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首 의운중중(疑雲重重)
-적당과 마주치다.
함정(陷穽)은 감천형을 기다리다.
"어떻게 되었느냐?"
객청에 도달한 감천형은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 있는 한 사나이를 발견하고는 다급히 물었다.
"이미……."
그의 옆에 둘러서 있던 사람 중 철적신검 호천성이 말을 하기 전에 감천형은 그 사람의 행색을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참혹했다.
사부를 따라 대소 수많은 싸움을 치러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악전(惡戰)을 수없이 넘긴 그인지라 자신의 앞에 죽어 있는 순찰당의 무사가 얼마나 참혹한 대가를 치르고 이
자리에 이르렀는지 능히 알 수 있었다.
"……."
묵묵히 그를 내려다보던 감천형이 입을 열었다.
"그가 남긴 말은?"
"강적…… 전멸…… 구원…… 이 세 마디만 남기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굳은 표정으로 철적신검 호천성이 대답했다.
"다른 곳에서의 소식은?"
"없습니다."
"……."
감천형은 미간을 찡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거의 찰나간이라고 해도 좋았다.
"곽 장로(郭長老)를 모셔오너라."
그가 입구에 선 위사를 향해 명하는 순간.
"노부 여기 있소."
말소리와 함께 천외유자 곽도광이 객청 안으로 들어섰다.
"어떻게 된 일이오? 수색을 나갔던……."
감천형은 간략히 설명하고는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제가 나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곽 장로께서 저 대신 잠시 이 맹주부를 관장해 주십시오."
그 말에 천외유자 곽도광은 머리를 흔들었다.
"불가하오! 지금 감 총당주는 일개인의 신분이 아니라, 맹을 책임지고 있는 임시 맹주의 신분이오. 전임 맹주께 유고가 생긴 이때에 만에 하나, 감 총당주에게까지 일이 생긴다면 우리 무림맹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고 말 것이오. 적이 누구며 무슨 의중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 우선은 어떻게 된 일인지 사람을 보내 조사를 시키는 것이 좋을 듯하오."
감천형은 잠시 망설이다가 철적신검 호천성을 바라보았다.
그의 뜻을 알아차린 철적신검 호천성이 입을 열었다.
"정예 위사 20명을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바로 출발시킬 수 있습니다."
"그들을 출발시키되, 전서구를 날려 낙양 백 리 주변에 비상망을 발동시키도록 하시오."
"그렇게 되면 전 무림을 경동시키게 될 겁니다."
"다른 것을 돌볼 상황이 아니오. 어차피 이렇게 되면 적과 전면전을 벌일 수밖에 없는데 웅크리고만 있으면 더 불리한 상황만 초래될 거요."
감천형은 천외유자 곽도광을 바라보았다.
"저도 출발하겠습니다."
"감 대행!"
천외유자 곽도광이 놀라 부르짖었다.
"사부님은 약관 이전에 강호에 출도하여 수중의 검 한 자루로써 군마(群魔)를 소탕하여 오늘날 무림맹을 이루었습니다. 위험이 있다고 하여 피해간 적이 없었고 적이 강하다 하여 물러선 적이 없었습니다. 늘 당당하고 산악과 같았지요."
감천형은 문득 희미하게 웃었다.
"저는 사부님께 그렇게 배웠습니다. 위험을 피해간다면 언제라도 그 위험을 넘어설 수 없다고."
"감 대행!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당할 뿐이지, 무모하라고 배우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완강한 등을 보이고 돌아섰다.
"허참……."
천외유자 곽도광은 나직이 혀를 찼다.
'어쩌면 저렇게 사부와 같을까? 마치 젊은 날의 독고 맹주를 보는 것 같군…… 허허…… 이거참…….'
그는 연신 머리를 내저었다.
-조용히 있으면 산악과 같이 진중하며, 일단 움직이면 맹호가 우리를 뛰쳐나오는 것과 같다.
그것이 건곤무적 독고해의 평가였다.
하지만 이제 그 평가는 패왕신도 감천형이 물려받아야 할 듯했다.
"무, 무슨 말씀이오?"
소림사의 장문 대광 대사가 놀라 소리쳤다.
취의청.
구대문파의 대표들은 이미 다 모여 있었고 이미 밖으로 나간 고수들을 제외한 나머지 핵심 인물들은 모두 여기에 있었다.
"정말 사실이란 말씀이오? 감 대행이 직접 밖으로 나간 것이?"
무당파의 장문인 일양자가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이런…… 아니, 곽 장로께서는 어떻게 그런 무모한 일을 그대로 두고 보셨단 말씀이오?"
초미노인 구열이 으르렁거렸다.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소. 누가 그들 사도(師徒)의 고집을 꺾을 수 있겠소? 그래서……."
천외유자 곽도광의 답변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초미노인 구열이 벼락같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딜 가는 게요?"
"갔다 와서 말하리다!"
그의 말은 이미 한참 멀리서 들렸다.
취의청의 문짝이 떨어질 듯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초미노인 구열이 나가면서 문짝을 차 열고 나간 까닭이다. 과연 그다운 행동이었다.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그는 감 대행의 뒤를 따라갔을 겁니다."
"아미타불…… 적당이 대체 무엇을 노리고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지 알지 못하면서 무작정 밖으로 나간다면 자칫, 일을 그르칠런지도 모를 것인데 아무래도 이번 일은 감 대행의 판단이 성급했던 것 같소……."
대광 대사가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노부도 말렸지만 결코 아무렇게나 행동을 할 사람은 아니니…… 두고 보도록 하지요."
"무량수불…… 곽 장로께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묵묵히 천외유자 곽도광의 말을 들으면서 수중의 은사불진만을 소리없이 굴리고 있던 일양자가 입을 열었다.
"말씀하시지요."
"맹주가 계실 때와 없을 때는 당연히 틀릴 겁니다. 그간 옆에서 지켜보신 바 어떻습니까?"
…….
일순, 취의청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그의 말은 과연 그가, 감천형이 맹주 대행으로서 후일 무림맹의 맹주로서의 자격이 있는가를 묻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천외유자 곽도광은 멈칫했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따라 무림맹의 지휘 계통에 자칫 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짐작컨대 무당 장문인 일양자는 성급하게 밖으로 뛰쳐나간 감천형이 과연 중임(重任)을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인가, 회의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천외유자 곽도광은 한운야학(閒雲野鶴)과 같은 삶을 살았다.
그런 그가 일 년 중 절반 이상을 이 맹주부에 머물게 된 것은 바로 건곤무적 독고해라는 걸출한 인물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감천형과 좌백, 천무 등의 성장 과정을 지켜봐 왔었다. 그런 그임을 알기에 일양자가 물은 것이기도 했다.
"젊은 날의 독고 맹주와 같다고 노부는 생각하오. 나머지는 장문인께서 판단하실 일일 터이고……."
천외유자 곽도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건곤무적 독고해는 이제 전설이 되었다.
그는 살아 있을 때에도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그런 그의 젊을 때를 보는 것 같다는 천외유자 곽도광의 말에 무당파의 장문인 일양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떡여 보였다.
"그런 정도라면 마음을 놓을 수 있겠군요."
몇몇 사람들이 동의한다는 듯 묵묵히 머리를 끄떡이고 있었다.
하지만 좌중의 기색은 밝지 않았다.
그 말 이후로 취의청은 잠시간 침묵에 잠겼다.
그 침묵이 무슨 의미인가를 좌중이 느끼는 것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독고 맹주의 젊은 날과 같다!
그 말은 얼핏 들으면 대단한 칭찬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있을 수도 있었다.
독고해!
건곤무적이라 불리었던 독고해마저 3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시신이 되어 돌아온 마당이다. 그런데 그의 젊은 날 능력과 같다면…….
좌중의 생각을 털어버리려는 듯 소림 장문 대광 대사가 길게 불호를 외면서 입을 열었다.
"곽 장로께서는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면 좋을 것 같습니까?"
"현재로써는 경동(輕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우선은 감 대행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봄이 좋을 것 같소. 하회를 봐서 우리도 나서야 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할 것 같으니 일단 그때까지는 기력을 충전하면서 기다려야 할 것 같소이다."
천외유자 곽도광은 무림의 원로로서 소림 대광 대사보다 따지자면 반 배분 정도 높았다. 나이도 그보다 스무 살이나 많았다.
하지만 상대가 대소림사의 장문이라 말을 높이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소이다!"
문득 화산우사 육기가 답답한 듯 입을 열었다.
"무엇을 말이오?"
"대체 독고 맹주는 무슨 일로 맹을 비우고 은밀히 강호에 나갔던 것입니까? 곽 장로께서는 그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그 말에 천외유자 곽도광은 멈칫, 미간을 찡그렸다.
"노부도 그 일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소. 감 대행은 혹시 아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일이 터진 다음에 하도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자세히 물어볼 기회가 없었소."
"그렇군요……."
화산우사 육기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의 말을 끝으로 취의청에는 다시 침묵이 찾아들었다.
그러했다.
건곤무적 독고해.
과연 그는 무엇을 하기 위해서 은밀히 맹주부를 나섰던 것이며, 과연 누구에게 죽게 된 것일까?
해답은 거기에 있는 듯하였다.
* * *
어둠은 이미 짙다 못해서 흩어지고 있었다.
사방을 뒤덮고 있던 어둠은 동쪽 하늘에서부터 비명을 지르며 갈라지고 있었다.
감천형은 신법을 전개하여 질풍처럼 전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맹주부를 떠난 지 이미 반 시진이 흘렀다. 그 유명한 용문(龍門)의 천불암(千佛巖)이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푸른빛이 가득한 버드나무가 수없이 늘어선 그 천불암은 얼핏 듣기처럼 단순한 바위가 아니다. 북제(北齊)시대부터 시작해서 수, 당을 거쳐 위(魏)와 진(晉)대를 거치며 형성된 불상만 14만여 개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의 산인 것이다.
그 모습은 가히 교탈천공(巧奪天工)이라 할 만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경치를 감상할 겨를이 없었다. 눈앞에 수하들의 시체가 즐비한데 그것에 눈이 갈 사람은 없는 법이니까.
이미 그가 발견한 시신만 20구가 넘었다.
쏴, 쏴아아…….
멀리서 이수(伊水)의 물소리가 철썩이며 들린다.
동쪽 하늘을 덮고 있는 먹구름은 이미 해가 떴을 시간인데도 희미한 빛무리만을 겨우 용인하고 있다.
낙양에서는 잔잔했던 바람이 이궐(伊闕)에 들어서자 사납게 불어대어 옷자락이 찢어질 듯 펄럭였다. 꽃샘바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심했다.
질풍이었다.
하늘을 온통 뒤덮고 있는 먹구름이 그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심하게 밀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번쩍하면서 때 아닌 어둠에 잠긴 용문이 순간적으로 밝아졌다. 새파란 빛이 먹장구름으로 검게 물든 하늘을 단숨에 산산조각으로 갈라내면서 무서운 기세로 치달렸다.
콰콰쾅!
문득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터졌다.
"최악이로군……."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 감천형이 미간을 찡그리곤 중얼거렸다.
바람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이수의 물소리도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이래서는 사람을 찾는다는 건 힘들게 된다.
그의 좌우로 호맹위사들이 간격을 두고 흩어져 그와 같이 전진하고 있었다.
그를 따르는 위사들의 숫자는 열 명가량.
나머지는 모두 먼저 간 사람들을 찾기 위해서 흩어졌다. 현명한 선택은 아니지만 선발대를 찾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감천형은 천천히 석벽을 쓸었던 손을 들었다.
그 손에는 아직 완전히 굳지 않은 피가 묻어 있었다.
"이쪽이란 말인가? 왜 이쪽으로 온 거지? 무엇을 발견했기에? 아니면, 무엇에 쫓겨서……."
그는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다.
"으악……!"
갑자기 비명 소리가 바람에 묻혀 들려온 것이다.
감천형의 신형이 찰나간에 십 장의 거리를 가로질렀다.
크고 작은 바위가 흩어져 있는 곳.
거기에 그와 같이 온 그의 수하 고수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겨우 두서너 자의 거리를 두고 쓰러진 그들의 숫자는 넷이나 되었다. 마치 두어 걸음을 걷다가 쓰러진 것처럼 가슴을 움켜쥐고, 혹은 엎어져 있는 그들이 이미 죽어 있음은 일견해서도 명백했다.
그중 하나는 다른 시체에 포개어지듯 엎어져 있는데 아마도 먼저의 시체를 살펴보려다가 죽은 것 같았다.
괴이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시체를 발견했다면 분명히 먼저 신호를 했어야 했는데……
감천형은 미간을 찡그린 채 주위를 쓸어보다가 갑자기 안색이 달라졌다. 그 시체들이 향하고 있었던 듯한 방향. 그곳 무성한 잡초들 사이로 뭔가 희끄무레한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감천형의 신형이 다시 허공을 가로질러 그곳으로 날아갔다.
흐윽!
찰나간에 삼 장여의 거리를 가로질러서 거기에 당도한 감천형은 그 자리에 쓰러져 있는 것이 사람임을 발견하고는 전신이 굳어지고 말았다.
알몸.
그러했다.
그것도 성숙한 여자의 나신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하늘을 향해 바로 드러누운 시신. 그녀의 몸 바닥에 깔린 검은 옷 조각이 그녀의 나신을 휘감으며 세차게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맑다 못해서 어둠 속에서 뿌연 빛을 발하고 있는 여자의 나신. 그것이 20대 여인의 것임은 너무도 자명했다. 팽팽하게 부풀어 바로 누워 있음에도 전혀 퍼지지 않는 유방이 그러했고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아랫배가 그러하였다.
찰나.
번쩍!
다시금 번갯불이 밤하늘을 가르며 번쩍였다.
주위가 순간적으로 밝아지면서 그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사매?"
감천형이 믿을 수 없는 듯 중얼거렸다.
그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움켜쥔 주먹이 절로 덜덜 떨려왔다.
잡초가 무성한 땅바닥에 쓰러져 있음에도 여인의 나신은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늘씬한 체형에 팽팽한 가슴에서 잘록한 허리까지. 군살 하나 없는 아랫배를 지나도록 마치 옥을 빚어 만든 듯한 여인의 나신은 서럽도록 희다. 그 나신의 순백(純白)은 반쯤 벌린 두 다리의 교차에 이르러서는 짙은 어둠이 깔리면서 깨어졌다.
하지만 여인의 나신, 그 황홀한 나신이 내던지듯 반쯤 벌리고 있는 두 다리, 늘씬한 그 다리의 눈부신 허벅지 안쪽으로 흘러내린 한줄기 붉은 선혈을 발견한 순간, 그는 더 이상 침착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강간을 당한 흔적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간살(姦殺)이란 말인가?
강바람에 긴 머리카락이 휘날리면서 옆으로 고개를 떨군 얼굴을 가려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그가 그녀를 사매라고 부른 것은 공연한 것이 아니었다.
너무 닮았다.
게다가 그녀가 깔고 있는 검은 옷자락은 얼마 전 그녀가 입고 있었던 그 야행의(夜行衣)와 너무 흡사하였다.
감천형은 전신이 굳어 그 여인의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젖혀 그녀의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있을 수는 없는 일.
그는 떨리는 손길로 그녀의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정말 그녀가 사매라면 그는 죽어서라도 사부를 볼 낯이 없게 된다.
감천형은 여인의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냈다.
여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콰콰-쾅!
벼락이 사방을 크게 울렸다.
묘한 안도의 빛이 감천형의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독고경이 아니었다.
무척 닮기는 했으되, 그녀는 아니었다.
그럼 그녀는 누구란 말인가.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 이런 변을 당한 채 죽어 있……!
채 생각을 끝낼 틈이 없었다.
소리도 없이 왼쪽에서 무엇인가가 그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그의 오른발에 힘이 들어갔다.
순간적으로 그의 신형이 누가 잡아당기듯이 그 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그 속도는 얼마나 빠른지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던 것 같을 지경이었다.
잡초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옆에서 그를 공격했던 암녹색 경장을 입은 자의 눈에 놀람의 빛이 튕겨져 올랐다.
땅!
감천형이 손에 들고 있던 대도를 쳐내 그것으로 그자의 검을 막아냈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자가 비틀, 뒤로 튕겨져 나갔다. 마치 철벽에 부딪힌 듯한 모습.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 순간에 다시 오른쪽에서 삼엄한 기운이 날아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기실 왼쪽의 암습과 거의 같은 순간에 발동되어 이미 그에게 도달하고 있었다.
번쩍!
밤하늘을 가르며 다시 번개가 쳤다.
그리고 그 번개와 함께 감천형의 수중에 들려 있던 대도에서 세상에서 패왕신도(覇王神刀)라고 불리는 그의 칼이 쏟아져 나왔다.
땅! 따당…….
"으악!"
날카로운 금속성이 연속으로 터지며 단말마의 비명이 뒤를 이었다.
감천형의 패왕신도는 그를 공격한 두 자루의 검과 부딪히자 그것을 마치 수수깡처럼 부숴냈다. 그도 모자라 그의 패왕신도는 암습자까지 두 조각을 만들어 버렸다.
피보라가 일었다.
그의 움직임은 정말 눈부셨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만 같았다.
패왕신도를 미처 뽑을 시간이 없자, 도갑(刀匣)째로 옆으로 쓸어내어 상대를 막아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패왕신도의 손잡이를 잡아 몸을 돌리는 탄력으로 신도를 뽑아서 뒤에서 공격해 오던 두 사람을 막아내는 것으로 모자라서 검과 함께 무 조각처럼 잘라내는 것은 마치 예정된 수순을 보는 듯 거의 한순간에 이루어졌다.
"으으……."
처음 그를 공격했던 암녹색 경장의 사내가 주춤 물러났다.
그 눈에 드러난 것은 공포.
"너는……."
단칼에 두 사람을 베어버린 감천형이 싸늘히 입을 열었다.
그 순간이다.
파팡!
그의 등 쪽에서 격렬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욱!"
감천형은 눈앞에 별이 번쩍 하는 것을 느끼며 부지중에 앞으로 서너 걸음 쫓아나갔다.
기혈이 춤을 추면서 들끓어 올랐다.
'여자?'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는 생각.
하지만 그것은 순간이고 그는 쫓아 나가던 걸음에서 오른발 끝에 힘을 실었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튕기듯이 뒤를 향해 반전(半轉)하면서 수중의 패왕신도를 쳐냈다.
쏴쏴아아-
바람을 가르는 파공음이 고막을 찔렀다.
"오호호호…… 과연 패왕신도의 명성은 명불허전! 나의 소혼장(消魂掌)을 맞고도 여전히 황소 같군그래…… 과연 대단해!"
쟁반에 구슬을 굴리는 듯 맑고도 영롱한 여인의 웃음소리가 깔깔대고 들려왔다.
방금 있던 자리에서 마치 바람처럼 훌쩍 날아올라 반 장가량 떨어진 바위 위로 올라간 여인이 입을 가리면서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죽은 듯 누워 있던 그 나신의 여인이었다.
"너는 누구냐?"
감천형이 그녀를 쏘아보면서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나? 오호호호…… 천하무림맹의 총당주의 신분으로서 나를 몰라본다면 나도 할 말이 없지?"
여인은 다시 깔깔대고 웃었다. 요사한 웃음이었다.
세찬 바람이 여인의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휘감아 날렸다. 풍만한 가슴이 웃음소리에 따라 탄력있게 출렁거렸다. 추위를 느껴서인지 팽팽하게 곤두선 가슴과 유실(乳實), 그리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신을 다 드러내놓고 있음에도 여인은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심지어 가장 비밀스러운 곳까지도 그녀는 감천형의 앞에 다 드러내고서 그렇게 웃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드러내놓고서 묘하게도 웃을 때는 손으로 입을 가리니 실로 괴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요기(妖氣)가 그녀의 웃음소리를 따라 전신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듯했다.
순간, 감천형은 아무 말 없이 수중의 패왕신도를 크게 휘둘렀다.
"으악!"
외마디 비명.
그의 뒤에서 그를 공격해 오던 녹의인 둘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럼에도 감천형은 뒤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
문득 감천형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입가로 가는 선혈이 흘러내렸다.
"호호호…… 아직도 버틸 생각인가? 소혼장은 이미 그대의 폐부를 흔들어놓았을 것이고 그보다 더 무서운 소혼침(消魂針)은 이미 그대의 혈맥을 따라 심장을 향해 가고 있을 거야."
그것을 보고서 다시 웃음을 터뜨린 그녀는 눈웃음을 치면서 교태롭게 말을 이었다.
"그럼 어떻게 될까? 그걸 보고 싶군, 당신이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것을……."
치밀한 함정이었다.
좌우에서 숨 쉴 틈 없이 공격을 해오는 사이에 전혀 의외의 공격. 아무리 무림이라 할지라도 여자가 나신을 드러내 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신을 드러냄으로써 함정은 완벽에 가까워 조심을 하고 있었던 감천형으로서도 그 암습을 피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녀는 단순히 그의 등을 친 것이 아니었다.
손에 숨겨가지고 있던 암기를 그의 등을 치면서 박아넣었던 것이다.
그 소혼침이라는 암기는 독을 머금고 있었을 뿐 아니라, 사람 몸에 들어가면 혈맥을 따라 심장을 공격하는 무서운 것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한번 힘을 쓴 감천형의 신형은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쏴쏴-
세찬 바람이 일대를 쓸었다.
바람이 불어오듯이 검은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고서 감천형을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열, 스물…… 일견해도 서른은 넘는다.
어둠 속에 얼마나 더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
같이 왔던 위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이 이미 적에게 희생당한 것 같다.
현재로써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이라는 뜻이다.
검은 옷자락이 여인의 희뿌연 나신을 휘감고서 악마의 나래처럼 세차게 펄럭이고 있다. 그녀가 조금 전까지 깔고 있었던 그 옷, 그것은 일종의 피풍인지라 우선 그녀의 나신을 가리는 데는 아쉬움이 없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모든 것이 아낌없이 드러났다 감추어진다는 것이 다를 뿐, 그로 인해 그때마다 여인의 나신은 불을 뿜는 듯 유혹을 발한다.
"나를 끌어내기 위한 함정이었나?"
감천형은 일그러진 얼굴로 여인에게 물었다.
"그렇다고도 볼 수 있겠지, 맹주 대행을 잡는다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니까."
여인이 여전히 교태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에 감천형의 얼굴은 굳어지고 말았다.
그가 맹주 대행이 된 것은 불과 어제, 그것도 밤중에 구대문파의 대표들과 상의하여 불시에 결정된 일이다. 그 일은 맹 내에서도 수뇌부를 제외한다면 알지 못하는 기밀 사항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 대외적으로 맹주의 유고를 발표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그런데 그것을 벌써 알고 있다는 것인가?
"너는 누군가? 왜 이런 일을 하지?"
감천형이 다시 물었다.
"호호호…… 궁금한가?"
더 이상 답변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영롱한 웃음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녹의인들이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푸른 파도가 밀려오는 듯했다.
쏴아아…….
마침내 세찬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번개가 치고 바람까지 세차다. 말 그대로 악천후였다.
쨍!
그의 패왕신도에 덮쳐 오던 자들이 튕겨지듯이 뒤로 밀려났다.
하지만 그의 힘이 전과 같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적이 강한 것인지 별다른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파도와 같았다.
일조가 물러나면 이조가 공격해 왔고 그를 막아내면 다시 삼조가 이미 발동하여 그를 공격하고 있었다.
차륜전(車輪戰)에다가 연환(連環)…….
이대로 간다면 스스로 힘이 빠지고 말 터이다.
아니, 처음부터 그가 쓰러지기를 기다리면서 시간을 끌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채 일각이 흐르지 않아 감천형은 위험한 순간을 맞아 계속 뒤로 밀리고 있었다. 언제 다쳤는지 여기저기에서 선혈도 보였다. 대단한 상처는 아니라도 평소의 그라면 있을 수 없는 일.
그가 쓰러지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의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그 순간이다.
"으악……."
갑자기 녹의인들의 외곽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악!"
방죽이 무너진 듯했다.
고함 소리와 함께 검빛이 어둠 속에서 크게 이는 듯하더니 비명과 함께 그들의 진영에 일대 혼란이 일며 한 사람이 비단폭을 째듯 그들의 사이를 헤집고 나타났다.
마치 일진의 폭풍이 휘몰아쳐 오는 것 같았다.
"물러나지 못할까!"
천둥치듯 쩌렁한 호통 소리, 그 앞을 가로막던 녹의인이 피를 토하면서 뒤로 튕겨져 나갔다.
8척(尺), 당당하다 못해 엄청난 덩치의 사내였다.
평범한 회색 옷을 걸쳤지만 구레나룻과 휘날리는 긴 머리카락은 바위를 보는 듯했다. 그는 흡사 거대한 솥뚜껑과 같은 손으로 막강하기 이를 데 없는 권력(拳力)을 쳐내고 있는데 그 앞을 가로막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녹의인 다섯이 일제히 검도를 쳐내며 그를 막기 위해서 덮쳤다. 하나 그가 양손을 풍차처럼 휘두르자 가공할 권풍(拳風)이 일며 태풍처럼 일대를 휩쓸며 그들을 한꺼번에 내쳐 버리고 말았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그들을 날려 보낸 그가 앞을 바라보면서 고함쳤다.
천둥 같은 음성.
"거령신권(巨靈神拳) 천무(千武)?"
그를 본 여인이 믿기 힘든 듯 미간을 찡그렸다.
구원군이 나타났음을 직감한 녹의인들이 일방 거한(巨漢)을 막아가는 가운데 7, 8명이 한쪽에 몰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패왕신도 감천형을 일제히 덮쳐 갔다.
가히 일패도지(一敗塗地)의 상황.
천만뜻밖의 일은 바로 그때 일어났다.
금세 쓰러질 듯 한쪽 구석으로 몰려 방어에도 급급하던 감천형이 그 거한이 나타남을 보자 갑자기 앞으로 짓쳐 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패왕신도가 가공할 힘으로 허공을 갈랐다.
쨍!
그의 패왕신도에 부딪힌 검이 반 토막으로 부러졌다.
필연코 뒤따르는 것은 비명.
"으악!"
피가 튀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감천형의 패왕신도가 이르는 곳에서는 아무것도 남아나지 못했다. 검이 부러지고 도가 부서지고, 살이 갈라지며 뼈가 조각이 났다.
가히 패왕신도라는 이름에 걸맞는 위력.
그를 잡을 듯 공격해 왔던 녹의인 일곱이 단 한 순간에 피를 뿌리며 쓰러져 갔다.
"으핫하…… 소제가 늦게 온 건 아닌 듯하군요?"
그 광경을 보고 거한이 껄껄 웃으며 다시 양손을 풍차처럼 휘둘러 앞을 가로막는 자들을 공격해 갔다.
그의 뒤를 흑의인들이 따르고 있음이 보였다.
맹주부의 위사들이었다.
"알맞게 왔다!"
감천형은 그를 향해서 씨익, 웃어 보이고는 고개를 돌려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여인을 보았다.
"이제 형세가 달라진 것 같지 않은가?"
"어, 어떻게? 설마 아무런 상처도…… 아니, 그럴 수는? 소혼침이 몸 안으로 들어갔는데……."
여인은 믿을 수 없는 듯 그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이것을 말하는가?"
감천형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콰콰쾅!
번갯불과 뇌전(雷電)이 일대를 공포스럽게 울리며 한순간 환하게 밝혔다.
그의 손에는 거의 명주실처럼 가는 한 치가량의 작은 침 하나가 음산한 빛을 발하며 하나 놓여 있었다.
"어, 어떻게? 그건 분명히……."
여인은 놀라 입을 딱 벌렸다.
"본 문의 건곤대라신공(乾坤大羅神功)은 천하제일의 신공! 이까짓 침이야 당연히 스스로의 힘으로 밀어낼 수가 있다네. 요사한 계집! 이리 내려오너라!"
감천형이 고함치면서 손을 휘둘렀다.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위 위에 서 있던 여인이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말을 듣고 싶어서 그녀가 바위 위에서 굴러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감천형은 내려오라는 고함과 함께 손에 들고 있던 소혼침을 그녀를 향해 던져 버렸고, 놀라 일시 정신이 흩어졌던 그녀는 미처 그것을 피하지 못하고 비명과 함께 바위 아래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이런!"
감천형이 혀를 차면서 땅을 박차고 바위로 날아올랐다.
그녀가 앞으로 고꾸라지지 않고 바위 뒤로 떨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뒤에서는 격렬한 싸움이 일고 있었지만 그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타난 거한은 그의 사제이자 무림맹의 무공교두(武功敎頭)인 거령신권 천무. 교두란 무공을 가르치는 선생이니 그의 무공이 약할 리 없었다. 더더구나 그는 무공에 미친 사람이라 항간에는 무공만 따지자면 건곤무적 독고해의 세 제자 중 제일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사람이었다.
그가 나타난 이상, 상황은 안심해도 좋을 터였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 의혹을 밝혀줄 수 있는 적의 수뇌를 잡는 것이고 현재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자는 바위 아래로 굴러 떨어진 여인임에 분명할 터이다.
그것은 오늘 그가 모험을 한 진짜 이유이기도 하였다.
"……."
감천형은 바위 위로 올라 주위를 쓸어보면서 미간을 찡그렸다.
막다른 곳인 줄 알았더니 바위 뒤로는 몇 군데로 통할 수 있는 길이 있었다. 그녀가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은 그의 퇴로를 막기 위함이었던 모양이다.
바위의 높이는 1장가량, 일반인이라면 오르려면 시간을 소비해야 할 높이지만 감천형에게 있어서 이 높이는 그저 평지와 같았다. 그것은 그가 그녀를 따라 몸을 날린 것이 거의 같은 순간이라는 의미.
그러나 바위 밑에는 아무도 없었다.
분명히 그녀가 굴러 떨어짐을 보자마자 그가 몸을 날렸음에도 불구하고.
날카롭게 주위를 쓸어보던 감천형은 3장가량 떨어진 바위 뒤쪽에서 검은 것이 얼핏 흔들림을 발견하고는 질풍처럼 몸을 날렸다.
대붕전시(大鵬展翅)의 일식으로 단숨에 3장의 거리를 가로지른 감천형은 그 바위에 이르러 비연귀소(飛燕歸巢)의 신법으로 바꾸어 바위를 발로 차는 순간에 반회전하여 바위 뒤로 돌아 들어갔다.
그 신법의 영교(靈巧)함은 놀라울 정도로 그가 원래의 바위에서 그 바위 뒤로 돌아감은 거의 동시라고 해도 좋았다.
있었다.
여인의 나신을 감싸고 있었던 그 피풍.
하지만 그것을 본 감천형의 패왕신도를 잡은 손에는 힘이 빠졌다.
그 검은 피풍뿐, 여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허물을 벗듯 그 자리에다가 피풍을 던져 버리고는 지금쯤 그 벌거벗은 몸으로 죽어라고 도주하고 있을 여인의 모습을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깔깔…….
문득 감천형의 귓속으로 요기롭기조차 한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내가 졌다고 해두지, 이건 시작일 뿐이야. 깔깔깔……."
감천형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목소리의 여운은 여기저기에서 은은히 들려왔다.
"회음전성(回音傳聲)……."
감천형이 입술을 물었다.
회음전성이란 음성을 토해내어 벽에 반사시키는 것을 말한다. 일종의 메아리와 같아서 내가의 고수가 이것을 시전하면 일시지간에는 그 종적을 발견할 수가 없다.
게다가 오늘과 같은 악천후에는.
이런 날에는 모든 흔적이 찰나간에 사라져 버린다. 날씨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놓쳤습니까?"
그의 뒤에서 종소리를 울리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거령신권 천무가 그의 뒤에 우뚝 서 있었다.
감천형도 분명히 작은 키는 아니다. 하지만 그의 앞에 서니 머리 하나는 모자란 듯했다. 가히 태산과 같은 몸집이다.
"헛수고를 한 듯하구나."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쓸어보던 감천형이 대답처럼 천천히 중얼거렸다.
그는 결코 무모하게 맹주부를 뛰쳐나온 것이 아니었다.
상대의 의중을 읽은 그는 오히려 상대의 뒤통수를 치기 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 일부러 자신의 허점을 보였었다.
그러나 알아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득이 있다면 여인의 나신을 감상한 정도일까? 그나마 사매가 잘못된 것인 줄 알고 제대로 보지도 못했었다.
쏴아아…….
빗소리만 요란하다.
천둥이 치고 번갯불이 간간이 사방을 밝히지만 싸움은 이미 끝이 난 다음이었다.
"계집이 도주하고 나자 모조리 다 흩어져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남은 것은 제압을 당한 놈뿐입니다."
그가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자 뒤에서 거령신권 천무가 말했다.
"몇이나 잡았느냐?"
"죽은 놈을 제외하고도 대여섯은 족히 될 것 같습니다. 부상당한 놈들도 있지만……."
문득 그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형님께 당한 놈들은 모조리 다 즉사했더군요."
…….
감천형과 거령신권 천무는 석상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들의 발 아래에는 제압을 당한 자들이 이리저리 쓰러져 있었고 그들을 감시하듯 무림맹의 위사들이 주위에 흩어져 경계를 하고 있다.
쓰러진 자들의 숫자는 모두 여섯이었다.
그중에는 심한 부상을 당한 자도 있지만 별로 다치지 않은 자도 둘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모아놓은 시체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하나도 살아 있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씻겨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입가에 흐른 검은 핏자국은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말하고도 남는다.
"모두 자결했단 말이냐?"
천무가 어이없는 듯 위사에게 물었다.
"예, 제압을 당해서 쓰러진 순간에 모두 검은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건…… 장난이 아니군요."
굳은 얼굴로 천무가 중얼거렸다.
미지의 적.
짐작조차 가지 않는 적은 정말로 간단한 상대가 아닌 듯했다. 어쩌면 오늘의 이 일은 그 나녀의 말대로 시작에 불과한 것인지도 몰랐다.
"돌아간다."
잠시 침묵했던 감천형이 입을 열었다.
* * *
날이 밝았다.
그처럼 쏟아지던 폭우도 아침이 되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멎고 푸른 하늘이 나타났다. 세찬 비바람이 멎자 태양이 떴고, 풀잎에 달린 영롱한 물방울은 무지갯빛을 반사하면서 싱그럽다.
무림맹주부 또한 고요했다.
돌사자와 열린 문, 그것을 경비하는 위사들의 모습은 전과 같고 아무 일도 없는 듯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겉보기일 따름.
내부적으로는 심각하기 이를 데 없었다.
뒷문으로는 암중에 수없이 위사들이 드나들었고 그들의 얼굴은 긴장으로 납덩이처럼 굳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이따금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빨리듯 맹주부 안으로 들어갔고 뒤를 이어서 흑의위사들이 바쁘게 맹주부를 빠져나갔다.
그렇게 천하무림맹의 총타에는 긴장이 치달리고 있었고 무림맹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취의청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무거운 침묵이 대청을 짓누르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그 침묵에 눌려 입을 열지 못하는 듯 보일 정도였다.
천하무적이라던 건곤무적 독고해.
그가 돌연 시체가 되어 돌아오더니, 그때부터 벌어진 변고는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더더구나 그들을 아연케 한 것은 천하무림맹을 마치 주머니 속의 물건처럼 희롱하는 적의 신출귀몰함이었다.
"방금 말씀드린 대로 적은 어둠 속에 숨어 있지만 우리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속속들이 꿰뚫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저들을 찾아내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잠시 침묵했던 감천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안색은 창백했다.
한바탕 악전을 치르고,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쉬지 못한 그였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일신의 피곤함보다는 답답함이 더 컸다.
"맹주께서는 그들에 대해서 정말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으셨단 말이오?"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무당파의 일양자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감천형은 굳은 얼굴로 다시 말했다.
"이번에 다녀오면 그들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때 이야기해 주겠다고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든 일…… 대체 무슨 까닭으로 가장 가까운 감 대행에게까지…… 조금만 말씀을 해주셨더라도 이렇게까지는……."
천외유자 곽도광이 안타까운 듯 머리를 저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심경이기도 했다.
다시금 침묵이 대청을 눌렀다.
그 침묵을 깨뜨린 것은 감천형이었다.
"정세를 판단해 본 결과, 적을 알기 위해서는 적의 의도대로 일단 위험을 무릅써야 될 것으로 판단하여 뒤를 삼 사제에게 부탁하고 모험을 했습니다만 희생만 초래하고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적당과 마주친 것이 아니오?"
천외유자 곽도광의 말에 감천형은 쓰게 웃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평소 견문이 좁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 여자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면 혹시 장락궁(長樂宮)과 무슨 관계가 있지 않겠소?"
운룡대협 고진추가 눈을 빛냈다.
"그에 대해서는 이미 조사를 시켰습니다만 크게 기대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으음……."
감천형이 이미 그들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조치는 다 취하고 있음을 알게 된 원로들은 부지중에 합창을 하듯이 신음을 흘려냈다.
패왕신도 감천형!
그는 그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일 처리를 보여주고 있었다.
"싸움이란 적을 알지 못하고서는 아무리 우세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를 뿐더러, 과연 그들이 무슨 생각으로 우리를 이렇게 희롱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것이 소생의 결론입니다."
"아미타불…… 무슨 좋은 방도라도 있단 말씀이오?"
소림장문인 대광 대사가 물었다.
"멀지 않은 곳에 사백(師伯)께서 은거하고 계십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분께 조언을 구하고자 합니다."
"사백? 아니, 맹주께 사형이 계셨단 말이오?"
믿지 못하겠다는 듯 운룡대협 고진추가 되물었다.
그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사부님께 의형(義兄)이 되셔서 제가 사백이라고 부르지만 엄밀히 말씀드려서 사형은 아니십니다."
"음…… 독고 맹주의 의형이라면 필시 세외고인(世外高人)이시겠구려? 명호가 어찌 되시오?"
천외유자 곽도광도 처음 듣는 듯 물었다.
"명호는 천기선생(天機先生)이라 하시지만 몸이 불편하셔서 세상과 접촉을 하지 않으시니 강호상에서 아는 분이 별로 없습니다."
"천기선생?"
군웅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보는데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그분의 일신 능력이 가히 경천위지(經天緯地)하여 지난날의 제갈무후(諸葛武侯)에 비견할 수 있으니, 만에 하나라도 그분이 강호에 나서게 된다면 강호의 정세는 일대변화를 맞게 되리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허어…… 그런 기인(奇人)이 전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건가?"
사람들의 눈에 아연 흥분의 빛이 떠올랐다.
건곤무적 독고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는 까닭이다. 그는 결코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고 과장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그러한 평가를 했다면 보통 사람일 리가 없다.
"어쩌면, 오늘날의 사태에 대해서 사백과 무슨 의논을 하신 것이 있을런지도……."
"정말 그렇겠소?"
"그랬다면 정말 좋겠는데……."
술렁거림이 일었다.
"그래, 그분이 어디에 계시오?"
초미노인 구열이 눈을 빛내면서 물었다.
"그것은 다녀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외부인이 은거지를 아는 걸 좋아하지 않으셔서…… 죄송합니다."
감천형이 고개를 숙였다.
"음……."
초미노인은 입맛을 다셨다.
"언제 갈 생각이오?"
천외유자 곽도광이 물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중으로 출발할 작정입니다."
"이 밤에 말이오? 위험하지 않겠소?"
"낙양은 천하무림맹의 거점입니다. 이 일대에서 겁이 나서 움직이지 못한다면 무슨 낯으로 무림맹이라는 간판을 걸고 있겠습니까?"
"허허…… 노부가 말을 잘못한 것 같군!"
천외유자 곽도광이 껄껄 웃었다.
감천형이 어릴 때부터 그를 보아온 사람이 천외유자 곽도광이었다. 이처럼 당당한 그를 보자 그는 내심 대견함을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다.
회의를 마친 감천형은 영소인 대한각으로 향했다.
시신을 도적맞아 시신도 없이 영혼을 모시고 있는 그 자리에는 소복의 부인 한 사람이 넋을 잃은 듯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평소라면 세상이 놀라 들끓었을 것이고, 문상객들로 인하여 슬픔을 느낄 수도 없이 그들을 맞이하여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찾는 사람 하나 없이, 시신마저 도적맞은 미망인은 홀로 눈물을 떨구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뒤에 선 감천형은 죄스러워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하늘과 같은 사부의 죽음도 모자라 텅 빈 관이라니…….
하늘거리는 촛불이 무심히 그의 뒤로 긴 그림자를 만든다. 침묵이 그 그림자를 훑어 흘러내린다.
"경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자면성모 봉설란이 물었다. 목이 메어 있었다.
"지금 돌아오고 있는 중입니다. 존체를 아직…… 찾지 못하여……."
"그 아이에게까지 무슨 일이 생기면 아니 된다. 그렇게 되면 내가 무슨 낯으로 그분을……."
나직이 울먹이는 소리가 들리자 감천형은 가슴이 저며왔다.
늘 자상함으로 무림맹 내부를 보살펴 언제인가부터 사람들에게 자면성모로 불리는 사모였다. 그녀의 여린 마음씨를 알고 있던 그인지라 더욱 그녀의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는 감천형이기도 했다.
그는 그녀의 등을 향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무언의 다짐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사백께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문득, 그녀의 몸이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분께 가야 할 정도로 사태가 심각한 것이냐?"
그녀는 감천형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하긴…… 네 사부가 그렇게 되셨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느냐. 그래, 다녀오너라."
"그럼……."
그녀에게 뭔가 말을 하려던 감천형은 암암리에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를 향해 절을 하고는 자리를 떴다.
흔들리는 촛불.
미망인의 그림자가 그 불빛에 따라 심하게 일렁였다. 촛불이 그녀를 흔드는 것인지, 바람이 촛불을 흔드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감천형이 무림맹주부를 떠난 것은 그 밤이 아니라 새벽이 밝아올 무렵이었다. 그는 자신이 떠나는 시각을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취의청에서 회의할 때는 밝히지 않았지만 맹주부 내에 적의 첩자가 스며들어 와 있고 그 신분도 낮지 않다고 감천형은 이미 단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림맹 내에서 그가 떠난 시각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그의 사제인 천수단혼 좌백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