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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176화 (176/200)

# 176

독왕전설 8권 完

1화

어찌 보면 꽤 오랜만이라고 할 수도 있건만 아무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시킨 차가 벌써 차갑게 식어 버렸다.

진검백이 갈지혁의 얼굴을 뜯어봤다.

단지 얼굴을 가렸던 머리를 묶어서만이 아니다. 뭔가 많은 것이 변했다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예전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그에게서 느껴진다.

여유로움.

그래, 바로 그거다.

예전의 갈지혁은 분명 강했다.

그와 싸우면서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될 자는 무림에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갈지혁은 초조해 보였다. 많은 자들이 갈지혁을 죽이려 들었고, 그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그랬기에 초조해 보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갈지혁도 항상 바쁘게 행동했다.

한데…… 지금은 아니다.

그의 몸에서는 예전엔 전혀 느낄 수 없던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심지어는 차를 마시는 가벼운 손짓에서조차도 그러한 느낌이 물씬 풍겨져 나왔다.

‘강해졌어.’

예전에도 강했다.

그러나 지금은 단지 강하다는 표현만으로 설명하기 힘든 수준이 되어 있었다.

여유가 뚝뚝 떨어지는 갈지혁은 철옹성(鐵甕城)이 되어 있었다.

그 누가 두드린다고 해도 무너질 것 같지 않은 견고한 거대한 성이 말이다.

“많이 변한 것 같네요.”

운하연 또한 진검백과 비슷한 생각을 한 듯하다.

“기연이라도 얻었나?”

“기연?”

갈지혁이 반문했다.

그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기연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갈지혁을 향한 일악천의 애정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준 일악천의 행동은 결코 기연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을 뿐이야.”

갈지혁은 대화를 잘랐다.

가만히 차를 마시는 그를 바라보던 운하연이 하고자 했던 말을 꺼냈다.

“단화초는 찾았나요?”

“찾았지.”

“…….”

“단화초를 찾지 못했다면 돌아오지도 않았다는 걸 알잖아.”

“휴.”

운하연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생각들이 지나간다. 그렇지만 섣불리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운하연은 다른 말로 화제를 돌렸다.

“이렇게 나온 걸 보니 정말로 독왕이 되었다고 판단한 모양이군요.”

“물론.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말에 진검백이 슬쩍 꿈틀했다. 그의 손가락 끝이 미미하게 떨려왔다.

풍객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차만 마시고 있다. 그는 확 변한 갈지혁의 모습에 쉽사리 말을 걸지 못했다.

애초에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지금의 그는 뭔가 초연한 듯한 기운을 토해 냈다. 근접하기 힘든 기운이 갈지혁에게서 느껴지는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사부님의 명을 받들 생각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고.”

“현재 무림 상황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

“어떤 부분을 말하는 거냐.”

“무림에 전쟁이 벌어졌다. 남만에 있는 독황독립문이 밀고 올라왔어.”

독황독립문이라는 말에도 갈지혁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태연한 척해도 은연중에 신경을 쓰더니 이제는 그러한 모습조차 없다.

애써 숨기는 것이 아니다.

독황독립문이라는 곳이 갈지혁의 관심 밖으로 사라졌다는 소리다.

그토록 복수를 하겠다고 하더니 대체…….

해남도에 가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하게 갈지혁은 변했다.

“상황은?”

“중원의 피해가 만만치 않아. 다행히 당문 덕분에 어느 정도 독을 막아 내고는 있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무림은 더더욱 힘들어질 거야.”

“그렇군.”

갈지혁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무림의 상황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 듯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혹 단리문이라고 들어 봤나?”

“단리문?”

“그래.”

“생소한 이름인데…….”

진검백이 운하연을 바라봤다.

뭔가 들은 것이 있냐는 듯한 눈빛이다. 그녀는 슬쩍 고개를 저으면서 자신 또한 아는 바가 없음을 내비쳤다.

“누군데 그래. 중요한 인물인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지.”

단리문이라는 자는 장막에 감추어져 있다. 알려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자.

지금 무림은 독황독립문에 모든 신경을 쏟고 있다. 독황독립문은 중원 무림을 뒤흔들고 있다. 그렇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독황독립문이 아님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단리문.

그자에 비하면 독황독립문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놈은 단화초를 손에 넣었다.

그것은 지독한 독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중원에 있는 모두를 죽일 수 있는 물건이다.

갈지혁만이 그를 막을 수 있다.

단화초의 독을 몸에 지니게 된 갈지혁만이 독성을 이겨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어느 마을 사람들이 독에 의해 몰살을 당한 곳은 없나?”

“그런 곳이 한두 곳이어야죠. 독황독립문이 나타난 이후로 사방에서 독 때문에 난리도 아니에요.”

갈지혁은 슬쩍 이마를 어루만졌다.

이것이다.

단리문은 독황독립문을 이용해서 시선을 끌고 있다. 그가 독황독립문의 문주인 지대익을 위해 싸운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런 인물이 지대익 정도 되는 자의 아래에 있을 리가 없다.

분명 지대익은 강하다. 그리고 문주로서 한 치의 부족함도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단리문이라는 자가 지대익의 수준을 넘어선다는 것이 문제다.

놈은 맹수다.

그것도 무리를 지어 사는 맹수가 아닌 고독한 늑대 같은 자다. 눈을 빛내고 기회를 노리다가 약점이 보이면 바로 목덜미를 물어 버리는 늑대다.

결코 누군가의 밑에 있을 자가 아니다.

갈지혁의 표정에서 무엇인가를 읽었는지 운하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단리문이라는 자가 누구죠?”

“……중원에 있는 생명을 모두 앗아갈 수 있는 힘을 가진 자.”

“뭐야?”

진검백이 발작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지만 이내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만큼 갈지혁의 말이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독황독립문에 쏠렸어.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독황독립문이 아닌 그야. 그리고 실질적으로 독황독립문을 움직인 것도 단리문일 거다.”

“……만나 본 적이 있나?”

“얼마 전 해남도에서 만나 싸움이 붙었었지.”

“졌나?”

“사부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죽었을걸.”

갈지혁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는 누군가에게 패한다는 것이 쉬이 믿어지지 않는 자다.

그리고 패했다고 한들 이렇게 손쉽게 대답할 자도 아니다. 그런데 이처럼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는 것은 그만큼 커다란 실력 차가 났다는 소리다.

변명할 거리 없는 깨끗한 패배.

갈지혁이 진검백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상대가 안 되더군. 나보다 최소 두 수는 앞선 자였어.”

“해남도에서 만났다면 얼마 안 되었을 것 아냐?”

“물론.”

갈지혁이 해남도에서 지낸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 기간 안에 단리문을 만나서 일방적으로 패했다. 지금 싸운다고 한들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몇 달이라는 시간으로 그리 큰 실력 차이를 줄인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나서 어떻게 하려고.”

대답은 정해져 있다.

갈지혁이 무슨 대답을 할지 알면서 물어본 거다. 알지만 쉽게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물었다. 다시 싸운다면 갈지혁은 또 한 번 패배를 경험해야 한다.

아니, 이기고 지고를 떠나 목숨이 붙어 있다면 기적이다.

갈지혁의 입에서 예상했던 답이 흘러나온다.

“싸워야지. 설마 입씨름이나 하려고 만나겠어?”

“얼마 전에도 졌다며.”

“그래. 그때는 졌지.”

“또 싸우면 넌 죽을 거야.”

진검백의 어조는 무미건조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갈지혁에 대한 걱정이 흠뻑 담겨져 있다. 죽는다는 말에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다.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갈지혁이 말했다.

“이번에 싸우면 내가 아닌 그놈이 죽을 거다.”

“…….”

무한한 자신감이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이러한 자신감이 지금의 갈지혁을 만들었다.

이게 바로 갈지혁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오기를 부리는 거라는 판단이 앞선다.

무공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패배를 쉽게 시인할 정도의 차이였다면 수년이 지나도 그 틈을 메우기는 상당히 까다롭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도 않은 지금이라면…….

무리다.

생각이 있는 자라면 그 누구라도 그리 생각할 것이다. 찻잔을 만지던 손을 뗀 갈지혁이 진검백의 두 눈을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다.

‘허언이 아니야.’

진검백은 결국 졌다는 듯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갈지혁에게는 도저히 못 이기겠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단리문이라는 자가 어디 있는지는 알고?”

“아니.”

“갈 곳은 정해졌어?”

“당문. 사천당문으로 갈 생각이다.”

“당문을?”

의외라는 듯이 진검백이 반문했다. 갈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없다.

갈지혁이 진검백과 운하연, 풍객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문으로 갈 건데 따라올 건가?”

“……물론이지.”

예전과는 다른 갈지혁의 모습에 내심 놀라면서 진검백은 씨익 웃었다.

갈지혁의 시선이 운하연에게로 향했다. 그녀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서 기다린 건 당신 때문이에요. 당연히 따라가야죠.”

“좋아. 그럼 서두르지.”

현재 중원의 상황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갔다.

독황독립문은 무공도 무공이지만 독을 쓰는 문파다. 그 탓에 조금만 방심을 하면 씻을 수 없는 타격을 입게 된다.

정도 무림은 바짝 긴장했다.

문제는 이 일이 단지 정파만의 것이 아니라는 거다. 독황독립문은 정파, 사파를 가리지 않았다.

중원을 제패하기 위해서 그들은 마교 또한 무너뜨리려고 들 것이 분명했다.

바로 마교를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문파들을 무너뜨리며 독황독립문은 중원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만약 사천당문이 없었다면 중원의 상황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문파에서 나름대로 비법이라고 준비해 두었던 해독제들이 통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른 지금 독황독립문의 독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 것이다.

지금 사천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싸움의 시작은 독황독립문이 있는 운남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운남에는 구파일방의 하나인 점창파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독황독립문을 막아 낼 힘이 있을 턱이 없다.

가뜩이나 갈지혁에게 의해 씻을 수 없는 타격을 입은 그들이다. 그러던 와중에 독황독립문이 나타나자 그들은 급히 힘을 모아 사천으로 이동했다. 운남이 독황독립문에게 먹혀 버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사천을 향해 무서울 것 없이 쏟아지던 독인들이 막힌 것은 사천당문과 청성파 때문이었다.

두 개의 힘을 통해 시간을 벌었고, 사방에서 구파일방을 비롯한 정파의 힘들이 사천으로 집결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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