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륙천자-2화 (3/31)

第 2 章 이 자식이 달랠 것을 달래야지?

허나 혁리혼은 고개를 내저었다.

‘훗...... 아니야. 얼음할아버지가 정말 내 곁을 떠난다면 흔들 거야. 그런 일은 없을 테지만......!’

드드...... 드.......

혁리혼은 조그맣고 까만 관을 끌며 가산(假山)을 돌아서고 있었다.

그때였다.

화다다닥―!

혁리혼이 가산을 돌아서는 순간, 한 마리 새하얀 설록(雪鹿)이 미친 듯이 내달아 왔다.

흡사 무언가에 크게 놀란 듯한 설록.

위에는 떨어질세라 한 녹의소녀(綠衣少女)가 설록의 목을 꼭 부여잡은 채 다급한 외침을 터뜨리고 있었다.

“이 멍청이, 바보야! 그까짓 독수리가 덮쳐온다고 놀라다니...... 멈추지 않으면 불고기를 해먹고 말 테다!”

소녀는 양볼을 빨갛게 붉힌 채 사내아이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허나 설록은 소녀의 말에 아랑곳없이 질풍같이 달리기만 할 뿐이었다.

화다다닥!

“익......?”

가산을 돌아서던 혁리혼의 눈망울이 커졌다.

하필이면 설록은 혁리혼을 덮칠 듯 앞쪽으로 달려오지 않는가?

아니, 설록은 이미 일 장여 거리를 두고 혁리혼과 부딪힐 기세였다.

“어...... 어라? 여기에도 바보가 있었구나! 비...... 비켜! 부딪힌다!”

소녀는 설록의 등에 매달린 채 다급한 외침을 터뜨렸다.

허나 혁리혼이 피하고 어쩌고 할 순간도 없었다.

꽝!

“얍!”

“아구야......!”

혁리혼과 소녀는 그대로 부딪혀 서로를 껴안은 채 삼 장여 밖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헌데 나가떨어진 모습이 우연치고는 너무도 묘했다.

혁리혼은 양팔로 소녀의 목을 껴안은 모습으로, 얼굴 또한 마주한 채 입술은 소녀의 입술과 엇비슷하게 붙어 있는 꼴이 아닌가?

“어...... 맛! 지...... 징그럽게!”

순간 소녀는 온몸이 저려 오는 아픔도 잊은 채 얼굴을 홍시처럼 붉히며 화다닥 몸을 일으켰다.

털퍽!

그 바람에 혁리혼은 저만치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혁리혼은 엉덩이의 눈을 털며 몸을 일으키다가, 매섭게 쏘아보는 소녀의 시선과 마주치자 머쓱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씨이...... 내가 뭐 일부러 그랬나? 자기가 먼저 달려들고선.......”

‘헌데 이상하다? 왜 자꾸만 얼굴이 붉어지는 거지? 난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혁리혼은 아무래도 모르겠다는 듯 슬그머니 자신의 양볼을 만지며 갸웃거렸다.

소녀는 한순간 잊었던 아픔을 느꼈는지 엉덩이를 감싸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고...... 아파라! 이 바보 같은 녀석아! 너는 눈도 없니?”

소녀는 앙칼진 음성을 터뜨렸다.

‘내가 바보라고? 빨간 여우 같은 계집애가?’

빨간 여우!

그랬다.

양볼을 빨갛게 상기시킨 채로의 소녀의 모습은 귀엽고 앙증스러운 빨간 여우 같다.

혁리혼의 얼굴도 그만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꽥! 소리를 질렀다.

“내가 왜 바보야?”

소녀는 혁리혼의 뜻밖의 큰소리에 멀뚱한 표정이 되는가 싶자 이내 입가에 악동 같은 웃음기를 매달았다.

“얼...... 씨구? 조막만한 게 깐에 성질은 있어 갖구.......”

그러다 문득 그녀는 이상한 탄성을 터뜨렸다.

“히야! 그러고 보니까 이 자식 되게 예쁘게 생겼는데?”

어찌 예쁘기만 하랴?

슬픈 듯하면서도 형용할 수 없는 신비함을 지니고 있는 눈.

여인이라 할지라도 반해 버릴 철저한 아름다움까지 느껴지는 옥면(玉面).

“자식이래?”

혁리혼은 퉁퉁 부은 얼굴이 되어 항의하듯 다가섰다.

그러자 소녀는 조그만 주먹을 들어올려 당장이라도 후려칠 기세로 꽃잎 같은 입술을 나풀거렸다.

“이게! 누나가 말하는데 입다물지 못하고!”

“누구 맘대로 누나래?”

혁리혼은 불만 어린 음성을 터뜨렸다.

으쓱.......

소녀는 조그만 어깨를 치켜 올리며 조금은 뻔뻔스런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조금 큰 것 같으니까 누나지!”

‘순 어거지.......’

힐끔!

혁리혼은 자신의 머리를 당장이라도 내려칠 듯한 소녀의 주먹을 올려다보았다.

‘또 대꾸하면 저 주먹이 내리쳐질 거야.......’

혁리혼은 그만 불만 어린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문득 소녀는 혁리혼의 아름다운 얼굴을 눈부시게 바라보며 물었다.

“네 이름이 뭐지?”

“대륙천자(大陸天子) 혁리혼(赫 魂)!”

혁리혼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헌데.......

대륙천자(大陸天子)―!

멍.......

소녀는 혁리혼의 말에 일시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말았다.

“대...... 대륙천자...... 라고......?”

허나 다음 순간 그녀는 배를 움켜잡고 까르르 옥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홋...... 네깟 게 무슨 당금 황제나 된다고...... 호호...... 대륙천자라고......? 호호.......”

천자(天子)!

그것은 황상(皇上)의 지고한 신분을 말함이 아니던가?

아니, 역대 황제라 할지라도 천자라는 어휘를 지닌 황제는 두 손가락으로 꼽을 뿐이다.

혁리혼은 소녀가 놀리는 듯하여 그만 얼굴이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할아범이 그랬어. 리혼은 장차 대륙의 주인, 대륙천자가 될 거라고! 정말이란 말이야!”

― 대륙의 주인 대륙천자!

너무도 엄청난 말이 아닌가?

“이게 어따 대고 큰소리야? 한 방 콱 쥐어박아 버릴까 보다!”

소녀는 혁리혼의 머리를 당장 쥐어박을 듯 조그만 주먹을 휘둘러 보였다.

혁리혼은 그만 자라처럼 머리를 움츠리고 말았다.

‘자기가 먼저 물어보고선...... 씨이...... 꼭 사나운 망아지 같은 계집애!’

“호호.......”

소녀는 그런 혁리혼의 모습을 보며 득의한 교소를 흘렸다.

“너는 이제부터 나 단소자하(丹素紫荷)의 귀여운 동생이다.”

“나는 하기 싫.......”

허나 혁리혼은 말끝을 흐리며 급히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단소자하가 아름다운 눈을 사납게 부릅뜨고 당장이라도 내려칠 듯 주먹을 움쩍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 그래...... 뭐...... 하면 되지.......”

혁리혼은 얼른 더듬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소녀 단소자하는 그제야 해맑은 웃음을 흘렸다.

“호호...... 좋아. 벌써 그렇게 말해야 했다, 너는......!”

혁리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해...... 이 계집아이는 얼굴도 예쁘지만 보고 있으면 괜히 내 마음이 즐거워진다.’

혁리혼은 아무래도 그런 기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치 얼음덩이에 뜨거운 물을 부어 버리는 순간 스르르 녹아 버리는 얼음처럼 혁리혼의 눈 속에 담겨져 있던 슬픔의 빛을 지워 버리는.......

소녀는 그런 기이한 힘을 몸 전체에 지니고 있었다.

혁리혼의 얼굴에 악동 같은 해맑은 웃음이 번져 오른 것은 그 순간이었다.

‘동생이라고...... 히...... 좋아......! 나만 손해볼 수야 없지!’

으쓱.......

혁리혼은 어깨를 치켜 올리며 빤히 단소자하를 바라보았다.

“그럼 나한테 뭘 줄 거야?”

“뭘 주다니?”

단소자하는 혁리혼의 느닷없는 표정과 말에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혁리혼은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따지듯 입을 열었다.

“남들은 다 그러더라. 동생을 삼으면 그 증표로 뭘 준다고!”

“그...... 그러니까 그 증표를.......”

“빨랑 줘!”

불쑥!

혁리혼은 손을 앞으로 내밀며 협박하듯 말했다.

‘요게 이제 보니까 칼만 안 들었지 완전히 날강도네? 하지만 내가 먼저 동생 하자고 그랬으니.......’

단소자하는 그만 양볼이 빨갛게 붉어지고 말았다.

“조...... 좋아.”

단소자하는 떫은 표정으로 머리 뒤쪽에서 하나의 비녀를 빼 혁리혼에게 건네주었다.

“자아, 받아. 이젠 동생 하는 거야?”

비녀[玉簪].

그것은 대략 반자 가량의 크기로, 전체적으로 푸른 서기(瑞氣)를 뿜어내고 있는 평범치 않은 것이었다.

단소자하는 쉽게 혁리혼의 손에 비녀를 넘겨주었지만 속으로는 눈물이 나도록 속이 상했다.

‘아깝다! 저건 내 생일날 어머님한테 어거지로 며칠을 울며불며 빼앗은 것인데.......’

허나 혁리혼, 이 두껍고 빤질한 녀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쩝! 이까짓 것 하나로...... 내가 아무래도 손해를 보는 것 같은데?”

“소...... 손해!”

단소자하는 발작할 듯 펄쩍 뛰며 눈꼬리를 하늘로 치켜 올렸다.

“이 자식아! 그...... 그게 얼마나 귀한 건데!”

“헹! 내가 알 게 뭐야? 이까짓 계집애들이나 갖고 노는 물건.......”

혁리혼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단소자하의 아름다운 얼굴이 그만 구겨져 버리고 말았다.

‘이...... 이 자식이......? 제까짓 거 동생 삼는데...... 이게 내 오기랑 성질을 몽땅 건드렸어?’

혁리혼의 말이 자꾸만 그녀의 비위를 박박 긁어 놨다.

“아무래도 나는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손해보는 것 같으니까. 이까짓 거 엿 바꿔 먹을래도 바꾸어 주지 않을걸?”

순간 단소자하는 두 눈에 불덩어리를 담고 발작적으로 야무진 교갈을 터뜨렸다.

“좋아! 이 자식아, 그럼 또 뭘 줘야 되는 거지?”

“네 입술을 잠깐 줘 봐.”

느닷없는 혁리혼의 말에 단소자하는 일시 어리둥절하고 말았다.

“이...... 입술을......?”

“힛! 아까 입술이 부딪히니까 되게 기분 좋더라. 나...... 한 번만 더 부딪혀 보게.”

단소자하는 그만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 자신보다 두어 살 어린 혁리혼을 내려다보았다.

“이...... 이.......”

“빨랑 줘.”

혁리혼은 단소자하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단소자하는 혁리혼이 정말이지 이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 바보 같은 자식이...... 달랠 걸 달래야지!’

단소자하는 어쩔 줄을 모른 채 빤히 올려다보는 혁리혼의 시선을 피했다.

혁리혼의 얄궂은 시선은 빤히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을.......

잘강.......

단소자하는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 자식을 동생 삼고 싶어. 너무 아름다워...... 계집애처럼...... 그리고 아까 보았던 그 슬픈 눈동자에는...... 이상하게 나를 잡아끄는 듯한 힘이 있었어. 정말 이상한 일이야.......’

그녀는 일시 안절부절못하고 우물거렸다.

“하...... 하지만.......”

“헹! 싫으면 그만두라지!”

단소자하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혁리혼은 배짱을 부리듯 코방귀를 뀌고 말았다.

그때였다.

삐이이― 익―!

한 줄기 긴 휘파람 소리가 여운을 끌며 조용한 가산의 숲 속을 울렸다.

순간 단소자하는 그만 다급한 기색을 떠올리고 말았다.

‘아버님이 부르시는 소리다!’

그녀는 다급히 말을 더듬었다.

“조...... 좋아! 딱 한 번만 부딪치는 거야!”

“히히.......”

혁리혼은 그만 입을 함지박만하게 벌렸다.

파르르.......

단소자하는 잔떨림을 일으키며 화편을 닮은 조그만 입술을 앞으로 내밀었다.

여인의 본능처럼 두 눈을 살포시 감은 채.......

아찔!

순간 혁리혼은 그녀의 입술이 다가옴에 따라 설익은 풋사과와 같은 풋풋한 향기에 정신이 다 없었다.

한껏 뒤꿈치를 세워 까치발을 한 채 세상에 태어나 첫 입맞춤 소리!

쪼옥...... 옥!

우렁찼다.

순간 단소자하는 그만 얼굴이 이유 모르게 활활 타오르는 듯함을 느끼며 화다닥 뒤로 물러섰다.

“모...... 몰라! 이 나쁜 자식!”

이어 빠르게 설록의 등에 올라탔다.

“히히.......”

혁리혼은 그런 단소자하의 모습을 바라보며 악동처럼 웃고 서 있었다.

흡사 남의 소중한 물건을 빼앗은 그런 표정으로.......

후두두두둑― 두둑!

설록은 단소자하를 태운 채 냅다 숲 속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뒤로 꼬리를 물 듯 단소자하의 공갈(?)이 이어졌다.

“리혼! 너는 이제부터 나 단소자하의 동생이다! 또 다른 누나를 사귀면 두들겨 줄 테다! 그리고 꼭 군산(君山)으로 이 누나를 찾아와야 돼!”

외침의 여운을 뒤로하고 단소자하는 이내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허나 혁리혼은 아직도 보드랍고 기분 좋은 감촉을 입술에서 여운처럼 느끼며 해쭉거리고 있었다.

“히히...... 좋은데? 다음에 군산을 찾아가서 한 번만 더 부딪치자고 그래야지!”

하지만 혁리혼은 이내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의 두 눈에도 사라졌던 고독하고 진한 슬픔이 앙금처럼 내려앉았다.

‘또...... 혼자가 되고 말았어.......’

혁리혼은 조그만 어깨를 떨었다.

‘춥다......!’

휘몰아치는 폭풍한설(暴風寒雪) 때문만은 아니다.

왠지 혁리혼은 참을 수 없이 춥다고 느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숲 속.......

‘나 혼자뿐이야.......’

혁리혼은 몸을 동그랗게 움츠렸다.

그러다 문득 그는 주위를 다급하게 돌아보았다.

“엄마랑...... 아버지 관......!”

휘리리리링―!

조그만 관은 저만치 눈구덩이 속에 파묻혀 혁리혼의 눈에 띄었다.

순간 이상한 반가움이 혁리혼의 조그만 가슴을 왈칵 메워 왔다.

그래...... 리혼은 혼자가 아니야.......

할아범이 그랬어.......

저 관 속에 엄마랑...... 아버지가 들어 계시다고.......

거짓말이라도 좋아.......

화다다닥!

혁리혼은 몇 번인가 곤두박질을 치며 관 앞으로 달려갔다.

* * *

“춥죠? 이 리혼도 지금 무지무지하게 추워요.......”

혁리혼은 싸늘한 관을 만지며 자꾸만 말을 건다.

마치 관 속에 있는 사람이 듣고 있기라도 한 듯.......

“가요...... 할아범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곳은 아주 따스해요. 정말이에요.......”

드드― 드―!

혁리혼은 관을 끌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혁리혼의 해맑은 눈망울에는 흐릿한 물기가 찰랑였다.

“칫......! 왜 자꾸만 눈물이 나오려고 그러지?”

쓰윽!

혁리혼은 팔소매로 눈물을 닦아내며 혼자 투덜거렸다.

그때였다.

캬르르― 르―!

카― 악!

휘이익―!

무언가 날렵하게 혁리혼의 앞을 가로막았다.

혁리혼은 어리둥절하다가 흠칫 뒤로 물러섰다.

늑대[狼].

세 마리 늑대가 두 눈을 시퍼렇게 빛내며 혁리혼을 향해 어슬렁거리며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크기만도 송아지만한 거대한 회색빛의 늑대.

이곳은 악양성과는 동떨어진 가산이다.

제법 살벌한 짐승들이 드글거리는 때문에 악양성 사람들은 밤이 되면 이 숲을 피해 멀리 돌아가는 실정이다.

번쩍! 번― 쩍!

크르르― 륵!

카르르― 릉!

세 마리 거대한 늑대는 섬뜩한 눈빛을 발하며 혁리혼의 앞으로 다가섰다.

순간 혁리혼의 몸이 괴이하게 웅크려지며 차갑게 안색이 굳어졌다.

* * *

눈[雪].

휘리릭― 사르르.......

이미 폭설이 되어 버린 눈은 하늘과 땅을 온통 일색으로 메우며 퍼붓고 있었다.

“우후후...... 훗...... 꼭 삼천 년 만의 하늘인가?”

사내.

그는 폭설로 꽉 채워진 하늘을 향해 한 서린 음성을 내뱉었다.

일신에는 하늘을 닮은 짓푸른 청의를 걸쳤고, 대략 삼십여 세 남짓한 절대준미의 사내.......

단아하게 이마를 동인 파란 유생건(儒生巾)이 참으로 보기 좋다.

유생건의 중앙.

하나의 검은 태양이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문양이 생동감 있게 수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심유하게 가라앉은 두 눈빛은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범상치 않은 무궁한 현기(玄氣)를 담고 있었다.

한 가지 흠이라면, 차갑다!

흡사 한 겹 얼음을 전신에 두르고 있는 듯.......

청의유생 사내의 전신에서는 뼈를 얼리고 살을 가르는 듯한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허나 그런 기운은 오히려 청의유생의 전신에 신비로움을 더해 주고 있었다.

슈르르...... 르...... 휘리리링.......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가산 위에 그렇게 서 있었는 듯 전신에는 가득 함박눈을 이고 있었다.

“단 한 번의 패배로 인하여...... 으으...... 수만 명이 삼천 년이라는 억겁의 세월을 묘강(苗疆)의 오지...... 그 어둠 속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살아왔다!”

삼천 년?

어떤 숙명적 암울함이 쏟아지는 폭설처럼 사내의 전신에 부어져 내리고 있었다.

꽈― 악!

격동인가?

그의 두 주먹이 하늘을 향해 격하게 움켜쥐어졌다.

“아극마세( 克魔勢)! 본 흑양밀전(黑陽密殿)은 삼천 년 전 네놈들에 의해 약자로서 처참한 피를 뿌리며 강제로 삼천년금약(三千年禁約)과 함께 어둠 속에 갇혔었다!”

흑양밀전?

검은 태양이란 뜻인가?

부르르......!

무서운 분노와 한이 뒤섞인 채 그의 전신이 폭풍을 만난 듯 진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침내 삼천년금약을 끝냈다. 이제 본 전이 무엇을 하려는가는 네놈들이 더 잘 알리라!”

휘리리리릭―!

차가운 삭풍은 눈보라와 함께 그의 전신을 매섭게 파고드는데.......

“삼천 년의 어둠으로 이어져 한과 암울함을 숙명적으로 지니고 태어난 나 타하륵( 瑕勒)은 어둠 속에서 늘 두 가지를 갖고자 불태웠다.”

일순 가히 하늘조차 조각낼 가공할 뇌전이 그의 두 눈에서 쏘아져 나왔다.

버― 언― 쩍!

도대체가 나약한 유생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그에게 있어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서운 안광이다.

“나는 저 빛이 쏟아지는 하늘을 갖고 싶었다!”

너무도 광오한 말이 아닌가!

그러나 그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광오함은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나이의 웅혼이 불타오르며 숨쉬는 저 광활한 대륙을 갖고자 했다!”

연이어 터져 나오는 엄청난 말들.

하늘 아래 이보다 더 광오한 말이 또 있을까 싶은데!

“그리고 마침내는...... 그것을 모조리 가질 수가 있었다!”

그는 미친 사내인가?

하늘과 대륙을 모조리 가졌다니......?

문득 타하륵은 잿빛의 음울한 하늘을 향해 텅 빈 괴소를 흘려냈다.

“쿠쿠쿠...... 쿳...... 허나 하늘은 너무도 공평치 못했다! 나에게 영원히 마르지 않는 물을 주었으나 그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주지 않았으니...... 으으...... 으.......”

뼛골을 파고 심장을 갈가리 찢어발기는 엄청난 고통과 한이 타하륵의 전신을 집어삼켜 버렸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찾으리라! 나의 몸 속에 숨어 있는 물을 담을 넓은 그릇을...... 그리고 약속한다!”

순간 그의 전신에서 무지막대한 강기( 氣)의 폭풍이 짓터져 올랐다.

우르르르― 릉!

가공할 기세!

“아극마세......! 흑양밀전의 삼천 년 후예인 본좌는 그후 천축...... 네놈들의 힘이 작용하는 그 모든 곳에 살아 있는 것을 흑양밀전의 이름으로 모조리 목을 잘라 버리리라!”

숨통을 짓끊는 전율의 피 냄새가 뿌려지는 말이다.

그 기세 때문인가?

카앗―!

휘몰아치던 폭풍한설조차 그의 몸에 이르러 숨을 죽이고 말았다.

스슷― 슷!

문득 그의 신형이 유령처럼 가산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늘의 뜻을 뒤집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나의 결심...... 이 매천자 타하륵의 결심은 변하지 않으리라!”

매천자(買天子)―?

폭풍!

보이지 않는 하나의 가공할 폭풍을 중원으로 몰고 온 묘강(苗疆)의 사나이 타하륵!

이제 중원에 들어 그의 첫 일보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 스.......

헌데 돌연 그의 신형이 가산 중턱에서 멈추어지며 눈가에 기광이 스쳤다.

“......?”

* * *

혁리혼.

세 마리 거대한 늑대를 마주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기이했다.

흡사 짐승이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발톱을 곤두세우고 상대를 경계하는 작은 늑대처럼.......

혁리혼의 작은 몸에서는 그러한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눈[眼].

혁리혼의 해맑던 두 눈은 순간적으로 가히 짐승의 그것을 닮아 가고 있었다.

늘 슬픔을 안고 다니던 혁리혼에게 있어서 그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변화였다.

“다...... 다가오지 마!”

혁리혼은 조그만 늑대처럼 더욱 몸을 웅크리며 차갑게 소리쳤다.

“너희들은 배가 고파 나를 잡아먹으려고 하지만...... 나도 가만있지만은 않을 거야!”

캬르르― 릉―!

캬르르륵―!

“내가 해를 당하는 만큼 너희들도 해를 입을 거야! 나한테! 정말이야!”

놀라운 말이다.

그 말은 곧 받은 만큼 반드시 돌려주겠다는 투혼(鬪魂)의 근성이 담긴 말이 아닌가!

순간이다.

캬아아―!

카르르― 릉―!

세 마리 거대한 늑대는 허기를 참지 못하겠다는 듯 무서운 기세로 혁리혼의 조그만 몸을 덮쳐들었다.

찰나 혁리혼의 두 눈에서 짐승의 눈빛을 방불케 하는 빛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번― 쩍―!

“칫......!”

혁리혼의 입이 거대한 늑대의 숨통을 짓깨문 것도 그 순간이다.

캐― 앵!

놀라운 일이 아닌가!

혁리혼의 조그만 몸에서 은연중 민첩하고도 날카로운 짐승의 행동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카카― 칵―!

한 마리 거대한 늑대가 순간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대며 뒤로 물러났다.

허나 혁리혼은 늑대의 숨통을 문 채 놓아주지 않았다.

기상천외!

어린 소년과 거대한 늑대의 싸움, 그야말로 놀랍고도 아연실색할 싸움이 아닌가?

캬르르륵!

캐― 앵!

나머지 두 마리 늑대가 거대한 몸을 날려 재차 살기 어린 기세로 혁리혼을 덮쳐 간다.

퍼― 억!

촤촤촤촤― 촥!

순간 혁리혼의 조그만 몸은 저만치 나가떨어진 채 핏물을 쏟아냈다.

늑대의 날카로운 발톱이 그의 허리춤을 뜯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일체의 비명도 혁리혼의 입에서 터지지 않았다.

비...... 틀.......

“치― 이!”

혁리혼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한 마리 늑대는 이미 혁리혼의 이빨에 의해서 숨통이 끊어진 후였다.

“빨리 돌아가! 그렇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너희들마저 죽일 거야!”

엄청난 일!

늘 슬픔을 안고 다니던 어린 그에게 있어 이런 섬뜩한 짐승의 기질이 숨쉬고 있었다니!

캬르르― 릉!

캬― 아―!

이미 피 냄새를 맡은 두 마리 늑대는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비릿한 울부짖음을 터뜨렸다.

시뻘건 아가리를 벌린 채 파란 녹광(綠光)을 쏘아내는 늑대의 모습은 가해 전율스러운 그것이다.

휘― 익!

순간 또다시 무섭게 늑대의 몸이 혁리혼을 향해 덮쳤고, 혁리혼의 입이 한 마리 늑대의 숨통을 물고 함께 뒹굴었다.

혁리혼!

그의 몸에서는 흡사 본능처럼 불가사의한 빠름과 잔인함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캬르르르르― 릉―!

캬아아.......

어린 소동과 두 마리 거대한 늑대의 혈투!

혁리혼의 전신은 피투성이가 된 지 오래다.

콰콰― 콱!

캬― 오오오―!

헌데 시간이 흐를수록 거세게 타오르고 있는 혁리혼의 눈빛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투혼(鬪魂)!

그것은 무섭도록 잔인한 승부의 기질.......

캬아아― 앙―!

쉬이이― 익!

순간 또 한 마리의 늑대가 혁리혼의 머리를 그대로 바수어 버릴 듯 물어 갔다.

절체절명!

그때였다.

버― 언― 쩍!

빠르다!

무언가 가히 뇌전을 수십 조각으로 짓끊는 가공할 빠름의 빛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이다.

퍼퍼퍼― 퍽!

파아아앗!

두 마리 늑대는 비명조차 터뜨리지 못하고 피 조각이 되어 사방으로 날아갔다.

혁리혼은 의혹의 시선을 돌렸다.

그곳.......

언제부터인지 청의유생 한 명이 차가운 표정으로 서 있는 채 한 손에는 괴이롭도록 묵광을 흩뿌리는 섭선(攝扇)을 말아쥐고 있었다.

타하륵, 바로 그였다.

너무도 냉혹하고 신비로운 기운을 함께 전신에 두르고 있는 인물.......

‘차갑다! 그리고 너무 신비로워.......’

혁리혼은 그런 기운을 순간 느꼈다.

허나 이내 입가에 해맑은 미소를 떠올리며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고마워......!”

“......!”

무심냉혹(無心冷酷)한 시선으로 혁리혼을 내려다보던 타하륵의 눈가에 괴이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기괴한 녀석이다, 보면 볼수록....... 조금 전 그 짐승 같은 기질과 무서운 투혼의 근성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지 않았는가!’

그랬다.

비록 전신에 섬뜩한 피칠을 하고 있지만 조금 전 늑대와의 혈투에서 뿜어내던 기질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그의 두 눈에는 언제나처럼 짙은 우수와 슬픔이 애잔하게 깔려 있었다.

그리고 또 있었다.

혁리혼의 전신에 일렁이는 고독스러움과 암울함은 그의 조그만 몸에 괴이한 어둠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이 아이에게는...... 어떤 숙명적인 암울함이 있다. 흡사 나처럼......!’

그냥 우연이었을까?

타하륵은 은연중 혁리혼의 몸 속 깊숙이 잠재워져 있는 바로 그 자신과의 동질성(同質性) 같은 것을 느낀 것이다.

숙명적 암울함과도 같은.......

문득 타하륵은 해맑게 웃고 서 있는 혁리혼에게 기이한 감정의 끈이 이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리 와라, 치료해 줄 테니.......”

혁리혼은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 이까짓 상처쯤은 금세 아물어 버릴 텐데, 뭐...... 그리고 나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아......!”

‘타성(惰性)에 젖지 않는 강한 기질까지 가진 녀석이다. 저 엄청난 상처에도 불구하고.......’

타하륵의 얼굴에 기묘한 빛이 차가움 속에 감추어진 채 스치듯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주루룩.......

혁리혼의 옆구리와 전신 구석구석 늑대의 이빨로 하여 만들어진 상처에서는 끊임없이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타하륵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해롭다.”

“......!”

혁리혼의 눈빛이 반짝 빛을 발했다.

어찌 들으면 심장까지 동결시켜 버릴 듯한 그의 음성.

허나 그 속에는 혁리혼을 생각하는 따스함이 깊이 깔려 있었다.

‘차가움 속에 따스한 마음을 가진.......’

혁리혼은 문득 타하륵에게 이상하리만치 따스한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타하륵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었다.

숙명(宿命)!

숙명적 암울함이 이어 놓은 이 조우(遭遇).......

아무도 몰랐다.

쿠르르르...... 르.......

수천년을 이어 구르는 무림(武林)의 대역사(大歷史).

그 혈륜(血輪)을 한순간에 뒤바꾸어 버리는 이 가공할 조우의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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