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발 쓰는 법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석소봉으로서는 생명의 은인에
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이었다. 동창 선위대 천지현황의 네 조장중
에서 보법과 경신술에 있어서는 최고로 치는 인물이 바로 그였던 것
이다. 동창 전체를 따져봐도 일급 당두 중 적중산과 천옥낭 정도에
게나 약간 밀릴 정도의 실력자였다. 그런 석소봉이 용유진에게 처음
가르쳐 준 것은 일선보(一線步)였다.
"일직선으로 걷는 법부터 배우라는 거다."
석소봉은 마당에 선 하나를 그어놓고 용유진에게 밤새도록 그 선
을 따라 걷도록 시켰다. 그리고 숙달이 될 때까지 모든 걸음을 그렇
게 하도록 지시했다.
"모든 공격은 직선으로 행해지는 것이 가장 위력이 강한거다. 최
단거리, 최단시간 내에 적에게 접근하면서 빵! 한 방을 때리는거
지."
용유진은 그 말을 수긍했다. 권정이라는 소녀가 그를 공격할 때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수련 다음날 다시 군주에게 갔다가
권정에게 한 번 얻어맞고 기어서 돌아온 다음에는 불만이 없을 수가
없었다.
"같이 직선으로 공격했는데 왜 저는 빗나가고 그녀는 성공한 겁니
까?"
석소봉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루 연습한 놈하고 몇 년 연습한 년하고 같겠느냐? 설혹 네가
무공의 천재라 일선보의 오의(奧義)를 체득했다고 해도 공격력이 차
이가 나는데 어떻게 맞상대를 하겠느냐. 정면으로 부딪혀서 상대가
되려면 너도 공격력을 갖춰야 해."
그래서 용유진은 일선보와 더불어 권법의 수련도 하게 되었다. 석
소봉이 권법의 달인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보다는 아는 게 많았던 것
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연전연패, 권정에게 얻어맞고 돌아오기만
했다.
"공격력이 비슷해지려면 몇 년 걸리겠는걸요."
용유진은 맞아서 멍든 눈 언저리를 물에 적신 천으로 닦으면서 그
렇게 이의를 제기했다. 석소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걸려도 해야지. 달리 방법이 없잖아?"
"제 생각엔 말이죠. 창을 들고 달려오는 상대를 꼭 창으로 대응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는 겁니다. 가령 옆으로 살짝 피해서 칼로 친
다. 이런건 어떨까요?"
석소봉은 용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두들겼다.
"벌써 꾀가 나는거냐? 하는 수 없군. 네 말대로 하는 방법을 가르
쳐 주지. 그렇게 해선 안된다는 걸 보여주려는 거다. 몸으로 체득하
지않으면 납득을 못할 것 같아서."
용유진은 미소 했다.
"제 방식이 원래 그겁니다. 몸으로 배우는 거죠."
석소봉이 가르쳐준 두 번째 보법은 양의보(兩儀步)였다. 이름이야
거창하지만 사실 좌우로 움직이는 법이었다. 일선보가 세로로 움직
이기라면 양의보는 가로로 움직이는 법인 셈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
도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일선보로 할 때보다 더 많이 얻어맞았다.
"일선보나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석소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번엔 삼재보(三才步)를 익히자."
"일이삼(一二三)으로 나간다…. 재미 있군요. 몇번까지 하는겁니
까?"
농담 삼아 던진 질문인데 석소봉은 의외로 진지하게 대답했다.
"사상(四象), 오행(五行), 육합(六合), 칠성(七星)에 팔괘(八卦),
마지막으로 구궁보(九宮步)다. 거기까지 익히면 더 배울 보법은 없
어. 여타의 다른 것은 다 이 아홉 가지에서 변형된 것이다. 숫자가
더 나간다고 좋을 것도 없지. 결국엔 일선보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정도다."
"아예 일선보만 하면요?"
"도(道)라는 것이 원래 돌아오는 것이다.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에로 나갔다가 다시 단순한 곳으로 돌아오는데, 처음의 단순함과
나중의 단순함은 다른 것이라는 말이지. 역시 그 경지에 다다라야
이해가 갈거다. 그리고 네 일선보는 이미 훌륭해. 믿어지지 않지만
너는 꽤 소질이 있는 놈이다."
그 소질이 있는 놈은 그날 이후로도 매일 두들겨 맞고 돌아왔다.
날이 갈수록 두들겨 맞는 횟수도 늘었는데, 그건 묘하게도 잘 피하
기 때문에 작게 여러번 맞아서 그런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보법과
경신술, 권법까지 배우면서 두달이 지나갔다. 처음 온 날로부터 계
산하면 석달이 가까워 진 것이다. 지장전으로 돌아갈 날짜가 얼마
남지 않은 용유진은 매우 초조함을 느끼게 되었다. 내공 면에서도
그날 이후로는 별 진보가 없었고, 매일 두들겨 맞기만 하다가 돌아
간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번은 이겨보고 싶다는 것이 그
의 바램이었다.
"군주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그날 이후 군주는 자객놀이는 하지 않지만 대신 그가 맞는 것을
보며 즐기는 것이 일과가 된 모양이었다. 특히 그가 얻어맞고 뻗으
면 손뼉을 치며 좋아하면서 온갖 악랄한 말들을 쏟아놓는데, 용유진
을 보지 못하는 동안 열심히 공부라도 해서 외워 두는지 하루도 같
은 말을 한 적이 없었고, 또 한 마디 욕설도 독랄하지 않은 것이 없
었다. 그러려니 하면서도 듣다보면 모멸감과 수치에 머리꼭대기까지
열이 뻗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또 그것을 보고 좋아하는 것
이 군주였다. 그러니 오늘 다른 사람은 몰라도 권정이라는 소녀만은
이기고 싶었다. 끝까지 당하는 모습만 보여줘서 군주를 즐겁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실력으로는 권정을 이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용유진은 골머리를 싸매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조비홍의 말대
로 한 가지만 열심히 연습해서 경지에 오르고, 그때 정면으로 부딪
혀서 이기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해결책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기다릴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렇다면 변화가 많은 초식을 사
용해서 허를 찔러야 했다. 이를테면 취타십팔방 같은 것을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용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쓰기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지만 취타십팔방은 절대로 써서는 안되는 초식이었다. 있으나
마나인 셈이다. 문득 용유진은 그렇게 있어도 쓰지 않고있는 초식이
몇 개 더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괜찮을지도…. 아니, 어쩌면 더 위험할지도…, 하지만 이
걸 알아보는 사람은 없을테니…."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태청수단진결에 수록되어 있던 몇 가지
초식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태청복마곤룡장권(太淸伏魔困龍掌拳)
이었다.
일반적으로 권법과 장법은 주먹과 손바닥의 차이처럼 구분되는 것
이지만 고도의 무공으로 올라갈수록 잘 구분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
었다. 무당 태극권(太極拳)은 권법이지만 그 안에는 손바닥을 사용
하는 수가 적지 않게 있고, 소림 위타복마장(韋陀伏魔掌)은 장법이
지만 주먹과 발을 사용하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또 한편으로 권법
은 직접 두들기고 치는 외가편향(外家偏向)의 무공이요, 장법은 허
공을 격하고, 혹은 직접 닿아도 발경(發勁)으로 적을 상하게 하는
내가지향(內家志向)의 무공으로 인식되지만 역시 고도의 단계에 이
르면 내가권(內家拳)과 외가장(外家掌)이 불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태청복마곤룡장권이라는 것도 그래서 장권의 특징을 공유하고 있는
데, 태청강기를 효과적으로 손발에 실어 보내게 하기위한 무공이라
그랬다. 취타십팔방 또한 기본은 금나술이지만 밀고 때리는 수법이
포함되어 있으니 권법이 아니라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용유진의 생각은 태청복마곤룡장권을 다른 것에 섞어서 사용하면
사람들이 모르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섞어서 사용하는
권법은 삼황포추(三皇暑椎)를 선택했다. 삼황포추는 표사들이 일반
적으로 사용하는 권법. 적을 타격하는 데에도 쓸모가 있겠지만 그보
다는 위협을 하고 신위를 뽐내는 데 쓰는 것이라 동작이 크고 화려
하며 경쾌했다. 이 특징을 태청복마곤룡장권에 접목시키려는 것이었
다.
아직 권각술의 경지에 다다르지 않은 용유진이 그렇게 태생이 다
른 두 가지 무공을 섞어 사용한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행위일 수
도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삼황포추도 길게 내뻗고 후려치는 권법이라 거기에 태청강기를 실어
보내기 적당한 것이었고, 태청복마곤룡장권은 취타십팔방과 달리 알
려지지 않은 권법이니 제대로 감추지 못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그런 계산 끝에 용유진은 기억에만 담아두었던
태청복마곤룡장권을 끄집어내어 그 동작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기 시
작했다.
석달의 기한이 채워지는 날, 용유진은 군주 앞에 다시 나갔다. 그
리고 길게 읍하고 말했다.
"그동안 능력도 없는 소인을 호위로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소인
은 이제 능력이 부족함을 절감하고 물러가오나, 군주마마의 성덕은
내내 잊지 못할 것이옵니다. 남아있는 분들이 군주마마를 잘 보필해
드릴 것으로 믿고…."
보령군주는 무슨 소린가 어리둥절해 있다가 손을 저어 용유진의
입을 막고 물었다.
"그러니까 이제 다른 곳으로 간다 이 말이냐?"
"소인은 수련이 부족하와 다시 수련을 받으러…."
군주는 짜증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수련이야 여기서 받아도 되는 것 아니냐. 누구 마음대로 왔다 갔
다 한다는 거야. 너는, 기름에 튀겨 죽일 능력없는 호위병 네 놈은
내가 가라고 할 때까진 아무데로도 못 간단 말이야!"
용유진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찢어죽이고 기름에 튀겨 죽일 놈을
왜 안보낸단 말인가. 눈앞에서 사라져 주면 될 것 아닌가. 그러나
입으로는 온건하게 말했다.
"상부의 명이 있으니 소인도 어찌할 도리가 없군요. 그저 군주마
마께오서는 내내 평안하시기를…."
"상부, 상부 하는데 도대체 그 찢어죽일 상부란 어느 놈을 말하는
것이냐. 내가 황제폐하께 말씀드려서 널 계속 여기 있도록 못하나
보자."
그때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가늘면서도 이상하게 힘이 있
는 목소리였다.
"군주마마께서 원하시면 그리 되는 것이지 황제폐하의 심기까지
어지럽혀 드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목소리의 주인은 이제 막 정원으로 들어서고 있는 몇 명의 사람들
틈에서 나왔다. 황궁 안에서까지 칼을 차고 있는 동창의 위사 몇
명, 그리고 그들 동창 위사들의 가운데에 에워싸이듯 서서 걷고 있
는 환관 한 명이었다. 문제의 말은 환관이 한 듯 다시 같은 목소리
가 그의 입에서 나왔다.
"우리 아이가 군주마마의 애호를 받게 되었으니 저로서도 기쁘기
한량 없는 일인데 어찌 군주마마 전에서 떼어놓겠습니까. 그냥 여기
있도록 하지요."
목소리에는 힘이 있고, 얼굴가죽도 팽팽해서 갖 마흔을 넘은 듯해
보이는 환관이었다. 그러나 화장을 노티 나게 해서 정확한 연령을
짐작할 수 없었다. 석소봉이 용유진의 머리를 잡아 눌러 인사를 하
게 하면서 그 자신도 무릎을 땅에 대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삼급 당두 석소봉, 제독(提督)께 문안 드립니다."
용유진도 사태를 깨닫고 재빨리 따라했다.
"번역 용유진, 제독께 문안 드립니다."
제독태감 조홍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가늘고 흰 손을 들어올려
새끼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게 소위 인사를 받는다고 한 행동이었는
데 붉게 칠한 긴 손톱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충분히 오만하고,
충분히 위엄 넘치는 행위였다.
"그래 석당두, 얼마전에 독에 당했다면서. 지금은 괜찮은가?"
그리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용유진을 향해 물었다.
"네 이야기는 들었지. 네가 독을 뱉었다면서?"
용유진은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그러하옵니다."
조홍은 혀를 찼다.
"무얼 잘못 먹었던 모양이구나. 바빠서 바로 오지는 못하였지만
지금이라도 잔독(殘毒)이 있는지 봐주마. 팔을 내밀어라."
누구 명이라고 거절할 것인가. 용유진은 팔을 내밀었다. 거기 채
워진 검은 팔찌가 시선을 끌었다. 그러나 조홍은 그것을 본척만척하
며 두 손가락으로 혈맥을 짚었다. 용유진은 그 사이에 곁눈으로 조
홍을 살펴 보았다. 큰 눈과 똑바른 콧대, 젊었을 때는 미남 소리를
들었을 수도 있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용유진이 확인하고자 하는 것
은 그게 아니었다. 일년 전 본 적이 있는 상관대부의 얼굴을 조홍에
게서 확인하려 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실패였다. 전에 보았던 얼굴
은 희미한 불빛 아래에 잠시 나타났던 것이었고, 수염으로 온 얼굴
을 덮다시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얼굴과는 비교하기 어려웠
다.
'흑오를 보고도 못본 척 하는게 오히려 수상해.'
용유진은 사부의 말을 믿기로 했다. 한 달이나 지난 지금 잔독이
있는지 여부를 살펴보겠다는 것도 수상했다. 오히려 그는 지금 용유
진의 몸속에 있는 월인의 존재를 검사해 보려는 것이 아닐까? 용유
진은 겁이 덜컹 났다. 고수가 되면 기를 흘려보냄으로써 상대방이
익힌 기의 종류와 성취 정도까지 알 수 있다고 하는데 그가 옥로진
기와 태청강기를 익힌 사실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용유진은 신경을 집중해서 조홍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느끼려 노
력했다. 과연 조홍의 손가락 끝에서 미미한 기가 나와 그의 혈맥을
염탐하듯 돌아 다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상한 것은 그 기가
낯설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에게 극히 익숙한 느낌이
었다. 용유진은 살짝 인상을 썼다. 아주 이상한 추측이 그의 뇌리를
때리고 있었다.
"왜? 아픈가?"
조홍이 물었다. 용유진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조홍은 무표정하게, 무감동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나 그 말이 용
유진의 심기를 뒤흔들어 놓았다.
"옥로진기를 익혔군."
용유진은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예. 그렇습니다만…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냥 알지."
조홍은 다시 물었다.
"비홍이 가르쳐 주더냐?"
이번에도 용유진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그리고 다시 반사적인
대답이 나왔다.
"예."
순간적이지만 속여선 불리하다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 어쩌면 이
음흉한 환관은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단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가 문제였을 뿐이었다. 만약 허신과 그의 관계까지 알고
있다면 일은 매우 어렵게 될 것이다. 어쩌면 혈맥을 제압한 지금 상
태에서 그를 죽일지도 몰랐다. 용유진의 등 뒤로 식은 땀이 흘렀다.
조홍은 그런 그를 여전히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식은 땀을 흘리는군. 요즘 몸이 안 좋은 모양이지?"
"예, 좀 그렇습니다."
"옥로진기는 아직 육 단계에 불과하고…."
옥로진기의 십이 단계 중에서 육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알
아차린 모양이었다. 사실은 구단계까지 진행되다가 막히는 바람에
육 단계로 후퇴했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용유진의 눈에
희망의 빛이 스쳤다.
"예, 자질이 부족하여."
"익힌지 일 년 만에 육 단계면 자질은 넘친다고 할 수 있겠지. 단
지 오의를 깨닫지 못하여 더 이상 진보하지 않는 것 뿐이야. 하여간
…."
조홍은 용유진의 팔뚝을 놓고 물러났다.
"잔독은 없는 것같군."
그는 보령군주를 보며 묘한 미소를 흘렸다.
"이 애를 데리고 여러모로 재미 있는 놀이를 하셨다구요?"
보령군주는 그를 두려워 하는 듯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있다가
간신히 입을 열어 대꾸했다. 그러나 그렇게 기가 질린 상태에서도
말은 여전히 표독스러웠다.
"댁의 수하들은 쓸모가 없어 그리 재미 있게 놀지도 못했지."
"저런…."
조홍은 미안하다는 듯, 아니라는 듯 애매하게 손을 흔들었다.
"제 수하들이 무능하기 보다는 군주마마의 시비들이 워낙 강한 것
이겠지요."
"아냐, 댁의 수하들이 무능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 증거를 보여주
지. 권정!"
권정, 손에 권갑을 낀 소녀가 나섰다. 군주는 그녀를 향해 명령했
다.
"오늘은 사정을 봐주지 말고 해. 그냥 때려죽여 버려! 꼭!"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권정이 용유진을 향해 걸어왔다. 용유진은 고소를 지으며 군주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군주는 냉랭한 코웃음과 함꼐 고개를 돌려버렸
다. 왜 화가 났을까. 용유진은 그와 조홍이 겉보기로는 매우 친근해
보인 것이 원인이 아닐까 추측했다. 하여간 문제는 권정이 오늘 그
를 때려죽이겠다는 각오로 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용유진은 석소봉을 보았다. 석소봉은 조홍을 보았다. 조홍이 고개
를 끄덕였다. 석소봉이 용유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낮게 속
삭였다.
"죽진 마라."
용유진은 씩 웃었다.
"오늘은 한 번 이길 겁니다."
석소봉이 이맛살을 꾸겼지만 용유진은 이미 권정을 맞아 나서고
있었다.
오늘 권정의 자세는 그동안 보여준 것과는 달랐다. 그동안은 전형
적인 소림권 그대로 용유진을 향해 비스듬히 서서 일직선으로 공격
하려는 자세였었다. 그런 자세에서 빠르면서도 직선적인, 그리고 파
괴적인 공격이 가해졌던 것인데 오늘은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었다.
훨씬 덜 공격적인 자세인데 풍기는 기도는 삼엄하기 짝이 없었다.
손도 주먹을 쥔 것이 아니라 약간 펴서 마치 장법을 쓰려는 듯이 보
였다.
용유진도 오늘은 평소와 다른 자세를 잡았다. 그동안은 발로 구궁
(九宮)을 밟고 손은 가슴을 보호하는 자세에서 시작했었다. 권정의
공격에 맞추어 다양하게 반응하려는 자세였다. 그러나 오늘은 오히
려 그가 예전의 권정처럼 모로 서서 비스듬히 권정을 바라보며 한
손은 펴고 다른 손은 주먹을 쥐었다.
"묘한 자세를 잡았군. 저 아이는 소림권도 배웠나?"
조홍이 묻고 있었다. 석소봉은 얼른 대답했다.
"몇 수 가르쳐 주긴 했지만 그중에 저런 자세는 없었습니다."
"무엇을 가르쳐 주었는지 말해보게."
석소봉이 재빨리 수십 가지의 이름을 대었다. 그가 여태 용유진에
게 가르쳐준 무공의 이름이었다. 조홍은 가볍게 혀를 찼다.
"애를 망쳤군. 뼈대가 굳기도 전에 너무 많은 걸 가르쳐 줬어. 배
우긴 잘 배우던가?"
"예. 녀석은…."
"다른 교두들이 말하던대로 무공의 천재더라 이건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오늘 자칫하면 크게 다치겠는걸? 그 무공의 천재가 말이
야."
석소봉은 표정을 굳히며 싸움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
게 경호성을 터뜨렸다.
"백보신권(百步神拳)!"
권정은 손을 묘하게 교차하며 허공에 원을 그리는 듯하더니 허리
께에서부터 주먹을 뻗었다. 두 사람의 거리는 오척, 아무리 손을 뻗
어도 닿을 수 없는 거리인데 주먹이 허공을 격하고 멈추는 순간 소
리없는 경력(勁力)이 허공을 갈랐다.
따당-!
종이 여러 장을 뭉쳐 손바닥을 때리는 것같은 소리가 용유진의 어
깨에서 터져나왔다. 용유진이 어리둥절 해 하고 있는 사이 그의 어
깨를 감싼 옷이 찢겨져 날렸다. 어깨에서는 피부가 터져 피까지 비
치고 있었다. 권정은 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일종의 경고였다.
죽기 싫으면 항복하라는 것이었다.
"죽여! 죽여버리라니까!"
군주가 포악을 떨고 있었다. 용유진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보령군주는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어가며 흥분했다.
"저봐! 사정을 봐주니까 시건방을 떨고 있잖아! 얼른 때려죽여버
려!"
권정이 다시 자세를 취했다. 손을 흔들고 주먹을 뻗었다. 소리없
는 경력이 다시 허공을 갈랐다. 용유진은 앞으로 뻗은 손바닥을 크
게 들어올렸다가 도끼로 장작 패듯이 허공을 후려갈겼다. 오척의 공
간 안에서 권정의 주먹과 용유진의 손바닥이 스치고 지나갔다. 닿지
도 않았는데 얼음장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용유진은 안
색이 창백해져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답답한 듯 기침을 했다. 그
기침 끝에 피가 섞였다. 그러나 표정은 밝았다. 권정은 뒤로 물러서
지는 않았지만 소매자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 옷자락이
갈려져서 너덜거리고 있었다. 용유진은 오늘 처음으로 장풍(掌風)이
라는 것을 사용한 것이다.
조홍이 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묘하군. 묘해. 저건 도대체 어디서 나온 장법이냐?"
뒤에 서있던 동창의 위사 중 하나가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옥로진기 아닙니까."
"바탕이 되는 기운이야 옥로진기의 그것이지만, 내가 모르겠다는
것은 저 형식이란 말이다. 소림권 같기도하고 무당권 같기도 하지만
양쪽 그 어느 것과도 다른 저 장법."
먼저 말했던 위사는 일급 당두 중 하나인 독지금강(毒指金剛) 노
륜(盧綸)이라는 자로 권각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는 인물이었지
만 지금의 질문에는 대답할 말이 없어 얼굴을 붉혔다.
"저도 모르겠군요."
말하는 사이에 권정과 용유진은 다시 네 수를 교환했다. 권정의
백보신권은 마치 총포(銃砲)를 쏴대듯이 연속적으로 경기를 쏴보내
었다. 그에 맞선 용유진은 팔을 크게 휘둘러 거기에서 경기를 일으
키고 있었는데 마치 부채로 바람 부치듯 했다. 그렇게 네 수를 교환
하면서 용유진은 차츰 밀리지 않게 되고 나중에는 권정을 압도할 정
도로 기세가 올라갔다. 다섯 번째의 공격은 용유진이 먼저 했다.
"나도 포(暑; 砲와 동자로도 쓰인다)를 쏠 줄 알지!"
오른 발을 크게 내 디뎌 권정에게 육박해 가면서 용유진이 소리쳤
다. 그의 오른쪽 팔이 앞으로 쭉 뻗었다. 그의 주먹 끝으로부터 무
시무시한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권정은 얼굴이 해쓱해지도록 긴장
해서 양손을 반원형으로 그리며 용유진의 주먹을 맞이 했다. 소림
반선수(般禪手)였다. 폭음이 일었다. 권정은 뒤로 주춤 물러났다가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분노해서 다시 앞으로 달려나왔다. 기공으로
싸우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그녀의 발이 천근의 무게를 담아 용유
진의 정강이를 노렸다. 동시에 손끝은 호랑이의 발톱처럼 구부러져
서 목을 할퀴었다. 항마연환퇴(降魔連環腿)에 소금강산수(小金剛散
手). 본격적으로 소림무공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순식간에 용
유진의 손발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삼황포추는 원래 헛점이 많
은 권법인데다가 변형시킨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이렇게 초식의 정
교함을 무기로 삼아 공격해오면 당할 도리가 없었다. 이리 걷어채이
고 저리 얻어맞으면서 연달아 뒤로 후퇴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형편없군요. 제가 창피할 지경입니다."
노륜이 아까의 창피함을 만회하려는 듯 아는 척을 했다.
"어디서 나온 권법인지 몰라도 저렇게 동작이 커서야 공수를 겸비
할 수 있겠습니까."
조홍은 고개를 저었다.
"권법이야 그렇다 쳐도 저 아이의 동작은 놀랍지 않은가. 저렇게
순간순간 몸을 비틀어서 여자애의 공격을 흘려보내는 것은 결코 그
권법에는 없는 것이겠지? 그러면서도 꾸준히 공격과 방어를 하고 있
지 않은가. 그렇다면 본능적으로 권법을 변형시켜 사용하고 있다는
건데 다른 교두들이 그를 무공의 천재라고 말하는 이유를 이제 알겠
어. 제대로 된 사부만 만난다면… 십 년 안에 일정한 성취를 보이는
것이 무리는 아니겠군. 하지만 이미 늦었어."
조홍은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 사이 권정은 용유진을 마당 끝까지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녀의
손발에서는 소림권의 정화들이 폭죽 터지듯 쏟아져 나와 용유진이
숨도 못 쉬게 만들었다. 하지만 용유진도 마지막 반격의 기회를 노
리고 있었다. 그리고 등이 담에 닿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순
간, 적이 그를 완전히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하고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고 공격을 늦추는 순간 반격을 가했다. 삼재보를 밟아 권정의
공격선에서 살짝 비키고 일선보를 밟으며 권정의 품으로 뛰어들었
다. 손은 이미 앞으로 완전히 뻗어 있었는데 이 순간 반 치쯤 더 길
어진 것처럼 뻗어서 권정의 가슴을 쳤다. 태청장권 중에서도 가장
삼황포추와 비슷한 초식을 쓴 것이다. 권정이 해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용유진은 아차 하는 심정이 되어 급히 손을 당겼다. 이대로 쳤
다간 소녀의 가슴을 만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조홍이 태청강기를 익혔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그
중에 나온 권법을 썼다는 것이었다. 찰나지간에 서너가지의 후회가
뇌리를 스쳐가는데 권정의 주먹이 가까워졌다. 가슴을 만지도록 허
용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권정이 인정사정 없이 그의 가슴팍을 후려
쳤다. 용유진은 피를 뿜으며 날아갔다. 뒷등이 담장에 부딪히자 담
장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권정은 여태 발휘하지 않던 최고의 힘으로
용유진을 공격한 것이다. 그리고 어쩔줄을 몰라했다. 원하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죽이려고 한 건 아닌데…!"
군주가 반쯤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뒤로 넘어갔다. 허약한 탓도 있
지만 방금의 광경으로 보아서는 영낙없이 용유진이 죽을 것같았기
때문이었다.
석소봉과 노륜이 용유진에게 다가갔다. 용유진은 담장을 쌓았던
돌들에 깔려 누워 있었다. 석소봉은 급히 돌을 치우고 용유진의 얼
굴을 들여다 보았다. 용유진이 힘겹게 눈을 떠 그를 바라보며 웃었
다. 무어라 말하는 것같아 석소봉이 귀를 가까이 했다.
"한…번…, 이겼죠?"
"미친 놈!"
석소봉이 가볍게 욕설을 뱉었다.
"입을 벌리지 마라. 기가…!"
빠져나가면 목숨을 단축시키게 된다는 것을 말하려 했는데 이미
늦었다. 용유진은 어디서 힘이 났는지 벌떡 상체를 일으키더니 연속
으로 세 모금의 피를 토하고 다시 쓰러져 버렸다. 석소봉이 급히 그
의 맥을 짚으려는데 다른 손이 대신했다. 조홍이었다. 그는 어느새
다가와 용유진의 가슴과 팔, 목덜미에 손을 대어 진맥을 했다. 고요
한 눈동자에 이채가 흘렀다. 그는 곧 손을 뗴고 물러섰다.
"죽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내공이 초보수준으로 되돌아갔어. 처음부터 다시 수련해야 할 게
다."
문득 생각난 것처럼 그는 석소봉에게 명령했다.
"명문에 진기를 주입해라. 물어볼 것이 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죽지는 않아."
석소봉은 하는 수 없이 시키는대로 했다. 용유진이 다시 눈을 떴
다. 조홍이 물었다.
"방금 쓴 권법의 이름이 뭐냐?"
"삼…황…포…추…."
조홍은 뒤로 돌아보며 물었다.
"누가 삼황포추라는 권법에 대해 알고있나?"
노륜이 다시 나섰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표사들이 그런 이름의 권법을 사용한다고 들었습니다. 보기만 멀
쩡하지 아무 쓸데 없는 권법이라 알려졌는데…."
조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데려가서 치료해 줘라."
그는 다시 군주를 향해 말했다.
"여전히 이 녀석을 데리고 계실 작정이십니까? 그러면 그냥 여기
두지요."
군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용유진이 살았다는 소리를 듣고는
많이 진정이 되었는지 다시 평소의 표독스런 태도로 돌아가 있었다.
"당장 데려가! 더 이상 꼴도 보기 싫어."
그러나 용유진의 몰골을 잠시 쳐다 보더니 곧 마음을 바꿔 말했
다.
"치료할 동안은 있어도 좋아. 하지만 움직일 수 있게 되면 바로
데려가!"
용유진은 석소봉에게 업혀서 숙소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기
공을 완성할 최후의 기회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