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용유진, 책을 훔치다.
1.
밤은 초가지붕의 움막에도, 황금 기와 찬란한 황궁에도 똑같이 공
평하게 찾아들었다. 그러나 그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은 천차만별의
차이가 있었다. 특히 내선감의 중지에 자리잡은 환관 조홍, 제독태
감의 침전에서 벌어지는 일은 밖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
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환상과는 달리 처음 순결을 잃는 소녀를
흥분시키는 것, 심지어 열락에 들떠 절정을 맛보게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대개의 소녀는 그런 일에 무지하며 그런 행위에
대해 공포심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초야를 치르고 난 신부의 입에
서 지옥 같았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드물지 않은 일인 것이다. 더구
나 그 행위가 모두의 축복과 용인 속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극히
비정상적인, 심지어 변태적인 환경 속에서 벌어질 때는 더욱 그러했
다.
소녀는 배꼽까지 발갛게 물들인채 떨고 있었다. 부드러운 살결에
는 소름이 잔뜩 돋아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옆에 서있는 동자(童
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열 세 살, 그리고 둘 다 팔려
온 신세였다. 출신과 성별은 다르지만 비슷한 경로를 거쳐 오늘 내
선감으로 업혀온 소년과 소녀는 지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채
제독태감의 침상 앞에 나란히 서있는 신세가 되었다. 두 사람의 심
정이 어떤지, 신체적인 상황이 어떤지는 소년의 바짝 오그라든 성기
와 불알을 보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방안이 아무리 분홍색 향연
(香煙)으로 물들어 있다 해도, 방금 약한 술 한 잔 씩을 마셔서 몽
롱한 기분에 잠겨 있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두렵고, 떨리고,
수치스러운 감정 뿐일 것이다.
게다가 방 안에는 그들 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면의 침상에
는 아랫도리만 가리고 누운 조홍이 있고, 여장을 한 또 한 명의 사
내, 조비홍이 있었다. 그들이 하는 일을 보라. 머리를 길게 풀어헤
치고 뽀얗게 화장을 한 조비홍, 얼핏 보기에는 황후나 비빈의 복장
에도 무색하지 않을만큼 화려한 여인의 복장에 어떤 미녀에게도 빠
지지 않을만큼 아리따운 외모의 조비홍은 지금 조홍의 온몸을 정성
스레 핥아주고 있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시 발끝에서 머리끝
까지. 조홍은 눈을 게슴치레하게 뜨고 조비홍의 봉사를 완벽히 즐기
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한 손은 조비홍의 옷섶을 파헤치고 들
어가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 한 순간 조비홍이 흠칫 움직임을 멈추
었다. 딱딱하게 긴장한 모습이었다. 조홍의 눈은 더욱 게슴치레하게
변했다. 그의 손은 조비홍의 치마자락을 젖히고 엉덩이 사이에서 움
직이고 있었다. 조비홍은 자못 흥분한 듯 고개를 뒤로 제치고 뜨거
운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조홍이 갑자기 손을 멈추고 몸을 돌려 침
상에 엎드렸다. 조비홍은 조홍의 아랫도리를 가린 천을 내리고 침상
옆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대야의 물에 천을 적셔 그 아랫도리를 정
성스레 닦았다. 그리고 엉덩이 사이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조홍의
입에서 기분 좋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것이 양아버지와 양자
사이인 조홍과 조비홍 관계의 정체였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조비홍이 일어나 침상을 내려왔다. 방금까
지 뼈가 녹을 듯한 신음을 흘리던 그 입은 이제 완전히 닫혀있고,
눈 가에는 어두운 그늘이 깔려 있었다. 조홍으로부터 등을 돌린 그
얼굴에는 상심의 그늘이 덮여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홍을 위한
두 번째 향연이 벌어질 차례, 그 준비를 하는 것 또한 그의 몫이었
다.
"서로 안아라."
조비홍의 명령이었다. 소녀와 소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명을 따
랐다.
"서로 비벼라. 부드럽게 쓰다듬고, 가볍게 입을 맞추는 것이다.
서로의 입에 말고, 서로의 살결에만…."
소년과 소녀에게 거부할 권리란 없었다. 그들은 시키는대로 했다.
처음엔 부끄러워 머쓱거리던 두 사람이 주춤주춤 명을 따르자 조비
홍은 공작새 깃털을 꺼내어 두 사람의 피부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간지러움과 성욕은 그 근본이 다른 것이지만 비슷한 중추에서 작용
하는 것, 소년과 소녀는 처음에는 간지러움 때문에, 그다음에는 간
지러움의 뒤에서 고개를 들고 올라오는 미묘한 느낌 때문에 당황해
했다. 붉어진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다. 어느새 그들 둘의 피부에 돋
았던 소름은 사라졌다. 뜨겁고 매끄러운 피부가 뱀처럼 감겨지고 있
을 뿐이었다.
조비홍은 문쪽으로 돌아서 소년과 소녀를 한꺼번에 감싸 안았다.
조홍이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시야를 비켜준 것이다. 그의 손은 소년
과 소녀의 등골을 훑고 내려와 작은 엉덩이 사이로 사라졌다. 소년
과 소녀의 입에서 동시에 작은 비명과 같은 소리가 퍼져나왔다.
"쉿! 조용히!"
소년과 소녀의 입이 그 한 마디로 닫혀졌다. 그러나 엉덩이에서부
터 느껴지는 저 끈적한 느낌은 달리 해소할 방법이 없었다. 소년과
소녀는 애써 입술을 깨물어 참으려 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간헐적인
비명을 토하고, 몸을 꼬았다. 인체에는 욕정을 자극하는 급소도 있
고, 조비홍은 그곳을 잘 알고 있었다. 소년과 소녀는 교접은 하지
않았지만 그보다 몇 배나 더한 자극을 받으며 점차 주변을 잊어가고
있었다.
한 몸의 양 손으로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다 하고있는 조비홍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단순히 애무하는 것이 아니라 옥로진기의
구결에 의거해서 소년소녀의 정(精)을 끌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조홍이 손을 내 밀었다. 조비홍은
소년과 소녀를 부드럽게 유도해서 조홍의 손이 닿는 곳까지 움직였
다. 조홍의 손이 앞으로 뻗었다. 그 손에는 새끼 손가락 말고는 손
톱이 없었다. 다른 손가락의 손톱들은 가짜였던 것이다. 그것도 지
금 이 향연을 위해서 기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손톱이 길게 자라있는 상태로는 어린 소녀와 소년의 정을 빨아들이
기 어려울 것이다.
조비홍의 손이 소년 소녀의 엉덩이에서 빠져나갓다. 대신 조홍의
손이 앞에서부터 진입해 들어갔다. 소년과 소녀의 입에서 동시에 비
명이 터져 나왔다. 아까의 그것처럼 열락에 들뜬 것이 아니라 갑자
기 가해진 고통에 반응한 비명이었다.
"아악-!"
조홍의 손길은 조비홍의 그것처럼 부드럽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거칠고 난폭했다. 그의 손은 소년과 소녀의
성기를 바로 움켜쥐었다. 소년과 소녀는 고통에서 벗어나려 몸을 비
틀었다. 그러나 조홍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먹이
를 문 늑대처럼 안광을 쏟아내며 소년과 소녀의 성기를 잔인하게 비
틀었다. 늑대가 살점을 물어 뜯듯이, 걸레를 쥐어 짜듯이 잔인하게,
탐욕스럽게. 소년과 소녀는 경련을 일으키며 그의 손에 매달렸다.
그들의 안색은 흙빛으로, 다음 순간에는 하얗게 바래졌다. 단지 고
통때문만이 아니라 조홍의 손으로 정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소년과 소녀는 마치 거죽만 남은 주머니 같
이 흐물흐물해져서 조홍의 손에 매달려 있었다. 조홍은 그 주머니들
을 털어버리고는 운공에 들어갔다. 그 입가에는 포식을 한 맹수의
그것처럼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조비홍은 옷을 다시 차려입고
방 한쪽 구석에서 상자를 꺼내 소년과 소녀의 잔해(殘骸)를 쓸어 넣
었다. 오늘밤 이곳을 물러날 때 가지고 가서 처리해야 할 상자였다.
그렇게 대충 정리를 하고 조비홍은 의자에 걸터 앉아 운공중인 조홍
을 바라보았다. 조홍의 몸은 안개에 가려진 듯 빛에 가려져 있었다.
몸 전체에서 은은한 옥빛 광채가 뿜어져 나오고 있고, 코로부터는
하얀 김이 뿜어졌다가 들어갔다가 하고 있었다. 옥로진기 십이 성의
성취를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의 운공 모습이었다. 이런 식으로 한
달에 둘씩 소년 소녀를 희생시키면서 몇 년은 더 수련을 해야 십이
성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조홍은 이십대 청
년, 어쩌면 열일곱 소년의 모습을 찾게될지도 모른다. 지금도 육십
의 나이에 사십대 장년의 용모를 유지하고 있어서 황제를 배알하러
갈 때는 일부러 회색칠을 해서 노티를 강조하고 있는데, 그때는 면
구라도 써서 변장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무엇보다도 그때는 십대고
수의 최정점에 서게 될 것이라고 조홍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조비홍은 문득 조홍이 태청강기를 수련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다
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그에게도 비밀인 것일까? 아니면 젊어서부
터 익혀온 옥로진기에 더 주안점을 두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었
다. 조홍에게는 비밀이 많고, 그 비밀에 접근하는 자는 살아남지 못
했다.
한 시진이 지나서야 조홍은 눈을 떴다. 그리고 조비홍을 향해 손
을 뻗었다. 조비홍은 그 손에 가서 안겼다. 두 사람은 침상에 올라
다정한 부부가 정사 후의 여운을 즐기듯 그렇게 누워 있었다.
"환관은 정상적인 사람을 사랑해선 안되는거다."
조비홍은 등골로 소름이 스치는 것을 느낄 정도로 놀랐다. 조홍은
그런 그의 목을 새끼손가락 손톱으로 가만히 긁었다. 조비홍의 목에
붉은 선혈이 비쳤다. 조홍이 마음만 먹는다면 방금 한 방법으로 조
비홍의 목을 자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방금은 단순히 애무에
불과했다.조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내게만 정절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네가 나 몰
래 소년들을 탐하고 있음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조비홍은 마른 입술에 침을 축이며 말했다.
"제발, 용서를…!"
조홍은 그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흔들었다.
"책망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야. 단지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즐기되 빠지지 말라는 얘기다.
특히 용유진이라는 아이에게는…."
조비홍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도대체 조홍이 어째서 그 아이를
알고 있을까. 조비홍이 다시 말했다.
"돌아가는 대로 처치하겠어요."
"처치할 수 있을까? 내가 알기로 너는 그 아이에게는 특별히 대하
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아이를 사랑하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대부를 위해서라면 누구든지 죽일 수 있어요."
조홍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아이를 죽일 필요는 없다. 지금처
럼, 더 깊어지지만 말고 그 아이를 지켜 보면 된다. 나중에, 나중에
내가 명령을 내리면 그때 죽이면 되는거야."
"알겠어요."
조비홍은 얼음굴에 빠졌다가 겨우 벗어난 것처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계속된 조홍의 말에 다시 긴장을 해야 했
다.
"거기 요즘 불순한 세력이 있다는데 들은 적 없느냐?"
"강복사에요? 그럴 리가…?"
"아냐, 거기엔 우리 동창의 힘 중 절반 이상이 모여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내게 대한 저항세력이 힘을 키울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
지."
"그런 세력이 있겠어요? 저항세력이 나오려면 중심이 있어야 할텐
데, 그런 인물이…?"
"거기 첩형을 너무 오랫동안 그냥 뒀어. 슬슬 갈 때도 됐지."
"그 두 분은 대부의 수족같은 분들이잖아요?"
"역대의 모든 권력은 수족에 의해 꺾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게
다. 나는 그들을 믿지만 또한 그들을 알고 있어. 힘을 주면 사용할
곳을 찾는 자들이지. 그래서 네게 그중 한 자리를 주겠다."
조비홍은 벌떡 일어나 절을 했다.
"대부께 감사드립니다."
조홍은 손을 내밀어 조비홍의 얼굴을 움켜쥐고 빙긋이 웃었다.
"나는 지금 동수보(董首輔)의 문제로 바빠 거기까지 신경을 쓸 틈
이 없다. 강복사의 일은 네게 맡길테니 믿음을 배신치 마라."
동수보란 내각수보(內閣首輔) 동습(董習)을 말하는 것이었다. 명
나라 조정에서 제독태감의 위치를 위협하는 존재는 대신의 우두머리
격인 내각수보밖에 없었다. 역대의 내각수보가 항상 그랬지만 지금
의 내각수보 동습도 환관에 대한 인상은 좋지 않았다. 아니, 틈만
나면 황제에게 고해 환관에게 몰린 권력을 빼앗으려고 들었다. 그
문제를 처리하는 데에 무공은 소용이 없었다. 암살을 하려고 들면
못 할 것도 없겠지만 그런 시끄러운 방법보다는 다른 방법을 쓰는
것이 낫다고 조홍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에는 정치로 맞서야
한다는 것이 조홍의 평소 지론이었다.
조비홍은 그가 첩형으로 올라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곰곰
히 생각했다. 조홍은 아마도 그를 첩형으로 삼아 자신의 기반을 든
든히 해놓고 다른 것에 집중을 하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그 다른 것
이 단지 내각수보를 상대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조홍의 야망은 권력을 유지하는 것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용유진은 왜 언급한 것일까?'
조홍이 용유진을 알고 있다는 것, 특히 그에게 경고를 할 정도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아프다던데…!'
용유진이 군주의 호위에게 맞아서 누워있다는 보고를 새삼 떠올려
보는 조비홍이었다.
***
용유진은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고 있었다. 권정에게 제대로 얻어
맞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 상처라면 조홍이 진맥한 대로 죽지는
않을 정도의 것이었다. 그러나 조홍이 미처 보지 못한 것, 권정의
타격이 원인이 되어 발동한 상세에 의해 그는 지금 저승문턱을 밟고
있었다. 단단히 뭉쳐져서 명치를 누르고 있던 월인이 권정의 타격으
로 촉발되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용유진의 몸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코 끝에 솜털을 가져
다 대어도 흔들리지 않게 숨이 멎었고, 어디를 만져봐도 기의 흐름
이 느껴지지 않았다. 의원은 이미 돌아간 상태고 석소봉도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용유진의 이 '죽음'은 아무에게도 알려
지지 않았다. 완전한 공백의 상태에서 용유진은 한 구 시체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그것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월인이었다.
월인은 우선 그 자신의 냉기를 발산해서 용유진을 시체로 만들어
놓고 완전한 기의 공백 상태를 이룬 용유진의 몸을 확인하고야 스스
로의 기를 풀었다. 그것은 마치 그릇에 담긴 맑은 물에 피 한 방울
을 떨어뜨리는 것과 비슷했다. 단, 지금 월인이 떨어뜨린 그 피 한
방울은 보통의 피가 아니었다. 단 한 방울로도 용유진을 붉게 물들
일 수 있는 강한 것이었다. 그런데 월인이 떨어뜨린 피는 한 방울도
아니고 한 대야였던 것이다.
두 번째 부작용이 생겼다. 용유진은 온 몸을 새빨갛게 물들인채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돼지의 방광에 밀대를 꽂고 바람을 불어넣
었을 때 부풀어 오르듯 그렇게 용유진은 손발의 구분만 겨우 될 정
도로 부풀었다. 월인의 제어되지 않은 힘이 용유진의 몸 속에서 폭
주함으로써 그런 모습이 빚어진 것이다. 다행히 용유진의 몸은 그동
안의 고련으로 충분히 질겨지고, 단단해 졌다. 정확히 말해서 어지
간한 기를 소화하고도 남음이 있는 체질이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그의 몸은 터질 듯 부풀어 오르면서도 터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내부의 깊은 곳에서 월인의 힘에 대항하는 두 줄기 힘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옥로진기와 태청강기였다.
싸늘하게 식은 용유진의 몸이 점차 따뜻해졌다. 멈추었던 숨결이
되살아났다. 옥로진기와 태청강기는 월인에게 정복당한 용유진의 신
체를 조금씩 탈환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 세 줄기 힘이
맞부딪혔다. 용유진의 몸은 붉은 색으로 부풀어 올랐다가 하얗게 오
무라들고, 다시 푸른 빛을 발산하며 정상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피부가 터져 나갔다가 새 살이 돋고, 빠졌던 손톱이 다시 자라났다.
머리카락이 우수수 빠졌다가 그림자 늘어나듯 눈에 보이게 자랐다.
이른바 환골탈태(換骨奪胎)가 이 순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옥로진기와 태청강기, 월인의 기가 섞여 기맥을 흐르고, 그 기맥
의 끝에 채 풀어지지 않은 월인의 기가 다시 칼날로 바뀌어 실렸다.
그 달빛 칼날의 끝에 임독양맥이 종잇장처럼 찢겨지고, 터졌다. 새
로 생긴 길로 세줄기 힘은 노도를 이루어 흘렀다. 용유진의 몸은 내
부에서부터의 격랑에 휘말려 펄떡거리며 뛰어올랐다. 부어오를 때
이미 옷은 찢겨져 나갔기 때문에 원치 않고도 벌거벗은 모양이 된
용유진의 몸에서 혈맥이 튀어 올랐다가 가라앉고 근육이 부풀어 올
랐다가 다시 수축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꿈결 속인가. 용유진은 강물 위에 떠있는 그 스스로를 발견했다.
강물은 지하의 동굴 같은 곳을 흐르고 있었는데 동굴의 벽은 온통
붉었고, 간혹 멀리서 어슴프레한 빛이 비춰들곤 했다. 용유진은 흐
름에 몸을 맡긴채 잠들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순
간 그는 그가 스스로의 몸 속을 떠다니고 있다는 것, 그리고 몸을
맡긴 강물이 일정한 그림을 그리며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람의 몸을 지도로 그린다면 길이 될법한 경로를 따라 강물이 흐르
고 있었다. 그것도 옥로진기의 운공법을 따라서.
용유진은 왜 옥로진기인가 생각했다. 태청강기의 구결도 알고 있
는데. 그 순간 그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강물은 방향
을 바꾸었다. 태청강기의 운공법대로였다. 용유진은 재미 있다는 생
각을 했다. 그럼 다른 방식으로도 되지 않을까? 다른 방식. 용유진
은 이전에는 분명히 알지 못했던 다른 방식의 흐름이 갑자기 솟아오
르듯 뇌리 속으로 떠오르는 것을 알아차리고 놀랐다. 여태까지의 그
어떤 흐름보다도 거칠고 강한 흐름. 그는 그것이 고루마공이라는 것
을 알았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그냥 떠오르고, 깨달은 것이
다. 고루마공의 원래 이름이 고루천강기( ?天 氣)라는 것도, 고
루천강대법( ?天 大法)이라 불리는 일련의 구결속에 천강수(天
手)니 고루인( ?印)이니 하는 갖가지 수법이 숨어있다는 것도 갑
자기, 번개에 맞은 듯 갑자기 깨달아 버렸다. 그리고 그 모든 지식
이 월인 속에 녹아 있었다는 것, 월인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단
순한 내공도 아니라 강시당 역대 당주의 정신이라는 것도 알아 차렸
다. 월인의 비밀이 풀린 것이다.
용유진은 점차 정신을 차렸다. 스스로의 정신이 스스로의 육체와
스스로의 혈맥, 스스로의 기맥을 보고 있다는 것, 무한히 광대한 정
신의 영역 속에서 한톨 깨알만한 스스로의 육체와 육체에 딸린 그
모든 것을 들여다 보고 있다는 것, 그 자신 육체와 다른 하나의 의
식으로서 스스로의 의식 자체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 비록 깨알만한
육체지만 그 안에 갖추어진 우주를 통해서 외계의 우주를 내다볼 수
있다는 것,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 세계와 그 자신을 투명하
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 밝음 속에서, 그런 명철함
속에서는 그는 옥로와 태청과 고루천강의 세 힘을 원하는대로 움직
이고 드디어 그 세 줄기의 끈을 꼬아 하나의 밧줄로 만들 수 있었
다. 원하는 대로, 정신이 가리키는 곳에로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몸이 그를 부리지 않고 그가 몸을 부리는 경지에로 진입할 수 있었
다.
용유진이 눈을 떴을 때, 그는 여전히 벌거숭이였지만 몸 위에는
비단 이불이 덮여 있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맡에는 그를 위해 눈물
떨구는 작은 소녀가 앉아 있었다. 보령군주였다.
용유진은 눈을 떠 보령군주의 작고 못생긴 얼굴, 좁은 이마를 보
았다. 잿빛 눈 속에 영롱한 눈동자가 살아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포악하고 메마른 성정 속에 순백의 동심이 남아 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손을 내밀어 군주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울지 마세요, 군주마마."
그것이 보령군주의 눈물샘을 터뜨려 놓았다. 보령군주는 그의 가
슴에 코를 박고 펑펑 울어대기 시작했다. 용유진은 단지 그 좁은 어
깨를 다독여 줄 수 있을 뿐이었다.
장왕이 죽은 것은 유달리 눈이 많이 내린 어느 겨울 밤이었다. 일
찍 죽은 어머니 대신 아버지에게 유달리 매달리던 보령군주가 그 최
초의 목격자이고 임종을 지켜본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많던 시종들
과 시녀, 호위병들은 그날 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장왕이
탁자를 뒤집어 엎고 문을 밀어젖힌 다음 정원의 섬돌 위를 굴러 내
려올 때, 일곱 살의 보령군주가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섬돌 위와 정원에 쌓인 백색의 눈위로 붉은 피가
흩어져 번져갈 때, 그날 그 자리에는 장왕과 보령군주 외에는 아무
도 없었다. 그렇게 몸 속의 모든 것을 피로 토하고 뒹굴던 장왕은
지금 보령군주의 입술과 같이 하얗게 말라붙은 입술로 무어라 말하
려고 했다고 했다. 보령군주가 작은 귀를 가져다 대었지만 아무 말
도 못하고 그냥 굳어 버린 그 입술이 그날 듣지 못한 말들, 영원히
들을 기회가 없어진 말들을 지금도 쏟아내고 있는 것 같다고 보령군
주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때 그가 나타났었다. 손톱을 길게 기
른 검은 그림자가 장왕의 시체와 보령군주의 어린 눈 앞에 나타났었
다. 그리고 그는 사라졌다. 장왕의 죽음을 확인하고, 보령군주의 머
리 위로 손을 쳐들었다가 가만히 쓰다듬어 주고는 사라졌었다. 어렸
을 때는 작은 진주라고 불리웠던 군주의 미모가 사라지고 비틀어진
것이 그때부터이고, 긴긴 밤을 뜬눈으로 지세우게 된 것이 그때부터
이고, 최악의 공포와 기억들이 성격을 비틀어지게 만든 것도 그때부
터였다. 그것이 보령군주의 이야기였다.
"죽이려는 마음은 없었어. 정말 미안해."
"저는 괜찮습니다, 군주마마."
"이젠 심통 부리지 않을테니 가지 말고 날 지켜줘."
용유진은 빙그레 웃었다.
"가야 합니다."
"내가 미운거야? 화가 덜 풀렸어?"
"아닙니다, 군주마마. 저는 지금 너무 약하기 때문에 누구도 지켜
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가야 합니다."
"수신팔위에게 가르쳐 주라고 할게."
"아뇨, 제가 배울 곳은 따로 있어요."
군주는 풀이 죽어 눈물만 떨구었다. 용유진은 다시 그 눈물을 훔
쳐 주었다.
"언젠가 돌아와 군주마마를 도와드리겠습니다."
군주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한 거지?"
"물론이지요."
"그럼 기다릴께."
창문틈으로 스며든 햇살이 두 사람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 햇살이
붉은 빛을 띠며 스러져 갈 때, 용유진은 강복사 선무청 조비홍의 방
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