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7화
갈지혁과 진검백은 각각 황금산장의 방 하나씩을 받았다.
황금산장에서 머무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더군다나 이렇게 개인 방을 준다는 것은 꽤나 높은 위치에 있는 자나 가능하다.
그렇지만 둘은 돈 한 푼도 없이 이곳에 머물게 됐다. 황금산장의 주인인 이풍이 있는 탓이다.
갈지혁의 방은 온통 하얀색 일색이다.
벽부터 해서 방 안에 있는 장신구 모두가 흰색 계통이다. 그 안에서 갈지혁은 이질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겼다.
갈지혁이 방을 천천히 걸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다. 황금귀 이풍과의 만남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황금산장까지 오는 며칠 동안 생각했다. 왜 일악천이 이러한 안배를 해 놨는지.
‘혼자선 힘들다는 거겠지. 독왕이 된다는 게…….’
힘들다는 건 알았지만 무림에서 돌아다니며 갈지혁 또한 절실히 느낀 바다.
적당한 선에서 이름을 알리며 정파 무림의 압박은 나름대로 피하고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적어도 지금 화산파의 진검백이 붙은 것이 그 예다.
이제 사천으로 넘어왔다.
사천에 있는 수많은 문파들이 압박을 가해 올 게다. 개중 하나라도 마음을 먹고 갈지혁을 공적으로 몰기 시작한다면 일은 어려워진다.
더군다나 달라붙기 시작한 독황독립문의 무인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분명 단화초다.
돈이 있다면 모든 게 편해진다. 돈이 없어 시간을 낭비할 일도 없고, 어딜 가나 최상의 곳에서 머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만을 위해 일악천이 황금귀 이풍을 보냈을 리는 없다. 그만한 것이라면 이풍 정도 되는 자를 움직였을 리가 없다.
닭을 잡아야 하는데 소를 잡는 칼을 줄 일악천이 아니다.
‘소를 잡아야 한다. 스승님이 원하는 거라면…….’
우선은 힘일 게다. 그렇지만 일악천이 원하는 것은 무인은 아닐 게 분명하다. 답은 하나다. 일악천은 갈지혁과 같은 독인을 만들어 내기를 원하는 것이다.
사독문은 여건이 됐다. 사방이 독초고, 또 일악천이 있었다. 그렇지만 무림은 그렇지 않다. 그만한 독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든다. 그리고 장소도 여의치 않다.
황금산장에는 그 모든 것이 다 있다.
그 외에도 황금산장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많다. 적어도 무림의 칼도 황금산장이라는 이름 아래에 있다면 더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까.
갈지혁은 침상에 앉았다. 그는 손을 들어 올렸다.
황금귀 이풍과의 싸움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입었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려는 생각을 가진 채로 독을 쓰니 솔직히 독이 마음 같이 움직이지는 않는다.
원래 수족처럼 다루던 것들인데 지금은 다소 불편한 느낌이 든다.
‘이 상태로는 안 돼. 이래선…… 독왕이 될 수 없어.’
하지만 갈지혁이 본연의 모든 것을 보인다면 그 순간 상대는 즉사다. 그렇게 된다면 무림은 결코 갈지혁을 놔두지 않는다.
가뜩이나 지금 갈지혁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상황에 그 같은 일은 나 죽여 달라며 넙죽 엎드리는 거랑 다를 게 없다.
그때였다.
갈지혁은 문이 갑작스럽게 열렸음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누가 들어온 지 아는 탓이다. 뒤에서 이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따라와. 보여 줄 게 있다. 이야기할 것도 있고.”
갈지혁이 침상에서 일어났다. 애초부터 이풍이 무엇인가 이야기하고자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게 언제일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금인 모양이다.
이풍이 걷자 갈지혁은 순순히 그 뒤를 쫓았다. 걷는 도중 이풍이 말했다.
“일악천과 한 이야기가 있지. 네놈을 돕기 위해 여러 가지를 준비할 생각이다.”
“스승님이 무슨 말을 하셨습니까?”
“잠깐만 기다려. 다 이야기 해 줄 테니까.”
이풍이 황금산장의 어떤 건물에 들어서더니 이내 침상을 옆으로 밀고는 무엇인가를 만졌다.
땅이 갈라졌다.
그대로 이풍이 아래로 뛰어내렸고 갈지혁도 그 뒤를 따랐다.
땅에 내려선 갈지혁은 고개를 들다가 눈이 크게 떠졌다. 그의 눈앞에 엄청난 것들이 펼쳐져 있다.
“내 것이다. 그리고 이제 네 것이 될 수도 있지.”
황금이다.
어마어마한 황금이다. 그것은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웅장함이 느껴졌다. 황금이지만 그 막대한 양은 사람을 위축되게 할 정도였다.
* * *
타탕!
“막아!”
“개소리……!”
흑색 옷을 입은 괴한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사방으로 녹색운무가 퍼져 나갔다.
푸른 옷의 무인들은 급히 호흡을 멈췄다. 그들의 검이 안개에 감싸이는 괴한에게 쏟아졌다. 그들이 자랑하는 연환칠계진(連環七界陣)이다.
사방으로 요사스러운 빛이 번쩍였다. 검에서 쏟아져 나오는 울음소리는 사람의 심장을 얼어붙게 할 정도다.
그런데 날아드는 검들은 녹색 안개 속으로 파고듦과 동시에 튕겨 나갔다.
“우욱…….”
돌아오는 검을 막아 내지 못한 무인은 가슴에 틀어박힌 검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피가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십에 다다른 그의 얼굴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가슴에 틀어박힌 검에서 독까지 중독됐다. 안개와 닿는 순간 검에 치명적인 독이 묻은 모양이다. 그는 채 세 걸음도 걷지 못했다.
털썩.
모두의 얼굴 표정이 변했다.
무려 오 년 전부터 쫓던 자다. 정체는 알 수 없지만 독을 쓰는 건 분명했다. 무림에서는 뛰어난 인재 몇을 모아 일 년간 호흡을 맞추게 하고 이 괴한을 쫓게끔 했다.
쉽지 않은 길이었다. 아무런 단서도 없고, 조용히 숨어 있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 불쑥 나타나곤 했다.
그렇게 오 년이다.
그 긴 시간을 쫓았고 괴한이 남긴 흔적을 토대로 여러 가지 합공도 준비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무용지물이다. 오 년이 넘게 쏟아 부은 그 시간들이 모두 헛것이었던 게다.
죽어서 쓰러지는 동료들을 보던 한 사내의 눈에서 피눈물이 쏟아졌다.
이 무리의 우두머리로 괴한을 쫓는 것에 인생을 걸었던 인물이다.
그랬기에 이 현실이 사내를 미치게 만들었다.
‘우리의 그 시간이…… 아무런 것도 아니었다는 것인가!’
아니다. 오 년을 함께하며 이제는 가족 같은 지기들이다. 나이는 모두 다르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하나다.
녹색 운무가 점점 간격을 넓혔다. 그 운무에 무기를 휘두르거나 피하려 하는 자도 있었지만 헛된 몸부림에 불과했다.
순간 운무가 꿈틀거렸다.
퍼억!
튀어나온 손이 막 운무 앞에서 검을 휘두르려는 사내의 머리통을 으깼다.
예상치 못했는지 사내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땅에 드러눕고야 말았다.
무리의 대장 사내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다.
사내는 옆에 서 있는 자를 바라봤다. 이 무리에서 최고로 나이가 많았던 자다. 다른 것은 그다지 변변치 않지만 추적 하나 만큼은 최고다.
“도망치게. 자네는…… 살아야 해. 그래서 꼭 여태까지 조사한 것을 전하게. 내가 저놈을 막지.”
“나보다는 자네가 사는 것이…….”
“추적에 능하다는 건 그만큼 도망칠 때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말이지.
자네가 가게. 꼭…… 살게.”
무슨 말인가 하려 하던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의 마음을 느낀 탓이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비장하게 말했다.
“어떻게든 가지. 자네 말대로 어떻게든 전할 것이네. 그럼.”
말을 마친 그의 몸이 반대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무리의 대장 사내는 몸을 돌렸다. 그는 손에 든 검을 강하게 쥐었다.
점점 다가오는 녹색 운무, 그리고 쓰러지는 동료들.
독이라는 건 정말 두렵다. 지금 쓰러지고 있는 자들은 능히 일류고수의 수준에 든 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하고 죽어 가고 있다.
‘후후, 마지막 자리인가.’
사내는 다리를 벌린 채로 검을 세웠다.
마지막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냥 죽어 줄 생각은 없다.
무인이었다. 여태까지 그리 살았고, 이제 죽어야 한다면 또한 무인으로 죽을 것이다.
“오너라!”
호기로운 외침에 착잡한 표정을 짓던 모두의 시선이 사내에게로 향했다.
그의 모습을 본 다른 자들의 얼굴 표정이 변했다.
사내가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 이곳에 모르는 자는 없다. 그렇지만 그토록 일그러졌던 얼굴에 이제는 웃음기를 띠기 시작했다.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무인답게 웃으면 죽으리라.
사내의 옆으로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는 주변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인생의 마지막을 이들과 함께 한다는 것에 감사했다.
“자네들은 최고의 동료였네. 다시 만나면…… 술이나 사지.”
“흐흐! 형님, 안주도 듬뿍 사셔야 합니다.”
“안주뿐인가. 자네가 원한다면 밤새 술을 마셔 줄 의향도 있네.”
“그 약속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럼 내세에 뵙죠.”
사내의 옆에 있던 호탕해 보이는 사내가 도를 든 채로 말했다.
무리의 우두머리 사내가 마침내 크게 외쳤다.
“간닷! 비혈이십사수(飛血二十四手)!”
정체를 알 수 없는 흑의인이 손을 툭툭 털었다. 마지막까지 검을 들고 눈을 부릅뜨고 있던 사내의 몸이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가슴에 뻥하고 구멍이 뚫려 버렸다. 아마 괴한의 손이 가슴을 뚫어 버린 모양이다. 그는 옷소매에 뭍은 피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더러운 놈의 피를 뭍이다니…….”
그때 허공에서 메아리처럼 소리가 들려왔다.
“한 놈이 도망쳤습니다. 잡습니까?”
“아니, 내버려둬. 마음만 먹으면 잡을 수 있겠지만 오히려 놈은 살려 둬야지. 그나저나 약속 시간보다 다소 늦은 듯한데. 덕분에 이런 날파리 같은 놈들을 죽여야 했잖아.”
“죄송합니다. 급히 여러 가지 전갈을 받고 오느라고…….”
“전갈? 그래, 뭐지.”
“계획은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다음 목표한 곳도 정했답니다.”
역병을 위장해 돌고 있는 독에 대한 이야기일 게다. 이 괴한은 지금 무림을 뒤흔들려는 계획에 가장 핵심에 위치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봐도 된다.
“그리고 갈지혁이 사천으로 갔다 합니다.”
“사천? 사천이라면 사천당문이 있을 터인데.”
“그래서 더 그의 행보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놈이 황금산장에 갔답니다. 아마 무슨 연유가 있는 듯한데 그것까지는 아직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알아내.”
“옙.”
“가라.”
괴한의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기척은 없었다.
괴한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얼굴을 덮고 있는 복면으로 향했다. 복면이 벗겨지고 긴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젊은 사내다.
너무나 연약해 보이고, 무(武)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렇지만 그 사내는 실로 무서운 인물이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결코 망설이지 않는 손속, 그리고 머리가 있다.
사내는 일전에 문우령의 거처에서 갈지혁과 손을 겨루었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