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왕전설-84화 (84/200)

# 84

9화

무슨 말인지 안다.

갈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환풍이 계속해서 말했다.

“당려환이 자넬 돕겠다고 했어. 그럼 난 따라야지. 그게 바로 당문의 독인인 나의 업이야. 그렇지만 네놈이 멍청하다면 내가 아닌 당려환이 버릴 거야. 그 전에 희망을 보여봐. 당려환이 네놈에게서 봤다고 말한 희망을 말이야.”

돕겠다는 말이다. 이 노인이 무슨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려환이 미소 짓는 것을 보면 분명 무엇인가 있다.

“좋아. 우선은 따르지.”

* * *

소림에 젊은 무인들이 찾아왔다.

칠천룡의 모임이다. 딱히 정해진 것은 없지만 그들은 이 날 즈음하여 모이곤 한다.

칠천룡 중 다섯이 함께 진검백을 만났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바로 소림사로 오기 위해 가던 길에 그렇게 마주쳤던 것이다.

칠천룡의 모임이거늘 일곱 모두 모이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진검백이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이 무리에 섞여 있던 그이지만 몇 년 전부터는 은연중에 이 자리에 초대받지 못하고 있다.

그 또한 이 자리에 오는 걸 석연치 않아 했고, 그건 나머지 칠천룡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리에 앉아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던 중 문이 열리며 젊은 중 하나가 나타났다.

칠천룡 중 제일이라고 불리는 묘운(昴雲)이다. 그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막 무공 훈련을 마치고 왔는지 옷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나?”

청우가 대답했다. 묘운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이곳에 온 다섯 명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한 명씩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묘운이 말했다.

“실력들이 일취월장한 것 같아. 특히 여 매는 많이 는 것 같아.”

“고마워요.”

여 매라고 불린 여인이 웃었다.

종남파 장문인의 딸로 예전에 진검백에게 마음을 지녔던 여인이다.

여상희(璵常喜).

활발하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다소 남성 같은 기질을 지닌 여인. 자식 중 유일하게 딸이기에 가주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그렇지만 그 안에 안주하기보다는 스스로 검을 들었고, 그 실력 또한 빼어나다.

묘운은 칠천룡의 모임에서만 이들에게 이토록 편하게 말했다. 여 매라고 여상희를 부르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부처님을 모시는 몸으로 가족에 관련된 호칭을 쓰는 것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다.

그랬기에 묘운은 이 자리에서만 여 매라는 호칭을 썼고 그 외에는 다른 중처럼 시주라는 말을 붙이곤 했다. 모두가 익숙했기에 아무도 그런 묘운의 행동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그렇게 하나 둘을 살피던 묘운이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여전히 진검백은 오지 않은 듯하군. 많이 바쁜 모양이야.”

“바쁘기는 무슨. 얼마 전에 만났네. 사천에서 수상한 짓을 하고 있더군.”

“만났다고? 그리고 수상한 짓이라니?”

묘운이 청운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그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그 날의 일을 회상했다. 수치스러운 패배였다.

입에 올리고 싶지도 않은 일이다. 그랬기에 청운은 그런 이야기는 쏙 빼고 몇 가지만 말했다.

“얼마 전에 사천에서 적검과 풍도가 싸운 일이 있지 않는가. 거기에서 만났어.”

“흠…….”

“그 놈 갈지혁이라는 자랑 같이 있더군.”

“갈지혁?”

묘운은 되물었다.

갈지혁이라는 이름이 생소하지는 않지만 듣는 순간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 탓이다. 청운이 간단하게 말했다.

“그 놈 있잖는가. 섬서에서 독을 쓰고 다니던 놈. 독왕대로행이라고 깃발을 들고.”

“아아! 갈지혁이라는 이름 어디서 들었나 했거늘 그자였군그래.”

“그래. 그놈하고 같이 있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지만 위험해. 그놈…… 이제는 정파 무인이라고 보기도 힘든 놈 아닌가.”

“자네는 진검백이 무슨 일이라도 벌일 거라고 생각하나?”

“아닐 거라는 보장은 없지.”

진검백은 묘운과 함께 칠천룡의 수위를 다퉜다. 그 둘의 실력은 너무 엇비슷하여 한 쪽의 손을 들어주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랬던 자이거늘 지금은 이같이 변해 버렸다. 칠천룡의 모임에 고개조차 내밀지 못하는 신세로 말이다.

물론 진검백 본인 스스로가 이 자리에 오는 걸 싫어하기도 하지만 이들에게는 부끄러워서 오지 못한다고 생각되는 형편이다.

그게 당연하다. 무인으로 그렇게 형편없게 되어 버렸는데 예전에 함께 했던 자들과 같이 자리하는 건 자존심의 문제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묘운이 뜬금없이 말했다.

예전부터 그랬다. 다른 사람들은 진검백이 나오지 않는 것을 당연스럽게 여겼고, 또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묘운만은 달랐다.

매번 모임마다 그는 진검백을 찾았다. 둘은 그리 친하지도 않았다. 같은 칠천룡이긴 하지만 은연중에 둘은 서로를 견제했다.

현재 소림과 화산처럼 말이다.

그런 묘운이 매 년이 지날수록 진검백을 찾고 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진검백은 변했다. 모두가 강해졌지만 그는 오히려 약해졌다. 이제는 칠천룡의 한 명으로 인정해 주는 것도 싫을 정도로 약해져 버린 것이다.

과연 일류의 수준에나 낄 수 있을까?

갈지혁의 이야기가 나오자 아미파의 여인이 움찔했다.

그녀는 갈지혁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도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무림에서는 그를 경계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미파의 입장에서는 소중한 은인인 셈이다.

어떤 쪽 한 곳으로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아마 그건 시간이 알아서 해 줄 것이다. 그녀는 우선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묘운은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묘운은 진검백과 가장 가까운 사내였다. 사이는 멀었지만, 그래도 진검백만이 자신과 같은 부류라고 생각했던 묘운이다.

‘정말로 약해지고 있는 것이냐.’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판단이 틀렸다는 말이 될 테니 말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묘운만은 진검백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한다. 강했지만 그는 늘 무엇인가를 갈구했다.

그의 눈은 언제나 다른 것을 쫓았다.

그걸 아는 묘운이다. 분명 진검백은 지금 그 다른 것을 쫓기 위해 지금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을 게다.

강해지지 않았을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예전보다 약해지지는 않았을 거라고 묘운은 생각하고 있다.

‘내 생각이 틀릴 리가 없지. 그놈…… 무엇을 보고 있는 거냐.’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진검백이 아니고서야 그의 생각을 속속들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갈지혁이라.”

묘운은 갈지혁이라는 이름을 되뇌었다.

크게 신경을 쓰지 않던 자다. 독이라는 것을 쓰고 무림을 시끄럽게 하고 있지만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는 않다. 지금 다른 문파에서 여러 가지로 견제를 하고는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 죽이려고 드는 자들은 없다.

아직은 건드릴 때가 아니라는 소리다.

그를 죽여야 할 명분이 없다면 구파일방이라는 이름으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전혀 관심이 없던 인물이었거늘 진검백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 이름이 머리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진검백은 그 갈지혁이라는 사내에게서 자신이 쫓는 그 무엇인가의 실마리를 보았을 게다. 그렇지 않으면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이빨을 들이밀 것이냐?”

갑작스러운 묘운의 말에 이야기를 하고 있던 다섯 명의 칠천룡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 그 다섯의 모습을 보며 묘운은 피식 웃었다.

다르다. 그 다섯과 자신은. 같은 칠천룡이지만 같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솔직히 어불성설이다.

진검백뿐이다. 칠천룡 중에서 유일하게 인정했던 자는.

“아아, 혼잣말일 뿐이야. 이야기들 나누게.”

그 한 마디에 다섯은 다시금 이야기를 시작했다. 묘운은 다시금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모자란 놈들.’

그는 소림의 인물이지만 소림과 어울리지 않는다.

* * *

태산북두(泰山北斗) 소림(少林)이라는 이름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다.

그만큼 무림에서 비중 있었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 수많은 무림을 노리는 싸움에 선두에 선 것이 소림이요, 가장 많은 피를 흘린 것 또한 소림이다.

그들은 피 묻은 죽장(竹杖:지팡이)를 휘둘렀고, 한 서린 부처님의 법어(法語)를 외쳐 댔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가히 존경심이 우러나올 만했다. 그랬기에 사람들은 소림을 칭송하기 시작했다.

소림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소림이라면 그것을 해결해 주리라.

그랬던 믿음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변하기 시작해 지금에 와서는 구파일방의 다른 곳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문파가 되어 버렸다.

그저 다른 문파에 비해 강한 힘을 지녔다는 것이 차이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것도 예전 이야기다. 소림이 비록 구파일방 중 최고의 무력을 지닌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못지않은 힘을 지닌 곳도 있다.

무당산(武當山)의 무당파(武當派).

화산(華山)의 화산파(華山派).

그리고 걸인들의 집합소 개방.

개방은 걸인들의 집합소다. 그렇지만 무시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어마어마한 문도수다.

10만에 이르는 숫자는 다른 구파일방 모두를 합해도 따라올 수 없다. 물론 개중에서 무공을 제대로 모르는 자들도 허다한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다른 문파에 비해 고수의 수도 많은 것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그 많은 문도들이 물어오는 정보가 있다. 정보에 능하다면 비길지언정 적어도 패하지는 않는다.

걸인들이 모인 곳이라 해서 엉망진창의 문파의 모습을 상상할지 모르지만 그건 개방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다른 그 어떠한 문파보다도 잘 정비되어 있는 곳이 바로 개방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10만이 넘는 문도를 지닌 개방이 여태까지 이렇게 버텨 왔을 리가 없다.

현 무림에서 최고의 문도수를 지니고 있지만 유독 싸움에 끼지 않는 것 또한 개방이다. 이상한 일이다. 그만한 힘이 있고 귀가 있다면 무림의 세력 싸움에 끼어들 법도 한데 유독 개방만은 뒤로 물러서 있다.

개방 방주인 걸왕(乞王) 굉곽은 싸움을 좋아한다.

호전적이고, 술을 좋아하며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이지만 유독 정파무림끼리 서로 아옹다옹 거리는 일에는 눈을 찌푸린다.

현 무림의 시끄러운 일들을 보고 있자면 머리가 아파 온다. 할 일은 태산 같은데 무림이 조용하다는 이유로 자신들끼리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고 다투고 있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무림에서 싸움이 끝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요즘은 잠잠하지만 신강에는 천산 마교(魔敎)가 있다.

서역에 있는 포탈랍궁(布達拉宮)도 요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리고 남만에는 오랫동안 중원을 두려움에 떨게 한 독황독립문(毒皇獨立門)이 있다.

사방이 적이다. 그들이 비록 지금은 야욕을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언제라도 무림을 공격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개방 방주인 걸왕은 지금 그들의 움직임에 모든 신경을 쏟아 붇고 있다.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는 다른 문파와는 다른 모습이다.

걸왕이 어딘가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탓이다. 무림의 싸움에 끼어들게 되면 결국 얽히게 되는 건 당연지사다. 그럴 바엔 조용히 초야에 묻혀 살고 말 것이다.

한 무리의 수장이라는 자들이 그런 작은 이익에 눈을 불을 키고 쫓는 것이 얼마나 추하단 말인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