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10화
비록 행동은 조금 이상하지만 둘이 사제지간이라는 걸 진검백은 알 수 있었다.
둘의 그러한 모습이 다소 기이해 보일 만도 하련만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만큼 서로에게 익숙한 사이라는 뜻일 게다.
사내도 그렇지만 노인 또한 만만치 않아 보인다.
만약 싸우게 된다면 그리 쉽지만은 않으리라.
그때 갈지혁이 짧게 말을 내뱉었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음?”
“적입니까?”
“……어떻게 생각하는가?”
운곽은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단박에 이렇게 물어보는 놈은 또 처음이다. 천천히 탐색하면서 들어올 줄 알았거늘 바로 물어본 것이다.
자신이 있다는 소리다. 만약 자신이 없었다면 상대에 대해 파악부터 하려고 들었을 게다. 상대가 적이라 해도 전혀 상관없다는 자신감.
‘이 모습인가?’
이풍이라는 노인네는 쉽사리 마음을 주는 자가 아니다.
그런 그가 자신 있게 말했다. 갈지혁이라는 놈 한번 지켜보라고.
운곽은 장난기가 돌았다.
“적이라면 죽이기라도 할 텐가?”
“제 앞을 막는다면.”
“푸, 푸하핫!”
망설임 없이 내뱉은 말에 운곽은 웃음을 터뜨렸다. 망설이지 않고 죽여 버린다고 말한 것이다. 다른 놈이 말했다면 화가 날 만도 하련만 왠지 모르게 갈지혁이 그런 말을 내뱉으니 웃음이 나온다.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독종이리라. 아마 한 번 물면 결코 놓지 않으려고 바둥바둥거리는 놈일 게다. 강한 놈도 무섭지만 독종은 더 무섭다. 단박에 숨통을 끊어 놓지 않으면 언젠가 목젖을 물려 든다.
독종을 만난다면 답은 두 가지다. 죽이든가 아니면 그를 건드리지 않는 것.
“다행히도 난 아직 죽을 운명은 아닌 듯하군.”
그 말 한 마디에 갈지혁은 노인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그가 누군지 모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접근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목숨을 노리고 달려들지는 않을 거라는 건 안다.
“만나서 반갑군. 운곽이라고 하지. 이놈은 내 제자야.”
“반갑습니다. 허영천이라고 합니다.”
운곽이라는 이름을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진검백이 물었다.
“무림사괴의 일 인이신 운 어르신이란 말씀이십니까?”
무림에서 운곽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자는 그 하나뿐이다. 진검백의 물음에 운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진검백은 긴장을 풀었다.
비록 무림사괴의 하나라 하지만 갈지혁은 이풍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 게다.
“잘 봤다. 이풍에게 들었지만…… 기대 이상이더군.”
“무슨 일로 절 찾아오신 겁니까?”
“이유가 있기도 하지. 하지만 그것보다 네가 점창파와 싸운다기에 궁금해서 발길을 이곳으로 돌렸을 뿐이야.”
“그렇다면 길을 막은 이유는 뭡니까?”
“이유?”
갈지혁의 반문에 운곽은 그저 웃었다.
그 또한 이렇게 갈지혁의 앞에 나설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의 제자인 허영천 때문에 이렇게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이다.
허영천이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여전히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그의 인상은 무척이나 좋다.
“죄송하지만 한 번 겨루어 주지 않겠습니까?”
“갈지혁을 쫓아가자는 것이 그 이유였더냐?”
운곽 또한 허영천이 왜 갈지혁을 따라가자고 했는지 이제야 안 듯하다.
그때 허영천이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가 입을 열며 말했다.
“제가 상대하고 싶은 건 갈 소협이 아닙니다.”
그의 눈이 막 검 손잡이에서 손을 뗀 진검백에게로 향했다. 그가 작은 미소를 흘렸다. 진검백은 그가 자신과 겨루고 싶어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때 허영천이 말했다.
“저자와 붙어 보고 싶습니다.”
“흐음.”
운곽은 가볍게 콧소리를 냈다.
진검백이라면 무림에서 꽤나 유명하다. 낙화검이라는 별호와 함께 말이다. 그런 그와 자신의 제자가 붙어 보고 싶다고 한 것이다.
이유가 있을 게다. 그렇지 않다면 허영천이 괜한 시간을 버리면서 이곳까지 쫓아오지 않았을 게다.
“당신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소. 낙화검이라고 불린다는 것도. 그렇지만…… 붙어 보고 싶군. 내가 보기에 당신의 검은 결코 저물지 않았어.”
검을 나눈 것도 아니다.
그저 갈지혁이 싸우는 것을 보고 있는 사이에 허영천은 그를 유심히 본 듯하다.
진검백이 당황스럽다는 듯이 주변에 있는 모두를 쳐다봤다.
그때 허영천이 말했다.
“정식으로 신청하지. 검객 허영천이 검객 진검백에게 도전하오.”
운곽조차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는 자신의 제자가 갈지혁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겨루어 보자고 말한 것은 갈지혁이 아닌 진검백이다.
“난 갈지혁에게 관심이 있는 줄 알았는데…….”
“갈지혁에게도 관심이 있지만 그는 지금 최고의 상태가 아니니까요. 그리고 소문과 달리 강한 저자와 한 번 붙어 보고 싶기도 하고.”
갈지혁의 외관은 그저 자잘한 상처 몇 개뿐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갈지혁은 꽤나 많은 내상을 입었다. 소절상과의 대결은 일방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건 갈지혁의 실력이 소절상보다 한 단계 높았기에 그리 보였던 것뿐이다.
소절상은 점창의 장문인이다. 무공의 귀재이기도 했다. 손속에 사정을 둔 것도 아닌데 갈지혁이 내상을 입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멀쩡해 보이는 것일 뿐 갈지혁 또한 내상을 입은 상태다.
허영천은 그런 상대와 싸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소문과는 전혀 다른 진검백의 모습에 의문도 생겼다.
왜 그가 낙화검인지 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진검백은 그런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을 정도의 약자가 아닌 듯하다.
허영천의 도전을 받았지만 진검백은 쉬이 검을 꺼내지 못했다. 싸우는 걸 그다지 원하지 않는다. 이겨도 상관없고 진다 해서 무엇인가를 잃는 것도 아니다.
싸우지 않는 편이 오히려 그에겐 이롭다.
“난 당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나 또한 당신이 진검백이라는 것밖에 모르오. 그렇지만 검을 든 자로서 붙어 보고 싶은 상대라고 느꼈기에 이리 말하는 게요. 피하지 마시오.”
“당신과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싸워서 득 될 것이 없는 싸움을 진검백이 할 리가 없다. 자신의 숨겨둔 실력을 굳이 보여 줄 필요도 없고 말이다.
진검백이 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자 허영천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싸울 맘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진검백의 의사는 알았지만 이곳까지 온 이상 검을 겨루어 볼 생각이다.
허영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화산의 검은 사람을 가리는 모양이오.”
“무슨……?”
“날 피하는 걸 보고 하는 말이오.”
도발이다.
명백한 도발임을 알지만 진검백은 전혀 흥분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런 도발에 쉬이 넘어갈 정도로 진검백은 다혈질이 아니다.
그리고 최대한 화산파에 얽매이지 않으려 하는 그다.
물론 사문이 자신 때문에 욕을 먹는 건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이 정도 도발에 진검백은 넘어가지 않는다.
“화산의 검은 언제나 협과 의를 위해서만 쓰이지요.”
“훗, 아직도 그 말이오? 무림이 변한 게 언제인데 아직도 협과 의를 자신 있게 말하는 거요?”
“그건 외부인인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가 온화하다. 그렇지만 그 속은 결코 아니다. 허영천은 어떻게든 진검백의 심기를 건드려 검을 들게 하려고 했고, 진검백은 그런 그를 애써 무시하려고 했다.
사문까지 들먹거렸음에도 진검백이 전혀 반응하지 않자 허영천은 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싸우면 그만 아닌가.
비록 사람 좋아 보이는 그이긴 하지만 허영천의 스승은 무림사괴의 하나인 운곽이다. 그의 괴팍함을 허영천 또한 이어받았다는 소리다.
“당신은 나와 싸우고 싶어하지 않고 난 당신과 싸우고 싶소. 그럼 답은 하나지.”
“……?”
“난 공격할 테니 당신은 피하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겠소.”
“그런 억지가 어디…….”
진검백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허영천의 검이 뽑혔다.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검이다. 그런데 검을 든 자가 다르니 그 기세 또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다.
그대로 검이 진검백에게 날아들었다.
말을 내뱉던 진검백은 급히 뒤로 몸을 뺐다.
검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유성처럼 마구 쏟아지는 검을 진검백은 간신히 피해 냈다. 그렇지만 문제는 피해 내고만 있다는 거다. 허영천의 검은 쉽사리 반격을 가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진검백은 계속해서 아슬아슬하게 목숨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발은 화산의 보법을 빠르게 밟았다. 맹렬하게 쫓아오는 검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이빨과도 같다.
진검백도 결단을 내려야 했다.
상대의 실력이 녹록지 않다.
만만한 상대라면 피하는 것만으로도 승부를 낼 수 있다. 그렇지만 아니다. 허영천이라는 자, 꽤나 고수다. 검을 들지 않는다면 결코 이길 수 없다.
아니, 지금 오히려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지 않은가.
잠시 망설였지만 답은 금방 나왔다. 이대로 가다가는 부상을 입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일은 진검백이 원하는 게 아니다.
막 가슴 쪽으로 날아드는 검을 진검백은 놓치지 않았다.
아까였다면 피하느라 급급했겠지만 오히려 앞으로 다가서며 검을 꺼내 들었다.
챙 하는 검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허영천이 슬쩍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제야 뽑으셨군.”
“당신…… 내가 검을 뽑게 한 이상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바라던 바요!”
버럭 고함을 지르며 그는 진검백을 밀쳐 냈다.
진검백의 몸이 뒤로 몇 걸음 물러서는 순간 허영천의 검이 여러 개로 갈리면서 사혈을 노렸다.
진검백의 검 또한 빠르게 움직이면서 허영천의 검을 쳐냈다.
그런데 그의 검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허공에 매화가 수놓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에 놓여지는 매화의 수가 많아지면서 허영천은 자신이 점점 버거워짐을 느꼈다.
가벼운 격돌이었지만 상대가 결코 자신의 밑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어려운 상대.’
빠르게 몰아치려던 마음을 버렸다.
오히려 지금은 기회를 봐야 한다.
막 뒤로 물러서려던 허영천은 빠르게 날아드는 진검백의 검을 보고 화들짝 놀라 급히 고개를 숙였다. 검이 아슬아슬하게 목을 스치면서 지나갔다.
등골이 오싹하다.
진검백이 검을 다시금 회수하며 천천히 말했다.
“검을 뽑은 건 당신 맘이었지만 이제는 거두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검을 뽑았으니까요.”
허영천은 검을 다시금 들어 올렸다.
예상했던 대로 진검백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낙화검이라는 우습지도 않은 별호를 받게 된 것도 다 이유가 있으리라.
애초부터 낙화검이라는 별호에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겨야 한다는 거다.
허영천은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검끝에 내공이 몰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발이 움직였다.
파파팍!
발이 땅을 찼다. 그림자만이 진검백의 눈앞에 가득했다. 시야를 모두 가리며 허영천의 몸이 진검백에게 다가왔다.
‘빠르다.’
진검백은 검을 세워 얼굴을 보호했다. 검을 얼굴까지 들어 올린 그의 눈이 좌우로 꿈틀거렸다. 놓치면 안 된다. 미약하게나마 그의 뒷모습이 보인다.
허영천의 보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를 지녔다. 내심 그의 보법에 놀라는 진검백이다.
그렇지만 이거면 된다. 완전히 놓치는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그 뒤를 잡고 있다. 그렇다면 그 후의 움직임도 알 수 있다는 소리다.
캉캉!
얼굴에 가져다 댔던 검을 진검백은 위로 움직였고, 바로 검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허공에서 수차례 격돌한 후에도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비문십이각(卑門十二脚)!’
그때 펼쳐진 것은 허영천의 각법이었다.
비문십이각이라는 각법은 특이했다. 일반적인 각법이 중요한 요혈을 노리는 것에 비해 그것은 달랐다.
일 각부터 십이 각까지 전부 하반신을 공격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것도 무릎 위를 넘지 않을 정도의 높이니 극히 낮다고 할 수 있다.
몸을 그토록 낮추어야 하니 그만큼 위험 부담이 큰 각법이다. 그렇기에 완벽한 기회가 아니라면 섣불리 펼칠 수 없는 무공이기도 했다.
진검백은 갑작스럽게 날아온 하단 차기에 성큼 뒤로 물러섰다. 바로 반격을 하려던 그는 이어지는 공격에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공중!’
공중으로 공격이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몸을 띄운다면 바로 상단 공격이 들어오기 마련이다. 일반적인 상식이고, 가장 효과적인 공격이기도 하다.
그걸 알면서 진검백은 일부러 그리 행동한 것이다. 오히려 그 고비를 기회로 만들 생각을 하며. 그런데 예상이 빗나갔다.
이어지는 공격 또한 하단이었던 것이다. 비문십이각이라는 각법을 모르는 탓에 벌어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