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二首 실종지의(失踪之疑) (4/113)

第二首  실종지의(失踪之疑)

-시신이 사라지다.

의혹(疑惑)이 맹주부를 뒤덮다.

 깊은 밤.

 흐르는 시간 속에 묻혀 어둠은 이미 삼경을 넘어서고 있었다. 

 밤은 점점 깊어가건만 취의청에 밝혀진 불빛은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고 있었다.

 아니, 그 불빛 아래 침묵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듯 더욱더 밝게 타올라 취의청 안을 밝히고 있다.

 패왕신도 감천형.

 그의 눈은 더할 나위 없이 가라앉은 채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당대 소림파의 장문방장(掌門方丈)인 대광 대사(大光大師)가 침통한 안색으로 희디흰 수염을 드리운 채 앉아 있고, 

 그 옆에는 수척에 이르는 은사불진(銀絲拂塵)을 가슴에 안은 노도사(老道士)가 있는데, 

 그가 바로 당금 무당파의 장교진인(掌敎眞人)인 일양자(一陽子)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좀 전까지 없었던 얼굴들이 십여 명 늘어나 있었다.

 '구대문파에서 모두 대표가 도착했다. 비록 그중 소림, 무당에서만 장문인이 직접 왔으나…… 나머지 사람들도 능히 그 파를 

 대표할 수 있는 명숙(名宿)들이다…….'

 감천형이 속으로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 소림 장문인 대광 대사가 침통히 불호를 외면서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노납(老衲)의 생전에 맹주의 시신을 보게 되다니.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구려! 정녕 믿을 수 없어……."

 "무량수불! 감 총당주는 이 일에 관해 무슨 단서라도 찾아낸 것이 있으신지?"

 무당 장교진인 일양자가 탄식하며 감천형을 바라보았다.

 구대문파의 장문인 중 그들 두 사람만이 직접 온 것은 소림, 무당파의 근거지가 낙양에서 가까웠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사안이 너무 중대한 까닭이었다. 

 그들은 맹주부에 도착해 일단 건곤무적 독고해의 시신을 확인하고, 그 다음에 취의청으로 돌아와 앉아 있는 것이다.

 "소생 미거하여 아직까지 흉수에 대한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말끝을 흐린 감천형은 그들을 돌아보며 침착한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소생이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아미타불…… 감 총당주는 이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오?"

 소림 장문인 대광 대사가 품속에서 핏빛처럼 붉은 봉서 하나를 꺼냈다.

 <소림문 장문방장 대광 대사 친전(少林門掌門方丈大光大師親展).>

 거기에는 행서체의 13자가 춤추듯이 선명했다.

  "노납은 이 봉서를 받고 급거 하산하여 무림맹으로 오다가 일양도우(一陽道友)를 만나게 되었소……."

 대광 대사는 일대의 고승답게 감천형의 의문을 미리 짐작하고 그 대답을 하고 있었다.

 감천형이 그 봉서를 받아 들자 무당 일양자도 침중히 고개를 끄떡였다.

 "빈도(貧道)가 받은 것도 내용이 조금도 다르지 않소."

 봉서의 내용은 간단했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감천형은 가슴속에서 치미는 분노로 손끝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놀랍게도 봉서의 필적은 바로 자신의 것과 판에 박은 듯했던 것이다.

 <천붕 급 래맹(天崩急來盟)! 천하무림맹 총당주 감천형 신(天下武林盟總堂主甘天炯信).>

 천붕이라는 말은 하늘이 무너졌다는 의미다.

 무림맹의 총당주이자 무림맹주의 대제자가 그러한 말을 쓴 것은 바로 무림맹주의 신변에 변고가 일어났다는 뜻이었다.

 더구나…….

 "그 봉서에는 무림맹에서 대지급 귀환을 요구하는 비밀 기호가 있었소. 그것은 맹주 유고 시 맹주 대행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소."

 이어지는 소림 장문 대광 대사의 말은 기가 막힌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도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보이지 않는 암중(暗中)의 적은 천하를 농락하고 있는 것이다.

 이 봉서는 누가 보아도 무림맹의 총당주 감천형이 보낸 것이 분명했다.

 딱딱히 굳어져 있는 감천형의 표정을 보며 곤륜 속가장문인인 운룡대협 고진추도 침잠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본 파가 받은 것도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소이다."

 아미파 각등 상인과 청성파의 수진 진인(修眞眞人), 공동과 화산(華山), 점창(點蒼) 그리고 종남(終南) 등의 제파(諸派)도 고개를

 끄떡여 동의를 표시했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감천형은 분노한 가운데에서도 일변 가슴속이 서늘해졌다.

 '그들이 나를 함정에 몰아넣고자 했다면 나는 황하에 뛰어들어도 이 누명을 벗기 힘들었으리라.'

 "으음…… 흉수의 능력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월등한 것 같소."

 묵묵히 있던 천외유자 곽도광이 단정하듯 말했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적이 패왕신도 감천형을 궁지에 빠뜨리려고 했다면 그는 실로 큰 곤욕을 치러야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장내의 사람들은 모두가 무림의 명숙이라 사리판단이 명확하여 거기에 하나의 큰 모순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봉서가 각 파에 도착한 날짜가 모두 틀렸던 것이다.

 더구나 곤륜이나 아미 등 멀리 떨어진 문파에 봉서가 도착한 것은 맹주부에 건곤무적의 시신이 도착하기 보름 전이었다.

 모두의 생각이 그에 미치고 있을 때.

 "적이 봉서를 보낸 시간은 아주 교묘해 여러분들께서 거의 한날한시에 맹주부에 도착하도록 안배했고 적은 그에 차질이 없도록

 봉서에 본맹의 수뇌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대지급 귀환의 비밀 기호까지 사용했습니다."

 패왕신도 감천형의 침중한 말소리가 좌중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대전 안은 숨소리마저 멎는 듯 조용하여 촛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리고는 적은 여유만만하게 여러분들이 본 맹주부에 도착할 시기에 맞춰 사부님의 시신을 운구해 왔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막대한 조직력을 가지고 치밀한 계획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며, 그들의 기도하는 바는 사부님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아미타불…… 그래, 총당주는 거기에 대해 짐작이 가는 바라도 있소?"

 소림 대광 대사가 감천형의 말에 동의를 표하며 물었다.

 "그들이 무엇을 꾀하고 있는지…… 아직은 단정해 추측하기는 이를 것 같습니다. 이 시점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독고 맹주께서는 중원(中原)의 무왕(武王)이라 불릴 정도로 누구나가 인정하는 무림제일의 고수이셨소. 총당주는 누가 그분을

 살해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 순간, 침착한 음성이 들려왔다.

 육순의 도인(道人)이었다.

 그는 바로 당금 화산 장문인 육합무적검 진자양의 사형인 화산우사(華山羽士) 육기(陸琦)로서 화산파 유일의 도사였다.

 감천형은 가볍게 머리를 저었다.

 "소생의 짧은 식견으로서는 뭐라고 감히 단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이 자리에는 선배 고인들께서 많으시니 같이 논의해 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데……."

 그는 화산우사 육기를 건너 보았다.

 "진 부맹주께서는 이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장문 사제께서도 알고 계시오. 하나 지금 연공이 막바지에 이르러 폐관을 깰 수가 없는 형편이외다. 지금 그만둔다면

 전공(前功)이 허사가 될 뿐 아니라 주화입마의 위험마저 있어…… 그래서 장문 사제께서는 총당주께 이 말을 전해달라고 했소이다."

 화산우사 육기는 감천형의 말에 침착히 계속 말을 이어갔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최대한 연공을 앞당길 테니까, 그동안 총당주가 무림맹을 맡아주도록……."

 감천형의 미간에 난색이 떠올랐다.

 "좀 전까지는 모르나…… 지금은 각 파의 명숙들께서 모두 모이신 상태인데 소생이 대국을 주지한다는 것은……."

 그의 말은 소림 장문인 대광 대사에 의해 중단되었다.

 "독고 맹주의 죽음은 너무도 엄청난 충격이오. 사실 지금까지 무림의 안정은 모두가 그가 존재함으로써 유지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맹주의 피살 소식이 알려지면 강호상에는 일대 혼란이 일어나게 될 것이오. 무림맹의 힘이 막강하다 하나 지휘

 계통이 서 있지 않으면 그 힘을 발휘할 수가 없게 되오. 비록 연륜이 짧다 하지만 감 총당주의 능력이라면 일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니, 지금은 사양할 때가 아니외다!"

 소림 일파의 위명은 하루 이틀에 이룩된 것이 아니다.

 대광 대사의 말은 당연한 것이라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기다 권한 대행자인 화산파 장문인 진자양의 부탁까지 있음에랴!

 감천형은 무거운 얼굴로 일어나 중인들에게 공수했다.

 "중임을 맡겨주시니 능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적이 아무리 안개 속에 숨어 신비함을 가장하고 있다고 하나

 천하무림맹이 하나가 되면……!"

 그의 말은 채 끝을 맺지 못했다.

 후닥닥!

 발걸음 소리조차 요란하게 인영 하나가 그 순간에 취의청 안으로 뛰어든 것이다.

 철적신검 호천성이었다.

 그는 무림맹 호맹위대장으로서 언제나 당황함이 없는 인물인데 지금은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만면에는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그를 본 감천형은 가슴이 철렁했다.

 '호 위대장은 결코 저렇게 덤벙거릴 사람이 아닌데!'

 그의 불안은 적중했다.

 털썩 한쪽 무릎을 꿇은 호천성은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크…… 큰일났습니다. 크, 큰일…… 매, 맹주님의 시신이…… 시신이……."

 그는 얼마나 당황했던지 사색이 되어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찰나, 감천형은 벼락을 맞은 듯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안색이 돌변했다.

 그리고 그는 호천성의 말을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몸을 날렸다.

 "……."

 감천형은 어이가 없는 듯 망연한 표정으로 목석같이 서 있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대한각.

 그의 좌우에는 흰 휘장과 병풍이 둘러쳐져 있었고 그 앞에는 관 하나가 놓여 있다.

 은은한 향이 피어 오르고 있는 제단(祭壇)의 위에 마련된 위패에는 독고공해지영위(獨孤公海之靈位)의 일곱 글자가 쓰여져 있어

 이곳이 바로 건곤무적 독고해의 영소(靈所)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관.

 감천형의 앞에 있는 그 관에는 바로 그의 사부인 독고해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 조금 전까지도…….

 하지만 덩그러니 열려진 관의 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 거기 누워 있던 독고해의 시신이 사라진 것이다.

 시신이 사라지다니…….

 정말 있을 수 없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감천형은 납덩이같이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옆에는 안색이 흙빛이 된 천수단혼 좌백이 바보 같은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그의 입에서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죽어 돌아온, 그들의 사부이자 무맹의 맹주인 건곤무적 독고해의 시신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정신이 있을 리가 없었다.

 천수단혼 좌백은 고개를 떨구었다.

 "소제는 외곽 경비에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바깥쪽에…… 연락을 받고 여기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일이 벌어지고 난 후였습니다."

 "자세히 말해 봐라!"

 "지금으로써는 말씀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곳을 경비하던 고수들은 모두가 제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고…… 이상이 생긴

 곳도 없었습니다."

 들을수록 귀신이 곡을 할 노릇이었다.

 패왕신도 감천형의 눈에서 노기가 일어났다.

 "아무런 이상도 없는데 사부님의 존체가 사라지다니? 그럼 사부님께서 부활하셔서 스스로 이곳을 빠져나가시기라도 하셨단 말이냐?"

 "……."

 천수단혼 좌백은 괴로운 표정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이 일을 처음 발견한 자를 찾아 보내고, 너는 순찰당의 전 인원을 점검하여 무슨 이상이 없었나를 알아보도록 해라!"

 감천형의 말에 천수단혼 좌백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 나서 바람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대한각을 나선 천수단혼 좌백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성격은 냉정하고 침착하여 희로가 얼굴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사부인 건곤무적 독고해도 그러한 그를 일러 제자 중 가장 심기가 깊다고 평하면서,

 제 사부가 죽어도 얼굴색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웃은 적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어금니를 악물고, 움켜쥔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어느 놈이든…… 용서하지 않겠다!"

 그의 입술을 비집고 맹수의 신음 같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하늘과 같은 사부. 그 사부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렇듯 욕을 보인단 말인가.

 "좌 당주가 순찰당을 맡고 나서 무림맹의 경비는 철벽과 같았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수석장로 천애유자 곽도광이 침통히 입을 열었다.

 그사이 취의청에 있었던 고수들은 모두 여기에 와 있었다.

 "흉수는 실로 대담하기 짝이 없군! 감히 천하무림맹의 맹주를 암산하고는 그도 모자라 이제는 다시 그 시신까지 훔쳐 가다니

 도대체……."

 무당파의 일양자가 분노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흥! 모두가 허수아비들뿐이니까 그렇지……."

 갑자기 한 가닥 싸늘한 냉소 소리가 그의 말을 자르며 들려왔다.

 모두의 안색이 돌변했다.

 "누구냐?"

 패왕신도 감천형은 휘장 쪽을 쏘아보며 외쳤다.

 그의 말과 함께 고수들이 좌우로 흩어져 휘장을 포위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강호의 역전노장들이라 굳이 뭐라고 말을 하지 않아도 상황 대처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싸늘한 긴장이 살처럼 흘러갔다.

 그것과 동시에 휘장이 미미하게 흔들리며 인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불이 밝혀져 있었다고는 하나 청당의 휘장 쪽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고 관의 뒤쪽이라 어쩐지 으스스한 기분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거기에서 흑영이 유령처럼 느닷없이 나타났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전신에 흑의를 차려입은 그 인영은 의외에도 이제 겨우 18, 9세 가량의 아름다운 소녀였다.

 흑의소녀의 안색은 한 겹 서리가 깔린 듯 싸늘했고 앵두와 같은 입술에는 얼음과 같이 차가운 웃음이 머물고 있었다.

 모습을 드러낸 그녀의 손에는 한망(寒芒)이 번뜩이는 단검이 한 자루 쥐어져 있는데,

 그녀의 흑의에는 선혈이 상반신을 적시며 흘러내리고 있어 섬뜩하기 이를 데 없었다.

 흑의소녀의 출현은 너무도 기이해 모두의 심중에 의혹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사매(師妹)?"

 그런데 그녀를 보고 패왕신도 감천형이 놀라 외치는 것이 아닌가.

 "사매?"

 "사매라니……?"

 너무도 의외의 상황에 군웅들은 어리둥절해서 감천형과 흑의소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나 감천형은 그들의 의혹을 풀어줄 여가가 없었다.

 그녀의 반신을 적시고 있는 선혈을 본 까닭이다.

 그는 일별하는 순간에 그녀가 방금 처절한 격투를 치르고 난 상태임을 느낄 수 있었다.

 "사매, 어떻게 된 거냐? 상처가 심한가?"

 황망한 감천형의 물음에 흑의소녀의 얼음장 같은 얼굴이 약간 풀렸다.

 "내 피가 아니에요."

 그녀의 음성은 간단했고, 그에 따라 군웅들의 의혹은 더욱 깊어졌다.

 서서히 검을 거두는 그녀를 보고 냉정을 회복한 감천형은 군웅들에게 그녀를 소개했다.

 "제 사매입니다. 선사(先師)의 무남독녀로서 독고경(獨孤瓊)이라 합니다. 남해(南海) 관음초(觀音礁)의 공문기인(空門奇人)이신

 절진 신니(絶塵神尼)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마 여러분들께서는 잘 모르실 겁니다."

 "아……."

 "절진 신니-!"

 그의 소개에 군웅들에게서 가벼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남해 관음초의 절진 신니는 세속과 인연을 끊고 남해의 전설처럼 전해지는 일대(一代)의 공문기인이었다.

 그 성정(性情)이 매우 괴팍해 중원도상은 물론 사람들과의 왕래가 전혀 없었지만 그 비중은 능히 일대의 종사에 부족함이 없는

 존재인 것이다.

 "네 피가 아니라니? 어떻게 된 일인지 어서 말을 해보아라. 지금……."

 독고경은 감천형의 재촉에 다시 얼굴이 굳어졌다.

 "바로 맹주부의 위사들을 풀도록 해요. 아버님의 존체는 적에게 탈취당했어요!"

 "적이라니?"

 감천형의 눈빛이 무겁게 굳어졌다.

 독고경은 어릴 때, 우연히 남해 절진 신니의 눈에 들어 그녀의 문하에서 수학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그녀가 겨우 12살 되던 때였으니 이따금 아버지가 가서 그녀를 만난 것 외에는 지금까지 관음초를 떠난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맹주부로 돌아온 것은 겨우 한 달 전.

 세상에서 보통 말하는 바대로 배울 것을 웬만큼 배워서 하산을 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랜만에 돌아온 그녀의 집, 맹주부에는 그녀를 반겨 맞아줬어야 할 아버지 독고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모종의 일로 인하여 그는 이미 석 달 동안이나 맹주부를 떠나 있었던 것이다.

 하루하루 아버지를 기다리다 마침 용문(龍門)으로 바람을 쐬러 갔던 그녀는 급거 귀환하라는 연락을 받고 돌아와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을 목도하게 된다.

 아버지,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던 그 아버지가…….

 그렇게 자상했던 그 아버지가 자신을 보고서도 눈을 뜨지 않았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목석이 되어 검은 관 속에 누워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넋을 잃고 멍하니 관 앞에 앉아 있었던 그녀는 구대문파의 장문인 등이 오면서 잠시 자리를 떴다.

 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혼절을 한 그녀를 거처인 화경루(花鏡樓)로 옮겨놓은 것이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 그녀는 깜박 정신을 차리자 다시 빈소로 달려갔다.

 화경루는 빈소가 차려진 대한각의 뒤쪽에 있다.

 그런데 빈소로 가던 그녀는 빈소를 빠져나오는 검은 그림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만약 그녀의 거처가 대한각의 뒤쪽에 위치하고 있지 않았었다면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인영의 움직임은 은밀하고도 신속했다.

 괴이함을 느낀 그녀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황급히 빈소로 달려 들어갔다.

 뭔가 틀렸다.

 누구도 감히 건드릴 리가 없을 것인데…… 관 뚜껑이 조금 비틀어져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관 뚜껑을 민 그녀는 전신이 싸늘히 식는 것을 느껴야 했다.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시신이 사라진 것이다.

 아무도, 정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독고경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조금 전에 본 그림자가 사라진 쪽으로 몸을 날렸다.

 망설이고 말고 할 계제가 아니었다.

 담을 넘자, 은밀하게 건너편 누각의 담을 넘는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둠 속이라 과연 제대로 본 것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맹주부의 뒷담에 올라선 그녀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그림자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게 섯거라!"

 그녀는 고함과 함께 전력을 다해 그 뒤를 따랐다.

 그녀가 맹주부를 벗어나는 순간, 뒤에서 경적(警笛)이 울리기 시작했다.

 남의 눈을 거리끼지 않는 그녀의 행적이 호맹무사들에게 발각된 것이다.

 "결국, 그들을 놓쳤단 말이냐?"

 감천형이 중얼거렸다.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들의 무공은 뜻밖에도 고강하여…… 그들 중 셋을 죽이고 포위망을 돌파하여 쫓아갔지만 이미 아버님의

 존체를 훔친 범인들의 종적은 사라져 버린 뒤였어요."

 독고경은 차가운 얼굴에 입술을 물었다.

 감천형은 그녀가 얼마나 악전고투를 했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존심이 강한 그녀인지라 결코 쉽게 상대가 고강하다는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 그들의 무공노수(武功路數)를 알아볼 수 있었느냐?"

 감천형의 물음에 독고경은 머리를 저었다.

 "창망하여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중원도상의 무공이 아닌 것처럼 보였어요."

 "설마 놈들이……."

 옆에서 천외유자 곽도광이 중얼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본 건곤무적 독고해의 시신에 난 흔적도 중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으니,

 생각이 그쪽으로 미칠 수밖에 없었다.

 "말도…… 놈들이 맹주의 시신을 보내놓고 무엇 하러 힘들여 그 시신을 다시 탈취하여 간단 말씀이오?"

 초미노인 구열이 어이없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 말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였다.

 "존체를 도적맞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말과 함께 대청 안으로 미모의 중년 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신에는 눈처럼 흰 소복을 입어 상가(喪家)의 차림이었지만 천생으로 타고난 기품과 미모를 그 옷이 가릴 수는 없었다.

 "부인을 뵙습니다."

 그녀가 나타나자 감천형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외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녀에게 공수하였고, 소림, 무당 등의 장문인들도 가볍게 머리를 숙여 그녀를 맞았다.

 "이 마당에 예는 무슨…… 어서 예를 거두세요. 죄인은 감당하기 힘듭니다."

 중년 부인이 한숨을 쉬면서 손을 저었다.

 모두가 그녀를 향해서 정중하게 예를 표했지만,

 유독 독고경만은 싸늘한 눈길로 그녀를 한번 훑어보고는 아무 말도 없이 대청을 나가고 말았다.

 중년 부인의 미간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녀가 암중에 탄식하는 것을 본 감천형은 난감한 빛으로 나직이 말하였다.

 "사모님, 사매는 아직 나이가 어리니……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그녀야말로 무림맹의 맹주인 건곤무적 독고해의 부인인 자면성모(慈面聖母) 봉설란(鳳雪蘭)이니, 감천형에게는 사모가 된다.

 중인들이 그녀에게 예를 표함은 당연했다.

 조금 전까지 울고 있었던 듯 눈시울이 붉은 그녀는 감천형의 말에 쓸쓸하게 웃어 보였다.

 "이 마당에 그게 무슨 대수라고…… 하지만 대체 이게 무슨 일이 일인지 말해 보오."

 감천형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흑의무복을 날렵히 차려입은 그는 맹주부의 위사(衛士)임을 알리는 표식을 팔뚝에 두르고 있어 누구라도 그가 맹주부의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뚜벅뚜벅 나무토막처럼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그가 군웅들이 보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걸어 들어옴을 보자 감천형이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가 맹주부의 외곽을 경비하는 십장(什長) 중 하나로서 그의 신분으로서는 부르지 않는다면 이곳까지 들어올 수 없는 까닭이었다.

 감천형이 물었음에도 흑의무사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저 뚜벅뚜벅 걸어 들어올 뿐이었다.

 갑자기 괴이한 느낌이 대청을 엄습했다.

 "너는……."

 그의 얼굴이 창백하고 눈동자가 풀려 있음을 본 감천형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퍽!

 그의 칠규에서 선혈이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그것과 함께 그의 신형은 마치 나뭇등걸처럼 앞으로 엎어져 버렸다.

 콰당……!

 요란한 소리가 들렸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흑의무사는 그렇게 엎어져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를 일으키지 않았다.

 …….

 일순, 숨통을 누르는 듯한 침묵이 대청을 엄습해 짓눌러왔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다시 일어난 것이다.

 다음 순간, 천외유자 곽도광과 초미노인 구열 등 몇 사람의 고수들이 번개처럼 대청 밖으로 날아갔다.

 무슨 일인지 조사를 하려는 것이다.

 감천형은 죽어 넘어진 위사를 뒤집었다.

 예상대로 그는 이미 절명해 있었다.

 피는 아직도 흘러나오고 있었고 선혈이 터져 나온 눈을 튀어나올 듯 부릅뜨고 있어서 심히 공포스러운 모습이었다.

 "아미타불…… 어떻게 된 것 같소, 감 대행?"

 소림의 대광 대사가 불호를 외면서 물었다.

 잠시 그의 맥문을 쥐고서 그의 내부를 검사해 보던 감천형은 미간을 찡그리면서 입을 열었다.

 "고심한 내가공력에 의해서 심맥을 공격당했습니다. 그리고는 일종의 섭심지류의 무공으로 그를 명령하여 안으로 들여보낸 것같이

 보입니다."

 "그런……."

 그때, 곤륜파의 운룡대협 고진추가 소리쳤다.

 "그의 손에 뭔가가 쥐어져 있소!"

 과연 그의 손에는 뭔가가 있었다.

 그것은 서간지(書簡紙)로 보였는데 너무도 꽉 움켜쥐고 있어서 상당한 힘을 소모하고서야 비로소 그것을 꺼내볼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본 모든 사람들의 안색은 그야말로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아무것도 없군……."

 밖으로 쫓아 나갔던 천외유자 곽도광이 안으로 들어오다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감천형이 들고 있는 서간지를 발견하고는 그가

 건네주는 것을 보곤 그의 얼굴도 흙빛이 되고 말았다.

 <더 이상 사인(死因)을 캐려 하지 마라. 죽음이 맹주부를 뒤덮으리라.>

 서명도 없다.

 누구에게 보낸다는 말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에게 보낸 것인지는 너무도 자명했다.

 "이, 이놈들이…… 이놈들이 감히 협박까지 하다니……."

 뒤늦게 돌아온 초미노인 구열은 치솟는 격노를 참지 못하고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납덩이처럼 굳은 얼굴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상대의 위협에 겁이 나서가 아니었다.

 이처럼 종횡무진 맹주부를 마음대로 드나드는 상대가 누군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곤무적 독고해.

 이 일대의 고수를 죽인 자는 과연 누구일까.

 그 시체를 보낸 자들은…… 그리고 그 보낸 시체를 다시 가져간 것은 무슨 까닭일까.

 분명한 것이 하나 있었다.

 상대는 맹주부를, 건곤무적 독고해가 빠진 무림맹주부를 만만하게 보고는 손아귀의 인형처럼 가지고 놀고 있다는 것.

 용담호혈(龍潭虎穴).

 누구나 무림맹주부를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오늘 밤에 일어난 이 일련의 일들은 참으로 참혹하리만큼 맹주부를 짓밟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처럼 삼엄하게 경계를 하고 있었음에도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그 적들은 신출귀몰,

 맹주부를 제 집처럼 드나들면서 돌려보낸 맹주의 시신까지 가져갔을 뿐 아니라, 협박까지 했다.

 사람을 협박장으로 써서…….

 치욕.

 황하에 뛰어들어도 씻을 수 없는 치욕을 건곤무적 독고해가 사라진 무림맹주부는 지금 맛보고 있었다.

*   *   *

 겉보기로 맹주부는 조용해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분노로서 들끓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나지 않아 맹주부의 위사들이 사방으로 쏟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수색 작업에 나선 것이다.

 누구에게도 맹주가 죽었으며, 그 죽은 맹주의 시신을 도둑맞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수색 작업을 총지휘하고 있는 순찰당주 천수단혼 좌백의 마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다.

 독고경 또한 옷을 갈아입고는 수색 작업에 동행했다.

 그녀의 무공은 아버지뿐만 아니라 일대고수인 절진 신니의 진전을 이어 여중고수(女中高手)인데다 적을 목격한 유일한 목격자라서

 빠질래야 빠질 수가 없었다.

 부중의 무사들의 절반 이상을 밖으로 쏟아낸 감천형은 문을 닫아걸고는 내부적으로 조사를 시작했다.

 적이 이렇게 신출귀몰할 수 있음은, 내부의 연통[內應]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감천형의 판단이었기에.

 감천형의 앞에는 다섯 명의 무사가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시신을 도적맞던 때, 독고경이 말한 방면을 지키던 무사들이었다.

 두 사람은 그 방향이었고, 나머지 세 사람은 그 좌우에 있었기에 누구든지 반역의 가능성이 있었다.

 이미 창밖의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온다.

 악몽의 밤이 지나고 있는 것이다.

 "긴말은 하지 않겠다."

 감천형이 입을 열었다.

 일단, 군웅들은 거처를 안배하여 쉬도록 한 상태였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 힘을 비축할 시간도 필요했고,

 그들은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와 이미 지쳐 있기 때문이다.

 "그 시각에 자리를 이탈한 사람은 앞으로 나서라."

 감천형의 말에 한 사람이 조금 망설이는 빛을 보임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넌가?"

 감천형의 지목을 받은 그는 깜짝 놀라 황급히 머리를 저었다.

 "저, 저는 잠시도 자리를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럼 누구냐?"

 "그게……."

 그가 망설이는 순간에 옆에 있던 흑의무사가 무릎을 꿇었다.

 "제가 잠시 자리를 비웠었습니다."

 "네가?"

 "나각(羅珏). 청성파의 출신으로 위대에 근무한 지 이 년째로 평소 스스로의 직책에 충실한 자입니다."

 옆에서 호맹위대의 수장인 철적신검 호천성이 부연 설명을 했다.

 "자리를 비운 이유를 설명해 보아라."

 "저, 저는…… 소변이 마려워서…… 그래서 옆 자리의 호 형에게 잠시 부탁을 하고 자리를…… 죽을죄를 졌습니다."

 나각이라는 무사가 머리를 떨구었다.

 그 말을 들은 감천형의 눈빛이 문득 한 생각으로 날카롭게 빛을 발했다.

 "네가 자리를 비운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

 "그건…… 채 반 각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볼일을 본 다음에 바로 돌아갔었습니다."

 "호맹위사의 수칙(守則) 제3조를 외워보거라."

 감천형의 말에 주춤했던 나각은 갑자기 안색이 창백해졌다.

 "외워보라고 하지 않았더냐?"

 나각의 이마에 식은땀이 방울방울 걸렸다.

 "죄를 받겠습니다."

 그는 입술을 물며 깊게 머리를 숙였다.

 "호 수장(胡首長), 수칙을 외워보게."

 "위사는 일단 번(番)을 서면 자리를 이탈하지 못하며, 번을 서기 전에 모든 준비를 끝마쳐야 한다. 여기서의 준비란 식사에서 생리

 현상의 해결까지를 의미합니다."

 호맹위대의 수장인 호천성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가장 기본적인 수칙을 지키지 않았다 함은 감독 불충분의 사유가 된다. 이의있나?"

 감천형은 차가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지 않고서 말했다.

 "책임을 지겠습니다."

 호천성이 굳은 얼굴이 될 때, 감천형은 다시 나각의 옆에 있는 호가라 불린 흑의무사를 향해 입을 열고 있었다.

 "나각이 자리를 비운 사이 너는 무엇을 했느냐?"

 그가 다급히 말했다.

 "저, 저는 자리를 이탈한 적이 없습니다. 나 형이 자리를 비운 동안, 저는 조금도 딴눈을 팔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냐? 적이 맹주님의 존체를 탈취해서 네가 있던 그쪽으로 유유히 사라졌음에도?"

 감천형이 냉소를 터뜨렸다.

 "정말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입에 침이 마르는 듯 마른침을 삼켰다. 초조한 빛이 역력했다.

 "너와 3장 거리에 있던 매복 2조에서는 그 시간에 영소를 빠져나오는 맹주님의 영애를 발견하고 그 순간에 일차 경보를 발령했다고

 했다. 그런데 너만 보지 못했다는 것이냐? 아무것도?"

 "그, 그렇…… 그 무렵, 잠시 토끼 한 마리를 발견한 것밖에는…… 정말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토끼?"

 "예, 작은 토끼였는데 맹주부에 웬 토끼?라는 신기한 생각에 잠시 그쪽을 바라본 것밖에는…… 서, 설마! 그사이에……."

 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나각, 네가 자리로 돌아왔을 때의 상황을 이야기해 보거라."

 긴장된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있던 나각이 입을 열었다.

 "경비 외곽에서 경보가 발령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뒤에 바로 순찰당주께서 영소로 달려오셨습니다. 그 뒤로는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바로 그 순간 감천형이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간악한 놈 같으니, 감히 네가 나를 속이려는 것이냐? 호 수장은 저놈을 반역죄로 체포해라!"

 그의 고함은 철퇴로 후려치는 듯 강렬했다.

 느닷없는 그의 명령에 일순 얼떨떨했던 철적신검 호천성은 지체없이 몸을 날려 나각 옆의 호가라는 흑의무사를 덮쳐 갔다.

 원래 이런 일이 있다면 그의 수하들이 처리하는 법이지만 오늘 일은 너무 중대하여 그가 직접 나서는 것이다.

 "당주님! 저는 정말 억울……!"

 철적신검 호천성이 질풍과 같이 덮쳐 오자 그 흑의무사는 창백하게 질려 소리치다가 입을 딱 벌렸다.

 마치 나는 독수리처럼 찰나간에 일 장 반가량의 거리를 가로질러 그에게 덮쳐 오던 철적신검 호천성이 돌연 그의 앞에서 손을 돌려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나각의 어깨 견정혈(肩井穴)을 짚어갔던 것이다.

 "아!"

 모두가 보고 있었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인지라 전부 놀라서 부지중에 경악의 탄성을 토해냈다.

 장중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변화.

 출기불의(出其不意)!

 호가라고 불린 흑의무사를 덮치는 줄 알았던 호천성은 그를 잡는 척하다가 돌연 손을 뒤집어 나각을 잡아갔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덮쳐 온 호천성의 일격을 피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나각은 앉은 자세에서 벌떡 몸을 뒤로 젖혀 호천성의 일격을 스쳐 보냈다.

 경악의 빛이 호천성의 얼굴에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고수답게 자신의 공격이 허탕을 친 것을 알자 그 순간에 손을 재차 뒤집어서 창응박토(蒼鷹搏兎)의 일식으로 거의

 땅에 눕다시피 한 나각을 양손으로 짓눌러 갔다.

 가히 전광과도 같은 변초였다.

 탄성이 일었다.

 저 신속한 변화에 일개 호맹무사인 나각이 대응할 수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않았다.

 팡!

 맹렬한 폭음과 함께 바닥에서 흙먼지가 피어 올랐다.

 동시에 경악의 빛이 호천성의 얼굴에 떠올랐다.

 또다시 허탕을 쳤던 것이다.

 거의 땅바닥에 누울 정도로 허리를 뒤로 굽혔던 나각은 그가 재차 공격을 하는 순간에 꿇었던 무릎을 쭉 뻗어 그 탄력을 이용하여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이 뒤로 이 장이나 물러나 있었다.

 그리고 호천성이 땅을 치는 순간에 그는 신형을 뒹굴어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질풍과도 같은 몸놀림, 절정에 달한 금리도천파(金鯉倒穿波)의 일식이었다.

 감천형이 그들을 조사하던 곳은 현장 확인을 위하여 영소가 마련된 대한각의 뒤편이었다.

 그러하기에 그가 한 번만 더 몸을 날린다면 후원 담을 넘을 수가 있었다.

 사방에서 다급한 외침과 함께 사람들이 움직였지만 그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누구도 그를 저지할 수가 없었다.

 "흥!"

 하나, 막 담으로 날아오르려고 하던 나각은 귓전으로 파고드는 차가운 코웃음 소리를 듣고 가슴이 섬뜩해졌다.

 바로 자신의 앞에서 들린 소리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한 사람을 보았다.

 감천형이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서 날아드는 나각을 향해서 일권(一拳)을 불쑥 내질렀다.

 강하거나 힘을 쓴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일격은 정말 적절하여 나각은 그 일권에 향해 달려든 것과 같은 꼴이 되어 피할 수가 없었다.

 감천형의 일권은 그의 명치를 쳤고, 나각은 외마디 신음을 토하며 실 끊어진 연과 같이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그런 그를 호천성이 달려와 혈도를 짚었다.

 "그를 형당으로 데려가라."

 감천형이 말했다.

 "누구에게 문초를 시킵니까?"

 호천성이 물었다.

 "내가 직접 하겠소."

 말과 함께 감천형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가 첩자인 줄 아셨습니까?"

 그의 뒤를 따르며 호천성이 궁금증을 참지 못해서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들의 앞에는 호맹위사들이 늘어진 나각을 형당으로 압송해 가고 있었다.

 "허허실실. 일부러 자신에게 의심을 품게 하고는 실제로는 그 의심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고 있었소. 나도 확신은 하지 못하여

 시험한 것에 불과했는데…… 만약, 그가 미리 준비하고 있어서 마각을 드러내지 않았더라면 어쩔 수가 없었을 뻔했소."

 "그렇군요……."

 호천성은 내심 감탄하며 고개를 끄떡였다.

 말은 쉽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판단이 아닌 까닭이다.

 눈앞에 형당 건물이 드러났다.

 형당(刑堂)은 규율을 집행하는 기관이다.

 형당의 당주인 철심무정 공손도는 이미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다가 수하들이 나각을 형틀에 앉히는 것을 보면서 물었다.

 "청성파의 장로인 수진자가 여기 있는데, 이 일을 먼저 알리지 않아도 괜찮을런지?"

 "사안이 사안이니, 일단 문초를 한 다음에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음……."

 공손도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당대에 이르러 구대문파의 성세는 중천에 뜬 태양과 같지는 않다.

 하지만 구대문파라는, 무림 중의 아홉 개 대문파라는 말을 듣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 중 가장 연혁이 일천한 문파라 할지라도 백 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한다.

 현 천하무림맹 또한 그들을 중심으로 하여 결성되었고 운영되어 왔다.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게다가 평소와는 달리 그 구대문파의 중요 인물들이 모두 이 무림맹에 모여 있었다.

 그러나 명확한 사실을 밝혀내기 전에 그들을 경동시킬 이유는 없었다. 

 나각이 비록 청성파에서 차출된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현재는 무림맹 소속.

 그를 처리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무림맹의 법이 우선하는 것이다.

 더더구나 지금은 비상시였다.

 어둠.

 거기에 타오르는 장명등(長明燈).

 나각은 눈을 떴다가 흔들거리는 불빛을 받으며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감천형을 보고는 눈을 감아버렸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마라. 이곳을 벗어날 수는 없을 테니까. 아무도 너를 구해줄 수 없다."

 눈을 감은 그에게 감천형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암중에 공력을 운기한 나각은 마혈(麻穴)이 금제되어 전신이 물먹은 솜과 같이 늘어져 있어서 손가락 끝 하나 움직일 수 없음을

 알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손과 발은 쇠심줄로 꼰 오라로 묶여 있었다. 그것은 전문적으로 고수를 상대하기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누가 너를 움직이고 있느냐?"

 감천형이 묻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각은 입을 다문 채 말을 하지 않았다.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네 이놈! 네가 그러고 어찌 사문을 대하려 하느냐?"

 철심무정 공손도가 눈을 부릅뜨고서 꾸짖었다.

 문득 나각은 눈을 뜨고 감천형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형용키 힘든 것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웃음이었다.

 이 상황에 웃음이라니?

 감천형은 무엇인가 불길한 느낌이 머리를 치는 것을 느꼈다.

 "아무것도……."

 나각이 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을 것……."

 채 말을 맺지 못하고 나각은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한 가닥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맙소사!"

 철심무정 공손도가 대경실색하여 황급히 나각의 하관혈(下關穴)을 쳤다. 하관은 바로 아래턱뼈가 두골에 걸리는 곳이다.

 그가 나각의 하관을 치자 나각의 입이 벌어지면서 검은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끅,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으…… 내가…… 지옥에 들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끄윽……!"

 나각은 뭔가 말을 할 듯 몇 번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언제라도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 법이다. 말을 할 수 없는 것이기에.

 "……."

 굳은 얼굴로 묵묵히 서 나각의 주검을 보고 있는 감천형을 철심무정 공손도가 일그러진 얼굴로 돌아보았다.

 "입 안에 물고 있던 독을 삼킨 것 같소……."

 그는 이어 길게 탄식했다.

 "명문의 제자가 입에 독을 물고 있을 줄은…… 본 당주의 실책으로 일을 그르쳤으니 죄를 받겠소."

 "이 일이 어찌 공손 당주의 잘못……."

 그 순간,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나타난 사람이 순찰당의 사람임을 본 감천형은 공연히 가슴이 섬뜩하여 급히 물었다.

 "수색을 나간 사람들이 강적을 만난 것 같습니다."

 "강적?"

 "예! 용문 방면으로 나간 제3대와의 연락이 끊겨서 사람을 보냈는데, 방금 그 방면으로 나갔던 본 당의 휘하 고수 한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일진 바람이 일면서 감천형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철심무정 공손도는 신음을 흘린다.

 숨 막히는 고요 속에 가슴으로 파고드는 괴이한 공포가 기척도 없이 맹주부를 향해 다가들고 있음을 이젠 누구라도 느낄 수 있었다.

 굳은 얼굴로 우뚝 선 형당의 당주 철심무정 공손도와 그 뒤에서 형틀에 앉은 채 피를 흘리고 죽은 나각의 시신이 그것을 증명하는

 듯 그렇게 그 자리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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