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11 章 虛無인가요, 아픔인가요......?
카아아아― 카아―!
위이이이― 잉―!
“크크...... 큿...... 망혼곡, 그곳을 진정 혼을 잃어버린 죽음의 곡으로 만들어 주겠다.”
퍼퍼― 퍽!
머리통이 바수어져 어둠 속으로 귀신의 날갯짓처럼 터져 올랐다.
“카카― 카...... 미친 자식! 지옥에나 가서 그런 소리를...... 커억!”
허나 그는 욕설을 터뜨리다 이내 목이 썩둑 잘려 날아가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하얗게 웃고 있는 칼에 의해서.......
망혼곡 인물들은 수백년 동안 대대로 오직 무공에만 미쳐 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강했다.
그냥 강한 것이 아니라 아주 강했다.
허나 인간의 체력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으으...... 미쳤다! 이놈들은 망혼곡 사람들보다 더 미친 놈들이다!”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밀려들다니? 죽음에 미친 놈들이다.”
쐐애애액!
카츠츠― 츳―!
미친 듯한 칼바람, 그것은 이미 피바람이다.
그 속에서 망혼곡 인물들은 피를 물고 거꾸러져 갔다.
찌르르― 릉!
퍼― 억!
“큭! 이런 빌어...... 먹을.......”
광유자는 구천황야 중 오야(五爺) 혈전마군(血箭魔君)의 마혈전(魔血箭)에 의해 허벅지에 바람구멍이 나고 말았다.
“흐흐흐...... 광유자, 이제 네놈의 목에 바람구멍을 내주면 아주 예쁘겠는데?”
“육시랄...... 놈의 자식! 지금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냐?”
꽈아아아아― 아―!
그는 어둠을 발기발기 짓찢는 가공할 강기의 폭풍을 일으키며 혈전마군을 덮쳐 갔다.
“쥐포처럼 예쁘게 찢어 놓겠다! 네놈을! 샤― 앙!”
화사.
그녀는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비틀거리고 있었다.
허나 그녀는 자신이 초옥 주위에 펼쳐 놓은 수많은 사진(死陣)을 이용해 쉼 없이 독수(毒手)를 쳐냈다.
츄츄츄츄...... 츠와와왓!
“컥!”
“카으으...... 독이다! 저 계집년의 손에서 뿜어지는 것은...... 피햇!”
녹는다.
덮쳐오는 자들은 모조리 한줌 독물로 화하여 녹아 버리고 있었다.
“깔깔...... 버러지 같은 사내놈들! 씨를 말려 버릴 테다!”
그녀는 한 사내를 증오했다.
그녀는 그 사내한테 거의 칠년 동안이나 숨 한번 제대로 못 쉬고 당해 왔다.
지금 그녀는 화풀이를 모조리 토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주 이상한 일은.......
그녀는 그 증오하는 사내를 위해 지금 죽음을 무릅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촤촤촤― 촤―!
“끄어억―!”
“저 계집년은 독종이다...... 컥―!”
어둠과 죽음을 함께 동반한 채 몰려들던 인물들은 덧없이 머리통을 바닥에 처박으며 거꾸러졌다.
그리고 녹아 버렸다.
헌데 돌연 그녀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아― 악―!”
화사는 믿을 수가 없었다.
작금에 그 누가 이런 불가사의한 무형지독을 사용하는지!
그녀는 전신이 일시에 굳어지는 듯한 착각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구천황야 중 삼야(三爺) 독황노사(毒皇老士)......!”
순간 그녀의 앞에 어느새인지 한 음습한 늙은이가 그림처럼 서 있었다.
독황노사!
“끄끄끄...... 어린 계집년, 놀라운 독술이다. 내력만 증강시킨다면 본좌조차 어쩌지 못할.......”
“이...... 이.......”
“허나 애석하게도 오늘 네년은 죽어 주어야 하겠다.”
찰나 독황노사는 이미 화사의 몸을 쪼개어 들고 있었다.
“가랏―!”
콰콰아아― 콰아― 아―!
천지말살의 가공할 독강이 어둠을 모조리 혼돈 속으로 곤두박질치게 하고 말았다.
그 가공함이여!
허나 화사, 그녀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내력이 부족할 뿐이며 이미 독황노사보다 한단계 위의 정심한 독술을 지니고 있는 그녀다.
“죽여 버리겠다! 이 꼬질한 늙은이!”
동시에 화사의 두 손이 어둠을 쭉 밀어냈다고 느끼는 순간 무시무시한 독기가 독황노사의 독강을 파고들었다.
우르르르― 릉!
반로.
그는 비교적 온전한 상태였다.
허나 그는 구천황야 중 오천황야의 합공을 받으며 극한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흐흐...... 반로, 아니 패검비마후 사림! 천왕이 되신 단고, 그분을 도와라! 그렇지 않으면 네놈은 그 자리에 무덤을 파게 될 것이다. 환공이 그랬던 것처럼!”
“화...... 환공이......?”
카캇!
반로의 오천황야를 향해 그어지던 검이 그대로 허공에서 동작을 멈추며 굳어졌다.
너무도 경악한 탓이다.
“그...... 그놈이 죽었단 말이냐? 그놈이......?”
“카카...... 죽었다. 그것도 처참하게 아홉 군데의 바람구멍을 몸에 만들고...... 카카...... 캇.......”
“......!”
반로의 움푹 패인 눈이 일순 망연히 어둠이 깔린 허공을 향했다.
‘그놈을 죽이기 위해...... 오백 년 동안 칼을 갈았는데...... 그놈이...... 죽었다니......!’
그의 얼굴에 허무가 짙게 깔렸다.
그의 시꺼메진 얼굴이 오천황야를 향해 돌려졌다.
“으으...... 분하다! 나는 그놈을 자신의 손자놈의 칼에 죽게 하려 했는데...... 으드득! 누가...... 누가 죽였느냐?”
“우리가 죽였다!”
대답은 간단하고도 깨끗했다.
순간 반로는 자신의 몸 속에서 오백 년의 고통과 수고로움이 일시에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네...... 네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말겠다!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 나의 계획에 재를 뿌리다니!”
팟!
그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솟구쳐 오름과 동시, 그의 검이 발작적으로 오천황야를 쪼개어 들어갔다.
카카카― 카― 카아―!
소름 끼치도록 가공할 검세!
“발광인가?”
“크카카...... 허나 아무리 강해도 우리 구천황야 중 단 세 사람의 힘만 합하면 하늘 아래 적수는 없다!”
무서운 말이 아닌가?
빠빠빠― 빡― 번― 쩍―!
오천황야의 검은 이미 반로의 정수리를 다섯 조각으로 조각하여 버릴 듯 폭사되어 들고 있었다.
콰아아아...... 콰아.......
카카카― 캇!
“끄아아악!”
“커― 헉!”
망혼곡은 바로 지옥의 구유사문(九幽死門)이었다.
처참하게 몸이 쪼개어져 어둠 속으로 처박히는 망혼곡의 인물들.......
반로와 화사, 광유자!
그들은 구천황야의 합벽검진(合壁劍陣) 속에 갇혀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진...... 진이 뚫리고 있다. 아아...... 절망이다!”
“으으.......”
화사 등은 절망의 피 토하는 울부짖음을 터뜨렸다.
그때였다.
“당연히 뚫려야 한다. 본좌 단고의 힘이 작용했으니까.”
사내.
그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새하얗게 웃고 있었다.
단고.
그는 무황과 철황을 좌우로 대동한 채 이미 오랫동안 거기에 서 있었다.
“구천황야! 본좌가 저 초옥에 들어가 혁리혼, 그놈의 목을 베고 나온 후에도 그들의 목을 베지 못한다면 내 친히 구천황야, 그대들의 목을 먼저 베어 버리리라!”
단고는 무감동한 음성을 차게 내뱉으며 지면을 박찼다.
슷.......
슷...... 으.......
삼후태작은 동시에 무릎조차 굽히지 않은 채 허공을 가르며 초옥을 향해 날아갔다.
불가사의한 신법.
헌데 그때였다.
“단고, 나는 나의 목에 칼을 디미는 놈은 누구라도 살려 놓지 않는다. 바로 너처럼!”
시리도록 냉혹한 음성이 야음(夜陰)을 타고 피어오름과 동시......!
콰아― 콰콰―!
꽝!
초옥이 모조리 폭죽 튀듯 사방으로 박살이 나 흩어지며 뇌의 빛이 어둠을 찢었다.
카아아아―!
“헉!”
“누...... 누구......!”
삼후태작은 허공에 신형을 띄운 채 이 느닷없는 공세에 대경실색 신형을 십여 장 밖으로 꺾어 날렸다.
허나.......
“크아아아악―!”
“커― 헉!”
보라!
삼후태작.
단고를 비롯한 그들의 몸뚱이는 순식간에 여섯 등분이 되어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지 않은가!
가공할 쾌(快)!
삼후태작, 그들은 채 검조차 뽑지 못하고 그대로 즉사를 해버리고 만 것이다.
촤촤촤― 촤아―!
허공으로 뜨뜻한 핏물이 빗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헉! 저...... 저럴 수가......?”
“하악―!”
구천황야와 단고를 따르던 고수들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도록 경악성을 터뜨렸다.
대체 이것이 말이나 될 법한 상황인가?
삼후태작은 젖혀놓고라도 그들 중 단고, 그는 환공조차 능가하는 가공할 능력을 지닌 인물이다.
헌데 그들이 모조리 단 일검에?
놀란 것은 비단 그들뿐이 아니다.
망혼곡의 인물들은 이 급작스런 상황에 아예 혼을 빼놓고 있었다.
허나 다음 순간이다.
“소...... 소공야!”
“아아......!”
망혼곡의 인물들은 몸서리쳐지도록 기쁨의 탄성을 터뜨렸다.
그렇다.
이미 오래 전부터 거기 있었는 듯, 혁리혼은 어둠 속에서 삼후태작의 시체를 밟고 괴괴로운 모습으로 서 있었다.
혁리혼은 천기, 칠절성좌류의 기운을 자신의 몸 속에 모조리 융화시킨 뒤였다.
세 시진.
그 순간은 참으로 길고도 긴 시간이었다.
허나 탈태환골지경!
혁리혼은 수천년 무림사를 통틀어 그 누구도 이룩하지 못했던 불가사의한 경지에 이른 사람이 되었다.
우우우우― 우우― 웅―!
그의 전신에서는 일곱 가지 기광이 어둠을 밀치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빛은 너무도 신비한 빛이다.
‘아...... 소공야는 강해지셨다! 그것도 과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치......!’
‘저분의 신위는 과거 환공, 그분을 수십 배 능가하고 있다. 오오...... 환공, 그분의 능력도 인간을 초월한 것이거늘......!’
장엄했다.
혁리혼의 모습은 흡사 억겁의 세월을 지니고 있는 듯한 거대한 태산과도 같았다.
광유자와 화사는 몸을 떨었다.
일찍이 그들은 한 인간의 몸에서 이렇듯 장엄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
망혼곡의 사람들이 몸을 떨며 환호의 외침을 발할 때였다.
“후훗.......”
혁리혼은 팔짱을 낀 모습으로 구천황야 쪽으로 다가섰다.
순간 넋을 빼놓고 서 있던 구천황야의 얼굴이 썩은 돼지간처럼 변하고 말았다.
“다...... 다가오지 마라!”
“삼후태작을 단 일초에 죽이다니...... 으으...... 저건 사람도 아니다! 인간의 능력이 아니다!”
“다가서면 반로와 화사, 그리고 광유자는 죽는다!”
반로와 화사...... 광유자.......
그들은 이미 일신의 내력이 거의 탈진상태에 있었다.
구천황야의 아홉 자루 병장기는 그들 세 사람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약간의 변화만 준다면 당장 반로 등은 목이 잘려져 나갈 것이다.
허나 혁리혼은 그들에 아랑곳없이 반로를 바라보며 다가섰다.
저벅.......
“후훗...... 반로, 한 가지 나의 요청을 들어준다면 살아날 수도 있는데?”
“무...... 무슨......?”
“대답이 우선이오. 어쩌면 내가 그 청이라는 것을 말하기도 전에 당신의 목이 떨어져 나갈지도 모르니까.”
이미 완벽한 죽음의 상황.
앞뒤 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반로는 얼굴이 시꺼멓게 변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 좋다!”
“큿...... 당연하지. 당신은 아직도 할 수만 있다면 오백 년은 더 살고 싶어하는 욕심쟁이니까.”
농담까지 곁들여 가며 유유히 다가서고 있는 혁리혼.
구천황야는 이를 갈았다.
혁리혼의 모습은 완전히 자신들의 존재를 묵살해 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홉 마리 개새끼를 보고 있는 것보다도 더.......
“카카카...... 미친놈!”
“네놈은 지금 누구의 칼이 더 빠른지 시험하자는 것이냐?”
“더 이상 다가온다면 이놈들의 모가지를 모조리 잘라 버리겠다.”
구천황야는 발작적인 외침을 한마디씩 터뜨렸다.
허나 혁리혼은 아주 차갑게 웃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훗...... 글쎄?”
순간이다.
쌰― 앙―!
구천황야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반로와 화사, 광유자의 목을 쑤시고 들었다.
카카카카― 카아― 카아.......
버― 언― 쩍!
빠름!
도대체 이것을 무슨 빠름이라고 해야 하나?
구천황야의 세 사람 목을 끊어 가는 병장기는 그야말로 뇌광을 수십 토막으로 끊을 수도 있는 불가해한 빠름이었다.
그리고 한 줄기 빛이 아홉 줄기의 빛을 쪼갠 것은 동시였다.
츳―!
찰나다.
“컥― 크앗!”
퍼퍼퍼퍽― 파아......!
더도 덜도 아닌 아홉 마디의 비명과 아홉 개의 소름 끼치는 음향이 터졌다.
구천황야의 병장기를 움켜쥔 손이 손목부터 잘려져 그대로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가?
그들의 손목은 혁리혼이 자른 것인가?
그가 잘랐다면 언제 검을 뽑아 언제 구초검식(九招劍式)을 사용할 수 있었단 말인가?
가공할 빠름[快]이여!
“믿을 수 없다!”
“세상에...... 이런 공포스러운 빠름이.......”
“으으.......”
구천황야는 손목에 전해지는 엄청난 고통을 느끼지도 못한 채 극도의 경악으로 두 눈을 부릅떴다.
불신과 경악!
허나 엄연한 현실은 이내 그들의 전신을 전율의 폭풍으로 뒤흔들고 말았다.
털썩!
구천황야는 그대로 혁리혼의 발치 앞에 무릎을 꺾고 말았다.
“으으...... 소공야, 제발.......”
“다시는 배반을 하지...... 않을 것이오...... 크으.......”
혁리혼은 어둠 속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 놓고 웃었다.
“너희들의 목을 보존해 달라는 말인가? 하지만.......”
“......!”
혁리혼은 시퍼런 날이 선 검을 뽑아들었다.
“한 번 배반한 놈은 또 한 번 배반할 수 있는 것이지. 피 맛을 보면 그 맛을 못 잊는 것처럼.......”
동시에 그의 검이 허공을 쪼갰다.
칵― 카아―!
퍼퍼퍼퍽! 파앗!
“컥!”
“커― 컥―!”
구천황야의 목은 모조리 잘려져 바닥에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그 순간 혁리혼은 아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허나...... 너희들 수뇌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살려 준다.”
부르르.......
망혼곡의 인물들은 뼛골 시린 전율을 터뜨리고 말았다.
‘으으...... 대범하나...... 너무 잔인하다!’
‘소공야는 이미 과거의 사람이 아니다...... 완전히 야수의 기질과 성격을 갖추었다!’
허나 혁리혼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반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반로.......”
“잔인해졌구나, 네놈은!”
“살아가는 수단이 조금 바뀌었을 뿐이오.”
반로의 얼굴 가득을 메우고 있는 흉측한 검흔이 씰룩거렸다.
“네놈의 요청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이제 죽을 때까지 나를 도와야 한다는 것이오.”
“뭐...... 뭐......?”
반로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혁리혼은 그런 반로를 바라보며 차게 웃었다.
“잘못 말했소? 내가?”
“이...... 육시를 해 죽일 놈!”
반로는 얼굴이 시꺼메지며 몸을 떨었다.
“네 할아비를 죽이려고 육백 평생을 모조리 네놈에게 주었더니...... 이제 무어가 어쩌고 어째?”
“추명!”
혁리혼은 그의 이 갈리는 외침에 아랑곳없이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인지 혁리혼과 이 장여 떨어진 곳에는 한 여인이 조용히 서 있었다.
중인들은 혁리혼의 부름에 그제야 그녀를 의식하고 무심결에 시선을 돌렸다.
순간이다.
‘와악―!’
‘우욱! 저...... 저런 추물(醜物)이......!’
중인들은 순간 십년 전에 먹은 잡동사니가 토해질 뻔하는 것을 억지로 눌러 참았다.
추명, 그녀는 이제 십칠 세의 소녀가 되어 있었다.
허나 그 추함이라니......!
그 모습은 차라리 지옥유문을 들락거리는 악귀나찰의 모습이었다.
추명은 주위의 질린 시선에 아랑곳없이 혁리혼의 앞으로 다가섰다.
혁리혼은 고개를 돌려버리며 짧게 말했다.
“읽어라.”
“예.......”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며 한 통의 서찰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리혼...... 아쉽구나. 네 녀석을 만나 이런 서찰로 조손간의 이야기를 하게 되다니...... 허나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을지 모르나 너만은 이 할아비를 이해해 주려무나. 이 서찰을 네가 읽게 되는 때는 이미 할아비는 세상 사람이 아닐진저.......>
서찰.
그것은 바로 혁리혼에게 보내진 환공의 것이었다.
그 서찰은 혁리혼이 깨어나는 순간 추명에 의해 전달되었다.
<천기를 보아 나는 나의 생명의 불꽃이 꺼져 있음을 알았다. 이 해가 가기 전에 할아비는 죽을 것이다.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지금과 같은 순간들을 예측했다. 때문에 할아비는 천왕제군대척의 진정한 힘을 망혼곡에 버리는 아픔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리고 네 녀석까지도 나의 곁에 두지 못하고...... 삼후태작의 눈을 속여 망혼곡에 버리는 촌극을 벌여야만 했다.>
환공은 이미 오래 전부터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것을 안배해 놓은 것이다.
<나는 삼후태작에게 죽을 것이다. 그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하늘의 뜻이다. 나는 본가를 나의 존립을 마지막으로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가장 절친한 지기(知己)인 반로마저 망혼곡에 넣고 말았다. 그 사실이 나에게는 뼈아프다. 그에게 나의 뜻을 전해라. 나의 용서를...... 그리고 너는 그를 얻어라. 그는 강한 사람이다. 천하에서 세 손가락에 끼이는......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을 네게 남긴다.>
서찰 내용을 듣고 있던 반로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이...... 이.......”
추명의 서찰 읽기는 계속되었다.
<내가 네게 남기는 것은 우황(牛黃)과 한당(寒黨)이다. 그들은 바로 할아비의 분신과도 같은 아이들이다. 우리 가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더욱 찬연한 꽃을 피우게 되리라. 바로 너에게서! 허허...... 리혼, 이 할아비를 욕하고 있느냐? 할아비는 세상에서 가장 너를 사랑한다. 나의 생명보다도 더...... 마지막으로 부탁할 것은...... 이 할아비가 너를 사랑하는 것처럼 추명을 사랑하거라. 그 아이는 아주 신비하고 기이한 힘을 지닌 아이다, 리혼...... 나의 소중한 손자.......>
서찰은 끝났다.
주위 망혼곡의 인물들은 무거운 심정이 되어 침울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기이한 감회가 그들의 가슴을 철사줄처럼 파고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환공의 뜻에 따라 수대에 걸쳐 혼(魂)을 잃고 살아왔다. 허나......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저 서찰 한 통으로써...... 용이 될 것이다. 수백년을 누워 있다가 일어나는 잠룡(潛龍).......’
허나 한 사람.
그는 구름을 뚫고 치솟는 분노로 전신을 와들거리며 떨고 있었다.
“이...... 이 주리를 틀어 죽일 놈의 조손! 환공 와룡수...... 빠드득!”
그는 이를 갈았다.
생각해 보면 그는 오백 년 동안 환공의 계산 속에서 살아온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 후예에게 묶여 버리고 만 셈이다.
한 가지 청이라는 목숨을 맞바꾼 조건에 의해.......
반로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면서 악마처럼 웃었다.
“우...... 웃기는 놈! 와룡수! 내 당장 네 손자놈을 때려죽여 네놈의 제사상 위에 돼지 머리 대신 올려놓고 말겠다!”
칵―!
그는 가래침을 내뱉으며 칼을 뽑아들었다.
혁리혼은 그런 반로를 지그시 바라보며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반로, 당신은 이미 나의 청을 허락했었소.”
순간 반로는 피가 거꾸로 돌고 말았다.
“너...... 너...... 으으...... 이 교활한 여우 같은 조손.......”
꽈당......!
그는 마침내 땅을 베고 드러누워 버렸다.
가뜩이나 내력이 탈진된 상태에서 극도의 울화가 그를 기절케 만든 것이다.
그는 기절을 하고도 연신 헛소리처럼 외쳐대고 있었다.
“오...... 오백 년을...... 두 조손 놈에게...... 우롱...... 당했다...... 와룡수...... 네놈을 지옥까지...... 쫓아가서라도...... 모가지를 잘라...... 오겠다...... 이 육시를 할...... 놈.......”
반로를 바라보던 혁리혼은 이를 드러내 놓고 웃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옥을 가야 할 텐데? 잠시 자고 나면 당신은 절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오. 당신은 남달리 오래 살고 싶어하는 위인이니까!”
문득 그는 허공을 향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우황, 한당!”
순간 두 마디 절복(絶腹)의 대답이 허공에서 들려왔다.
“예.......”
“왕야!”
스― 슷!
슈르르.......
동시에 각각 검과 도끼를 지니고 있는 두 인물이 혁리혼의 뒤쪽에 내려섰다.
그들! 바로 주생과 우간이 아닌가?
술에 미친 놈과 계집에 미친 놈.......
그들은 변해 있었다.
아주 차갑고 무식한 모습으로.......
그들이 바로 환공의 숨어 있는 분신이었다.
문득 혁리혼은 여명이 희끄무레 눈발 속에서 비쳐드는 동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의 주검이 있는 곳으로 가자...... 나는...... 그분의 손을 잡아 봐야 이 가슴의 멍울이 풀릴 것만 같으니.......”
허무와 진하디진한 슬픔이 그의 야수 같은 눈 속에 앙금처럼 내려앉았다.
“......!”
“......!”
망혼곡의 인물들은 순간 이상한 감동 같은 것을 뭉클하게 받고 말았다.
돌아서는 혁리혼의 등에서.......
그들은 한순간 보았던 잔인함과 야수의 빛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아주 이상한 사내였다.
자신의 감정을 늘 숨기고 있는.......
사르르...... 륵.......
소리 없는 눈은 떨어져 혁리혼의 전신에 아프게 내려앉고 있었다.
눈[雪]이다.
원단지일(元旦之日)...... 새해를 맞는 눈.......
* * *
지옥의 차디찬 칼바람은 나의 정수리를 쪼개고 들었습니다.......
이것이 허무인가요...... 아픔인가요.......
아니면 내 운명의 고독인가요.......
당신의 주검을 찾아가는 나의 발길은 고통의 잔상이 되어 시리도록 하얀 눈의 비명을 만듭니다.......
휘류류류...... 류.......
하얗게 부서지는 눈송이는 새해의 아침을 수놓고 있었다.
개벽(開闢)의 밤은 지나갔다.
한 시대의 막을 올리는 개벽의 밤.......
그것은 한 마리 야수를 해산(解産)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