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행표-36화 (36/37)

제18장: 용유진, 사선(死線)을 넘다.

1.

"어떻게 하지?"

황태자가 물었다. 그러나 용유진이라고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얘기를 해보는게 좋겠습니다."

황태자가 절벽 위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거기 책임자가 누구냐?"

몸에 밧줄을 감은 위사, 한진걸이 나섰다.

"소인입니다. 전하."

"지금 너희들이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는 잘 알고 있겠지?"

한진걸의 대답은 유들유들했다.

"물론입니다. 전하."

"역모는 구족을 멸한다는 것을 알고 하는 일이냐?"

"물론입니다. 전하. 그런 각오 없이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황태자는 이를 갈았다.

"그럼 얼른 하지 않고 무얼하고 있느냐!"

"보채지 마십시오, 전하. 곧 좋은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한진걸은 손까지 흔들어 보이고는 다시 물러났다.

"도대체 뭘 기다린다는 거냐, 저놈들은…?"

"아마도 조홍의 명령을 기다리는 모양입니다. 전하."

"그 전하 소리 좀 빼! 젠장."

용유진은 쓴웃음을 짓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전하, 그렇게 흥분하시면 적의 간계에 빠지는 격이 됩니다. 최대

한 체력을 보존하고 심기를 안정시켜야 될줄로 압니다."

"그럼 빠져나갈 수 있다는 건가?"

"시도는 해봐야겠지요."

용유진은 주위를 살피며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극도로 좋지

않았다. 흑수계라는 곳이 마치 호리병처럼  생긴 계곡이라 나가기가

어렵다는 것은 이미  각오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이렇게 위로부터도

무방비 상태인줄은 몰랐다. 절벽은 깎아지른  듯했지만 미세하게 나

마 경사가 있어서 올라가기 어렵진 않았다. 그러나  그건 입구로 다

시 나가는 것보다 오히려 어려울 것 같았다.  위에 적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런 지형이면  화공(火攻)에는 취약하기 짝

이 없었다. 용유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계곡의 입구로 탈출하

는 수밖에 없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리 와 앉으시오."

그는 권정을 손짓해 앉히고 등에 손바닥을 대었다. 다행히 무공을

전폐시킨 것은 아니고 일시적으로 폐쇄시켰을  뿐이었다. 그는 옥로

진기의 치료결을 웅용해서 권정의 상세를 바로 해결해 주었다. 그러

나 다른 두 명의 소녀는 상세가 너무  깊어 죽지는 않겠지만 무공을

사용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권정은  슬픈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

소녀와 귓속말을 했다. 두소녀가 자세를 바로 하고 군주와 황태자를

향해 절을 했다.

"부디 옥체 보전하시옵소서!"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용유진이  손을 뻗는 순간, 그녀들은  이미

칼을 안고 쓰러지고 있었다. 방해만 된다는 것을 알고 자진(自盡)한

것이다.

양평중이 그것을 보고 용유진을 향해 말했다.

"아녀자도 저러니 사내들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군요."

용유진은 딱딱하게 말을 받았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말인가?"

"부상은 안 입었지만 무공이 모자란 것은 저희도 마찬가지이니 짐

이 되는 것도 똑같은 신세지요."

"그래서?"

"앞에 뭐가 있는지나 알아보려 합니다."

"안돼!"

"말리지 마십시오. 그동안 같이  지낸 시간들은 정말  즐거웠습니

다."

양평중은 인사를 꾸벅 하고는 천자조원들을 향해 손을 쳐들었다.

"가자!"

그와 천자조원들은 갑자기 계곡의 입구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용

유진이 손을 쳐들어 말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허공에서 비오듯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양평중과 천자조원들은  칼을 뽑아 머리

위에서 흔들며 달렸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동창에서 사용하는 화

살은 삼릉철혈전(三稜鐵血箭)이라 부르는데 화살촉이 삼각으로 모서

리가 있고 하나같이 정강으로 만든  것이라 호신강기류(護身 氣類)

의 무공을 파훼하는 데에 효능이 있었다. 게다가  그런 화살을 그들

은 노궁(弩弓)을 사용해서 쏴대고 있었다.  천자조원들이 하나씩 둘

씩 쓰러졌다. 그 모습을 용유진은 주먹을 불끈  쥐고 쳐다보고만 있

었다. 아까는 양평중을 말리긴 했지만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었다.

계곡 입구로 나가는 것을 어떤 방법으로 막는지  시험 할 필요가 있

었던 것이다. 그래서 양평중을 제외한  천자조원들이 모두 고슴도치

가 되어 쓰러지는 것을 보고만 있는 것이었다.

양평중은 몇 개의 화살에 관통되긴 했지만 끈질기게  달려가서 계

곡의 입구에 다다르고 있었다. 용유진은 침을  삼켰다. 이것으로 끝

이라면, 양평중만이라도 살아 나간다면  그는 죄책감을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무참히  깨어졌다. 천지를 진동시키

는 폭음이 계곡의 양쪽으로부터 터져나왔다. 바위가 날고, 불덩이가

허공에 튀었다. 계곡은 순식간에 무너져 바위더미가 되었다.

용유진은 보령군주를 안고, 황태자의 손을 끌며 뛰었다.

"지금입니다, 전하!"

바위 더미는 절벽만큼 가파르지는 않았다. 단숨에  뛰어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쉽지 않았다. 쏜살같이 달려가는 그

들 여섯 사람 앞에 몇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용유진은 황태자의

손을 놓고 검을 휘둘렀다. 푸른 섬광이 일며 사  척의 검신이 십 척

이 넘게 길어져 적을 향해 뻗어나갔다.

적들은 하나같이 동창의  위사들이고, 하나같이 표창을  사용하는

자들이었다. 당두는 아니었지만  특별히 훈련시킨 번역들이라  표창

하나에만은 조예가 있었다. 조홍은 당두들만  데려온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용유진의 검강이 어떤 위력을 지녔는지  보았기 때문

에 정면에서 맞설 생각을 않았다. 용유진의 공격이 다가가자 신속하

게 회피하면서 표창을 날릴  뿐이었다. 용유진은 검의  방향을 돌려

전면으로 넓게 휘둘렀다. 그의 검 끝에 닿는  표창들이 박살이 나서

흩어졌다. 검 끝에 실린 강기의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일견 적들을 물러나게 한 것처럼 보였지만 용유진은 급히 검을 거

두고 황태자와 보령군주를 안은  채 허공으로 뛰어  올랐다. 부숴진

표창들의 가루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허공에 뜬

그를 향해 두 개의 그림자가 튀어 올라 마주쳐  왔다. 한 사람은 대

파도(大巴刀), 다른 한 사람은 죄인들의 목을 벨  때 사용하는 참수

도(斬首刀)를 휘두르고 있었다. 일급 당두 마적삼(馬赤三)과 난약찬

(欄蒻璨)이었다.

용유진은 크게 한 소리 외쳤다.

"한 방 갈겨!"

그는 공중에서 황태자를 놓고 그 자신도 자유로운 한 손으로 대파

도를 막아갔다. 황급한 지경이라 전하 소리도 못 붙이고, 경칭도 사

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자신 다급한  김에 예전에 배운 단혈철

수를 사용하여 맨손으로 대파도를 막을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

행인 것은 내공이 조화지경(造化之境)에 이르러 역대의 철혈문 제자

중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단혈철수를 사용했다는 것

이었다.

대파도가 용유진의 손바닥을 찍었다. 아니, 용유진의 손바닥이 대

파도를 후려 갈겼다. 용유진의 손바닥에 빨간  줄이 그어졌다. 마적

삼의 호구가 찢겨지며 대파도는  허공으로 날았다. 그  빈 가슴으로

용유진의 일장이 작열했다. 삼황포의 제 일초, 명옥수였다.

마적삼이 피를 뿜으며 날려갈 때, 용유진은 허공에서 아래로 가라

앉으며 눈을 돌려 황태자를  찾았다. 다급한 김에  황태자에게도 한

수를 기대했는데, 황태자가 대력금강기는 익혔을지  몰라도 싸움 경

험은 없어 대단히 위험한  도박이었다. 다행히 황태자도  총망 중에

제대로 한 수를 발휘한 것 같았다. 난약찬이  피곤죽이 되어 날아가

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황태자도 아주 무사하지만

은 않아서 날개 부러진 새처럼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용유진은 급히 상황을 판단하고는 황태자의 옷깃을 잡아  끌고 흑

수계 안으로 다시 뛰쳐 들어갔다. 권정과 수신이비가 비틀거리며 그

를 쫓아오고 있었다.

***

"약속이 틀리군!"

고목은 아까전부터 툴툴거리고 있었다. 약속시간에 늦은 생사판에

게도 툴툴거리고, 용유진을 데리고 오지 않은 상관대부에게도, 용유

진을 보지 못한 이상 치료법을 가르쳐 줄 수 없다는 관 속의 공손조

덕에게도 툴툴거렸다. 그러나 주로 투덜대는  대상은 상관대부였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말도 안되는 조건을 달았기 때문이었다.

"공손 강시만 데려가서 만나게  해주겠다, 우린 여기서  기다려라

그건가?"

조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말한대로일세."

고목은 하늘을 보고 웃었다.

"우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내일까지? 내년까지? 살아만 있다

면 백 년 후까지 이 자리에서 기다려야 할  수도 있지. 도대체 자네

들이 돌아온다는 걸 뭘로 보장하나?"

"자네들은 내 말을 믿어야 하네. 믿지 않고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

지."

"방법이라…, 방법이 왜 없을까?"

고목의 표정이 점점 음침해졌다. 그러나 조홍은  여전히 무표정했

다.

"내가 다른 방법은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지."

고목이 나직히 으으렁거렸다.

"한판 붙어보겠다는거냐?"

"원한다면."

고목은 어이 없다는 듯 생사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것 참, 이 친구가 안보는 사이에 매우  진보했나 보군. 혼자서

우리 둘을 상대로 싸우고 싶은 모양이야."

생사판이 나직히 말했다.

"말을 정확히 하지. 그는 우리가 아니라 너와 싸우겠다는거야."

고목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럼 너는?"

"나는 여기서 기다리겠어. 난 자네와 달리 바쁘지 않아."

고목은 눈동자를 바쁘게 굴렸다. 여우같은 생사판이  이러는 것에

는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조홍이

숨겨놓은 무엇인가 위협적인 것을 먼저 알아차리고  빼는 것일 가능

성이 가장 높았지만, 어쩌면 둘이 손을 잡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는 단독으로 싸운다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

러나 생사판과 조홍 둘을 한꺼번에 상대한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게

다가 세력 대 세력으로 한다면 세 세력 중에서 그가 가장 처질 것이

다. 지금은 그랬다.

'지금은 말이지….'

고목은 하늘을 보고 생각하는  척 하면서 시간을 가늠했다.  그가

청한 조력자가 올 때였다. 그의 생전에 처음으로 금전 말고 다른 것

으로 협조를 얻은 조력자였다. 그가 오면 그의  세력은 단번에 셋중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변할 것이다. 그는 그때까지 참기로 했다.

"좋아, 좋아. 내 평생 단 한 번 상관대부의  말을 믿어보지. 갔다

오게."

그가 자리에 앉는 순간 멀리서 폭음이 들려왔다. 네 사람중 그 누

구의 안색도 변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그 소리의 정체에 대해 적지않

은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조홍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

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내기에는 내가 졌네. 더 이상 내기를 할 필요가 없게 되었어."

공손조덕의 표정이 변했다.

"그 아이에게 위해를 가했구나!"

"아니, 아직은 아니지. 하지만 곧 그럴 작정일세. 그게 싫으면 자

네가 내게 한 가지만 말해주면 돼. 내게만!"

고목이 방금 앉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더러운 놈! 그게 무슨 소리야! 약속을 깨겠다는 거냐!"

조홍은 손을 들어 올렸다.

"더이상 약속따위에 구애될 시간이 없어. 할 일이 많거든."

그들이 앉은 곳은 석경산의 나지막한 한 봉우리 정상이었는데, 사

방이 숲으로 둘러싸여 아늑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 아늑함은 살벌함

으로 금세 변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사방의 숲에서 동창의 위사

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 정도는 애초에 여기 와 앉을 때부터 짐작했

던 것이지만 지금 고목을 놀라게 한 것은  그들 동창의 위사들이 빈

손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한 방향에 각각 세 개씩 기묘한 기

관들을 가지고 나타났다.

조홍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저기 대롱같은 게 달린 건 너무 두려워 말게.  대포가 아니고 그

냥 반룡수통(蟠龍水筒)이야. 피부에 닿으면 조금  따끔거릴 뿐이지.

저쪽에 노궁(弩弓)이 좀 위험한 물건이지. 화살 뒤쪽에 화약도 달아

놔서 맨손으로 받으면 손을 잃게 될  위험이 있다네. 천화신전(天火

神箭)이라고 부르더군. 마지막 하나는 그냥 화포인데, 폭약이 좀 특

별한 걸세. 굉천뢰(轟天雷)라는 거야. 어지간하면 쓰지 마라고 했지

만… 요즘 아이들은 명령을 잘 안들어서…. 자네들이 이상한 행동을

하려고 하면 기다리지 않고 쏠지도 몰라."

반룡수통에 천화신전, 그리고  굉천뢰까지 모두가 병사들이  쓰는

물건이었다. 고목이나 생사판같은 절정고수라면 어떻게  피할 수 있

을지도 모르지만 그 수하들에게는 치명적인 물건들이 그것이었다.

고목은 투덜거렸다.

"니미, 어쩐지 수하라곤 가마꾼 둘만 데리고 오더라니!"

가마꾼 둘, 적중산과 천옥낭을 말하는 것이었다. 조홍은 손톱으로

코를 긁었다. 기분이 극히 좋을 때 하는 버릇이었다.

"뭐, 사실 저런 물건 없이 우리 애들만 풀어도  재미는 있었을 걸

세만은…, 나이가 들수록 손발을 놀리는 게  귀찮아져서 말이야. 내

게으름을 용서해 주게나."

그리고는 공손조덕을 바라보았다.

"자, 필요하다면 둘이 좀 떨어져서 말할 수도  있네. 어서 말해주

게나."

공손조덕이 고개를 저었다. 힘없는 몸짓이었지만 그  의사는 명확

했다.

"나를 바보로 아는건가? 내가 말해주면 나와 내  귀여운 손녀까지

저 흉칙한 물건들의 제물이 되겠지? 말해주면 죽는다는  걸 뻔히 아

는데 왜 말을 할까?"

"말을 않으면 자네도, 자네 손녀도, 그리고 자네 귀여운 후계자까

지 모두가 죽기 때문이지. 말을 하면 그대의 손녀 정도는 살려서 보

낼 수도 있어. 자네도 살려주지. 그 늙은 목숨 침상에 누워 죽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겠다는 말일세. 이제 그만 자네도  욕심을 버릴 때

가 됐지?"

공손조덕은 허탈하게 웃었다.

"내 살아 생전에 상관대부에게서  욕심을 버리라는 말을 다  듣는

군. 세월이 변했다고 할까? 아니면 인간이 변했다고 할까?"

"세월도 변하고 인간도 변한  것이지. 무엇보다도 처지가  변했다

네. 나는 항상 그렇게 생각해왔지. 강자(强者)의 말이 진리라고. 약

자의 말은 무슨 도리(道理)를 내세워도 결국엔 변명에 불과해. 지금

나는 강자고 자넨 약자야. 그러니 내 말을 들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생긴걸세."

"자넨 정말 강해. 왜 강한가 했더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강

한 거였군. 나는 물론 약하지. 수십 년을 고련해도 항상 약했지. 슬

프군. 죽기 직전에야 이런 도리를 깨우치다니 말일세."

공손조덕은 깡마른 손을 들어 조홍을 불렀다.

"이리 오게. 내 자네에게 치료법을 말해주지."

조홍은 피식 웃었다.

"늦게라도 진리를 깨달았으니 자넨  복된 사람일세. 가르쳐  주는

김에 하나 더 가르쳐 주지.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람을  완전히 믿지

마라! 그걸세."

그는 적중산을 향해 말했다.

"네가 가서 듣고 오너라."

공손조덕이 쓴 웃음을 지었다.

"죽어가는 사람의 손짓까지 경계하다니 자네 답군. 좋아, 그를 보

내게. 가르쳐주지."

적중산이 공손조덕에게 다가가 한참동안 무엇인가를 들었다. 그리

고 조홍에게 돌아왔다. 조홍이 귀를 내밀었다. 적중산은 그 귀에 입

을 가까이 대고는 말했다.

"치료법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적중산의 손이 갑자기 조홍의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천옥낭이 도

끼를 들어 조홍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이 갑작스러운  사태 변화에

모두가 얼이 빠져 있는데,  정말 경악할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조홍의 가슴을 찌른 적중산이 얼굴이 붉어지도록 용을 쓰는데 그 손

이 빠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의 상태는  천옥낭보다는 나았

다. 그녀는 조홍의 뒤통수에  맞고 튀어나온 도끼에  그녀 스스로의

얼굴을 찍혀 즉사했던 것이다.

조홍이 빙긋거리며 말했다.

"글세,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람을  완전히

믿는게 아니라고…."

그는 손을 내밀어 적중산의  머리에 대고 천천히 눌렀다.  팔척이

넘는 적중산의 키가 점점 작아졌다. 그는  무릎을 꿇더니, 나중에는

그것도 안되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러나 조홍의  손은 계속 그

의 머리를 눌러 바닥에 비벼 버렸다. 적중산의  머리는 두부처럼 뭉

개졌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공손조덕이 손을 들어 박수를 쳤다.

"훌륭하이. 우리 넷 중에 기공으로 치면 자네가 가장 윗길이로세.

옥로진기를 십이성 성취했음이 분명하군."

고목이 눈썹을 꿈틀대었다.

"옥로진기라고? 태청강기 아니었던가?"

조홍이 웃었다.

"환관이 방중술을 동원해서 옥로진기를 익혔다고  하면 이상하지?

태청강기를 익혔다고 세상을 속이는 수밖에  없었지. 그보다 생사판

자네야 말로 천마불사공이 아니라 오행진독신공을 익혔지?"

공손조덕이 다시 끼어들었다.

"고목 자네도 남 이야기 할 처지가 아닐걸?  자네도 대력금황기가

아니라 다른 걸 익혔다면서. 난 계속 자네의 그 완벽한 대머리에 의

혹을 느끼고 있었지. 저건 순양공(純陽功)을 익힌 사람이 아니면 안

될텐데 하고 말이야.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순양공은 동정을 잃으

면 안되는 거잖아. 그래서 아니라고 생각했지.  기루의 주인이 동정

이라는 건 어째 어색하다고 생각해서. 결국 이젠 알겠어. 자넨 순양

공을 익혔지. 도반삼양공이라는  이름의 순양공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그런 사실을 왜 속였냐는 거야."

그 대답은 생사판이 했다.

"도반삼양공을 익히려면 그냥 동정이기만 해선  안되기 때문이지.

거세를 해야 해. 고목 저놈도 상관대부처럼  고자기 때문이지. 그게

부끄러워서 일부러 기루를 차린거야. 보상심리라고나 할까…."

고목이 정말 태양이라도 된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이를  으드득

갈더니 생사판을 향해 주먹을 쥐고 흔들었다.

"오늘 일만 해결되고 나서 보자. 내가 네 놈을  죽이지 못하면 사

람의 자식이 아니다."

공손조덕이 다시 박수를 쳤다.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행동이었

다. 그는 조홍을 향해 손짓했다.

"아쉽군. 방금 그 친구에게 진짜로 치료법을 말해 줬는데 죽여 버

리다니. 자네가 직접 오는 수밖에 없겠군. 옥로진기 십이 단계로 금

강불괴나 다름 없는  몸이 죽어가는 늙은이의  손짓을 두려워하지는

않겠지?"

조홍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내가 다른 건 안 무서워도 죽을 힘은 무서워하지.  죽을 힘을 다

해 때리는 고루천강수라면 더욱 무섭고. 그냥  거기서 얘기하게. 오

늘 내 크게 인심을 써서 다른 두 친구에게도 치료법을 들을 수 있도

록 허락하겠네."

공손조덕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웃음은 정말 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정말로 고루천강수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

었다. 죽을 힘이 아니라 용유진에게서  돌려받은 절반의 고루마공을

사용한 고루천강수를. 그런데 여우같은 조홍이 기회를 주지 않는 것

이다. 그는 갈구리처럼 구부러진 손으로 조홍을 향해  한 방 갈기며

소리쳤다.

"아깝다! 천하의 간웅을 내 손으로 처치하고 싶었는데!"

그것이 신호였다. 동창의 위사들이 선 곳의 땅거죽이 일어나며 열

두 구의 천강시가 튀어나왔다. 애당초  고루방에 희생된 천강시들은

강시당의 진짜 열 두  호법이 아니라 급조된  청년들이었던 것이다.

지금 강시당의 열두 호법, 진정한 천강시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와 동

창의 위사들이 가지고 온 기관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그중 몇 개는

실제로 발동되었지만 천강시에게는 별로 효과가 없었다. 그들에게도

위협이 될 굉천뢰를 먼저  부수고 나니 남은 것은  독수를 뿜어내는

반룡수통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걸 기다렸다. 오늘 한 번 죽어봐라!"

고목이 멧돼지처럼 흥분하며  덮쳐갔다. 조홍이 아니라  생사판을

향해서였다. 그의 양손은 강렬한  광채를 뿜어 마치  화산이 폭발할

때 용암이 날아가는 모습과도 같았다.

"미친 놈! 적아(敵我)를 구별 못하는군!"

생사판이 왼손을 흔들고  오른손으로는 귀왕자를 찔러갔다.  그의

왼손에서 검은 가루가 뿜어져 나와 그물처럼 고목을 감쌌다. 오행진

독신공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공의 정화였다. 고목의 양손이 거기 닿

자 불에 달군 쇠꼬챙이를 기름에 집어 넣는듯한 소리가 퍼졌다.

조홍은 이미 공손조덕의 일장을 맞받은 상태였다.  엄살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가 두려워 하는 것은 고루천강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고

목과 생사판처럼 잔소리를 해가며 싸울 틈이 없었다. 그러나 수하들

에게 지시를 않을 수도 없었다. 그는 맹렬하게  명옥수를 쳐대며 소

리쳤다.

"잘됐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몽땅 죽여버리자!"

당두들이 포함된 동창의 위사들이 혹은 천강시와 싸우고, 혹은 봉

우리를 향해 돌격해 왔다.  그들에 맞서서 생사교  팔대 호교령들과

고목의 첩이라는 나찰십이방의 여인들이 마주  달려나갔다. 묘한 것

은 팔대호교령 중의 일부가 동창의 위사들과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

라 공손영령을 향해 공격해왔다는 점이었다.  원숭이처럼 생긴 통비

원과 매부리 코에 약삭빠르게 생긴 금시계(金翅鷄)였다. 공손영령이

그들을 맞아 고루마공을 사용했다. 곧 장내는 적아를 분간하기 힘든

혼잡의 극을 향해 치달아갔다.

***

"저거…, 저거…!"

보령군주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손끝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두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용유진은  그 손끝을 따라 시

선을 돌리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얼 보고 그러는겁니까?"

"저거…, 저 하얀 입술!"

황태자의 안색도 변했다. 그는 계곡 입구에 구르고 있는 마적삼의

시신, 그중에도 하얗게 변해있는 입술을 보았다.  과거에도 그는 그

런 입술을 본 적이 있었다. 동생, 장왕의 시신에서였다.

"네가?"

황태자는 용유진의 멱살을 잡았다가 바로 놓아 주었다. 장왕이 죽

었을 때 용유진은 겨우 열  살을 넘겼을 것이다. 그가  자객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자객을 알고는 있을 것이다.

"무슨 방법으로 죽인거지? 누구에게 배운 무공이냐?"

용유진은 한 순간 모두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명옥수, 옥로진기의 한 무공입니다. 조홍이 직접 손을 썼다는 이

야기군요."

짐작을 확인시켜주는 한  순간이었다. 용유진은 다시  보령군주를

보았다.

"군주마마도 명옥수에 당하신 거군요. 그럼 고칠 수  있을지도 모

릅니다."

그때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물 쏟아지는 소리였다.  고개를 들어

보자 계곡 위에서 아래로 나무  통에 든 액체를 뿌리고  있었다. 그

액체가 무엇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코끝을 찌르는 기름

냄새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화공!"

계곡은 호리병처럼 오목하고, 관목이지만 나무는  많았다. 그리고

피할 곳은 없었다. 도저히 도망갈 구멍이란 없는 것이다.

"입구로 다시 한 번…!"

수신이비가 벌떡 일어났다가  비틀대며 다시 쓰러졌다.  그녀들은

아까의 탈출전에서 독에 당했기 때문에  정상이 아니었다. 복면인들

이 던진 표창은 그 하나하나가 독성이 강한 물건들이었기 때문에 부

숴지면서 독기를 뿜어대었던 것이다. 용유진이  급히 되돌아온 이유

가 그것이었다.

용유진은 급히 계곡 내의 시체들을 끌어 모아 주변에 울타리를 치

면서 외쳤다.

"최대한 옷에 기름이 안 묻도록 주의하고, 이 울타리 안에 들어오

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동창의 위사들은  기름은 얼

마든지 있다는 듯 나중에는 통채로 던지기도 했다.  곧 계곡 안에는

기름이 강을 이루어 흐르고 호수가 되어 고였다. 용유진과 일행들은

발목까지 차는 기름 속에 서 있어야 했다. 작은 불씨 하나라도 떨어

지면 이곳은 불지옥이 되는 것이다.

그때, 절벽 위에서 비명이 울리고, 기름통만이 아니라  그것을 던

지던 사람까지 떨어져 내렸다. 일행이 바라보자 거기 새로운 일단의

무리가 나타나 동창의 위사들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위류향과 석

소봉, 오대룡과 몇 명의 동창 당두들이었다.  허신을 따르는 위사들

이 나타난 것이다.

용유진은 반색하고는 검을 쥐었다. 그리고 외침과 동시에 검을 허

공을 향해 뻗었다.

"빠져나갈 준비를 하십시오!"

검에 푸르스름한 광채가 감돌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그것은 한줄기

섬광이 되어 용유진의 손에서 빠져나가 절벽의 윗부분을 때렸다. 폭

음이 일며, 절벽 한쪽이 크게 무너져 내렸다.  그 위에 서있던 동창

의 위사들과 함께였다.

"이건…?"

황태자는 이 처음 보는 무공의  경지에 놀라 용유진을 보고  다시

놀랐다. 용유진의 머리카락은 한올한올 허공을 향해 뻗쳐있고, 그의

온 몸은 번개 속에 있는 듯 푸르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아무 것도 잡혀 있지 않은데 그는 마치  무거운 물건을 나르듯 힘겹

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절벽을 무너뜨린  푸른 섬광이 그

손짓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어검술(御劍術)!"

황태자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기도 전에 푸른 섬광은  돌아와 용

유진의 손에서 거무튀튀한 검으로 변했다.  용유진이 피곤하게 웃었

다.

"방금 만든 따끈따끈한 검법입니다. 전궁 제 이초라고 부르죠. 그

만 가십시다."

용유진은 수신이비를 안고, 황태자는 보령군주와 권정을  안고 허

공으로 몸을 날렸다. 그 순간 계곡에 횃불 하나가 떨어졌다. 계곡은

곧 불길에 휩싸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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