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행표-34화 (34/37)

제17장: 용유진, 사냥을 나가다.

1.

"사냥이라고? 갑자기 웬 사냥?"

근 몇 년동안 지금처럼 허신이 당황한 적은 없었다.  그는 오랫동

안 준비를 했고, 그 덕분에 대부분의 일들이 그가 예상하던 범위 안

에서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특히  최근 한 달 동안의  일들은 하루,

한 시진 단위로 계획을 짜 놓았기 때문에  예상에 빗나가는 일이 하

나라도 생기면 매우 곤란한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이렇게 계획의 토대 자체를  바꾸어야 할 정도로 큰  일은 예상했다

하더라도 대응할 방법을 찾기가  곤란한 것인데, 하물며  내일 당장

벌어질 일임에야.

허신은 골머리를 싸쥐었다. 처음에는 그 의외성에  놀란 것이지만

생각을 하면 할수록 조홍의 방법은  절묘했다. 단순하고 난폭하기까

지 한 방법이었지만 그 때문에 실패할 가능성도 거의 없는 것이다.

사냥터에서 그는 어떻게든 황태자와  용유진을 암살하려 할  것이

다. 모두가 무기를 휴대하고 있고, 산에는 맹수가  있다. 사냥을 하

다가 죽는다는 일이  황태자에게 일어날 가능성이란  거의 천만분의

일만큼도 없는 것이지만 막상 알고보면 그런 일은 세상에 심심치 않

게 일어나곤 하는 것이다. 일단 죽이고 나서  이유를 가져다 붙이기

란 너무나 쉬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사냥터에서는 조홍이 최대의 세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

이었다. 놈은 마음만 먹으면  황태자 아니라 황제조차도  죽여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반면 허신쪽의 사람은 몽땅 다 끌고 간다고 하더라

도 몇 명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특히 힘이 될 수 있는 동창 쪽

의 인원은 정말 몇몇 되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에서 정면 격돌을 하

면 허신쪽의 사람들은 하나당 열, 어쩌면 스물을  상대해야 할 정도

였다. 이대로 나간다면 사냥터는 도살장에  가까운 장소가 되어버릴

것이다.

허신은 종이를 꺼내놓고 계산을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계산을

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용유진의 표현대로 하면  원하는 답이 나

오지 않는 것이다. 그는 몇장의 종이를 파지로  만든 다음에야 계산

을 포기하고 의자에 기대어 심호흡을 했다.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황궁 안에서는 암살을 시도하기도 어

렵고, 시도하면 용유진이  막아낼 가능성도 높았다.  적어도 용유진

혼자 살아나오기는 불가능하지 않았다. 거기에 암살사건이 일어나기

만 하면 공론을 몰아 조홍을 그 사건의  배후로 지목할 준비도 되어

있었다. 설사 암살사건의 배후가 그라는 점이 증명되지 않는다고 해

도 상관이 없었다. 이런 일은 한 번 밀리기 시작하면 파국은 금방인

것이다. 요컨데 황궁 안에서는 무력보다는 정치였다. 그래서 지금까

지 가장 역점을 두어 준비한 것이 그  부분이었는데…, 조홍은 단숨

에 무력대결로 상황을 바꿔버린 것이다.

허신은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종이를 꺼내어 다시  계산하기 시

작했다.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은 언제든 있을  수 있었다. 하늘을 뒤

집어 엎는데 순탄하게 계획한 일, 예상한 일만 일어날 리가 없는 것

이었다.

중요한 점은 조홍은 무력에 장점이 있고, 그는 정치에  장점이 있

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홍은 무력대결을 선택했고,  허신 자신은

무력대결로 나가는 것만은 극력 피하려 했었다.  이제 달라진 것은?

암살기도가 보다 광범위하게,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규모로

시도된다는 것뿐이었다. 물론 그것으로도 충분하지만….  죽든 살든

이제와서 계획을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 허신의 결론이었다. 조홍은

사냥터에서 무력으로 일을 벌이고,  그는 황궁에 남아  전복을 꾀할

수밖에 없었다. 운좋게 황태자가 살아남는다면? 운좋게 용유진이 살

아서 황태자 암살시도의 배후가 조홍이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면? 그

땐 허신이 이기는 것이다.  단번에 판세가 뒤집혀 버릴  수가 있다.

그러나 만약 그 역이라면?

허신은 희미하게 웃었다. 죽으면  그만이다. 삼십년간 준비해  온

일이고 뭐고, 복수고 뭐고간에 죽으면 그만이다. 더 이상 세상의 일

에 상관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포기하자 허신의 마음이 편해졌다. 그는 깍지를 껴서 머리

를 받치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생각에 잠겼다.  만약 용유진이 황

태자를 데리고 며칠 간 도망을 다닌다면? 하루를 꼬박 버틴다면? 사

흘? 나흘이면 어떨까? 아무리 조홍이라도 그렇게  긴 시간동안 황제

의 눈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생존 싸움인 것이

다. 살아만 있으면, 시간만 끌면 이기는 싸움이었다. 정면으로 마주

쳐서 이길 필요는 없었다.

허신은 다시 눈을 번쩍 뜨고 계산을 시작했다. 가능한  모든 변수

가, 동원 가능한 모든  무력을 생존에만 기울이면…,  답은 나왔다.

역시….

"네가 내 기대만큼 커주었기를 바랄 수밖에 없구나."

허신은 기원하듯 탄식을 내 뱉었다.

***

양평중이 그 소식을 가져왔을 때, 용유진은 이미 다른  경로로 그

일을 알고 있었다. 양평중보다도 먼저 내관(內官)이 와서 사냥 출정

의 준비를 갖추도록 황태자에게 전했던 것이다.

"그 놈 참 대단한 놈이야!"

황태자가 감탄을 했다. 용유진도 그 말에 찬동했다.

"예, 정말 대단합니다."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도 못했으면서 동물적인  감으로 단번에

상황을 바꿔버린 조홍의 대담함과 그 책사적(策士的)인 기질에 감탄

한 것인데 황태자가 감탄하는 이유는 그와 달랐던 모양이었다.

"어화원(御花園)에 아방궁(阿房宮)을 만들어 놓고 몇 년이 지나도

록 나와 보지도 않는 분을 무슨 수로 끌어냈을까? 아들인 나보다 아

버지를 잘 아는 놈이 그 놈 아닌가. 정말 감탄했어."

아방궁이라는 건 황제가 미녀들을 모아놓고 향락에 젖어있는 융덕

전(隆德殿)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당금의 황제는 정사를 신하들에게

맡겨두고는 몇 년째 그곳에서 황음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곳과

내각의 연락을 맡고 있는 것이 병필태감이고, 사실은  그 배후의 제

독태감이었다. 그 덕에 조홍이 무소부지(無所不至)의 권력을 휘두르

고 있는 것이다. 그런 황제인 만큼 사냥같은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

았는데, 조홍은 용케도  밖으로 끌어내었다. 황태자가  말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예전에 정덕황제(正德皇帝) 같은  분은 사냥을 좋아해서  거용관

(居用關)을 넘어 요동까지 사냥을 나가신 적도 있다고 들었지만, 당

금의 황상께서야 겁도 많으시고…, 무엇보다 게으르시거든. 그런 분

을 끌어낼 정도면 돌부처도 움직이겠어. 그놈 뛰어난  데가 있는 놈

이야. 확실히…."

황제가 겁이 많고, 게으르다. 이런 말은 황태자쯤 되지 않으면 함

부로 못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용유진이 주목한 것은  말의 내용이

아니라 어조였다. 임박한 위기를 보고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 황

태자의 여유였다.

'황태자로서의 기상이 높아 그런 것인가, 그게 아니면  따로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건가…?'

용유진은 내심 궁금해하면서도 그런 내색은 않았다.  어차피 나중

이 되면 알 일이었다. 궁지에 몰렸을 때야말로 그 사람의 본색이 드

러나는 것이다. 땅이 흔들리지 않으면 땅이 거기  있다는 것조차 모

르는 것이 인간이므로.

황태자가 그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될 것같은가?"

"조홍의 일당과 우리의 전면전이 될 것입니다. 전하."

"전면전이라…, 전쟁이란 말인가? 우리에게 전쟁을 할만한 인원이

나 있나? 일방적으로 밀리는 건 전쟁이라 부르지 않지. 그냥 학살이

라 하는 게 옳지 않을까?"

"학살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 전쟁이 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쪽의

유일한 승리 비결이리라고 생각합니다. 전하."

"소수로 그게 가능할까?"

"가능합니다. 전하.  단지…, 고도로  정예화된 소수라면  말이지

요."

"정예화 되었다는 건? 군사들을 말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군사들은 이번 일에 끼어들지도 못할  것입니다. 소인

이 아뢰는 것은 각분야의 달인(達人)들로 구성된 소수입니다. 추적,

은신, 저격과 사냥, 전투의 달인들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완벽하게 합심하여 한 가지 일을 하고자 한다면,  바로 그때에야 말

로 우리가 이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나?"

"있긴 있습니다만…."

용유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불행히도 저쪽에 더 많습니다."

황태자는 역시 놀라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히려 용유진을 놀리듯 웃었다.

"그러니 어쩔텐가? 이대로 당할텐가?"

"제게 몇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대단히 소극적인  것이긴 하지만

황태자 전하가 살아계신다면 결국 우리가 이긴다는 전략입니다."

"결국 핵심은 그것 아니었나? 어떻게  내가 살아 남을 수  있다는

건가?"

"가장 좋은 방법은…."

용유진은 침중하게 말했다. 별로 가능성이 없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황제폐하의 곁에 붙어있는 겁니다."

황제의 옆에 있는데 암살을 기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혹시 기도한

다고 해도 상대적으로 경호하기가 대단히 쉬울 것이다. 그러나 실현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

"왜 그런가? 그냥 내가 세 살 먹은 어린애처럼  황상께 매달려 있

으면 되는 일 아닌가?"

"조홍은 어떤 수를 써서든지 황태자 전하를 따로 유인하고  말 것

입니다. 그게 어떤 수일지는 몰라도요."

용유진의 예상은 불행히도 정확하게 들어 맞았다. 사냥 출정 첫날

밤, 황태자는 한 장의 서찰과 한 가지  물건을 전달 받았다. 서찰에

는 '주인을 돌려받고 싶으면 내일  정오, 흑수계(黑樹溪)로 오라'는

단 한 문장이 쓰여 있었고 물건은 문제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려주

는 것이었다. 바로 보령군주의 귀걸이였다.

***

"확실합니까? 전하."

황태자는 용유진의 질문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령군주의

열 여섯 번째 생일 선물로 준 봉황무늬 귀걸이였던 것이다.

용유진이 다시 말했다.

"그와 같은 귀걸이는 가짜로 만들기 어렵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심이…."

"틀림 없이 보령의 것이야. 황태후 마마께 물려받은 것을 다시 하

사한 것이니 잘못 볼 이유가 없네."

용유진은 침묵했다. 틀릴 리가 없다는 것은 그도 잘 알았다. 봉황

무늬 귀걸이를 알아봐서가 아니라 조홍이 그런  식으로 속임수를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서였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보령군주

정도는 납치해 올 수 있는데 굳이 귀걸이를  모조하고 할 필요가 없

었다. 후회스러운 것은, 칼로 발 등을  찍고싶을 정도로 후회스러운

것은 보령군주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언젠가 그때,

그는 분명 보령군주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소인이 가서 데려오겠습니다. 전하."

"아니야. 내가 가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전하께서는  여기 그냥 계시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소인이 수하를 부려 경호하도록 하겠습니다."

애초에 보령군주의 납치가 조작일  가능성이 있다고 강변한  것이

그때문이었다. 황태자는 여기 그대로 두고 그 혼자  가서 구출할 생

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계산 못한 것이 있었다. 황태자가 보

령군주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점이었다. 황태자가 그 귀엽지 않

은 군주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그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짐작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황태자는 일찍이 보지 못했던 무게를 가지고 그 점을 말하고 있었

다.

"놈은 내 약점을 가장 정확하게 찌른 거야. 나는  보령을 모른 척

할 수가 없어."

그것은 그의 동생, 보령군주의  아버지 장왕에 대한 심정적  부채

(負債) 때문이었다.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 있었던 동생,

그를 대신해 자객에게 죽은 동생에 대한  보상이 보령군주를 아끼는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날 밤에…, 그 아이가 죽을 때 나도 거기 있었지."

장왕이 흰 눈밭 가득 피를 뿌려놓고 죽어갈 때, 황태자도 거기 있

었다. 탁자 아래에, 죽음이 두려워 바들바들 떨면서, 어린 보령군주

조차도 아버지를 부르며 쫓아 나가는데, 그는,  황태자는 탁자 아래

숨어 오줌을 지리고 있었다. 그가 본 것은  자객의 발 뿐이었다. 그

발이 탁자 아래 숨어있는 황태자의 무릎을 툭툭 치면서 그렇게 말했

던 것이다.

"오늘의 두려움을 잊지 않는다면 전하는  오래 살 수 있을  게요.

기억해 두시오. 나는 누구든, 원한다면 누구든 죽일 수 있소. 이 것

이 나타나면 무조건 그대로 따르는 것이 전하의 생명을 부지하는 길

이라는 걸 명심하셔야 하오."

자객은 그렇게 말하면서 거북이 한 마리를 떨구어 놓고 갔다.

"거북이요?"

"그래, 작은 청 거북이였지."

황제의 손가락이 서찰의 한 구석을 가리켰다. 거기 청  거북이 한

마리가 있었다. 푸른 물감으로 그려진 거북이 한 마리. 황태자는 서

찰을 움켜 쥐었다. 그 손이 눈에 보일 정도로 떨리는 것을 용유진은

보고도 모른 척했다.

"그러므로!"

황태자는 이빨까지 딱딱 부딪히며 말했다.

"그러므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나

는 황태자도, 사내도 아니야. 언제까지나 그  날의 악몽에서 벗어나

지 못할 것이다."

"하는 수 없군요."

용유진은 첫 번째 계획이 깨어졌다는 것을 인정하며 말했다.

"두번째 계획을 사용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게 뭔가?"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겁니다. 전하. 죽을 때까지요."

황태자는 빙긋이 웃었다. 그의 떨림이 점점 사그러들고 있었다.

"그 계획은 마음에 드는군."

"최소한 저보다 먼저 돌아가시게는 않겠습니다."

용유진도 마주 웃었다. 그는 처음부터 떨지 않았다. 아니, 처음에

는 떨지 않았다. 그러나 이젠 조금씩 떨기 시작했다. 흥분과 긴장감

때문이었다. 이제야말로 싸울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그의 투지는 최고조에 달했다. 지닌바 능력을 최고로 발휘할 상태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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