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용유진, 조홍을 만나다.
1.
이틀째 되는 날, 용유진은 운기를 해보고 느껴지는 여러 반응들을
곰곰히 생각해 본 결과 옥로진기에 있어서는 일정 경지에 다다랐다
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어제 임독양맥을 타통할 기회를 스스로 던
져 버렸다는 것도 깨달았다. 아쉬운 마음에 다시 운공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직전의 단계에라도 도달한 것을 다행으로 알고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니 무리하지 말 것.
이것도 사부의 가르침 아니었던가.
"향기만 맡았는데도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 문제의 향기가 전부라는 것도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용유진은 엉뚱한 생각을 했다. 향기만 맡아도 임독을 타통할 뻔 했
는데 나머지 약을 한꺼번에 먹으면 그 효과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
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생각했으면 바로 행동에 옮기라'는
공자님 말씀만 생각하고 용유진은 나머지 물건을 거내었다. 환약을
싼 껍질을 벗기자 검은 알맹이가 나왔다. 달콤하면서도 쓴 향기가
코 끝에 맴돌았다. 용유진은 그것을 냉큼 삼켜 버렸다. 이렇게 해서
천하에 몇 개 남지도 않은 소림 대환단(大還丹) 한 알이 사라졌다.
용유진은 이번에는 약 먹고 물 마시듯이 옥병을 입에 대고 그 내용
물을 마셔 버렸다. 천년에 한 방울 고인다는 공청석유(空淸石乳) 한
모금이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맛은 별로 없구나."
용유진은 입맛을 다시며 옥병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배를 움켜쥐고 방안을 뒹굴었다. 거대한 구렁이 두 마리가 뱃속에서
싸움을 벌인 듯 말로 다 할 수 없이 묘한 고통이 뱃속에서 치밀어
올라왔다. 온몸이 뜨거운 열기로 휩싸여 달아올랐다. 용유진은 땀방
울을 뻘뻘 흘리면서 억지로 일어나 가부좌를 취했다. 그것도 쉽지
않았다. 몸이 칡덩굴처럼 비틀리고 있었다. 고문도 당해봤지만 이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이러다 죽겠다!'
용유진은 죽는다는 생각을 하자 그동안 잊고 잇었던 천마호심결을
떠올렸다. 순식간에 온 몸이 싸늘해졌다. 찰나지간에 한 번 구결대
로 운기를 한 것이다.
'효과가 있는 걸?'
그러면서 떠올리는 순간 다시 한 번 운기를 했다. 온몸이 얼음구
덩이에 들어간 듯 싸늘해지고 심장이 답답해 왔다. 아까전 보다 훨
씬 더 강한 고통이 그를 휘감았다.
'아차! 이게 아닌걸?'
천마호심결을 떠올리지 말랬던 사부의 경고가 뇌리를 때렸다. 그
러나 그 순간에 다시 천마호심결은 그의 몸안을 돌았다. 갑자기 온
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아이구!'
용유진은 이것이 바로 천마호심결의 해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한 번 돌았다. 스스로를 볼 수 없어서 용유진은 몰랐지만
지금 그의 온 몸은 시꺼멓게 죽어가고 있었다.
'다른 거, 다른 걸 생각해야!'
그냥 다른 것으로는 안되고 생사판이 알려준 천마호심결보다 강력
한 어떤 것을 생각해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용유진은 몰랐다. 그러
나 다행히 그는 그런 것을 한 가지 알고 있었고, 마침 그것을 기억
했다. 태청강기였다. 바로 얼마 전 그 구결과 그외의 여러 가지 무
공을 외우고 책을 태워버리지 않았던가. 가장 근래에 외운 것이라
이순간 그의 머리에 떠오른 것이었다. 그는 태청강기의 구결을 입속
으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정기신은 인체의 삼보이고, 그 과정은 연기화정, 연정연신, 에
구, 이게 아닌데…. 연정화기, 연기화신, 연신환허로 진행되는 바
….'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구결조차 제대로 외기
가 힘들었다. 용유진의 정신은 차가운 빙굴(氷窟)로 떨어지듯 가물
가물해 졌다. 그때 손바닥으로부터 또 한 줄기의 차가운 기운이 일
어나 그의 뇌리로 바로 치고 올라왔다. 천마호심결의 기운이 단지
차기만 한, 흉폭하고 거친 차가움이라면 지금 일어난 기운은 한줄기
얼음칼처럼 예리하고 맑은 차가움이었다. 용유진의 정신이 순간적으
로 맑아졌다. 그는 차츰 제대로 구결을 외우게 되고, 이내 입정의
경지로 들어갔다. 무의식중에 발동한 월인의 기운이 천마호심결에
대항해 잠시 맑은 정신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래 시작부터가 무모한 일이었다. 그가 생각했으면 바로 행하라
는 말만 기억하고 '과유불급(過猶不及)', '과한 것은 모자람만 못하
다'는 역시 공자님 말씀을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래된 일이었
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지만 그의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를 넘
게 섭취해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약도 좋고, 태청강기라는 희대의
신공을 운기하면서도 그는 결국 생사현관을 타통하지 못하였다. 게
다가 뇌리로 치솟아 올라온 월인이 원래의 장소로 돌아가지 못하고
가슴 한 복판, 명치께에 머물러 진기를 눌러 버렸다. 단번에 반박귀
진을 넘어 삼화취정(三花聚頂), 오기조원(五氣造元)의 경지로 돌입
할 수 있었던 것인데 겨우 보통의 고수 수준에 머무르는, 아니 월인
이 누르고 있는 동안은 그보다도 못한 수준에 머물러 버린 것이다.
그나마 천마호심결의 극악한 기운은 배출 할 수 있는 것이 다행이었
다.
용유진은 입으로 검은 핏물 한 덩이를 토해놓고서야 정신을 차렸
다. 그리고 석소봉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았다. 용유진은 눈을 껌벅
거리며 물었다.
"어떻게 된거죠?"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석소봉은 얼굴에 묻은 몇 방울의 핏물을 닦으며 투덜거렸다.
"열흘이나 간호해 줬더니 얼굴에 핏물을 뱉어? 너처럼 말썽 피우
는 부하는 처음이야. 그리고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용유진은 여전히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제가 열흘이나 누워 있었습니까?"
"아직 제 정신이 아니군. 도대체 며칠동안 잤다고 생각하는 거
냐?"
"전 단지…, 잠깐 눈을 감았다 일어났을 뿐인데요."
그는 정말로 멍청해 졌다. 단지 운기조식 한 번 했을뿐인데 열흘
이 후딱 지나가 버린 것이다. 더구나 그 사이에 여러 사람이 왔다
갔다고 석소봉은 말하고 있었다.
"군주도 왔다 간 건 모르지?"
"군주가 왜요?"
"내가 알게 뭐냐. 와서 한참 들여다 보고갔단 말이지. 약도 내렸
으니 지금 먹어라. 일어나는대로 오라고 했으니 또 가봐야지."
그러고 보니 침상 옆에 대접이며 환약이 이것저것 놓여 있었다.
용유진은 대접을 들었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거, 독약 아닌지 몰라요."
"먹기 싫으면 관두고 얼른 가. 그 군주마마 등살에 내가 치여 죽
겠다."
그의 말대로 군주는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람을 보내어 용유진의 상
세를 물어보곤 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염려되어 그런 것은 아닌
듯했다. 군주는 용유진이 들어서자 눈을 반짝이며 호통부터 치는 것
이다.
"저거, 저놈 또 왔다! 오늘은 누굴 죽이려고 저놈이!"
용유진은 깊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저는 돌팔이 자객이라 제일 죽이기 쉬운 사람조차 죽이지 못합니
다. 군주마마."
"제일 죽이기 쉬운 사람이 누구냐?"
용유진은 스스로 목을 졸라 보였다.
"물론 저 자신이지요."
"큭큭큭!"
이상한 웃음소리였다. 용유진은 어리둥절해서 주변을 돌아보다가
그 웃음이 군주가 흘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표정은 마치 괴
로워 일그러뜨리는 것처럼 하고 웃음소리는 마지 못해 흘리는 듯한
군주. 거의 웃어본 적이 없는 사람만이 그렇게 웃을 수 있을 것이
다. 용유진은 이 막무가내의 군주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궁금해졌
다.
군주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네 소원을 들어주마. 죽여주겠단 얘기다."
용유진은 손을 저었다.
"이미 한 번 실패했으니 이젠 죽고싶지 않군요. 성은은 망극하나
사양하겠사옵니다."
"아니야, 네겐 사양할 권리가 없어! 내가 죽으라면 넌 죽는거다!"
"그런…!"
"닥치고 다시 덤벼 봐! 오늘도 호위를 뚫나 보자!"
용유진에게는 정말 사양할 권리가 없었다. 군주가 손을 쳐들자 갑
옷까지 갖춰입은 여덟 명의 시녀가 손에손에 무기를 들고 군주의 앞
을 가로 막았다. 그리고는 용유진을 찢어죽일 듯 바라보는 것이다.
"내 수신팔위(守身八衛)다. 이들도 뚫을 수 있다면 대단하다고 인
정해 주지."
"뭐가 대단하단 말입니까?"
"대단한 자객이라고 인정해 주겠단 말이다."
"그건 싫습니다."
"왜 싫어?"
용유진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대단하든 어쨌든 자객으로 인정이 되면 처형되는 것밖엔 더 있겠
습니까? 전 대단한 자객은 되고 싶지 않군요. 실제로도 전 대단한
자객은 못됩니다. 그렇게 여덟분이나 가로막고 있으니 뚫을 수가 없
군요. 역시 전 돌아가서 실패한 자객의 수치를 피로 씻는 수밖에 없
겠군요."
군주는 하늘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분노한 빛으로 용유진을 손가
락질했다.
"교활, 앙큼한 것! 또 속이려고 그러지! 이번에는 안 속는다."
"아뇨, 전 진짜 저 여덟 분을 뚫을 자신이 없습니다. 그냥 여기
있으렵니다."
용유진은 한 걸음 물러나 팔짱을 꼈다.
"이게 원래 제 자리죠. 제 임무고요. 전 자객이 아니라 호위병입
니다."
"안돼! 넌 자객이야! 자객이 아니면 재미 없단 말야!"
군주는 발을 동동 굴렀지만 용유진은 들은 척도 않았다. 아이와
노는 것은 아이가 전문이고, 용유진은 아직 아이 티를 완전히 벗지
못했으니 적격인 셈이었다. 군주 못지않게 그도 남다른 고집이 있다
면 있는 아이 아니던가. 일방적으로 군주에게 휘둘리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이 또 마침 버릇없고 고집불통인 군주에게 제대로 먹혀
들어갔다. 용유진이 자객 노릇 하기를 완강히 거부하자 더 강요를
못하고, 대신 다른 놀이를 생각해 내었다.
"좋아, 넌 호위병이다. 대신 이제부터 나를 암살하려는 자객들을
막는거야."
"자객이 어디 있습니까?"
군주는 득의에 찬 미소를 짓더니 수신팔위를 향해 말했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척살팔병(刺殺八兵)이다. 목표는 물론 나야.
너희들은 존귀하고 고귀한 군주님을 시해하려는 불경한 무리들이지.
그러려면 먼저 호위병을 죽여야 해. 자, 호위병은 저기 있다."
군주의 손가락이 용유진을 향해 뻗었다. 그 손가락 끝에서 용유진
은 웃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였다. 이젠 상대를 않고 버티고 있어
도 소용이 없었다. 여덟 가지 무기를 꼬나쥔 여덟 명의 소녀가 그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저는 무기도 없는데요?"
"자객이 덮쳐오는데 무기가 없다고 도망갈 셈이냐?"
용유진은 쓰게 웃었다. 엉터리같은 말만 하던 군주가 제법 요점을
찔렀던 것이다.
"하는 수 없군요."
용유진은 손을 풀며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여덟 소녀 중 하나가
그를 맞아 나섰다. 그녀의 무기는 양손에 낀 권갑(拳甲), 소가죽 장
갑에 쇠붙이를 달아 주먹의 파괴력을 높이는 무기였다. 여자가 쓰기
에는 좀 무식해 보이는 무기였고, 소녀가 쓰기에는 더욱 그랬다. 그
런데 이 소녀는 그나마 혼자 나서서 용유진과 대적하려 하고 있었
다.
"혼자 하시겠습니까?"
권갑의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포권했다. 이렇게 해서 군주의 자
객놀이는 끝나고 때아닌 비무가 벌어지게 되었다.
상대가 소녀라고 해서 용유진이 방심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기 실
력이 최하를 기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반면 상대는 소녀라
해도 제대로 무공을 익혔을 것이다. 아무래도 그보다는 상수일 가능
성이 높았다. 한편으로 그는 두려워 하지도 않았다. 며칠 전 두 번
의 기습이 성공한 것으로 해서 그는 약간의 자신감은 가지고 있엇
다. 방어를 든든히 한 뒤에 기회를 보아 기습적인 공격을 하면 꼭
진다고는 볼 수 없다고 은근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대가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이었는지 드러나는 데에는 단 세 수로 충분했
다.
소녀의 첫 수는 과감하고 단순하게 직선으로 뻗어서 그의 가슴을
찌르는 것이었다. 간단하게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금강삼매장 중
의 천수휘화를 펼쳐서 옆에서부터 그 팔뚝을 막아갔는데, 소녀의 팔
뚝은 강철 기둥같고, 그걸 옆에서부터 후려친 그의 손은 먼지를 터
는 것처럼 가볍기만 했다. 소녀의 주먹은 그의 방어에 아무런 영향
을 받지않고 그대로 뻗어 그의 가슴팍을 찔렀다.
"큭-!"
자신도 모르게 숨을 토해내며 용유진은 뒤로 물러났다. 사실은 뒤
로 퉁겨졌다. 가슴의 고통을 채 느끼기도 전에 소녀의 두 번째 공격
이 닥쳐들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내려쳐 오는 수도(手
刀) 공격이었다. 피하지 못하면 목이라도 잘려질 것같은 기세였다.
용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소녀의 팔뚝을 비틀었다. 석소봉
의 경고를 잊고 취타십팔방을 쓴 것이다. 소녀의 팔목이 조금전과는
달리 간단하게 잡혔다. 그러나 용유진은 곧 그 손을 놓았다. 석소봉
의 경고가 뒤늦게 생각난 것이다. 소녀는 그 틈을 타서 수도로 그의
어깨를 때렸다. 어깨가 바스러질 것같이 아파왔다. 그 고통에 움추
리는 용유진의 명치로 소녀의 세 번째 공격, 팔꿈치가 파고들었다.
용유진은 썩은 나무등걸처럼 앞으로 꼬꾸라졌다. 소녀의 팔꿈치는
창끝처럼 예리했다. 숨도 못 쉬고 뻗어있는 귓가로 군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아무래도 자객이나 해야겠다. 기습할 때 빼곤 형편 없잖아."
용유진은 간신히 숨을 돌리고 기어 일어나며 대꾸했다.
"군주님의 충성스런 호위병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옆에 그렇게
든든한 호위가 있으니 이제 저는 필요 없겠군요."
"동창 것들은 어차피 필요 없어! 너 따위가 호위를 하겠다고 온
것만 봐도 증명이 되지. 가서 석 당두에게 말해라. 부하를 보낼땐
실력을 더 길러서 보내라고! 그 전엔 내 털끝 하나 못 건드린다고!"
용유진은 배를 움켜쥐고 비틀거리며 숙소로 돌아왔다. 군주가 하
는 말의 내용이 여러모로 이상했기 때문에 석소봉을 만나면 꼭 물어
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숙소에 석소봉이 늘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석소봉의 상세는 극히 중했다. 의원을 부르러 가다간 그 사이에
죽을 정도였다. 얼굴에 검은 반점들이 찍혀 있는데 마치 독에 중독
된 듯한 모습이었다. 용유진은 석소봉을 눕혀놓고 숨을 가다듬었다.
다행히 그에게는 독에 중독된 상처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
다. 바로 옥로진기와 태청강기였다. 옥로진기로 석소봉의 독을 빨아
들이고, 태청강기로 태워버리면 가능할 것 같았다.
"첫 시도지만…."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용유진은 옥로진기를 운기하면서 두 손
바닥을 비볐다. 진기를 손에 모으는 것이었다. 그의 손이 은은하게
은빛을 띠어갔다. 옥로진기가 발전하면 손이 찬란한 은빛 광채를 뿜
게 되었다가 대성하면 다시 평범한 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지금 용
유진의 성취는 오륙성에 불과했기 때문에 보통의 손보다 약간 하얀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그는 그 손으로 석소봉의 배를 아래에서부터
위로 쓸었다. 얼굴이 점점 더 검어졌다. 용유진의 손이 이번엔 그
얼굴을 감쌌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용유진의 손이 검게 물들어갔
다. 반면 석소봉의 얼굴은 점점 밝아졌다. 치료는 제대로 진행되었
다.
한 시진 가량 경과한 후 석소봉은 눈을 떠 그를 보고 말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그 첫마디가 용유진을 어리둥절하게 했
다. 석소봉을 중독시킨 것은 바로 그였다. 정확하게 말해 그가 내뱉
었던 핏물이었다.
"어디서 독에 당한 적이라도 있었나?"
용유진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 모르겠습니다."
거짓말이었다. 그에게는 짐작가는 것이 있었다. 그가 내뱉은 핏물
은 생사판이 불어넣어준 천마호심결의 기운이었고, 그렇다면 그 기
운이 바로 독이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생사교의 비밀은, 그리
고 천마불사공의 비밀은 바로 독이라는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하여
간 이 일을 석소봉에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석소봉
은 더 묻지 않았다.
"황궁은 복잡한 곳이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독에 당할지도 모르
지. 하지만 내가 그렇게 당할줄은 몰랐다."
용유진은 고개를 숙였다.
"저 때문에 고생하셨군요. 죄송합니다."
"네 덕분에 살았으니 괜찮다. 그런데 얼굴을 보니 오늘도 당하고
온 모양이군."
용유진의 얼굴이 붉어졌다.
"조그만 계집아이에게 맞아죽다 살았습니다."
"수신팔위에게 당한 모양이군."
석소봉은 피식 웃고 그를 위로했다.
"괜찮다. 권갑을 했다는 걸로 보아 권정(拳精)에게 당한 것인 모
양인데, 그녀라면 네가 당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소림사에서 권
법을 익히고 온 계집아이니 말이다."
"소림사가 여자에게도 무공을 가르쳐 준단 말입니까?"
"특별한 경우지. 황상께서 직접 부탁하셔서 이루어진 일이다."
"황제폐하께서 부탁을 하셔서 무공을 익히고 온 시녀가 보령군주
를 호위한다구요?"
"원래 군주를 호위하기 위해 무공을 익히게 한 시녀니까."
석소봉의 설명은 이랬다. 원래 보령군주의 아버지는 장왕(藏王)이
었다. 현 황제의 아들이고, 본처 격인 황후(皇后) 곽씨(郭氏)에게서
난 두 아들 중 둘째였다. 그리고 현 황태자(皇太子)의 동생이었다.
그 장왕이 몇년 전 병에 걸려 죽자 황궁이 들썩였던 적이 있었다.
병사라고 했지만 사실은 황위 쟁탈전에 희생되어 암살당했다는 이야
기가 유력하게 돌았다. 그것도 동창이 암살했다는 소문이었다.
"동창이요? 정말입니까?"
"사실이 어떤진 나도 모른다."
석소봉은 표정을 굳혔다.
"동창이라고 하지만 일 만이 넘는 사람들이 있어. 당두만도 백 명
이다. 나도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 각기 다른 명령을 수행하
기 때문에 평생 얼굴 한 번 안 마주치고, 서로 동창 사람인줄도 모
르는 채 죽고 죽일 수도 있다. 그게 동창이지."
"과연…!"
용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군주가 우릴 미워하는 이유가 그것이군요. 그리고 자객에 유달리
집착하는 이유도."
"그래. 군주는 동창이 장왕을 죽였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그래
서 동창의 호위는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그래서 황상께서
구대문파에 사람을 보내 무공을 배워오게 한 다음 그녀의 호위를 맡
긴거야."
"구대문파에 보냈다면…, 하나가 모자라는군요."
"한 문파에서는 아예 자파의 사람을 보내 경호를 시키고 있지."
"그게 누굽니까?"
"호신이비라고 불린 여자들. 사실은 아미파 비구니들이다. 그중
하나에게는 너도 직접 배운 적이 있을걸?"
"아!"
용유진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인연이라는 것이 이런 식으로
꼬일 수도 있는 것일까. 얼마전 아미십이장을 가르쳐 준 그 비구니
를 군주의 호위비녀로 다시 보게 된 것이다.
"하여간 저 때문에 망신살이 뻗쳤군요. 가서 공부 더 하고 오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공부를 하긴 해야지. 네 실력으론 정말 망신당하기 꼭 좋으니."
용유진은 은근히 걱정이 되어 물었다.
"지장전으로 돌아가야 할까요?"
기공을 완성하지 못한 상황에서 지장전으로 다시 보내지게 생긴
것이다.
"지장전으로 가서 배우면 좋겠지만…, 어차피 석달 기한은 받은
것이니까 그때까진 그냥 내게 배워라."
용유진은 반색했다.
"절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망신 당하지 않을 정도까지만. 단, 그것도 네게 소질이 있을 경
우야. 가르쳤는데 보람도 없으면 안 가르치겠다."
"되도록 지지않게 열심히 하겠습니다."
석소봉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석달 배워서 지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한 이야기야. 창피하게나
지지 말란 이야기다. 석달동안 열심히 해서 몇대 덜맞게라도 되면
다행일거다."
"하여간 열심히 하겠습니다."
석소봉은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일단 좀 쉰 다음에…."
"쉬신 다음에요."
"발 쓰는 법부터 가르쳐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