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행표-30화 (30/37)

제15장: 용유진, 임무를 맡다.

1.

'大順의 道는 대신의 法이니 무릇 법이란 人君이 천하와  함께 하

는 것입니다… 우리 태조 高皇帝는 法을 創하고 治를 制함에 百王을

거울삼았으며, 옛 관직의 설치를 본받아 六部를 설치한 까닭에 감히

丞相을 復設하자고 말하는 자는  베게 하였고, 大小가  位를 지키고

內外가 來往을 금하였기 때문에 감히 대신의 廳政을 말하는 자도 베

게 하였으며… 習이 內閣의 長으로 있으면서  票擬權을 장악하여 적

당히 조치하고 처리하며… 원컨데 폐하께서는 대신으로 하여금 각기

직분을 지키도록 하되, 代言  票擬者는 권세를 부려  위엄을 세우지

말고, 旨에 따라 집행하는 자는 권세에 붙어  利를 쫓지 말며, 吏部

는 私를 행하지 말며… 그런 다음에야 조정의 威福이 튼튼해질 것입

니다.'

만언(萬言)에 달하는 이 장편의 소(疏)가 이부(吏部)에 올라온 것

은 어제 새벽, 조회가 시작되기도 전이었다. 이부상서(吏部尙書) 초

방(焦方)은 환관 조홍의 심복으로 이 상소를 바로 내각에 보내어 처

리하도록 했으나 그것은 형식에 불과하고 사실은 구경만 시켜주고는

병필태감(秉筆太監)에게 넘겨  버렸다. 병필태감  유석용(柳石用)은

초방과 마찬가지로 조홍의 심복, 상소가 올라오자 마자 쪼르르 달려

가 하회를 물었으니 조홍이 직접 들고 황제에게 달려가 처리를 허락

받았다. 원래가 이 상소는  조홍이 시켜서 올라온  것이었기 때문에

급행으로 처리된 것이었다.

상소문은 길었지만 요지는 간단했다.

'태조 홍무제(洪武帝)가 승상제(丞相制)를 폐지한 것은 대신의 전

정(專政)을 방지코자 한 것인데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  동습은 내

각수보(內閣首輔)로서 호부상서(戶部尙書) 조평(趙平), 병부상서(兵

部尙書) 황필(黃弼) 등과  붕당(朋黨)을 지어  국정을 농단(壟斷)한

다'는 것이었다.

조홍의 술수에 놀아난 황제는 급기야 대노하여 동습의  관직을 삭

탈(削奪)하고 국문(鞫問)에 부치는 한편 거기 연루된 대소 사십여명

의 관료들을 일제히 잡아들여 가담 정도가 무거운 자는 역시 국문에

부치고, 가벼운 자는  정장(廷杖)을 치도록 하였으니,  이날 장(杖)

삼십 대, 혹은 오십 대를 맞고 죽는 자가 속출하였다.

그러나 진짜 희생자는 체포, 압송 과정에 있었다. 조홍은 특히 중

심인물들을 체포함에 있어서  동창의 위사들을 동원하여  각 대신의

사저에 모여있던 식객(食客), 호원(護園), 지사(志士)들을 막론하고

모두 죽여버리도록 지시하였던 것이다. 반역을  꾀하는 무리라는 것

이 그 죄목이었다. 특히  동습의 경우에는 조홍의  전횡을 일찍부터

견제하여 수없이 많은 상소를 올려왔던 바, 조정 내에서는 조홍에게

대항하는 가장 강한  세력으로, 민중(民衆)들에게도 조정의  마지막

양심으로 알려졌었다. 그래서 그의 저택에는  뜻있는 강호의 지사들

이 자청하여 호원의 역할을 맡고  있었던 바, 어젯 밤  가장 격전이

벌어졌고, 가장 많은 피를 흘린 곳도 이곳이었다.

용유진이 무당파 속가제자중 일인자로 하삭(河朔)의 검호(劍豪)로

추앙받던 태청검객(太淸劍客) 정일붕(鄭一鵬)을 꺾고, 동습과 그 처

자식을 체포한 것은 그때문이었다. 오 년을 끌어오던 내각과 환관의

정쟁(政爭)은 결국 조홍의 승리로 돌아간 것이다.

조비홍이 동창의 내람첩형이 된  이후 그의 집무실은  선무청에서

극락전(極樂殿)으로 옮겨졌다. 이름만 극락전이지  실제로는 동창의

대소사를 총괄하는 본영(本營)답게  가는 곳마다 철문이고,  석실인

요새와 같은 건물이었다. 그중 한 방에 허신도 있었다. 조비홍의 방

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곳이었다.  이 방에서 일종

의 사전 점검을 받은 이후에야 조비홍을 만날 수 있는 구조였다. 부

내관령이라지만 과거 조비홍같이  독자적인 권한을 위임  받은 것이

아니라 여전히 조비홍의 주사 노릇을 하고 있는 허신의 위상이 이런

방 구조로 표현된 것이었다.

용유진이 들어섰을 때 허신은  열심히 주판 알을 튕기고  있었다.

그의 탁자 아래에는 무슨 계산을 했는지 먹칠된 종이가 수북히 쌓여

있었는데, 일반적인 숫자가  아니고, 글자도 아닌  일종의 기호들이

빽빽하게 적혀있었다. 용유진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허신의 저 모습은 이미 몇 달 전부터 계속 보고 있는 광경이었던 것

이다.

"여전히 산학(算學) 공부 중이십니까?"

"음."

허신은 그를 힐끗 쳐다  보고는 다시 주판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용유진이 말했다.

"최근에 태허산학진경(太虛算學眞經)이란 책을 구했는데 사부님께

드리려 가져왔습니다. 참고로 하실지도 몰라서…."

허신은 용유진이 내놓은 책을 받아서 탁자 아래로 던져 놓았다.

"성의는 고맙다만 더 이상의 책은 필요 없어. 계산방법은 이미 충

분히 알고있지. 단지  상수(常數)의 수에 비해  변수(變數)가 많고,

이놈의 변수들이 계속 변해서 골치가 아픈거란다."

"변수가 많아서… 라기보다는 지금의 변수들로는 원하는  답이 나

오지 않아서 심려하시는 게 아닙니까?"

허신은 허를 찔린 듯 입맛을 다시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변수를 결정하는 것은 실제 세계에서는 필연보다는  우연이 많은

데 이 우연의 수가 많으면 계산이라는 건  그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

지. 지금 내 계산은 변수의 이행범위를  최소로 줄여놓았고, 어제의

일로 더 이상 변수의 변화는 없어졌다고 보아도  좋을 정도다. 그런

데도 계산이 안 나온단 말이야."

"어째서 그렇습니까?"

"미지수(未知數)가 있어서 그렇지. 계산에 필요  불가결한 미지수

가 하나 있는데, 이걸 어떻게 잡아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

용유진은 탁자 위로 몸을 기울여 허신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게 누굽니까? 그 미지수가…."

"바로 너다!"

허신은 용유진의 코를 한 번 튕기고는 말했다.

"네 한계치를 어디로 규정해야 좋을지 몰라서 아직 결과가  안 나

오는거다."

"최대로 잡으시면 어떻습니까? 추측하실 수 있는 최대치로."

"그래도 진다."

허신은 한숨을 쉬었다. 용유진은 할 수 없다는 듯 손을 들었다.

"제자로서도 그러면 어쩔 수 없군요. 제 한계까지  발휘해도 진다

면 이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황 아닙니까."

"아니. 이길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어."

"뭡니까?"

"추측할 수 있는 네 최대치를 대입하면 우린 지지. 그러나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로 하면 이긴다. 근소하게나마 우리가 쎄지."

용유진은 고소를 지었다.

"사부님의 기대는 항상 제자가  감당 못할만큼 크니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게 좋겠군요."

"아니야. 방법은 그것 하나밖에  없어. 네가 내 기대만큼  커주는

것밖에…."

허신은 웃지도 않고 용유진을 바라보았다.

"좋든 싫든, 계산이 나오든 안 나오든, 때는 이미 가까워졌다. 그

동안 생각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졌었어. 바라기로야

몇 년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만 세상 일이 그렇게 원하는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 그냥 만족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지금까지 끌고

온 것만도 정말 행운인거야. 더 욕심을 부리면 망하지. 문제는 이거

다. 앞으로 한 달. 그래, 결코 그보다 길지는 않을거야. 그 안에 파

국(破局)이 이루어진다. 그 후의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는 네 어깨에

달려있어. 잊지 말아야 한다."

용유진은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하지만…."

그는 고개를 들어 사부를 바라보며 웃었다.

"죽어간 사람들, 앞으로 죽을 사람들은 종이 위의 숫자 이상의 것

입니다. 운명의 수레바퀴가 구르기 시작하면 누가  웃고, 누가 울지

알게되겠지요. 그건 인간의 힘이라기보다는 하늘의 소관이 아니겠습

니까. 너무 심려하지 마시길."

"나도 안다. 알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계산이라도 맞춰보는

것밖에 없어 이러는 것이니 너야말로 너무 걱정말아라. 그보다 이제

정말로 때가 되었다. 그래서 널 부른 것이다."

"사부님이요? 조첩형이 절 부른줄 알았는데요?"

"조첩형이 부른 것이 내가 부른 것이지. 하여간 전에 이미 말한대

로 너를 그곳에 배치하기 위해 부른 것이다.  미지수가 대입되어 가

장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장소 말이다."

"드디어…!"

용유진의 표정이 굳었다. 무거운 짐이 가슴을 누르는 기분을 순간

적으로 느낀 것이다.

"시작하는 것입니까?"

"그렇다."

허신은 책상 위의 종이들을 팔로 쓸어 버리며 단정적으로 말했다.

"이제 번천지계(飜天之計)를 시작하겠다."

"제일 처음 할 일은…?"

"네가 조첩형을 만나는 것이지. 들어가 봐."

조비홍은 더욱 아름다워졌고, 더욱 침착해졌다.  그에게서는 예전

에 보였던 병적인 불안정성 같은 것을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웠다.

용유진은 그러나 그것이 약간 아쉬웠다.  안정은 조비홍에게서 예전

의 불안한 매력을 앗아가 버렸다. 조비홍은 지금  마치 시집 가기를

포기하고 비로소 여유를 찾은 뒷방 큰 누님처럼 따스한 기운만을 풍

기고 있는 것이다. 그 따스한 기운은 용유진을  보자 더욱 강화되었

지만 곧 질책 섞인 우려로 나타났다.

"요즘 일하는 게 통 마음에 들지 않아."

"그렇습니까?"

용유진은 미소를 보냈다. 벌써  여러번 듣는 말이었다.  그때마다

대충 얼버무렸던 일이고, 그러나  오늘은 미소로 넘어가  주지 않았

다.

"웃을 일이 아니야."

"뭐가 문젤까요? 어제 동습을 나포한  것은 결국 우리 조  아닌가

요."

"동습을 잡은 게 문제가 아니라 정일붕을 살려준 게 문제야. 손에

사정을 두는 일이 최근 부쩍 많아졌더군."

용유진은 찔끔했다. 일부러 심장과 늑골을 피해  가슴을 관통시키

고 검을 뽑지 않은  것은 조비홍의 말대로 정일붕을  살려주기 위해

한 일이었다. 일시적으로는 기절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조치만 하

면 한 두달의 요양으로 완치가 되도록 찌른 것이다. 그런데 그게 들

켰다는 것은 그의 배려가 헛수고가 되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정일붕은 죽었겠군요."

"물론 죽었지. 내게 그 사실을 알려온 자가 숨통을 끊어주었다."

"저런…."

조비홍은 책상을 쳤다.

"저런이 아냐, 저런이! 만약 그자가 살아서 어정어정 사람들 있는

곳으로 기어나갔어 봐. 그 후환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지?"

"그 자는…."

용유진은 변명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

었다.

"죽이기엔 아까운 검객이었습니다."

조비홍은 혀를 찼다. 철없는 막내 동생을 보듯 하는 태도였다. 실

제로도 그렇게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지만.

"죽이기에는 아까운 검객이라고? 그런 말을 하는 넌  죽어도 아깝

지 않으냐?"

"설마 하나 놓쳤다고 죽이기야 하겠어요? 고작해야 좌천이겠죠."

좌천 따위는 염두에도 두지  않는 용유진이기에 하는  말이었지만

그게 조비홍의 속을 긁어놓았다.

"기껏 출세시켜 줬더니 고작 좌천이라고? 정말 좌천이  어떤 건지

당하고 싶은가 보군."

용유진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조비홍의 얼굴 가까이로  얼굴을 들

이밀고 말했다.

"화내지 마십시오, 누님. 제가 잘못 했습니다."

조비홍은 얼굴을 붉히며 뒤로 물러 앉았다.

"또 누님 소리군! 그 소리 한 번만 더 했다간…!"

했어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은 그가 용유진에게  제일 듣

기 좋아하는 말이 그 누님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몇 년 전의 야릇한

상황 이후 그와 용유진은 누나와 남동생처럼  친숙하게 지냈기 때문

에 그도 가끔은 진짜 남동생을 둔 누나가  된 기분으로 지냈던 것이

다. 가족도, 연인도, 친구도 없는 삭막한 궁정생활 속에서 용유진과

의 그런 관계는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기도 하고,  추운 밤 한 단

지의 화롯불같기도 했으니.

조비홍은 다른 쪽으로 화제를 바꾸었다.

"전에는 임무를 수행한다고 하고는 산서(山西)로 가서  며칠을 보

냈지? 며칠이면 끝낼 일을 핑계로 한 달이나  놀다 왔잖아. 거기 애

인이라도 숨겨둔 건가?"

"에구, 들켰군요. 어떤 놈이 그런 일을 다 고자질 했지?"

용유진은 농담으로 받으면서도 내심으로는 다시 찔끔했다. 겉으로

는 서로 능청을 떨고 있지만 그 일에  대해서는 조비홍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조비홍 역시 '번천지계'의 한  부분, 번천을 시도하

는 한 일원이었기 때문이었다. 허신이 무슨 수로 조비홍을 끌어들였

는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 조비홍이  '번천지계'를 지탱하는 세  개의 다리

중 하나가 될 그 일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용유진이 켕겨하는

부분은 그가 산서에서 한 달을 보냈다는 사실,  거기서 강시당을 찾

아다녔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때문이 아니라 애인을 숨겨뒀다고 말하

는 부분이었다. 강시당에는 애인이라고 할것까지는  없지만 분명 그

가 찾는 여자가 있었다. 공손영령. 그녀에 대해 조비홍이 촉각을 곤

두세우고 있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어떤 놈이 그것까지 고자질 한거야…!'

용유진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조비홍의  토라진 듯한 얼굴을  보았

다. 이럴 때 보면 조비홍은 마음만 여자가  아니라 육감과 표정, 질

투심까지 여자의 그것을 닮은 것 같았다.

"그때도 그냥 넘어갔지만 원래는 문책감이야. 이번에도 내가 중간

에 막아주지 않았으면 문책감이야. 문책에  문책이면 사형은 가능하

지 않은줄 알아? 조심하라는 거야! 아예 일을  만들지 말든지, 아니

면 아무도 모르게 하든지!"

용유진은 이제야 말로 진심으로 사과했다. 조비홍은 지금 그가 서

툴게 행동한다고 꾸짓고 있는 것이다.

"조심하겠습니다."

"하여간!"

조비홍은 비로소 표정을 풀며 말했다.

"약간의 문책을 하겠다. 천자조를 데리고 영화궁으로  가. 거기서

달리 지시가 내릴 때까지 황태자 전하를 경호하는 거다."

용유진은 어리둥절 해져서 되물었다.

"영화궁에 황태자 전하가 계셨습니까?"

황태자를 경호하러 간다는 것은 예정된 일이었다. 그  또한 '번천

지계'의 한 축이 되어야 할 사람었으므로. 다른 누구도 아니고 용유

진이 그렇게 만들어야 할 대상이 바로 황태자였으므로. 그가 의아해

하는 것은 황태자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영화궁에 있다는 점이었

다. 예전에는 거기 보령군주가 있지 않았던가.

"영화궁에 황태자 전하가 없으면 누가 있다는 거야.  예전에 거기

있을 때 도대체 뭘 본거야?"

보령군주, 일찍 아비를 잃은 조카를 황태자가 보살피고 있었던 것

이다. 영화궁에서. 당시 석소봉은 황태자의 경호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고, 용유진은 그중 한 사람으로 보령군주의 노리개가 되었던 것

이다.

"그땐…."

용유진은 사태를 몇 년이 지난 지금에야 파악하고 쓴 웃음을 지었

다. 그때의 기억들이 되살아난 것이다.

"두들겨 맞느라고 정신이 없었죠."

지금도 보령군주는 난폭할까? 그날의 약속을  기억할까? 용유진은

기억을 되짚으며 발을 모았다.

"알겠습니다. 바로 영화궁으로 가지요."

"거기 원래 그 임무를  맡고있던 당두가 있을테니 인수인계는  그

자에게 받도록. 나가봐!"

조비홍은 다시 탁자에 쌓인 서류를 뒤적이며 말했다. 그때 용유진

의 시선을 끄는 서류가 잠시 보였다. 용유진은 고개를 빼고 그 서류

를 들여다 보려 했다.

"뭘 보는거야?"

"아뇨, 아는 이름이 보여서요."

조비홍은 용유진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옮겨 서류 하나를 꺼냈다.

정확하게는 긴급 보고 표시가 된 서찰이었다.

긴급 보고라지만 이미 몇 달 전에 일어난 사건에 관한 보고서. 유

황도를 탈주한 몇 명의 탈주범들에 관한 보고서였다.

"중주사견 말인가? 이 자들에게 관심 있나?"

용유진은 묘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이건 순전한 우연이고, 제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이들이 어떻

게 됐다는 겁니까?"

"유황도에서 탈주했지."

조비홍은 서찰을 읽어주었다.

"유황 채굴반에서 작업중 이미 이십여 년 전에 유폐된  유형범 가

뢰도(賈賴度; 반년 전  육십 팔세로 사망,  별칭 팔황신마八荒神魔,

살인, 강간, 강탈, 유괴 혐의)를 만나 무공을  전수받고, 굴을 뚫어

해안가로 접근한 다음 폭풍우 치는 밤에 탈주. 현재까지의 조사로는

호광 일대에서 그들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있음. 이상."

용유진은 넌더리를 치며 중얼거렸다.

"정말 악운이 쎈 놈들이군요."

"아, 별첨(別添)이 있는걸."

조비홍은 뒷장을 넘겨서 거기 한 줄 더 쓰인 문장을 읽었다.

"팔황신마 가뢰도는 멸문한 마교의 잔당이라는 혐의도  받고 있었

음."

***

"니미, 귀가 왜 이렇게 가렵지? 어떤 놈이 내 욕이라도 하나?"

황구이는 작은 나무가지 하나를  주워 귀를 후벼 팠다.  흑구삼이

그를 보고 혀를 찼다.

"누가 우리 욕 할 때마다 귀가 가려웠으면 벌써  귓구멍이 동굴이

됐겠소. 자주 씻지 않으니 귀가 가려운 거지요.  형님도 이제 좀 씻

고 사시오. 말투도 좀 점잖게 하구요."

황구이가 눈을 까 뒤집었다.

"지랄, 별 좆같은 소리를 다 하네. 평생 이렇게 살았어도 아무 문

제 없었어. 갑자기 씻는 건 뭐고, 말투는 어쩌라는 거냐!"

"전에는 중주사견의 하나였을 뿐이니 안 씻어도 상관  없고, 욕을

달고 다녀도 상관 없었죠. 하지만 이젠 마교의 이교주(二敎主) 아닙

니까. 교주씩이나 되는 분이 그러면 안되죠."

"마교의 이교주?"

흑구삼은 실실 웃으며 반구대를 가리켰다.

"예, 대형이 마교 대교주(大敎主), 저는  삼교주(三敎主), 막내는

사교주(四敎主), 아니면 말교주(末敎主), 어떻습니까?"

백구말이 끼어들었다.

"사교주로 해주쇼. 거기까지 말(末)자가 끼어들건 뭐요."

"이교주든 뭐든 난 하고싶은 욕 다 하고  살랜다. 니미, 교주씩이

나 돼서 욕도 맘대로 못하면 그런 교주를 무슨 맛으로 해."

"셋째 말이 맞다!"

반구대가 흑구삼의 역성을 들었다.

"출세를 하면 그만큼 사람도 커져야 하는거야. 지금은  마교 교도

래야 달랑 우리 넷 뿐이니 그렇지만, 조만간  교도를 모으면… 흐흐

너도 무게 좀 잡아야 할게다. 입이 무거워야 권위가 서지."

네 마리 개는 다같이  흐뭇한 미소를 흘렸다. 순천부에서  잡혀서

유황도로 압송되어 갈 때만 해도 이젠 죽었다고 생각한 그들이었다.

무공은 전폐되고, 외팔 외다리로 그 지옥같은 연기 구덩이에서 유황

을 파낼 때만해도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팔황

신마 가뢰도, 전대 마교의 호교령이었던  그를 만나 천마불사신공을

배우게 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제 그들의  눈앞에 전설의 마교

교주로서 막강한 권력과 향락이 펼쳐진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마교

를 재건하는 막중한 책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을 않

는 그들이었다.

"그런데 생사판 그 놈이 우릴 교주로 인정할까요?"

"마교 십팔대 지파(支派) 중에서 고작 오독마궁(五毒魔宮)의 일개

시동(侍童)이었던 녀석이 호교령의  전수자 앞에서 감히  어쩌겠어?

지금 그놈이 천마불사신공이 아니라 오행진독신공 따위 잡기로 사기

를 치고 있다는 걸  밝히기라도 하면 생사교 따위야  당장 허물어질

것을…."

"너무 무시하지 않는게 좋을 것 같은데요, 형님. 과거에야 그랬지

만 지금은 당당한 무림 십대 고수의 하나 아닙니까. 오행진독신공도

오독마궁 최고의 절기로 천마불사신공보다야 좀  못하다지만 무시할

수 없는 절기고…."

"뭐가 무시할 수 없는 절기야! 우리 천마불사신공은  진짜로 죽어

도 죽지 않는 거고, 그놈의 오행진독신공은 독기운으로 조금 생명을

연장하는 것에 불과하잖아!"

"대신 우리는 천마불사신공만 익혔지 그 외의 절기들은 하나도 모

르고 있잖습니까."

"그거야… 천천히 찾아서 익히면  되지. 마교 삼대 호교  법기(法

器)만 찾으면…, 특히 그 천마령(天魔鈴)만 찾으면  우린 진짜로 강

해질 수 있는 거야. 흐흐흐. 그땐 생사판이고 뭐고 싸그리…."

"쉿-! 누가 들을라."

제멋대로 지껄이던 네 마리 개가 일제히 입을 다물고 주위를 살폈

다. 간혹 들려오는 밤새 소리, 나무가지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 말고

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곧 그 계집애가 올거니까 이제 그만 조용히 하고 잠복해!"

네 마리 개는 어두운 수풀에 몸을 감추었다. 그러나 역시 꿈을 꾸

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 흑구삼이 참지 못하고 한 마디 덧붙였다.

"그 계집애가 천마령을 가지고 있는 거 확실히 봤지?"

백구말이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제가 계집애들 용모랑 복장 잘못 보는 거  보셨습니까? 총망중이

지만 분명히 그 계집애 오른쪽 귓볼에 천마령이 달려있는 걸 봤다구

요. 한쪽에 소녀, 반대쪽에 해골 그림이 새겨진…."

"쉿-! 온다!"

그들은 다시 납작 엎드렸다. 그들이 기다리던 문제의 계집애가 오

고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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