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20화
“화산파와 얽으려 들지 마시오. 난 그저 맘에 안 들었을 뿐이야. 당신들이 설치는 게.”
“킥킥, 솔직해서 좋군. 어쨌든 길을 막았으면 대가를 받아야겠지?”
구백룡은 자신 있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에는 꽤나 긴 손톱 같은 모양으로 검날이 달려 있었다. 조이지만 다소 모양이 독특하다. 안으로 휘어진 검날이 박히면 빼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날카로운 검날에 햇빛이 반사되면서 요사스러운 빛을 발했다. 저 손톱 같은 검에 뭍은 수많은 사람들의 피의 원성이 들리는 듯하다.
진검백은 아까와는 사뭇 다른 표정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우석청 또한 고수였지만 지금 이 앞에 있는 구백룡에 비하면 모자라도 한참은 모자라다.
구백룡은 뒤에 있는 배를 향해 소리쳤다.
“모두 넘어와! 시간을 너무 끌었다.”
그의 외침과 함께 뒤에 있던 거대한 배에서 수많은 무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검백은 들고 있던 검을 꽉 쥐었다. 구백룡만으로도 버거운 싸움이다. 그렇지만 싸울 상대는 구백룡 하나만이 아니다. 그 뒤로 모습을 드러내는 장강수로채 인물들의 수는 이삼백을 웃도는 숫자였다.
‘무리야. 너무 많아.’
아무리 강하다 한들 이 많은 자들을 모두 벨 수는 없다. 특히 앞에 있는 구백룡까지 생각한다면 결코 가능한 싸움이 아니다.
그때,
“귀찮아…….”
중얼거림과 함께 잠시 모습을 감췄던 갈지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갈지혁의 손에는 처음 보는 수투(手套:장갑)가 씌어져 있었다. 온통 검은색에 손가락에 꽉 달라붙는 수투였다. 그런 갈지혁의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진검백조차도 그가 지금 무슨 행동을 하려는지 감을 잡지 못했다.
구백룡이 갈지혁을 힐끔 바라봤다. 한눈에 봐도 이 싸움에 끼어들 기색이 역력하다. 구백룡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마치 불에 날아드는 불나방 같다.
죽을 게 뻔한데도 나서는 이들이 우습다.
배를 넘어오고 있는 삼백에 가까운 무인들은 장강수로채의 정예들이다. 결코 어중이떠중이들을 모은 게 아니라는 소리다. 절정고수들은 없지만 전부 어느 정도 경지에는 오른 자들이다.
구백룡은 갈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선다면 죽어. 물러서.”
“누가 날 죽인다는 거요? 당신이?”
“장강수로채가.”
그 말은 굉장히 의미심장했다. 장강수로채의 누군가에게 죽을 수 있다는 말로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또한 구백룡 자신이 장강수로채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그만큼 그는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지니고 있는 사내다.
“네가 섬서의 문젯거리라는 갈지혁이라는 건 알아. 독을 쓰는 것도. 그렇지만 그게 다야. 네놈이 아무리 강해도…… 수적 열세는 어떻게 할 수 없지.
싸우면 죽어. 그래도 나설 건가?”
“그건 구백룡인지 뭔지 하는 당신이 판단할 게 아니야. 죽어? 죽긴 누가 죽어. 난 죽지 않아. 그리고 선천적으로 난 지는 싸움에는 안 나서거든.”
“이길 수 있다 이건가?”
말을 하면서 구백룡이 다시금 조소를 흘렸다. 세 살 정도 된 아이가 우기는 것 같아 보이는 탓이다. 이만한 인원을 혼자서 막아 내겠다? 이 정도의 인원이라면 구파일방의 하나라고 해도 쉽사리 볼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겨우 이제야 이름을 갓 날리기 시작한 놈이 지금 이 인원 모두를 막을 수 있다 한다. 가소로울 수밖에 없다. 우습고, 철부지 같아만 보인다.
그런데 갈지혁은 그런 구백룡의 비웃음을 보면서도 태연했다.
“좋아. 그럼 봐야겠군. 네가 과연 살아남는지, 아니면 죽는지.”
구백룡의 눈이 슬쩍 뒤로 향했다. 배로 쏟아져 들어온 자들이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백룡의 얼굴에 자신감 가득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갈지혁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백골환(白骨幻)…….”
취익, 취이익!
이상한 소리가 배를 가득 채웠다. 작은 듯하지만 모두의 귀에는 분명하게 들렸다. 마치 뱀이 기는 듯한 소리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막 배를 넘어왔던 장강수로채의 인물들은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온몸을 휘감는 순간,
“허억!”
누군가의 입에서 먼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몸이 무엇인가에 묶인 듯하다.
손을 들어 올리려고 해도 움직이지가 않는다. 마치 거미줄에 꽁꽁 묶인 듯하다.
구백룡은 갑작스럽게 들려온 비명 소리에 급히 고개를 돌렸다가 안색이 돌변했다. 자신 있게 짓던 미소가 일그러졌다. 그의 입술이 비틀렸다.
“뭐, 뭐야?”
뒤쪽에 배를 넘어오던 수하들이 몸을 비틀면서 게거품을 물고 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구백룡은 할 말을 잃었다. 독을 쓰는 자라는 걸 알기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저 작은 소리만 울렸을 뿐 독을 쓰는 걸 보지 못했다.
더군다나 구백룡은 독을 느끼지도 못하고 멀쩡하게 서 있지 않은가.
단 한 번의 손짓에 오십 명가량이 그대로 쓰러졌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직접 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그다지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다. 구백룡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너…… 이 새끼!”
이를 와락 물면서 구백룡이 갈지혁을 노려봤다. 그의 눈에서 아까의 여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구백룡의 눈에는 갈지혁을 찢어 죽이기 전에 결코 풀리지 않을 분노만이 가득했다. 이를 부드득 갈던 구백룡의 손에 끼여진 조가 날아들었다.
그의 몸이 마치 매처럼 민첩하게 다가왔다.
슉! 슉슉!
빠르게 좌우로 움직였지만 갈지혁은 턱을 뒤로 당기며 공격을 피해 냈다.
그의 조에서 일순 하얀색 빛이 솟아올랐다. 하얀색 빛에 휩싸이는 조가 그대로 갈지혁의 가슴으로 내리 꽂혔다.
그러자 갈지혁이 빠르게 손을 휘둘렀다.
갈지혁의 손도 녹색 기류가 감싸며 흔들렸다. 두 개의 힘이 부닥치면서 둘 모두 뒤로 물러났다. 구백룡의 얼굴에 또 한 번 놀랍다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장법이었다. 마주한 갈지혁의 장법은 분명 독장이다. 그런데 그 독장의 위력이 너무 컸기에 구백룡 또한 뒤로 물러서야 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독장은 일반적인 장법보다 파괴력을 죽이고, 날카로움을 없앤 대신 큰 살상 능력을 지닌다. 그런데 갈지혁이 휘두른 장법은 그렇지 않다.
갈지혁이 아무런 말도 없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구백룡은 급히 몸을 공중으로 날렸다. 직감적으로 뭔가 위험함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으, 으악!”
비명에 구백룡은 뒤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부하 중 하나가 가슴을 움켜쥔 채로 푸들푸들 떨고 있다. 온몸은 이미 녹색으로 변해 있고, 눈동자는 흰자위만 가득하다.
보이지 않았다. 손가락에서 지력이 쏟아져 나왔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감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면 아마 가슴을 움켜쥐고 있는 건 구백룡 자신이었을 게다.
장강의 왕이 되는 데까지 무려 사십 년이 걸렸다. 그토록 자신이 쌓아 두었던 것을 갈지혁은 무너트리고 있다.
아미파와 싸우고 있는 자들은 서서히 싸움을 정리해 가고 있다. 하지만 막 배로 넘어온 수하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하다. 갈지혁의 단순한 움직임 하나에 몇십 명이 나뒹구는 걸 본 탓이다.
그 모습을 보니 함부로 움직일 마음도 들지 않는다.
구백룡이 와락 소리를 질렀다.
“멍청하게 서서 뭐 하는 거냐!”
그의 고함에 평소 구백룡을 아는 수하들이 움찔했다. 그들이 움직이려 하자 이번엔 갈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만히 있어라. 움직이는 놈부터 죽여 줄 테니.”
그 와중에 한 명이 움직이자 갈지혁은 그자가 있는 쪽을 향해 다시금 백골환을 터트렸다.
쉬익거리는 뱀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그 부근에 있던 자들이 마찬가지로 가슴을 움켜쥐면서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익!”
구백룡의 얼굴이 붉어졌다. 눈뜨고 자신의 수하들이 죽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니 울화통이 터진다. 어떻게든 막고 싶은데 도저히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꽤나 많은 경험이 있는 구백룡이다. 사천당문의 무인들과도 수없이 손을 겨뤄봤다. 그들은 독을 쓴다. 하지만 아무도 갈지혁 같지 않았다. 독을 하독하는데 보이지가 않는다. 암기에 묻혀서 독을 쓰던 사천당문과는 너무 다르다.
‘도대체 언제…….’
눈에 보여야 뭘 해도 할 것이 아닌가.
너무 귀찮은 상대다. 이렇게 상대하기가 꺼려지는 자는 생전 처음이다.
갈지혁이 완벽하게 구백룡을 막아 내자 진검백이 움직였다. 아미파의 여승들이 점점 쓰러지면서 밀리기 시작하던 싸움터에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땅에 발을 딛기가 무섭게 그의 검은 매화를 쏟아 냈다.
장강수로채의 정예들이긴 했지만 개중에 진검백의 검을 받을 만한 자는 거대한 철퇴를 들고 있는 우석청뿐이다. 더군다나 그 또한 진검백에 비하면 한참은 아래니…….
단숨에 상황이 변할 것은 당연하다. 구백룡은 점점 상황이 변해 가는 걸 보면서 앞에 있는 갈지혁을 노려봤다.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쓰러져 나뒹구는 수하들의 수만 해도 백 명가량이다. 그렇게 간단한 움직임으로 이만한 인원을 없앨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여태까지 보아 왔고, 생각했던 독은 이런 게 아니다.
‘이놈의 독은 독이 아냐. 아니…… 이것이 진짜 독이겠지.’
왜 무림에서 독을 엄하게 막았는지 이해가 간다. 손을 겨루어 봤다. 독을 쓰는 것을 제하고도 무공에도 빼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이만한 자들이 몇 명만 모습을 드러낸다면 당장에 무림은 쑥대밭이 될 게 분명하다.
놀라긴 했지만 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갈지혁의 독은 통하지 않는다. 백골환이라는 독 또한 자신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하지 않았는가. 독이라는 것은 일정 수준 이하의 하수에게나 통하는 것이다.
“다른 놈은 몰라도 너만은 꼭 죽여 줘야겠다.”
“아까 전에도 죽인다고 한 것 같은데 말이요.”
“크크, 다르지. 아까는 널 얕봤어. 아니, 독을 얕봤다고 해야 맞겠지. 네가 쓰는 독과 오대세가의 하나인 사천당문의 것이 너무 달라. 사천당문이었다면…… 우스웠지.”
사천당문의 무인들은 너무 약했다. 독이 묻은 암기를 쓰거나, 독을 뿌리기도 했지만 피하면 그만이었다. 심지어는 독을 쓰기 전에 가까이 붙어 그대로 목을 따버린 놈들도 한둘이 아니다. 독을 쓰는 자들은 거리만 주지 않으면 된다.
그렇지만 갈지혁에겐 통하지 않는다.
“신기하군. 같은 독을 쓰는 자인데 왜 이렇게 다른지.”
“당연히 다를 수밖에.”
갈지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사천당문은 분명 오대세가의 하나로 무림에서 나름대로 입지를 지니고 있는 문파다.
무림에서 유일하게 독을 쓰는 것이 허용된 곳이 바로 사천당문이다. 물론 그것이 정파 무림이라는 틀 안에 있을 때지만.
갈지혁이 말했다.
“그들과 난 바라보는 하늘이 다르니까.”
구백룡은 천천히 갈지혁이 내뱉은 말을 되씹었다.
“바라보는 하늘이…… 다르다?”
상대를 너무 얕봤던 모양이다. 독이라고 하면 으레 사천당문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제 구백룡에게 묻는다면 당장에 갈지혁을 떠올릴 게다.
그만큼 갈지혁이 보여 준 독은 뇌리에 각인됐다.
빨리 갈지혁을 쓰러트리지 않는다면 이번 일은 실패다. 너무나 쉽게 백 명에 달하는 수하들이 쓰러졌다. 남은 인원은 그 두 배에 가깝지만 그들을 불러들일 수도 없다. 또다시 갈지혁의 독에 당하게 될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