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22화
싸움터를 전전한 귀면수라 또한 약선문의 무공을 얕봤다. 실전에서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운하연을 얕봤다. 그런데 정작 그녀가 들고 나온 것은 권법이다.
“이, 이 계집이…….”
철부마왕은 애써 고통스러운 표정을 감췄다.
적어도 상대에게 그러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다. 운하연은 그저 웃으면서 주먹을 들어 올렸다.
“또 가죠.”
그런 운하연의 모습에 갈지혁은 그제야 여태까지 그녀가 자신의 공격들을 피해 낸 것이 이해가 갔다. 어느 정도 실력을 감추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기대 이상이다. 검을 겨루고 있던 진검백 또한 그러한 운하연의 모습에 놀랍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운하연이 기수식을 취했다.
오른손은 강하게 말아 쥐고 아래로 향했고 왼손을 하늘거리며 하늘을 향해 치솟는다. 흡사 아름다운 춤을 추는 무희(舞姬)와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오른손과 왼손 사이에 알 수 없는 기운이 몰리기 시작했다.
약선문에는 권법이 하나 있다.
비루십이권(悲淚十二拳).
알려지지 않은 권법이다. 그것은 여인이 만든 권법으로 열두 개의 초식으로 되어 있다. 그 초식 하나하나에는 이 무공을 만든 여인의 한이 서려 있다.
살의가 짙다. 그랬기에 약선문에서는 그 무공을 감췄다. 익히지 않은 이유는 살의가 짙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제약이 많았던 탓이다.
우선은 여인만이 익힐 수 있다. 그것만 해도 약선문의 무인들 대부분은 익힐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슴에 한이 있어야 한다. 또 한이 있다 해도 깨달음이 없다면 일반 주먹질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삼류 무공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무공을 약선문이 굳이 무림에 내보였을 리가 없다. 실제로 그 무공을 제대로 익힌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무공을 만든 여인조차 이 권법을 펼쳐내지 못했다.
약선문 역사상 처음으로 비루십이권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일권(一拳). 무루주(舞淚酒).”
하늘거리면서 춤을 추는 두 개의 주먹. 그 안에서 쏟아지는 눈물.
넋을 잃고야 말았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그러면 절대로 안 되는데…… 넋을 잃고야 말았다.
여인의 마음은 철부마왕조차 흔들리게 했다. 문득 그가 정신을 차리는 순간 이미 운하연의 주먹이 그의 가슴을 격타했다. 입에서 울컥하며 피와 함께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엄청난 위력이다. 철부마왕이 겨우 여인의 주먹질 한 번에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이다.
다행히 철부마왕이 강력한 외공을 익힌 탓에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이런 주먹을 계속해서 버텨낼 수는 없다.
상황을 보고만 있던 흑색의 사내가 혀를 찼다. 너무 쉽게 생각했다. 단리문이 왜 자신들을 보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자신들 정도는 돼야 이들을 제압할 수 있다.
‘얕봤군.’
늦게 깨달았지만 동요는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 자신이 멀쩡하니까.
“광살마존!”
진검백과 검을 겨루고 있던 광살마존이 고개를 돌렸다.
“철부마왕!”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서 있던 철부마왕이 고개를 돌렸다.
“귀면수라!”
갈지혁에게 막 살초를 펼치려던 검을 멈추며 귀면수라가 고개를 돌렸다.
그 셋은 모두 흑색의 사내를 바라봤다. 자신들의 별호를 부른 것이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다. 굳이 정체를 가르쳐 줄 필요는 없었던 탓이다.
그 세 명의 별호를 모두 듣자 진검백과 운하연은 그들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진검백은 광살마존에 대해 안다. 철부마왕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지독한 마인들이다. 그렇지만 그는 귀면수라에 대해서는 모른다.
귀면수라를 알고 있는 건 운하연이다. 그녀는 귀면수라에 대해서 예전에 들은 적이 있다.
다들 사라졌다고 알려진 마인들이다. 그런 그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각기 활동하던 곳도 달랐고, 결코 누군가의 밑으로 들어갈 만한 자들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분명 누군가의 사주로 이곳에 왔다.
그리고 동시에 저 흑색 피부를 지닌 사내에 대한 의문도 생겼다. 이 셋 모두 이 사내에게 복종하는 듯한 모습이다.
이런 세 명을 복종시킬 만한 자라면……?
“상대를 경시하면 너희들이 죽는다.”
“뭐? 내가 죽는다고?”
광살마존의 표정이 변했다. 진검백과 마주하면서 이들의 실력이 예상보다 강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단 한 번도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은 그다. 비록 이들이 강하다 해도 자신과 이 셋에 비하면 한참은 애송이라고 생각한 탓이다.
그리고 만약 자신들이 다 진다고 해도 그 사내가 있으니까…….
광살마존이 그토록 믿는 사내가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경시하면이라고 말했다. 적어도 그가 우리를 보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는데 그걸 몰랐다.”
그는 입고 있던 불편한 윗도리를 벗어 옆으로 던졌다. 어깨까지만 덮고 있던 옷이 드러났다. 완벽한 흑색의 피부.
그렇지만 전혀 이국의 인물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생긴 것이나 말투 모두 완벽한 중원인의 것이다.
“흑풍(黑風)이군요, 당신.”
긴가민가 했던 운하연은 어깨에 드러난 문신을 보고 말했다.
그러자 세 명의 인물이 움찔했다. 설마 그를 알아볼 자가 있을 줄은 모른 듯했다. 그러자 흑색의 사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대단한 아가씨군.”
“왜 당신이 여기 있는 거죠?”
“왜?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되나?”
“무당파의 뇌옥에 갇혀 있어야 할 당신이니까요.”
흑풍이라면 무당파의 뇌옥에 이십 년 전에 갇힌 인물이다. 그런 그가 지금 이곳에 버젓이 서 있는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무당파의 지하 뇌옥이다.
천 년 뇌옥이라고까지 불리는 그곳으로 들어간다면 결코 나오지 못한다. 그런 곳에서 어떻게……?
“흑풍? 저자가?”
진검백 또한 흑풍에 대해서는 장문인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무림의 이단아였다. 그리고 지금 무림에서는 흑풍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무림에서 지우고 싶은 이름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희대의 살인마.
희대의 광인.
그는 무당파의 인물이었다. 그리고 무당파의 기재였다.
파문당하는 바로 그 전날까지.
흑풍은 무당파에서 파문당했다. 사부를 잔혹하게 죽인 죄로.
이곳에 온 괴한들의 정체가 모두 밝혀졌다. 하나하나가 모두 상상을 불허할 정도의 인물들이다. 그런 자들 넷이 누군가의 명으로 이렇게 무리를 만들어 다닌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이 정도의 인물들이라면 중원에서 죽이지 못할 자가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을 게다.
네 명의 연수 합공을 막아 낼 정도의 고수는 무림에 흔치 않을 테니까. 특히 흑풍이라면 무당파의 차기 장문인으로 거론되던 자다.
그의 자리를 대신해 장문인의 자리에 있는 것이 지금의 무진악이다.
무진악의 사형이기까지 한 그는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될 무공에 손을 댔다. 무당파의 무공이 아닌 천 년 뇌옥에 갇힌 마인의 금지된 무공에 말이다.
그 대가로 흑풍은 온몸의 색이 변해 버렸다. 그리고 그는 그 비밀을 눈치챈 사부를 때려죽이고 무림으로 도망쳤다. 그때부터 그는 신분을 감추고 흑풍이라는 별호로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그렇지만 아무리 감쪽같이 숨겼다고 해도 결국은 꼬리가 잡히는 법이다.
흑풍의 정체를 알아낸 무당파가 그를 쫓았다. 그 와중에 무당파가 입은 피해는 적지 않았다. 완성되지도 않은 무공으로 무당파를 그토록 뒤흔들었던 그다. 그때의 흑풍은 광인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금지된 무공을 완벽하게 익혔다는 말이 된다.
그때도 그만큼 강했던 흑풍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그는 그때와 비교도 못 할 정도로 강해졌을 게다.
상대의 정체가 흑풍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자 운하연과 진검백 모두 얼굴빛이 변해 버렸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아는 탓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괴물 같은 셋도 있으니…….
주변에 침묵이 흐르자 갈지혁은 품속에 손을 넣었다.
흑색의 수투를 꺼내 든 갈지혁은 그것을 손에 꼈다. 만만치 않은 상대다. 갈지혁의 입가에서 냉소적인 말이 튀어 나왔다.
“네가 흑풍이든 뭐든 나와는 상관없지. 넌 우리를 죽이러 왔고, 난 죽어 줄 수 없다는 거, 그게 전부다.”
“큭큭, 맞아. 네 말이 맞아. 우리는 싸워야 해. 그게 다야.”
흑풍의 어깨에 그려진 검은색의 회오리 문신이 꿈틀거렸다. 그의 온몸이 미동했다. 당장이라도 근육이 터질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다지 거대한 몸은 아닌데 마치 돌로 된 성처럼 단단해 보인다.
흑풍의 몸에서 하얀 기운이 일기 시작했다.
마치 온몸이 검이 된 듯하다. 날카로운 예기가 미친 듯이 춤을 춘다. 진검백은 검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흑풍은 엄청난 고수다. 지금 눈앞에 있는 광살마존도 그렇지만 흑풍에 비한다면 한참은 모자라다.
‘내가 도와야 한다.’
갈지혁이 상대해야 되는 자의 수는 둘이다. 흑풍 하나로도 벅찬 상태인데 귀면수라라는 자까지 상대해야 한다.
운하연의 실력은 잘 모른다. 그렇지만 자신 있게 나선 이상 승산이 있기에 그런 것일 게다. 적어도 운하연이라는 인물은 자신의 그릇도 모르면서 함부로 나설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아는 탓이다.
‘철부마왕은 운하연이 잠시 막을 수 있어. 귀면수라라는 자도 강하긴 하겠지만 갈지혁이라면 막아 낼 수 있을 테고. 문제는 역시 흑풍인데…….’
아까와는 달리 흑풍의 몸은 투기로 가득했다. 여태까지 관전만 했지만 이제부터는 그 또한 움직이려고 들 게다.
흑풍의 두 손으로 알 수 없는 기운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진검백은 자연의 움직임을 몸으로 느꼈다.
당장이라도 폭풍이 몰아칠 것만 같다.
갈지혁은 고개를 반쯤 숙인 채로 천천히 움직였다. 머리카락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검백과 마찬가지로 갈지혁 또한 상대가 어느 정도 실력을 지닌 자인지 정도는 알 수 있다.
‘최고의 상대.’
여태까지 싸웠던 그 누구보다도 강하다. 그것만큼은 자신할 수 있다.
웬만한 독으로는 절대 상대할 수 없을 게다. 시답지 않은 독은 뿌려봤자 피해는커녕 공격할 기회만 만들어줄 것이다. 갈지혁은 말없이 작은 칼을 꺼내 팔을 그었다.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다. 미치도록 붉은 피.
갈지혁이 지닌 최대의 독은 바로 그의 피다.
“조심해라, 귀면수라.”
갈지혁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흑풍이 말했다. 붕대로 온몸을 가리고 있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갈지혁의 독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독이 얼마나 위협적인 것인지도 잘 알고 있다.
귀면수라는 검을 들어 올렸다. 그 또한 흑풍에게는 많이 뒤처지지만 절정의 반열에 오른 고수다.
철부마왕은 자신의 뺨을 강하게 쳤다.
짝짝거리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릴 정도다. 싸움이 벌어지면 의당 사람이 모인다. 그렇지만 지금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갈지혁의 거처인 탓이기도 했지만 누군가가 이 주변을 막고 있는 게 분명하다.
“흐흐!”
철부마왕은 입술이 터져 흐르는 피를 닦아 내며 웃었다. 그 모습이 사뭇 살기가 가득해 보인다. 그렇지만 운하연은 태연했다.
“아가씨!”
밖으로 나온 풍객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외쳤다. 운하연은 그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아가씨…….”
지켜 주고 싶다. 하지만 풍객도 알고 있다. 자신이 어떻게 철부마왕이라는 거물과 싸울 수 있단 말인가. 자신보다 운하연이 훨씬 강하다는 것도 잘 아는 그다.
운하연 또한 그걸 안다. 그렇지만 풍객이 자신의 옆에서 지켜준다고 설치는 것을 단 한 번도 말리지 않았다. 그런 풍객의 마음을 잘 아는 탓이다.
그렇지만 지금만큼은 풍객이 나서게 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 실력이 되어야 싸워도 싸우는 법이다. 풍객과 철부마왕의 차이는 너무 크다.
거대한 도끼가 들어 올려졌다.
광살마존의 입가에서 예의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놈은 죽을 게다, 화산파의 애송이.”
“그래, 난 죽을 거요. 늙어서.”
“장난칠 여유도 있고 좋구나.”
노인의 얼굴에서는 젊은 자의 목소리가, 손가락에는 날카로운 암기들이 자리했다. 상대하려는 자는 광살마존이지만 이미 머릿속은 어떻게든 갈지혁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앞에 있는 자만 단박에 제압하면 일이 쉬워질 텐데…….
쉽지 않은 상대라서 문제다. 순식간에 제압할 정도로 만만치 않다. 진검백의 얼굴도 진지해졌다.
광살마존이라면 암기술의 달인이다. 그리고 박투에 능하기도 한 자다.
진검백은 들어 올린 검에 내공을 집중했다. 시간을 끌 생각은 없다. 단숨에 이십사수매화검법을 펼쳤다.
파악!
주먹을 내질렀을 뿐인데 엄청난 권풍이 휘몰아친다. 갈지혁은 뒤로 물러나면서 손바닥을 휘둘렀다.
쾅!
굉장한 소리와 함께 갈지혁의 몸이 뒤로 쭉 밀려났다. 발바닥으로 땅을 차면서 갈지혁의 몸이 공중으로 부웅 하고 떠올랐다. 그 찰나 검 한 자루가 갈지혁의 발 부분을 스치며 지나갔다.
귀면수라의 검이다.
땅에 채 발이 닿기도 전에 귀면수라의 검이 다가왔다.
비혼살영이라고 불리는, 그림자같이 은밀하게 다가오는 검이다.
채 눈치채기도 전에 검날이 목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이들은 갈지혁을 죽일 생각이 없다. 그렇지만 우선 제압하기 위해 살수를 펼치는 것이다.
타타탕!
갈지혁의 소매가 갑자기 솟구치는 듯하더니 검을 쳐냈다. 귀면수라는 의외라는 듯이 검을 거둔 후 재차 움직였다. 그렇지만 갈지혁의 몸이 흐릿해지는 듯싶더니 어느새 귀면수라의 옆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