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12 章 醜銘이라는 이름의 여자
천왕현전.
혁리혼은 거기에 있었다.
황금의 태사의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그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참으로 사람이란 모를 것이다.
칠년 전.
혁리혼은 무한히 높고 장엄하기까지 한 이 황금태사의를 올려다보며 저주를 받으며 치욕을 씹었었다.
허나 지금.......
그는 도저히 자신의 것이라고는 상상치 못했던 황금태사의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것도 끝없는 저주를 퍼부었던 할아버지의 안배에 의해서.
혁리혼은 끝없는 감회에 젖어 있었다.
“큿.......”
문득 혁리혼은 아무도 없는 텅 빈 천왕현전을 내려다보며 실소를 흘렸다.
이제 잠시 후면 천왕현전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찰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굽어볼 것이고.......
그 옛날 할아버지가 자신과 할아범을 굽어보았듯이.......
그때 문득 천왕현전의 문이 조용히 열리며 한 여인이 발소리를 죽여 들어왔다.
슷―! 여인의 손에는 찻잔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향기로울 듯싶은 찻잔은 아주 추악한 여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추명.......’
혁리혼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는 그녀의 추악한 것이 싫은 것이 아니다.
마치 그녀를 보노라면 할아버지의 저주 서린 잔해가 그녀에게 담겨져 있는 듯했다.
그것이 싫었던 것이다.
“왕야...... 구향용정차(九香龍精茶)를.......”
추명은 조심스럽게 찻잔을 혁리혼 앞으로 내려놓았다.
“음.......”
혁리혼은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하나 추명은 물러가지 않았다.
호화로운 황금태사의에 앉아 있는 너무도 아름다운 사내 혁리혼.
그녀는 그의 얼굴을 훔쳐보다가 그만 넋을 잃고 만 것이다.
‘아아...... 아름다운 분...... 그리고.......’
그녀의 추악한 얼굴에 붙은 이상하리만치 아름다운 두 눈이 아픔처럼 흔들렸다.
‘너무도 내게서 멀리 있는 분이다, 저분은.......’
정혼(定婚).
그것은 이미 환공이 혁리혼과 추명에게 씌워 준 운명의 너울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여 추명은 얼마나 긴 세월 동안 아픔과 눈물을 흘려야 했던가.
‘하지만 추명은 늘 저분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리라. 저분에게서 한 올의 사랑을 받는 대신 열 올의 미움을 받아도 좋다.’
“.......”
‘저분은 나를 미워하지만 나는 저분을 사랑한다. 아주...... 나를 미워하더라도 저분은 나의 마음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저분을 사랑하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나의 마음이니까.......’
그때 문득 차 맛을 음미하던 혁리혼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추명, 너는 아직도 가지 않았느냐?”
“......!”
순간 추명은 차가운 얼음으로 전신을 덮어쓴 듯한 오한을 착각처럼 느끼고 말았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말없이 돌아섰다.
추악하고 일그러진 얼굴이 이내 그 붉은 기운까지 감추고 말았지만.......
일순 혁리혼이 돌아서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추명.......”
추명은 흠칫했다.
그녀의 등으로 혁리혼의 건조한 음성이 흘렀다.
“돌아서지는 마라. 네 얼굴을 보면 한때 내 심장을 쪼갰던 과거가 떠오르니까.......”
“......!”
추명의 어깨가 잔떨림을 일으켰다.
혁리혼의 한마디는 추명의 조그만 가슴에 칼끝처럼 박혀든 것이다.
“할아버지는 서찰 끝에 너를 가리켜 신비롭고 놀라운 힘을 지닌 여인이라고 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르겠다.”
가장 신비롭고 놀라운 힘을 지닌 여인.
그랬다.
환공은 혁리혼에게 보낸 마지막 서찰 속에서.......
“천녀(賤女)에게는 신비로운 것도, 놀라운 힘도 없습니다.”
천녀, 천한 여인이라는 뜻이다.
그녀는 혁리혼에게 늘 그런 말을 쓴다.
비록 형식적이기는 해도 분명 혁리혼의 정혼녀인데도.......
“다만 무림의 일에 조금 알고 있다는 것 외에는.......”
“무림의 일......?”
뜻밖의 일이다.
망혼곡에 늘 처박혀 지내온 그녀가 무림의 일을 알고 있다니?
“왕야께서는 끝없이 강해지고 싶고 그것을 늘 확인하려는 욕망을 지닌 분이십니다.”
“......!”
칼끝같이 예리무비한 말이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그녀는 혁리혼의 무서운 야망을 욕망에 빗대어 찌르고 있는 것이다.
혁리혼은 얼굴빛이 미묘하게 변하고 말았다.
그는 평상시의 추명을 보고 있지 않은 것이다.
“허나 왕야께서는 남을 알고 싸우면 백번 싸워 백번 다 이길 수 있다는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백승(百戰百勝)...... 이 간단한 논리를 아셔야 합니다.”
“......?”
“맑은 밤하늘을 보면 천녀는 늘 여덟 개의 성좌를 봅니다. 그것은 바로 팔황대마성좌라 일컬어지는 성좌들입니다. 그중에는 왕야의 것도 있습니다.”
혁리혼의 입꼬리가 묘하게 잔파문을 일으켰다.
팔황대마성좌!
추명, 그녀는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팔황대마성좌는 곧 여덟 명의 인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인간 중에서도 가장 강한 힘을 지닌 인중지룡(人中之龍)을.......”
“.......”
“그들은 장차 난세를 이끌어 나갈 주역의 인물들로.......”
그녀는 팔황대마성좌의 인물들을 차례차례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왕야와 같은 오천 년 전 난세주역(亂世主役)의 후예들을 먼저 꼽으면.......”
천극마분도(天極魔分島)!
그것은 남해에 위치하고 있는 천 개의 섬들을 이르는 말이다.
신비의 잠자고 있는 절대괴도(絶代怪島)들.......
도주(島主)는 한 명의 여인이다.
가히 일신의 능력을 추측 불허하는.......
천극화련(天極花蓮) 빙여설(氷如雪)―!
천극마분도에 관해 무림에 알려진 것은 없다.
또한 천극마분도의 존재조차도 무림은 모르고 있다.
허나 만약 그 누군가가 그의 존재를 알고 그들이 바로 오천 년 전 난세주역 중 하나의 세력으로, 바다[海]로 간 세력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중원은 대혼돈을 일으킬 것이다.
마뢰사불(魔雷邪佛)―!
그것은 세력이 아니라 한 괴청년승(怪靑年僧)을 일컫는 말이다.
미증유의 힘을 몸 속에 지니고 있는 괴승.
그의 출신내력은 모조리 불명(不明)이다.
하나 추명은 그를 알고 있었다.
놀랍게도.......
비[雨]와 뇌(雷)가 시작되는 곳.......
마뢰사불은 바로 오천 년 난세주역의 후예였다.
옥면마존(玉面魔尊)―!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신비한 미청년(美靑年).
그 역시 인세에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허나 추명은 역시 알고 있었다.
그가 한 줄기 바람[風]을 안고 있는 거대한 팔황대마성좌의 주인이며, 오천 년 전의 주역.......
대륙의 끝 바람이 시작되는 곳으로 간 세력의 후예라는 것을.......
혁리혼을 포함한 네 명의 후예들.
오천 년 난세주역의 힘이 밝혀지고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추명의 입에서.......
“다음은 당금 무림을 난세로 이끌고 나갈 네 사람의 초인입니다.”
“......!”
혁리혼은 지금 넋조차 잃을 지경이었다.
‘이...... 여인이...... 어떻게.......’
추명은 혁리혼의 표정에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죽마인예(竹魔忍銳) 영목태랑( 木太狼)―!
동영(東瀛) 최고 인자막부(忍者幕府)의 일인자.
그는 이미 인간 극한의 경지에 도전해 인자로서는 전설의 환번(幻飜)의 경지를 넘어섰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 누구도 목을 내놓아야 한다.
그가 지닌 고도의 살인술(殺人術)은 이미 사상최고라고 평가된다.
마황제일존(魔皇第一尊)―!
그는 현세를 이끌어 나가는 마종(魔宗)의 위대한 주인이다.
가장 아름다운 사내...... 가장 아름다운 손을 지닌 사내.......
그러나 그 아름다운 얼굴과 섬세한 손은 곧 마종에게 있어 공포이다.
그는 강했다.
과거 대륙의 아홉 개 하늘이라고 불려진 십대천세의 구천세군의 합공을 단 십초에 꺾어 그들로 하여금 무릎을 꿇게 한.......
마황제(魔皇帝), 그는 마교의 주인이다.
그리고 명실공히 당금 중원대륙의 가공할 집권자이다.
흑뇌마자(黑腦魔子) 타하륵( 瑕勒)―!
흑양밀전주(黑陽密殿主).
그는 어둠의 주인이며, 검은 태양이다.
흑양밀전은 과거 삼천 년 천축의 군림좌였다.
그들은 온갖 인세에서 천대받는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허나 삼천 년 전 아극마세라 불리는 세가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힌 채, 묘강의 사화산(死火山)...... 그 끝도 보이지 않는 무저갱 속으로 버려졌다.
허나 그들은 벌레처럼 생을 연명해 마침내 삼천 년이 지난 현세에 모습을 드러냈다.
무서운 힘과 한을 품은 채.......
어쩌면 그들은 장차 가장 무서운 폭풍의 핵이 될지도 모른다.
혈군대마작(血君大魔爵) 아극탑막( 克塔幕)―!
천축의 삼천 년 이래 군림좌로 존재하고 있는 거대한 세력 아극마세( 克魔勢)의 세주(勢主).
혈황(血皇)?
그는 삼천 년 이래 가장 공포스러운 피의 군림시대를 천축에 이룩한 신화의 인물이다.
그는 강했다.
신보다도 더.......
여덟 명의 강자.
여덟 개의 별...... 팔황대마성좌!
혁리혼의 눈빛이 경악의 빛으로 순간 물들었다.
‘흑뇌마자 타하륵이...... 팔황대마성좌 중 일성좌(一星座)!’
흑뇌마자 타하륵!
혁리혼은 과거 그를 만나지 않았던가?
그 신비한 중년유생을.......
“그들은 오천 년 시공을 초월한 난세의 주역들로 당금 무림에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천기가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왕야께서는 절대 그들을 쉽게 보아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추명의 말은 끝났다.
끝으로.......
“아주 강한 것으로 이루어진 철루(鐵樓)라면 안에서 파괴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무너지는 순간 자신의 몸도 그 철루 속에 묻혀 다칠 테니까요.”
“......!”
“허나 밖에서 파괴하면 오랜 시일을 소요하기는 하나 오히려 여유를 갖고 쉽게 파괴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스스스.......
추명은 이내 치마 끝을 소리 없이 끌며 대전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의 마지막 말.
의미심장한 말이 아닌가?
“.......”
참으로 오랫동안 혁리혼은 망연히 추명이 사라져 간 대전의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늘 이 짧은 순간, 혁리혼은 너무도 이상한 추명을 보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망혼곡에서 한발짝도 밖으로 나간 일이 없는 그녀가 무림의 일에 소상히 알고 있다는 것도 그렇고, 무림인들조차 아직 모르고 있는 여덟 명의 가공할 인물에 대해 그렇듯 모조리 알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가장 혁리혼을 놀라게 한 사실은, 그녀가 믿을 수 없게도 하늘의 뜻...... 천기조차 정확히 읽어내고 또 그 천기에 대한 방비책마저 만들어 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러갔을까?
스스― 슥!
스슷.......
반로를 필두로 망혼곡의 주요 인물들이 대전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을 보고서야 혁리혼은 현실로 돌아왔다.
혁리혼은 아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아아...... 나는 가장 훌륭한 미주(美酒)가 황금의 독에서 익는 것이 아니라 가장 보기 흉한 흙토기 속에서 익어 간다는 옛말을 이제야 실감하고 말았다. 어리석게도.......”
혁리혼의 말은 꽤 오랫동안 넓은 대전 안에 여운처럼 맴돌았다.
* * *
천왕의 지고한 존좌에 오른 혁리혼을 향해 반로 등은 많은 말을 제기했다.
“왕야, 비록 본 천왕제군대척의 힘이 가공한 것은 사실이나 중원무림을 쉽게 보아서는 아니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중원은 넓습니다. 그리고 기인이사(奇人異士)와 잠룡들이 사막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습니다.”
혁리혼은 오랫동안 그들의 말을 들으며 묵묵히 앉아 있었다.
거대한 황금태사의에 앉아서 오만한 태도로.......
“특히 마교는 강합니다. 그리고 마황제일존은 무림사 이래 가장 강한 마(魔)의 주인이며, 중원대륙의 집권자로 평가되는 사람입니다.”
혁리혼은 아주 차갑게 웃었다.
“마교와 대별되는 세력은 어느 것인가?”
광유자의 허리가 급격히 꺾였다.
“마교와 손을 잡고 있는 천왕마성(天王魔城)입니다. 그들의 잠재해 있는 힘도 그렇거니와 성주인 제왕인마후(帝王印魔候) 마인도(麻印刀)는 과거 십대천세의 구천세군 개개인의 능력보다 두 단계 위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는 아주 강한 자입니다.......”
천왕마성!
그것은 당금 무림을 집권하고 있는 두 번째 세력으로 인지된 곳이다.
“큿...... 천왕이라......?”
혁리혼은 기묘하게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그의 눈빛은 점차 야수의 눈빛을 닮아 가고 있었다.
아주 차고 잔인한.......
“그 이름부터가 나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
“본좌는 천왕마성이 있는 그 자리에 천왕제군대척을 세우고 싶다. 마교보다도 더 크고 웅장하게...... 최소한 열 배 이상으로!”
― 천왕마성의 자리에 천왕제군대척을 세우고 싶다!
천왕의 군림존좌에 오른 혁리혼의 첫번째 무서운 패도지심(覇道之心)!
그것은 무서운 말이 아닌가.
혁리혼은 이를 드러내 놓고 웃었다.
아주 사악하고 잔인하게.......
“그런 후 마교(魔敎)...... 서서히 피를 말려 죽이리라! 나 대륙천자의 허락 없이 대륙의 집권자로 군림한 대가로......!”
― 나의 허락 없이 군림한 대가!
너무나 광오하지 않은가!
결정! 그것은 오천 년 무림사를 뒤엎는 또 하나 거대한 난세의 부름이다.
원단지일의 밤.
그것은 무서운 죽음으로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 * *
강서성(江西省) 창도성(昌都城).
오랜 역사의 흐름을 간직한 고도(古都).
과거 송조(宋祖)의 옛 성터로 송(宋)의 흥망성쇄를 역사의 상처처럼 지니고 있는 곳이다.
겨울의 황혼녘.
떨어지는 낙조는 몰락한 송조의 애조를 띤 채 파양호( 陽湖) 수면에 소리 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야트막한 구릉.
그곳에서는 창도성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지금 구릉 위에서는 세 명의 남녀노소(男女老少)가 노을을 받으며 창도성을 굽어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파양호 건너에 자리하고 있는 거대한 또 하나의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양호는 그 넓이만도 방원 수십 리에 걸쳐 있을 정도로 드넓다.
그리고 파양호를 따라 끝없이 펼쳐진 고루거각(高樓巨閣)의 거성!
― 천왕마성!
뉘라서 이 거대한 성을 모르랴.
수백년 동안 중원무림계를 집권해 온 하나의 가공할 마성.
모든 마는 그곳으로부터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마의 원조가 바로 그곳이다.
비록 지금의 마교의 힘에 물러나 마도의 두 번째 집권자로 전락해 있지만 일백만 마도최강의 고수와 천하에 일천여 분타를 거미줄처럼 깔고 있는 그들의 힘은 가히 가공, 그 자체였다.
한 명의 맹인(盲人)과 한 명의 낙척유생(落拓儒生).
또 한 명의 요요로운 여인.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천왕마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늑대의 눈빛처럼.......
휘리리링― 휘링―!
차가운 겨울의 삭풍이 주위를 휩쓸고 지난 직후, 그들 사이의 침묵이 깨졌다.
“첫번째 제물이다.”
두 눈이 없는 추악한 얼굴을 하고 있는 노인은 문득 소름 끼치는 무감동의 음성을 바람결에 흘려냈다.
“크크, 첫 번째 제물치고는 꽤 큰 놈이다. 마교보다는 좀 작지만.......”
낙척유생의 모습에 사팔뜨기는 괴이하게 두 눈을 굴리며 말을 덧붙였고, 그 뒤를 이어 요요로운 여인은 아주 요악하게 웃었다.
그녀는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작은 소리로 뇌까렸다.
“훗...... 저 속에 있는 놈들은 모두 짐승 같은 사내놈들이다. 그를 닮은...... 모조리 독으로 녹여 버릴 테다.”
이들은 바로 반로, 광유자, 그리고 화사가 아닌가?
천왕제군대척에 있어야 할.......
문득 반로의 신형이 지면을 차고 올랐다.
파아아―!
“이제 시간이 됐다. 가자!”
그의 뒤를 이어 광유자와 화사의 신형이 허공 위로 둥실 떠올랐다.
“새벽이 되면 천왕마성의 오십삼만 일천구(五十三萬一千九) 명의 마도최강의 고수가 마명록(魔名錄)에서 핏물로 지워진다. 그리고 사상최대의 불가사의가 조양을 받으며 천왕마성의 자리에 서리라!”
동시에 한 줄기 시퍼런 발광체가 그들의 신형과 함께 노을 속으로 솟구쳐 올랐다.
츄츄츄츄― 츅!
찰나 노을을 자욱이 메우며 천지사방에서 솟구쳐 오르는 흑영들.
보라!
파아아아― 아아―!
쉬이이이― 익―!
왈칵......!
무시무시한 죽음의 냄새가 순식간에 파양호를 뒤덮었다.
믿을 수 없는 일.
그들 족히 십만여 이상이 되는 흑의인들이 파양호의 수면을 일 장여 높이로 비등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천 장에 달하는 파양호의 호수를 건너.......
천왕마성의 성루를 순찰하던 경비무사들은 어리둥절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와아― 웬 놈의 새 떼가 저리도 많이 날아들지?”
“까마귀인가 본데...... 아주 더러운 흉조(凶鳥)군.”
“글쎄 까마귀 같기도 하고...... 아...... 아니! 저것은 사람...... 저...... 적(敵)이...... 커억!”
세 명의 순찰무사는 한순간 그것이 까마귀가 아닌 사람이라는 사실을 느끼는 순간 목에 화끈한 통증을 느끼며 거꾸러졌다.
“카흑!”
“끄으으...... 으...... 이럴 수가, 인간이 허공을 날아...... 그것도 수천 장 수면 위로.......”
퍼퍼퍼― 퍽!
머리통이 그대로 부서지며 핏물이 노을 속으로 확 번져 올랐다.
소름이 쫙 끼치는 노을 속의 전율할 공포!
그것이 시작이었다.
“크와와와왁!”
“커― 헉―!”
“저...... 적이다! 웬 놈들...... 카― 악!”
가공할 죽음의 빛이 노을을 꿰뚫고 피어올랐다.
그곳은 바로 천왕마성의 심부(深部)였다.
* * *
아름답기로는 서호(西湖)가 제일이고, 넓기로는 동정호(洞庭湖)가 중원제일로 꼽힌다.
고요하기로는 홍택호(洪澤湖)가 꼽히고, 파양호는 그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특히 노을을 담고 있는 파양호의 아름다움은 신선도 취한다고 했다.
“너는 저 노을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사내.
중년의 모습에 중원의 복장을 하고 있지 않은 그는 동영 특유의 무복을 하고 허리에는 긴 죽검을 차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아주 차갑고 무표정했다.
흡사 영원히 녹지 않을 듯한 얼음처럼.......
소녀는 사내의 말을 조용히 들으며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참으로 특이한 미모를 갖고 있었다.
한 송이 백화(白花)처럼 깨끗한 아름다움과 거의 표정이 떠오르지 않는.......
흡사 바보와도 같은 백치미(白痴美).......
소녀를 향한 사내의 음성은 차가우나 아무도 모르는 슬픔이 앙금처럼 깔려 있었다.
“노을을 좋아해서도 안 된다!”
“.......”
“저 노을을 좋아하게 되면 너는 퇴폐적이고 천한 여인이 된다.”
“.......”
“알겠느냐, 미랑?”
헌데 문득 표정이 없던 소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미소.
하늘 아래 이렇듯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미소가 또 있을까 싶은데.......
소녀의 미소는 뇌살적인 백치미를 담은 너무도 아름다운 미소였다.
‘아니에요, 자공(刺公)...... 어쩌면 저는 이 노을을 좋아하게 될지도 몰라요.......’
눈.
그녀의 호수처럼 맑고 아름다운 눈망울은 꿈꾸듯 젖어 있었다.
사내는 그녀의 눈빛에 기이한 빛을 띠며 소녀가 향하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그의 꽤나 무표정한 얼굴이 잔경련을 일으켰다.
쏴아아아― 아아―!
처― 얼썩!
사납게 파도는 거대한 바위에 머리를 부딪힌다.
바위.
그 위의 한 사람.
노을 속에서 그는 흡사 하나의 불덩어리처럼 타오르는 듯 보였다.
‘서생......?’
사내는 바위 위에 우뚝 선 채 까마득히 노을 속 저 건너 아물거리는 천왕마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마에는 하늘을 닮은 푸른 유생건을 질끈 동였고, 일신에는 순백의를 단아하게 입고 있는 서생.......
서생의 용모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아주 유약한 전형적인 서생의 모습.......
허나 그것은 정녕 기이한 일이다.
차츰 시간이 흐르며 서생을 바라보는 사내의 면도날처럼 얄팍한 입술 끝이 이지러졌다.
‘야수를 닮은 자다. 흡사 황혼을 바라보고 있는 한 마리 늑대를...... 기이한 일이 아닌가. 보잘것없는 나약한 서생에게서 이런 야수의 느낌이라니......!’
사내는 서생의 모습에서 아주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야수의 인상을.......
그리고 점차 그는 황혼 속에 서 있는 서생에게로 향한 무한한 이끌림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은 마력이다! 보는 이의 혼을 잡아끄는......!’
이글거리며 하늘의 한편을 태우고 있는 노을.
그는 그 노을을 두 눈에 담고 있었다.
그에 따라 그의 고요하기만 한 두 눈이 붉게 물들며 타오르고 있었다.
‘노을이 좋다. 피처럼 붉은 중원의 노을이...... 저 노을을 보고 있노라면 나의 혈관 속에 잠자고 있는 투혼이 잠을 깨기 때문이다.’
문득 그는 파도치는 파양호의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도 노을은 아주 빨갛게 물들어 일렁이고 있었다.
― 왕야, 당신을 제외한 칠황대마성좌를 경계하셔야 합니다. 그들은 강한 자들입니다. 머지않아 그들은 오천 년 시공을 초월한 가공할 난세를 부르고야 말 것입니다!
그는 한 여인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주 추악한 여인의 말을.......
혁리혼.
서생의 모습에 황혼 속에서 환상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그는 바로 혁리혼이었다.
너무도 아름다운 용모.
그는 그런 아름다운 용모 위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처절하리만치 퇴폐적인 미소.
‘훗...... 허나 난세를 일으키는 폭풍의 눈은 나의 손안에 있다. 추명, 너는 그것을 아느냐?’
저주와 추악함을 운명처럼 타고난 여인 추명......!
‘그리고 나의 손은 이미 바람을 일으켰다. 미약한 바람을...... 허나 그것은 곧 무서운 폭풍으로 변할 것이다. 무서운 폭풍...... 난세의 문을 여는!’
문득 그는 파양호 건너 아득하게 보이는 천왕마성의 거대무비한 성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는 이미 어릴 적부터 나 자신에게 약속을 했다. 이 광활한 대륙을 놓고 한판의 도박을 거는 승부사(勝負師)가 될 것을.......’
그의 천왕마성을 바라보는 눈빛은 서서히 야수의 그것을 닮아 가고 있었다.
‘승리할 것이다. 만약 패한다면...... 죽으리라! 무장으로서 가장 영광스럽게!’
그때 돌연 꽤나 차갑고 무심한 음성이 혁리혼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자네는 아주 강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로군.)
그것은 한 줄기 전음이었다.
‘이것은 동영비전(東瀛秘傳) 인자가문의 전설로 내려오는 자하마인심어(刺瑕魔印心語)!’
혁리혼의 눈가엔 잔파문이 일었고, 천천히 전음이 시작된 곳을 향해 시선이 돌려졌다.
한 명의 낭인(浪人)과 소녀.
백여 장 떨어진 곳에 그들은 노을을 받으며 혁리혼을 바라보고 있었다.
‘낭인.......’
혁리혼의 눈빛이 아주 차게 물들었다.
거의 일신에 기도랄 수도 없는 평범한 기운을 지닌 모습에서.......
불현듯 가공할 느낌을 받은 것은 기분 탓인가?
‘일개 낭인의 모습에서 무형의...... 칼의 기운을 느끼다니......!’
칼의 기운!
‘저자는 최소한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극한의 경지를 한 번쯤은 초월해 본 경험이 있는 인물이다.’
일순 혁리혼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비틀렸다.
‘죽검!’
그는 낭인의 허리에 차여져 있는 긴 죽검을 발견한 것이다.
어찌 보면 아무런 의미도 주지 않을 죽검을.......
허나 혁리혼의 눈빛은 죽검에 이르러 강렬하게 순간적인 빛을 뿌렸다.
정적.
낭인과 혁리혼의 사이에는 일순 기괴한 정적이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파도와...... 노을과...... 사람의 존재까지 멈추어 버리는...... 모든 것이 한순간 정지된 그런 느낌의 정적이.......
‘나도 모르게 저자가 뿜어내는 이상한 마력에 걸려드는 듯하다.’
낭인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에 있는 죽검의 손잡이를 꽉 거머쥐었다.
‘이것은 극고무상(極高無上)의 경지에 이른 부동심법(不動心法)...... 그 가공할 검도지경에 이른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땀.
죽검을 잡은 낭인의 손아귀로 질펀한 땀이 흘렀다.
‘그렇다면 저자가 그런 무서운 경지에......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기도.
혁리혼에게는 기도랄 수 있는 특이한 것이 없었다.
있다면 유약하기 이를 데 없는 서생의 모습이 아닌가?
정적은 꽤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어둠이 파양호의 수면 위로 내려앉을 때까지.......
낭인의 손목을 잡은 소녀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아름다운 사내다. 노을보다 더.......’
허나 그녀는 어느 순간 아쉬운 가슴을 두 손으로 거머쥐었다.
혁리혼은 이미 시선을 돌린 것이다.
이미 어둠은 대지를 휩싸고 꿈틀거렸다.
순간 그 어둠 속으로 무언가 확! 하고 엄청난 불길이 솟구쳐 올랐다.
‘천왕마성이?’
낭인의 눈빛이 놀람으로 치떠졌고, 그의 시선은 엄청난 경악과 불신을 담고 있었다.
보라!
수백년 마도의 집권자로 군림해 왔고, 당금에 이르러서도 마교와 함께 마의 양대산맥이라 할 수 있는 천왕마성이.......
엄청난 화염 속으로 서서히 파괴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불바다[火海]!
파양호는 어둠 속에서 순식간에 엄청난 불길을 투영하고 있었다.
콰아― 콰아― 콰아―!
우르르르― 릉!
천왕마성!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어둠과 화염 속의 천왕마성을 바라보던 혁리혼의 입에서 아주 조그만 음성이 흘러 나왔다.
“후훗...... 강하지 못하면 꺾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빙글.......
그리고 그는 몸을 돌려 천천히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일순 그가 낭인과 소녀를 한 번 힐끗 바라보는가 싶자, 그의 신형은 이내 어둠 속에 묻혀 버렸다.
슷―!
부르르......!
낭인은 일순 전신에 가는 진동을 일으켰다.
“무...... 무슨......!”
그는 조금 전 혁리혼의 마지막 뇌까림을 분명히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나직한 뇌까림이었지만 낭인은 일신에 추측할 수 없는 내력을 지닌 사람이다.
백 장 밖의 낙엽 지는 소리마저 천둥 소리처럼 들을 수 있는.......
“그렇다면 그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경악과 회의의 시선으로 그는 혁리혼이 서 있던 거대한 바위와 파양호 건너에서 무섭게 불길이 치솟아 오르는 천왕마성을 바라보았다.
화르르르르― 릉―!
콰아...... 콰아.......
불길은 흡사 독사의 혓바닥처럼 어둠을 핥고 있었다.
“그럼...... 그가 바로 저 천왕마성을 붕괴시킨......!”
그냥 이와 같은 생각이 든 것은 예감이었을까?
얼마나 어둠과 침묵이 계속되었을까?
일순 낭인은 어둠 속에 차디찬 냉기를 부어 놓고 말았다.
“중원무림에...... 무서운 효웅(梟雄)이 있었다! 아주 무서운...... 으음.......”
그는 문득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
그녀는 혁리혼이 사라져 버린 어둠을 향해 꿈결 같은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사랑을 처음으로 배운 여인의 몽롱한 눈빛을.......
‘아아...... 나 죽마인예(竹魔忍銳)가 중원에 온 것은 어쩌면...... 커다란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소녀 미랑의 꿈에 젖은 시선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미랑...... 이 아이의 아픔을 더욱 크게 만드는.......’
무슨 말인가?
알 수 없는 말들.......
하나 분명한 것은 소녀 미랑은 이제 영원히 노을을 사랑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헌데 죽마인예라고 했는가?
낭인은 자신을 가리켜 그렇게 말했는가?
이 이름을 기억하는가?
추명이 말하던 여덟 명의 인물...... 그 속에 기록된 죽마인예 영목태랑!
동영 최강의 인자대부(忍者大父)인 그!
“아...... 아.......”
어둠은 뜻 모를 영목태랑의 탄식을 안고 이내 사위를 완전히 먹물처럼 덮고 말았다.
혁리혼과 죽마인예가 떠난 파양호의 호변.
쏴아아아― 처얼― 썩!
어둠을 깨치는 파도만이 공간을 뒤흔든다.
그때였다.
스슷.......
하나의 가냘픈 인영이 어둠 속에서 호변으로 흘러내렸다.
여인.
어둠에 가려져 용모는 볼 수 없으나 그녀의 몸에서는 꽤나 차가운 기운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혁리혼이 사라진 어둠을 향해 이를 갈아붙였다.
“분명 그 자식이라고 했다, 아버님은! 내가 장차 언니와 함께 저 자식의 여자가 될지도 모른다고? 흐흥!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
그녀는 어둠 속에서 주먹을 쥐어 보이며 중얼거렸다.
“제까짓 자식이 감히 나를......? 네놈의 아가리에 칼이 들어간 다음에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나는 봐야겠다. 건방진 사내놈! 호호호.......”
그녀는 이내 살기 어린 미소를 흘리며 어둠 속으로 신형을 뽑아 올렸다.
“감히 흑양밀전의 작은 주인인 나를...... 어떤 놈이 갖는단 말인가? 나는 사내놈들 따위는 발가락 사이에 끼고 다닐 텐데.......”
그녀는 꽤나 여유만만한 웃음을 흘리며 점차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헌데.......
흑양밀전?
그것은 바로 어둠의 태양!
바로 묘강으로부터 폭풍을 지니고 온 사내 타하륵!
흑뇌마자 타하륵의 가공할 세를 말함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녀는......?
무언가 처음부터 괴이하게 꼬이고 있었다.
묘한 곳에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