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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전序戰 (2/113)

서전序戰

 여기 한 사람의 영웅(英雄)이 있다.

 그의 이름은 건곤무적(乾坤無敵) 독고해(獨孤海)!

 누가 그를 모르랴.

 당금 무림의 기둥인 천하무림맹(天下武林盟)의 맹주(盟主).

 그는 영웅이다.

 정사양도의 존경을 받는 그는 영웅이었다.

 일장진천(一掌震天)-일장은 하늘을 떨어울리고

 일검정해(一劒定海)-일검으로 광란하는 바다를 잠재운다.

 그의 무공은 절대(絶代)라 불리며, 그의 앞을 막을 자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   *   *

 악몽(惡夢)의 밤!

 대평원(大平原).

 그토록 처절(悽絶)했던 밤은 희미하게 움터오는 미명(未明)에 쫓겨 힘을 잃어가고 어둠 속에 묻혔던 대평원은 이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누가 있어 그 드러난 대평원을 보고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있으며, 벌린 입을 다물 수 있으랴.

 시산혈하(屍山血河)!

 광막한 대평원은 시체로 산을 이루고 피로써 강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지난 밤새 이루어졌다.

 더구나 그것이 단 일 인에 의해 벌어진 일임을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하나, 정녕이었다.

 보라!

 그 시산혈하의 가운데 태산과 같이 우뚝 서 옷자락을 펄럭이고 있는 사람을……. 

 그의 기도는 하늘이었으며, 그의 손에 들린 비룡음(飛龍吟)이란 일대명검(一代名劒)은 대지를 누르고 있었다.

 창궁(蒼穹)의 힘을 담은 호목(虎目)과 태산의 의지로 뻗은 콧날, 

 쇳덩이보다 더 강인한 사각형의 턱에 굳게 다물어진 그의 입술은 백절불굴한 사자(獅子)의 기상(氣象)!

 당금 천하에 누구 이러한 기도를 가지고 있는가.

 있다면, 오직 한 사람.

 그의 이름은 건곤무적 독고해!

 약관 스물의 나이에 출도해 지난 30년 간 천하를 질타해 온 대영웅(大英雄).

 그는 지금 여기에 홀로 서 있었다.

 밤새, 그 악몽의 밤새 수백의 고수를 베어넘기고서 그는 서 있었다.

 그의 눈은 한 주검을 보고 있었다.

 전신에 삼십육 개소의 검상(劒傷)과 십이 개소의 도상(刀傷)을 입고 반 시진 전에 절명한 그 주검. 

 그는 지난밤 죽음으로써 그를 호위하던 삼십육맹주친위대(三十六盟主親衛隊)의 대장인 창궁신룡검(蒼穹神龍劒) 진국웅(陣國雄)이다.

 그의 죽음을 끝으로 맹주 친위대는 전멸했다.

 그리고 이제, 이 대평원에는 그 혼자 서 있는 것이다.

 전신에 난 십이 개소의 검상은 느끼지도 못하는 듯이…….

 '국웅…… 지난 20년 간을 추적해 왔던 신비세력을 목전에 두고 자네는 먼저 갔군…….'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적(寂)……막(莫)!

 주위에 살아 있는 것은,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것은 숨 막히는 고요.

 그리고 죽음.

 '그들의 힘은 생각보다 십 배 강하다. 어쩌면 나는 오늘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런지도 모른다…….'

 건곤무적 독고해의 안색은 침중했다.

 그가 지난 밤새 치른 격전을 누가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그 흉험무비(凶險無比)를!

 그러고도 살아 있기에 그는 건곤무적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때, 천천히…… 아니, 홀연히 그의 앞쪽에 다시 검은 그림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슴푸레한 천색(天色) 아래서.

 "오는가?"

 건곤무적 독고해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서서히 한 걸음을 떼었다.

 발에 걸리는 시체.

 바로 그 순간이다.

 스팟!

 갑자기 건곤무적 독고해의 발 아래 땅속에서 무서운 도광(刀光)이 피어났다. 

 적을 발견하고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을 기다린 일격. 그 속도의 가공함은 번개였고 그 위력의 무서움은 벼락과 같았다.

 번쩍!

 땅! 따다당!

 섬광 한줄기가 매서운 금속성과 함께 귀청을 찢은 것은 그 찰나였다.

 건곤무적 독고해가 천천히 몸을 세우는 순간, 정녕 무서운 속도로 변화는 일어났다.

 그의 좌우 반 자[半尺] 높이의 허공.

 거기에는 전신을 황톳빛으로 감은 괴인 두 사람이 떠 있는데, 

 그토록 무서운 도광을 쏟아냈던 묵도(墨刀)는 그 순간에 반 토막이 나고 흙먼지 속에서 피벼락이 일어나면서 그들의 신형은 두 

 동강이 나 땅 위로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당했는지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득 건곤무적 독고해의 신형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 흐르는 실낱같은 핏줄기.

 "음산쌍마(陰山雙魔)…… 이들 같은 절세의 마두들마저 그들의 하수인이 되었단 말인가?"

 신음 같은 중얼거림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단 일 초였다.

 구천에 가서라도 믿을 수 없는 듯이 두 눈을 부릅뜨고서 죽어간 음산쌍마. 

 그들의 연수암격(聯手暗擊)은 지난 40년 간 강호무적이었다.

 살아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그들이 단 일 초에 쓰러지고 만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과연 건곤무적이라는 중원무왕(中原武王)! 정녕 대단하군. 구관(九關) 삼십이 개소의 매복을 돌파하고 여기까지 올 수 있다니……."

 한 가닥 차가운 음성이 천천히 들려왔다.

 부르르-

 풀잎에 매달렸던 아침 이슬이 그 음성의 냉기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내렸다.

 나타난 검은 그림자들.

 그들의 수효는 결코 많지 않았다.

 정확히 열두 명 하고도 다시 한 명.

 좌우로 갈라진 열두 명의 사이로 한 사람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전신에 걸친 검은 장포 위로 솟은 얼음을 빚은 듯한 얼굴. 거기에는 표정이 없었다.

 인피면구(人皮面具)임을 말하기라도 하듯이.

 하지만 건곤무적 독고해는 보고 있었다.

 흑포냉면인의 한 걸음, 한 걸음을.

 그리고 그 한 걸음마다 주위의 공기가 동결(凍結)되고 그의 발길이 미치는 곳에 얼음이 얼고 있음을.

 그것은 너무도 가공할 기도였다.

 "성기결상(成氣結霜)…… 천하에 한음기공(寒陰氣功)을 이 정도의 경지까지 연성한 사람은 오로지 한 사람…… 

 북해빙왕(北海氷王)뿐! 귀하가 북해빙왕 냉천추(冷千秋)요?"

 건곤무적 독고해는 천천히 아침 대기를 들이마시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하나, 흑포냉면인은 무심하고 차가운 빛으로 독고해를 쳐다보며 걸음을 멈추었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그사이에서 열두 명의 흑의인은 이미 건곤무적 독고해를 포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독고해는 그것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냉천추, 당신은 자신의 신분을 시인할 용기도 없소?"

 그의 물음에 흑포냉면인에게서 흘러나온 것은 냉소였다.

 "독고 맹주! 지금 이 상황에서 본좌의 신분이 무엇이던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소? 한 가지 변함없는 것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신이 죽는다는 것뿐이오."

 그 말소리의 여운에는 무서운 살기가 깔리고 있었다.

 "으와아핫하하하하-!"

 그 순간, 갑자기 건곤무적 독고해의 입에서 앙천대소(仰天大笑)가 터져 나왔다.

 휘이이잉…….

 한낱 웃음소리.

 거기에는 날벼락이 치는 듯한 위세가 깃들어 있어 사방의 흙먼지를 휘말아 올리며 풀포기를 으스러뜨렸다.

 건곤무적!

 이 이름은 이토록 거대했다. 상처를 입은 상황에서조차.

 하나…….

 "그 웃음이 그치는 순간, 당신은 죽게 될 것이오. 독,고,맹,주!"

 흑포냉면인에게서 흘러나온 음성은 여전히 싸늘할 뿐이다.

 건곤무적 독고해는 웃음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그토록 자신이 있소?"

 "지금은."

 흑포냉면인은 간단히 고개를 끄떡였다.

 그것이 신호인 듯 열두 명의 흑포인들의 전신에서 무서운 기세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좋아, 그렇다면 한 가지만 더 물어보기로 하지. 당신이 바로 그 신비세력의 주재인(主宰人)이오?"

 순간, 흑포냉면인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본좌는 그럴 자격이 없소."

 "음……."

 그의 대답에 건곤무적 독고해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말이 가지는 의미는 너무도 엄청난 것이었던 것이다.

 그가 정녕 북해빙왕 냉천추라면…….

 "본좌는 맹주를 위해 설치된 십이관문(十二關門) 중 열 번째 관문을 맡고 있을 따름이오. 가능성은 없겠지만 맹주가 십이관까지 

 갈 수 있다면 원하던 사람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오."

 건곤무적 독고해는 그의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상황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엄중했다.

 지난 20년 간 그가 조사한 것으로는 오늘 그를 함정에 빠뜨린 이 신비세력은 가히 천하무쌍의 힘을 보유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 힘은 천하로 퍼져 있었으며, 만약 그가 오늘 죽게 된다면 아마도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될 것이었다.

 그것은 이곳에서도 이미 증명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 정도까지라니…….

 "천하십왕(天下十王) 중 하나를 수하로 부릴 수 있는 사람이 당금 무림 중에 존재한단 말인가?"

 격한 중얼거림이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순간.

 "본좌는 제십관을 지킨다고 했지, 그의 수하라고는 하지 않았다!"

 냉소가 흑포냉면인에게서 터져 나왔다.

 그 말에 건곤무적 독고해의 눈에 의혹이 일었다.

 바로 그 순간.

 우우-우웅웅!

 독고해를 둘러싼 열두 명의 흑의인들에게서 뼈를 깎을 듯한 무서운 소용돌이가 일어나며 독고해를 덮쳐 왔다. 

 갑자기 사방의 기온이 엄동(嚴冬)으로 곤두박질했다.

 "천한형의진(天寒形意陣)…… 북해빙궁의 절학인가?"

 독고해의 눈빛이 침중히 변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에 그의 신형은 한줄기 검광으로 화(化)하고 있었다.

 쏴아앙!

 거대한 검광이 햇살처럼 일어나면서 흑포인들의 한음기주(寒陰氣柱)를 뚫고 들어갔다.

 "위험하다!"

 한소리 다급한 외침이 터지면서 흑포냉면인의 신형이 날아올랐다.

 그의 신형이 흑포인들의 진세로 날아들고, 독고해의 검광이 한음기주에 휘말리며 그것을 꿰뚫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쓰-쓰으으…….

 "으아-악!"

 검기강력이 회오리치며 일어나고 처절한 피보라가 하늘을 수놓았다. 

 터지는 비명 속에서 다섯 명의 흑포인들이 가슴을 움켜잡고 피분수를 끌며 날아올랐다.

 그리고 천천히 걷히는 검광 속에서 드러나는 독고해의 신형. 그의 안색은 창백했고, 입가에서는 선혈이 선연히 피어나고 있었다.

 그의 앞 일 장 거리에는 흑포냉면인이 거대한 빙산(氷山)처럼 서 있었다. 

 전신이 희뿌연 빙기로 뒤덮인 그의 눈에는 경악이 뚜렷했다.

 "아직도 어검비행(御劒飛行)을 할 수 있다니…… 고려검왕(高麗劒王) 못지 않군!"

 순간 미미한 파동이 독고해의 가슴에서 일어났다.

 "고려…… 검왕도 여기에 참가했나?"

 "알 수 없지, 본좌가 아는 것은 본좌가 제십관을 맡았다는 것이고 건곤무적이 오늘 이곳에서 죽는다는 것뿐이다."

 독고해의 물음에 흑포냉면인에게서 흘러나온 것은 차가운 선고(宣告).

 그리고 그의 손에서는 무서운 한음기력(寒陰氣力)이 폭풍과 같이 쏟아져 나가 독고해를 휘감았다.

 십여 장 주위가 단숨에 얼음으로 뒤덮였다.

 찰나.

 "남의 손에 죽는다면 건곤무적이 아니다."

 한소리와 함께 독고해의 손에서 비룡음이 기이한 원호(圓弧)를 그리며 흑포냉면인을 향해 찔러가기 시작했다.

 "……!"

 일순, 흑포냉면인의 눈에 긴장이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천만의 수영(手影)이 일어나며 막강한 강기를 일으켰다.

 꽝!

 벼락이 치는 듯한 굉음 일성(一聲)!

 흙먼지가 천지를 가리고 십수 장 주위가 초토가 되며 얼음으로 뒤덮이는 순간,

 "흐……윽!"

 들릴 듯 말 듯한 신음 소리가 일어났다.

 천지를 가릴 듯 일어났던 흙먼지가 천천히 가라앉으며 주위의 상황이 드러났다.

 "과연 대단하군!"

 신음 같은 탄성을 토하며 서 있는 흑포냉면인.

 가슴을 움켜쥔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는 선혈이 서서히 흘러내린다. 

 그의 눈에는 저 멀리 사라지고 있는 독고해의 모습이 투영되고 있었다.

 비틀거리고 있는 신형…….

 그러나 아직도 그의 모습은 태산이었다.

 "중원무왕이 천하십왕 중 으뜸이라는 소리를 믿지 않았더니……."

 흑포냉면인이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궁주님!"

 그의 곁에서 선 흑포인들이 살기에 찬 눈으로 멀어져 가는 독고해를 노려보았다.

 "그냥 두어라. 호랑이는 호랑이답게 죽어야 하는 법이다. 내 비록 전력을 다하지 않았으나……."

 그의 눈에 기이한 빛이 흘러갔다.

 "그는 이미 전신 기혈이 진동되고 심맥이 뒤틀린 엄중한 내상을 입었다. 그 몸으로는 절대로 그가 있는 제십이관까지 가지 못한다."

 그의 눈에 괴이한 격동의 빛이 흘렀다.

 "이로써 약속은 지켜진 셈이니, 본왕이 그에게 빚진 것은 없는 것이다! 이제는…… 지난날의 약속으로 그가 우리를 구속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흐흐흐……."

 그는 독고해가 간 곳을 보고 냉소를 터뜨리더니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지난 날의 약속으로 우리를 구속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는 실로 거대한 의미가 숨 쉬고 있었다.

*   *   *

 "으아악!"

 번쩍이는 칼날.

 뿌려지는 핏방울.

 죽음을 가르며 건곤무적 독고해는 질풍처럼 전진하고 있었다.

 누가 그를 보고 상처 입었다 하랴.

 하나 그의 안색은 이미 감출 수 없도록 창백했다.

 '괴이하군…… 열한 번째의 관문이 겨우 이 정도란 말인가?'

 상처 입은 사자와 같은 신위를 보이고 있는 독고해의 눈에는 의혹이 드러났다.

 그때 돌연, 그의 주위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의 주변 일대에는 사람의 키를 덮을 듯한 갈대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휘이잉- 스사사사사-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귀신의 호곡성(號哭聲)인 양 갈대를 휩쓸며 독고해의 전신으로 사정없이 부딪혀 왔다.

 하지만 그뿐, 어디에서도 사람의 흔적은 느낄 수 없었다.

 생명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독고해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이제부터 닥쳐올 가공할 태풍전야(颱風前夜)의 고요임을…….

 그것이 발동하면 가히 개천벽지(開天闢地)의 위력이 있을 것임을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눈앞에 있는 갈대들이 폭풍에 휘말린 것처럼 산산이 부서지면서 흩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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