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행표-33화 (33/37)

2.

조홍은 그날 오후 영화궁을 예방했다. 황궁 안에 가지  못할 곳이

없는 그였지만 적어도 한 사람, 황태자를 만나러  오기 위해서는 허

락을 얻어야 하는 처지였다. 황태자가 그를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이

었다. 황태자가 왜 조홍을 싫어하는가? 조홍이  그를 죽이려 한다고

의심하기 때문이었다. 그 의심은  그가 황태자가 될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짙어졌다.

환관이란 애초에 독자적인 권력을 가질 수 없는 존재였다. 그들은

시문이 뛰어난 학자도 아니고, 행정에 밝은  관리도 아니었다. 그리

고 더구나 병권을 쥔 장군도 아니었다. 혹시 그런 면들에 재능을 가

진 자라고 하더라도 국법은 그들이 그 재능을 발휘하게 허락하지 않

았다. 물론 제국 초기에 정화(鄭和)와 같은  뛰어난 환관도 있었다.

그는 영락제(榮樂帝)의 명을 받들어 칠 회에 걸쳐 해상 정벌과 무역

을 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조차도 황제의  특별한 허락이 아니

었다면 그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환관의  권력은 그 자

신의 재능이 아니라 황제의 총애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돌려 말하면

황제의 총애가 끊어지는 그 순간 환관은 권력을 잃게된다는 것이다.

환관은 태생적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어

렸을 때부터 그 옆에서 시중을 들어주는 것은 궁녀보다도 오히려 환

관이었다. 황제가 평생을 보내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존재, 그것도 환관이었다. 심지어 환관은 황제의  방사 시간에도 옆

에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만큼 가장 황제의  마음을 잘 알아주

고, 황제가 친밀감을  느끼는 존재는 환관이었다.  여기에서 환관의

권력이 나온다. 황제의 뜻을 내각에 전달하는 것이  환관이니 그 사

이에 개입할 여지가 생긴다. 아니, 그 이전에 황제가 만사를 의논하

는 것이 환관이므로 환관의 뜻이 곧 황제의 뜻이 되는 것이다. 이런

환관이 권력에 가장 위협을  느끼는 때는 동습과 같은  신하가 그를

탄핵할 때가 아니었다. 사실 그런 것은 귀찮을뿐  위협이 되지는 않

는 것이다. 그들이 가장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가장  큰 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동료 환관이었다.  그중에서도 황태자가 총애하

는 환관이었다. 그가 바로 다음대의 권력자가 되는 것이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고 해서 꼭 황태자의 총애까지  받는다는 보

장은 없다. 사실은 대개의 경우 그 반대였다. 황제의 뜻에만 맞추다

보면 황태자의 비위를 거슬리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당

금의 황태자처럼 오랫동안 황태자로만 있으면  더욱 그러했다. 그러

므로 현재의 권력자 조홍은 황태자를 경원하고, 황태자는 조홍을 싫

어했다. 이대로 나가서 황태자가 황제가  되면 조홍은 실권(失權)하

게 된다는 것이 불을 보듯 명확한 이상  조홍도 나름대로 살 궁리를

해야 할 것이다. 황태자가 그를 총애하게 하거나, 그를 총애하는 황

태자를 세워야 하는 것이다. 물론 후자가 편했다. 다행히 현 황제에

게는 황자가 많고, 그 중에는 아직 어려서 황제가 되어도 환관의 의

사를 대변하는 것밖에 모를 황자도 있다. 그러니  문제는 단 하나였

다. 현재의 황태자가 죽어주면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은 즉위만 하면 목을 치려고 벼르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어떻게든 그 즉위를 저지하려고 한다. 이렇게 속셈이  뻔한 두 사람

이 마주 대하면 좋은 분위기가 될 리가 없었다.

황태자는 노골적으로 싫은 눈빛을 하고 조홍에게 물었다.

"웬일인가? 바쁘다고 들었는데. 큰  일을 했으니 피곤할 것  아닌

가."

조홍은 황태자의 그 말이 동습을 실각시킨 일에 대해 비꼬는 것이

라는 것을 충분히 알아들을  정도로 영리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지 않을 정도로 냉정하기도 했다. 그는 웃음을

잃지않고 말했다.

"황제 폐하의 성은을 받들어 움직이는 것이니 손발이 닳아도 어찌

피곤하다 하겠습니까. 그보다 전하야 말로  심려하시는 바가 있으시

다는데 하잘 것 없는 일들은 이 보잘 것 없는 종에게 시키시고 하늘

과 더불어 복락을 누리는데 진력하시는 게 어떠하신지요?"

황태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역시 조홍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

는지 알 정도로 영리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냉정을  가장할 이유가

없었다.

"동 학사(學士)가 왕년에 내게 경서를 가르쳐 준  분이라는 걸 모

르지는 않겠지? 최근까지 나와 함께  시문(詩文)을 논하던 분이었다

는 것도 알테고? 사심(私心)이라고는  한 점 티끌만치도  없는 분이

붕당을 조직했다고 내치게 만들어?  그러고도 네가 내  앞에서 웃는

낯을 보이는가?"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것입니다. 전하. 전들 어찌 고매하신 동

학사께서 그런 모의를 하고 계신줄 알았겠습니까? 하오나 그런 상소

가 올라오면 조사하는 것 또한 제 임무,  조사하여 사실이 확인되면

황상께 아뢰는 것도 제 임무, 그리하여 돌아나오는 칙령(勅令)을 집

행하는 것도 종의 임무이니 어찌할 수 없었사옵니다. 해량하여 주시

옵소서."

황태자는 조홍을 밉게 노려보았다. 그가 동습의  무죄를 호소하는

상소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조홍에게  알려준 것이 분

명했다. 오늘의 예방은 그  일에 대한 경고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런 경고에  흔들릴 정도의 인물이 아님은  조홍도 알

것, 오늘 그의 언행에서는 아직 조홍의 정확한  저의가 짐작되지 않

았다. 황태자는 그것을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기로 했다.

"그 말을 하려고 날 찾은  건가? 그렇다면 알겠으니 그만  물러가

게."

조홍은 허리를 굽신거리며 말했다.

"저희 책임 아래 있는 아이들이 근래 일을 잘  하는지 둘러보고자

하는 마음도 있사옵니다."

그의 책임 아래 있는 아이들, 용유진과 위사들을 의미하는 것이었

다. 황태자는 의외라는 표정이 되었다.

"그런 사소한 일에도 관심을 가졌던가? 의외로 열심히  일하는 모

양이군. 아니면 한가하거나."

"그것도 종의 소관이니 관심  갖는 것이 당연한 일인줄로  아옵니

다. 더구나 전하의 옥체를 호위하는 막중한 일이니  어찌 사소한 일

이라 하겠사옵니까? 의중에 맞지않은 일 계시면  말씀만 하소서. 바

로 조치하겠사옵니다."

황태자는 손을 저었다.

"쓰레기들만 모인 곳에서 웬일로  괜찮은 사람을 보냈더군.  하자

없으니 그만 물러가게."

조홍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황태자의 의외로  긍정적인 태도

변화가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누구를 보냈든  당장 데려 가라

고 호령을 내리던 황태자가 아니었던가. 하필  용유진을 보냈을 때,

황태자의 태도가 변했다는  것에는 우연이상의 무엇이  있다는 것이

당연했다. 조홍은 이때 처음으로 눈을 돌려 황태자의 뒤에 시립하고

있는 용유진을 보았다.

당당한 체격, 흔들림 없는 눈의 소유자가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많이 컸군!'

이것이 그가 오늘 용유진에게서 느끼는 첫  인상이었다. 신체적인

성장은 별 것 아니었다. 눈이 문제였다. 한 사람의 어른으로 자립한

자의 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도가 문제였다.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그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놈은 어느새 상당한 고수로 성

장해 있는 것이다.

'내가 너무 방심했던가?'

조홍은 스스로를 책했지만 겉으로는 미소를 보냈다.

"용 당두가 전하의 신임을 받는다니 반갑기 그지  없는 일이로군.

그 비결을 듣고싶을 정도야. 전하께서는 이 늙은  종은 전혀 신임해

주지 않으신단 말일세."

용유진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전하의 성은이 있으셨을 뿐입니다."

"얼마 전에 봤을 때만 해도 궁녀들에게 맞아 피를  흘리던 자네가

이렇게 훌륭히 한 사람의 위사 역할을 하는 것을 보게 되니 나도 저

윽이 흡족하네 그려."

"전하의 성은을 입어 그러합니다."

조홍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그래, 폐하의 성덕에 전하의 성은이 있으시니 천하가  더불어 태

평함이로세. 그보다… 잠깐 따로 이야기 좀 할 수 있겠나?"

"전하의 신변을 경호하는 중차대(重且大)한 임무를 수행중이라 따

로 시간을 낼 수 없음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조홍의 표정이 용유진의 딱딱한  태도와 더불어 딱딱하게  굳어갔

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화통을  터뜨릴 것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가

스스로의 실태(失態)를 인식하고 얼른 다시 표정을 풀며 황태자에게

손을 모았다.

"황송하오나 여기 용  당두와 잠시 따로  자리를 가질 수  있을지

요?"

황태자의 태도도 용유진에 못지 않게 딱딱했다.

"내 앞이라고 말 못할 것이 무언가? 그냥 여기서 하게!"

"천한 것들의 일상사를 얘기할 뿐이니 전하의 귀를 더럽힐까 두렵

습니다."

황태자는 조홍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용유진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할텐가?"

용유진이 조홍에게와는 달리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소관의 직속상관은 제독이시니  당연히 명을 따라야겠지만  지금

소관은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고,  그 임무는 또한  제독께서 내리신

것이니 이것 또한 중요하여 어느쪽을 따라야 할지 모르겠나이다. 소

관의 좁은 소견으로는 한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임무중임을 감

안하시어 제독께서 이미 내린  말씀을 거두어 주시는 것이  옳을 듯

하옵니다."

황태자가 조홍을 보았다.

"그렇다는군."

조홍은 이제 완연히 붉어진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무리 황태자의 앞이라 하나 용유진의 지금  언행들은 그에게는 심

각한 모욕이었다. 아니 황태자의 앞이라 더욱  그러했다. 그는 간신

히 진정하고 억지 웃음을 흘렸다.

"천한 종이 여러 모로 실수를 하였습니다. 바라옵건데 이 방 구석

에라도 가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황태자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 그와 용유진은  이 환관

녀석을 훌륭히 욕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마지못해  그런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까지야 말릴 수 있나. 어서 그리 하게."

조홍과 용유진은 황태자로부터 서너 걸음 떨어져서  마주 보았다.

조홍은 고개를 용유진에게 붙이다시피 가져다 대고는  이를 갈며 으

르렁거렸다.

"뭘 믿고 이러는 거냐? 감히 내게 반항을 하다니…, 죽고싶으냐?"

용유진도 역시 나직하게 속삭였다.

"제독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소관은 단지 임무에

충실할 뿐입니다."

"임무라고? 오늘 당장 너를 이 임무에서 교대시켜 버리겠다. 그러

고도 임무라는 소리가 나오나 보자."

용유진은 엷은 미소를 흘렸다.

"황태자 전하께서 허락을 않으실 것입니다."

조홍은 살기를 가득 담아 용유진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용유진은

추호도 두려워 하는 빛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속을 알 수 없

게 담담한 미소를 띠고있을 뿐이었다. 조홍은 그  모습에 적지 않게

충격을 먹었다. 그가 짐작하는 이상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기분이

었다. 그는 손을 뻗어 용유진의 팔뚝을 쥐었다. 용유진은 피할 생각

도 않고 있었다. 조홍이 음침하게 말했다.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는 걸 인정하마. 그러나 너도 지금 내

가 너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위사 하나 죽이

는 것으로 내 지위가 위태롭게 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용유진은 여전히 담담했다.

"제독께서는 그러실 수 없을 것입니다."

"왜 내가 그러지 못한다고 생각하느냐?"

"지금 절 죽이면 내기에 지게 될테니까요."

조홍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야말로 불의의 일격이었다.

"지금, 지금 무슨 소릴 하는거냐?"

"제독태감 조홍은 저를 죽일  수 있어도 상관대부는 저를  죽이지

못한다는 것, 털끝 하나 다치게 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말하는 거지

요."

조홍은 한참동안 아무 말없이 그를 노려보다가 희미한  미소를 그

리며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좋아, 아주 좋아. 자넨 정말 훌륭히 임무를 수행하고 있군. 앞으

로도 열심히 해주기를 바랄뿐일세."

그는 황태자에게 대충 절하고는 물러가 버렸다.

황태자가 용유진에게 물었다.

"뭐라고 하던가?"

용유진은 이채를 띠고 되물었다.

"적지 않은 소리였는데 못 들으셨습니까?"

"전혀."

용유진은 황태자의 눈가에 의심의 빛이 스쳐가는 것을  느끼고 아

차하는 생각을 했다. 교활하게도 조홍은 공력을 모아 말소리를 차단

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마지막 말만 들리게끔 했으니  그 사이에 오

간 밀담에 대해 황태자가 의심을 일으킬만도했다. 사실 그것이 조홍

이 노린 것일지도 몰랐다. 조홍은 그 궁지 속에서도 전혀 예상치 못

한 방법으로 일격을 던지고 가버린 것이다.

용유진은 혀를 차며 말했다.

"북신 상관대부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황태자의 안색이 묘하게 변했다.

"들어본 이름인 것같군."

"제독태감 조홍이 바로 북신 상관대부라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황태자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물론 믿지. 이미 알고있는 일이니까."

용유진이 오히려 놀라버렸다. 황태자는 손을 흔들어 아무 것도 아

니라는 표시를 했다.

"내게도 눈과 귀는 있지. 호시탐탐  내 목숨을 노리는 자에  대해

그 정도도 몰라서야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겠나."

용유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사년 전의 일입니다…."

***

"뭐야, 왜 그렇게 했지?"

조홍의 분노는 엉뚱한 곳에서 터져나왔다. 사실은 아주 엉뚱한 곳

은 아니었다. 용유진을 황태자에게로 보낸 당사자, 조비홍의 집무실

로 뛰쳐 들어가 그 얼굴에 서진을 집어던져  피를 보게 하는 것으로

터져나왔으니 말이다. 조비홍은 이마가 깨져  피를 흘리면서도 조홍

의 발치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용서를…!"

"내가 무엇 때문에 화를 내는지도 모르고 있겠지?  용유진! 그 용

가 꼬마를 왜 황태자에게 보냈느냔 말이다!"

조비홍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얼굴을 들었다가 다시 조아렸다.

"용서를…! 소자가 모르고 한 일입니다. 잘못된 점이 있다면 당장

불러들이겠습니다."

"됐다, 이미 늦었어!"

조홍은 조비홍의 얼굴을 걷어차 뒹굴게 만들고도 화가  덜 풀렸는

지 욕설을 퍼부어댔다. 그리고는 씨근덕거리며 중얼거렸다.

"이제 겨우 동습을 거꾸러뜨리고 한숨 돌리는 사이에 일을 그렇게

처리했단 말이지. 미처 알려주지 않은 내 죄가  크다만 너는 그놈을

너무 키워 버렸어. 게다가 극히 안 좋은 시기에  안 좋은 장소로 놈

을 보내 버렸다. 이 일을 어떻게 책임질테냐!"

당연히 조비홍에게는 할 말이 없었다. 조홍이  스스로도 인정했듯

이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은 탓이었다. 그러니  조비홍만 탓할 일이

아닌 것이다. 조홍은  거기까지 생각을 하고는  혼자 씨근덕거렸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고 중얼거렸다.

"아니, 어떻게 생각하면 잘된  일일지도…. 한 번에 둘을  처리해

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는 그대로 멈추어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간다는 말도 없이 조비

홍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지나가느라고 그는 조비홍의 집무실 바깥 방에 서류 속

으로 고개를 처박고 있는  환관이 그의 오랜 친구이자  오랜 원수인

허신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허신은 조홍이 나가자 서류에서 얼굴을 들어 문을  바라보며 중얼

거렸다.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는 것같은데…, 이제 밥상  차리기만 기

다리면 되는 것인가?"

조비홍이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분노한 것 같은데, 이러다가 역효과가 나는 것

아닐까요?"

갑자기 경칭을 쓰는 조비홍이었다. 그러나 허신은 조비홍과 단 둘

이 있는 자리에서는 경칭을 듣는 것에 이미  익숙해진 터였다. 그를

포섭하면서부터는 계속 그래왔기 때문이었다. 번천지계의 시작은 그

럼으로써 가능해졌다. 환관 중에도 신진  권력층의 핵심으로 분류되

는 조비홍을 포섭함으로써 권력이동의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그 포

섭 작전에 용유진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용유진  본인도 모르는

일이었다. 용유진으로 하여 약해진 조비홍의  정서적 빈틈을 파고들

었다는 것이 허신의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비홍의 이마에 난 상처를 보며 말했다.

"너무 흥분한 것은 아니다.  충분히 흥분한 것이지. 그놈  환관은

죽어도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 것이  품격이라는 것도 잊을 정

도로 흥분했구나. 환관은 어떤 일이 있어도 우아함을 잃으면 안돼."

"신변에 위협을 느끼면 누군들 당황하지 않겠습니까."

허신은 조비홍의 반론에 고개를 흔들어 거부를 표시했다.

"몰락할 때는 더욱 그렇지. 우아하게 몰락해 가는 게 좋아."

***

"흥미로운 얘기군!"

황태자는 용유진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 눈을 반짝였다.

"그럼 자네 지금은 월인의 비밀을 풀었나?"

용유진은 내기에 대해서만 말했을 뿐 동창으로 들어온 이후의 일,

특히 허신에 관련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당연히 구전일기혼원공

이라는 새로운 기공을 만든  일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황태자는 월인의 비밀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용유진의 말 전체에 대해서  증거를 요구하는 것일 가능성이  더 컸

다. 용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월인은 바로 고루마공의 정화였습니다. 역대  강시당 주인들

의 내공중 일부를 모아  만든 기의 덩어리같은  것입니다. 고루마공

중의 특수한 방법을 사용해 만든 것이지요."

"보여줄 수 있겠나?"

용유진은 손을 펴서 천장을 향하게 하고 내밀었다.

"소관이 재질이 떨어져 그중 일부만을 내공으로  사용할뿐 나머지

는 아직 덜 융화되어 이렇게 남아 있습니다."

그의 손바닥에서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곧 붉은 칼날과 같은 것이

솟아 나왔다. 붉은 수정과 같은 결정체, 월인이었다.

황태자는 신기한 듯 바라보다가 손을 저었다.

"되었네. 이제 자네 말을 믿지."

과연 황태자는 그의 말에 대한 증거를 보고자 했던  것이다. 용유

진은 월인을 다시 몸 속으로 흡수하면서 약간의  가책을 느꼈다. 기

실 그는 이미 월인의 정화를 거의 다 흡수해 버렸다. 방금은 그렇게

흡수한 정화를 다시 결정화 하여 보여준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고

루마공이 어느 경지에 이르면 월인을 내공으로, 내공을 다시 월인으

로 만드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그는 고루마공의

절반 정도를 다른 곳에 쓸 수 있었다. 꼭  필요한 곳에 쓴 것이지만

그것 역시 지금 황태자에게 밝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황태자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관심을 다시 조홍에게로 돌렸다.

"놈이 그렇게 돌아갔으니 이제 곧 반응이 올거야.  나를 죽이려고

발악을 하겠지."

"그럴 것입니다. 전하."

어떤 식으로든 조홍은 황태자를 암살하려고 할  것이다. 황태자의

폐위(廢位)를 추진한다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황태자의 인

망이 너무 높고, 책봉된 기간도 길다. 암살이 가장 손 쉬울 것이다.

"심려 놓으십시오, 전하. 소인을 믿어 주시면 될 것입니다."

용유진의 장담에는 근거가 있었다. 조홍은 이제 황태자 만이 아니

라 그도 암살하려고 할 것이다. 방금 그가 조홍의 심기를 전드려 놓

은 것은 중요한 경호수단을 쓴 것이었다. 대상을  둘로 늘여 놓았으

니까. 장담하건데 그를 암살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를 죽이지 못하면 황태자도 암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이 용유진

의 계산이었다. 허신이 그를 여기 보낸 계산도 바로 그것이었다. 상

식적으로 생각해서 암살 대상  둘을 한 군데에 모아  놓으면 암살은

훨씬 용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경우는 달랐다. 지켜야 하

는 쪽의 처지에서 보면 한곳에 모여 있는 편이  나을 수 있었다. 더

구나 조홍과 그 심복들의 공격 앞에서 어느정도  버틸 수 있는 사람

이 용유진밖에 없는 이상 더욱 그러했다. 이것이  첫 번째 답안이었

다. 그리고 용유진이 인정하는 유일한 답안이기도  했다. 그러나 허

신의 계산에는 또 한 가지의 답안이 있었다.

-만약 둘 다 살기 어려우면 너라도 도망쳐  나와라. 어쩌면…, 사

실은… 그쪽이 번천지계에는 낫다. 우리는 황태자의 시신을 들고 황

제 앞에 가서 조홍을 탄핵할 수 있게 되니까.

그것이 허신의 계산이고 의사였다. 제자에게 주는  무형의 압력이

었다. 필요하다면 황태자를 희생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 허신의 뜻이

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필요하다는 뜻을 은근히 비친 것이다.

용유진은 번천지계에서 이 부분에 가장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

다. 아무리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해준다고 하지만  그렇게 하면 조

홍과 다를 것이 조금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혹시 다르다고 강

변을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심정적으로 그 계획을 강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핏속에 흐르는 표사의 기질 때문일지

도 모른다. 표사란 기본적으로 누구를 지키는 것이지 누구를 죽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

부의 뜻에 안 맞는다고  해도 결국 그는 황태자에게  표사의 약속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그는  진심으로 황태자를

지킬 수가 없었다. 그러지  않고는 그는 전심전력으로  조홍과 맞서

싸울 수가 없었다. 어느 경지 이상의 무공이 되면 이러한 심정적 부

담이 승패를 좌우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진심으로  싸울 마음이

나지 않으면 가진 바 실력을 다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용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사부의 뜻에 따르지 않는  자신을 정당

화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가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다면 그럴 필

요는 없었을 것이다. 조홍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이빨을 드

러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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