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용유진, 지장전에 들다.
1.
지장전은 달리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부르는데, 주존(主尊)인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명계의 십대명왕(十大冥王)을 모시는 곳이었
다. 십대명왕은 진광(秦廣), 초강(初江), 송제(宋帝), 오관( 官),
염라(閻羅), 평등(平等), 태산(泰山), 도시(都市), 변성(卞城), 전
륜(轉輪)의 순으로 명계, 지옥의 각 단계를 관장하는 왕이었다. 말
하자면 사찰 안에 지옥의 모습들을 소개해 놓은 곳이 지장전이었다.
그리고 여기 동창에서는 실제로 지옥을 구현해 놓았다고 알려져 있
었다. 그 수련이야말로 지옥의 고통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용유진은 그런 이야기를 양평중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용유진은 양평중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지금 입으시는 옷은 처음 보는건데요?"
양평중은 지금 그의 앞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그것도 보통
옷이 아니라 암녹색의 짙은 옷, 한 천으로 끊어 만든 것도 아니고
누더기처럼 이리저리 덧대어 만든데다가 소매와 바짓단, 옷섶을 모
두 끈으로 묶을 수 있도록 만든 옷이었고, 가장 재미 있는 것은 웃
옷 뒷덜미에 모자처럼 생긴 천도 하나 달려 있어서 뒤집어쓰면 복면
까지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용유진의 질문에 양평중은 온갖 인상을
쓰며 투덜거렸다.
"젠장 여름까진 이 옷을 입게 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별 거지 발싸개같은 놈들이 여기 뭐 빨아먹을 게 있다고 들어와설랑
은 이런 때이른 생고생을 하게 만들지…! 육실헐 놈들! 찢어죽일 놈
들!"
볼이 통통해서 귀여워 보이는 인상의 양평중이 입이 걸다는 것은
묘한 부조화였다. 평소같으면 그걸로 한 번 놀려줄 용유진이었지만
지금은 궁금한 것이 먼저였다.
"그 옷이 뭐길래 그렇게 입기 싫어하세요?"
"지옥으로 가는 복장이란 말이다."
지장전에서 수련을 할 때 입는 일종의 수련복이었다. 원래 동창
위사의 자격은 대단히 엄격해서 대개는 금의위에서 고르고 고른 인
재를 동창으로 뽑아와 위사로 삼는 식이었다. 금의위 자체가 보통
군졸을 뽑는 것과는 달라서 귀족의 자제들이 태반이고, 적어도 신분
이 확실한 집안의 자제들 중에서 무술에 능한 자들을 뽑는데, 그 중
에서도 뛰어난 인재들을 뽑아서 동창으로 데려오는 것이다. 그렇게
데려온 인재들로도 부족해서 재교육하고 수련을 시켜 동창의 위사답
게 만드는데 그 장소가 지장전이었다. 수련은 가혹하고 위험해서 죽
는 자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열 명이 오면 그중 아홉 명은 금의위
로 되돌려보내지는 것이 악명높은 동창의 수련방법이었다. 그렇게
가혹한 수련을 통과해도 고생은 끝나지 않아, 모든 동창의 위사는
일 년에 한 번 한 달 동안 정기적으로 재수련을 받아야 했다. 양평
중의 올해 훈련 순번은 여름에나 오는데, 재수 없게도 어젯밤의 도
적 사건때문에 앞당겨 졌던 것이다. 도적이 코끝까지 왔는데도 눈치
를 채지 못했다는 이유로 벌어진 일이었다. 그만이 아니고 어젯밤
강복사의 경계를 섰던 모든 위사들과 이 숙소에서 잔 모든 위사들이
함께 받는 문책성의 수련이었다. 양평중이 투덜거리는 이유가 그것
이었다.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준비 하고 있는데 방문이 열리고 허신
이 얼굴을 들이 밀었다.
"용가 꼬마 있나?"
물론 있었다. 용유진이 나가려 하자 허신이 짐보따리 하나를 던져
주고 말했다.
"조 부내관령님이 네게 주는 선물이다. 고생 좀 하라구…."
허신이 히죽거리는 얼굴이 이상해 용유진은 얼른 짐을 풀어 보았
다. 암녹색의 옷 세 벌이 거기 들어 있었다. 양평중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꼬마야."
그는 용유진의 어깨를 잡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죽지 않도록 잘 하라구."
양평중의 경고는 농담이 아니었다. 수련 첫 날 용유진은 힘들어
죽지 않으면 차라리 자결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거운 쇳
덩이를 온몸에 달고 끝없이 뛰는 것이 첫날 수련의 전부였던 것이
다.
'일단 몸을 만들어라!'
이것이 교두의 지상명령이었는데, 그 소리를 들으며 용유진은 허
신의 '먼저 몸을 만든다'는 방침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게 되었다.
일단 몸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몸으로 각각의 기능을 익히게
하는 것, 이것이 동창의 방식이었다. 어느 한 가지만 특출나게 잘
하기 이전에 전반적인 능력을 갖추게 한다는 것이 동창이 위사에게
요구하는 자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동창이 위사들을 수련시키는 방법은 거의 고문에 가까운
것이었다. 사흘간 잠도 재우지 않고 뛰게 했다. 그 다음엔 소림외가
(少林外家)의 수련법을 동원해서 괴롭히기 시작했다. 백 근이 넘게
나가는 청동 향로를 들고 몇 시진을 한 발로 서있는다거나 발에 돌
을 매달고 물 속에 오랫동안 잠겨 있어야 한다거나 하는 수련이었
다. 양평중이 몰래 말해준 것에 의하면 이곳의 수련 중에서는 손가
락으로 물구나무 서고 있는 동안이 가장 편하다는 것이었다. 대개의
위사는 그 시간에 잠까지 잔다고 했다.
그러나 용유진이 그런 수련을 따라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른
위사들은 이미 내공을 적정 경지에 이르도록 수련했고, 체력적으로
도 거의 완성되어 있기 때문에 죽지 않을 정도로는 버틸 수 있었지
만 용유진은 형편없이 약한 상태였다. 그는 수없이 혼절하고, 다시
깨어나며 수련을 했다. 그렇게 혼절한 시간을 교두가 허락하지 않았
으면 그는 벌써 죽었거나, 내 쫓겼을 것이었다. 그렇게 겨우 겨우
보름을 지나자 소위 '몸 만들기'는 끝이 났다. 물론 용유진을 제외
한 다른 위사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몸 만들기의 교두는 체
격이 산처럼 큰 사내와 뼈만 남았다 할 정도로 비쩍 마른 부조화의
두 사람이었는데, 큰 사내가 일급 당두 중 하나인 적중산이고, 마른
사내는 이급 당두 중 하나인 활고루(活 ?) 염충(廉忠)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다. 그 중 염충이 마지막 수련을 끝내고 용유
진에게 말했다.
"너는 보름동안 권각술을 배우고 난 뒤에 다시 이 수련을 하는거
다. 생각같아서는 당장 목을 비틀어서 담 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지
만 꼬마라서 한 번 더 기회를 주는거다. 하지만 다음 번에는 꼬마라
고 봐주는 건 없어. 죽고싶지 않으면 약이라도 먹어서 단련하고 와
라! 아니면 도망을 가든지."
용유진은 곤죽이 되어 서있기도 힘든 상황에서도 똑바로 서려고
노력하며 물었다.
"제 나이 또래의 사람으로 이 수련을 완벽히 통과한 사람이 있습
니까?"
염충이 대꾸했다.
"아직은 없다."
용유진은 히죽 웃었다.
"그럼 제가 처음이 되겠군요. 다음엔 완벽히 통과할 테니 말입니
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천천히 기울어지더니 완전히 뻗어버렸다.
염충은 적중산과 눈빛을 교환하고는 앞에 늘어선 위사들에게 외쳤
다.
"어이, 누가 이 꼬마 좀 치워버려."
***
"금강삼매장(金剛三昧掌)은 달리 아미십이장(峨嵋十二掌)이라고도
불리는데, 그 발기 구결은 천(天), 지(地), 지(之), 심(心), 용
(龍), 학(鶴), 풍(風), 운(雲), 대(大), 소(小), 유(幽), 명명(明
冥)의 열 두 자외다. 손으로 발기(發氣)를 하니 장법이라 하는 것이
지만 그 근본에는 아미기공(峨嵋氣功)이 깔려있고, 매 자세에는 보
법과 권각지술이 포함되어 공수를 겸비할 수 있으니 단순한 장법은
아닌 것이오."
양평중이 나직히 속삭였다.
"자랑은 그만하고 빨리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좋겠군."
"이 아미십이장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정신은 임제종(臨濟宗)의
평상무사(平常無事), 무위진인(無位眞人)의 도리요. 똥을 누고, 옷
을 입고, 피곤하면 눕는 그 모든 곳에 선(禪)이 있으니, 어리석은
자는 웃지만 지혜로운 자는 알 것이외다."
양평중이 다시 나직하게 속삭여 말했다.
"무공을 가르쳐 주기 싫으면 꼭 저렇게 넋나간 소리만 늘어놓는다
니까. 누가 중이 된댔나? 무공이나 빨리 가르쳐 달란 말이지."
용유진은 양평중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금강삼매장을 해설하던 교
두가 눈을 부라리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눈 구멍 두 개만 내놓
고 온 몸을 포대같은 것으로 감춘 교두는 그러나 양평중 쪽을 향해
한 번 쏘아보기만 할뿐 다시 자기 이야기로 돌아갔다.
양평중이 용유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 교두는 아미파 비구니일거야. 우리가 요구하니까 하는 수없이
와서 전수는 해주지만 사실은 여기 서있는 것도 싫을거라고. 일부러
틀리게 가르쳐 줄 수도 있으니까 집중해서 들으면 오히려 손해야.
그냥 모양만 보라구."
아까의 두 마디보다 더욱 낮춰서 한 이야기인데 교두는 다 들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양평중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
다.
"아까부터 빈니(賓尼)의 말에는 관심이 없는 모양인데, 그냥 듣지
말고 나가시는 것이 어떠오?"
양평중은 빙글빙글 웃었다.
"아, 저는 그냥 심심해서요. 명성 높은 아미파 금강삼매장은 안
보여주시고 불법 강의만 하시니 졸려서…."
"임제의 도리를 듣지 않고 금강삼매장을 익힌다는 것이 가능하기
나 한 줄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건가?"
얼굴을 보이지 않았지만 비구니의 목소리는 노기에 가득차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양평중은 여전히 싱글거리며 웃었다.
"임제의 도리를 들으면 금강삼매장을 익힐 수 있나요? 금강대정신
공(金剛大靜神功)을 익히지 않고도 익힐 수 있느냐는 거지요."
비구니는 대답하지 않고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양평중은 계속 말
했다.
"금강대정신공을 가르쳐 주실 생각이 없으시면 그냥 시범만 보여
달란 이야기지요. 장법의 형이라도 배우게 말입니다. 괜히 불도(佛
道)가 뭐고, 조사(祖師)가 어떻고 하지 마시구요."
위사들 중에서도 그 말에 찬동하는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왓
다. 비구니는 손을 저었다.
"좋소. 그렇게 원하시니 바로 금강삼매장으로 들어가겠소. 이것이
제 일초식 천수휘화(天手揮花)요."
교두는 팔을 크게 휘두르며 장법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위사들
이 비로소 딴 소리 않고 거기 집중했다. 비구니는 열 두 초식을 다
전개하고 나서야 멈추었다.
"알아보겠소? 거기 아까 전부터 투덜거리던 시주부터 한 번 해보
시오."
"하라면 하지요."
양평중이 일어나 나가더니 금강삼매장의 열 두 초식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단 한 번 보고도 조금도 틀리지 않고 완벽히 따라해 보이
는 것이다. 초식 시전이 끝나고 양평중은 다시 한 번 웃었다.
"됐습니까?"
비구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저었다.
"들어가시오. 아까 말은 용서해 주겠소. 자, 다들 일어나서 시전
해 보시오. 방금 시주처럼 다들 하면 금강삼매장은 다 배웠다고 인
정하겠소."
용유진도 한 번 보고 그 동작을 따라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이상
하게도 다섯 번째 초식 금정천룡(金頂天龍)에서 비학주비(飛鶴珠飛)
의 초식으로 넘어가기 전에 꼭 쓰러지곤 했다. 옆에서 양평중이 비
웃었다.
"독립보(獨立步)를 제대로 못하니까 그런거야. 보법부터 다시 익
혀야 겠다. 너는."
용유진은 얼굴을 붉히며 다시 연습했다. 그러나 이 번에도 마찬가
지였다. 아무리 신경을 써도 금정천룡에서 비학주비로 넘어가는 순
간에는 꼭 넘어지는 것이다. 다섯 번째 넘어졌을 때 용유진은 이상
한 시선을 느꼈다. 교두 역할을 한 비구니가 복면 너머로 그를 바라
보며 이상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용유진은 머리를 긁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소질이 없어서요. 제대로 못 배웠나 봅니다."
"아니."
비구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주 잘하고 있네. 그런데 자네도 이곳 위사인가?"
용유진은 대답했다.
"된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위사가 맞긴 맞죠."
비구니는 머리를 흔들며 돌아섰다.
"아깝다, 아까워."
그 모습을 이해할 수 없는 용유진은 멍청히 서있기만 했다. 그런
모습을 멀찍이서 보는 사람이 있었다. 적중산과 염충이었다.
"어떻게 생각해?"
적중산의 질문에 염충이 대답했다.
"적당두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적중산은 피식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말 저놈은…."
그는돌아서며 마지막 말은 작게, 입속으로만 웅얼거렸다. 그러나
염충은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말대로 적중산과 그는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으니까.
"무공의 천재야!"
***
권각술 수련의 두 번째는 화산 복호권(伏虎拳)이었다. 어제와 마
찬가지로 온몸을 가린 사람이, 아마도 화산파의 도사로 짐작되는 교
두가 와서 가르쳐 주었다. 셋째 날에는 공동파( 派)의 복마장법
(伏魔掌法), 넷째 날에는 점창파(點蒼派)의 유운신법(流雲身法)이었
다. 이런 식으로 천하의 명문 정파들이 비전으로 분류하는 신공절기
(神功絶技)들이 동창의 수련장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말 이해가 안 가는군요."
용유진은 오늘도 수련에 그다지 좋은 모습은 보이지 못하고 있었
다. 유운신법을 연습하면서 몇번이고 발이 꼬여 갈지자 걸음을 해야
했던 것이다. 양평중이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저번날 아미파의 비구니가 말한 것처럼, 아니 내가 말했던가? 하
여간 각파의 무공에는 각파의 내공심법이 기본이 되어야만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어. 고도의 무공일수록 그게 더하지. 우린 이
미 어느 정도 권각술과 경신술, 몸 쓰는 법을 익힌 상태기 때문에
어느 무공을 보든 비슷하게 할 수 있지. 하지만 넌 그냥 그대로 따
라하기 때문에 발이 꼬이는 거다."
용유진의 수련법에 대한 충고였는데, 용유진이 궁금해 하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아니, 그거 말고 왜 각파에서 사람들이 와서 비전절기를 가르쳐
주는거죠?"
"동창에선 원래 그랬어. 매년 몇 차례씩 특별수련이 있는데, 그
분야의 최고수를 초빙해 오거든. 이쪽저쪽 다 싸매고 오지만 뻔하
지. 다 구대문파 사람들이야. 그것도 각파의 장로급 이상 고수지."
"비전이란 말그대로 비밀리에 전해져야 비전 아닙니까? 구대문파
사람들이 뭐가 아쉬워서 동창에 비전을 전해주죠?"
양평중은 피식 웃었다.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이었다.
"동창이 강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니? 원래 권력 앞에선 불가능
한 게 드문 법이란다."
양평중의 말은 대체로 옳았지만 틀린 것도 있었다. 그것을 허신이
지적해 주었다. 허신은 권각술을 배우는 보름의 기간이 끝나자마자
용유진을 찾아와 다시 몸 만들기로 들어가려 하는 그를 빼내어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달리 할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양평중이 잘 모르고 하는 소리지. 각파의 무공을 전해주는데 그
걸 정말로 속까지 다 드러내어 가르쳐 주는 경우가 어디 있겠느냐.
권력 앞에서는 불가능한 게 없다지만 사람의 신념까지 빼앗을 순 없
는거야. 그래서 네가 제대로 했다는거다. 금강삼매장? 그거 분명히
중간에 요결을 빼놓고 가르쳐 줬을거다. 유운신법? 그것도 전체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사소하지만 신법의 핵이 되는 어떤 부분은 감추고
안 가르쳐 줬을거란 말이지. 물론 눈에 보이게 그랬다간 두들겨 맞
지. 그러니까 진짜는 아니라도 나름대로 보완방법을 섞어서 전수를
해주는데, 너는 그 부분을 받아들일 수 없는거다. 의식적으로는 몰
라도 무의식적으로 네 몸이 엉터리를 거부하는 거지. 그러니까 발이
꼬이고, 넘어지는거야."
허신의 뒤를 묵묵히 따라가던 용유진이 불쑥 물었다.
"본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허신이 돌아보며 웃었다.
"난 이쪽저쪽에 눈이 없는 곳이 없단다."
그리곤 이런 농담도 할 틈이 없다는 듯 곧 표정을 굳혔다.
"사실은 그런 말이 교두들 사이에서 이미 돌았기 때문에 들은거
지. 그래서 너를 빼온 거다. 내 생각보다 훨씬 빨리 네가 발전하는
바람에 놈들이 네게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어. 이렇게 나가다간 내
기고 뭐고 일단 죽이고 보자고 나올 가능성도 아주 없지 않은 거지.
월인의 비밀을 푼다고 놔뒀다가 네가 공손조덕보다 더 골치아픈 적
이 되면 그거야 말로 난리 아니냐."
"그렇게 될 리가요…."
용유진이 웃었지만 허신은 웃지 않았다. 그는 용유진의 눈앞에 손
가락을 흔들어 '절대로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넌 꼭 공손조덕보다 강해져야 한다. 적어도 그만한 고수는 되어
야 한다. 그것도 그들이 허용한 시간 안에. 그래야 너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아."
"십 년, 이제 구 년 남았는데 그 안에 공손조덕 정도의 고수가 된
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십 년이 아냐. 그들이 허용한 시간은 그보다 훨씬 짧을거다. 아
마도 오 년? 아니면 삼 년? 그안에 해야 해."
그건 더욱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허신에게는 말하고 싶은 것이
더 많이 있어 보여 말도 꺼낼 수 없었다.
허신은 용유진의 어깨를 짚고 그 눈을 똑바로 들여다 보며 한 자
한 자 신중하게 말했다. 그나름의 무공 전수 방식이었다. 직접 무공
을 가르쳐 주지는 못하지만 제자가 그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바란
대로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지금 네게 석 달의 시간이 생겼다. 네가 수련 받는 걸 조금 과장
해서 알려줬더니 조비홍이 호의를 베푼거지.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사실 그쪽에서 보면 네가 꼭 와야 할 이유가 없지만, 네쪽에
서 보면 꼭 가야할 곳이다. 이 황궁 안에서 조홍의 힘이 못 미치는
유일한 장소가 지금 가는 곳이거든. 거기서 너는 시키는 일 이외에
도 다른 걸 하나 해야해. 옥로진기와 태청강기를 완벽히 익히고, 할
수만 있으면 월인의 비밀도 풀어서 고루마공까지 익혀라. 그래서 단
번에 임독(臨督)을 뚫고 생사현관(生死玄關)을 타통해서 반박귀진의
경지에 도달하는 거야. 그렇게 하지 못하면 다음 번 몸 만들기 수련
에서 너는 죽는다. 알겠지?"
용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토를 달 수도 없는 상황이지만 그또한
죽기 싫으면 열심히 해볼 수밖에 없었다. 잘 될 것 같지는 않았지
만.
허신은 품에서 몇 가지 물건을 꺼내었다.
"이걸 주마.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가 내놓은 것은 은으로 싼 둥근 환약 하나, 옥병 하나, 금으로
만든 작은 상자 하나였다.
"세 가지가 다 약이다. 다들 무공수련에 도움이 되는 약이지. 처
음 시작할 때 하나를 먹고, 고비다 싶을 때 또 하나, 위험할 때 마
지막 하나를 먹어라. 황궁은 보물창고라지만 사부가 구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어 미안하구나."
용유진은 사양을 하려다가 그냥 받아두었다. 예의를 차릴 시간이
없었다. 그들이 가려고 하는 곳에 이미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강복
사의 가장 뒤쪽 담장은 바로 황궁과 맞닿아 있었고, 작은 문이 하나
있었다. 지금 그들이 도착한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허신이 문을 열
고 말했다.
"그럼 잘 갔다 오거라. 석달 후에 보자."
용유진은 그제서야 가장 중요한 질문을 했다.
"근데 지금 제가 가야하는 곳이 어딥니까?"
허신이 머리를 쳤다.
"내가 그걸 말 안했나? 이 정신 좀 보게."
그는 문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높은 유리지붕 건물 보이지? 당마루와 활개장마루가 맞닿는
곳에 용두(龍頭)가 서있는 곳 말이다."
"용두는 어느 지붕에나 있는데요?"
"잘 보면 크기와 그 아래로 늘어선 잡상(雜像)들의 숫자가 다 다
를거야. 내가 말하는 곳은 잡상이 여덟 개 있는 곳이다."
용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찾아보지요. 거기로 가면 되는 겁니까?"
"아니."
허신은 고개를 저었다.
"거긴 절대 가면 안된다. 거기가 태후(太后)마마의 침전(寢殿)인
곤령궁(坤寧宮)이야. 갔다간 단번에 댕강이지. 그 앞에 또 큰 건물
이 있는데, 용마루를 물고 있는 용의 조각이 있어. 대문(大吻)이라
는 건데, 몸통에는 칼이 꽂혀있지. 그 아래로 석상들이 선 걸 세어
보면 꼭 열 개일거다."
"거기도 가선 안되겠죠?"
"물론이지. 거긴 황제폐하가 드나드시는 곳이야. 건청궁(乾淸宮)
이지. 그 두 건물로 가기 전에 왼쪽으로 빠지면 영화궁(永和宮)이
있는데, 거기로 가야하지. 거긴 용마루에 석상이 일곱 개 있을거야.
근데 담장은 세 길이나 하고 그 사이로 길은 많은데다 어디를 가도
거기가 거기인 것같아서 찾아가기가 어려울 거다. 지나가는 사람한
테 물어보고 가."
용유진은 쓴 웃음을 지었다. 그냥 간단하게 영화궁으로 가라고 하
면 될 것을 복잡하게 말할 이유가 무어 있다는 건가.
"거기 가서 뭘하라는 겁니까?"
허신은 다시 머리를 쳤다.
"아, 내 정신 봐라. 그것도 말 안했나? 거기 가면 할 일을 알려줄
거다."
"누가요?"
"석소봉이 지금 보령군주(寶鈴君主)마마의 경호책임을 맡고 있으
니까 그가 알려주겠지."
"결국…, 석소봉 당두를 찾아가라는 이야기군요."
허신은 모르는 척 돌아섰다.
"글세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내가 언제 아니라고 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