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17 章 覇雄과 梟雄
“바보 같은 녀석!”
중년유생.
그는 안색을 일그러뜨리며 호통을 터뜨렸다.
일신에는 금의를 걸친 전형적인 유생의 모습에, 전신에는 상서롭기 그지없는 서기가 맴돌고 있는 그의 신태는 신비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앞.
한 소녀가 취의경장 차림으로 서 있는 채 주눅이 들어 있었다.
“아...... 아버님!”
호화롭기 이를 데 없는 대청.
이곳은 흑양밀전하고도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는 은밀한 곳이다.
꽈― 악!
중년유생은 태사의의 모퉁이를 땀에 젖은 손으로 움켜쥐며 불길을 입에서 터뜨렸다.
“네 녀석보고...... 누가...... 누가! 그에게 그 따위 어리석은 접근을 하라고 했느냐?”
중년유생은 극도의 분노를 참을 수 없는 듯 말조차 더듬고 있었다.
그는 늘 정갈하고 조용한 사람이다.
도대체가 희로애락이라든가, 인간의 감정을 겉으로 표현해 내지 않는.......
그런 그가 지금은 얼굴에 순식간 무수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경악과 당혹...... 그리고 분노까지.......
취의경장 소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꽃잎 같은 입술을 떨었다.
“저...... 저는 다만 시험...... 으로.......”
“시...... 시험? 헛헛헛헛!”
중년인은 이내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분노가 섞인 차가운 웃음이다.
그는 일찍이 자신의 딸에게 그렇듯 분노의 표정을 지어 본 일이 없는 사람이다.
“마야, 너는 참으로 어리석은 아이다.”
타마야!
그녀는 바로 혁리혼에게 여인이 지닐 수 있는 자존심까지 송두리째 밟혀 버렸던 바로 그녀였다.
그리고 중년인.
기억하는가?
검은 태양의 주인 흑뇌마자 타하륵을!
중년유생은 바로 그였다.
머릿속에 삼십이만 팔천기(三十二萬八天技)라는 엄청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인간 불가사의!
흑뇌마자 타하륵은 당혹한 시선으로 자신의 성숙한 딸을 바라보았다.
“너 정도의 능력으로 용을 건드리다니!”
‘용? 그가......?’
타마야는 눈가에 놀람의 빛을 언뜻 떠올렸다.
그녀의 기억속에 자신의 아버지가 타인을 가리켜 그렇듯 표현한 인물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믿을 수 없어! 그 짐승 같고...... 오만한 자식이?’
그녀는 잘강잘강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오기만 해봐라! 이 망할 자식!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 버리고 말 테다!’
그녀는 뒤로 감추고 있는 두 주먹을 앙증맞게 움켜쥐었다.
그녀의 속을 읽고 있기라도 하는 듯 흑뇌마자 타하륵은 어이없는 표정을 떠올렸다.
“철없는 녀석! 그는 어쩌면...... 이 아비조차 아래로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흥! 절대 그렇지 않아요. 그 따위 자식이 감히 아버님을......? 믿을 수 없어요.”
“.......”
“본 전의 이백만 고수만으로도 그 따위 놈은 수백 명 아니라 수천 명이라도 굴복시킬 수 있어요!”
그녀는 코방귀를 쉴새없이 뀌어대며 냉소를 친다.
“두고 보세요! 소녀가 그렇게 하고 말 테니까요!”
“허허...... 헛.......”
흑뇌마자 타하륵은 자신의 철없는 딸을 바라보며 기가 막히다는 듯 웃어 버리고 말았다.
“너는 이제 네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가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너는 용을 분노케 했다. 최소한 본 전의 고수를 모조리 동원한다 해도 겨우 막을 수 있을까 싶은 용을......!”
그는 혁리혼을 그렇게 평가하고 있는가?
그러나 타마야의 뇌리 속에는 며칠 전 혁리혼에게 당했던 수치심이 자꾸만 떠올라 그녀의 마음에 독기를 일으켰다.
사내의 시리도록 하얀 손이 자신의 옷을 거침없이 벗겨 버리고.......
그의 손은 자신의 나신 구석구석을 파고들었고.......
사내의 이는 그녀 자신의 속살을 베어물었다.......
그리고 그녀는 사내의 능수능란한 애무에 걷잡을 수 없이 침몰해 버렸던.......
여자의 자존심이라는 것은 발가락의 때만치도 생각해 주지 않았던 그 야수 같은 자.......
타마야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파르르......!
‘짐승 같은 자식!’
지금도 그녀는 혁리혼의 손과 입술이 전신을 스멀거리며 다니는 듯한 착각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흥! 오기만 하면 그놈의 사지를 분질러 평생 내 앞에서 기어다니도록 하고 말 거예요!”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타하륵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허허...... 내가 실수를 한 것이다. 네 녀석에게 혁리혼, 그와 과거 이 아비가 했던 약속을 들려준 것이.......”
헌데 그때였다.
공간을 찢는 한 줄기 비명이 솟구쳐 오른 것은.......
“크아아아악―!”
그 뒤를 이어 흑양밀전은 무수한 비명 소리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컥!”
“카흑...... 끄으.......”
“저...... 적이다! 막아랏! 커― 컥!”
순간 흑뇌마자 타하륵의 안색이 급변하고 말았다.
“벌써.......”
동시에 그는 급급히 신형을 돌리며 밖으로 향했다.
“그가 왔다!”
그때였다.
파드드득!
한 마리 붉은 까마귀가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며 요란스럽게 지껄여댔다.
― 까까...... 바보야, 주인은 벌써 왔는데 어디로 가려느냐? 이 멍청아!
혈오, 바로 그 영악한 동물이었다.
흑뇌마자가 흠칫 몸을 멈추는 순간이다.
캬아아아― 오오오―!
파아아― 앗!
공간을 뒤흔드는 표범의 울음소리와 함께 하나의 인영이 빛살처럼 실내로 스며들었다.
동시에 한 줄기 차가운 음성이 실내를 울렸다.
“큿...... 병법의 만가지 계를 지닌 자에게는 선공이 최고라던가?”
백의서생.
한 마리 거대한 백표범과 실내로 들어선 인물은 일신에 눈처럼 희디흰 백의를 걸치고 있는 서생이었다.
입가에 퇴폐적이고도 뇌살적인 미소를 머금고 있는.......
타하륵과 타마야의 얼굴빛은 순간 대조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말았다.
백의서생과 타하륵은 아주 잠깐 동안 서로를 응시하다가 타하륵의 입에서 먼저 쩌렁한 대소가 터져 나왔다.
“와하하하핫핫핫...... 핫...... 컸군, 자네는!”
“흑뇌마자, 꽤나 오랜만이오! 후훗.......”
백의서생은 바로 혁리혼이었다.
흑뇌마자 타하륵은 고졸한 웃음을 여운처럼 물었다.
“꼭 팔년 만인가?”
“인사치레치고는 팔년 만에 아주 멋진 인사를 받았소.”
혁리혼은 묘한 웃음을 타하륵의 옆에 서 있는 타마야에게 던졌다.
그 시선을 받는 순간 타마야는 잘게 몸을 떨었다.
파르르.......
‘나쁜 자식!’
타하륵은 멋쩍게 혁리혼을 바라보았다.
“허헛...... 나의 어리석은 여식을 말하는군.”
“아니오. 꽤나 괜찮은 여자였소.”
꽤나 괜찮은 여자.......
그 한마디에 타마야는 그만 얼굴이 홍시처럼 빨갛게 변하고 말았다.
‘이 자식이 지금......!’
그녀는 발작을 해도 수십 번은 했을 심정이다.
다만 타하륵이 앞에 있기에 이를 갈며 참고 있을 뿐이다.
‘두고...... 보자, 망할 자식!’
그녀는 혁리혼을 향해 표독스러운 눈빛을 주었다.
그것이 만약 칼의 빛이었다면 혁리혼은 난도질을 당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큿...... 아직도 기세는 굉장하군.’
혁리혼은 타마야의 시선을 받으며 입가에 묘한 웃음을 흘렸다.
타하륵은 씁쓸한 기색으로 혁리혼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네에게 아주 깨끗하게 당했군. 선공지계(先攻之計)라? 허허허...... 헛.......”
혁리혼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일각 후면 그들은 이곳까지 들어설 것이오. 흑양밀전의 모든 고수들의 살수를 뚫고......!”
“믿네. 최소한 마뢰사불(魔雷邪佛)이 끼여 있으니까.”
마뢰사불!
혁리혼은 뜻밖이라는 듯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후훗...... 벌써 아시었소?”
“아핫! 자네는 나와 흑양밀전의 능력을 우습게 보지는 말게. 이미 자네가 천왕마성을 하룻밤 사이에 깨끗이 밀어 버린 사실까지도 알고 있었으니까.”
“......!”
‘저...... 저 사람이......? 무림에 퍼진 그 천왕제군대척의 주인......?’
타마야는 너무도 뜻밖의 놀라운 사실에 일시 바보가 되고 말았다.
허나 한번 앙심을 품고 있던 그녀의 가슴속에는 더 이상한 묘한 반발심이 만들어져 버렸다.
‘흥! 제까짓 게 천왕제군대척의 주인이면 주인이지! 앞으로 무림은 나 타마야에 의해서 발칵 뒤집히고 말 것이다. 천왕제군대척의 주인을 개처럼 끌고 다닐 테니까!’
글쎄......?
그녀의 내심을 모르는 듯 혁리혼은 차갑게 웃고 있었다.
“흑뇌마자, 그들이 지겨워할 것이오. 어쩌면 점혈(點穴)로 흑양밀전의 고수를 눕히는 것이 아니라 진짜 칼로 눕혀 버릴지도 모르오.”
섬뜩한 암시가 담겨 있는 말이다.
흑뇌마자의 입꼬리가 묘하게 꼬이고 말았다.
“점혈......? 하하핫...... 승자의 아량인가? 어쨌든 고맙군.”
이어 그는 허공을 향해 꽤나 낭패한 음성을 터뜨렸다.
“도풍(刀風)!”
순간 천장 위로부터 한 줄기 무감동한 대답이 흘러내렸다.
“핫―!”
“그들에게 정중한 방법으로 길을 터 주어라!”
“복명하오이다!”
예의 무감동한 음성은 이미 이십여 장 밖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어둠의 주인, 숭배받는 검은 태양!
그의 한마디는 곧 율법이고, 천법이다.
타하륵은 이내 혁리혼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을 꺼냈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났으니 축배를 드는 것이 어떻겠나?”
“후훗...... 오는 동안 꽤나 목이 컬컬했었소.”
“하하핫...... 우리는 언제나 통하는 것이 있군.”
타하륵은 쾌소를 터뜨리며 대청을 앞서 나섰다.
그 뒤로 혁리혼은 타마야의 칼끝 같은 시선을 뒤로하며 사라져 갔다.
* * *
아주 어울리는 밤이다.
흑양밀전에 흘러내리는 차가운 편월과 어둠은.......
운치 있는 밤.
월광의 가루가 쏟아져 부서지는 술잔.
“나의 진정한 뜻은 아니었지만 나의 여식의 실수를 합해 나는 자네에게 두 번 패한 것이 되었군.”
“.......”
“허나 아직 나를 꺾었다고 생각하지는 말게. 진짜 나는 꺾이지 않았으니까 말일세.”
타하륵은 술잔을 입가에 가져가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금배(金杯)에 담겨 있는 술은 꽤나 오래된 술인 듯 그 향기가 가슴까지 깊숙이 빨려들고 있었다.
혁리혼은 그 향기를 음미하듯 천천히 술잔을 코앞까지 올리며 빙긋 웃어 보였다.
“그 계는 따로 마련되어 있소. 나의 머릿속에......!”
“하하핫...... 어떤 계책인지 기대가 되는데?”
“.......”
“허나 자네는 너무했네. 마야의 자존심을 그렇듯 밟아 놓았으니 말일세. 후훗...... 자네는 앞으로 그 아이의 귀찮은 행동을 모두 감수해야 할 것이네.”
혁리혼은 고졸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러다가 술을 입 안 가득 부으며 한참 후에야 술맛을 음미하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이 혁리혼의 여자가 될 여인이지요.”
“호오...... 자부심이 꽤나 대단하군?”
“조금 시간이 걸릴 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흑뇌마자 타하륵의 여식을 자신의 여자로 만든다는 말은 다른 뜻도 있다.
바로 타하륵이 자신을 패배시키면 자신의 여식을 주겠다던 팔년 전의 약속을 뒤집는다면......?
그의 여식을 취한다는 말은 곧 타하륵을 굴복시킨다는 말이 아닌가?
타하륵은 통쾌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핫...... 그런가? 좋아, 이 밤은 어차피 축배의 밤이 아닌가? 드세!”
쨍.......
술잔이 부딪치고, 아름다운 월광은 술잔에 담겨 두 사람의 입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패웅과 효웅의 대좌!
아니, 그것은 어쩌면 영웅과 영웅의 대작인지도 모른다.
‘너무도 완벽한 몸가짐!’
혁리혼은 지금 흑뇌마자를 감탄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흑뇌마자.
혁리혼이 보는 그는 한 사람을 닮아 있었다.
우연의 억지인지 모르나 혁리혼의 기억속에 아주 강하게 부각되어 있는 금황제운을 닮은 사내였다.
‘팔년 전 내가 본 그의 자취는 이미 많이 지워져 있다. 완벽하고도 중후한...... 완성된 한 인간을 보는 듯하다! 그는 이미 패웅지로를 걷고 있다. 최소한 당금 무림에서 그 누구도 감히 막을 수 없는...... 전신에서 무형중 뻗어 나오는 기운만으로도 능히 그러하다!’
혁리혼은 술잔을 기울이며 입꼬리가 굳어졌다.
흑뇌마자 타하륵.
그는 절대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한 세기가 만든 인간 불가사의인 그!
문득 잔잔한 표정으로 술잔을 기울이던 타하륵이 혁리혼의 상념을 깨며 입술을 떼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천극마분도의 소문 말입니까?”
혁리혼은 담담히 대꾸했다.
타하륵의 입꼬리가 기묘하게 비틀렸다.
“훗...... 자네의 표정을 보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모습이군?”
혁리혼은 입가에 신비한 미소를 담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타하륵은 한 잔의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천극마분도의 소문에는 무서운 계가 들어 있네. 그것은 바로 팔황대마성좌의 인물들을 부르는 죽음의 소리지.”
“.......”
“누군가...... 팔황대마성좌를 한곳으로 부르는...... 그 심중에는 오천 년 시공을 초월한 난세지난세의 피를 부르는 무서운 획책이 담겨 있네.”
누군가?
물씬.......
죽음의 향기가 담겨 있는 말이다.
문득 혁리혼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아주 차갑게 웃었다.
“훗...... 누군지 모르지만 그는 아주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있소.”
“......!”
“난세는 나 혁리혼이 만들 것이오!”
― 난세는 내가 만든다!
취중에 하는 소리인가?
그의 붉디붉은 입술 사이로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말은 무서운 말이 아닌가?
흑뇌마자 타하륵의 눈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또 하나의 눈빛이 찰나 기괴한 빛을 뿌렸다.
허나 그것은 지극히 찰나지간의 일.
혁리혼은 고졸한 빛깔을 입꼬리에 매달았다.
어찌 보면 보는 이로 하여금 섬뜩함까지 느껴지게 하는 야수의 기운이다.
“그저 아까운 것이 있다면 그는 내가 만든 무대 위에서 자신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 모른다는 것이오.”
“.......”
“허나 조연은 그 암중의 인물뿐만은 아니오. 이 한판의 승부에 뛰어드는 자라면 모두!”
타하륵의 술잔을 잡은 손끝이 꽤나 미묘한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혁리혼을 바라보며 입술을 떼었다.
“만약 나 타하륵이 끼여든다면......?”
혁리혼은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역시 조연의 인물이 될 것이오. 어느 순간 칼끝에 사라져 수중고혼이 될......!”
야수!
마치 먹이를 앞에 놓고 노려보는 야수의 눈빛을 혁리혼은 갖고 있었다.
그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 타하륵은 자신도 모르는 전율 같은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그리고 팔황대마성좌를 그 암중의 인물이 끌어들이나...... 그는 결국 나의 일을 잠시 대행해 주고 있을 뿐이오.”
“......!”
“나의 이용물이 될 테니까...... 팔황대마성좌 중 나를 제외한 칠황대마성좌 모두!”
혁리혼은 술잔을 높이 쳐들며 이상한 웃음을 지었다.
순간 타하륵의 입에서 대소가 터져 나왔다.
“으하하핫핫핫― 핫― 아주 멋진 계를 자네는 지니고 있는 듯하군?”
“.......”
“허나 아직은 불확실한 것이네. 꼭 그렇게 되리라는 장담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네.”
“......!”
“천지간에는 상극이 있고, 천적(天敵)이 있듯이...... 자네가 있는 대륙에는 나 흑뇌마자 타하륵이 존재하니까.”
천적!
그의 말속에는 의미심장한 뜻이 담겨 있었다.
죽음의 냄새 같은.......
“큿...... 잊지 않을 것이오, 그 말을...... 내가 죽어 버리지 않는 한.......”
‘혁리혼, 팔년 동안 무서운 야수를 닮아 왔구나, 너는!’
이를 드러내 놓고 웃는 혁리혼을 바라보는 타하륵의 가슴 저 뒤편에는 아주 차가운 냉기가 스멀거리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호쾌한 밤.
허나 그 기울어지는 술잔에는 아름다운 월광의 부스러기와 죽음의 약속이 담겨 있는.......
이 밤은 그런 밤이다.
* * *
화원(花園).
이슬이 촉촉이 내린 화원의 광경은 참으로 신선하다.
작약(芍藥)과 붉디붉은 흡사 피를 토하는 듯한 혈난(血蘭).......
새초롬한 빛을 뿜어내는 청결한 백화(白花).......
봄빛을 받아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기화요초(琪花瑤草)는 아주 영롱한 이슬을 머리 위에 이고 있었다.
흑양밀전의 구중심처는 온통 꽃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이것은 흑뇌마자의 배려였다.
한 소녀를 위한.......
손.
여인의 손은 시리도록 하얗고 곱디고왔다.
너무나 아름다워 흡사 흙이라도 묻을까 불안한 그런 하얀 손은 지금 한 자루의 호미를 움켜쥐고 있었다.
사륵...... 삭.......
일신에는 아주 평범한 농부의 아낙과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는 여인.
허나 꽃이라 한들 이렇듯 아름다울까?
고귀하다는 난초의 아름다움도, 청순하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백화나 그윽한 국화보다도 더 아름다운 여인.......
화원에 피어오른 무수한 꽃들은 그녀의 주위에서 모두 빛을 잃고 만다.
그녀는 세상을 잊어버린 채 꽃에 파묻혀 있었다.
사내.
그는 꽤나 오랫동안 그런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소녀다. 마야, 그녀와는 쌍둥이라지만 너무도 분위기가 다른.......’
쌍둥이?
그랬다.
소녀는 한 여인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물방울처럼.......
바로 타마야라는 소녀와.......
문득 조용한 화원의 정적을 깨며 소녀는 나직한 웃음을 배시시 입가에 떠올렸다.
“훗...... 백향(白香), 너는 참으로 고운 향기를 지니고 있다. 너를 보고 있노라면 나조차 그 향기에 샘이 난단 말이야.......”
그녀는 한 송이 자백란(紫白蘭)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백란을 좋아했다.
특히 그 향기를.......
그래서 그녀는 이제 꽃에 이름까지 붙여 부른다.
“흠...... 흠.......”
소녀는 앙증스럽게 코끝을 자백란에 대고 화향을 들이키고 있었다.
“아...... 아...... 사람들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왜 피를 흘리며 싸우는지.......”
한 송이 하얀 순결의 백화처럼 그녀는 순수한 영혼을 지니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한지( 芝)!
“사람들의 마음이 너의 하얀 마음을 닮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화향에 취한 듯 몽롱한 음성을 아주 작게 뇌까렸다.
그때였다.
저벅...... 저벅.......
와작― 꽈직!
꽃들의 자지러지는 비명과 함께 한 사내가 화원으로 무법자처럼 성큼성큼 들어서고 있었다.
타한지의 청순한 얼굴에는 순간 노기가 서렸다.
노기라고는 하지만 그 모습은 오히려 이상한 아름다움까지 만들어 주고 있었다.
“무례한!”
허나 그녀의 화가 난 얼굴을 보는지 안 보는지 사내는 계속 꽃들을 밟으며 들어서고 있었다.
“훗...... 이처럼 강한 자에게 밟히면 무엇이든지 부러지게 되어 있는 것이 대자연의 섭리다!”
사내는 꽤나 오랫동안 화원 멀찍이에서 타한지를 바라보고 있던 사내였다.
그는 문득 타한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지 않느냐, 한지?”
그는 자연스럽게 타한지를 향해서 반말을 한다.
‘반말을?’
타한지는 상큼 초승달 같은 아미를 치켜 올렸다.
터― 억!
그녀는 화가 난 듯 양손을 허리춤에 걸치며 앵두 같은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은 무례하기 그지없는 사람이군요.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죠? 금지구역인데...... 당신은 누구죠?”
타한지는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묻고 있었다.
허나 사내는 입가에 처절하리만치 퇴폐적인 미소를 매달며 계속 꽃들을 밟으며 타한지 앞으로 걸어왔다.
“밟고, 또 부러진다는 것은 또한 파괴의 논리이자 약육강식의 법칙이다.”
“저는 당신이 누구냐고 물었어요!”
타한지는 얼굴을 그만 무색하리만치 빨갛게 붉히며 악물린 옥음을 터뜨렸다.
사내는 그래도 딴소리...... 타한지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 해댄다.
“허나 그 대자연의 섭리조차도 강자의 마음에 따라 바뀌어질 수 있다.”
“다...... 당신...... 이 한지를 무시하고...... 있군요?”
타한지는 그만 울어 버릴 듯한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글썽이고 말았다.
참으로 깨끗하고 순수한 영혼을 지닌 여인.
씨익.......
사내 혁리혼은 타한지의 앞에 이르러 악의 없는 웃음을 떠올렸다.
그 미소의 아름다움이여!
연화(蓮花)의 웃음처럼 끝없이 맑고 뇌살적인 퇴폐적 미까지 곁들여진 그 미소는 실로 인간의 웃음이랄 수 있을까 싶은데.......
‘아...... 아.......’
타한지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내심 탄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는 그제야 사내의 용모가 눈부시도록 아름답다는 사실과 그의 미소가 주는 무한한 의미를 느낀 것이다.
‘아름다운 사내...... 백화와 혈난보다도 더...... 아름답다.’
허나 그녀는 이내 아쉬운 빛을 서늘한 두 눈에 떠올렸다.
혁리혼은 어느새 몸을 굽혀 자신이 밟고 지나온 꽃들을 손질하기 시작한 채 그녀를 외면해 버린 것이다.
스― 윽―!
그의 사내의 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옥수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화원을 오가며 꽃을 다듬고 있었다.
“......?”
타한지는 처음에는 이 무례한 사내가 싫었으나 차츰 시간이 흐를수록 묘한 호기심이 가슴 깊숙이로부터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호기심이랄 수도 없는.......
그것은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헌데 혁리혼이 꽃을 만지는 시간이 점차 흐를수록.......
그것은 너무도 믿을 수 없는 사실이다.
소로록...... 사륵.......
혁리혼이 밟아 꺾여져 시들하던 꽃들이 다시 생기를 되찾는 것은 참으로 불가해한 일이었다.
“어멋?”
타한지는 천진한 어린아이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신기해 한다.
“이와 같은 것을 활물(活物)의 도(道)라고 하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한지?”
이상도 하지.......
이제 혁리혼의 반말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원래 그렇게 불러야 되었던 것처럼......!
타한지는 웃음을 떠올렸다.
마치 한순간 꽃봉오리가 탁 트이는 그런 아름다움을 지닌 미소.
“아아...... 훌륭해요.”
짝!
그녀는 손뼉까지 치며 혁리혼의 앞으로 조금 바짝 다가앉았다.
그 행동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스스럼이 없었다.
그녀는 혁리혼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앙증스럽게 갸웃거린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배우고 싶어요, 한지는.......”
혁리혼은 순간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고 말았다.
‘아아...... 아름다운 소녀다. 정말 아름다운 꽃이...... 보잘것없는 꽃들 속에 파묻혀 숨쉬고 있다.’
타한지의 아름다움은 주위에 널려 있는 기화요초의 아름다움에 빛을 잃게 하는 화중화(花中花)였다.
* * *
그는 아주 오랫동안 구층 누각 위에서 창문을 통해 화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흑뇌마자 타하륵.
그는 입술을 잘게 떨고 있었다.
‘활검마선지경(活劍魔仙之境)! 검도(劍道)의 경지가 마극(魔極)의 경지를 넘어선 선(仙)의 경지를 또다시 넘어선다는 전설의 검의 경지!’
그는 혁리혼이 조금 전 만지던 죽음의 꽃에서 살아나는 생기를 보며 경악을 베어물고 있었다.
‘그는 이미 가공할 경지를 넘어서고 있다. 칠절성좌류의 인간......! 생각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듯 가공한 것이란 말인가?’
회의와 경악이 넘실거리는 그의 시선은 화원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아아...... 무섭다. 이제 삼 일을 그와 함께 있었는데도...... 시시각각 그는 다른 무서운 경지를 나에게 보여 주고 있다. 내가 그를 상대할 수 없음인가?’
타하륵은 고뇌의 빛을 떠올리며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스르르르...... 르.......
동시에 그는 발 없는 유령처럼 창가에서 사라져 갔다.
“혁...... 리혼.......”
짧은 시간 타한지와 혁리혼은 서로를 마주한 채 앉아 있었다.
그러다 문득 타한지는 화들짝 놀라며 그만 얼굴을 숙이고 말았다.
“어머!”
‘내...... 내가 왜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 바보!’
그녀는 귓불까지 빨갛게 달아 버리고 말았다.
혁리혼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잔잔한 음성을 흘렸다.
“한지, 너는 금방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활물의 도리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는 쉽게 익혀지는 법이니까.......”
타한지는 고개를 더욱 숙이며 꽃송이를 만지작거렸다.
마음이 깨끗하지 않다는 것은 무인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난제다.
그것은 곧 부동의 마음을 깨우칠 수 없다는 것과 같은데.......
아주 깨끗한 영혼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부동의 묘는 가장 쉽게 깨우쳐진다.
다만 그런 해맑은 영혼의 소유자가 없을 뿐이지, 부동의 묘는 활물의 묘를 깨우쳐 주는 아주 오묘한 이치가 있는 것이다.
타한지는 혁리혼이 자신을 보고 있는 듯한 부끄러움 때문에 고개를 숙인 채 자꾸만 꽃들을 매만져 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다.
사르르...... 르.......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만지는 꽃은 조금씩 생기를 되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장 순수한 영혼을 지닌 여인.
그녀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부동의 묘와 활물의 묘가 은연중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었다.
혁리혼은 한마디 말로써 그녀의 몸 속에 있는 그런 기운을 일깨워 준 것이다.
혁리혼.
그는 무궁한 능력을 몸 속에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아...... 아.......”
타한지는 일순 얼굴에 활짝 웃음을 떠올렸다.
“어때요? 한지도 이젠 잘할 수 있잖아요, 그쵸?”
그녀는 함박웃음을 떠올리며 칭찬을 듣고 싶어하는 어린아이처럼 혁리혼을 돌아보았다.
허나 혁리혼은 이미 거기에 없었다.
그는 어느사이에 그녀의 옆을 떠난 것이다.
“아......!”
타한지는 일순간 아주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을 때와 같은 허전함을 느꼈다.
‘그분은...... 이 한지가 미워서 가 버린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조그만 가슴에는 아무도 모르는 앙금이 사르르 쌓이고 있었다.
초연(初戀)이라는 앙금이.......
* * *
혁리혼은 하나의 누각을 돌아서고 있었다.
“타하륵.......”
그는 조그맣게 그의 이름을 뇌까리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사흘 동안 타하륵의 시선은 늘 자신을 쫓고 있었다는 사실을.......
바로 조금 전 그의 모습이 구층 누각의 창가에 비추었던 것처럼.......
‘만약 그대가 현명한 자라면...... 자신의 능력을 이미 나와 비견했을 것이다. 이제 그대는 굴복해야 한다.’
스슷― 슷―!
그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걸음을 옮겨 또 하나의 가산을 넘어서고 있었다.
‘만약 아직도 굴복하지 않는다면......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다. 내가 살아가는 방법은 단 한 가지다. 나의 힘이 될 수 없는 것이라면 없애 버리는 한 가지 길이 그것이다!’
그 말!
적자생존(適者生存)의 논리가 깔려 있는 무서운 투쟁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그는...... 야수였다.
한 가닥 투혼과 패도의 길을 걷는......!
혁리혼이 가산의 귀퉁이를 막 돌아서려는 순간이다.
카아― 카아― 카아―!
무시무시한 검광이 천지를 뒤덮으며 혁리혼의 전신을 사납게 쪼개어 왔다.
숨통을 짓끊는 가공한 기세!
순간 혁리혼은 뒷짐을 진 채 아주 차가운 웃음을 입가에 물었다.
“천방지축 날뛰는 겁 없는 계집 같으니라구!”
순간 날아드는 검을 혁리혼은 그대로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호호...... 너는 미친놈이다! 이 검은 불괴지신조차도 파괴해 버리는 마검이다! 호호...... 가소로운 자식! 죽엇!”
검망 속에서 까르르 교소가 터지며 언뜻 타마야의 독기 서린 얼굴이 비추었다.
허나.......
카캉―!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마검은 혁리혼의 손아귀에 잡혔고, 타마야의 얼굴은 시체의 그것처럼 창백하게 변하고 말았다.
우두두둑― 파파파― 팍!
“이...... 이럴 수가...... 없다! 이 마황검(魔皇劍)은 어떠한 불괴지신도 파괴해...... 버리는 무적의 검인데...... 너는...... 너는......!”
그녀의 놀라움은 경악을 넘어서고 있었다.
혁리혼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 오른손을 번쩍 쳐들었다.
“봐라!”
“......!”
순간 혁리혼의 손에서 듣기만 해도 심장이 박살날 듯한 마음(魔音)이 터졌다.
찌르르르릉......!
그리고 그의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옥수는 그 순간 믿을 수 없게도 푸른 벽옥의 빛을 띠는 것이 아닌가?
주춤.......
타마야는 두 눈을 부릅뜨며 자신도 모르게 뒤로 비칠 물러섰다.
그녀는 넋 나간 사람마냥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버님에게...... 들은 적이...... 있다...... 저와 같은 현상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무림사 이래 그 누구도 연성할 수 없었던...... 마라천강월벽수(魔羅天 月碧手)!”
마라천강월벽수!
그것은 악마의 손이다.
신의 능력으로도 파괴할 수 없는.......
파르르......!
“이...... 이.......”
타마야는 입술을 잘게 떨고 말았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의 굴곡 사이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타하륵, 바로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 자신에게 말했던 한마디!
― 마야, 너는 지금 엄청난 용을 화나게 하고 말았다!
그 말을 실감하고 있었다.
너무도 보잘것없는 유생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혁리혼.
허나 그에게는 순간순간 타인으로 하여금 경악을 멈출 수 없게 하는 기괴한 마력과 가공할 능력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도...... 도대체 이자의 능력은 어디가 끝이란...... 말인가!’
주춤...... 주춤.......
그녀는 얼굴이 굳어져 자꾸만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 순간 그녀는 지면을 박차며 앙칼진 독설을 터뜨렸다.
팟......!
“언젠가...... 반드시 네놈을 죽이고 말 테다!”
순간 혁리혼은 차게 웃으며 입꼬리를 일그러뜨렸다.
“큿...... 그냥 가려고 하느냐?”
동시에 혁리혼은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어 가볍게 움켜잡아 당기는 시늉을 했다.
스― 윽!
찰나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던 타마야의 교구가 거꾸로 혁리혼의 품안으로 빨려드는 것이 아닌가!
“헉―!”
슈― 욱―!
눈 깜짝할 사이 그녀는 이미 혁리혼의 품안에 안겨 있었다.
“이...... 이.......”
그녀는 얼굴이 시꺼멓게 죽어 버리고 말았다.
혁리혼은 무표정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을 꺼냈다.
“타마야, 앞으로는 절대로 내 앞에 모습을 보이지 마라. 나는 이후 너에게 이런 아량은 베풀지 않겠다.”
“......!”
“아주 보잘것없는 여자다, 너는!”
퍽!
혁리혼은 그녀를 그대로 바닥에 던지며 가산을 돌아가 버렸다.
타마야는 일순 입술이 격하게 떨림을 일으켰다.
그녀는 엉덩이에 느껴지는 통증조차 잊어버린 채 혁리혼이 사라진 가산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르르......!
입술 끝에서 시작된 잔떨림은 그녀의 전신으로 이내 치닫고 있었다.
수치심 때문일까?
아니, 그녀는 지금 혁리혼이 자신에게 한 마지막 두 마디에 몸을 떨고 있었다.
― 내 앞에 절대로 모습을 보이지 마라......!
― 너는 아주 보잘것없는 여자다!
여심이란 꽤나 미묘한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처럼이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혁리혼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었다.
허나 지금 그녀는 혁리혼의 그 두 마디에 몸을 떨고 있는 것이다.
‘나를...... 다시는 안 보겠다고......? 나를......?’
그녀는 이내 머리를 무릎 사이에 파묻고 말았다.
“짐승 같은 자식......! 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