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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검무안 9화]
第二章 모두 떠나버린 섬 (2)
적송림은 불탔다.
어머니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십이좌실도 새까만 재가 되어 사라졌다.
모두가 타버렸다.
마록타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모두 다 태워버렸어.’
적송림에서 바라 본 마을 풍경도 가관이다.
아버지의 집무실은 주춧돌 몇 개만 남고 모두 허물어졌다. 자신의 거처였던 곳도 담벼락만 남았다. 다른 곳은 그래도 집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 도주가 거처하던 곳은 철저하게 짓이겨 놨다.
모두 불타고 부서졌다.
적암도는 마치 전쟁의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느낌을 준다. 잔인하게 군마(軍馬)에 짓밟힌 전장의 폐허가 이곳에 있다.
늘 사람으로 북적거리던 마을이 개미새끼 한 마리 구경할 수 없을 정도로 텅 비었다는 점도 새롭다.
이토록 절실했던가. 모두가 도주를 등지고 섬을 떠날 정도로 간절했던가.
해변에서 죽은 사람이 오십여 명이라고 했다.
마을에서 처단된 사람이 삼백여 명이라고 했다.
그야말로 대학살이다.
삼백오십 명을 죽이고 팔백여 명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스무 척의 배에 나눠 타고 떠나갔다.
적암도는 텅 비었다.
사람이 살던 흔적만 남았다.
그는 불타버린 십이좌실 중 팔좌실이 있던 곳으로 걸어갔다.
그곳도 다른 곳과 바를 바 없이 재만 남았다. 그 많던 서적들이 모두 불타버렸다.
그는 목 없는 아기동상의 팔을 붙잡고 뒤로 꺾었다.
그르르릉!
둔중한 울림과 함께 시커멓게 그을린 벽이 스르륵 움직였다.
사람들은 어머니를 과소평가했다.
송연부인이라고 하면 그저 마음씨만 좋은 현모양처로 생각한다.
적암도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 아니, 세상의 기준으로 평범한 것이니, 적암도 기준으로는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무능력한 사람이다. 그리고 또 그런 취급을 당했다. 겉으로는 존경심을 표했지만 속으로는 비웃었다.
그녀가 한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수북이 쌓여있는 책들을 정리해서 십이좌실로 나눠놓은 것뿐이다.
정말로, 정말로 송연부인의 능력을 잘못 알았다.
가장 뛰어난 사람은 가장 평범하게 위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속았다.
어머니는 기관진학(機關陣學) 신산귀계(神算鬼計)에 달통했다.
어쩌면 어머니는 그날 자신의 죽음까지도 내다봤을 게다. 이런 말을 하면 모두들 믿지 않겠지만, 그러고도 남을 분이다.
저벅! 저벅!
그는 열려져 있는 벽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까만 재로 뒤덮인 곳과 맑은 청석(靑石)으로 깔린 길이 뚜렷하게 대별되었다.
그르르릉!
그를 삼킨 벽이 다시 움직였다.
***
“마록타!”
노모보가 눈을 번쩍 떴다.
적암도의 모든 사람이 떠났다. 떠나지 않은 사람은 땅에 묻혔다. 하지만 단 한 사람! 그가 남아있다!
열등인간! 하등동물!
어느 세계에나 바보, 병신은 꼭 있다.
마록타는 적암도 제일의 병신이다. 무공을 수련할 몸뚱이도 아니고, 책을 읽을 만한 머리도 없고, 하다못해 배를 타고 나가서 물고기를 잡아올 근력도 없다.
놈은 이름도 없다. 마록타라고 불린다.
마노는 아름다운 보옥이다. 하지만 마노의 원석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마치 자갈에 푸른곰팡이가 핀 것 같다. 거기에 꼽추, 그래서 마록타다.
마록타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그 놈은 섬사람들이 버린 찌꺼기를 훔쳐 먹고 산다. 해변에 떠밀려온 물고기나 짐승의 사체를 주워 먹는다.
그 놈이 왜 이제야 생각났을까!
‘그놈이 적사해의 급류를? 아냐…… 그건 불가능해.’
섬에 마록타가 남아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놈이 야뇌슬을 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도 놈은 죽여야 한다. 섬에서 벌어진 일들을 낱낱이 보았을 테니까. 반란을 힘으로 일으키지 않고 독으로 제압하는 치졸함을 보였으니까.
그는 아버지의 계획에 반대했다.
정정당당하게 싸워도 이길 수 있는데 무엇 하러 독을 쓰는가.
아버지는 궁지에 몰린 쥐를 예로 들었다.
도주와 도주 편에 선 오십여 명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이쪽 피해도 만만치 않다.
중원을 얕보지 마라.
이주하는 주민은 팔백여 명에 이르지만,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이백 명에 불과하다. 다른 사람들도 한두 수 잔재간은 지니고 있지만 고수 앞에 들이밀 정도는 아니다.
중원은 고수가 구름처럼 많다.
중원의 태산북두(泰山北斗)라는 소림사(少林寺)에는 승려가 삼천이요, 무승(武僧)이 오백이다. 도가(道家)의 성지라는 무당산(武當山) 무당파(武當派)에도 칠백 제자가 있다.
인(人)의 장막을 뚫고 나가야 한다.
지금은 고수를 한 명이라도 아껴야 할 때다.
그 뿐만이 아니다. 번잡한 일이 일어나면 그 틈을 노리고 탈출하는 자도 생긴다.
야리몌가 탈출한다고 생각해 봐라.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네 씨를 낳는다고 생각해봐라. 그 씨를 받아줄 수 있는가? 너는 네 자식이니까 받아줄 수 있다고 치자. 미와빙은 어떤가? 그녀를 설득할 자신이 있는가?
깨끗이 정리하는 것이 좋다.
아버지의 생각대로 적암도는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어디까지나 치욕이다. 무인이 검으로 승부를 결하지 않고 독을 썼다는 것은 누가 봐도 비굴한 짓이다. 아주 치사한 행동이다.
그 짓을 마록타가 봤다.
“죽일 놈이 생겼군.”
죽일 놈이 생겼다는 건 일곱 명의 무인들에게 일거리가 주어졌다는 뜻이다.
마록타 같은 놈을?
사실 그런 인간을 죽여야 한다는 것, 그 자체가 모욕이다.
버러지 같은 인간을 죽이기 위해서 오제의 무공까지 수련한 무인이 나서야하다니.
그러나 그런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권태롭다.
어떤 면에서는 너무 따분해하는 그들을 위해서 심심파적 유희가 주어진 것이다.
“놈이 어디 숨어있는 지는 아무도 몰라. 혹시 알면 말해.”
검을 차고 있는 탁태자(卓台蔗)가 말했다.
“놈이 어디 있는지 알게 뭐야. 우리가 언제 그런 놈에게 신경이나 썼어?”
화륜을 차고 있는 노염백(魯閻伯)이 말했다.
“좋아. 이제부터 놈을 잡는다. 각기 흩어져서 잡되, 숨을 끊어놓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상품은?”
“한 달간 대형(大兄). 어때?”
“한 달간 주공으로 하자.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 아예 수하처럼 부려먹는 거지.”
검을 찬 우염비(于焰比)가 말했다.
그와 도의 달인인 곡문권(曲紋滾)은 오제의 핏줄을 잇지 못했다.
처음부터 적암도에 정착한 사람들이 아니라 난파(難破) 같은 불가피한 이유로 나중에 흘러들어온 사람들의 핏줄이다.
적암도에는 그런 핏줄들이 많다.
탁미왕노장(卓米王魯張)!
이 오성(五姓)을 제외한 여타의 성씨는 모두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사람들이다.
생각해보라. 그들이 적암도에 들어와서 편하게 살았겠는가.
원주민들은 무공이 하늘을 찔렀다. 오제의 절기는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발전을 거듭했다.
적암도는 범인(凡人)이 발을 디딜 땅이 아니다.
같이 어울려 살 수는 있다. 그들의 시중을 들어주고, 노역(奴役)을 하면 밥 한 술은 얻어먹는다.
귀천(貴賤)이 생긴 것이다.
오성을 가진 사람들은 귀한 사람들이고, 타성씨들은 천한 일꾼들이다. 잡일이나 하고, 고기나 잡아오고, 청소나 하는 막일꾼으로 만족하면 살아야 한다.
우염비와 곡문권은 그런 핍박을 이겨냈다.
그들은 참 운이 좋다.
먼저 도주가 타성이다. 야씨는 오성에 속하지 않지만 오성과 함께 적암도에 흘러들어온 원주민이다. 그런 성씨가 하나 더 있다. 송연부인의 일족인 빈(賓)씨다.
이 두 성은 오성에 속하지 않지만 오성과 동등한 권한을 누린다.
하지만 역시 오성이 아니기는 마찬가지다.
도주가 도주직에 오를 때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은 바로 성씨였다고 들었다.
도주는 취임한 후, 이십사 무동을 활짝 개방했다.
타성을 가진 자라도 무공을 배우고 싶으면 마음껏 배월보라고 문호를 활짝 열었다.
우염비와 곡문권이 태어나기 십여 년 전의 일이다.
도주가 그런 파격적인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선조들처럼 노역이나 하고 있을 게다.
자신들에게 힘을 준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억압하는 게 당연하다는 자를 위해 분골쇄신한다.
이래서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 차있다는 게다.
우염비는 오성을 가진 자들에게 약간의 자괴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더욱 무공에 매진한 면도 있지만.
탁태자가 씩 웃으면서 말했다.
“저놈 소원 좀 들어주자. 우릴 노예처럼 부리고 싶은 모양인데…… 하하하!”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무인도는 워낙 작아서 뒤질 곳이 없다. 눈을 감으면 무인도의 모든 모습이 그림 그리듯 그려진다. 큰 바위, 작은 바위, 노송이 몇 그루인지도 헤아릴 수 있다.
그곳에 숨을 곳은 없다.
마록타가 숨어있다면 역시 적암도다.
적암도는 천여 명이 부족함 없이 살았을 만큼 큰 섬이다.
이곳에는 숨을 곳이 많다. 하지만 그 어느 곳도 안전한 곳은 없다. 찾는 자 역시 적암도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숨을 곳이라고 생각되는 곳은 숨바꼭질을 하면서 한 번씩 숨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