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18화
갈지혁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잠을 자는 듯하지만…… 그럴 갈지혁이 아니다. 눈은 감고 있지만 이미 그 여섯의 눈길을 느끼며 자는 척을 하는 것뿐이다. 어느 때건 움직일 수 있는 상태로 갈지혁 또한 그 여섯을 파악하고 있다.
왜 그들이 자신을 쫓는지는 안다. 사독문을 벗어난 탓일지도 모르지만 그거였다면 이렇게 감시만 하고 있을 턱이 없다. 사독문을 벗어난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려면 이미 예전에 살수를 펼쳤어야 옳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갈지혁을 감시만 할 뿐이다. 답은 뻔하다.
‘단화초……. 아직도 욕심을 못 버렸군, 지대익.’
여섯 명의 정체불명의 괴인들은 지금 갈지혁의 뒤를 쫓으며 단화초의 흔적을 찾으려 하는 게다. 무림을 온통 뒤흔들고야 말 단화초를 지대익은 간절히 원하고 있다.
하지만 결코 넘겨줄 생각은 없다. 일악천은 지대익의 손에 단화초가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게다. 지대익이 무슨 이유로 단화초를 원하는지는 정확히 장담할 수 없지만 그것이 옳지 않을 거라는 건 분명하다.
배가 순간 크게 덜컹이면서 갈지혁의 몸도 흔들렸다. 갈지혁의 몸은 잠에 빠진 사람 마냥 힘없이 그렇게 움직였다.
빠르게 움직이던 배가 갑작스럽게 멈춘 탓에 몇몇의 사람들은 잠에서 깨어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위에서 갑판 위에서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웅성거림이 점점 커지면서 눈을 감고 있던 갈지혁에게도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강수로채가 왜 여기에…….”
“왠지 기분이 안 좋더니…….”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기만 하던 갈지혁은 대충 상황을 알아차렸다. 장강수로십팔채가 이 강에 모습을 드러낸 모양이다. 배가 갑작스럽게 멈춘 것 또한 그 탓이리라.
갈지혁은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지금 일어난 듯 행동하면서 옆에 있는 진검백을 깨웠다.
“일어난 거 알아.”
“후우, 귀찮은 일에 끼어드는 건 질색이라고.”
“네 의사가 어떻든 이미 그리된 것 같은데.”
“망할! 이곳에 웬 장강수로채야.”
장강수로십팔채라는 집단이 있다. 장강을 기반으로 해서 물 위에서 노략질을 일삼는 수적(水賊)의 무리다. 헌데 단순히 그리 볼 수만은 없는 게 그들은 단순한 수적이 아니다. 그들은 커다란 문파와 다를 게 없다. 무공을 익혔으며, 특히 물 위에서 싸우는 싸움에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
그랬기에 다른 수적이라면 모를까 장강수로십팔채가 나타났다 하면 대부분의 선박들이 어떻게든 좋게 좋게 해결하려고 드는 것이다. 문제는 이 해로에 장강수로채가 모습을 드러낼 리가 없다는 거다. 이곳은 그들이 활동하는 영역이 아닌 탓이다.
“가짜 아냐? 장강수로채라면 으레 겁을 먹으니까.”
“확인해 보면 알겠지. 올라가자.”
“쳇.”
진검백은 귀찮다는 듯이 말을 내뱉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배 갑판에서 커다란 소란이 이니 안에서 잠들어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에서 깬 상태다. 그들은 장강수로채라는 말에 겁을 집어먹어 버렸다.
반면 무인들은 급히 자신들의 병기를 꺼내 들며 만약에 있을 사태에 대비했다.
갑판 위로 올라가기 위해 문을 열자 햇빛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출발할 때는 밤이었는데 벌써 해가 뜬 모양이다. 진검백은 슬쩍 인상을 찡그리고는 바로 위로 올라섰다. 그의 눈이 근처에 있는 배로 향했다.
정말로 장강수로채인가 확인하려던 진검백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가 잠시 주변을 살피다 말했다.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많군.”
“……나도 알아 그 정도는.”
“적어도 가짜는 아니겠군. 일개 수적이 이만한 배를 운영할 재력이 없을 테니. 그리고 단순히 이 배를 털기 위해 나타난 것도 아닌 것 같고 말이야.”
갈지혁의 말에 진검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생각도 같음을 보였다.
실로 절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대충 세어 봐도 삼십 여 척은 될 것만 같은 배들. 그리고 한 가운데 있는 배의 위용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 크기는 족히 커다란 성벽과도 같았다.
“이, 이게 무슨…….”
더듬거리며 말을 하는 것은 이 배를 모는 선장 이곽이었다.
이곽 또한 장강수로채와 이렇게 대면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 해로를 무려 삼십 년이나 다닌 그다. 그러면서 장강수로채에 피해를 입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한 마디로 이 해로와 장강수로채와는 전혀 연관이 없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나타난 이 광경은 무엇이란 말인가.
둥그렇게 펴진 채로 서 있는 배들은 모든 길을 막았다고 화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둘씩 기어 나오는 무인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굳어졌다. 이 배는 무인들이 꽤나 많이 타고 있었다. 더군다나 아미파의 혜정 신니를 비롯해 점창파에서 나름대로 무공을 익혔다고 자부하는 자들도 있다. 장강수로채라고해도 이 정도라면 싸워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눈에 보이는 모습을 본 그들은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장강수로채는 배에 있는 모두를 굳게 만들어 버렸다.
한눈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많은 수의 배가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배를 유심히 바라보던 진검백은 옆에 서 있는 갈지혁에게 말했다.
“작은 배에 최소 열 명씩은 타고 있는 것 같은데…… 큰 배는 세기가 무서울 정도야.”
장강수로채의 수적의 숫자는 오백 가까이는 되는 듯했다. 저 정도의 숫자라면 이 배에 있는 자들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냥 수적도 아닌 장강수로채의 수적임에랴.
지금으로서는 아무런 것도 할 수가 없다. 저들이 먼저 다가와 용무가 무엇인지 말하기 전까지는. 다가오던 배들이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뱃전에 다가왔다.
뱃전에 올라선 사내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커다란 덩치에 얼굴은 수염으로 가득하다. 나이는 대충 서른이 조금 넘은 듯했다. 그가 큰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쩌렁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으하핫! 형님! 제가 왔소!”
“멍청한 녀석. 이런 식으로 눈을 끌 필요는 없다니까.”
장강수로채 수적의 말에 대답은 놀랍게도 갈지혁의 뒤에서 들려왔다. 모두의 눈이 대답을 한 자에게로 쏠렸다. 배 구석에서 악기 하나나 들고 오는 내내 조용했던 사내다. 유약해 보이고, 행색도 형편없다. 어떻게든 악기 하나로 돈을 벌어 근근히 하루하루를 버티는 사람처럼 보였거늘 그게 아닌 모양이다.
사내는 슬쩍 모두를 둘러봤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달았다.
“겁먹을 필요들 없소.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다만 이 배에 있는 누군가에게 용무가 좀 있어서 말이오. 그래서 이렇게 여러분들에게 민폐를 끼친 듯하구려. 용서하시오.”
말은 미안하다고 하지만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패자(覇者)의 기운이다. 언제나 위에서 선 자만이 내뿜을 수 있는 기백이다. 이러한 자는 두 가지 부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부는 자와, 그만한 능력이 있는 자.
이 사내는 후자다.
“나오시오. 아니면 내가 가리다.”
패기 있는 사내의 목소리에 배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를 살폈다. 갑자기 누구를 나오라는 것인가.
“장강에 용이 한 마리 살고 있다더니 그게 당신인가 보군요.”
들려온 목소리는 여인의 목소리였다. 아미파의 여승 중 하나가 나서며 대답한 것이다. 혜정 신니조차 조용히 있거늘 끼어든 여인을 보며 건방지다 생각해야 정상이다. 헌데 사내는 부드럽게 웃었다.
“용이라……. 과분치도 않소이다. 이렇게 모시게 되어 죄송한 마음을 금치 못하지만 이해 바라오.”
아미파의 젊어 보이는 여승이 바로 사내가 찾던 그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아니, 애초에 여인은 아미파의 인물이 아니다.
여인의 외모는 그리 빼어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귀염성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이도 채 스물이 갓 되거나 그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듯했다.
커다란 눈에 흰 피부가 다소 눈을 끄는 여인이다.
“구백룡(九白龍), 물러서시지요.”
혜정 신니가 나서며 말했다. 그녀는 여인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고, 사내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구백룡이라고 불린 사내가 혜정 신니를 향해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무림에서 명성이 자자한 혜정 신니를 이렇게 볼 줄은 생각도 못 했소이다.”
“이만한 대 인원을 끌고 왔다는 건 일을 벌이겠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리 봐도 되겠습니까?”
“후후, 수로왕(水路王)이 장강의 길을 막은 탓에 지금 우리의 타격이 이만 저만이 아니오. 수로왕은 만나려고 해도 피하기만 하니 이렇게 딸이라도 만날 수밖에. 수로왕은 딸을 애지중지한다고 들었거든. 이야기하기 싫어도 해야 할걸.”
혜정 신니가 손을 꺼내 들어 공격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녀의 허리에 달렸던 검이 어느샌가 손까지 닿아 있다.
혜정 신니를 비롯한 아미파의 인물은 지금 임무를 지니고 있었다. 그게 바로 수로왕의 딸인 진려희(振麗熙)를 지켜내는 것이다. 눈에 안 띄게 하기 위해 아미파의 여승으로까지 변장시키면서 왔거늘 이미 알아차렸던 모양이다.
수로왕은 현재 해로를 이용한 장사를 휘어잡고 있는 거부이자 무인이다.
그리고 구백룡은 현 장강수로채의 채주다. 당연히 부닥치지 않을 수 없는 사이인 것이다. 수로왕은 장사를 하고, 구백룡은 그런 장사꾼들을 노리는 수적이다.
적당한 선을 지키며 그렇게 지내왔거늘 수로왕이 손을 쓴 것이 이번 일에 발단이 됐다. 장강수로채가 일을 하던 주변을 지나는 배가 현저히 줄어 버렸다. 모두 수로왕이 장강의 길을 막아 버린 탓이다.
그 수로를 가야 하는 사람에게 일정 금액을 주면서 약간 멀더라도 길을 돌아가게끔 한 것이다. 전부 장강수로채에 막대한 타격을 주기 위해서다.
실제로 수입이 반 이상이 떨어져 버려 그 타격은 녹록지 않은 상태다.
이야기를 하려 해도 자꾸 수로왕이 피하자 구백룡은 이렇게 극단적인 수를 쓴 것이다. 바로 그의 딸인 진려희를 노렸다.
혜정 신니가 검을 뽑아 들자 뒤에 있던 아미파의 무인 모두 그녀의 옆에 섰다. 언제든 싸울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하지만 구백룡은 그 모습조차 우스웠던 모양이다. 실제로 지금 구백룡의 뒤에 있는 장강수로채의 수적들은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고수들이다.
그들이 무공을 아예 모르는 생초보거나, 삼류무인이 아닌 이상 질래야 질 수가 없는 상황이다. 열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아미파의 무인들과, 몇백에 달하는 장강수로채.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이미 승패가 정해진 싸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지만 아미파 또한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다.
점창파의 무인들은 애매한 상태였다. 같은 구파일방의 하나인 아미파가 위험에 처했지만 도와야 할지 아닐지 망설이는 것이다. 어차피 싸워 봤자 필패가 눈에 보인다. 더군다나 지금 점창파와 아미파는 견원지간(犬猿之間)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이를 갈지 않는가.
“혜정 신니, 물러서시오.”
“우스운 소리입니다. 저희는 진 소저를 무사히 모시고 가는 게 임무니까요.”
“내가 빼앗아 가야겠다면?”
“……마찰은 불가피하겠지요.”
“전부를 죽이는 꼴이오. 난 결코 자비롭지 않소이다. 나에게 칼을 겨눈 자들을 살려 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소. 물러선다면 베지 않을 거요.”
말을 하면서도 구백룡 또한 대답을 알고 있었다. 아미파라는 이름이 걸린 이상 그들이 물러설 리가 없다. 알면서도 물었고, 돌아온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아미파의 정신은 그리 쉽게 꺾이지 않습니다. 설령 죽는다 해도 말이지요.”
“괜한 죽음을 사서하는군. 어쩔 수 없지. 막는다면 힘으로 데리고 가는 수밖에.”
구백룡은 뒤에 서 있는 털이 가득한 사내에게 말했다.
“모셔와라.”
“알겠습니다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