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행표-37화 (37/37)

2.

불길을 처음으로 본 것은  조홍이었다. 그는 황혼이 깔리는  서쪽

하늘을 환하게 밝히는 불빛을 보면서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봐라, 공손강시! 네 꿈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공손조덕은 월인의 힘을 반만 돌려받은 상태라 예전만  못한 공력

으로 예전에 비해 두 배 이상 강해진 조홍과 싸워야 했기 때문에 계

속 밀리던 중이었다. 그래서 조홍이 저런 여유를 부릴 수도 있게 된

것이지만 화광이 올라오는 걸  보고 그또한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아

빈틈을 찌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겉으로는 태연을 가

장하고 조홍에게가 아니라 고목을 향해 일장을 날렸다.

"내 꿈이라고? 내 꿈은 너희들 셋을 몽땅 죽여버리는 것 뿐이다!"

생사판과 일진일퇴의 격전을 벌이다가 불시에 기습을 받은 고목은

뒤통수에 한 대 얻어맞고는 분노를 공손조덕에게 돌렸다.

"이것들이 짜고 싸우네! 어디 너도 한 번 당해봐라!"

그는 이제야 말로 무기를 꺼내 들었다. 양손을 한 번 뒤집는가 했

더니 어느새 그의 손에 두 자루 날카로운 검, 조양과 명봉이 들려있

었던 것이다. 그는 조양을  하늘로 치켜 세우고, 명봉은  땅을 향해

내렸다. 다음 순간 그의 손에서 두 자루의  검이 사라졌다. 그를 둘

러싼 공간에 귀를 찢는 듯한 소음이 가득차는 순간이었다.

공손조덕이 깊이 심호흡을 했다. 조홍도 양손을 가슴 앞으로 교차

시키며 방어자세를 취했다. 생사판은 펄쩍 뛰어 일  장 이상을 물러

섰다. 고목의 비도술(飛刀術), 어검술에 가까운  비도술이 발휘되면

그 누구도 안전하다고 보장할 수 없었다. 고목의  괴퍅한 성격에 따

라 목표는 누구든지 될 수 있었다.

허공을 가르던 새 울음소리가,  이것을 고목은 봉의 울음이라  했

다, 그 새 울음소리가 갑자기 강해진 순간 조홍이 쌍장을 연달아 휘

둘렀다. 고목의 검 한 자루가 허공에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날아와

서 그의 인후(咽喉)를 노렸던 것이다. 공손조덕도 두 손바닥을 모아

합장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고목의 나머지 검이  그 손바닥에 잡

혔다가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빠져나갔다.  고목은 그 매끄러

운 대머리에 빛을 내며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 어느새 다

시 두 자루의 검이 잡혔다.

생사판이 그림자처럼 매끄럽게 고목을 향해 다가왔다.  그의 귀왕

자가 고목을 스치고 지나가더니  조홍을 노렸다. 조홍은  방금 겨우

고목의 비검을 막아내고 안도의 한숨을 쉬던  찰나라 귀왕자의 공격

에 빈틈을 찔린 셈이었다.  그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그의 손톱이

날카로운 낫처럼 공간을  자르고 귀왕자를 쳤다.  쇳소리가 울렸다.

공손조덕이 수도를 세워 조홍의 옆구리를 때렸다. 고목이 다시 검을

수평으로 던져 보내었다. 허공 가득 새 울음소리가 퍼졌다.

조홍은 귀왕자를 간신히 막아내었지만 얼굴이 찢겨지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공손조덕의 수도도 옆구리를 강하게  후려 갈겼다. 조

양과 명봉이 그의 양어깨를 꿰뚫을 듯 다가왔다. 위기일발의 순간에

그는 오히려 천천히 행동했다. 두 손을 들어 가슴 앞에서 원을 그리

며 움직였다. 그의 손에  하얀 서리같고, 옥같은  기운이 뭉쳐졌다.

조양과 명봉이 공중에서 누군가에게 눌리기라도 한  듯 방향을 틀어

조홍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공손조덕의 수도는 쇳소리만 내고 다

시 튀어나왔다. 조홍의 손이 가슴앞에서 모였다가 사방으로 뻗었다.

공손조덕도, 고목도, 생사판까지 연거푸 몇 걸음을 물러났다.

고목이 소리쳤다.

"상관오리야, 정말 많이 진보했구나!"

공손조덕은 입을 벌려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 내었다.

"고목 땡초야, 제대로 싸우고 그런 소리를 해라!"

그는 고목과 생사판이 진심으로 싸우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

던 것이다. 생사판은 대꾸하지 않고 음침한 눈으로 공손영령과 그의

수하들이 싸우는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그는 조홍이든 공

손조덕이든, 심지어 치료법에 조차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았다. 그

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주목받지 않고 공손영령의 귀걸이, 천마령을

탈취하느냐에 있었다.

이때, 공손영령이 번개처럼 팔을  휘둘러 통비원과 금시계,  금빛

날개의 닭을 한걸음씩 물러서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쏘아진 탄환처

럼 뛰어올라 장내를 벗어났다. 생사판이 안색이 변해 외쳤다.

"쫓아라!"

공손영령과 싸우던 통비원, 금시계는 물론 다른 팔대 호교령이 일

제히 공손영령을 쫓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싸우던 상대가 놓아줄 리

가 없었다. 쌍두사와 독안효(獨眼梟), 독각시(獨角 ), 투오공(鬪蜈

蚣)은 지금까지 싸우던 적, 동창의 당두들에게 제지되어 머물고, 무

면호와 독각토만이 공손영령의 뒤를 쫓았다.  화광이 충천하는 방향

이었다.

조홍이 씹어뱉듯이 외쳤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 모두 죽여버려라!"

그 말을 계기로 싸움터의 긴장이 더욱 높아졌다. 그의  말이 허장

성세는 아니었던 것이 천강시가 열 둘인데 제대로 싸우는 것은 반밖

에 안되었고, 나찰십이방도 살아남은 숫자는 겨우  여덟, 이것이 고

목과 공손조덕의 세력이었다. 생사교의 호교령들을  합쳐도 열 여덟

밖에 안되었다. 그에 반해 살아남은 동창의 당두들은 마흔이 가까웠

다. 잘 봐줘도 일대 이로 싸워야 하는 것이다.

여기 온 동창의 당두 중 제일 고수는 새  을(乙)자로 휘어진 기형

검, 정확한 명칭은 귀곡검(鬼曲劍)을 사용하는 일급 당두 단무혁(丹

武赫)이었다. 그는 이미 천강시 하나를 동작 불능 상태로 만들고 나

찰십이방 중 둘의 사지를 잘라버리는 전과를 이루었는데, 지금 조홍

의 명에 따라 다시 살기를 드 높이고 있었다.  그는 피 묻은 귀곡검

을 혀를 내밀어 핥으며 새로운 목표를 찾았다. 그 눈에 시커멓게 생

긴 녀석 하나가 들어왔다.  생사교의 제 삼 호교령인  독각시, 일명

코뿔소였다.

"죽엇!"

한 마디 외침과 함께 그의 귀곡검이 허공을 가르고 독각시를 향해

날아갔다. 검을 잡고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아예  통째로 던져 버리

는 것이다. 그것을 신호로 격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

공손영령은 화광이 올라오는 곳에 용유진이 있으며,  그에게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확인하러  가는 것인데, 통

비원과 그 일당, 특히 이상하게 생겼으면서도 경공 하나는 기막히게

빠른 금시계에게 잡혀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격전을 벌여야 했다.

아까 봉우리에서는 통비원과 그,  단 둘을 상대로  해서도 빡빡하게

싸웠는데 이제 거기 무면호와 독각토마저 끼자  싸움은 극히 불리하

게 돌아갔다. 희대의 기공인 고루마공을 익혀 호신강기 역할을 했으

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곧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을

것이다.

그녀는 간간이 천강수를 써서 적들을 위협하는 것  말고는 대부분

의 초식을 방어 위주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새로운 적이 나

타났다. 사람은 네 명이지만 다리가 일곱 개밖에 안되고, 팔은 다섯

개 밖에 없는 무리들, 중주사견이었다.

"참, 비효율적으로 싸우지?"

황구이의 말에 흑구삼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계집애 하나 상대하는데 건장한 네  사내가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백구말이 품속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며 나섰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반구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사교에 가입한 기념으로 한 건  하지 뭐. 막내야, 손 좀  써봐

라."

공손영령의 눈가에 다급함이 스쳤다. 알고보니 이  개떼들도 생사

교의 일당인 모양이었다. 무언가 치졸한 수를 쓸  것 같은데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네 호교령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

었던 것이다.

백구말이 잔뜩 얻어터져 부은 듯한 얼굴에 징그러운  미소를 떠올

리며 손에 쥔 물건을 흔들었다.

"남자에겐 해가 없고 계집애에게만 영향을 주는  물건이니 두려워

마시길!"

그의 손에서 작은 단지처럼 생긴 물건이 날았다. 그리고 공손영령

의 발치에 떨어졌다. 경황이 없는  가운데에도 공손영령은 발끝으로

그 단지를 걷어차 다시 날려  보내려 했다. 그 순간  단지가 깨지고

분홍빛 연기가 터져 나왔다. 싸움은 끝났다.

"이걸 어쩌지?"

백구말이 입술을 핥으며 공손영령을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그들

의 앞에 반 벌거숭이 상태로 누워 있었다. 음약(淫藥). 강력한 흥분

제로 정신을 흐트려 놓고 혈도를 제압해버린 것이다.

금시계가 침을 뱉었다. 그들은 자객이 본업이지  강간범은 아니었

기 때문에 음약을 사용한다는 따위의 일을 경멸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일은 어쨌거나 중주사견  덕에 쉽게 끝난  것이 사실이었다.

상을 줘야 할 것이다. 그는 공손영령의 귀에서  귀걸이를 떼내며 말

했다.

"우린 이거면 되니까 나머지는 알아서들 처리해도 좋아."

백구말과 그 일당들이 반색을 하는 순간, 푸른 섬광이  숲을 밝히

고, 금시계의 상반신이 하반신에서 떨어져 솟아올랐다. 피는 흐르지

않았다. 그의 상반신과 하반신의 접합부분은 불로 태운 것처럼 순간

적으로 익어 버려서 피가 새어나올 틈이 없었다.

"누구…?"

통비원이 본능적으로 팔을 휘둘러 자신을 보호하면서 소리질렀다.

그러나 그 소리도 채 입에서  다 나오기 전에 그는 한  사람이 그의

앞에 나타나는 것을, 그리고 한 자루의 검이 그의 입을 뚫고 뒤통수

로 나오는 것을 느껴야 했다.

무면호는 종리극의 손에 죽었다가 한 번 다시 살아났지만 사실 이

지(理智)를 잃어버린 반 강시 상태였다. 그는 이미 강복사에 침입했

을 때 이미 한 번  죽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본신의  생기를 완전히

소진하고 오행진독신공의 독기운에 의해 간신히 신체적 기능만 발휘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만큼 반응이 늦고,  그 초식들은 정묘함이

없었다. 그는 뒤늦게 나타난 황태자의 주먹에  간단히 죽어 버렸다.

진짜 죽음이었다.

금시계를 토막내고 통비원을 관통한 용유진의 검은 그러고도 기세

를 잃지않고 독각토까지 노리고 있었다. 독각토 역시  한 번 죽었다

가 살아났지만 한 번 뿐이었기 때문에 무면호처럼 완전히 이지를 잃

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런 차이가 그의  목숨을 구해주지는 않았다.

간신히 몸을 돌려 용유진의 검을 피하는 그의 얼굴로 황태자의 주먹

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는 뇌수를 흩뿌리며 뒤로 넘어갔다.

중주사견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무리 그들이  천마불사공을

익혔다 해도 지금 그들을 겨누고 있는 용유진의 검에 금시계처럼 동

강이가 나버리는 사태를 맞게 되면 재생 불가능이었다.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용유진은 상처 투성이, 피 묻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이거 어디서 본 얼굴들이군요. 날 기억하는지 모르겠소이다."

반구대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포권했다. 일당 중에 두  손을 모

아 인사할 수 있는 건 그밖에 없었다.

"물론입니다. 용공자. 그동안  기상이 더욱 헌앙(軒昻)해  지셨군

요. 무공도 조화지경에 오르시고…, 경하 드립니다."

"경하는 내가 드려야지요. 기연을 만나셨다면서요?"

반구대의 표정이 더욱 어색해졌다.

"기연은 무슨…. 잔재주 조금 는 것뿐이지요."

용유진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사실 네 분을 만날 때마다 별로 좋은 상황에서 만나는 것이라 기

분이 좋을 일이 없는데, 묘하게도 네 분만  만나면 보물이 굴러들어

온단 말씀이지요. 이번에도 그런지 시험해 보고싶소만…, 기대를 저

버리지는 않으시겠지요?"

황구이가 버럭 화를 냈다.

"니미, 보물은 무슨 보물.  그런게 있으면 우리가 여기서  이러고

있겠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용유진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황구이는 어깨

뼈가 바스러지는 고통을 느끼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강기를 사용하

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쇠 몽둥이에  맞는 것에 불과했기에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그는 세로로 두 동강이 났을 것이다.

용유진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것이 중주사견의 공포심을  더욱 자

극했다.

"네 분 덕분에 동창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를 배웠지. 그중  이런

도리가 있더이다. 조금만 차분히 생각해 보면 세상엔 기억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말이오."

백구말이 창백한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공자에겐 이럴 시간이 없을거요."

"왜 그렇소?"

백구말은 공손영령을 가리켰다.  그녀의 얼굴은 홍시처럼  붉어져

있었다. 그것이 단순한 부끄러움, 혹은 용유진을  만나 기뻐서 그러

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저대로 두면 곧  혈맥이 터져 죽을거요.  얼른 고쳐주지  않으면

…."

용유진이 검을 내밀어 그의 코를 건드렸다.

"치료 방법은?"

백구말이 음침하게, 한편으로는 아쉽게 말했다.

"음약을 마셨으니 음양화합(陰陽和合) 밖에 더 있겠소?"

용유진의 검이 움직였다. 백구말은 귀를 움켜쥐고  펄쩍펄쩍 뛰었

다. 쇠몽둥이 같게만 보이던 전궁검이 푸른 이빨을  드러내 그의 귀

를 잘라가 버린 것이다.

"좋아, 오늘은 귀하들을 그냥 보내드리도록 하겠소.  귀하들은 몰

랐겠지만 그동안 귀하들  덕에 내가 얻은  행운에 대한 대가요.  단

지!"

용유진은 빙그레 웃었다.

"옷은 다 벗어두고 가도록!"

중주사견은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옷을 벗었다.  그리고 숲사이로

사라지려 하자 용유진이 반구대를 찍어 가리켰다.

"아, 거기 그 것도 두고 가시오."

반구대는 여인이나 사용할 둥근 청동 거울로 치부를  가리고 있었

다. 용유진이 말하는 것은 바로 그 거울이었다.

반구대가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이 나이에 치부를 가릴 물건 하나 없이 가기란 좀 곤란…!"

용유진이 다시 웃었다.

"그걸 생각 못했군요. 좋소, 옷을 돌려드리지요. 대신  그 거울은

두고 가시오."

반구대가 머뭇거리자 용유진의 검이 다시 푸르스름하게 빛이 나기

시작했다. 중주사견은 황급히 옷을 집어들고 숲사이로 사라졌다. 먼

곳에서 황구이의 욕설이 들려왔다.

"젠장, 이 개잡종 놈아! 나중에 두고 보자!"

용유진은 씩 웃고는 거울을 집어 들었다. 파랗게 녹이  슬어 거기

비추이는 것도 없는 낡은 거울이었다. 그것을 용유진은  품 속에 집

어 넣고 황태자를 향해 절을 했다.

"잠시 이 여인을 치료하러 가야겠습니다."

황태자가 묘한 미소를 흘렸다.

"아는 여인인가?"

"제 약혼녀입니다. 전하."

보령군주가 휘청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

다.

"비상시지만 사람의 생명은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일각의 시간을

줄테니 가보게."

"일각이라…."

용유진은 웃었다.

"좀 짧은 것같지만 그 안에 해보겠습니다."

그는 공손영령을 안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오대룡이 소리

쳤다.

"호법 필요하지 않아?"

용유진은 짧게 대꾸했다.

"됐네요."

황혼이 짙어지고, 숲에는 밤새들이 날기 시작했다. 나무  아래 그

늘이 엷어지는 대신 대지의 빛깔이 어둡게 가라앉고 있었다. 사방이

수풀로 둘러싸인 좁은 빈터에 용유진은 옷을 벗어 자리를 만들고 공

손영령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 혈도를 풀어주었다. 공손영령은 용수

철처럼 튀어 일어나더니 그를 끌어안았다.

"보고싶었어."

"석달 만인걸 뭐."

석달 전, 이 모든 일이 생기기 전에 그는 공무를  핑계 삼아 산서

에 갔었고, 그때 공손영령을 만나고,  공손조덕을 만났었다. 월인의

절반 내공을 돌려준 것이  그때였다. 돌려주지 않았으면  며칠 안에

죽었어야 하는 것이 공손조덕의 형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용유진은 공손영령이 대담해 진  것이 음약의 탓이라고  생각하고

그녀의 정수리에 손을 대었다.

"자, 치료하자. 옥로진기가 이럴 때 꽤 효과가 있지. 사실은 독에

대해서만은 만병통치야."

"내력소모가 많을텐데, 피곤하지 않아?"

"다른 방법 보다야 그나마 이게 체력 소모가 적겠지."

공손영령은 고개를 끄덕이고  가부좌를 틀었다. 용유진의  신색이

엄숙해지고, 그의 백회혈(百會穴)위로 옥색 기운이 서렸다. 잠시 후

그가 손을 뗐을 때, 공손영령의 안색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용유진은 그녀의 안색이 아직 상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왜 그러지? 약기운이 덜 빠졌을까?"

공손영령은 대답을 않고 입술만 깨물고 있다가 문득  수줍게 웃었

다.

"그래요. 아무래도 그게 필요한 거 같아."

"그거…?"

"그래 그거…."

공손영령은 눈을 감고 입술을 내 밀었다. 피에 젖고, 땀에 절었지

만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용유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주먹으

로 입술을 문지르고는 그녀의 입술에 마주 대었다. 공손영령이 팔을

조금씩 움직여 그의 목을 끌어 안았다. 용유진은 아찔해지는 감정을

느끼고 공손영령의 허리를 감아 쥐었다.

"난…, 처음인데…."

"나도 그래."

"혼인도 않은 상태에서…, 더구나 이런 비상시에 이래도  되는 걸

까?"

"비상시라 지금 해야 해. 지금밖에 기회가 없어."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밤이 기다리고 있을텐데…."

"조홍에게 죽으면 우리에겐 단 하루의 밤도 허락되지  않아. 그래

서 지금 하는 거야. 음…, 잠깐만. 거긴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음…, 내가 벗을께."

잠시 침묵이 흐르고, 숲속에는 옷자락 스치는 소리만  들렸다. 공

손영령이 다시 말했다.

"잠깐만."

"이번엔 뭐지?"

"미리 먹어둘 게 있어. 아까 그놈들 손에서 월령은 챙겨 왔지? 유

진에게 준것도 "

공손영령은 용유진의 손에서 귀걸이를 받아 한쪽 귀걸이의 소녀얼

굴과 다른쪽 귀걸이의 해골을 마주 대었다. 반짝  작은 섬광이 빛나

고, 두 개의 귀걸이는  각각 반쪽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방울의 추 역할을 하는 두 개의 구슬이 굴러 나왔다. 붉은 색, 그리

고 푸른 색이었다. 공손영령은 푸른 색을 용유진에게 내밀고 자신은

붉은색 구슬을 삼켰다.

"됐어. 이제 다시 해."

"도대체 이게 뭐지?"

"천마환(天魔丸)."

"뭐?"

"강시당의 선조 한 분이 마교 몰락 시에 천마령을 입수했어. 그게

월령이고, 천마검(天魔劍), 천마경(天魔鏡)과  더불어 마교의  삼대

보물 중 하나지. 천마령은 그 자체로도 보물이지만  사실 핵심은 그

추가 되는 천마환이야. 월인과 마찬가지로 마교 전래의 공력이 응축

되어 있다는 말이 있는 물건이야. 복용하면 천마불사공을 익힌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는데, 단지 그 복용 방법이…."

"남녀가 각각 먹고 약기운을 중화시킨다는 건가?"

"그런거야."

"그래서 지금 해야 한다고 하는 거군."

"당장 효력이 없을 수도 있지만…, 지금 조홍과 싸울  수 있는 건

유진밖에 없어. 나로서는 이거라도 해줄 수밖에는…."

"음…."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용유진이 다시 말했다.

"내게 한 생각이 있는데…."

"뭔데?"

"아까 중주사견에게서 얻은 게 천마경이 아닐까 하는거야."

"그래?"

"음…. 지금 확인해 볼게."

"됐어."

"뭐?"

"나중에 해. 지금은 다른게 더 바빠."

"음…, 알았어."

잠시후 용유진이 다시 말했다.

"여기 맞아? 듣던거랑 다르군. 잘 안돼."

"거기…, 맞아…. 다시 해 봐…."

잠시 후 공손영령이 말했다.

"아직도 잘 안돼? 음…!"

"됐어."

"알고있어…. 아!"

"아픈거야?"

"아니, 등에 돌이…."

"음… 그거 말곤 아프지 않아?"

"약간…. 참을만 해. 유진은?"

용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공손영령도  더 묻지 않았다.  약간의

고통과 무진장의 설레임, 손톱 자국, 격렬한  싸움에서도 흐르지 않

던 땀이 흐르고, 약간의 피가 비쳤다. 일찍  나온 달빛이 그들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

한적심(漢赤心)은 한진걸의 동생으로 동창의 이급 당두였다. 그는

방금 오랜 격전 끝에 생사교 호교령인 독안효를  죽이고, 다시 천강

시 하나를 동료 둘과 함께 협공하고 있었다. 그의 주무기는 형과 마

찬가지로 밧줄, 단독으로 싸울 때보다는 동료와 협공을 할 때 더 위

력을 발휘하는 무기였다. 그래서 지금도 그는 천강시의 공격에 맞상

대 하기보다는 동료들이 싸우는 주위를 돌다가  기회를 보아 밧줄을

던져 천강시의 발목을 옭아매는데 주력했다. 그의 이러한 작전이 맞

아 떨어져 올가미를 만든 밧줄에 천강시가 발을  디뎠다. 그는 전력

을 다해 끌어당겼다. 천강시가 휘청 넘어져  땅바닥에 굴렀다. 동료

들의 무기가 그 위로 떨어졌다. 천강시는 다른 무공은 둘째 치고 호

신강기가 강해서 웬만큼 얻어맞지 않으면 꿈쩍도 않는데, 지금 연이

은 타격에는 견딜 수가 없었다. 천강시는 곧 팔이 부러지고 목이 뒤

틀려 동작불능 일보직전의 상태가 되었다. 그때 용유진과 황태자 일

행이 나타났다.

공손영령은 돌아오자 마자 천강시 하나가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

고 몸을 날려 한적심을 걷어찼다. 그 보법이 평소와 달리 어색하고,

주저하는 듯했지만 그것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었고, 성공에 도취

된 한적심으로서는 더욱 그랬다. 그는 호박 깨지는  소리를 생애 마

지막 소리로 만들어내고는 길게 뻗어 안식을 취했다.

동창 위사들 사이로 푸른 섬광이 뱀처럼 기었다. 간혹  빛나는 금

빛 광채는 황태자의 것이었다. 전세는  원래 조홍쪽이 압도적이었는

데 단번에 뒤바뀌어 버렸다.

조홍은 어느새 공손조덕을 쓰러뜨리고 고목과  생사판을 상대하고

있었다. 셋 다 서로를 쓰러뜨리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어떻게

하면 공손조덕을 구슬러서 치료법을 들을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견제를 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래서 전세가 바뀌자  조홍이 크게

한 번 손을 휘두르는 것으로 전권(戰圈)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조홍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아까 전의 화광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여겼는데 알고보니

이루어 진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이다. 죽었어야  할 황태자와 용

유진이 그의 앞에 버젓이 서있지 않은가.  게다가 배신자, 위류향과

오대룡, 석소봉도 부상은 입었지만 무사한 모습으로 나타났고, 보령

군주까지 보였다. 누군가가,  그 누군가가 압도적인  무공으로 힘을

보태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 원인을 황태자가  발휘한 무공과

(황태자가 무공을, 그것도 고도의 무공을 사용하다니!) 용유진의 검

강 때문이라고 보았다.

전세는 순식간에 바뀌었고, 그에 따라 그의 머리도 번개처럼 돌아

갔다. 조홍은 황태자를 향해  최대한의 공경을 나타내며  깊이 읍했

다.

"전하, 거기 계셨군요. 오늘  이 역모를 꾸미는 불칙한  무리들과

싸우느라 찾아보지는 못하고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릅니다."

황태자와 용유진, 고목과 생사판은 서로를 보며  눈을 깜박이다가

일제히 대소를 터뜨렸다. 눈에 빤히 보이는  속임수 아닌가. 그들이

보기에 조홍의 행동은 너무 치졸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홍은 그런 것엔 눈 하나 꿈적하지 않았다. 아직 그는 완

전히 진 것이 아니었다. 황태자가 살아있으면 그것이 그들쪽에는 이

긴 것으로 생각될지 몰라도,  그 또한 살아있으면  이긴다고 계산했

다. 그의 뒤에는 황제가 있고, 그의 입에는 아직 세치 혀가 있기 때

문이었다. 억지든 뭐든 황제가 인정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나 그 계산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인물이 나타났다. 늙은 몸을

지팡이로 지탱하고 허신이 그 장소에 나타난 것이다. 뒤에 백리제일

과 해룡선사까지 대동하고….

"이게 뭐야? 어떻게 된 일이지?"

허신이 턱을 만졌다. 한 마디로 대답하긴 곤란한 질문이었다.

"그냥, 그렇게 된거지 뭐. 자네도 알다시피 권력이란,  특히 우리

환관들의 권력이란 얼마나 무상한 것인지."

"믿을 수 없다. 황제폐하의 총애가  너희들에게로 옮겨갔으리라고

는 절대로 믿을 수 없다."

백리제일이 나서서 말했다.

"총애란 결국 애정과도 같은 것이지. 그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이

유로, 그 얼마나 간단하게 애정이 식고, 다시 불타 오르고, 또 미움

으로 변하며 돌아가는지 나는 자네와 여기 허가(許哥) 덕분에 잘 알

게 되었네. 이 끓어오르는 애정이, 혼백을 사를 정도로 강렬한 사랑

이 식을 수 있을까 의심하는 그 순간에 이미 사랑은 끝난거야. 폭주

하는 마차가 서면 말들은 쓰러져 버리지. 뒤돌아 보며 온 길을 회상

하는 순간에 사랑은 멈추고, 애정은 종말을  고한다네. 황제의 총애

도 그와 같지."

"허튼 소리!"

조홍은 소리쳐 말을 끊었다.

"네가 나를 배신하고 허가놈에게 붙고, 해룡 저놈마저  나를 떠났

을 때, 나는 더 이상 사랑이니 애정이니 따위를 믿지 않게 됐지. 황

제의 총애란 내가 만든 것이야. 나는 그를  이용하고, 그가 내게 빠

져 헤어나올 수 없게  되도록 만들었지. 그걸로 끝이야.  그는 내가

풀어주기 전에는 내 그물에서  나올 수가 없어.  너희들과는 다르단

말이다."

용유진이 허신에게 속삭였다.

"사부님과 조홍이 연적(戀敵)이었단 말입니까? 그럼  여태 넷이서

사랑 싸움을…?"

허신이 눈을 찡긋거렸다.

"나도 젊었을 땐 용모가 훤칠했단다. 하여간 그건 그렇고 이 자리

부터 해결하자."

허신이 손을 들자 다시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조홍은  가슴이

내려앉는 충격을 다시 맛보아야  했다. 새로 나타난  무리의 중앙에

선 대신은 분명 얼마전  실각시킨 내각수보 동습이었다.  동습은 흰

옷에 흰 관모를 쓰고 엄숙히 말했다.

"황상께서 붕어(崩御)하셨음을 알리는 바요. 지금 이 순간부터 조

정대신은 상복을 입고, 대례(大禮)를 진행할 것이며, 황태자 전하께

서 황위에 오르기까지 의결은 내각에서 내릴 것이오."

"그런…, 말도 안되는…!"

조홍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백리제일이  다시 말했

다.

"사별이란 슬픈 것이지. 어떤  사랑도, 어떤 맹세도 죽음을  이길

수 없고,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 없으니."

허신이 말했다.

"약을 너무 많이 쓴 게 실수야. 그 문제에 대해서도 국문(鞫問)이

있을 것일세. 황태자 전하 시해기도 사건, 장왕 암살사건과 함께."

"장왕 암살? 그게 왜 내게 돌아오지? 나는 모르는 일이야."

"조사해 보면 나올 일이야."

용유진이 앞으로 나섰다.

"조사하지 않아도 나옵니다. 증거가 명백히 있으니 말입니다."

조홍은 용유진을 향해 이를 갈았다.

"무슨 증거가 있다는 거냐, 이 햇병아리야!"

"군주 마마가 증거요."

"군주는 자객을 못 알아본다고 했어!"

"본 것이 아니라…, 당한 것이 증거요."

용유진은 보령군주의 좁은 이마 낮은 코, 밉살스런  눈매를, 무엇

보다 하얗게 껍질이 내려앉은 입술을 가리켰다.

"명옥수에 당하고도 살아 남으면 저런 모습이 되지요.  알고 계셨

소?"

조홍이 놀라는 것으로 보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용유진은

안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국문장(鞫問場)에서 시범을 보여주지요.  내 계산으로는  세기만

적절히 조절하면 멀쩡한 여인의 얼굴을 공주와 똑같이 변모시켰다가

바로 되돌려 놓을 수도 있소."

보령군주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 말은…?"

용유진이 미소를 짓고 읍을 했다.

"경하드립니다. 마마. 마마의 용모가  훼손된 것을 고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 이제 네 만행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얼른  무릎을 꿇고 빌지

않고 뭘 하는게냐!"

황태자의 일성이었다. 그는 손을 들어 동창의  위사들을 주목시킨

다음 위엄있게 말했다.

"당금의 황태자로서, 사직을 이어받을 차기  황제로서 그대들에게

약속하노니, 지금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면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겠

노라. 새로운 동창, 새로운 제독 아래에서 일할 수 있도록 허여하겠

다."

"누구 마음대로! 나는 아직 지지 않았어!"

조홍이 악을 쓰며 나섰다.

"사태가 달라진 것은 없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자들만 모두 도

륙하면 우리가 이기는 거다. 자 빨리 무기를 들어!"

그러나 동창의 위사들은 무기를 들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들었

던 무기를 내려 놓으며 황태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위류향이 일

부러 그 선두에 앉아 크게 외쳤다.

"황제폐하께 충성을 다짐합니다. 황제 폐하 만세만세만만세!"

황제를 제외한 누구도 만세 구호를 받을 자격은 없다.  그것은 차

기 황제로 예정된 자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동습은  짐짓 못 들

은척 하고, 황태자도 거절하지 않았다. 동창의  모든 위사가 위류향

을 따라 외쳤다.

"만세만세만만세!"

하나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소리였다.

結  독행표(獨行 )

"정말 싸울테냐?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허신의 조심스러운 만류를 용유진은 미소로 뿌리쳤다.

"권력쟁탈전이라면 이 정도 선에서 그만 두어도 좋겠지요. 하지만

강호인으로서 싸우는 것이라면 마지막 승부는  가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먼저 죽은 사람들이 너무 가엽게 되어서…."

"그러니까 혼자 싸울 필요는 없다는 거다. 치료법을  조건으로 고

목과 생사판을 동원하면… 쉽게 이기지 않겠니?"

허신은 쉽게 이긴다가 아니라 다른 말을 하려 했던  것이었다. 지

지 않는다. 죽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지금 누가 보아도 용유진이 조

홍을 이긴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의 검이 검강을 만들어내고 초보지

만 어검술을 사용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고목, 생사판, 공손

조덕을 동시에 상대할 정도로 옥로진기를 익힌  조홍에게는 한두 수

아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용유진은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검객을 원하셨잖습니까. 검객이 어찌 다수로  소수를 핍박하겠습

니까. 사부님께 멋진 검객을 하나 키웠다는 보람을 갖도록 해드리겠

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허신의 귀에 속삭였다.

"보표로서 황태자 전하와 계약을 했는데, 지금 조홍을  죽이지 않

으면 계약이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위협이 상존한다는 결과가 되어

버릴테니까요."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조홍을 향해 돌아섰다. 조홍은 한  때

상심한 모습을 보이다가 지금은 그 상심을  분노와 원한으로 바꾸어

누구든 걸리는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는 결의에 찬 모습으로

서있었다. 도망쳐서 후일을 기약할 수도  있었겠지만 분하게도 고목

과 생사판이 구경하는 척 하면서 퇴로를 봉쇄하고 있어서 그또한 쉽

지 않았다.

"남이 잘되는 꼴은 죽어도 보지 못하는 것들!"

고목은 하품을 하고, 생사판은 침묵했다. 고목이 태연한  것은 수

신이비로부터 용유진의 약속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고,  생사판이

그리 밝은 기색이 아닌 것은 천마령 탈취작전이 결국 실패했음을 느

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둘 다 용유진에게서,  혹은 조홍의 손에서

겨우 살아남아 손녀의 간호를 받고있는 공손조덕에게서 치료법을 들

어야 물러날 수  있는 처지였다. 조홍에게는  적대적이고, 용유진과

공손조덕에게는 잘 보여야 할 처지인 것이다.

조홍은 살기를 줄기줄기 흘리며 용유진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좋아, 애송아! 덤벼라!"

용유진은 처음부터 전궁검을 빼들고 두 손으로 그  손잡이를 바쳐

들고는 예를 표했다. 아무리 역적이라고 하나 무림 십대고수의 하나

와 싸우는데 그 정도의 예는 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기 때문이

었다.

조홍이 신경질 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인사  따위는 필요없어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공격이었다. 그의 손그림자가 순식간에 팔

방을 점유하고 용유진에게 휘몰아쳤다. 용유진은 검을 무겁게 들고,

무겁게, 둔탁하게 휘둘렀다. 팔방을 점유해도 어차피 공격해오는 곳

은 하나, 그 맥점을 자르는 일검이었다. 푸르스름한 광채가 검에 감

돌고, 손그림자가 검을 쥐고, 때렸다. 강철의 몽둥이처럼 두터운 검

신이 풀잎처럼 휘어졌다가 다시 펴졌다. 조홍은 손을  돌려 그 손톱

끝이 잘려나간 것을 확인하고 한층 더 살기를 뿜었다.

"언제 취타 십팔방까지 익혔느냐."

용유진은 단 한 수의 교환만으로도 숨결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끼

며 짧게 대답했다.

"덕분에!"

"덕분은 무슨 덕분이라는거야!"

조홍이 자세를 낮추어 용유진을 향해 웅크리듯 하더니  맹렬히 주

먹을 퍼부었다. 그 하나하나의 주먹이 자모연환포(子母連環砲)의 포

탄처럼 허공을 가르고 용유진의 요혈로  날아들었다. 용유진은 검에

서 한 손을 떼고 연속 삼장을 날린  다음 마지막에는 검조차 날려보

내었다. 명옥수, 태청장권, 천강수의 삼황포에  이은 어검술의 공격

이었다. 무수히 쏟아지는 혜성 속을 한 줄기 빛이 가르는 듯한 장관

이 용유진과 조홍의 사이에 펼쳐졌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걷힌 뒤

에 중인들은 찬바람을 들이 마셨다. 용유진은 피를  토하며 몇 걸음

을 물러났는데, 창백한 안색으로  보아 적지않은 충격을  입은 듯했

다. 그리고 조홍은 용유진의 전궁검을 두 손으로  잡고 버티고 있었

다. 전궁검의 푸르스름한 광채가 불꽃처럼 튀었다.  그것은 마치 생

명이 있는 물건처럼 몸을 떨며, 꿈틀대며 조홍의  손을 뚫고 나아가

려 하고 있었다. 아직 용유진과 검은 한 가닥 진기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검의 푸른 광채는 죽어들어가고  조홍의 전

신에는 우윳빛 광채가 어렸다. 그는 그대로 검을 내밀면서 용유진의

가슴으로 달려들었다. 용유진이 역으로 손을  내밀어 손잡이를 움켜

쥐었다. 두 사람은 그 상태로 서로 밀기 시합이라도 하는 것처럼 대

치했다.

공손조덕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건 안돼! 내공으로는 그를 못 당한다!"

허신이 다급하게 물었다.

"구전일기혼원공, 아니 옥로진기에 고루마공,  태청강기까지 가지

고도 안된단 말이오?"

"익힌 내공의 수가 많은 것 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소. 내공이란

한 가지를 순일(純一)하게 익혀 극(極)에 다다르는  것이 오히려 나

을 수도 있는 것이오. 구전일기혼원공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유진

이 잘못 익힌 것도  아니지만 그는 극에 다다르지  못하였고 조홍은

한가지만 익혀도 극에 다다랐으므로 그가 유리한거요."

그 우열의 차이는 두 사람의 얼굴에 바로 나타났다.  조홍의 얼굴

은 평상을 되찾아가고 있는데 반해 용유진의  얼굴은 검게 죽어가고

있었다. 내공대 내공의  겨룸에서 밀린다는 증거였다.  게다가 그의

손은 검의 손잡이를  잡고있는데도 얼기설기 터져서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용유진은 사실 온몸의 혈맥이 터질것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조홍의 순일한 내공이 그의 내공을 압박해 전신에 강렬한 압력을 전

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  압력의 방향이 바뀌

었다. 그를 압박해오던 압력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어리둥절해 하

고 있는 사이 진상이 드러났다. 그의 내공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조

홍의 몸에 흡수되고 있었던 것이다.

'옥로진기 흡자결(吸字訣)!'

조홍이 옥로진기의 흡자결, 즉 정기를 흡수하는 요령으로 그의 내

공까지 흡수하려하고 있다는 것, 실제로 흡수하고 있다는 것을 용유

진은 깨달았다. 그는 급히 자신도 흡자결을 운용해 저항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물은 많으면 넘쳐 낮은 곳으로  흐르지만 내공의 경우

에는 달랐다. 작은 쪽이 큰 쪽에 동화되고 흡수되는 경향이 있는 것

이다. 특히나 옥로진기처럼 애초에 정기와  내공을 흡수하는 기능이

있는 심법의 경우에는 그 우열에 따라 승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용

유진은 순식간에 껍데기만 남은 듯한 허탈감에 빠졌다. 온몸의 내공

이 한 방울도 남지않고 고스란히 흡수된 느낌이었다.

'결국 이게 끝인가?'

십팔년의 길지 않는 생애가, 그 사이에 쌓인 많지않은  추억이 용

유진의 뇌리를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지극히 고요한 한 순간

의 마음, 모든 것이 빠져나가고 빈 그릇같이  남은 육신,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 텅빈 머리속에 번개처럼 한 생각이  스쳤다. 달뜬 입

술, 분홍빛으로 상기된 목덜미, 귀를 간지르던 억눌린 신음…. 용유

진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공손영령과 보낸 짧은  열락의 순간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침울해졌다. 그가 죽고나

면 혼자 남을 그녀의 신세를 생각하고 슬퍼진 것이다. 그 다음은 투

지였다. 어디에서 그런 기운이 나왔는지 모르게 분노와 오기가 가슴

속을 메우고 머리를 지배했다. 그 기운을 따라서 뱃속으로부터 한줄

기 힘이 솟아나왔다. 용유진은 그 힘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천마

환이었다.

조홍은 미칠 것처럼 놀랐다. 완벽히 공(空)의 상태로 용유진을 만

들어놓았다고 생각했는데 한순간 눈빛이 달라지더니 새로운 힘이 용

솟음치듯 솟아오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건 아주 이질적인 힘이

었다. 아까까지의 기운은 순일하지는 않지만 한 가지였고, 옥로진기

와도 성질이 부합되어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기운은 달랐다. 지독히 거칠고, 음산하고, 파괴적이었다. 그는 낯빛

을 굳히며 옥로진기의 흡자결을 멈추었다. 그것이 실수였다. 용유진

의 내부에서 생성된 기운은 저항이 사라지자 이번엔 역으로 그 자신

이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탐욕스럽게 조홍의 내부에 있는 기를 흡수

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 안돼…!'

조홍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려 했지만 때는 늦었다. 모든 것이 허무

로 돌아갔다. 그는 곧 빈껍질만 남아 버리고 말았다.

조홍의 목이 힘없이 아래로  꺾이고, 그의 손이 전궁에서  떨어질

때, 용유진은 선채로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운기조식을 하고 있

는 것이다. 그의 내부에 형성된 힘의 덩어리들이 혼탁하게 맴돌다가

기어코 하나로 섞이고 있었다. 이전까지 그의 내부에 있던 힘, 천마

불사공의 힘, 거기에 조홍에게서 끌어들인 힘까지 어느 것하나 가볍

지 않은 기운들이 용유진의 혈맥을 노도처럼  흐르다가 간신히 물길

을 잡아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구전일기혼원공의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그는 선채로, 한 시대를 풍미한 거물이 쓰러

지기 시작하여 땅에 닿을때까지의 그 짧은  순간에 대공(大功)을 성

취했다.

"바보같은 모습이군!"

고목은 낯선 음성에 뒤돌아  보았다. 어느모로 보나 평범한  시골

노인이 명아주 지팡이 하나로 몸을 세우고 서있었다. 고목이 반색을

했다가 곧 짜증을 부렸다.

"아니, 이제야 오면 어떻게 하나! 일은 다 끝났는데!"

그 시골 노인이 바로 그가 여태 기다리던 조력자였던  것이다. 그

한 사람으로 최대의 세력을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 사람이었

다.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오기야 일찍 왔지. 다만 나갈 틈이 없어서 그냥 있었을뿐!"

고목은 입을 딱 벌렸다가 억지로 다물었다. 이 노인의  심기를 거

슬려서 좋을 것은 없었다. 싸울 때 그의 편이 되면 천군만마의 힘이

되지만 혹시 그 괴퍅한 성질이라도 거슬렸다가는 최악의 적이 될 사

람이니 그냥 고이 돌려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젠 상관대부도 죽었고, 꼬마놈은 그에게 치료법을  가르쳐 준다

고 약속을 했다. 혹시 약속을 안 지킨다 하더라도 여유를 두고 기다

리는 게 나을 것이다. 공손 강시는 아직  안 죽었고, 내기도 시한이

되지 않았다. 모르는 척하고 매  년 있는 약속을 기다리면  될 것이

다. 문제는 꼬마놈이 너무 커버리는 바람에 내기에  질 것이 확실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아니,  사실은 꼬마놈이 상관대부를  죽이는 그

순간에 내기는 그들이 지는 것으로 판명이 난  것이다. 하지만 아직

억지를 부려볼 여지는 있었다. 일단 시간을 끌고,  그 다음엔…. 고

목은 요모조모 머리를 굴리다가 문득 노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노인

이래 봐야 그 자신보다 오히려 어린 친구였지만.

"근데, 누가 바보같다는 말씀인가?"

"물론 조홍이지. 검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어린애에게 당했으니

바보 아니고 뭔가."

"검도 제대로 못 써? 자네가 하는 말이니 그런가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펄쩍 뛸걸? 검강에 어검술까지 자유자재로 사용하는데…."

노인은 그래도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는 칠절(七絶)도 할 수 있어. 아직 더 커야 해."

"칠절이면… 칠절신군?"

"그 말고 또 누가 있나? 그가 저 애보다는 약간 위일거야."

"그가 그렇게 강했나…?"

고목은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일이 끝났으니 어쩌나?  자네와 싸우게 해주겠다고  했던

조홍도 죽었고. 오늘 헛걸음 했네 그려."

"괜찮아. 저 아이도 봤고. 지금은 저렇지만 곧  나까지 위협할 정

도로 크는 날이 오겠지. 이삼  년 내에…. 그땐 검을 겨룰  수 있겠

군."

고목은 내심 반색했다. 이 무공에 미친 늙은이가 꼬마놈을 노린다

면 그에게는 손해날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속셈이 드러날까봐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말했다.

"뭐, 그런 소득이라도 있었다니 다행이군. 그럼 그만 가야겠네?"

얼른 가줬으면 하는 것이 고목의 바램이었지만 노인은  다른 생각

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보다…, 자네 쌍검이  생각보다 괜찮던걸. 한  번 볼 수  있겠

나?"

고목이 펄쩍 뛰었다.

"내 보잘 것 없는 무공이  무어 그리 볼게 있다고 그러나.  난 싫

네. 내가 졌어. 졌으니 그냥 가게."

"뭐, 언젠가 보게 되겠지. 그럼 생사판의 무식한 검법이나 구경해

볼까? 먼 길 왔으니 얻어가는 게 있긴 있어야 할텐데…."

혼자 중얼거리던 노인은 고목이 있던 자리를 다시 보고는 눈을 꿈

벅거렸다. 방금까지 옆에 서있던 고목이 어느새  사라진 것이다. 그

는 다시 생사판쪽을 쳐다 보고 한 번 더  놀랐다. 생사판 역시 조금

전부터 그를 힐끔거리더니 어느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노인은 쓴

웃음을 지었다.

"저런 것들이 십대고수라고…, 이름이 창피하다, 창피해."

그는 지팡이를 끌고 다시 사라졌지만 한 사람은 그를 알아보았다.

공손조덕이었다. 그는 상세를 살피러 온 용유진을 향해 의미있는 시

선을 던졌다.

"검을 더 익혀야겠구나. 무서운 적이 널 노리고 있다."

"그게 누굽니까?"

"검치 섭광생."

용유진은 웃었다.

"저따위를 그분이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한낱 표사를요."

"음… 이제 진짜로 표사를 하겠다는 건가?"

"일단 허락을 받구요."

용유진은 황태자에게 다가가 절을 했다.

"소인 부족하나마 계약을 이행한  듯 싶습니다. 고생을  시켜드려

망극하기 짝이 없습니다. 전하."

황태자는 미소를 지었다.

"잔금을 달라는건가? 주지."

그는 품속에서 책 한 권을 꺼내어 내밀었다. 그 표지에는 '금황기

총람'이라는 다섯 글자가 쓰여져 있었다. 그날  황궁서고에 온 친왕

은 친왕이 아니라 황태자였던 것이다. 친왕과 황태자의 피변이 등급

상 같기 때문에 생긴 착각이었다.

황태자는 책을 건네주고는 말했다.

"나보다는 자네에게 쓸모가 있을 것같으니 자네가 수습하게나. 그

보다…, 자네 정말 위사를 그만둘텐가? 동창  위사라는 것도 나름대

로 괜찮은 일이라네. 명문가의 자손들이 앞을 다투어 지망하는 금의

위, 그 중에서도 최고인재들만이 동창의 위사가 되는 것을…."

"제가 할 일은 따로 있는 줄로 압니다. 전하."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용유진의 빛나는 눈을 들여다 보

고 말했다.

"표사 일을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군. 알겠네. 섭섭해 할  사람이

많겠지만 뜻이 그렇다면 보내야지."

허신은 동습과 밀담을 나누다가 용유진을 보고 웃으며 걸어왔다.

"너는 정말 잘 커줬다.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사부님."

허신이 동그랗게 눈을 떴다.

"그게 뭐냐?"

용유진은 극도로 목소리를 낮추어 허신만 들을 수 있게 물었다.

"황제의 붕어를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이렇게 절묘한  시간에

요."

허신이 잠시 망설이다가 낮게 속삭였다.

"어젯밤 꿈에 열성조(列聖祖)께서 나타나셔서 알려주셨다."

그리고는 표정을 굳히고 중얼거렸다.

"그런 걸로 해 두자꾸나. 어차피 곧 붕어하실 분이셨다."

용유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갑자기 엎드려 절을 했다.

"제자는 이만 하산하겠사옵니다. 허가를…."

허신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내가 가진 것의 반도 배우지 못했다만 네 재능이  그것밖에 안되

니 더 데리고 있어봐야 헛수고일 것이다. 그만 하산하도록 허가하겠

다."

농담을 섞어 말하던 그는 곧 허리를 숙여 용유진을 일으켰다.

"하지만 너는 내 최고의 제자였다. 나를 잊지 말아라."

용유진은 스승의 손을 잡고 말했다.

"곧 제가 중원 최고의 표사라는 것도 아시게 될 것입니다."

<        끝       >

후기.  화성(華城)에서...

오랫동안 벼르고 벼르다가 드디어 서울을 떠나 시골로  이사를 왔

다. 허름한 집이라도 좋으니 마당 넓은 집에서 큰 개 키우며 살고싶

다는 소망을 전부터 가지고  있던 참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마당은

넓어서 이제 큰 개만 구하면 소망이 성취될 모양이다.

이 이야기를 읽은 분들은 이야기 속에서 개들에 관련되어 수차 표

현된 혐오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실 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은 나는 개를 좋아한다. 이야기 속에 나온 개들, 중주사견에 대

해서도 어느 인물보다도 따스한 시선을 가지고 썼다.

지금 나와 진산은 개 세 마리를 키우고 있다.  요크셔테리어가 두

마리, 슈나우저가 한 마리인데 서울 다가구 주택의 좁은 공간에서부

터 데리고 있던 애들이다.

나는 간혹 인간의 악취미에 의해 인위적으로 줄여지고  왜곡된 애

완견들의 삶을 생각하고 슬퍼질 때가 있다. 작게작게 축소되어 기형

에 가깝게 줄어든 개들, 크게크게 확대되어 약을  먹이지 않으면 그

발목이 몸통을 지탱하지도  못하는 또다른 기형의  개들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움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을 대신해서 용서를 빌

고싶은 마음까지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개들에 대한  사람의 가장

큰 죄는 사랑받지 못하면  살 수 없도록 개들을  왜곡시켜 놓았다는

점이다. 애완견의 가장  큰 장기는 사랑스러움이고,  그것은 그들의

생존 조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조장하고, 만들어놓은

것이다.

우리집에 사는 세 마리 개들은 각기 사랑의 한 양상을 극단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가장 먼저 우리집에 들어온 개는 '요요'라는 이름의 요크셔테리어

암컷인데 '주는 사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똥오줌 가리는 것말고는 뭐든 하고싶은대로 내버려 두는  우리 부

부의 지론에 의해 요요는 대단히 자유롭게 컸다. 할 줄 아는 애교라

고는 단 한 가지도 없을 정도로. 손을 달래도 주지않고 앉으래도 앉

지 않는다. 기대도 않는다. 애초에  가르쳐주지도 않았으니까. 그런

요요가 유일하게 할줄 아는 애교는 내 손을 핥는 것이다. 요요는 가

만히 내버려 두면 언제까지나,  하염없이, 한사코 내  손을 핥는다.

그것이 그녀가 내게 보일 수 있는 애정의  가장 작은 부분이라는 듯

귀여운 눈으로, 끝없이 나를 맛보는 것이다.

두 번째로 들어온 개는  '똘똘이'라는 이름의 역시  요크셔테리어

숫놈이다. 우리 부부가 없을 때 요요가 혼자 외로워 할 것을 생각해

서 요요의 노리개, 나중에는 든든한 남편으로 자랄 것으로 기대하고

사온 것인데 우리 부부의 계산은 보기좋게 틀려버렸다.  개 두 마리

가 있으면 서로 노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우리보고 놀아달라고 한다

는 것을 왜 미처 알지 못했을까.

똘똘이는 숫놈답지않게 요요보다 예쁘고, 그녀석 스스로가  그 사

실을 잘 알고있는 것 같다. 녀석은 '받는 사랑'의 전형이다.

녀석은 요요가 핥고있는 손의 반대편으로 와서 내  손아래 머리를

밀어넣는다. 끊임없이, 끈질기게. 쓰다듬어 달라는 표시다. 만약 뜻

대로 안해주면 '알알' 그러며 위협적으로 짓는다. 그게 얄미워 엉덩

이라도 때릴라치면 멀찍이 떨어져서 원망스러운 눈으로 본다. '이렇

게 귀여운 나를 어떻게 때릴 수 있지? 뭐 잘못된 거 아냐?' 이런 눈

빛이다. 녀석은 사랑받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고, 그 사랑은

독점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녀석은 아무리 구

박을 받아도 다시 손을 내밀면 그 아래 머리를 들이미는, 자신은 어

떤 일이 있어도 역시 사랑받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뻔뻔함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 개는 내가 고른 슈나우저 암컷 '슈슈'다.  나는 솔직히 이

개를 가장 좋아한다.

그녀는 좀처럼 핥지않는 무덤덤함을 가지고 있고, 코를 골며 자는

특기도 있다. 내가 누우면  이불 속으로 들어와  팔베게를 요구하는

뻔뻔함과 사랑스러움을 동시에 소유하고,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발을

안고 '아우웅, 아우웅' 우는 정열도 발휘한다.  다른 사람에게도 간

혹 그런다고 하는 말을 듣긴 했지만 내게  그럴 때의 절실한 눈동자

와 목소리를 들으면 나는 그러한 애정을 다른 누구에게 똑같이 보인

다는 사실을 좀처럼 믿을 수가 없다. 똥오줌을 제일 못 가리고 요크

셔테리어에 비해 체격이 커서 그 배설물의 양도  적지 않지만, 꾸짖

는 소리 한 마디에 방안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떨구고 반

성하는 모습을 보면 나는 이 멍청한 개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슈슈와 나는 '사랑의 교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구현하고

있다고 나는 강변한다. 진산은 그건 슈슈에 대한  나의 편애라고 말

하지만.

나는 개들에게서 사랑을 배우고, 그들을 사랑하며, 무엇보다 아내

를 사랑하며 화성의 한켠에 머물러 있다. 밤새 소리, 개구리 울음소

리가 요란한 밤에.

화성에서….

左栢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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