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26 章 女心
여인.
호숫가를 돌아 혁리혼의 가까이로 다가오고 있는 여인은 아주 추괴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추괴한 정도가 아니었다.
월광 아래 비치는 여인의 모습은 나찰의 모습일지라도 그녀의 얼굴보다는 아름답다고 느낄 만치 여인은 추악했다.
그녀의 양손에는 하나의 차 쟁반이 들려 있는데, 그 위에는 다가서기도 전에 코를 찌르는 향긋한 다향이 피어오르는 차가 올려져 있었다.
그녀는 소리 없이 혁리혼의 앞까지 이르고 있었다.
혁리혼의 입꼬리에 잔경련이 일었다.
“......!”
할아범의 죽음과 함께 나에게 온 여자.......
그리고 외할아버지의 저주를 나에게 가져온 여자.......
저 여인을 보면 그들의 죽음과 모든 것이 눈에 보이고 만다.......
나는 너를 보고 있노라면 늘 한 가지 생각을 절실하게 한다.......
내 앞에 절대 나타나지 말 것을 비는.......
너는 아느냐, 추명?
추명은 조심스럽게 혁리혼의 앞으로 찻잔을 내밀었다.
고개를 돌린 채.......
“왕야, 차를 드실 시간입니다.”
추악한 얼굴과는 달리 두 가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여인.
차 쟁반을 들고 있는 시리도록 아름다운 옥수가 그것이고, 돌려진 추악한 얼굴에 자리하고 있는 한 쌍의 눈이 그것이다.
“.......”
혁리혼의 추명의 손을 바라보는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는 찻잔을 받으며 문득 입을 열었다.
“추명, 나는 될 수만 있다면 너에게 한 가지 청을 하고 싶다.”
“......?”
추명은 혁리혼의 청이라는 말에 어리둥절 혁리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추악하나...... 혁리혼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눈.
자신하건대, 하늘 아래 그와 같은 아름다운 눈빛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추명은 입가에 추악하나 조금은 슬퍼 보이는 미소를 떠올렸다.
“왕야께서 바라시는 것이라면...... 천녀는 목숨이라도 내어놓을 것입니다.”
빙글.......
혁리혼은 그녀에게로 등을 돌리며 무감동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그렇게 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없다.”
“......!”
파르르......!
추명은 조그만 어깨를 잘게 떨었다.
그 말은...... 듣는 사람에 따라서 평범하게 들릴지는 모르나 추명에게는 무서운 말과도 같은 것이다.
그녀는 잘강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아...... 아니에요...... 저는 분명히 그렇게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이 추명이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밤하늘에는 아름다운 십오야.
혁리혼의 두 눈에는 시리도록 차가운 월광.......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나는 그 모든 것을 네게 해주리라. 허나.......”
추명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혁리혼의 말이 꽤나 미묘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불안이 그 속에는 담겨 있었다.
“그 대가로 너는 이제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
파르르......!
추명의 몸이 아주 가는 경련을 일으켰다.
혁리혼의 음성이 잔인하게 그녀의 그런 몸을 또다시 후려쳤다.
“너를 마주하게 되면 죽은 두 사람의 처참함이 저주처럼 내 뇌리 속을 비집고 들기 때문이다.”
“......!”
“이것이 나의 부탁이다, 추명.”
말과 함께 혁리혼은 찻잔을 추명에게 되돌려주었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차는 아주 차게 식어 있었다.
혁리혼의 마음처럼.......
추명은 고개를 숙인 채 찻잔을 받아든다.
추스를 수 없이 가늘게 떨리는 손.......
‘아아...... 당신은 잔인하십니다, 왕야......! 당신은 가혹하신 분이십니다.......’
돌아서는 그녀의 어깨는 어느 때보다도 꽤나 작아 보였고, 돌려진 얼굴 위로 점점이 흘러내리는 촉촉한 물기를 혁리혼은 보지 못하리라.
혁리혼은 무정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너는 나에게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추명.......”
“.......”
추명은 돌아선 채 어둠 속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어둠에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허무와 고독과 가슴을 찢는 아픔.......
‘당신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천녀(賤女)는 무엇이든지 할 것입니다...... 당신은 잔혹하나...... 원망하지는 않으렵니다.......’
사박.......
‘천녀가 타고난 운명이니까요...... 허나...... 당신을 사랑했고, 영원히 사랑할 것입니다. 그 마음만은 막지 말아...... 주세요...... 진심입니다...... 추명은.......’
그녀는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루룩!
그에 따라 그녀의 뺨에 어리던 물기는 어둠을 타고 발등에 부어졌다.
“나타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는.......”
그녀의 음성은 가슴을 파고드는 아픔과 같았고, 애조를 담고 있으나 혁리혼의 꽤나 무정한 시선은 어둠을 향하고 있을 뿐이다.
암천에 기우는 달에.......
“하지만 원하는 것도...... 없습니다. 있다고 하여도 왕야께서는...... 영원히 모르시고...... 말 것입니다.......”
“......?”
혁리혼의 눈길이 그제서야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그녀의 어스름한 등에로 돌려졌다.
차가운 달빛과도 같은 시선.
어둠 속에는 두 가지 흔적이 새겨지는 것을 혁리혼은 모른다.
하나는 여인의 눈물이고, 또 하나는 아주 아픈 고통이 담긴 허무가 새겨지고 있는 것을.......
추명은 자꾸만 어둠 속으로 간다.
하늘엔 별 총총.......
가슴엔 임 총총.......
먼발치 삼년여.......
눈물주[淚酒] 석 동이네.......
차마 연비(聯臂)를 못 그려.......
임 그리울 땐 바늘을.......
난 오늘밤 석 동이의.......
눈물주를 마실래요.......
임께 말하여서 들꽃연비.......
그려 달라 할래요.......
소리 없이 가실 임이여.......
임은 가시나 이 몸의 가슴에 남아 계십니다.......
* * *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
하남성에는 여름이 꽤나 일찍 온다.
지하에 화맥이 있다고 해서 그런다던가?
흐드러지게 물먹어 피어오르는 산록.......
특히 낙양성은 더욱 그러하다.
그곳은 지하에 화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화맥이 있기 때문이다.
사내들의 철심(鐵心)에 불을 담아 주는 여인들.......
여름이 되면 낙양을 가득 메우고 있는 수많은 기루에서는 계집들의 방향이 더욱 물씬 풍겨 나온다.
물오른 꽃잎의 내음새처럼.......
허나 하남성의 단 한곳.
그곳은 낙양성과 좁은 발치에 떨어져 있으면서도 늘 섬칫한 기운을 뿌려낸다.
계집의 사타구니에서 풍기는 방향도 아니고, 소름이 돋아나는 듯한 죽음의 냄새가.......
― 북망산(北邙山).
인간의 허무한 생의 종착지를 보여 주는 곳.
끝없이 펼쳐진 공동묘지에는 키를 넘는 갈대와 음산한 귀무(鬼霧)만이 바람에 흐늘거리는 유령처럼 흔들거리고 있었다.
휘이이잉...... 휘리리링.......
으으...... 으.......
당장이라도 머리를 풀어헤친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을씨년스러운 곳.
북망산의 아래.
언제부터인가 그곳에는 하나의 거대한 장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벽천마장(闢天魔莊)>
호화롭기 그지없는 장원임에도 늘 괴괴로운 기운이 맴돌고 있는 곳.
사람들은 그곳을 지나노라면 북망산의 으스스함보다도 더 오싹한 한기를 느낀다.
마치 장원을 맴도는 기운이 주인을 닮았기 때문이다.
장주의 이름이 자도천(紫刀天)이라고 하던가?
허나 벽천마도군(闢天魔刀君)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사람들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위인.
아는가?
이 벽천마장이야말로 과거 십대천세 중 여덟 번째 위치를 점하고 있던 도(刀)의 하늘이 웅크리고 있는 곳임을!
― 벽천마도군 자도천!
가공할 이름이여.......
그 이름이 바로 벽천마장의 권위를 중원의 아홉 개 하늘에 올려놓은 도의 하늘이다.
번― 쩍!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도광이 도신에서 뿜어져 나온다.
차가운 월광을 받으면서.......
“나...... 나는 믿을 수가...... 없다......!”
노인.
차디찬 서리를 맞은 듯 하얀 백발은 앉아 있는 그의 등뒤로 넘겨져 바닥에 끌려 있고, 얼굴에는 인간의 감정 따위나 온기조차 묻어 있지 않은 노인.......
노인의 얼굴은 아주 차가웠고 흡사 시체의 그것과 같았다.
“모조리 죽었다니...... 어찌 그럴 수가...... 그것도 죽인 자가 누구인 것도 밝혀지지 않은 채...... 구천세군(九天勢君) 중 칠형(七兄)까지 일곱 명이...... 으으.......”
노인의 얼굴은 푸들푸들 잔경련을 일으켰고, 그의 손에 들린 헝겊은 자꾸만 시퍼렇게 날이 선 도신을 닦아 내리고 있었다.
스...... 윽......!
헌데 도대체 무슨 말인가?
구천세군 중 일곱 명이 죽다니......?
그것도 죽인 자가 누구인지도 모른다니......!
차디찬 칼날 위로 노인의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이 비추어졌다.
심장 짓떨리게 할 만치 음사한 얼굴.......
그 얼굴은 이 순간 끊임없이 경련을 전율처럼 흘리고 있었다.
“으...... 무엇 때문에? 누가? 왜? 그들을 죽였단 말인가?”
그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 순찰을 맡았던 수하가 가져온 서찰을 떠올리고 있었다.
금방 뚝뚝 흐르는 핏물을 찍어 휘갈겨 쓴 서찰 하나.
<네 목을 가지러 간다. 이 서찰에 사용된 핏물의 주인처럼...... 네 목은 오늘 달이 뜨는 순간 북망산 위에 잘려 버려질 것이다.......>
서찰의 내용이나 그 밑에 의당 있어야 할 서명은 없었다.
“그...... 피는 분명 구천세군 중 칠형인 십왕마존의 것이...... 다......!”
어둠.
아주 짙은 어둠이 서서히 대지를 장막처럼 내리덮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인의 얼굴에도.......
“크크크...... 허나 노부의 도는 허깨비가 아니다. 누구인지...... 반드시 목을 잘라...... 보여 주리라, 나의 위력을!”
날이 섰다.
아주 새파란 칼날이.......
“이곳 벽천마장을 주위로 세 겹의 천라지망이 펼쳐져 있다. 그것도 가장 극강의 고수만으로 엄선된 오만(五萬)의 힘으로!”
그는 칼날을 섬칫한 눈으로 바라보며 악마처럼 웃었다.
“크크크...... 아주 맑다. 저 월광처럼.......”
그는 힐끔 북망산의 능선으로 으스스하게 솟아오르는 십오야를 바라보며 면도날처럼 얄팍한 입술을 열었다.
“꽤나 오랫동안...... 이곳에 피를 묻히지 않았는데...... 크크...... 오늘 묻히게 된다.”
“아니야, 그 칼에는 이제 영원히 피가 묻지 않을 것이다. 주인을 잃게 될 테니까.”
느닷없이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음성.
그 음성은 서리가 묻은 듯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고 오싹한 공포까지 담겨 있었다.
“헉―! 누...... 누구?”
노인은 홱 고개를 돌리며 자지러질 듯한 비명성을 터뜨렸다.
허나.......
텅......!
아무도 없었다.
오직 있다면 악마의 숨결처럼 넘실거리는 어둠의 앙금만이 있었다.
그러나 노인의 얼굴은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느...... 느낄 수 있다......!’
버― 언― 쩍!
두 눈에서는 무시무시한 사광이 쏟아져 나온다.
‘분명 누군가가 내 옆에 이르러 있는데...... 나는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이자의 모습을...... 대체......!’
주루룩......!
식은땀이 가슴을 타고 사타구니까지 흘러내렸다.
그는 백오십 평생을 살아오며 최소한 수만 명의 목을 잘랐고, 공포라고는 느껴보지도 못한 인물이다.
허나 그런 그가 지금 무한한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으...... 으...... 나는 안다. 지금 누군가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을...... 누...... 누구냐?”
이처럼 허무하고 공포스러운 일도 있을까?
자신의 숨통을 노려보는 죽음의 그림자가 바로 옆에 와 있음을 느끼는데도 그 죽음을 가진 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공포다.
뼈를 바수고 심장을 가르는.......
“누...... 누구냐? 네놈은...... 누구냔 말이다!”
“.......”
“어떻게 세 겹의 천라지망이 깔려 있는...... 본 장원에.......”
“그들은 모조리 죽었다. 정확히 오만 명이더군. 너를 더하면...... 꼭 오만 일 명이 북망산에 사적(死籍)을 더하는 거지.”
음성.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나 인간의 음성이라 할 수 없는 소름 끼치도록 무감동한 음성이 어둠에 밀려들 듯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오...... 오만 명이 모조리......? 헌데 비명은 없었는데......?”
꽤나 공포스러운 음성이 노인의 얄팍한 입술을 비집고 흘러 나왔다.
어둠 속에서 아주 차갑고 희디흰 웃음이 얼핏 노인의 동공 속으로 파고들었다.
“후훗...... 그들이 왜 죽었는지는 네가 죽어 보면 알겠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내비치는 새하얗고 사악한 웃음이여......!
‘저...... 저기다!’
순간 노인의 신형이 날았다.
팟......!
그리고 그의 수중에 들려 있는 한 자루 시퍼런 도가 무시무시한 기세와 빠름으로 한곳을 향해 쏘아져 갔다.
찰나!
찌― 어어― 억―!
꽈르르르― 릉!
가공할 도세!
방안의 한쪽 벽은 모조리 도풍에 휘말려 올라 가루로 변했고.......
우르르릉...... 꽝! 꽝!
지반은 모조리 폭죽 튀듯 솟구쳐 올라 장원은 모조리 폐허 속에 먼지를 뿌렸다.
“후훗.......”
허나 아주 새하얀 웃음은 이미 그의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노인은 또다시 발작적으로 신형을 날려 웃음을 덮쳐 갔다.
“죽― 엇―!”
카아...... 카아...... 카아.......
버― 언― 쩍!
“벽천마도군, 조금 후 나는 네 심장의 고동이 멈추어진 뒤...... 배반자의 핏물은 어떤 색깔을 하고 있는가 보겠다. 우후후...... 구천세군 중 일곱 명이 나에게 심장의 피를 보여 주었던 것처럼...... 우후후.......”
벽천마도군!
그랬다.
노인.
그야말로 당금 무림의 거부할 수 없는 존재로서 도의 하늘이 바로 그이다.
벽천마도군의 무표정하던 얼굴이 시꺼멓게 변하고 말았다.
“으...... 으...... 네놈은 서찰의 주인......?”
“우후훗훗.......”
“헌데 배반자라니......? 내가......? 미...... 미친놈! 네놈은...... 누구냐?”
부르르......!
칼을 잡은 벽천마도군의 두 손이 격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위이이이이― 잉!
콰아...... 콰아...... 콰아.......
무시무시한 빠름과 강함으로 허공을 쪼개고 있으나 그의 칼은 아무 것도 쪼개고 있지 않는, 진짜 어둠만을 쪼개고 있는 것이다.
웃음의 주인은 불가사의한 빠름으로 그의 칼끝에서 순간순간 사라져 버리고 있었다.
순간 그의 뒤쪽에서 다시 악마의 웃음과도 같은 미소가 스산하게 피어올랐다.
“후후훗...... 벌써 잊었구나, 너는! 십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뭐...... 뭣이......?”
홱!
벽천마도군은 극도의 경악성을 터뜨리며 몸을 돌렸다.
“그...... 그럼 네놈은 대군(大君)과 어떻게 되는......!”
허나 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화끈.......
무언가 불에 데인 듯한 불기운을 목젖에서 느끼며 그는 두 눈을 부릅떴다.
빠르다!
그는 태어나 최초의 빠름으로 몸을 돌렸는데도 한 자루 칼끝은 소리 없이 자신의 목을 꿰뚫고 있는 것이다.
“끄으...... 끄으.......”
벽천마도군은 경악과 공포로 이지러진 얼굴을 칼의 주인에게 돌리며 가래 끓는 소리를 터뜨렸다.
“네...... 네...... 놈...... 은......!”
어둠 속에 한 인물이 서 있었다.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는 칼의 주인.
아주 짙은 야수의 눈빛을 가진.......
그는 냉혹하게 웃고 서 있었고, 소름 끼치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너의 심장을 가지러 온 사람!”
허나 벽천마도군은 이미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퍼― 억!
하나의 가공할 죽음의 그림자......!
사월영(死月影).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고, 대지 위에 달이 떠오르는 순간 그의 죽음은 반드시 만들어졌다.
아무도 모른다.
그가 누구인지.......
그가 왜 사람을 죽이는지.......
그는 그림자만을 남긴 채 벌써 여덟 명을 죽이고 있었다.
여덟 명.
바로.......
― 구천세군 중 팔 인!
그들이 죽어갔다.
너무도 가공한 일이 아닌가?
한 시대를 집권했던 그들이.......
너무도 간단하게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왜?
어떻게......?
도대체 죽이는 자의 무공은 어떤 경지이기에......?
구천세군 중 팔 인과 관계되는 자들은 모조리 죽었다.
대륙천자가 중원무림을 집권하고 나선 이래 그것은 또 하나의 엄청난 전율을 무림에 던져 주고 있었다.
사월영(死月影)―!
* * *
“대형, 지금이 시작을 할 때입니다.”
그는 어두운 하늘을 향해 아주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문약한 유생의 모습에 계집처럼 섬세한 면이 있는 사내.
그의 시선은 한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림[畵].
그의 일 장 앞에 조용히 앉아 월하(月下) 아래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년인.
그의 손에 들린 한 자루의 붓은 먹물을 듬뿍 묻힌 채 화폭 위로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움직이고 있었다.
스으으...... 스으.......
화폭에 한 번의 붓이 스칠 때마다 한 마리 금린이 생동감 있게 새겨지듯 그려진다.
월하 속에서.......
그것은 기가 막히도록 놀라운 신기였다.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 예강?”
예강―!
그렇다.
이곳은 바로 송(宋)의 마지막 몰락 황가― 태부원이고, 문약해 보이는 유생은 바로 금황예강이라는 인물이다.
그리고 제왕의 기도를 지니고 있는 자.
화폭에 묵화를 그리고 있는 중년인은 바로 금황제운이다.
“.......”
아주 무심한 시선을 화폭에 던지던 금황예강은 문득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는 중원을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이제 마교를 완전히 없애려 하고 있지요. 그 첫번째로.......”
“.......”
“그는 구천세군 중 여덟 명...... 팔천세군을 죽였습니다. 천하를 속인다 할지라도...... 그는 나 금황예강의 눈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허나 그는 역시 강하다......!”
문득 금황예강의 암천을 향하고 있는 눈빛이 꽤나 미묘한 빛을 발했다.
‘아주 강한 자......! 그리고 나의 마음속에 영원히 아로새겨지고 만 자...... 허나 운명이다. 나와 그가 적이 되어 버린 것은......!’
잘강.......
그는 붉은 입술을 어둠 속에서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허나 그는 한 가지 커다란 실수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닥쳐온 기회입니다......!”
기회―!
그는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말하라, 예강......!”
금황제운은 여전히 붓을 든 채 화폭에 금린 한 마리를 그려 넣고 있었고 그의 붓끝에서 그려지는 금린은 점차 무섭도록 강렬한 빛을 띠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튀어오르는 금린의 기세는.......
“이형(二兄)은 마교를 파괴한다는 야망 때문에 천왕제군대척을 등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실수입니다!”
이형!
그들은 지금 혁리혼을 향해 말하는 것인가?
혁리혼과 그들은 과거 의형지간(義兄之間)을 맺은 적이 있었다.
“.......”
“이형은 지금 마교의 전역에 천왕제군대척의 절반이랄 수 있는 힘을 집군하고 있습니다. 허나 그는 모르고 있습니다.”
“......?”
“마황제일존 갈무좌는 얼마 전 하나의 엄청난 세력을 자신의 밑으로 들였습니다.”
“세력.......?”
금황제운의 손끝이 문득 동작을 멈추었고, 금황예강은 입가에 꽤나 의미 있는 미소를 떠올렸다.
“그는 천마대밀주 마랍격이라는 자로 출처가 지극히 신비로운 자입니다. 허나 그 누가 마교와 손을 잡았든 그것은 상관이 없는 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