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9 章 刀의 웃음
― 검을 만드는 일은 흡사 차디찬 하늘처럼.......
이슬처럼 맑은 검신(劍身)의 빛을 차츰 네 마음속에 담아 가는 것이다.......
그것은 곧 칼의 마음이고, 눈[目]이다.
검혼(劍魂)의.......
땅...... 따땅...... 따...... 앙.......
혁리혼은 쉬지 않고 마광한옥빙괴를 두드렸다.
허나 마광한옥빙괴는 자국조차 나지 않았다.
‘벌써 한 달이 지났다!’
혁리혼의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반로는 그럴 때마다 칼끝 같은 음성을 내뱉었다.
― 바보 같은 놈! 네 혼이 담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 망치로 두드리는 것이 아니다! 마음[心], 네 혼(魂)으로 두드려야 하는 것이지!
망치를 잡은 손이 찢어지고 터진 것은 이미 오래 전이다.
진득한 피가 흘러 마르고, 다시 또 피는 줄줄 흘러내렸다.
반로, 그는 이미 옛날의 반로가 아니다.
패검비마후 사림이 되어 있었다.
아주 광적인.......
그는 혁리혼이 잠을 잘 때에도 따라다닌다.
그리고 광기 흐르는 얼굴로 혁리혼을 향해 외쳤다.
“이 멍청한 놈! 그 따위 정도로 나의 육백 년 혼을 사겠다고 했느냐?”
혁리혼은 그에게 자존심이란 자존심은 모조리 갉아먹히고 말았다.
‘빌어먹다 똥물에 머리를 처박고 뒈질 놈의 영감탱이! 물귀신같이 따라다니며 나를 못살게 굴다니! 이 칼이 다 완성되면 제일 먼저 저 늙은이의 모가지부터 잘라 봐야겠다. 얼마나 칼이 예리한지!’
* * *
망혼곡은 혼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모여 사는 대신 그들은 모조리 미친자들이었다.
그중에 주생(酒生)이라는 인물이 있다.
주생!
그는 술에 미친 자다.
그는 잠이 들었을 때에도 술이 담긴 호로병의 주둥아리를 물고 잔다.
“우후후후...... 미친놈!”
그는 대장간 앞에서 쓰러질 듯 불안한 모습으로 선 채 냉소와 조소를 한꺼번에 물고 있었다.
혁리혼을 향해.......
벌컥...... 벌...... 컥.......
“커억―! 끄윽...... 리혼, 나는 한 가지...... 끄윽...... 소원이 있는데.......”
주생은 헝클어진 머리에 유생건이 날아가 버릴 듯 덜렁거리는 몰골로 혁리혼 앞으로 다가섰다.
허나 혁리혼은 쉴새없이 망치질을 하며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땅...... 따앙.......
그러나 주생이 점차 가까이 다가섬에 따라 혁리혼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저놈...... 주생! 살기를 갖고 다가선다......!’
그랬다.
처음 그것은 느낄 수 없으리만치 미세한 것이었으나 주생이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그 살기는 혁리혼의 전신을 흡사 밧줄처럼 옭아매 오고 있는 것이다.
스― 윽!
“우후후...... 그 소원이라는 것은...... 끄윽...... 다른 것이 아니라...... 우후후...... 그렇게 미칠 수 있는 네 녀석의 머리를 쪼개 안주 대신 골수를 마셔 보고 싶다는 거지. 끄...... 윽...... 맛이 어떤가 말이야...... 크크큭.......”
마지막 웃음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혁리혼의 모골을 곤두서게 했다.
부르르......!
혁리혼의 몸이 마침내 진동을 일으켰다.
주생이 게슴츠레한 몰골로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나를 죽이려 한다.’
순간 혁리혼은 그 무시무시한 살기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찰나 혁리혼은 들고 있던 망치로 주생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슈우우욱―!
믿을 수 없는 빠름!
하나 환상처럼 주생의 모습은 거기에 없었다.
후루루루...... 루.......
그의 신형은 벌써 십여 장 뒤에 있었다.
‘놈은 고수였다! 그것도...... 무서운.......’
퍼― 억!
“컥! 아욱......!”
혁리혼은 경악을 채 끝내기도 전에 복부에 무서운 통증을 느끼며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반로의 머리통만한 주먹이 그의 복부를 후려친 것이다.
“어리석은 놈! 살기를 느꼈다 함은 곧 심마(心魔)를 견디지 못했다는 증거다!”
비틀.......
주생은 걸음을 옮겨 혁리혼에게 다가섰다.
“리혼...... 술을 주랴? 아예 미치는 데는 술이 최고지. 우후후후...... 킬.......”
혁리혼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복부를 쓰다듬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그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나는 분명 나의 혼을 망치에 심었었는데...... 모자랐던가?”
“......!”
주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진짜 미쳤다! 반로보다도 더......!’
혁리혼은 진짜 미쳐 있었다.
하나의 쇳덩이에.......
땅...... 땅...... 땅.......
* * *
정말이지, 나에게 지금 당장 소원이 무어냐고 어떤 놈이 물어만 준다면.......
나는 다른 것은 다 때려치우고 이렇게 말할 테다!
반로.......
저 발라먹고 싶은 영감탱이의 주둥아리를 발기발기 찢어 아예 영원히 말을 못하게 하고 싶다고.......
이건 진짜...... 참말이다.......
땅...... 땅.......
혁리혼은 아예 미쳐 버린 사람처럼 망치질을 해댔다.
반로는 그런 혁리혼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입을 열었다.
“리혼...... 너는 칠절성좌류의 기운을 장차 하늘로부터 받을 사람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
“......!”
땅...... 따땅...... 따아앙.......
“그때까지 너는 여섯 가지의 기운을 몸에 지녀야 한다. 그래야 천기를 받을 수 있을 테니까.”
“......!”
“그것은.......”
땅...... 따땅...... 따아앙.......
혁리혼이 내려치는 망치 소리를 비집고 반로의 입에서 말이 이어졌다.
월(月)의 기운.......
그것은 삼라만상을 통틀어 가장 극음의 기운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곧 만독의 극음지성(極陰之性)과 통한다.
만독은 바로 영생불사(永生不死)의 근원이니, 월의 기운은 영생불사지체(永生不死之體)의 초석을 가꾸어 준다.
수(水)의 기운.......
그것은 대자연의 이치이며, 물의 도리이다.
그것은 네 가지로 나뉘는데.......
고요히 심산계곡(深山溪谷)을 흐르는 계류(溪流)와.......
점차 빨라지는 급류(急流).......
마침내는 대지와 부딪혀 소용돌이치는 회류(廻流).......
그리고 천지개벽, 그 대자연의 미증유 거력에도 패하지 않고 오히려 동화되는 광풍폭류(狂風暴流).......
물의 힘은 곧 대자연의 힘을 준다.
목(木)의 기운.......
그것은 우주의 모든 초목(草木)의 기운이다.
그것은 영초(靈草), 영과(靈果)로 나타나고 다시 복용함으로 해서 무궁한 내력으로 나타난다.
금(金)의 기운.......
그것은 쇠[鐵]의 기운이다.
쇠의 기운을 몸 속에 얻음으로 해서 영원히 파괴되지 않는 불괴지신, 금강불괴지체(金剛不壞之體)를 얻는다.
토(土)의 기운.......
그것은 곧 땅[地]의 기운이다.
지맥의 힘이 땅 속을 흐르는 것처럼, 그 기운을 얻음은 곧 인간의 체내에 흐르는 사만 팔천구십 개의 혈도를 모조리 타통(打通)하는, 생사현관타통(生死玄關打通)을 이루게 된다.
일(日)의 기운.......
그것은 하늘의 기운이다.
광활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주는 하늘.......
그 기운을 얻음은 영규타통(靈竅打通)을 의미한다.
끊임없는 지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신의 두뇌를 얻는 것이다.
땅...... 따땅.......
반로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혁리혼의 망치 소리를 뚫고 너무도 선명하게.......
“너는 이미 화사에게서 모든 독공을 방법이야 어떻든 간에 배웠다. 그것은 곧 월(月)의 힘이다.”
“.......”
“또 광유자에게 무수한 영약을 훔쳐먹음으로 해서 목(木)의 기운을 얻었고, 다시 천지혼원심역법을 배움으로 해서 토(土)와 일(日)의 기운을 얻었다.”
“.......”
“그리고 너는 지금 노부에게서 금(金)의 힘을 배우는 것이다.”
“.......”
“수(水)의 힘만은 네가 직접 얻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화(火)의 기운을 하늘로부터 받는 날.......”
“.......”
“너는 칠절의 기운을 가장 극성까지 얻을 것이다. 하늘 아래 가장 완벽한 인간이 되는 것이지! 그리하면 네 몸 속에 인혼칠채사리(人魂七彩舍利)라는 내단이 생길 것이다!”
― 내단(內丹)!
인간의 몸 속에도 내단이 생길 수 있는 것인가?
놀랍고도 지고무상한, 그리고 아주 심오한 말들이 반로의 입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반로는 칼끝처럼 예리한 음성으로 못을 박았다.
“허나...... 네놈이 그것을 이루기 전에 잡념을 머릿속에 둔다면 너는 화(火)의 기운에 의해 죽으리라! 광유자와 화사, 그리고 노부의 수고에도 아랑곳없이.......”
순간이다.
꽝―!
혁리혼은 뒤통수를 후려치는 엄청난 충격을 착각처럼 느끼며 망연한 시선을 반로에게 주었다.
“지...... 지금 뭐라고 했지?”
허나 반로는 이미 방안으로 사라진 뒤였다.
화르르르륵―!
화덕 속의 불길은 아예 광란하듯 타오르고 있었다.
“광유자와 화사...... 반로의 수고로움이라고......?”
혁리혼의 눈빛이 타오르는 불길처럼 요란하게 흔들렸다.
반로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럼 화사와 광유자가 나에게 무공과 영물영약을 도둑당한 것은 나의 뜻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뜻에서였단 말인가!’
이것은 간단한 듯하나 엄청난 차이가 있는 말이다.
‘그들이 왜...... 나에게 그렇듯 엄청난 것을 일부러 주려 했단 말인가?’
끝없는 의혹이고 혼돈이었다.
그 혼돈 속으로 반로의 음성이 차게 스며들었다.
― 네가 얻은 월, 목, 금, 토, 일의 기운은 아직 불완전한 것이다!
― 수의 기운을 얻은 뒤 네놈의 머릿속에 잡념이 들어 있다면 화의 기운을 하늘로부터 얻는 순간 네놈은 죽는다!
혁리혼은 입술이 이지러지고 말았다.
‘모르겠다, 아무래도...... 그들이 왜 나에게 그렇듯 엄청난 것을 주려 했는지...... 일백팔(一百八) 가지의 가공한 독제(毒製), 독용(毒用)의 수법...... 그리고 그것을 응용하는 갖가지 살상수법은 화사의 모든 것이고, 칠년 동안 내가 광유자에게 훔쳐 배운 그의 독창기예 십만(十萬)은 내가 빼앗아 먹은 구백팔십칠(九百八十七) 가지의 영물영초와 함께 그의 모든 것이었다!’
― 일백팔 가지의 독을 만드는 법과 사용법...... 그 엄청난 응용의 살상법!
― 광유자가 창출한 십만기예, 구백팔십칠 가지의 영약영물!
칠 년.......
혁리혼이 망혼곡에 들어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것으로 소화해 버린 것들이다.
‘허나 상관하지 않겠다. 나의 목표는 오직 하나...... 그리고 생각하는 것도 오직 하나...... 환공을 꺾는 일이다!’
날이 선다.
칼날이.......
아침의 영롱한 이슬처럼.......
투명하고도 아름다운 칼날이여.......
반로의 육백 년 혼과.......
너 검의 혼과.......
나의 혼이 여기 살아나고 있다.......
‘으으...... 무섭다! 저놈이......!’
반로는 몸을 떨고 있었다.
두 눈.
눈알이 뽑힌 텅 빈 동공을 일그러뜨린 채.
‘나는 육백 년 동안 혼을 넣으려 했으나 안 되었다. 헌데 몇 달 만에.......’
그는 오감의 예민함으로 느끼고 있었다.
혁리혼에 의해 마광한옥빙괴가 점차 그윽한 마기를 발산하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음을.......
‘나의 계산이 잘못되었다. 저놈이 저렇듯 빠르게 만들 줄이야...... 놈은 너무 무섭고도 빠르게 큰다!’
땅...... 따...... 앙.......
혼을 부르는 소리.
그것은 혁리혼의 망치 소리가 아니다.
검혼을 부르는 소리다.
혁리혼, 그는 변해 있었다.
얼굴은 화덕에 데어 추악하게 이지러지고 물집이 생겼다.
손은 뭉그러져 피고름이 흐르는데.......
단 한군데, 그의 두 눈은 시퍼런 날이 선 칼처럼 빛나고 있었다.
무섭도록 극강한 쇠의 기운을 그는 이미 몸 속에 넣고 있는 것이다.
‘후후후...... 후...... 나는 이제 쇠의 마음을 안다...... 가장 단단하고 강하며, 차갑고, 잔혹한 쇠의 마음을.......’
땅...... 따...... 앙.......
* * *
휘이이이― 위잉―!
살갗을 얼리고 뼈마저 동결시켜 부수어 버릴 듯한 삭풍.
겨울의 차디찬 서리가 그의 몸에 돋아 있었다.
허나 그는 그 매서운 한기를 잊은 지 오래다.
그는 이상하게 웃고 있었다.
“으흐흐...... 후후...... 크큿.......”
시퍼렇게 날이 선 완성된 검을 바라보면서.......
그것은 칼[刀]의 웃음[笑]이다.
혁리혼의 웃음은.......
“큿...... 너는 이제 나의 분신이다. 나의 혼을 갉아먹으며 태어난 놈......!”
허나 그 웃음이 끝나는 순간 혁리혼은 이미 대장간 안에 없었다.
그는 어디론가 미친 듯이 뛰쳐나가 버린 것이다.
남아 있는 것은 혁리혼의 망치와 꺼져 가는 독사의 혓바닥 같은 새파란 불꽃, 그리고 경악에 찌든 반로의 얼굴뿐이었다.
‘으으...... 칼에서 죽음의 냄새가 풍긴다. 저놈은 무섭게도 칼에 죽음의 혼을...... 사혼(死魂)을 불어넣었다! 저것은 패(覇)...... 검(劍)이다! 가공한......!’
패(覇)― 검(劍)―!
반로는 전신이 벼락에 꿰뚫린 듯 몸을 진동하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으으...... 설마 저 짐승 같은 놈이 패검을 만들 줄이야...... 아무도 가로막을 수 없는......!”
* * *
눈[目].
그의 두 눈은 물위에 둥둥 떠 있었다.
계류의 흐르는 물위에.......
혁리혼은 눈에 핏발을 곤두세웠다.
‘물의 기운...... 물의 마음이라고......? 벤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의 혼이 담긴 이 검으로!’
졸졸...... 졸.......
발에는 이미 감각이 없었다.
얼어 버린 것이다.
벌써 며칠 동안 그는 그렇게 서 있었던 것이다.
미친 사람처럼.......
사흘...... 나흘...... 닷새.......
칠주야(七晝夜)도 넘었을 듯싶다.
까칠한 입술과 얼어 버린 몸뚱이.
희미해지는 육신의 혼.......
그러나 정작 늘 별볼일 없이 보아 왔던 계류......!
그 조그만 물줄기를 그는 베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몸을 떨고 있었다.
추워서가 아니다.
몸과 뼈를 동시에 얼리는 고통 때문이 아니다.
“으으...... 어떻게 벤단 말인가? 이 끊임없이 흐르는 물을......!”
맨 처음 벤다고 확신했던 그의 생각은 미풍에 날리는 먼지처럼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어떻게 물의 마음을 알고...... 어떻게 물의 힘을 자를 수 있다는 말인가? 끊임없이 흐르는 것처럼 물의 힘은 그 무엇으로도 영원히 막거나 끊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제서야 알았다.
이 보잘것없는 작은 계류 속에도 수십만 광음(光陰)과도 같은 억겁의 연륜이 있음을.......
그것은 영원히 인간의 힘으로 파괴할 수 없는 것이다.
어찌 한낱 인간의 힘으로 억겁의 세월을 자를 수 있으랴!
조그만 보잘것없는 계류는 바로 억겁의 세월이며 대자연의 힘인 것이다.
“으으...... 나는 어리석었다. 한낱 조그만 돌[石]에도 생명이 있고, 위대한 대자연의 숨결이 담겨 있음을 몰랐다!”
혁리혼은 칼을 잡은 손을 격렬하게 떨었다.
“나는 그 보잘것없다고 느낀 돌멩이와...... 이 계류에 비해 얼마나 왜소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인가......!”
그는 문득 하나의 영상을 떠올렸다.
“반로(半老).......”
그 보잘것없는 왜소한 반로의 얼굴이었다.
그는 물위에 환영처럼 떠올라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 어리석은 놈! 이제야 알겠느냐? 쿠쿠쿠...... 크캇캇캇...... 나의 육백 년 혼이 비로소 거기에 있음을......!
― 나의 평생을 다 바쳐 풀지 못했던...... 이겨내지 못했던 대자연의 힘! 그 속에 나는 인간...... 나 반로의 절망과 함께 혼을 묻고 말았다. 그래서 내 혼은 죽어 버렸던 것이지!
― 만약 그 대자연의 미증유 거력을 티끌만치라도 깨우쳤다면 나는 절대 네놈의 할아비에게 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아...... 이것은 혼돈이고 대허무(大虛無)다......!”
혁리혼은 계류 속에 비치는 시퍼런 하늘을 허망한 시선으로 쫓고 있었다.
위이이잉― 위잉―!
휘리리릭.......
깊어지는 겨울의 삭풍은 매섭다.
하나의 육신을 얼려 바수어 버리기에는 아주 쉬울 만큼.......
혁리혼은 전신이 얼음처럼 꽁꽁 얼어 버리고 말았다.
허나 동사(冬死)해 죽었어야 옳은데, 오히려 그의 정신은 끝없이 맑아진다.
이는 어인 일인지.......
‘혼이 나를 부른다. 내가 죽어가지 않도록...... 혼이......!’
그는 대자연에 서서히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바로 부동(不動)의 묘리를 깨우치면서.......
― 부동의 묘리!
억겁과도 같은 순간들을 극한의 고뇌와 회의로 이겨내면서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것을 깨우치고 있는 것이다.
문득 혁리혼은 아주 조그맣고 작은 음성을 자신도 모르게 뇌까렸다.
“보이는 것은 순간의 고통과 고뇌다. 허나...... 눈을 돌리면 그곳이 진리(眞理)요, 피안(彼岸)이니......!”
분명코 그것은 어떤 영감이었으리라.
무섭게 본능의 뇌리를 뒤흔드는!
그리고 육신의 저 심연(深淵)한 밑바닥으로부터 엄청난 기세로 솟아오르는 한 줄기 빛과 희열은......!
우르르르― 릉!
혁리혼의 몸이 거센 폭풍을 만난 듯 뒤흔들렸다.
“아아...... 보인다! 모조리......!”
대각(大覺)!
불가(佛家)가 말하는 대각의 묘(妙)...... 그 엄청난 깨우침이 한순간 그의 전신을 노도처럼 휘감고 말았다.
“인간처럼 우매하고 고집스럽지 않은...... 부딪치는 것은 파괴하지 않고 유연히 돌아가는...... 타협할 줄 알고...... 오만하지 않으나 때로는 유함 속에 미증유의 거력과도 같은 무서운 잔인함이 담긴......!”
거대한 깨달음, 대각의 검(劍)도 느꼈음인가?
우우우우― 웅!
검이 운다.
엄청난 용틀임을 터뜨리며.......
검은 신검이며 쾌검이다.
“아아...... 그것이다! 물은 마음[心]...... 물의 힘은...... 어이해 이 간단한 진리를 나는 우매하게도 몰랐던가?”
번― 쩍―!
혁리혼은 검을 치켜 올렸다.
그의 두 눈에서 흐르는 기운은 차라리 검의 번들거리는 죽음의 예기!
“그리고 또 있다. 비록 손바닥만한 넓이의 계류에 지나지 않으나...... 저것은 하늘을 담고, 한 마리 짐승도...... 저렇게 나의 몸도 자연스럽게 담아 비추는 깊이를 추측할 수 없는 포용감!”
혁리혼의 두 눈에서 번들거리던 집요한 죽음의 예기는 순간 무궁한 장중의 빛으로 물들어 갔다.
대자연의 모든 것을 포용해 버리는 눈...... 눈!
순간이다.
“벤다! 물의 기운을!”
혁리혼의 입에서 천년을 머금은 심연한 외침이 터졌다고 느끼는 순간.......
카아아아― 카아― 카아―!
버― 언― 쩍!
그의 검이 하늘의 허리를 끊으며 검풍을 일으켰다.
“흐르는 마음은 곧 물의 마음이고, 그는 곧 검의 마음...... 유수만겁(流水萬劫)― 겁(劫)!”
검도 미쳤고, 사람도 미쳤고, 검에 의해 가루로 잘게 부서져 허공에 흐드러지는 초목과 돌가루도 미쳐 날뛰었다.
콰아...... 콰아...... 콰아.......
순간이다.
보라!
계류.......
믿을 수 없게도 흡사 딱딱한 고체처럼 모든 흐름을 멈추며 수천만 분수가 되어 쪼개지고 있는 것이다.
쩌― 억― 쩌― 쩌― 쩍!
불가사의.
엄청난 불가사의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허나 그것은 순간의 착각처럼 계류는 또다시 흐른다.
슈슈슈슈...... 슈.......
‘다음은 급류와 회류...... 그리고 폭류―!’
혁리혼은 이미 거기에 없었다.
미친 듯한 광소를 터뜨리며 혁리혼은 이미 어디론가로 미친 듯이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크하하핫― 하핫!”
* * *
“아흑...... 아...... 아.......”
비음.
여인의 속살처럼 부드럽고 심혼조차 앗아 버릴 비음은 자지러질 듯 벌려진 입술 사이로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여인의 입이다.
쏴쏴쏴쏴― 쏴아―!
억수같이 퍼부어 내리는 겨울비.
여인은 뼈를 얼리는 차가움도 느끼지 못하는 걸까?
나신!
시리도록 새하얀 나신 위로 비는 쏟아지는데도......?
꽃뱀[花蛇]이었다.
여인은 그렇게 사내의 거구를 휘감고 자지러질 듯한 교성을 터뜨리고 있었다.
“아학.......”
“헤헤헤...... 개는 짖어야 개처럼 보이듯이...... 계집은 역시 너와 같은 아름다운 음률이 흘러야 된다.”
거구의 사내는 여인의 몸을 바수어 버릴 듯 짓누르며 이를 드러내 놓고 웃었다.
우간.
망혼곡 사람들은 청년을 그렇게 불렀다.
계집과 색(色)에 미친 놈!
그는 밥 먹을 때나 잠을 잘 때도...... 그리고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급한 순간에도 계집을 생각하는, 그 방면에 아예 미쳐 버린 놈이다.
“헷헷...... 네년까지...... 이제 망혼곡에서 내가 맛보지 않은 계집은 없다. 화사...... 그 사악한 계집만 빼고...... 흐윽...... 좋은데?”
“아음...... 아흐.......”
계집의 사지는 몇 번인가 기절할 듯 급작스럽게 움츠러들었다.
문득 우간은 오른쪽으로 충혈된 눈길을 돌려 욕설을 퍼부었다.
“미친...... 자식!”
호수.
그의 시선이 돌려진 곳에는 족히 방원 일천 장에 이르는 거대한 호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말이 호수이지, 하나의 조그만 바다였다.
미친 듯이 울부짖는 폭우 속의 호수.
우르르르르― 릉―!
혁리혼.
그는 그 거대한 해일과도 같은 파도를 마주하고 있었다.
“헤헷...... 돌아도 보통 돈 놈이 아니지. 벌써 한 달도 더 저렇게 서 있으니...... 저 거대한 파도를 벤다고? 우히힛...... 미친놈!”
콰아아아― 콰아―!
“나 같으면 그 시간에 계집을 눌렀어도 몇 번은 더 누를 수 있는...... 아까운 시간인데.......”
우간은 이내 사납게 계집의 몸 위로 자신의 거구를 찍어눌렀다.
순간 계집의 입에서 숨막히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악! 아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