려놓은 독고경은 상기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것은 연전에 아버님께서 제게 주신 거예요."
"사부님께서 말이냐?"
"그래요. 지난번 관음초에 다녀가셨을 때 제게 주고 가셨어요."
"……."
감천형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격동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어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는 듯하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그것이 이미 4년 전이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때 말씀하시기를, 만약 내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때 이 금합을 열어보도록 하라고……."
감천형의 안색이 돌변했다.
"뭐라고? 그럼 사부님께서 설마 오늘의 일을 예측하시고 네게 이 금합을 맡겼단 말이냐?"
"나도 몰라요, 아버님의 존체를 탈취해 간 자들의 뒤를 추적하다가 문득 이것이 생각나서 돌아온 거예요. 실은 혼자 열어볼까 했었는데, 사형과 같이 열어보라고 아버님께서 말씀하신 게 생각나서……."
"나랑 같이 열어보라고 하셨단 말이냐?"
감천형의 질문에 독고경은 머리를 저었다.
"아뇨. 네가 가장 믿을 수 있다고 판단되는 사형과 같이 보라고 하셨어요."
"음……."
듣기에 기분 나쁜 말은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신비롭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대체 어떤 일이기에 이렇게 일 처리를 해야 했던 것일까.
금합은 보기보다 더 정교하고 튼튼했다. 금합을 열자 그 안에는 오직 접힌 봉서 한 장이 놓여 있을 따름이었다.
"사형이 봐요."
격동된 표정으로 그 봉서를 바라보고 있던 독고경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이 글을 너희들이 보게 된다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강호에 대란(大亂)이 발동했음을 의미한다. 겁난이 도래하면 너희들로서는 물론이고, 당금 무림 중의 그 어느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가 없다.
너희들이 이 글을 본다는 것은 그 겁난을 막기 위한 나의 마지막 승부수가 실패로 돌아갔음을 의미하는 것이니, 이제 방법은 하나뿐이다.
나의 사부님을 모셔오는 수밖에는…….>
"사부님?"
감천형과 독고경은 부지중에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버님의 사부님이라면 사조(師祖)란 말인가요?"
"그런 것 같은데……."
"우리한테 사조가 계셨어요? 사형은 알아요? 사조가 계신 걸?"
"나도 처음 듣는다. 본 문은 사부께서 고대의 비전(秘傳)을 얻어 새롭게 세우신 것으로 아는데……."
감천형의 음성에는 의혹이 가득했다.
사실이었다.
건곤무적이라고 일컫는 독고해의 사문(師門)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호상에 알려지기로는, 아니, 감천형이 아는 것도 그러했다. 건곤무적 독고해, 그의 사부는 스스로의 힘으로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사조라니…….
"여기 지도가 있어요."
독고경이 소리쳤다.
서신의 마지막에는 지도가 한 장 첨부되어 있었다.
지도에 그려진 것은 한 폭의 산수화였다.
험악한 가운데 수려한 산세가 그려진 그 지도에는 오직 <중조(中條) 무우곡(無憂谷)>이라는 다섯 글자뿐이었다.
"중조산의 무우곡이란 건가……."
감천형은 지도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아는 곳이에요?"
"아니, 들어본 적도 없구나."
"아, 여기 또 글자가 있군요."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심경월선인(尋鏡月仙人)이라는 다섯 글자가 무우곡으로 짐작되는 계곡의 아래에 적혀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심경월선인, 경월선인을 찾아라…….
"사조님의 함자가 경월선인이신가 보죠?"
"그런 것 같다."
감천형은 지도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떡였다.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대체 어떤 일이 있기에 이처럼 모든 것을 비밀로 해야 했다는 것일까.
사부에게 사문이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는 것은 감천형에게 있어 충격이었다.
모든 것이 일그러진다면 사문이라도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사부는 사문조차 밝히지 않았던 것일까. 그 의미를 느낄 수 있는 머리를 가지고 있기에 그가 받는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할 거예요?"
"찾아가야지."
"내일이라도 상황을 봐서……."
감천형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은 무거웠다.
* * *
긴급 회의가 소집되었다.
감천형의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경악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의 상황으로 보아 사부님께서는 오늘날 일어날 모든 사태를 이미 예측하고 무엇인가 안배(按配)를 남기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생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곳으로 사조님을 찾아가고자 합니다."
"나도 찬동은 하지만, 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되고 있는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으니 이런 일은 처음이구만. 으음……."
근엄한 천외유자 곽도광이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곳이 어딘지 알 수 있겠소?"
"중조산입니다."
그의 설명은 간단했다.
"또 혼자 가실 생각이시오?"
소림사의 대광 대사가 물었다.
"되도록이면 인원수가 적은 게 좋을 겁니다. 행동이 신속해야 할 것이고 비밀 유지도 필요합니다."
"내일이면 감 대행의 사백이란 분도 만나러 가야 할 텐데 언제 일을 다 처리할 수 있겠소?"
"그 일을 처리하는 대로 바로 떠날 생각입니다."
그는 굳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적의 의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사부님의 존체를 보냈다가 힘들여 다시 빼내간 것도 그러하고, 여러분을 한날한시에 이곳에 모이게 하고는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고 있음도 이해할 수 없는 점입니다. 현 상황을 종합한다면, 지금쯤 우리 맹주부는 생사가 걸린 위기를 맞아야 할 것 같은데…… 실로 괴이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
침묵이 대청을 눌렀다.
누구도 답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대문파의 장문인, 그와 같은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모인다는 것은 천하를 경동시킬 큰일이 아니라면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모아놓고서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그들이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하나뿐…….
과연 그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그때였다.
문밖에서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한 사람의 음성이 촉급하게 날아들었다.
"순찰당의 나곤입니다. 긴급 보고를!"
감천형의 안색이 굳어졌다.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연락이 끊겼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숭산 방면으로 수색을 나간 제5대와 6대가 모두 소식이 끊어져 당주께서 순찰당의 정예를 이끌고 그쪽으로 가셨습니다……."
비룡객 나곤.
무림맹 순찰당의 제이부당주인 그의 보고를 듣는 감천형의 안색은 납덩이와 같았다.
"어떻게 하실 작정이시오?"
"좌 당주가 위험하지 않겠소?"
소림장문인과 초미노인 구열이 잇달아 입을 열었다.
감천형은 좌중을 둘러보았다.
무림맹에는 일원(一院), 오당(五堂)이 있고 사개위대가 각 문파로부터 차출되어 중심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일원은 천외유자 곽도광이 주축이 된 무림맹 어른들의 모임인 장로원(長老院). 정보 수집을 맡은 신기당(神機堂)과 젊은 영재들을 교육시키는 무영당(武英堂), 형벌을 맡은 형당과 접대와 예의 등을 담당하는 예당(禮堂), 그리고 경비 업무를 총괄하는 순찰당이 다섯 개의 축을 이루고 있으며 동서남북의 호맹위대가 존재한다.
그들이야말로 천하무림맹의 축이라 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그들은 독고해가 없는 지금, 무림맹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림, 무당 등 구대문파의 대표자가 있는 지금은 더 더욱.
뒤집어 말한다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무슨 일이 생기면 전체 무림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는 것과 같다는 의미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감천형이 입을 열었다.
"귀환 명령을 내리시오."
"귀환? 당주께 말입니까?"
"그렇소. 지금 즉시 인마를 이끌고 돌아오라고 명을 전하고, 나머지 수색에 나선 고수들도 모두 돌아오도록 지급으로 명을 전하시오."
"알겠습니다."
비룡객 나곤은 의아한 얼굴이었지만 이내 사라졌다.
"돌아오다니? 맹주의 시신 찾는 걸 포기한단 말이오?"
초미노인 구열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포기가 아니라, 적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입니다."
"끌어들이다니?"
"적은 숨어 있고 우리는 드러나 있어서 우리의 모든 일은 저들의 이목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본 맹의 눈과 귀가 되었던 신기당은 그간 맹주님의 행방을 찾느라 그 전력을 강호에 투입하여 단시간 내에 복귀가 힘듭니다. 지금 돌아오고 있긴 합니다만…… 그래서 차라리……."
그의 설명이 이어진다.
어둠은 더 깊게 천하무림맹의 총타를 덮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내고 있지만 맹주부는 조용하기만 했다. 최소한 겉보기로는 전과 별다름이 없어 보였다.
맹주부를 숙위(宿衛)하는 호맹위사들의 마음은 전보다 더없이 무거웠다.
직위고하에 따라 아는 것은 차이가 있지만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은 누구라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취의청을 지키는 책임자인 손오(孫吳) 또한 그런 사람 중 하나다. 비록 15명의 수하를 거느리는 소위장(小衛長)이긴 하지만 건곤무적 독고해를 10년 간이나 따른 역전노장이기도 했다.
손오는 취의청 창가에서 날카로운 눈으로 주의 깊게 일대를 살피다가 천천히 자리를 벗어났다. 담장에 이른 그는 잠시 주변을 살펴보고는 커다란 회양목을 돌고는 원래 그가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원래 있던 자리에 도착한 그는 문득 자신이 있던 자리에 거대한 체구를 가진 사람이 우뚝 서 있음을 발견하고는 주춤 굳어졌다.
거한은 어둠 속에서 손오를 바라보다가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게 뭔가?"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보는 순간, 손오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방금 회양목의 옹이 구멍 속에다 은밀히 감춘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사부님을 따라서 싸움터를 누빈 역전의 노장이다. 내가 사부님의 제자로 처음 들어왔을 때…… 나는 당신을 아저씨라고 부르고, 당신은 나를 업어주기도 했었지. 그런데 이게 뭔가?"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아주 작게 접어진 쪽지 하나.
그것을 들고 있는 거령신권 천무의 부릅뜬 고리눈은 어둠 속에서 무섭게 빛을 뿜고 있었다. 그것은 극렬한 분노였다.
"설마 했었다……. 당신이 귀를 기울여 취의청을 엿보는 것을 보면서도 당신만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지. 말해 보라. 이것은 누구에게 가는 것인가?"
천무는 무섭게 빛나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쪽지에는 알 수 없는 기호가 그려져 있고 아주 간략한 단어 몇 개가 적혀 있음을 그는 이미 본 다음이었다.
그 내용은 취의청에서 나눈 대화 내용.
"그, 그건 내가 한 것이……."
"철혈도 손오! 당신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헛소리를 하지 않을 호한으로 알았다. 그런데, 그런데 이런 짓이란 말인가? 사부님이 놈들에게 당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당신이 사천(四川)에서 죽어갈 때 살려준 것이 누구였지? 그런데 당신이 감히……."
거령신권 천무가 고함을 질렀다.
억눌린 분노로 나직하던 그의 음성은 이내 천둥처럼 밤공기를 뒤흔들었다.
"나, 나는 아니오! 아니오!"
흑의무사, 손오는 발작하듯 고함치면서 갑자기 몸을 돌려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도주는 채 몇 장을 가지 못했다.
그 앞으로 언제 나타난 것인지, 감천형이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그들의 앞잡이였던가?"
감천형이 물었다.
하나둘, 그의 주위로 당금 천하를 주름잡는 고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만에 하나라도 그가 이곳을 벗어날 가능성은 없었다.
그 순간이다.
문득 철혈도 손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을 본 감천형이 소리치며 그에게 덮쳐 갔다.
"그를 막아라!"
하지만 그는 늦었다.
손오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독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심맥(心脈)을 끊어 자결을 한 것이다.
"지금은…… 그들을 막을 수 없소…… 때가…… 될 때까지는……."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대지에 입맞춤했다.
그의 맥을 확인한 감천형이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심맥을 끊었군."
말과 함께 그는 굳어진 천무를 보았다.
"성급했구나. 지켜보라고 하지 않았더냐?"
"설마 그일 줄은 몰라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천무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
감천형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철혈도 손오의 배신. 그의 이러한 죽음은 그로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는 맹주부 내에서도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 중 하나였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배신을 할 줄이야.
그 상황을 보고 천무에게 참으라고 요구하기는 무리. 역시 이 일에는 좌백이 적합했다.
"믿을 사람이 없군……."
그때 초미노인 구열이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성미 급한 그이니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 말은 모든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 족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누구도 누구를 믿지 못한다는 뜻, 그것은 다시 말해서 서로 믿어야 할 우군이 서로를 믿지 못하고 경원하게 된다는 의미일 수도 있어서 정말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 * *
그렇게 밤이 지났다.
다행히 천수단혼 좌백은 위사들과 함께 아침이 밝아올 무렵, 귀환했다.
그러나 실종된 사람들은 찾지 못했다.
감천형은 점심 무렵, 은밀히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다시 맹주부를 빠져나갔다.
북망산으로 사백인 천기선생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와 동행한 것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거령신권 천무였다.
하지만 그들은 천기선생을 만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