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행표-27화 (27/37)

2.

"아무래도 생사판은 천마불사공을 익힌 게 아닌 모양이다."

다시 만난 사부는 그 동안의 경과를 듣더니 그렇게  말했다. 조비

홍은 방에 없고, 허신은 나무 상자 가득  서류와 책, 여타의 집기들

을 옮겨 담고 있었다. 용유진이 도우려 하자 허신은 거절했다.

"극비 서류들이야."

그렇게 말한 것은 농담이었고 진실은  이야기 할 시간을 더  갖기

위한 것이었다. 정리가 끝나면 바로 새로운 방으로  옮겨야 하기 때

문이었다.

"왜 이사를…, 어디로 갑니까?"

"조 부내관령이 출세를 했으니 더 좋고 넓은 방으로 가야지. 나도

따라가게 됐다만 거긴 사람이 많아서 여기보단 안 좋을 것 같아."

"출세를 해요?"

"첩형이 되었어. 내람첩형(內覽帖刑)이라고나 할까…,  여기 강복

사를 관리하는 일이니까 일이야 그동안 하던 것과 다를 바가 없지만

권한이 무지막지하게 커졌지."

"음… 정말 출세했군요."

"그건 그렇고 아까 하던 얘긴데…, 아무래도 생사판이  익힌 것은

오행진독신공(五行鎭毒神功)일 가능성이 높아. 독으로  인간의 잠재

력을 끌어올리는 기공이라고 들었다. 독공(毒功)이지."

"강호에는 천마불사신공이라고 소문이  났잖습니까. 자신이  익힌

기공을 구태여 숨길 이유가 있을까요?"

"있지."

처음 시작할땐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의 생사교는 생사판이 천마불

사신공을 익혔다는 것을  교리처럼 믿고있는 종교집단이었다.  만약

생사판이 천마불사신공이 아닌 다른 기공을 익힌 것이라면, 죽지 않

는다거나 죽은 뒤에 다시  산다거나 하는 교리들이 그  근거를 잃게

되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동안 독으로 교도들을 속여왔다는 것이 드

러나면 그 충격은 적지 않을 것이었다.

"하여간 재미있게 되었구나. 조홍도 그걸 알아차린  것이 분명해.

널 진맥했던 건 천마호심결이 진짜 독이었나  알아보려는 의미도 있

었겠지. 조홍이 그 사실을 어떻게 이용할지 목하 주목되는군."

조홍의 이야기가 나오자 용유진은  잊고있던 사실을 기억해  내었

다.

"저도 한 가지 의심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생사판에 대해서?"

"아니요. 조홍에 대해서요."

용유진은 삼황포추에 태청강기를 섞어 사용한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조홍이 그것을 못 알아봤다는 것도.

"조홍은 태청강기를 모르고 있어요. 특히 제가 쓴  마지막 초식은

삼황포추와 비슷할 뿐이지 완벽한 태청복마곤룡장권의  한 초식이었

는데 태청강기를 익힌 사람이 그걸 못 알아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

는 일이죠. 그가 절 진맥할 때 사용한 진기도 옥로진기였고…."

"확실하냐?"

"예. 제가 보기엔 그렇군요."

"재미 있군, 재미 있어."

허신은 짐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방안을 서성거렸다. 그의 눈이

아련한 기억을 더듬는 듯 흐려졌다.

"그랬었구나, 그래, 그랬었어…."

넋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다가 그는 문득 용유진을  바라보며 물

었다.

"옥로진기가 금지된 무공이라는 걸 아느냐?"

"금지된 무공이었나요?"

"그래. 전전대의 황제폐하께서 금지시켰지. 그 전대의  황제가 유

달리 황음(荒淫)한 소행을  많이 하신 것이  그것때문이라고 보셨던

거야."

옥로진기는 일정 경지에 다다르게  되면 반드시 사람의  정(精)을

흡수해야 그 이상의 경지로 오르게 된다. 그것이  대충 칠 단계. 팔

단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동남동녀(童男童女)를 죽여가며 수련해야

하는 것이다. 삼 대  전의 황제는 그렇게 했다.  당시의 제독태감과

함께 그 피비린내나는 수련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다가 궁내의 원성

에 부딪혀 결국  중도에 좌절하고, 알려지진  않았지만 암살당했다.

제독태감도 함께였다.

"옥로진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내가 처음에 네게 가르쳐 준 것과

같은 건강호흡법과 나중에 조비홍에게 배운  무공으로서의 그것, 이

두 가지지. 아마도 조홍은 조비홍에게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안심하고 그걸 배우도록  한거야. 핵심을 못

배우기 때문에 오히려 해악이 없을 걸로 생각한  것이지. 그런데 의

외로 너는 정을 흡수하지 않고도 대성해 버렸구나."

"저는 왜 그렇게 된걸까요?"

"난들 알겠느냐만은… 아마도 월인의 덕일거다. 네 말대로라면 월

인은 그야말로 사람의 정이 뭉쳐서 된 것일테니까.  불완전한 네 옥

로진기를 완전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거지.  하지만 조홍에게는 그런

기연은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동남동녀를 희생시켜가며 옥로진기를

익힌 것일테지. 자그마치 사십 년 전부터…."

허신의 눈은 다시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사십 년 전에 그와 나는 서적명화고장사(書籍名畵庫掌司)의 일을

맡아보고 있었지. 간단히 말해 황궁의 보물창고를 관리했다는 거다.

그때 우리 관할에 황궁서고(皇宮書庫)와 무고(武庫)도 있었는데, 어

느날 그가 내게 달려와 말했어. 태청강기가  수록된 책을 찾았다고.

그걸 바탕으로 힘을 키우겠다고 했지. 그때만 해도  우린 야망이 있

었고, 무공에 있어서는 그가 제일 뛰어났었어.  소질로만 치면 백리

제일이 최고였지만 싸움은 그가 더 잘했지.  성격 탓일거야. 하여간

그래서 못 본척 해준건데… 그게 거짓이었군.  우리도 속인거야. 아

마도 놈은 삼대  전의 제독태감이  남긴 옥로진기의 비결을  얻었겠

지."

허신은 시름에 빠진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허리를 펴며

웃었다.

"그게 맞을거다. 그렇다면 우린 중요한 약점을 잡은 셈이다. 결정

적인 시기에 놈을 꺼꾸러뜨릴 병기를 손에 쥔 셈이야."

그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무언가 즐거운 일이라도 생겼다는 모습

이었다.

"비슷한 일이 또 하나 있구나. 이것 참 묘하다."

그는 용유진에게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듯 말했다.

"일승 고목대사의 무공도 거짓일거다. 그도 대력금황기를 익힌 건

아니라는 이야기야."

"그건 또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대력금황기가 있는 곳을 내가 알거든."

대력금황기가 숨겨진 곳. 그것이 용유진에게 주는 허신의 다음 가

르침이었다.

"몸을 만들면 그다음엔 뭘 해야 할까? 손발을 놀리는 방법을 익혀

야지. 권각술을 익히라는 얘기다. 그런데 여기에서  얘기가 좀 어려

워 져. 동창에서 배울 수 있는 권각술의 범위라는  건 한 사람이 평

생을 걸려 배워도 다 배우지 못할 정도로 광대해. 천하의 거의 모든

무공이 여기 모여 있다는거지. 그중 어떤 걸 배워야 할까? 전부? 아

니면 그중 하나만?"

허신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것이 그것이었다. 동창의 위사

들이 배우고 익히고 성취하는  것을 보며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을지

고심을 했던 것이다.

"결론은 하나만 선택해서 배우는 게 낫다는 거다.  이것저것 욕심

을 부려서 배워봤자 그중  어느 것 하나에도 정통하지  못하는 것이

대개의 경우였어. 하지만 또  하나만 죽어라고 파고드는  건 진보가

늦어 좋지 않았다. 내 결론은 여럿을 배우되  하나에 집중하라는 거

다.여러 권각술을 두루 섭렵하여 장단점을 배우고,  그 교훈을 선택

한 하나에 반영시키라는 것이지."

여러 가지를 배우는 데에는 역시 동창 만한 곳이  없다. 지장전에

다시 들어가서 용유진이 배워야 할 것이 그것이었다. 외부에서 교두

가 와서 가르쳐 주는  것은 물론이고, 지장전  자체의 교두들에게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중점을 둘 하나로 나는 취타십팔방을 선택했다.  손발 놀리

기로는 이것만큼 정교한 것이 없지. 하지만 금나술만으로는 역시 무

언가 부족해. 그래서 하나 더 준비한 것이  이것, 대력금황기다. 원

래 구대극품기공 중에 대력금황기가 장공(掌功)에  있어서는 으뜸이

라고들 했지. 그러니 정교함으로는 취타십팔방,  강맹하기로는 대력

금황기면 대충 모양이 나온다는 것이다."

용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양은 나오는군요.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요? 모양만  좋지 전부

머리속으로 그리기만 한 것 아닙니까. 직접 익혀보면 어떨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잖습니까."

"그야 그렇지. 문제가 있으면 익혀 가면서 네가 해결할 수밖에 없

겠다."

허신은 간단히 책임을 미뤄버리고는 말을 돌렸다.

"네 이야기를 듣고 또 하나 떠오른 생각이 있다.  이쪽도 꽤 가능

성이 있어 보여서 계속 추진했으면 하는 건데…,  이것 저것 섞어서

하나의 권각술을 만드는  거다. 삼황포추에 옥로진기와  태청장권을

도입한 것처럼…."

그럴 이유도 있었다.

"어차피 동창 안에서는 옥로진기든 태청강기든 써선 안된다. 몰래

수련하기도 힘들거야. 어디에나 감시의 눈이  번뜩이고 있으니 말이

다. 그러니 삼황포추에 다른  권각술의 장점을 섞어  넣으라는 것이

다. 그리고 그 틈에 옥로진기와 태청강기도  섞어넣고. 좋은 모양이

나오면 다행이고, 안 나와도 옥로진기와  태청강기를 수련하는 기회

는 되지 않겠니."

그것은 용유진도 생각한 것이 있었다. 생사현관이  타통된 이후로

는 이상하게 두뇌회전이 빨리 되어 떠올리기만  하면 대충의 윤곽이

잡히곤 해서 그 스스로도 신기해 하고 있는 중이었다. 특히 요즘 중

점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그것, 삼황포추에 취타십팔방, 그리고

태청장권까지 결합시킨 무공이었던 것이다.

원래 무공을 만드는 것은 무공을 익히기보다 백 배나 힘든 법이었

다. 천하제일고수로 불리며 명멸해간 고수들은  밤하늘 별처럼 많아

도 새로운 무공을 창안한  사람은 많지가 않은 것이  무림의 역사였

다. 새로운 무공을 만들고 쓸 수 있게끔  한 사람이야말로 천하제일

고수보다 한 단계 높은 이름, 대종사(大宗師)라고 불리워 마땅한 것

이다.

용유진은 자신이 새로운 무공을 창안할 정도는 안될지  몰라도 기

존의 무공을 섞어 하나의 무공을 새로이 드러내는  정도는 할 수 있

을 것같았다. 그래서 허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해보겠습니다. 근데 대력금황기는 어디 있습니까?"

"물론 황궁서고에 있지."

"예? 방금은 가지고 계신 것처럼 말씀하셨…."

"황궁서고에 있으면 가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냐.  몰래

들어가서 가져 오면 되니까."

허신은 황궁서고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애들 장난처럼 말했다.

"예전에 조홍이 태청강기를 발견했다고 거짓말을 할 때 나도 사실

은 대력금황기를 발견했지. 그때는 놈이 한꺼번에 두 가지나 가지고

수련하다가 무리해서 오히려 진보가 더딜까봐  말을 안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잘된  일인지 모르겠다. 하여간  거기 들어갔다

나오는 건 나중에 하자. 일단 들어가면 하루는  있어야 하는데 지금

은 그렇게 자리를 비웠다간 당장 발각될거다. 나중에 시간을 내도록

하지."

"그럼 지금은 뭘 해야 합니까?"

"지장전으로 가야지."

허신은 방 한쪽을 뒤지더니 옷  한 벌을 꺼내어 용유진에게  주었

다.

"자, 얼른 가서 수련해라. 배울 것도 많은데  언제까지 여기서 노

닥거리고 있을테냐."

허신의 말처럼 확실히 배울게 많긴 많았다. 동창은 무공을 익히기

에는 가장 좋은 장소라는 것도 맞는 말이었다.  다시 들어간 지장전

은 용유진을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미처 다 퍼붇지 못한 지옥의 고

통을 안겨준다는 방식으로. 꼬박 한달간의 고통이 끝나고 염충의 앞

에 섰을 때 용유진은 저 표정을 양평중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

다. 염충은 못 먹을 것을 먹은 표정으로 용유진에게 관문 통과를 말

했던 것이다.

"몸은 충분히 만들어진 것 같군.  네가 여기를 통과한 가장  어린

나이라는 것도 인정하겠다."

몸 만들기가 끝났다는 것을 인정받고 나자 지장전은  그에게 새로

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애초에 몸만들기 수련장은 지장전 안에서도

기본에 불과했던 것이다. 달리 시왕전이라고 불리는 것에 걸맞게 지

장전은 열 개의 공간을 그 안에 가지고 있었다. 몸 만들기 수련장은

공간으로 치지도 않았고 크게 둘로 나누어  권각술과 병기술의 수련

장만 공간으로 계산했다. 다시 권각술 수련장은 권(拳), 장(掌), 지

(指), 나(拿), 각(脚)의 다섯 수련장으로, 병기술 수련장은 창봉(槍

棒), 도검(刀劍), 추퇴(錐槌), 기형병(奇形兵),  암기(暗器)의 다섯

수련장으로 나뉘어 있었다. 각 수련장에는 그 분야에 정통한 교두가

있고, 참고로 할만한 무공비급이 쌓여  있었다. 천하각파, 삼교구류

의 서적이 모두 망라되어 있는 듯했다. 거기에서 용유진은 밤낮으로

수련을 하고, 밤이면 남몰래 삼황포추를 완성하는  연공을 했다. 그

렇게 일 년이 지나서야 용유진은 대력금황기를 가지러 갈 시간을 낼

수 있었다.

황궁의 창고들은 대개 외벽(外壁)에 가까운 장소에 지어놓기 마련

이다. 물건이 드나드는 곳인 만큼 외부로 통하기  편리한 위치에 짓

는 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원칙에  해당되지 않는

창고가 세 개 있었다. 서고와 무고, 그리고 의약고(醫藥庫)였다. 의

약고는 그 특성상 태의원(太醫院) 옆에 붙어 있었고, 서고와 무고는

황궁 내의 중지(重地)에 자리잡고 앉아 수많은 호위병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대충 그렇게만 알고 있던 용유진은 허신을  따라 문제의 서

고에 가보고는 어리둥절해져 버렸다. 서고와 무고는 두 개가 아니었

다. 지상에는 서고, 지하에는 무고라는 식으로  하나의 건물로 지어

진 것이 황궁서고와 황궁무고의 정체였다. 더 놀라운  것은 저 지하

에는 다시 극비로 관리되는 문서와 서적들을 모아놓은 또 하나의 서

고가 있고, 영약과 기진이물(奇珍異物)로 분류된 물건들을 보관하는

또 하나의 의약고가 있다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보물 창고였다. 그

보물창고로 용유진은 걸어 들어갔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대낮에,

허신과 함께.

"촌놈처럼 두리번거리지 마라. 들킬라."

앞서가는 허신은 소매에 양손을 집어넣고 팔자 걸음을  하는 태연

한 모습이었다. 용유진도 그  모습을 흉내내려 하자  허신이 꾸짖었

다.

"어허, 환관 주제에 팔자 걸음이라니. 종종걸음으로 걸어라."

용유진도 환관으로 변장한  상태였던 것이다. 용유진은  투덜거렸

다.

"사부님은요."

"나야 환관이라도 직계가  높은 환관이니  당연히 거들먹  거려야

지."

실제로는 주사에 불과했지만 오늘 허신도 변장한  상태였다. 용모

를 꾸미는 것이 아니라 직급을 사칭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조비

홍의 명패를 용케  빼돌려서는 환관중에도 극상위에  속하는 직급을

가장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의 이러한 직급사칭은 대단한 효과를

가져왔다. 그들이 가는 길 앞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서고를 지키던

자도, 그 아래 지하로  내려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던  자도, 허신이

내미는 명패를 보고는 아뭇소리 없이 문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그

래서 그들은 단지 걸어오는 시간만 소요해서  황궁서고의 깊숙한 장

소에까지 도착했다.

"그럼 넌 여기서 그 책을 찾아라. 책 이름이 뭔지는 알겠지?"

"금황기총람(金皇記總覽)이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래. 그거다. 아마도 저쪽 어디에 있을거다."

그러면서 허신이 가리킨 곳은 짝이 안 맞거나 낡아 부스러져서 손

질을 요하는 책을 모아둔 곳이었다. 아주 부지런한 관리자가 아니면

그 아래까지는 도저히 손이 안 가기 때문에 실제로는 썩어 문드러지

도록 방치해 두는 곳이기도  했다. 용유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

다.

"저 안에 있는 걸  어떻게 찾습니까. 다  뒤져봐야 할 것  같은데

요."

"그러니까 하루 있어야 한다고  했잖니. 자 그럼 수고해라.  나는

내일 데리러 오마."

허신은 용유진을 두고 가버렸다. 용유진은 잠시  혼자서 투덜거리

다가 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시간은 꼭 하루밖에 없었다. 정확히 오

늘과 같은 시간이 아니면 나갈 수가 없었다. 두 명이 들어왔다가 한

명만 나간다는 것은 원래 안되는 것이지만  그것을 허신은 경비병들

의 교대시간을 이용해서 해결했다. 제대로 인수인계가 안된 틈을 이

용해 두 명이 들어와서 한  명이 나가고, 다음날 한  명이 들어와서

두 명이 나간다는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그래서 고관을 사칭하는

것이 필요했다. 동창의 첩형쯤 되는 사람에게 목적이나 인원 따위를

물어 기록하는 짓은 아무리 눈치 없는 경비병들도  하지 않았다. 그

것은 당금 황궁에서 환관이 휘두르고 있는 권력의 정도를 가늠케 해

주는 일이기도 했다. 황족이라도 거쳐야 하는 절차를 환관은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식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용유진은 새앙쥐처럼 책더미를 파고들다

가 문득 멈추고 귀를 쫑긋거렸다.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주위를 급히 둘러보고는 몸을 띄워 천장에 박쥐처럼 달라붙었다. 불

빛이 다가왔다. 등잔을 들고 있는 환관이 하나 나타났다. 처음엔 허

신인가 했지만 곧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다. 환관의 뒤에 피변(皮弁)

을 쓰고 곤복(袞服)을 입은 것으로 보아 황족이었다. 문제의 황족은

환관을 세워 두고는 서가에서 책을 이것저것 고르기 시작했다. 용유

진의 바로 아래쪽이었다.

용유진은 잔뜩 긴장해서 아래의 황족을 살펴 보았다. 바로 위에서

보는 것이라 모자와 어깨, 황족이 들여다 보는  책밖에는 보이지 않

았지만 그것으로도 그의 신분을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피변을 보면 신분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피변은 등급상 면류관(冕旒冠) 다음가는 관(冠)으로 조회 때 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등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사슴가죽이나 검은 비

단으로 덮은 것인데, 거기 세로로 바느질한 줄의  수를 세면 황제인

지, 혹은 친왕인지, 그도 아니면 고관인지가 드러나는 것이다. 지금

용유진의 아래에 있는 사람의 피변은 아홉 줄로 바느질하고 그 사이

에 주옥(珠玉)을 달았으며, 붉은 실을  늘어뜨렸으니 친왕의 급이었

다. '어느 친왕이 무료한 김에 아직 못  읽어본 희귀본 서적을 찾으

러 왔다'가 오늘 일에 대한 그럴듯한 설명인 것 같았다.

'하필 오늘이냐, 젠장!'

용유진은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렸는데, 천장에 매달려  있기가 힘

들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일년 열두달이 다  가도록 관리를 맡은

환관 외에는 사람 그림자를 구경하기 어려운  곳에 친왕씩이나 되는

인물이 책을 찾으러 왔다는  것은 재수가 그리 좋지  않다는 징조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조회 때나 쓰는 피변을 쓰고 왔다는

것은 방금 조회가 끝났다는 증거였다. 벌써 아침이 된 것이다. 허신

이 그를 데리러 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정말로 재수 없는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서가를  뒤지던 친왕

은 흥미를 끄는 책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용유진이 뒤지던 책 더미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직 건들지 않은 더미에서 책  몇권을 꺼내 뒤적

이더니 한 권에 흥미를 갖고 한참이나 서서  읽기 시작했다. 그러더

니 마음을 정했는지 그 책을 덮고 품속에 넣은 다음 돌아섰는데, 용

유진은 그 사이에 그  책이 바로 문제의 금황기총람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밤새도록 찾아도 안 나오던 책이 친왕의  우연한 손길에 걸

려든 것이다.

'젠장, 젠장, 젠장!'

속으로 아무리 욕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친왕은 용유진이 그렇게

찾던 책을 가슴에 간직한  채 환관을 앞세워 서고를  빠져나가 버렸

다.

용유진은 날개 꺾인 새가 떨어지듯  책 더미 위로 뛰어  내리고는

허탈해 져서 주저 앉아 버렸다.

'사부님 볼 낯이 없게 됐군.'

아예 못 찾은 것도 아니고 다 찾아놓고는 다른 사람에게 가로채인

셈이니 허탈한 건 둘째 치고 분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용유진은

한참 씨근덕거리다가 포기하고는 벌렁 누워버렸다. 생각해보면 대력

금황기가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태청강기와 고루마공 만으

로도 삼황포추를 완성시킬 수는  있었고, 사실 거의  완성된 상태였

다. 게다가 그가 태청강기를 얻었을 때를 생각해보면 그것도 터무니

없이 운이 좋았기 때문 아닌가. 오늘 다른 사람이 운이 좋았다고 해

서 그가 투덜거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역시 보물은 인연이 있는 사람에게 가는가보다."

욕심을 버리니 마음이 편해졌다. 용유진은 그대로  누워 빈둥거리

다가 사부가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리기 무료한  김에 팔을 뻗어 아

무 책이나 한 권 집어 들었다. 그리고 책의  표지를 보고는 벌떡 일

어나 앉았다.

"이건 또 무슨 우연의 일치냐!"

군데군데 좀이 먹어 너덜거리는  책, 그러나 그 겉표지에는  붉은

글씨로 뚜렷하게 '옥방심결(玉房心訣)'이라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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