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22화
“아님 무엇이 있겠습니까. 독인에게 그 이상의 꿈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군요.”
“아니, 아니 그건 맞는데 말이야 아직도 그런 말을 할 녀석은 없다고 생각해서.”
갈지혁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당려환은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슬쩍 미소를 지어 버렸다.
당려환의 말대로다. 지금 무림에서, 아니 몇백 년 전부터 그 누구도 독왕이라는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다.
금기시된 말이라고 해도 된다. 그 말로 자신을 치장하는 자들은 죽는다.
정파 무림은 독을 신격화시키는 것을 절대 용서치 않는다.
당문이 숨죽은 듯 살아야 하는 것도 그 탓이다. 독에 대한 멸시와 원한은 당연스럽게 당문에게로 쏟아졌다. 당문은 침묵했다. 무림을 상대로 싸우기에는 당문의 힘은 너무나도 작다.
당려환은 그렇게 죽은 듯이 지내왔다. 언젠가 비상할 기회를 노리며.
갈지혁의 진심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것을 알 방도도 없다. 믿을 수밖에 없다. 아니, 믿지 않는다 해도 그냥 그렇게 넘길 수밖에 없다.
“독왕이라…… 꿈이지. 우리들의 꿈.”
“꿈이 아닙니다. 현실이죠. 이제 곧 벌어질.”
갈지혁은 당연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용기는 대단하다. 분명 목숨을 걸었을 게 분명하다. 저런 자가 많아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프다.
죽는다. 저렇게 나가다가는 독왕이 되기는커녕 목숨도 부지할 수가 없다.
당려환이 진지하게 물었다.
“독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물론이지요. 독왕이라는 것은 천하입니다.”
“천하?”
“천하제일인이라는 뜻도 될 수 있지만 그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천하제일인이라고 해도 무림을 상대로 한다면 이길 수 없으니까.”
갈지혁의 말대로다. 천하제일인이 된다면 독왕이라고 자신을 부르며 다닐 수는 있을 게다. 문제는 한 사람의 손으로 몇천에 달하는 고수들을 막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불가능하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들이 날리는 모든 공격을 피해 낼 수는 없다.
독은 검과는 다르다. 간단한 손짓만으로도 많은 자들을 죽일 수 있는 건 사실이다. 그래도 독이라 해서 완전한 것은 아니다.
갈지혁이 말했다.
“예를 들어 이야기해 보죠. 만약 제가 길을 걷습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저라는 놈을 누르고 이름을 알리기 위해 덤벼 들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무림에 그런 놈들이야 허다하지. 그런데 그게…….”
“그건 독왕이 아닙니다. 천하제일은 되도…… 독왕은 안 됩니다.”
“그 말은…….”
“제가 길을 걸을 때는 그것이 산길이든, 아니면 수많은 무인들의 사이건 길이 생겨야 합니다. 그게 독왕입니다.”
갈지혁의 말하는 독왕이라는 것은 천하제일인과는 다르다.
분명 천하제일인에게 쉽게 덤벼드는 놈은 없을 게다. 하지만 분명 있다. 천하제일인이라는 위치에 있다면 수많은 자들의 도전을 받게 된다. 갈지혁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 누구도 덤빌 수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불가능하다고 생각은 되지만…… 흥분이 되어 버렸다.
우습게도 자신의 반 정도밖에 살지 않은 놈의 그 한 마디에 어린 아이처럼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상상해 보라.
그 누구도 막지 않는다. 길을 걸으면 길이 생긴다. 독인들의 꿈이다. 당당하게, 그리고 무인으로서의 일보를.
갈지혁의 그 말은 당려환에게 있을 수 없는 모습을 상상하게 해 버렸다.
가만히 앉은 채로 당려환은 고개를 숙였다.
햇병아리일지도 모른다. 그저 꿈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천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믿고 싶다. 독이라는 것이 당당하게 무림에서 활보하는 것이 보고 싶다.
여태까지 그러한 것을 위해 살아오지 않았던가.
당려환은 최대한 감정을 죽인 채로 말했다.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포기하는 순간 그건 꿈이 되니까.”
“……좋다.”
포기한 사람에게는 운도 따르지 않는다.
오랜 시간 무림에 몸담아 본 당려환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무엇인가 마지막 끈을 잡고 있는 자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용케 살아나곤 한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걸어 보려고 한다.
갈지혁이라는 놈에게 말이다.
“네놈 혼자서 독왕이 된다는 건 불가능해.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럼 가능하게 해야지. 불가능하지만 그나마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네 힘을 만들어. 힘들겠지만 어떻게든 해야 돼. 독왕이 된다는 거…… 쉬운 게 아니지. 나 또한 너에게 조금 힘을 실어 줄 생각이다.”
“가주!”
이노가 소리쳤다.
전혀 알 수 없는 놈에게 당문의 미래를 맡기려고 하는 것이다.
갈지혁에게 힘을 실어줬다가 그가 자멸하게 되는 날 당문 또한 적지 않은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아직 확실하지 않은 갈지혁에게 도대체 무엇을 도와주려는 것인가.
“이노, 어차피 있어 봤자 변하는 건 없네. 슬슬 나도 늙어가. 점점 용기가 없어지지. 용기가 있을 때…… 한번 해 봐야지. 적어도 내 두 눈으로 독왕을 본다면…… 여한이 없지. 죽는다 해도 말이야.”
순간 고함을 질렀지만 이노 또한 당려환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랬기에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
반면 갈지혁은 갑자기 힘을 주겠다는 당려환의 제안에 내심 당황스러웠다.
이런 일을 생각하지 않았던 탓이다.
당문이 돕는다면 이래저래 좋은 것이 사실이다. 그들의 귀도 빌릴 수 있고, 무엇보다 독을 만드는 재료의 공급이 수월하다.
그때 당려환이 말했다.
“단, 조건이 있네. 너를 돕겠지만…… 네놈에게서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때부터 우리 사이는 끝이야.”
진검백이 갈지혁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수고했다는 듯이.
* * *
지독한 악취다.
돼지고기가 썩는 냄새라고 해도 이보다는 역하지 않을 게다. 사방이 온통 어둡다. 그렇지만 뭔가 모를 으슬으슬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닫혔던 문이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의자에 앉아 졸고 있던 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오, 오셨습니까?”
“그래.”
중년의 무인은 문을 열고 나타난 젊은 사내에게 쩔쩔매며 눈치를 봤다.
젊은 사내는 너무나 유약해 보였다. 툭 치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이.
아! 바로 그 사내다.
일전에 사독문에 독황독립문 문주인 지대익과 함께 나타났던 자다. 그리고 이상한 흑의를 입고 수상한 짓을 벌이기도 한다.
몇 년 전부터 정파 무림에서 쫓는 자이기도 한 그가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그럼 전 다시 지키고 있을 테니…….”
“똑바로 지키는 게 좋아. 그렇지 않으면…… 너도 이 안에 있는 놈들처럼 만들어 버릴 테니까.”
꿀꺽.
중년의 사내는 사색이 되면서 엉덩방아를 찌어 버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 사내라면 분명 그리 할 수 있을 게다.
젊은 사내는 천천히 문에 열쇠를 넣어 돌리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악취가 더 심해졌다. 그렇지만 사내는 인상조차 찌푸리지 않았다. 그가 가지고 온 화섭자에 불을 붙이자 주변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놀라운 것들이 있었다.
사람이다. 그것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이십 명 이상의 사람들이 옷이 모두 벗겨진 채로 줄에 묶여 매달려 있다.
그 광경은 실로 사람의 손으로 벌인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잔혹했다. 웬만큼 비위가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당장에 토악질이 터져 나올 것이다. 그런데 사내는 너무나 태연했다.
마치 그것들이 보이지라도 않는 듯이.
살이 썩어 들어가는 자도 있고, 온몸 색깔이 이상한 것이 독에 중독된 듯한 자도 있다. 사내는 개중에 하나에게 다가갔다.
독에 중독되었는지 온몸이 검게 변색된 자다. 사내는 손을 뻗어 독에 중독된 아이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짜증 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망할 새끼, 그거 하나 못 버티냐?”
아이는 죽어 있다. 그것도 독에 중독 당해서 말이다. 겨우 열 살 남짓 된 사내아이다. 친구들과 막 뛰어 놀면서 부모님한테 꾸중이나 들을 나이인 것이다.
그런 아이가 이런 음침한 곳에 묶여 있다. 그것도 목숨이 끊어진 채로.
그렇다. 이곳은 이 사내의 실험장이었다.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그는 장난을 치는 것이다. 이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 죽는다.
여자든 아이든 노인이든 상관없다.
어차피 독 앞에서는 모두가 같다.
이곳은 독황독립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이 사내만의 장소로 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안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
설령 그것은 독황독립문의 문주인 지대익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사내는 사람들이 썩어 가는 냄새로 가득한 이곳이 역하지도 않은지 구석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의 눈이 매달린 채로 죽어 가는 사람들로 향했다.
사내는 씨익 웃었다.
이렇게 죽기 직전의 마지막 발버둥을 치는 인간을 보는 것이 즐겁다. 어차피 살아봤자 별 볼일 없는 놈들이다. 까짓 거 저런 자들 백 명이 죽든, 천명이 죽든 무슨 상관인가.
“이것도 아니야. 도대체 단화초의 독이란 건…….”
사내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화초였다.
그가 나타나면서 지대익은 무림을 정복할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그는 그런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중원을 지배하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우선은 단화초를 찾는 것이 사내의 최고의 목표였던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다.
그가 의자에 앉은 상태로 독백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지대익. 머리는 좋지만 너무 늙었어. 예전의 그 강력한 추진력을 잃었지.”
지대익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은 전혀 다르다. 그는 지대익과는 전혀 다른 것을 꿈꾸는 자다.
“지운경? 풋, 아직 멀었어. 풋내기야. 갈지혁의 상대가 못 돼. 갈지혁 이야기만 나오면 눈에 불을 켜지만…… 만나면 도망쳐야지. 상대가 안 돼.”
사내는 안다. 갈지혁의 실력을 말이다.
지운경은 분명 재능이 있는 자다.
그렇지만 갈지혁과는 차원이 다르다. 예전 사독문을 들어가기 전에도 지운경은 언제나 갈지혁의 아래였다. 사독문에 들어가 일악천에게 무공을 하사 받은 지금은 그 실력 차는 더욱 벌어졌다.
어떻게 싸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승자는 갈지혁이 될 게다.
“인물이 없어. 너무 멍청한 놈들뿐이야.”
독황독립문은 중원인이 아닌 남만인들이다.
남만인들은 성격상 무엇인가 계략을 내고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생각을 하기보다는 우선은 부닥치고 보는 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사내의 깊은 속내를 알 리가 없다.
“일악천…… 그 노인네가 있었으면 힘들었겠지만.”
일악천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