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부가 다른 건 몰라도 말 하는데 있어서는 흐릿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용유진은 황궁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런데 그가 들어
간 문은 원래 이름도 없는 쪽문인데다가 오른쪽 귀퉁이에 치우쳐 있
어서 한참 걸어들어가도 온통 세 길 넘는 담만 있지 옆으로 빠지는
길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간 뒤에 겨우 만난 사람은 어디론
가 급히 가고 있는 금의위의 군사였는데, 그는 영화궁을 찾는다는
용유진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듣는 곳인데?"
용유진은 이 사람도 그처럼 처음 황궁에 들어오나 보다라고 생각
하고 반가운 김에 물었다.
"노형도 여기 처음인가 보군요."
군사는 고개를 저었다.
"난 십 년째 여기 경비만 서고 있는데."
"그런데도 영화궁을 모른단 말입니까?"
"그런 걸 어찌 아누? 난 여기로 오는 길밖에 몰라."
용유진은 기가 막혀 고개를 저었다.
"그럼 건청궁으로 가는 길은 아십니까?"
군사는 그건 안다는 듯 자신있게 대답했다.
"오던 길로 되돌아가서 왼쪽으로 다시 한참 가. 한 시진쯤 걸으면
대충 거기가 황궁 뒷뜰의 중간쯤 될거야. 거기에서 다시 물어보게
나."
용유진은 왔던 길로 돌아가야 했다.
"젠장!"
사부가 왜 건청궁을 가르쳐 줬는지 그 깊은 뜻을 이제야 알 것 같
았다. 길을 잃으면 그걸 기준으로 찾으라는 모양이었다.
그는 군사의 말대로 황궁 뒷뜰의 중간쯤에 갔다. 금향정(金香亭)
이니 어경정(御景亭)이니 하는 정자들이 나란히 서있는 그 중간에
순정문(順貞門)이 있었다. 들어가려 하니 군사가 막고 섰다.
"여기 오면 안돼!"
"왜요?"
"이길은 황제폐하만 가는 곳이니까."
"그럼 이 안쪽으로는 어떻게 갑니까?"
"저 정자 옆길로 가!"
용유진은 금향정과 어경정 사이의 좁은 길을 걸어 안쪽으로 들어
갔다. 오른편에는 흠안전(欽安殿)이 있고, 왼편에는 곡지관(曲池館)
이라는 곳이 있는데, 역시 그가 들어가면 안되는 곳이었다. 지나가
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가 다가가 말을 붙여볼 틈도 없이 바쁘게
가버렸고, 천천히 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은 다들 얼굴에 '나
는 고관(高官)이다'라고 써붙이고 다니는 것같은 표정을 하고 있어
서 말을 붙여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궁녀처럼 보이는 여자
들에겐 말도 못 꺼냈고, 그녀들에게 다가가려 치면 괴물이라도 본
것처럼 비명을 지르고 도망가기 바빴다. 용유진이 황궁 안을 헤매는
것이나, 사람들이 다 용유진을 힐끔거리며 가는 것이 시골 촌놈 보
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용유진은 사부가 말한 황후의 침소와 건청궁 주변을 해가 지도록
돌아다닌 끝에 간신히 영화궁이라고 짐작되는 건물이 있는 주변까지
왔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높은 담장이 바둑판처
럼 줄지어 서있고, 그 담장 안쪽으로는 그놈이 그놈같은 궁궐들이
여섯 개나 자리잡고 있어서 과연 어느 것이 영화궁인지 알 수가 없
었다. 그때 마침 저쪽에서 수십명의 금의위 군사들이 오고있는 것이
보였다. 용유진은 얼른 다가가서 길을 물어보려고 했다. 다른 곳으
로 가기 전에. 그러나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군사들은 우 하고 달
려오더니 그를 포위했다. 애초에 그를 잡으러 온 것이다.
"웬놈이냐!"
용유진은 어리둥절 해져서 대꾸했다.
"용유진이오."
금의위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장수가 검을 뽑아들고 나섰다.
"용유진이 웬 놈이냐!"
"동창의 번역이오."
동창 소리가 나오자 장수의 눈빛이 달라졌다. 뿐만 아니라 말투도
달라졌다.
"동창의 번역이 왜 그런 옷을 입고 황궁을 돌아 다니는 거요?"
용유진은 그제야 그가 수련복을 안 갈아입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그에게 접근을 않은 이유도 깨달았다. 용유진은 동창 위사
의 표식인 철패를 꺼내어 보였다.
"이유가 좀 있어서…."
장수는 그 철패를 보고서야 검을 거두었다.
"난 또, 자객이 나타났다는 소리가 들려서 허겁지겁 왔구만…."
허겁지겁 나타나는 것이 한 나절이나 걸린다면 이건 정말 문제라
고 생각했지만 용유진은 그런 말을 할 정신도 없었다. 멀리서 사람
들이 구경하는 것이 보여 용유진은 쥐구멍을 찾고 싶었다.
"영화궁이 어딘지나 가르쳐 주시오."
그때 한 사람이 나타나 용유진의 목덜미를 잡아 끌었다.
"여기다, 여기! 왜 안오나 했더니 여기서 바보짓이나 하고 있었단
말이지. 넌 정말…, 나중에 두고 보자!"
석소봉이었다. 그는 담장 사이로 난 몇 개의 문들을 통과해서 한
궁궐의 후원으로 들어간 다음 거기 구석에 있는 전각의 방 한 곳에
용유진을 던져넣었다.
"옷부터 갈아입어! 그렇게 차리고 돌아다니고도 화살에 맞아죽지
않은게 정말 신기하다!"
석소봉은 원래 성격이 까다롭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고, 용유진과
도 그렇게 친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에게 처음부터 찍혔으니 앞으로
석달간도 그리 쉽진 않겠다고 용유진은 각오부터 해야 했다. 그러나
당할 때 당하더라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저…."
"뭐야?"
"옷을 미처 준비하지 않았는데요."
영화궁에서 용유진이 하는 일은 제대로 된 옷이 반드시 필요한 일
이었다. 석소봉의 지휘를 받아 보령군주를 경호하는 일이었기 때문
이었다. 명색이 군주의 호위병인데 아무 옷이나 입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석소봉의 도움으로 간신히 옷을 마련해 입고 이
제부터 그가 경호해야 할 보령군주를 만나러 갔을 때, 그는 다시 한
번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저 놈이 아까 황궁을 소란케 한 자객이냐?"
보령군주, 사실은 보령군주로 짐작되는 소녀는 희미한 그림자만
보이는 휘장 뒤에 앉아 그렇게 첫 마디를 던져 보내었다. 휘장 밖에
서 시중을 드는 시녀들이 일제히 입을 가렸다. 웃음을 참는 것이다.
석소봉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 자는 제 휘하의 번역 용유진이라는 인물로 자객은 아니올습니
다. 이제부터 군주마마를 경호해 드릴 자이지요."
"닥쳐라! 내가 자객이라면 자객이야. 저 하늘의 새가 물고기라면
물고기고, 저놈 보고 개라면 저놈은 개인거야. 어느 앞이라고 감히
토를 달아!"
석소봉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예, 예."
휘장 속의 그림자, 보령군주는 한참 동안이나 씨근덕 거리더니 다
시 용유진을 불렀다.
"어이, 자객!"
용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네 이놈, 자객!"
용유진은 역시 대꾸하지 않았다. 표사가 꿈인 그가 동창의 위사따
위나 된 것도 억울한데 이제 자객 소리까지 들어야 할 것인가. 절
대 그럴 수 없었다.
보령군주는 거의 발악하듯 소리를 질렀다.
"이 쳐죽일 놈의 자객 녀석아! 얼른 대답하지 못해!"
석소봉이 용유진의 옆구리를 찔렀다. 용유진은 한숨을 내 쉬고는
하는 수없이 허리를 굽혔다.
"예, 군주마마."
군주는 만족한 듯 소리를 가다듬더니 다시 호통을 쳤다.
"자객 주제에 금의(錦衣)를 입다니! 얼른 자객 옷으로 갈아입고
오지 못할까!"
용유진은 어이가 없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건 자객 옷이 아니라…."
"닥쳐라! 능지(陵遲)할 것 같으니! 내가 자객 옷이라면 자객 옷인
게야! 그래도 얼른 입고 다시 대령 하지 못하고!"
석소봉이 다시 옆구리를 찔렀다. 용유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
나왔다.
"군주… 맞습니까?"
감히 불경스런 소리는 못하고 설명을 요구했는데 석소봉은 더 심
한 말을 했다.
"미친 년같지? 정말로 미쳤는지도 몰라. 그래도 너는 제법 잘 하
고 있는 편이다. 이대로 잘 해봐."
"뭘 잘해보라는 말씀입니까?"
"심심해서 저러는 모양이니 같이 잘 놀아주란 말이다. 여태 저 군
주에게 볶이느라고 온갖 고생을 했는데, 네가 와서 다행이다."
"결국 전 저 군주의 노리개감이란 말이군요."
"안 그러면 널 왜 불렀겠어! 나이가 비슷한 놈을 찾느라고 나도
꽤 고생했다."
용유진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숙소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다시
군주에게 갔다. 군주는 그의 형색을 보고는 숨이 넘어갈 듯 웃어대
었다. 그리곤 다시 호통을 쳤다.
"발칙한 것, 찢어죽여 마땅할 것! 감히 황궁을 노리고 침입하다
니! 누구를 노리고 왔는지 썩 불지 못할까!"
용유진은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여기 가장 존귀한 분이라면 군주마마밖에 더 있겠습니까?"
군주는 그것보라는 듯 자리를 두들기며 흥분해 외쳤다.
"그래, 그래. 그것 봐! 날 노리고 온 거라니까! 호위병들은 무얼
하느냐, 얼른 자객을 막아라!"
그러나 문제의 자객은 팔짱을 끼고 서있을 뿐이었다. 군주가 다시
호통을 쳤다.
"자객이 왜 그모양이냐! 목표를 봤으면 행동이 있어야 할 것 아니
냐!"
용유진은 석소봉을 바라 보았다. 석소봉은 하늘 구석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군주가 다시 외쳤다.
"얼른 자객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용유진은 속으로 욕설을 뱉으며 군주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이게 무슨 미친 짓이냐!'
그런데 그의 행동은 지나치게 갑작스러웠고, 마침 유운신법을 배
운지 얼마 되지 않아서 쾌속하기 짝이 없었다. 바로 옆에 서있던 석
소봉이 놀라 제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용유진은 그렇게 득달같이 달
려나가 휘장을 제치고 군주의 면전에 섰다. 잠시 장내가 조용해 졌
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벌집을 쑤신 듯 시끄러워졌다.
"불경한 놈!"
석소봉이 번개처럼 달려가 용유진의 목덜미를 잡아 당겼다. 그러
나 그 전에 군주의 좌우에 시립해 있던 시녀 둘이 먼저 소매 속에서
단검을 꺼내어 휘둘렀다. 용유진은 본능적으로 몸을 숙여 검을 피하
고 뒤로 되튕겨 나오려 했다. 그러나 그냥 물러나기는 억울했다. 그
는 그 경황에도 손을 내밀어 군주의 옷자락 끝을 만지고는 씩 웃어
주었다. 그 순간 미처 다 피하지 못한 단검이 그의 옆구리를 그었
다. 석소봉의 손이 목덜미를 잡아 당겼다. 용유진은 피를 흘리며 허
공을 날아 처음 섰던 그 자리에 떨어져 뒹굴었다. 석소봉이 그를 일
으켜 세웠다가 다시 꿇어 앉혔다.
"용서를 빌어라! 용서를!"
용유진은 웃음을 떨구지 않았다.
"저야 군주마마께서 시킨대로…!"
"발칙한 놈!"
석소봉이 그의 머리를 두들겼다. 용유진은 땅바닥에 코를 박았다.
군주가 외쳤다.
"그냥 둬!"
용유진은 간신히 고개를 쳐들어 군주를 보았다. 화려한 궁장(宮
裝)의 소녀, 나이는 열 두셋쯤 되었을까. 작은 코에 희미한 눈썹 밑
으로 혼탁한 회색 눈을 가지고 있었으며 턱은 뾰족했다. 입술은 병
든 강아지처럼 흰빛이었다. 그게 보령군주의 용모였다. 병든 쥐새끼
처럼 생긴 군주였다.
'이야기에 나오는 군주하고는 전혀 다르잖아.'
용모는 그랬지만 보령군주에게도 이야기에 나오는 군주와 비슷한
점이 한 가지는 있었다. 버릇 없고, 고집이 강하며, 특히 억지 부리
는 데는 탁월한 소질이 있었던 것이다. 용유진의 기습으로 인한 충
격이 가시자 군주는 눈에 파랗게 불을 켜고 고함을 질러대었다.
"비겁한 것! 방자한 것! 기습을 하다니! 내 옷에 더러운 손자국을
남기다니!"
용유진은 여전히 웃었다.
"군주마마께서 잘 모르시는군요. 자객은 원래 기습을 주로 한답니
다. 제가 정말 자객이었으면 방금 군주마마는 제 손에 목숨을 잃었
겠지요."
"흥, 방금 그건 무효야. 방금 그건 기습도 음…, 아주 더럽고 악
랄한 기습이었다. 제대로 된 기습을 하면 내 호신이비(護身二婢)가
못 막았을 리 없다. 그렇지?"
마지막 물은 것은 옆에 서 있던 두 시녀, 검을 꺼내 용유진을 다
치게 한 두 시녀였다. 그중 오른쪽에 선 시녀가 허리를 굽혔다.
"그렇사옵니다. 마마."
왼쪽에 선 시녀가 용유진을 가리켰다.
"다시 한 번 공격하라고 하면 저희가 단번에 목을 분질러 놓겠습
니다. 마마."
군주가 손을 저었다.
"보기 흉하니까 목은 부러뜨리지 말고, 음… 배나 갈라 봐. 자객
의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
용유진은 어이가 없어서 하하 웃었다. 손발이 잘 맞는 군주와 시
녀였던 것이다.
군주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어서 덤벼!"
"정말 덤벼도 될까요?"
"그래, 어서 덤벼!"
용유진은 몸을 일으켰다.
"다치셔도 전 모릅니다!"
"자객이 웬 말이 그렇게 많아! 얼른 덤벼!"
말은 당당하게 하면서도 군주는 몸을 뒤채어 물러나는 것이 은근
히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용유진은 석소봉을 힐끗 보았다. 석소봉
은 이번에도 먼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갑니다!"
용유진은 고함을 질렀다. 군주가 시녀의 옷자락을 잡고 뒤로 숨었
다. 그러나 용유진은 오히려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군주가 눈만 빼
곰히 내밀며 손가락질 했다.
"비겁한 놈! 덤빈다더니!"
용유진은 다시 하하 웃었다.
"불리한 줄 알면서 덤비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지요. 저는 자객으
로서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으니 어디 으슥한 곳에 가서 자결하렵니
다. 피로 수치를 씻어야지요."
그러면서 군주의 앞을 물러서려 하자 군주는 약이 올라 발을 동동
굴렀다.
"잡아, 잡아 죽여! 얼른 잡아와서 여기 꿇리란 말야!"
오른쪽에 선 시녀가 섬돌 아래로 몸을 날려 왔다. 군주의 명령대
로 용유진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용유진은 몸을 돌려 쏜살같
이 뛰었다. 군주를 향해서였다. '앗'하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용
유진은 오른쪽 시녀의 옆을 비켜서 군주의 면전으로 달려들었다. 왼
쪽 시녀가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것도 애초에 계산이 된 것이었
다. 용유진은 보름간의 수련 중 다섯째 날에 배운 개방( 幇)의 타
구십팔초(打狗十八招) 중 황구복천(黃狗伏天) 수법을 권법으로 변화
시켜서 몸을 땅에 밀착시키고 뒷발을 들어 시녀의 아랫배를 걷어찼
다. 시녀가 흠칫 놀라 몸을 물렸다. 여자의 급소를 공격하니 검을
돌려서 그 발부터 잘라버리려고 하는 것이었다. 순간 용유진은 몸을
뒤집으며 발을 바람개비처럼 돌렸다. 청성파(靑城派) 비전인 운리선
풍각(雲裏旋風脚)의 응용이었다. 시녀의 발이 거기 걸리려 했다. 시
녀는 공중으로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 용유진은 군주의
옷자락을 다시 한 번 잡았다가 놓았다. 그리곤 뒤로 굴러 물러가는
데 허공에 뜬 시녀가 검을 던졌다. 용유진은 어깨에 단검을 맞고 멈
추었다. 그를 놓치고 당황하던 오른쪽 시녀가 그때 달려와 그를 걷
어차 버렸다. 용유진은 푸대자루처럼 공중에 떠서 뒤로 날아갔다.
오른쪽 시녀가 따라오며 연속으로 걷어찼다. 용유진은 희미한 정신
속에 시녀의 발을 잡아 비틀어 버렸다. 일방적으로 당하던 중에도
이 수법은 극히 신묘해서 시녀로서는 그가 발을 잡는 것을 피할 수
가 없었다. 결국 용유진과 시녀는 같이 나뒹굴었다. 시녀는 얼굴을
붉히며 일어나 정말로 살기를 담아 용유진을 걷어차려 했다. 그때
석소봉이 끼어 들었다.
"그만 하시오!"
시녀는 둘 다 물러가고, 군주는 씨근덕 거렸다. 용유진은 땅바닥
에 엎드려서 군주를 보며 물었다.
"어떻습니까? 제가 다시 이겼죠?"
그리곤 코를 박고 쓰러졌다. 옆구리를 다친데다 어깨엔 검이 꽂히
고, 옆구리에 다시 타격을 입은 상태로는 말을 하는 것조차 신기할
정도였던 것이다.
군주는 용유진에게 놀림을 받았다고 생각하는지 펄쩍 뛰었다.
"저 놈을 당장 엎어놓고 매우 쳐라! 때려 죽여버리란 말야!"
석소봉이 용유진을 가리고 서서 말했다.
"이놈 이제 한 대만 더 때리면 죽을겁니다. 그러면 군주님도 매우
서운하시겠지요?"
"내가 그 놈 죽는다고 서운할 게 뭐람."
"이놈 지금 죽으면 내일부턴 못 노시잖습니까?"
"다른 놈을 불러서 놀면 되지."
"이만한 녀석은 찾기 힘드실 겁니다. 그리고 동창 위사는 군주님
장난감이 아니에요. 만약 죽기라도 하면 꾸중이 내리실 겁니다."
군주는 입속으로 한참이나 투덜거리더니 손을 저었다.
"알았다, 알았어. 내일 다시 데려와!"
석소봉은 고개를 저었다.
"이정도 상처면 하루이틀로는 안 낫겠는걸요. 다시 걸으려면 상당
히 있어야 겠습니다."
"사흘!"
군주는 손가락 셋을 세워 흔들었다.
"사흘 안에 다시 고쳐서 데려와! 안 그러면 진짜로 죽여 주겠다."
용유진은 숙소에 누워 끙끙거렸다. 석소봉이 말했다.
"너무 진짜같이 덤벼들어서 크게 다친거야. 너처럼 그렇게 덤벼들
면 나라도 당황해서 독수를 쓰는 수밖에 없겠다."
"그 시녀들의 무공이 원래는 높단 말입니까?"
"어쩌면 나보다도 더."
"젠장!"
용유진은 이를 갈았다.
"날 희롱한거군요. 칼로 긋고 찔러 가면서…."
"군주의 장단에 맞춰준 거지."
"다음 번엔 혼을 내 놓겠습니다."
"맞아 죽지나 마라! 그리고 너 마지막 한 수…, 그거 취타십팔방
이지?"
용유진은 흠칫 놀라 석소봉을 바라 보았다. 석소봉은 날카로운 눈
초리를 그에게 보내었다.
"백리노인이 왜 네게 그걸 알려줬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쓰지
마라.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어. 그 시녀들이 밖에서 들어
온 여자들이라 괜찮았지, 만약 원래 황궁에 있던 시녀들이었으면 그
수법은 금방 드러나서 내일이면 황궁 전체에 알려졌을거다."
"소문이 나면 안되는 건가요?"
"당연히 안되지!"
원래 황궁의 시녀, 호위병, 금의위와 동창, 그리고 포두들에게 가
장 기본으로 요구되는 무공은 금나술(擒拿術)이었다. 임무의 성격상
죽이기보다는 나포하는 것이 주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로부터
금나술을 극도로 발전시키고 전수해 왔는데, 그중 최고의 무공으로
알려진 것이 취타십팔방이었다. 환관 중에도 특별히 무공에 소질이
있던 백리제일이 황궁에 전해오는 금나술을 총 망라하여 연구하고
정리하여 만든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었다. 모종의 사연이 있어 지금
백리제일은 궁밖으로 쫓겨나고, 무공은 페지가 되었지만 그가 만든
무공에 대해서는 침을 흘리는 자가 하나 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노인이 무공을 전수해줄 정도로 사이가 좋다고 하면
제독태감도 가만히 있지 않을테고…. 너따위야 언제 죽든 상관 없지
만 백리 노인에게 해가 간단 말이다."
석소봉은 용유진을 힐책하고는 일어서서 나가며 한 마디 던졌다.
"사흘 동안이나마 요양 잘 하라구. 다음 번엔 오늘보다 힘들테니
까 말이야."
"젠장!"
용유진은 석소봉이 나가자 일어나 앉았다. 온 몸이 쑤셨다. 특히
다친 곳이 찌르듯 아파서 제대로 운신할 수가 없었다.
"이러다간 무공수련이고 뭐고 골병 들어 죽겠군."
이런 곳이 수련하기 좋다고 보낸 사부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아
프다고 쉬다간 정말로 무공 수련을 할 틈이 없을 것이다.
"사흘 후에 못 일어나면 죽고, 석달 안에 반박귀진 하지 않으면
죽는단 말이지. 난 정말 운도 좋군, 젠장!"
용유진은 투덜거리면서 가부좌를 취했다. 그리고 문득 생각난 듯
품속을 뒤져 사부가 준 물건을 꺼내었다. 은으로 싼 환약, 옥병 속
에 든 약, 그리고 금상자 안의 약. 어느 것을 먼저 먹을까 고민하며
금상자를 연 순간 그 안에서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눈이 부
셔 감기 직전에 용유진은 상자 안에 황금빛 가루가 가득 담긴 것을
본 것 같았다. 그러나 조금 후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상자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게 뭐야? 어떻게 된거야?'
용유진은 상자를 뒤집어도 보고, 방 안을 뒤져도 봤지만 황금색
가루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날아가 버렸나보군, 젠장.'
사실은 날아간 것이 아니라 그의 코로 모두 흡수가 된 것이었다.
이름하여 사라용뇌향(沙羅龍腦香). 밀봉된 상태에서는 황금 가루처
럼 보이지만 사람의 숨결만 닿으면 한 줄기 향기가 되어 흡수되는
약이었다.
"어쨌든 하난 썼으니 운기나 해야…."
용유진은 아쉽게 입맛을 다시며 운기에 들어갔다. 일단은 가장 익
숙한 옥로진기였다. 자세한 내용은 몰랐지만 이것은 제대로 된 수련
법이었다. 원래 옥로진기라는 것은 채음보양법의 하나로 그냥 조식
만으로는 죽어도 경지에 다다르지 못하는 기공이었다. 정사를 통하
든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정(精)을 흡수해야 발전하는 일종의
사공(邪功)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사라용뇌향을 흡수했으니 순
수한 음기를 흡수한 것보다도 더 효능이 있었다. 용유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급속도로 단계를 뛰어넘어 한 줄기 진기를 임독 양맥
에 부딪게 하는 데까지 도달했다. 용유진의 몸이 두 번 들썩거렸다.
그리고 눈을 떴다.
"왜 이러지?"
-이상한 현상이 몸에 생기면 즉각 운기를 중단하라.
이것이 사부의 명령이었고, 그래서 즉각 운기를 중단한 용유진이
었다. 덕분에 간단히 생사현관을 타통할 기회를 그는 놓쳐 버렸다.
하지만 지금 그의 신경은 다른 곳에 쏠려 자신이 기회를 놓쳤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그의 손바닥에 야릇한 느낌이 전해 오고 있었
던 것이다.
월인.
공손조덕을 만나던 그날 밤 이후로 보지 못했던 월인이 그의 손바
닥에 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일이냐?"
용유진은 골머리를 싸매었다. 어느날 그의 손 속으로 사라져 버린
월인이, 그가 위급할 때 한 자루 장검으로 변해 나와주었던 월인이
지금 다시 예전의 그 붉은 칼날로 변해 손에 들려있는 것이다. 용유
진은 월인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아무런 것도, 아무 글자도 새겨
져 있지 않았다. 월인은 붉은 수정과도 같이 은은한 붉은 빛을 뿌리
는 투명한 물체였다. 빛조차 없었으면 그냥 얼음조각으로 볼 정도였
다.
"여기 어디에 고루마공이 있다는 거야?"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월인은 또 한 번의 변신을 했다. 고드름이
녹듯이 서서히 녹아 그의 손으로 스며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 다시 사라지는 거야?"
용유진은 혹시 몰라서 월인에 얼른 입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나
입속으로 들어오는 것도 없었다. 단지 극도로 차가운 기운만을 남긴
채 월인은 다시 손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참이나 손바닥을 들여다 보던 용유진은 고개를 젓고 다시 운기
조식에 들어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는 아련히 느껴지
던 진기가 강물처럼 뿜어져서 어어 하는 사이에 기맥(氣脈)을 따라
돌더니 맹렬히 임독의 양 관문을 두들겼다. 용유진은 눈을 번쩍 떠
버렸다. 이것이 임독 양맥을 타통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너무 빨랐고, 그 기를 통제할 자신도 없어서 일단 진정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게다가 옥로진기로는 석달 안에 그 경지에 도달하기 어렵
다고 사부가 말하지 않았던가. 용유진은 사부가 알고있는 옥로진기
는 절반의 것에 불과하고, 그래서 제 위력을 다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 버렸다.
"그래도 아까보단 약하니 다행이군."
일에는 기세라는 것이 있어서 할 때 해버려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용유진의 혼잣말이었다. 기공의 수련에도 그 말은 마찬가지로 통하
는 것이라,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순간은 자주 있는 일
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용유진이 운공을 할 때는 진기
는 훨씬 순하고 부드러워 져 있었다. 옥로진기가 발전한 것은 사실
이지만 이제 그 기에는 임독을 뚫을 힘 같은 건 남아있지 않았다.
임독이 막힌 상태에서 용유진의 몸에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는 용유진은 아무런 아쉬움 없이 누워 잠을 청했
다.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