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독왕전설 6권
1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십사영에게서 날아온 서신은 단리문이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상대로라면 지금쯤 진검백과 운하연이 살아 있어서는 안 된다. 둘은 죽어야 했고, 갈지혁은 어떻게든 이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겨 단화초를 찾아가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이 완전히 틀어졌다.
보냈던 네 명의 무인 중 셋이 죽었다. 그나마 흑풍이 살았지만 그 또한 몸이 온전하지 못한 상태란다. 그런데 죽여야 할 둘 중 단 하나도 죽이지 못했다.
완벽한 손해다.
“이럴 리가 없는데…….”
세 명이 죽은 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흑풍이 몸을 피한 것은 다르다.
단리문이 믿었던 것은 그 네 명이 아니라 바로 흑풍 하나였던 것이다.
다들 패한다고 해도 흑풍이라면 혼자서도 모든 걸 끝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서신의 내용을 보면 합공을 당한 것도 아니다.
갈지혁과의 일 대 일 대결.
그리고 동수를 이루었던 듯하다.
단리문은 쉽사리 믿어지지 않았다. 흑풍이라면 자신 또한 무시 못 할 실력자다.
현재 무림에서 숨겨진 은거기인까지 해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데 충분한 자다.
문제는 그것도 옛말이라는 거다.
흑마진천무뢰마공(黑魔眞天舞雷魔功)이 극에 달한 지금 흑풍의 실력은 예전과는 또 다를 것이다.
그런 그와 동수라니…….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건가?’
갈지혁이라는 자를 나름대로 크게 판단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조차도 너무 작았던 모양이다.
괴물 같은 놈이다. 이제야 단리문은 갈지혁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 흑풍을 꺾을 만한 고수라니…….
그뿐만이 아니라 진검백과 운하연 또한 적지 않은 실력을 지닌 듯하다.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던 자들에게 발목을 잡힌 기분이다.
낙화검 진검백. 삼류의 무인으로 떨어져 버린 자다.
약선문의 소문주 운하연. 무공과는 거의 담을 쌓다시피 하고 약에만 파고든 줄 알았던 여인이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으니 가관이다.
진검백은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절초인 매화만리향을 펼쳐 댔고, 운하연이라는 여인은 주먹으로 철부마왕을 때려 죽였다.
“어처구니가 없군 그래. 쓰레기라고 불리는 무인이 펼치는 매화만리향, 철부마왕을 힘으로 압도해 쳐 죽인 여인…….”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뭐, 크게 상관은 없지. 어차피 시간이 해결해 줄 일.’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신이 그 셋을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것이다. 단리문은 나무에 기대고 있던 등을 천천히 떼면서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건물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무당파(武當派).
그렇다. 지금 단리문은 무당파의 지척까지 와 있었다.
단리문은 서신을 품속으로 집어넣고는 씨익 웃었다.
“바빠지겠어. 이 일만 해결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수를 써야겠군.”
그는 지금 무당파에 목적이 있다. 그리고 오늘 단리문은 그동안 생각했던 모든 일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단리문은 전혀 망설임 없는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무당파를 향해 걸었다.
무당파의 문 앞을 막고 있는 무인들이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진황 스승님을 뵈러 왔습니다. 단리철이라고 합니다.”
“아……!”
단리문은 자신을 단리철이라고 소개했고, 그의 이름을 듣자 무인들은 무엇인가 알아차린 듯 한 모습을 보였다.
단리철이라면 무당파에서 꽤나 유명한 인물이다. 제자를 들이지 않기로 유명한 진황이 유일하게 맞이한 제자이다. 그것도 속가제자이니 무당파의 이야깃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안쪽으로 무인이 사라지더니 이내 그가 나타났다.
“안으로 오시랍니다.”
비록 나이는 그가 훨씬 많아 보였지만 무인은 존대를 썼다.
배분의 차이다.
지금 단리문은 무당파의 장문인인 무진악의 윗 배분인 진황의 유일한 제자다.
속가제자라고는 해도 그 배분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단리문은 무당파의 문을 어렵지 않게 통과하고는 진황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진황은 단리문의 스승이다.
어렸을 적에 그를 거뒀고, 그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단리문에게 야망을 심어 준 인물이기도 하다.
진황의 거처에 이르렀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모두 물린 모양이다.
예전부터 단리문과 이야기할 때는 주변에 있는 모두를 물러나게 하던 그다.
그건 둘의 이야기를 절대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단리문이 문을 두드렸다.
“접니다.”
“들어오너라.”
안에서 차분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리문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는 노인 하나가 단정한 자세로 앉아 무엇인가를 그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일은 잘되어 가느냐?”
“물론.”
“알아차린 자는?”
“없습니다.”
“일은 확실히 해야지, 미적거리다가는 뒤꼬리를 잡히기 십상이지.”
진황은 붓을 내려놨다. 그의 앞에 있는 하얀 종이 위에는 학이 그려져 있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종이에서 뛰쳐나와 하늘을 날 것만 같이 생생하다.
“찾아온 이유는?”
“……제 계획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 독은 완성된 듯하고, 갈지혁이라는 놈의 뒤도 잘 쫓고 있지 않느냐?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더냐?”
“하나 있습니다.”
진황은 그게 무엇인가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단리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
단리문이 천천히 다가와 종이 위에 그려진 학을 바라봤다.
“당장이라도 뛰쳐나올 듯이 생생하군요.”
“아직 멀었지. 그보다 네 이야기가 듣고 싶은데…….”
“아닙니다. 완벽해요. 당신은 앞으로…… 이보다 완벽한 학은 그리지 못할 거니까.”
“뭐?”
찰나였다. 코앞까지 다가온 단리문의 손이 진황의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퍼억!
“커, 커억!”
손은 가슴을 관통하고 뒤로 빠져나와 버렸다. 진황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는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렸다.
“이, 이노옴……!”
“폐물은 물러날 때야. 너무 오래 살았지.”
“주, 죽어……!”
진황은 손을 움직였지만 그 위력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그는 천천히 무너져 내렸고, 단리문은 쓰러진 자신의 스승을 보면서 다시금 미소를 흘렸다.
단리문은 포권을 취했다.
“고마웠소, 나를 키워준 건. 하지만 알았어야지. 개 주제에 호랑이의 새끼를 키우면…… 결국 죽는 건 당연한 거 아냐?”
말을 마친 단리문은 몸을 돌렸다.
무당파에서 진황을 죽였다.
자신이 들어온 것도 알고 있을 테니 범인이 누군지도 단박에 알려질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자신의 존재는 뜬구름 같은 것이니까.
“이제…… 갈지혁 일행이 남았나?”
하늘이 유난히도 푸르다.
무당파의 하늘은 볼 때마다 아름답다.
펄럭.
옷자락이 하나 휘날린다.
푸른색 옷이다.
하늘처럼 맑고 색은 짙으며 알 수 없이 사람을 끌어들이는 아름다운 색이다.
해검지(解劍池).
무당의 성지다.
무당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이곳을 들어가는 무인은 모두 무기를 두고 간다. 그곳에 한 남자가 도도한 표정으로 서 있다.
그의 모포 자락이 휘날린다.
그는 앞에 놓여 있는 자신의 검을 들어 올렸다.
사내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참…….”
차르릉.
검이 뽑혀 나왔다. 그는 주변을 스르륵 둘러봤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무인들.
미칠 듯이 바람이 불어온다.
사내가 웃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이 원을 그렸다.
날카로운 예기로 가득한 검면에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무인들의 모습이 비쳤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단리철!”
해검지에는 커다란 나무들이 있다.
그 나무들에는 이런저런 장식들이 달려 있다.
흰색 끈, 붉은 끈, 청색 끈이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인들의 기도 때문이다.
그들의 내공이 밖으로 표현되면서 주변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참 아름다운 광경이다.
“단리철!”
귀청을 울리는 소리에 사내는 표정을 찡그렸다.
시끄럽다. 귀가 아픈 이런 소리를 듣는 것 또한 고역이다.
“시끄럽군. 난 단리철이 아니야. 내 이름은 단리문이지.”
이곳에 홀로 서 있는 사내는 단리문이었다.
그리고 그를 죽일 듯이 살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건 무당파의 무인들이다.
그렇지만 단리문의 말이 그들은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개중 하나가 반문했다.
“단리문? 그게 무슨……?”
“몰라도 돼. 무당의 무인은 모두 죽을 테니까. 어차피 다 죽으면 알아봤자 쓸모없는 것들이지.”
“네놈이 돌아도 단단히 돌았구나. 사숙조 어르신을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무당을 모욕해?”
단리문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상관없는 그다.
지금 이곳에 나타난 무당파의 무인의 수는 언뜻 봐도 오십을 넘어선다.
그것도 일류 이상의 무인들이 전부다.
픽 하고 웃으며 그가 말했다.
“꽤나 빠르구나, 무당의 개들.”
“건방진……!”
노인 하나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진황의 사손뻘로 지금 무진악과 같은 배분을 지닌 자다.
그는 지금 단리문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무당에서 진황을 죽였다. 만약 시비가 아니었다면 이리 빨리 알아차리지 못했을 게다.
시비가 알아차리고 바로 보고를 했고, 단리문이 채 해검지를 벗어나기 전에 포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당황할 거라고 생각했던 단리문이 너무나 태연했다.
도망치려는 시도조차 보이지 않은 모습에 그는 단리문이 무엇인가 한 수가 있다고 판단했다.
“무화, 나이가 들었으면 조용히 처박혀 있지 왜 굳이 이런 자리를 찾아와 죽음을 자초하는 거냐?”
“듣다 보니 못하는 말이 없구나, 이놈!”
노인은 단리문이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며 말하자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렸다.
더 이야기할 것도 없다.
진황을 죽인 것은 단리문이다. 그리고 지금 그의 행동을 보면 그 누구도 단리문이 진황을 죽였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을 게다.
스승을 죽였다.
다른 곳도 아닌 무당파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졌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무당파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처벌은 하나다.
필살이다.
“네놈은 스승을 죽였다. 그리고 사숙들에게…….”
“한 번도 그를 스승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고, 단 한 번도 너희들을 내 사숙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착각도 수준급이군.”
이 이상 말해 무엇 하랴.
무화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당이 어떻게 하다가 이런 자를 제자로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다.
지금은 무당이 벌여 놓은 일을 스스로의 손으로 거둘 때가 된 것이다.
“……더 이상 할 말은 없을 듯 하군. 쳐라!”
오십 명의 무인 중 일부가 단리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우선은 그의 실력을 파악하고 빠르게 제압하려는 듯했다.
그때 단리문의 검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덩실거리면서 춤을 추는 듯이 그의 몸이 기이하게 꺾였다. 화사하고 부드러운 동작 끝에 검에서 터져 나오는 것은 서릿발과도 같은 검기였다.
퍼버벅!
검기는 채 피할 틈도 주지 않고 사방으로 비산해 무인들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그 위력도 위력이지만 너무나 빨랐기에 무인들은 미처 피해 내지 못했다.
꽈당!
일류에 달하는 무인 일곱이 그대로 땅에 처박혔다.
무화의 표정이 변했다.
그가 아는 단리문은 분명 무재이긴 했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자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