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륙천자-1화 (2/31)

第 1 章 少年과 棺, 그리고 書

“그놈...... 그 짐승 같은 놈의 후예가 아직 살아 있다는 말이냐?”

우르르― 릉!

지면과 천장을 무섭게 진동시키는 우레음.

그것은 거대한 금사(金絲) 휘장의 뒤로부터 흘러 나오고 있었다.

구 인(九人)!

아홉 명의 신태비범한 인물들은 순간 피 터지도록 지면에 머리를 박았다.

콱―!

“분명 확인된 사실입니다!”

아홉 명의 인물.

비록 부복을 하고 있는 모습이나, 그들 개개인의 전신에서 무형중 뻗어 나오는 기운은 태산조차 밀어 버릴 무지막대한 것이다.

가히 하늘을 안고 있는 듯한 인물들.

그들 중 가운데의 중년유생(中年儒生).

그의 입에서 절대경앙의 음성이 흘러 나왔다.

“마황제일존(魔皇第一尊) 갈무좌(葛武座)는 십대천세주 대군을 꺾고 당금 중원대륙의 집권자로 부상했으나 대군의 모든 것을 제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놀랍고도 엄청난 사실이다.

의문 속에 죽임을 당한 십대천세주 대군!

그의 일대 의혹을 남긴 죽음이 이곳에서 속속들이 파헤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황제일존(魔皇第一尊) 갈무좌(葛武座)―!

새로운 대륙의 집권자가 되었다는 그는 누구인가?

“소공야(少公爺)는 분명 살아 옥체를 보존하고 계십니다. 대군의 심복이었던 갈극척(葛極尺)에 의해서!”

“......!”

“놀라운 사실은 갈극척은 바로 갈무좌의 생부(生父)이며, 과거 백년 이래 사도대종사(邪道大宗師)로 군림했던 사교대존황(邪敎大尊皇)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대군...... 그놈이 죽은 것은......?”

“무서운 배반을 당한 것입니다.”

“......!”

“대군은 천고절증(天古絶症)으로 죽어가는 것을 살려 자신의 심혈을 다해 키운 갈무좌에 의해 목을 잘린 것입니다.”

“으음......!”

금사의 휘장 뒤에서 무언가 복잡한 감정이 섞인 침음성이 나왔다.

무궁한 신비와 가공할 기도를 전신에서 뿌리고 있는 중년유생.

그는 머리를 조아리며 전신에 격한 격동을 터뜨렸다.

“환공이시여......! 당연히 소공야를 추대하여 위대한 본가의 후계자인 대륙천자로...... 맞아야 할 것입니다!”

대륙천자―!

광활한 대륙 위에 군림하는 하늘의 아들임을 일컬음인가?

격동!

대륙천자, 이 한마디가 대전을 울리는 순간 부복해 있는 구 인의 전신이 폭풍을 만난 듯 흔들렸다.

“환공이시여! 대륙천자를.......”

“아아...... 본가에 후예가 없는 지금...... 그분을 반드시 맞아야 할 것입니다!”

극도의 절박함이 깃들여져 있는 외침이다.

순간이다.

“갈(葛)―!”

부르르...... 르.......

공간을 갈가리 찢는 듯한 노갈이 짓터져 나왔다.

“인과응보(因果應報)다! 대군 혁파후...... 그 짐승만도 못한 놈이 죽은 것은! 어찌 그놈의 후예가 본좌의 후예란 말인가?”

“......!”

“혁파후...... 그놈에게 본좌는 모든 것을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헌데 그놈...... 그놈은......!”

분노.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감지할 수 없는 공허와 회한이 깔려 있음을 아무도 모른다.

“본좌의 딸과 본좌의 칠백 평생의 모든 것을 갖고 이곳을 떠났다! 어찌 그놈을...... 그 짐승 같은 놈을 용서하리! 하물며 그 후예를.......”

뼛속까지 스며드는 참담한 한이 분노에 뒤섞여 있는 말이다.

대군 혁파후!

그가...... 그랬던가.

헌데 칠백(七百) 평생이라니!

이 무슨 엄청난 말인가?

휘장 뒤에 있는 인물은 지금 칠백이라는 고령을 살고 있다는 말인가?

불가사의한 일이다.

휘장 뒤로부터 흘러 나오는 무궁한 살기!

구 인은 그 무형의 가공할 기운에 숨통이 막혀 옴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문득 휘장 뒤에서 재차 주위의 짧은 정적을 깨며 분노를 삭인 음성이 흘러 나왔다.

심장까지 파고드는 시리도록 냉혹한 음성이다.

“혁파후...... 그놈은 본좌의 명을 어기고 본가를 은밀히 떠났었다. 율법(律法)에 따라 어떻게 처리되느냐, 구천황야(九天皇爺)?”

구천황야―!

아홉 명의 부복해 있는 인물들은 순간 급격히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콰― 직!

“반역자로서 본가의 율법에 따라...... 삼족(三族)을...... 멸합니다!”

무한한 경복과 함께 전율까지 깃들여진 대답.

그것은 구천황야가 휘장 뒤의 인물을 얼마나 경앙하면서도 두려워하는지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대군 혁파후는 본가의 반역자이나 화후(花后)께서는...... 환공의 영애(令愛)이십니다. 또한 소공야께서는 그분의 영식(令息)으로 환공의 피를 이어받은 유일한 본가의 후계자이십니다. 부디......!”

“환공이시여! 이것은 본가에 있어서 절대로 중요한 사실입니다.”

“소공야를 거두어 주셔야 합니다!”

격동!

그리고 가슴을 조리는 절박함이 대전 안을 울렸다.

그러나 휘장 뒤에서 흘러 나오는 환공의 음성은 얼음 조각처럼 냉혹했다.

“본가의 율법은 그 누구도 움직일 수 없다!”

순간 대전 안을 또다시 울리는 피 토하는 외침이 구천황야의 입에서 터졌다.

“화...... 환공이시여―!”

“소공야, 그분은 환공의 손자이십니다!”

허나 휘장 뒤에서 나오는 음성은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무궁한 신비와 냉혹함까지 곁들여진 짤막한 명이다.

“본좌는 손자를 둔 적이 없다. 잡아들여 죽여라!”

― 죽여라!

순간 구천황야의 입에서 울부짖는 듯한 절망의 피 토함이 터졌다.

“아아......!”

“환공이시여...... 통촉하소서!”

그러나 이미 휘장에 비치던 신비의 환공은 사라진 뒤다.

도대체 이곳은 어디인가?

백팔(百八) 개의 황금기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황금대전(黃金大殿).

그리고 칠백의 기하학적 세월을 인간으로서 풍미하고 있는 불가사의한 인물 환공(幻公)!

하늘의 기운을 닮은 구 인, 구천황야!

모든 것이 불가사의와 신비뿐이다.

허나 분명한 것은 대륙천하를 양손에 움켜쥐고 있던 위대한 존좌 십대천세주 대군 혁파후.

그가 한낱 한 세가에 소속된 인물이었다는 놀랍고도 가공한 사실이다.

그리고 대륙천자.......

이 이야기는 바로 그 어린 소년에게서부터 시작된다.

중원대륙.

언제나 무한한 가능성을 안고 있는 광활한 대륙.

이제 저 드넓은 대륙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려나?

* * *

호북성(湖北省).

대륙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대홍산(大洪山)을 비롯한 중원제일의 산수절경(山水絶景)을 자랑하는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 무당산(武當山) 등.......

호북성은 그야말로 하나의 거대한 산맥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호북성은 천험의 산벽(山壁)으로 하여 예로부터 고도의 문물과 발전을 꾀해 왔다.

고대상업의 도시가 그곳에 이루어져 있는 것이 그렇고, 그 어느 곳보다 화려한 발전을 꾀할 수 있었던 것이 그 때문이다.

악양성(岳陽城).

장장 구만리(九萬里) 장강(長江)이 한수(寒水)를 통해 드는 동정호(洞庭湖)를 끼고 악양성은 있었다.

불망루(佛望樓)!

수천년을 통해 악양성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온 거대한 불탑(佛塔).

높이 이십여 장에 달하는 이 거대한 불상은 양자강(楊子江)을 건널 만큼 악양성을 향해 드리워져 있었다.

불망루에는 전설이 있었다.

누구든 백일 불공을 드리게 되면 한 가지 소원이 성취된다는.......

눈[雪].

이 해에 들어서는 그 어느 해보다도 많은 눈이 내렸다.

대설(大雪).

늘 사람들은 눈을 이고 다녔다.

휘리리링.......

소르륵...... 소륵.......

눈이 내린다.

내리는 눈은 솜처럼 하얗고 보드라운 함박눈이다.

너무도 하얀색이라 차라리 슬프기까지 한.......

* * *

나는 아버지의 얼굴도 몰라요.......

어머니의 얼굴도 모르죠.......

하지만 할아범이 그러는데...... 이 관(棺)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이 울 엄마랑 울 아버지래요.

그치만 나는 안 믿어요.

관 속에는 뼈다귀만 들었거든요.

뼈다귀가 어떻게 울 엄마랑 울 아버지가 되어요......?

머리는 헝클어진 채 소동(小童)은 연방 노랫가락을 불러대며 설로(雪路)를 푹푹 빠지며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스― 윽!

소동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치 그림자처럼 새까만 옻칠을 한 조그만 관이 꽁무니를 따라간다.

“나는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죠...... 어머니의 얼굴도.......”

함박눈을 맞고 걷는 소동을 따라 조그맣고 까만 관도 슬픔처럼 하얀 눈을 이고 있었다.

문득 소동은 노랫가락을 멈추며 앙증맞게 투덜거렸다.

“칫! 할아범은 왜 이 리혼( 魂)에게 중 할아버지한테 가지 말라는지 모르겠어.”

혁리혼(赫 魂)―!

운명이 그렇게 이름붙여 놓은 이 조그만 소동.

혁리혼은 헝클어진 머리 사이로 멀찍이 앞을 바라보았다.

<불망루(佛望樓)>

하나의 거대한 불상이 눈발 속에서 너무도 부드럽고 따스한 웃음을 혁리혼에게 보내고 있었다.

소동은 불상의 자비로운 미소를 접하자 헝클어진 머리카락 속에서 웃음을 떠올렸다.

“히...... 오늘은 리혼이 백일째 불공을 드리는 날이야.”

백일 불공!

“중 할아버지는 리혼의 소망을 꼭 들어주실 거야. 꼬...... 옥......!”

소동 혁리혼은 어기적거리며 또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꾸...... 뻑.......

혁리혼은 엉덩이를 하늘로 치킨 채 불망루를 향해 연방 절을 해댔다.

그 모습은 정녕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모습이다.

“아흔여덟...... 아흔아홉...... 배액―!”

혁리혼은 백 번째 절을 마치며 좋아라 팔짝 뛰었다.

순간 헝클어진 머리결이 뒤로 젖혀졌다.

아름답다.

허공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은백의 눈은 이 순간 모조리 그 빛을 잃고 말았다.

철부지와 치기 어린 얼굴에 오묘하도록 신비롭고...... 슬프도록 아름다운 눈.......

오뚝한 콧날과 붉디붉은 입술은 화편(花片)을 닮았다.

너무도, 정녕 너무도 아름다운 소동.......

거기에 몸을 감싸고 있는 순백의 하얀 털조끼는 소동의 아름다움과 귀여움을 더해 주고 있었다.

“히히...... 빨리 보여 줘. 백일만 절을 하면 리혼의 소망인 어머니랑 아버지랑 얼굴을 보여 준다고 했잖아?”

허나 혁리혼의 앙증맞은 말에도 아랑곳없는 듯 거대한 불상은 자비로운 웃음만 지을 뿐이다.

하긴 돌로 만들어진 불상이 말을 할 리 없다.

그만 혁리혼의 얼굴은 무색해지고 말았다.

“왜 안 보여 줘? 약속했잖아!”

혁리혼은 그만 울어 버리고 말 듯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그러나 불상은 여전히 침묵만을 지킬 뿐이다.

“치이, 나쁜 중 할아버지.”

신비롭고도 짙은 슬픔을 안고 있는 듯한 혁리혼의 눈망울이 찰랑이고 말았다.

“백날만 맨날 와서 절을 하면 소원을 들어준다고 해놓고선.......”

소록.......

사르르...... 르.......

함박눈은 혁리혼의 몸 위로 슬픔처럼 잔떨림을 일으키며 내려앉고 있었다.

“왜 리혼의 소원을 안 들어주는 거야? 리혼은 엄마랑...... 아버지를 보고 싶단 말이야...... 정말이야.......”

그것이 혁리혼의 조그만 가슴속에 담긴 소원이었던가?

거대한 말없는 불상을 향해 혁리혼은 볼멘 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른 애들은 엄마랑 아버지랑...... 다 있더라. 씨이.......”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혁리혼은 그래서 자꾸만 눈물을 삼키려고 눈을 깜빡거렸다.

“할아범도 중 할아버지도 다 거짓말쟁이야. 할아범은 이 관 속에 있는 게 엄마랑 아버지라고 그랬는데 몰래 보니깐 뼈다귀만 있더라. 힝.......”

흘러내릴 듯 찰랑이는 눈물을 삼키며 혁리혼은 울부짖듯 외쳐댔다.

“다시 오나 봐라. 이 거짓말쟁이 중 할아범아! 안 와! 안 올 거야!”

혁리혼은 일순 조그만 발로 냅다 불망루의 거대한 불상을 찼다.

탁―!

“아야야......!”

순간 혁리혼은 그만 발끝에 오는 통증에 펄쩍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퍼.......”

눈물은 기어코 찰랑이다가 혁리혼의 양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픔 때문인지 중 할아버지가 미워서인지 혁리혼은 모른다.

주루룩.......

하지만 눈물은 자꾸만 그의 눈앞을 가렸다.

‘정말이지, 리혼은 엄마랑 아버지가 보고 싶단 말이야...... 힝.......’

늘 혼자인 혁리혼.......

쓰― 윽!

혁리혼은 팔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악물린 음성을 흘렸다.

“할아범이 그랬는데...... 우는 사람은 바보랬어. 그래서 리혼은 바보가 되지 않으려고 울지 않을 거야.”

혁리혼은 몸을 일으키며 원망스러운 얼굴로 거대한 불상을 올려다보았다.

“씨이...... 얼음할아버지는 내가 한 번만 가도 해달라는 걸 다 해주는데.......”

쏘옥!

혁리혼은 불상을 향해 약을 올리듯 혀끝을 귀엽게 내밀어 보였다.

“거짓말쟁이 중 할아버지! 리혼이 안 오면 심심할 거야. 하지만 이제 리혼은 정말 안 올 거야.”

혁리혼은 이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휘리리링.......

눈바람이 차갑게 그의 조그만 몸을 삼킬 듯 불어왔다.

스― 윽!

혁리혼의 슬픔을 달래 주려는 듯 조그맣고 까만 관은 자꾸만 혁리혼의 뒤를 따라간다.

드드드...... 득.......

소년과.......

관.......

그리고 눈.......

* * *

불망루가 악양성 사람들에게 마음의 지주라면, 금대루(金貸樓)는 악양성 사람들에게 고통과 눈물을 한꺼번에 주는 필요악(必要惡)과도 같은 존재다.

<금대루(金貸樓)>

그것은 금자를 빌려주고 물건을 차압하는 전당포 같은 곳이다.

동시에 온갖 고물(古物)과 고서(古書)를 취급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저 보잘것없는 조그만 금대루.

허나 악양성 사람이라면 막 태어난 아이까지도 진저리를 치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칵! 퉤에...... 더러운 전충(錢蟲) 같은 늙은이!”

“염왕(閻王)도 무심하지. 허구한 날 저런 늙은이 목을 왜 안 따 가는지 모르겠다.”

금적산노(金積山老) 황금충(黃金蟲)―!

구순(九旬)을 넘어서고 있는 냉혈인간.

아니, 금자에 관한 한 염왕보다 더 악독한 그가 바로 금대루의 주인이다.

노인.

전신을 누더기로 감싸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허름한 옷차림의 노인은 이미 오랫동안 한지(漢紙)로 새끼를 꼬며 앉아 있었다.

염소수염에 비쩍 마른 체구와 깊이 패인 주름은 이미 그가 인생의 뒤안길을 걷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주르르륵!

그는 새끼를 꼬며 문득 대청 밖으로 내리는 함박눈을 힐끔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기이한 일이다! 이제 그놈을 하루만 안 보면 궁금해지니.......’

꼬아 놓은 한지로 된 새끼줄은 이미 노인의 옆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의 고집스럽고 냉기 흐르는 얼굴에 일순 기이한 파문이 스쳤다.

‘놈에겐 사람을 잡아끄는 이상한 힘이 있다. 마치 마력과도 같은 것이...... 그 어린 녀석의 몸에는 있다.’

주르르...... 륵.......

그는 다시 꼰 새끼줄을 습관처럼 한옆으로 내던지며 또다시 한지를 집어들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이 한곳에 이르러 뚝 동작과 함께 멈추었다.

대청이 마주하고 있는 싸리문.

그곳에는 지금 한 소동이 새하얀 눈을 머리 위에 수북이 인 채 서 있었다.

소동의 옆에는 새까맣고 옻칠을 한 조그만 관이 놓여 있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소동.

혁리혼, 바로 그였다.

노인은 혁리혼을 발견하는 순간 안색이 무뚝뚝하고 싸늘하게 변했다.

“네놈은 들어오려면 들어오고 나가려면 사라져 버리지, 청승맞은 강아지처럼 왜 거기 서 있는 게냐?”

밥맛 떨어지도록 무뚝뚝한 말투다.

툭! 툭!

혁리혼은 눈을 털며 해맑은 웃음을 흘렸다.

“응...... 얼음할아버지는 금대루의 뒤뜰인 이곳 대청에는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하잖아. 그래서.......”

노인, 금적산노 황금충의 눈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아닌게아니라 천하의 화후장상이 설사 금자를 빌리러 온다 해도 결코 이곳 대청에는 발끝 하나 못 들어서게 한다.

허나 예외가 있었다.

단 한 사람, 혁리혼은 어느 때부터인가 은연중 그 예외라는 단 한 사람이 되었다.

노인은 새끼줄을 꼬며 코방귀를 뀌었다.

“미친놈!”

“히...... 얼음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해도 속으로는 리혼을 좋아하지? 그렇지?”

혁리혼은 금적산노 앞으로 다가서며 웃었다.

주르륵.......

금적산노는 새끼를 꼬며 쳐다보지도 않은 채 혁리혼의 말을 받아넘겼다.

“나는 아직 누구도 좋아해 본 적이 없다. 더욱 너 따위 꼬마놈을.......”

“그래도 얼음할아버지는 이 리혼이 달라는 것은 다 주면서.......”

“네놈의 할아비가 대금을 다 치러 주는 때문이다.”

“헤...... 거짓말!”

“주둥이 닥치고 차가운 눈 맞지 말고 마루로 올라와 앉아라, 바보 같은 녀석아!”

혁리혼은 슬그머니 마루턱에 걸터앉으며 계속 쫑알거렸다.

“저번에 할아범한테 물어보니깐 대금은 한 번도 준 일이 없다고 그러더라, 뭐...... 히히...... 그러고 있잖아?”

“......?”

“리혼은 할아버지가 참 좋더라. 남들은 할아버지를 돈벌레라고 하지만.......”

“미친놈!”

“참, 얼음할아버지...... 빨랑 줘!”

“......?”

“저번에 그랬잖아! 리혼의 엄마랑...... 아버지의 목상(木像)을 깎아 준다고!”

금적산노의 눈빛이 순간 변했다.

무뚝뚝하고 차가운 그의 얼굴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당황감 같은 것이었다.

“그...... 그건.......”

“알아...... 만들지 않은 거지?”

혁리혼은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어른들은 다 거짓말쟁이야. 중 할아버지도 리혼이 백일 동안이나 절을 했는데도 엄마랑 아버지의 얼굴도 보여 주지 않고.......”

‘이놈이...... 불망루를 찾아갔었나?’

금적산노의 노안에 감지할 수 없는 파문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 금적산노를 닮은 놈......!’

문득 금적산노는 어린 혁리혼의 애잔함이 깔린 시선을 피해 눈발이 휘날리는 허공을 응시했다.

그는 눈을 보고 있으나 눈을 보고 있지 않았다.

이제 아련히 기억속에 사라져 가는 과거를 그는 보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나 금적산노에게도 그런 적이 있었지...... 부모를 모르고 자라던 그때...... 노야(老爺)에게 늘 부모님의 목상을 깎아 달라고 졸랐었다. 아니...... 울며 억지를 부렸었지. 몇 날 밤을 자지도 않으면서.......’

차르륵...... 소록.......

하얀 눈빛은 짙은 고통과 슬픔의 빛이 되어 그의 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때 노야는 아픈 웃음을 흘리면서 그랬었다. 허허...... 허...... 이놈아, 내 어찌 네 부모의 얼굴을 알아 목상을 깎을 수 있겠느냐...... 라고...... 그리고 계속 막무가내로 철없이 조르는 나에게 노야는 물었었다.’

― 충(蟲)아...... 너는 부모님을 보고 싶은 소원 외에 또 무슨 소원이 있더냐?

― 요술방울[ 鈴]을 갖고 싶어요. 흔들면 이 충아가 바라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요술방울 말이에요.

― ......?

― 그런 방울을 얻으면 충아는 매일 흔들 거예요. 부모님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 허허...... 허! 그럼 이 할아비가 그런 요술방울을 주지.

‘허나 노야가 준 그 요술방울이라는 것을 밤새도록 흔들었지만 부모님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그의 노안에 아픈 영고(靈苦)가 스쳤다.

그것은 겉으로 표현할 수 없는 내면의 깊은 아픔과도 같은 것이다.

‘나는 커 가면서야 비로소 알았지. 부모님은 영원히 죽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요술방울의 진정한 의미를......!’

“......!”

‘헌데 이제 나의 어릴 때를 닮은 녀석에게 내가 노야에게 졸랐던 똑같은 말을 듣게 될 줄이야. 부모님의 목각상을 깎아 달라는.......’

주르륵.......

금적산노는 다시 새끼를 꼬아 갔다.

마치 과거의 아픔처럼 새끼줄이 꼬인다.

혁리혼은 고개를 갸웃했다.

“새끼줄은 왜 꼬는 거야?”

“심심해서!”

“......?”

“쿠쿠...... 새끼를 꼬아서 그 사이사이에 천 냥짜리 전표를 뭉텅뭉텅 끼어 매달아 놓는 거지.”

“......?”

“쿠쿠쿠...... 아느냐? 이 늙은이는 매일 그렇게 천하를 새끼줄에 매달아 놓고 보지!”

― 천하를 새끼줄에 매달아 놓고 본다!

미묘한 말이다.

“치이, 천하를 어떻게 새끼줄에 매달아 놔? 어른들은 다 거짓말쟁이들이야.”

혁리혼은 몸을 일으켰다.

툭! 그는 하릴없이 옆에 놓인 관을 발끝으로 차며 시무룩하게 입을 열었다.

“리혼은 이제 갈래.”

금적산노의 입에서 퉁명스런 말이 터져 나왔다.

“네놈을 잡아 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

“고적만고(古積萬庫)에 가서 책이나 꺼내서 어서 꺼져라!”

책(冊)?

“싫어!”

혁리혼은 돌아서며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

“왜 그런지 모르지만 리혼은 자꾸만 슬퍼서...... 그래서 책을 읽고 싶지 않아...... 그리고 고적만고에 있는 책들은 다 읽어 버렸는걸.......”

금적산노의 노안에 순간 경악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모조리...... 읽었다고?’

고적만고.

그곳에는 어림잡아도 수십만 권의 고서기서(古書奇書)가 있다.

그것은 금적산노가 평생을 바쳐 모은 것들이다.

금적산노.

그는 그것을 혁리혼의 슬픔을 달래 주기 위해 개방해 주었던 것이다.

바로 일년 전부터.......

‘아아...... 믿을 수 없는 일...... 수십만 권의 책을 일년 만에 모조리......?’

금적산노는 돌아서 걸음을 옮기는 혁리혼을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허나 나는 믿지! 천하가 모두 믿지 않아도...... 놈은 숨은 용(龍) 새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놈은 하늘로 차고 오를 것이다.’

금적산노의 노안에 희미한 잔파문이 피어올랐다.

혁리혼의 조그만 등.

그 속에서 금적산노는 또다시 자신의 아프고 슬펐던 과거를 본 것이다.

진하디진한 고독과 고통...... 그리고 애절함 등을.......

“기다려라!”

문득 금적산노는 자신도 모르게 냉랭한 외침을 터뜨렸다.

혁리혼은 의아한 얼굴로 돌아섰다.

눈[眼].

혁리혼의 두 눈은 늘 신비롭도록 아름다우면서도 보는 이의 가슴을 저미는 슬픔을 담고 있다.

“빌어먹을 놈! 궁상맞게 그 지랄 같은 눈으로 쳐다보지 마라!”

금적산노는 욕설을 퍼부으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혁리혼에게 던졌다.

휙―!

순간 무언가 혁리혼의 발치에 떨어지며 청아한 소리를 터뜨렸다.

딸랑...... 딸...... 랑.......

그것은 한 쌍의 조그만 방울이었다.

“......?”

혁리혼은 얼떨결에 방울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는 순간 혁리혼은 두 눈에 은은한 공포의 빛을 떠올렸다.

한 쌍의 방울.

그것은 참으로 괴이한 것이었다.

방울에는 각각 남녀로 구분되는 마귀들이 빙글빙글 돌며 귀무(鬼舞)를 추고 있는 모습이 양각되어 있었다.

가히 그 수는 수백 명의 마귀에 이르렀다.

조그만 방울 속에 그렇듯 놀라운 신기묘각(神技妙刻)을 새겨 넣은 것도 그렇거니와, 마귀들은 흡사 당장이라도 춤을 추며 튀어나올 듯 생동감과 심장을 짓떨리게 하는 무궁한 공포를 발하고 있었다.

혁리혼은 두려움을 착각처럼 손끝에 느꼈다.

“이...... 이게 뭐야?”

“쿠쿠쿠...... 이 늙은이는 어린 시절 얼굴도 모르는 부모를 보고 싶을 때는 그 파천마상령(破天魔商鈴)을 흔들곤 했었다.”

― 파천마상령(破天魔商鈴)!

혁리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파천마상...... 령......? 부모님을 보고 싶을 때......?”

문득 혁리혼의 눈빛이 반짝 빛을 발했다.

‘그럼...... 얼음할아버지도 부모님을 모르고 자라셨구나. 이 혁리혼처럼.......’

혁리혼의 조그만 가슴이 문득 아파 왔다.

어린 그는 그제서야 늘 차갑고 고독한 얼음할아버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 늙은이를 키운 노야(老爺)가 준 것이다. 어린 나를 달래기 위해서...... 이제 네놈에게 준다. 그 옛날 노야가 나에게 준 것처럼...... 어서 꺼져라!”

“할아버지...... 고마워.......”

혁리혼은 희미한 웃음을 입가에 떠올렸다.

금적산노도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왠지 모를.......

“쿠쿠쿠...... 이 늙은이는 네게 부모님의 얼굴을 보여 줄 것이다. 허나 너에게 그 소원 외에 무엇이든 원하는 것이 있다면.......”

“......?”

“흔들어라, 마구 흔들어라! 과거 노야가 나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어떤 형용할 수 없는 격한 감정이 금적산노의 노안에 추스를 수 없을 만치 차올랐다.

그것은 금적산노의 얼굴에서 볼 수 없었던 놀라운 표정이었다.

그가 엄청난 격동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다.

“어서 꺼져 버려라! 이 죽일 놈아!”

금적산노는 격한 감정을 터뜨리듯 혁리혼을 향해 꼬아 놓은 새끼줄을 미친 사람처럼 내던졌다.

팍! 파아.......

혁리혼은 빙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난 알아...... 지금 할아버지 마음이 왠지는 모르지만 너무너무 슬픈 것을.......’

그는 조그만 입술을 깨물며 싸리문을 나섰다.

그의 걸음이 옮겨짐에 따라 조그만 관은 혁리혼의 그림자처럼 울음을 터뜨리며 따라간다.

드르르륵...... 드...... 드.......

아무도 없는 대청.

대청에 앉아 있는 금적산노는 최소한 그렇게 생각했다.

‘쿠쿠...... 리혼, 귀여운 녀석...... 너는 모른다. 이 늙은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휘이이이잉!

텅 빈 대청에 차가운 설풍(雪風)이 차고 들었다.

‘구십 년 전 처음 노야를 사랑했던 후로...... 네놈을 처음...... 사랑했다...... 쿠쿠...... 허나 네놈도 이제 이 늙은이의 곁을 떠나고 마는구나...... 죽일 놈!’

문득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금적산노의 텅 빈 시선이 자욱이 눈발이 휘날리는 허공을 건너 한곳에 머물렀다.

기(旗).

파다다다닥! 하나의 깃발이 눈보라에 미친 듯이 찢어질 것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천향화루(天香花樓)의 깃발이다.

악양성(岳陽城)에서 최고로 유명한 기루의.......

‘나는 관상을 볼 줄 알지. 며칠 이내 저 녀석은 떠날 것이다. 이제 숨은 용 새끼가 용틀임을 하며 창공을 날게 되는 게지. 저 천향화루의 깃발이 꺾어지는 순간......!’

무슨 말인가?

‘파천마상령을 훗날 주려 했으나...... 저 천향화루의 깃발이 이제 꺾일 것이기에 조금 일찍 네놈에게 주는 것이다!’

문득 그는 허공을 향해 고독해 보이는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상로(商老), 이제 주인은 바뀌었다.”

누구를 향한 말인가?

그의 음성이 끝나는 순간 허공 중에서 가슴을 울리는 격정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노...... 노태야(老太爺)!”

“상로, 더 이상 말하지 마라. 과거 노야께서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나의 의자(椅子)는 이제 새시대를 용 새끼한테 넘겨준 것이다.”

“노태야......!”

순간 금적산노는 허공을 향해 텅 빈 웃음을 터뜨렸다.

“어허허...... 헛헛...... 헛......!”

언제까지나 그의 웃음은 허공을 맴돌며 그칠 줄을 모른다.

그 웃음은 영원한 이별을 마무리짓는 아픔의 웃음이었다.

금적산노.

냉혈과 냉심(冷心)을 가진 돈벌레.

허나 그는 또 다른 얼굴을 가진 사람이다.

* * *

드르르...... 드...... 드.......

자꾸만 관은 울면서 혁리혼의 뒤를 따라간다.

‘이...... 상...... 해.......’

혁리혼의 여린 눈동자에는 자꾸만 지울 수 없는 의혹이 넘실거렸다.

‘늘 차갑고 무뚝뚝하던 얼음할아버지가 오늘만은 그렇지가 않았거든? 마치 아주 못 볼 것 같은 슬픔 같은 것이 얼음할아버지의 얼굴에 숨어 있었어...... 누구보다도 리혼은 얼음할아버지의 마음을 잘 알아.......’

딸랑....... 혁리혼은 품속에서 청아한 방울 소리가 들려오자 눈길을 자신의 가슴에 주었다.

손을 가만히 보듬듯 품속의 방울을 잡아 갔다.

왠지 자꾸만 얼음할아버지와 바꾸어 버린 것 같은 두 알의 방울.......

“후...... 하지만 얼음할아버지가 설사 내 곁을 떠나 어디론가로 가 버린다 해도 나는 찾을 수 있어.......”

‘얼음할아버지는 그랬거든.......’

― 쿠쿠쿠...... 쿠...... 흔들어라. 마구 흔들어라! 그리하면 너는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다!

문득 혁리혼은 방울을 흔들어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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