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22 章 노을이라는 悲歌
얻는 것은 꽤나 많은 것 같은데.......
나의 마음은 왜 이리도 텅 비어만 가는가!
나의 투혼은 저 노을을 보고 있노라면 살아 꿈틀거리나.......
심연(深淵)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나의 진실은 차디찬 얼음 조각과도 같다.......
허공 속의 잔상(殘像)처럼 스러져 버리는 나의 심혼이여.......
나는 빈 껍질의 조가비가 되어 포말 속에 스러져 버리누나.......
언제나 야수를 닮아 있는 사내.
그는 타오르는 노을 속에 서 있었다.
마치 노을 속에 서 있는 고독한 한 마리 이리처럼.......
“나는 누구이고...... 나는 무엇인가......?”
공허와 허무의 잔상이 드리워진 뇌까림.......
그는 아주 고독한 사람이다.
타인은 모를 아픈 고독을 늘 심중의 한 귀퉁이에 갖고 있는 자.
그것은 강해지려는 자에게 반드시 존재하는 하나의 속성이고, 혁리혼은 그 속성을 삶의 한 찌꺼기처럼 갖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난 뒤 나는 그 무엇을 위해 존재하려는지.......”
그는 점차 존재의 가치에 회의 같은 것을 느끼며 그 속에 함몰되어지고 있었다.
허나 그는 이내 세차게 머리를 내저었다.
무너져 내리는 자신을 지키려는 아집과 같은 표정이 되어.......
‘천극마분도는 이제 나의 손에 들어왔다. 그리고 팔황대마성좌 중 이곳에 온...... 나와 빙여설을 제외한 사황대마성좌까지.......’
사황대마성좌!
‘그들은 얼마지 않아 나의 힘에 더해질 것이다......!’
문득 그는 바다 건너 보이지 않는 중원의 대륙을 건너보았다.
언제나 자신의 야망이 타오르는 그곳.
그곳을 향한 야망의 칼은 아주 차디차게 빛을 뿌린다.
“후훗...... 갈무좌, 너는 지금 네가 펼쳐 놓은 죽음의 계(計)에 만족하여 축배의 잔을 들고 있으리라!”
갈무좌!
대륙의 집권자이며 마의 주인인 그.
그의 죽음의 계라니.......
“너는 천극마분도의 소문...... 팔황대마성좌의 죽음을 부르는 소리를 만들어 놓고...... 꽤나 득의만면해 있을 것이다. 이곳에 있는 육황대마성좌가 피 튀기는 삼마겁의 전설을 향한 쟁탈전으로 하여 모조리 양패구상(兩敗俱傷)을 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리고 너는 축배의 잔을 들며 팔황대마성좌 중 육황대마성좌가 존재하지 않는 텅 빈 중원대륙을 손쉽게 손안에 넣을 것이다. 허나...... 후후훗훗.......”
천극마분도의 가공할 계!
그것이 바로 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던가?
혁리혼은 아주 차게 웃었고, 그의 이빨 새로 또 다른 숨막히는 살음(殺音)이 흘러 나왔다.
“너는 곧 그 축배의 잔에 네 피를 담게 될 것이다. 꽤나 뜨거운 네 피를!”
물씬.......
죽음의 기운이 숨막히게 그의 뇌까림 속에서 피어올랐다.
“너는 상대를 잘못 보았어.......”
혁리혼은 불붙어 타오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갈무좌, 후후후...... 너는 하늘을 닮으려 하고 있느냐......?”
누가 하늘인가?
화르르르!
하늘도 불붙어 타오르고, 바다도 탄다.
그리고 혁리혼은 그보다 더 무섭게 노을 속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
하늘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던 혁리혼의 눈빛이 기이하게 바뀌었다.
저만치 백사장 위로 한 인물이 느릿하게 걸어오는 것이 그의 눈에 띄었다.
일신에는 동영 인자 특유의 복장을 걸쳤고, 허리춤에는 긴 죽검을 찔러 꿰차고 있는 자.
그의 등에는 백의를 입고 있는 여인이 업혀 있었다.
‘저자는...... 죽마인예 영목태랑!’
죽마인예 영목태랑!
동영으로부터 중원으로 들어온 팔황대마성좌의 인물 중 한사람, 바로 그였다.
스― 슷!
죽마인예는 아주 천천히 해변가에 다가섰고, 그는 이내 바닥에 눈보다 흰 포단을 깔고 앉았다.
그리고 하나의 판자 위에 소녀를 눕혀 놓는가 싶자.......
스르르르...... 륵.......
그는 판자를 바닷속으로 밀어넣었다.
소녀와 함께.......
소녀는 죽은 것일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하여 서서히 죽어가던 소녀 미랑이다.
그녀는.......
쏴아아아― 쏴아―!
처...... 얼...... 썩.......
미친 듯이 몰아치는 바다의 파도는 소녀를 싣고 자꾸만 대해로 밀려들어간다.
서서히 죽마인예는 무릎을 꺾으며 죽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르릉― 스릉―!
쉬이이이.......
노을 속으로 무섭게 뻗치는 장검의 예(銳)!
“......!”
혁리혼은 그를 바라보다가 순간 놀람의 빛을 얼굴에 담았다.
‘할복(割腹)을......?’
할복!
그렇다.
죽마인예는 지금 할복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을.......
죽마인예는 파도에 밀려가는 여인 미랑을 바라보며 눈빛을 잘게 떨었다.
“미랑......! 나에겐 너를 살릴 힘이 없다. 나를...... 용서하라......!”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이 절절히 담겨 있는 뇌까림.
그렇다면?
‘그러면...... 그녀는 죽어서 바다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혁리혼은 무심결에 죽마인예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아주 차게 입을 열었다.
“잔인하군.”
“잔인한 것이 아니다.”
일말의 감정조차 담기지 않은 채 죽마인예의 음성이 허무의 잔상처럼 공간에 피어올랐다.
“......!”
“그녀는 노을을 사랑했다. 아주.......”
“......?”
“그래서 그 노을 속으로 가는 것뿐이다.”
죽마인예의 시선은 무심한 빛을 띠며 노을이 타고 있는 허공에 매달렸고, 그 시선은 노을처럼 붉디붉은 피를 머금고 있었다.
가슴을 쪼개는 고통과 아픔의 핏물을.......
그리고 그는 허망한 음성으로 조그맣게 뇌까렸다.
“한 여인이 노을을 사랑하여...... 그렇게 죽어간 것처럼...... 후후후...... 후.......”
웃음.
그것은 웃음이 아니었다.
인간이 지닐 수 없는 고통까지 모조리 담아 붓는 울음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웃고 있는 자.......
그는 태어난 이래 감정이라는 것은 모조리 거세해 버렸던 동영 최고 인자의 대부(大父)로 불려진 인물이다.
“여인......?”
혁리혼은 미묘한 표정이 되어 뇌까렸다.
“바로 저 소녀의 어머니지.”
“......!”
“후후...... 그대는 묻고 싶지 않은가? 저 소녀의 어머니가 누구인가를......?”
혁리혼은 기실 그 말을 묻고 싶었다.
노을을 사랑하여 죽어가 버린 그 여인을.......
그 속에는 분명 어떤 아픔이 숨어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녀는 동영 최고의 화녀(花女)였다. 아주 아름다우면서도 더러운 음녀(淫女)의 찌꺼기를 갖고 있었던 여인...... 그리고 노을을 누구보다도 사랑한 여인.......”
‘기녀......?’
죽마인예의 바다를 응시하는 눈 속에는 고통과 함께 환상을 쫓는 빛이 담겨 있었다.
혁리혼은 물었다.
“그럼 그대와...... 저 소녀의 어머니라는 여인...... 과는?”
문득 죽마인예의 무심한 눈빛이 고통 속으로 침잠해 들었다.
“나는 과거 그녀의 시량(侍良: 기루에서 기녀들의 잔심부름을 하는 노비)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뜻밖의 놀라운 사실이 아닌가?
동영의 인자 가문의 자부(刺父)로 군림하고 있는 그가 과거 한낱 시량이었다니?
“그리고 나는 미랑의 어머니인 그녀를 사랑했던 사람이다. 아주.......”
그랬던가?
노을을 담고 있는 눈.
죽마인예는 과거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이 그랬듯이 두 눈 가득 노을을 담고 있었다.
그는 지금 노을을 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의 영상을 보고 있는 걸까......?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바쳐 그녀를 사랑했었다...... 허나...... 후후후...... 후.......”
그의 마지막 말은 허무의 웃음이 되어 노을 속으로 피어올랐다.
이미 오래 전에 감정을 거세해 버린 사내.
그래서 그런지 그의 웃음은 허무의 빛이나 오히려 듣는 사람의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
슬픔의 빛이 되어.......
“그녀는 고관대작이나...... 강한 무장(武將)과 번공(飜公)만을 상대로 몸을 파는 일류화녀였기에.......”
파르르르르.......
그의 무감동한 입꼬리에 일순 추스를 수 없는 감정의 파문이 일었다.
그의 입술 끝은 잘게 부서지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사랑이 닿을 수 없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아주 처참하게 나의 사랑을 밟아 버렸었다...... 나의 보잘것없는 시량으로서의 사랑을...... 그 덕분에...... 후후...... 나는 그녀를 사랑했던 사내에게 눈을 뽑히는 화를 받았었지...... 큿큿.......”
그의 웃음은 울음인가, 자신에 대한 저주인가......?
눈!
그의 오른쪽 눈은 바로 의안(義眼)이었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한 사내의 품에 안겨 더러운 신음을 흘리며 조롱의 시선을 주었다...... 후후...... 우후후...... 비천한 시량놈이라고...... 큿큿.......”
그는 자꾸만 웃는다.
그 웃음에는 피가 묻어 나오고 있었다.
아주 처절한.......
“허나...... 그녀 역시 죽어갔다. 한 번공(飜公: 한 성의 영주)에 의해서...... 자신 외에 다른 사내에게 몸을 주었다는 명목으로......!”
죽마인예의 몸은 아주 잔진동을 일으켰다.
부르르.......
“그 순간 나는 나를 저주하고 말았다.”
“......!”
“먼저 나의 가슴속에 그 더러운 피의 찌꺼기를 지닌 여인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를 증오했고, 그녀가 타인의 손에 의해서 죽어가는 순간 그것을 막을 수 없었던 나의 약함을 증오했다...... 그리고 그녀의 주검을 싸고도는...... 그녀가 사랑했던 저 노을을 증오했다......!”
동영 최고의 인자.
그에게도 그런 뜨거운 면이 있었던가?
수천 명의 인자의 목을 무 끊어 버리듯 잔혹하게 제거하며 절대보좌에 오른 그에게......!
번― 쩍!
문득 시퍼렇게 날이 선 죽검을 바라보는 죽마인예의 눈이 차디찬 검신에 소름 끼치도록 시퍼렇게 비추어졌다.
“그녀가 남긴 핏덩이......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미랑을 안고 나는 맹세했었다.”
“......!”
“이 아이를 가장 깨끗하고 곱게 키우리라...... 그리고 가장 강한 인자가 나는 되리라고...... 크크큿.......”
혁리혼의 시선이 아프게 한곳으로 돌려졌다.
쏴아아아― 아아―!
처― 얼― 썩!
거대한 파도 위에 낙엽처럼 흔들리고 있는 하나의 판자.......
그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소녀...... 미랑.......
혁리혼의 입술이 미묘한 여운을 남긴 채 잘게 부서졌다.
“그럼...... 저 소녀가 바로 미랑......?”
“자신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도......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란 소녀다...... 그리고 자신이 더러운 화녀의 피를 안고 태어났음을 고통스럽게 느끼며 살아온...... 소녀다.......”
죽마인예는 처절한 시선으로 바닷속에 밀려가는 소녀를 바라보았고, 혁리혼은 문득 아픔의 시선으로 노을을 바라보았다.
‘부모의 얼굴을 모르며 자란...... 소녀라고......?’
혁리혼.
그 역시 부모를 모르고 늘 조그만 가슴에 아픔을 담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얼마나 긴긴 세월을 아픔과 눈물로 지새웠던가?
철없이 자라던 그 순간을.......
혁리혼은 잘게 부서지는 고통의 시선으로 바닷속에 밀려가는 소녀를 본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아픔인가?
지금 그의 가슴을 저미고 드는 것은.......
“더러운 피를 지닌 여인에게서 태어났으나 그녀는 너무도 깨끗한 영혼을 지니고 태어난 소녀였다. 우후후...... 후...... 허나 그것이 지금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노을을 이내 검은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어둠이 삼켜 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 으스름한 어둠 속으로 죽마인예의 허망과 고통이 어우러진 음성이 흩어졌다.
“나는 이제 그 누구보다도 강한 인자...... 자부의 번공이 되었다. 크크...... 그러나 그것 역시 무슨 의미가...... 있는가.......”
“......!”
“그리고 그녀가 더럽게 죽어간...... 그 슬픈 땅덩어리 동영을...... 잊고자 미랑을 데리고 중원으로 왔다...... 허나 미랑 역시 죽어가지 않는가......?”
“......!”
“크크...... 크...... 이 모두가 노을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노을을!”
“노을을......?”
혁리혼은 눈가에 의혹의 빛을 떠올렸다.
노을을 사랑하다니......?
사람도 아닌 노을을 말인가?
죽마인예의 음성은 점차 이상하리만치 차갑게 변해 가고 있었다.
마치 서리 묻은 칼끝처럼.......
“그녀는 자신의 가슴속에 죽음을 심어 주도록 사랑한 사내를 그렇게 불렀다.”
노을...... 이라 불린 사내?
“우후후...... 훗...... 나는 그 노을이라 불린 그자에게 미랑을 주고자 했다. 허나 그의 너무도 높은 위치는 그녀에게 절망을 주었다. 더러운 기녀의 피를 받고 태어난 그녀에게.......”
그의 웃음은 비참했다.
“나 역시 그녀를 그 사내가 받아주지 않는다면...... 그녀가 기녀의 더러운 피를 지닌 여인이라 하여 받아주지 않는다면...... 이 칼로 그를 죽이고자 했었다......!”
칼!
한 자루의 길디긴 죽검은 서럽디서럽게 어둠 속에서 빛을 뿌리고 있었다.
“허나 그 사내가 일대 영웅인 것을 알기에 한 여인의 사랑으로 하여 그 영웅을 죽이고자 했던 나의 칼은 무디어지고 말았다.”
순간 혁리혼은 어둠 속에서 꽤나 차가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어리석은 사람이군. 만약 그 사내에게 저 여인을 데리고 갔다면.......”
“......!”
“그는 철혈(鐵血)을 지니고 있지 않는 이상 받아주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혁리혼은 질책의 뜻이 담긴 칼끝 같은 시선으로 죽마인예를 돌아보았다.
죽마인예는 순간 어둠 속에서 입꼬리를 일그러뜨렸다.
“그 사내는 바로 자네라네.”
혁리혼은 일순간 바보가 되고 말았다.
결국 여태까지 죽마인예가 말했던 사내는 바로 자신이었던가?
죽마인예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짓씹으며 혁리혼 앞에 머리를 꺾었다.
“동영의 위대한 인자는 그 누구에게도 결코 머리를 꺾지 않는다. 허나...... 나는 그대에게 머리를 꺾겠다. 그녀를 받아주게! 그녀를.......”
그의 음성은 어둠 속에서 아주 비참하게 울렸고, 혁리혼의 얼굴은 점차 무섭도록 차갑게 굳어지고 있었다.
“나를...... 놀렸군, 그대는!”
“그러나 내가 이렇게 머리를 꺾고 비는 것은 결코 놀리고자 함이 아니다.”
“......!”
혁리혼은 몸을 차갑게 돌렸다.
순간 죽마인예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크크크큿...... 큿...... 그대는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철혈인가?”
저벅...... 저벅.......
혁리혼은 어둠 속으로 굳어 버린 채 걸어갔고, 그 뒤로 죽마인예의 처절한 음성이 무심 속에 뒤섞여 공간을 쥐어짰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 그대의 사랑을 얻어주지 못하면 나 역시 죽으리라던 약속을 지킬 수밖에......!”
카아아앗!
동시에 그의 길디긴 죽검은 슬프도록 처절한 빛을 어둠 속에 뿌리며 그의 복부를 쑤시고 들어갔다.
허나 혁리혼은 아주 무정하게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죽마인예는 어둠을 보고 있었다.
주루루룩.......
그는 장부로 태어나 처음 눈물이라는 것을 흘렸고, 어두운 하늘을 원망하고 있었다.
“인자 가문에는 율법이 있다. 세 치 혀끝을 어겼을 때는 할복으로 무장의 영광을 지킨다는.......”
그는 새우처럼 몸을 구부린 채 천천히 바닥에 쓰러졌다.
동시에 어둠 속으로 선연한 핏물이 뿜어져 올랐다.
촤촤촤― 촤촤―!
“무정한 자여.......”
순간 혁리혼은 우뚝 걸음을 멈추어 섰다.
그의 차갑게 식은 시선은 천천히 뒤돌려져 죽마인예의 식어 가는 몸을 바라보았다.
어둠과 할복으로 하여 죽어가는 자.......
허나 지금 혁리혼은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부르르.......
그는 몸을 떨고 있었다.
‘할아범......!’
그는 죽어서라도 잊을 수 없는 과거가 있다.
지금과 같이 한 꼽추노인이 자신의 생명을 위해 할복을 자청하면서까지 죽어가던 그 모습......!
어찌 그 과거를 잊을까?
혁리혼은 바로 그 과거의 저주스러운 광경을 죽마인예에게서 보고 있는 것이다.
외할아버지 앞에서 차디차게 식어 가던...... 꼽추할아범의 모습을.......
부들...... 부들.......
혁리혼은 전신을 격하게 진동시키고 있었다.
그때였다.
“받아주세요, 그녀를......!”
어둠 속에서 감정이라고는 티끌만치도 묻어 있지 않은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은 빙정이 있기 때문에...... 여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녀를 거두어 주십시오. 당신은 결코 차가운 사내는 아닐 것입니다......!”
음성은 잘게 떨림을 일으키며 부서져 내렸고, 그 음성은 어둠 저편에 서 있는 나무 아래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 부탁을 들어준다면 본 도와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당신을 최소한 미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진심입니다...... 정녕......!”
‘빙여설!’
음성의 주인은 빙여설이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왜소한 몸을 돌리고 있었다.
혁리혼은 미묘한 눈빛을 어둠 속으로 주었다.
‘그녀가......!’
짧은 정적이 어둠 속에 앙금처럼 가라앉았다.
문득 혁리혼은 어두운 공간을 올려다보았다.
“우황, 한당!”
“예!”
“왕야......!”
“그를 데려가 치료해 주어라. 그는 저렇게 죽어갈 사람이 아니다. 죽마인예는 팔황대마성좌의 한 인물로서......!”
스르르르...... 르.......
순간 죽마인예의 몸은 빨려들 듯 어둠 속으로 삼켜지고 있었다.
격정!
죽마인예는 인자가 된 이래 처음으로 주체할 수 없는 격정을 느끼고 있었다.
아득한 죽음의 심연 속에서.......
‘후후...... 영웅이라는 이름의...... 사내여...... 고...... 맙...... 다......!’
끝내 그는 차디찬 손길이 자신의 몸을 부여안음을 느끼며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혁리혼은 바다를 본다.
어둠과 차가운 월광이 흡사 비늘처럼 넘실거리는 흑해(黑海)!
어둠, 너무도 칠흑 같은 어둠이지만.......
그는 보고 있었다.
아득히 멀어져 가는...... 사랑의 노예가 되어 버린 미랑을.......
문득 혁리혼은 소녀를 향해 오른손을 쭈욱 뻗었다.
스― 윽―!
대해 속에서 위태롭게 흔들거리던 소녀 미랑은 아주 빠른 속도로 나뭇조각과 함께 혁리혼의 품으로 빨려들었다.
“죽마인예, 결국 그대는 미랑과의 약속을 지킨 셈이군.......”
혁리혼은 해수로 축축이 젖은 채 혼절해 있는 미랑의 몸을 안아든 채 작게 중얼거렸다.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는 범위에서 자신의 목적을 만들어 놓은...... 동영 특유의 교활함이 있으나...... 괜찮은 사내, 죽마인예 영목태랑!”
혁리혼은 천천히 어둠 속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한 조각 잔잔한 음성이 어둠 속에 묻히고 있었다.
“미랑...... 어쩌면 너와 나의 만남은 숙명인지도 모른다...... 과거 할아범이 나를 위해 죽었고...... 그와 똑같이 죽마인예가 할복을 했던 것은.......”
* * *
사르르륵...... 륵.......
어둠을 깨치는 소리.
황촉의 음영을 받아 더욱 하얗게 보이는 여인의 얼굴은 참으로 아름답다.
아주 깨끗한 영혼을 가진 여인.
그녀의 몸을 떨어져 나가는 옷자락은 비명을 지르는 듯 크게 소리치며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오늘 이 한순간을 위하여 이 여인은 이렇듯 꽁꽁 전신을 감추고 있었던 것인가?
혁리혼의 아름다운 옥수는 이내 누르면 터져 버릴 듯한 미랑의 젖가슴을 감싼 헝겊 조각을 떼어내고 있었다.
숙명처럼 자신의 여인이 되기 위해 잠자고 있는 여인.......
얼굴에 어리는 백치의 미가 혁리혼은 참으로 바보같이 느껴졌다.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듯 소중한 것이었던가? 죽음을 부를 만큼......?’
스르르.......
농익어 수줍도록 하얀 젖가슴이 드러날 때 혁리혼은 어둠 속에서 소년처럼 얼굴을 붉혔다.
늘 야수 같은 기질을 갖고 있었으나 기실 그는 그렇지가 못했다.
‘죽음이라니...... 어리석고 바보 같은 여자...... 여자란 참으로 알 수 없는 존재다......!’
바보는 혁리혼이었다.
여인은 꿈을 먹고 산다, 사랑이라는 꿈을......!
그래서 사랑이라는 꽤나 미묘한 것은 여인의 평생이라는 의미에서 커다란 것이다.
허나 사내는 사랑을 먹고 살지는 않는다.
사랑이 그 평생의 조그만 것에 불과한 것을 보면.......
그래서 사내는 여인을 모를 수밖에.......
사락.......
짧은 비명이 터져 나가며 이내 미랑의 손바닥만한 고의는 어둠 속으로 날아 흩어지고 있었다.
순간!
아름다움이여......!
한 송이 꽃의 아름다움을 무엇에 비견해야 옳으랴.
농익은 가슴과 깊숙이 꽃술을 감추고 있는......!
‘아름...... 답다...... 너무도......!’
혁리혼은 숨을 막는 신선한 또 하나의 충격에 일시 입꼬리를 가늘게 떨었다.
“이것을.......”
혁리혼은 왼손에 들고 있던 백색의 영정(靈精)을 미랑의 반쯤 벌려진 입과 함께 바라보며 꽤나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오랫동안.......
그리고 혁리혼은 한참이나 지나서야 서슴없이 미랑의 입 속에 영정을 집어넣었다.
오천 년을 살아 하나의 빙정이 된다는 빙극우혈화의 영기가 담긴 빙정......!
빙정이 미랑의 입 속으로 타고 넘는 순간이다.
쓰쓰쓰...... 쓰스으.......
미랑의 전신에는 순식간 엄청난 한기가 맴돌았다.
동시에 그녀의 나신은 순식간에 허연 서리가 묻어나고 있었다.
“으...... 으.......”
혼절해 있던 미랑의 입에서 소름 끼치는 신음이 흘러 나왔다.
오천 년을 머금어 온 무서운 한기가 그녀의 전신을 굳히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없다! 늦으면 그녀의 몸이 모조리 얼음 조각으로 부서져 버리리라......!’
“으윽......!”
혁리혼은 미랑의 몸을 끌어안는 순간 전신으로 엄습해 드는 무시무시한 한기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가공할 한기다!’
동시에 그는 전신에 무한의 내력을 끌어올렸다.
순간 보라!
우우우우― 우웅―!
츠츠츠― 츠츳―!
그의 전신에서 일곱 가지 오색 영롱의 무지개 빛깔이 서기(瑞氣)처럼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바로 칠절성좌류의 기운이 혁리혼의 몸에 잠재해 있음으로 해서 나타나는 신비한 현상이었다.
일곱 가지의 무지갯빛 서기가 뿜어져 나오는 순간 엄습해 들던 엄청난 한기는 봄 눈 녹듯이 스르르 꺼져 버렸다.
문득 혼절해 있던 미랑의 입술 사이로 괴로운 신음이 흘러 나왔다.
“으...... 음...... 아아.......”
빙정을 복용함으로써 체내에서 생기는 무서운 미약의 효과!
그것이 엄청난 열기를 동반하고 그녀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꽃뱀.
한 마리 아름다운 꽃뱀의 울음소리.......
차가운 월광이 방안으로 스며들어 미랑의 고혹적인 입술 사이로 흘러 나오는 신음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가지런한 하얀 치열이 너무도 아름답고, 그녀의 꿈틀거리는 육신은 뇌살적이었다.
사내.
여인은 그를 노을이라고 했던가?
차갑고 무뚝뚝한 야수의 냄새가 나는 사내는 원래 뜨거운 사람이었다.
차가운 얼음일수록 불에는 빨리 녹는 법인가?
“아...... 흐윽......!”
걷잡을 수 없는 열기.......
그것은 참으로 기이한 것이다.
처음 미세한 세포 하나하나에서 시작되는 그 열기는 아내 전신 구석구석 모든 영혼을 일깨워 뒤흔들고 있었다.
사내의 손끝은 그 영혼을 일깨우는 마법의 손이었다.
노을은 무섭게 탄다.
마치 불을 지펴 놓은 것처럼.......
미랑.
그녀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 꿈은 너무도 현실을 닮은 듯하기에 그녀는 아름다운 미소까지 입가에 머물고 있는 채 타오르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참으로 이상하죠...... 훗! 내가 노을을 사랑할 수 있다니...... 저는 상상도 못했어요.......”
“하지만 미랑...... 지금 노을은 너를 사랑하고 있다.......”
노을은 그렇게 말하며 미랑의 몸을 소담스럽게 안았고, 미랑은 보조개를 만들어 내며 아주 아름답게 웃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쥐면 날아가 버릴 듯한 노을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불안해요.......”
“왜지......?”
“당신은 쥐면 금세 날아가 버리고...... 흩어져 이내 나의 눈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요...... 그래서.......”
“후훗...... 그렇다면...... 너도 노을이 되면 되지...... 늘 함께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노을은 미랑을 향해 포근하게 웃었고, 미랑은 꿈결처럼 몽롱한 눈빛으로 노을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몸을 감싸 안고 있는 노을을.......
“아아......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후훗...... 너는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여인이다, 미랑...... 너는 분명히 노을이 될 수 있어.......”
노을은 그녀의 옷자락을 가만히 풀어헤친다.
미랑은 그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아아...... 나는.......”
“미랑, 사랑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저는...... 저는.......”
“노을이 되지 않으련? 늘 나와 함께 있는 노을이.......”
“되고...... 싶어요...... 정말이랍니다.......”
“훗...... 봐아...... 너는 지금 노을이 되고 있잖아...... 아주 붉은.......”
미랑은 정말 노을이 되고 있었다.
온몸이 붉게 물드는...... 참으로 아름다운 노을이다.
미랑은 금세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아아...... 정말...... 이에요...... 노을이 되고 있어요...... 당신처럼 아름다운 노을이.......”
“미...... 랑......!”
노을은 아주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고 미랑은 그 미소 속에 모든 것을 맡겨 버렸다.
“아아...... 악!”
꽤나 심한 고통이 그녀의 모든 꿈을 안아 버렸다.
그것은 유리 조각이나 칼끝 같은 것으로 살갗을 째는 것과 같은 또 다른 유의 아픔.
하나의 노을이 되는 아픔이었다.
“아아...... 아흑.......”
미랑은 두 눈을 떴다.
분명 꿈이리라.
허나 그녀는 하복부를 강하게 꿰뚫는 아픔을 잊고 말았다.
‘꿈이 아니...... 었어......!’
그녀는 자꾸만 눈앞을 확인하려는 듯 자신의 입술을 달콤하게 부딪고 있는 뜨거운 입술의 사내를 감싸 안는다.
“아아...... 아.......”
그리고 자신의 입술에서 부끄럽게 흘러 나오고 있는 것은.......
“소녀는...... 소녀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진심입니다...... 아아.......”
* * *
파르르......!
그녀는 꽤나 오랫동안 차디찬 월광을 받으며 어둠 속에서 몸을 떨고 있었다.
“아아...... 짐승...... 당신은 짐승이야...... 짐승.......”
귓속으로 파고드는 여인과 사내의 비음을 듣지 않으려는 듯 참담한 표정으로 귀를 막고 있는 여인.
사무향......!
팔황대마성좌 중 하나의 가공할 성좌의 주인이기 이전에 그녀는 꽤나 섬세한 감정을 가진...... 사랑할 줄도 아는 뜨거운 여인이다.
월광은 잘게 은가루처럼 바수어져 그녀의 잔떨림을 일으키는 조그만 어깨 위로 부어지고 있었다.
“흐흑.......”
그녀는 몸을 돌려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타탁...... 탁.......
“다시는 사내를 사랑하지...... 않겠어...... 그 누구도...... 흑.......”
어둠은 그녀의 발 아래에서 자지러질 듯 깨고 있었다.
“리혼...... 나는 그를...... 저주하고...... 말 테다.......”
그때였다.
“당신이 정말 그분을 저주할 수 있을까요?”
어둠 속에서 요요로운 음성이 그녀의 발을 묶고 나섰다.
“헉―! 누...... 누구......!”
순간 사무향은 멈칫 걸음을 멈추며 앞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있는 거기.
한 여인이 어둠 속에 가려져 유령처럼 흔들거리고 있었다.
얼굴도 보이지 않는 여인.
그녀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숨막히는 요요로운 요기뿐이다.
“본녀는 당신의 말을 믿지 않아요. 당신은 그분을 아주 사랑하고 있을 테지요? 그리고 영원히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비 맞은 배꽃처럼 사무향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나는 그를 사랑하지는 않을 것이나...... 잊지는 못할 거예요.......”
“아니에요. 당신은 그분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둠은 아주 조용히 속삭이듯 말하고 있었다.
악마의 속삭임처럼.......
“당신은...... 누구인가요......?”
사무향의 물음에 어둠은 꽤나 미묘한 말을 했다.
“태후는 당신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로 간다면 당신은 반드시 왕야의 사랑을 받을 것이지요.......”
이상하리만치 믿음을 안겨주는 마력적인 어둠 속의 여인.
마치 그 마력에 이끌리듯 사무향은 자신도 모르게 그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 나는 갈 것입니다! 태후라는 사람에게......!”
“호호...... 당신은 이제 영원히 왕야의 사랑을...... 차지하시게 될 것입니다...... 자아...... 어서 가요.......”
동시에 사무향은 어둠과 함께 공간 속으로 사라져 갔다.
스스스...... 슷.......
스으.......
요요로운 여인.
그리고 태후.......
무언가 있다.
이 어둠 속에는...... 또 다른 어떤 어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