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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172화 (172/200)

# 172

22화

“붙어 봐야 알 일.”

무슨 꿍꿍이를 지니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무력에서는 해남파 쪽이 위다.

그때 선두에서 막 검을 뽑던 곽생의 표정이 바뀌었다. 미묘한 무엇인가가 그의 신경을 건드린 것이다. 동시에 그가 급하게 소리쳤다.

“독이다!”

곽생의 몸으로 스며들려던 독이 갑작스럽게 밀려났다. 단리문이 백씨세가의 인물들에게 말했던 대로 이 독은 일정 수준 이상의 무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마음먹고 단리문이 독을 주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을 몰살시킬 것도 준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백씨세가에는 그가 없었다. 얼마 전 갑자기 사라진 후 단리문은 백씨세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극독은 아닌데…….’

잠시 고민하던 곽생은 얼마 전 해남파를 점령하면서 당했다는 독을 기억해 냈다. 그 독에 당하는 순간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내공을 점검해라!”

“어?”

사방에서 놀란 듯한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예상대로 지금 백씨세가가 쓴 독은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인 모양이다. 곽생은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내공이 사라진 자는 뒤로 빠지고, 독을 밀어낸 자는 앞으로 나서라!”

우르르.

일사불란하게 무인들이 움직였다. 진형이 새롭게 변했다.

곽생은 고개를 돌려 무인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이곳에 온 해남파 무인의 수는 팔백여 명. 개중에서 오백 명 이상은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분명 전력에 큰 손실이었다. 하지만 고수들이 이 독에 중독되지 않았다는 것은 커다란 다행이었다.

‘싸울 만하다.’

곽생은 검을 뽑아 올렸다.

그의 입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해남도의 사람은, 해남파의 무인은 무릎을 꿇지 않는다!”

“와아!”

뒤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 소리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무인의 혼을 들끓게 만들었다.

“검을 들 수 있는 자는 진격한다!”

말을 마친 곽생이 당당하게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백씨세가의 무인의 숫자까지 합치면 거의 이천에 달하는 무리가 싸움을 시작하려는 것이다.

어느 쪽이 이기든 커다란 피해는 감수해야 한다.

곽생은 바로 앞에 다가오는 자를 바라봤다.

‘백무령!’

백씨세가의 가주로 이자가 추대되면서부터 해남도는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이 많은 피를 흘리게 된 원인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무인들이 수두룩했다. 모두 육지에서 돈을 주고 데리고 온 무인들일 게다.

곽생은 그대로 일직선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 빠름은 낙뢰와도 같고, 날카로움은 마치 호랑이의 이빨과도 같았다.

남해삼십육검(南海三十六劍)!

곽생의 자랑이자, 그가 평생 동안 연구해 온 검법이다. 남해삼십육검이 앞장서서 오던 무인들을 덮쳐 갔다.

백무령은 급히 뒤로 물러났고 나머지 무인들이 앞으로 튀어나와 곽생을 제압하려 들었다.

무려 열 명에 달하는 무인이 곽생을 감싸고 살초를 펼쳤지만 그의 남해삼십육검 앞에 오히려 그들이 단숨에 쓰러져 버렸다.

번쩍 하는 듯싶더니 두세 명이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백무령은 당황했다.

‘곽생, 이놈의 무위가 이토록 높았던가?’

해남파의 장문인이라곤 하지만 몇 번 만나 본 그는 너무나 유한 사내였다.

싸움이라는 것도 모르는 듯했고, 야망도 없어 보였다. 사내답지 못한 우유부단한 자일 거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곽생은 분명 유한 사내다. 그렇지만 그건 평소의 모습이고, 검을 잡는 순간 그는 무인이 되어 버린다.

괜히 곽생이 해남파의 장문인이 된 것이 아니다. 그만한 능력이 있었기에 장문인이 될 수 있었던 게다.

곽생의 남해삼십육검에 주변은 피바다로 변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사방에서 붙기 시작한 싸움은 백중세를 유지했다.

독 때문에 싸울 수 있는 무인의 숫자가 확 하고 줄어 버린 해남파다. 숫자는 이쪽이 세 배 이상 많다. 그런데 백중세라니…….

만약 나머지 오백 명이 검을 들 수 있었다면 싸움은 단숨에 해남파 쪽으로 기울어졌을 것이다.

해남파가 백씨세가에 대해 잘 몰랐듯이 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해남파는 해남도 최고의 무력 단체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그들이 무공을 펼치는 일은 거의 볼일이 없었다. 남해도라는 섬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대부분이 자잘하다.

굳이 그들이 나서지 않아도 해결되고, 또 나선다고 해도 일부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랬기에 해남파의 무력을 견식해 볼 기회는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어째서 해남파가 구파일방의 하나인지 백무령은 그걸 간과했다.

‘이긴다고 해도 이건…….’

시간이 흐르면 분명 숫자가 많은 자신들 쪽이 유리해진다. 하지만 너무 많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분명 반수 이상은 죽게 될 게다.

하지만 물러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지금 물러나면 오히려 피해는 이쪽에서 감당해야 한다. 많은 자들이 죽겠지만 그뿐이다. 어차피 돈으로 사 온 자들, 죽는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었다.

그만큼 많은 돈이 빠져나가기는 하겠지만 까짓것, 해남도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깟 돈 몇 푼이 아까우랴.

이곳에 있는 모두가 죽어도 좋다, 해남파만 뿌리 뽑을 수 있다면.

피 냄새가 주변으로 서서히 퍼지기 시작할 때였다.

검을 휘두르던 자들 중 일부가 갑자기 쓰러지기 시작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해남파와 백씨세가 양쪽 모두 크게 당황했다.

그렇지만 이내 두 세력 모두 현재의 상황을 인식했다.

터벅.

싸움을 벌이던 무인들 모두 발자국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 들어서고 있었지만 사내의 걸음걸이는 너무나 가벼웠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고, 섣부르게 움직이지도 못했다. 지금 나타난 사내의 정체를 이곳에서 모르는 이는 없었다.

백무령이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사내를 응시했다. 옆에 있던 화문성을 바라보자 그가 슬쩍 고개를 끄덕인다.

침통 어린 말투로 백무령이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갈지혁…….”

“정 싸우고 싶으면 나와 싸우지요. 해남파 장문인, 나와 싸우시겠습니까?”

“아니.”

곽생이 검을 내리며 말했다.

망설일 것도 없다.

지금 갈지혁이 이곳에 왜 나타났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다. 그리고 갈지혁과 마찬가지로 곽생 또한 이처럼 많은 피를 흘리는 것은 원치 않았다.

갈지혁은 대답을 듣기가 무섭게 고개를 돌려 백무령을 바라보았다.

“백씨세가의 가주 백무령, 나와 싸우시겠습니까?”

“…….”

대답할 수가 없었다.

천하의 그 누가 갈지혁과 싸우고 싶겠는가. 다만 이대로 물러선다면 백씨세가는 남해도를 휘어잡으려던 계획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는 거다.

이번에 물러서면 백씨세가가 해남도의 패자가 되는 것을 다시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백씨세가는 돈에 의해 고용된 자들이 있는 곳이다. 해남파와는 다르다. 고용된 자들은 이번에 싸우고 나서 돈을 받고 떠날 자들이지만 해남파는 그렇지 않다.

더군다나 이렇게 해남파와 싸운 일도 소문이 날게다. 아무리 돈을 준다고 해도 지금처럼 백씨세가에 몰려들지도 않을 것은 분명하다. 해남파는 구파일방의 하나.

육지에서 온 이들에게 구파일방이라는 것은 경외의 대상이자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나는…….”

싸워야 한다. 지금 싸우지 않으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가주!”

뒤에서 수하의 외침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해남파만 해도 버거운데 갈지혁까지 개입한다면 싸움은 완전히 기운다. 싸워 봤자 죽는 것은 이쪽이다.

지금 싸우면 모든 것을 잃는다.

백무령의 옆에 있던 화문성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러나야 합니다.”

“…….”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토록 꿈꾸어오던 해남일통의 꿈이 너무나 쉽게 무너졌다.

이십 년 넘게 준비해 왔거늘 단 한 명으로 인해 꿈이 무산돼 버렸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백무령은 눈을 감았다.

“……물러가겠네.”

* * *

시끄러웠던 해남도는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갈지혁이 있었다. 해남도에서 갈지혁이라는 이름은 이제 세 살짜리 아이라도 알 정도가 되어 버렸다. 그의 이야기는 다소 살이 붙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백씨세가와 해남파가 격전을 벌이는 사이에 나타나 교섭을 벌인 이야기는 아마 몇 십 년간은 해남도의 이야깃거리가 될 게다.

두 세력 사이에 나타나 자신과 싸우겠냐고 묻는 질문에 두 곳 모두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싸움은 저절로 끝나 버렸단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꿈꿀 법한 멋진 장면이 아니던가.

일악천이 돌아왔을 땐 이미 싸움은 끝나 있었다. 예상대로 갈지혁은 싸움을 조기에 종결시켜 버린 것이다.

그는 단화초의 다른 비밀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해남파는 자신들의 본거지를 돌려받았다.

백씨세가의 목적이 파괴가 아니었던 탓에 돌려받은 해남파는 원래의 모습 그대로였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왔지만 그들의 감회는 새로웠다.

해남파는 빠르게 모든 것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곽생이 가장 먼저 준비한 것은 바로 갈지혁이 원했던 약재들이었다.

신세를 졌다. 평생을 두고 노력해도 못 갚고 죽을 정도로 커다란 신세를 말이다.

해남파 구석의 조용하면서 경관이 좋은 방을 내주었고, 그곳에서 갈지혁은 아무의 방해도 없이 일악천과 시간을 보냈다.

그토록 기다렸던 약재들이 해남파로 돌아온 지 삼 일째 되는 날 아침 모두 전해졌다.

일악천은 직접 약재들을 살폈다.

“괜찮군.”

해남파가 전력을 다해서 이 약재들을 구하기 위해 매달렸다. 특상품 만으로 준비된 것은 당연하다.

약을 만들 물품들은 모두 준비되었다.

며칠 전에 이미 일악천이 부탁해 둔 탓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다.

남은 것은 약재를 만드는 것과 갈지혁이 단화초를 흡수하는 것뿐이다.

갈지혁은 가부좌를 튼 채로 앉아 운기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동안 일악천은 약재를 만들었다.

한 시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갈지혁은 운공을 끝냈고, 일악천도 약을 만들어 냈다.

눈을 뜬 갈지혁이 마당에 있는 일악천에게 다가갔다.

“몸 상태는?”

“좋습니다.”

갈지혁은 담담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 그가 어떠한 기로에 서 있는지 잘 아는 일악천이었다.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오히려 죽을 확률이 다섯 배가량은 높다. 정말 운이 좋아야 성공이지 그렇지 않으면 갈지혁은 죽는다.

알면서도 갈지혁은 단화초의 독기를 흡수하려고 한다. 그리고 일악천도 말리지 않는다. 지금 할 수 있는 선택이 이것밖에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미 해남파에 장소도 부탁했다.

지금 이곳에서 단화초의 독기와 싸운다 치자. 만약 갈지혁이 이겨 내지 못하면 이 근방에 있는 모두가 죽는다.

그래서 준비된 곳이 바로 해남파가 예전 중죄인을 가두던 지하 감옥이었다. 지금은 아무도 없고, 땅속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해서다.

일악천이 갈지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가자.”

“예.”

둘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해남파의 지하 감옥은 아무에게나 개방되어 있지 않다. 물론 아무도 없다고 하지만 출입이 제한된다.

문을 지키고 있던 무인들은 누군가가 다가오자 막아서려다가 그들의 정체를 알고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다름 아닌 갈지혁과 그 일행들이었기 때문이다.

갈지혁은 남해파의 은인이다.

미리 언급을 받은 것이 있는 탓에 그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지하 감옥의 입구를 열었다.

일악천과 갈지혁은 그 어두운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계단이 끝없이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엄청난 깊이다.

터벅터벅.

발자국 소리가 울린다.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걷기만 할 뿐이었다.

긴 계단이 끝나고 이내 죄수들을 가두던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깊은 곳까지 걸어간 갈지혁은 그 자리에 앉았다.

일악천이 품에서 두 가지를 꺼냈다.

하나는 오늘 만든 약재, 다른 하나는 단화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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