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용유진, 보물을 얻다.
1.
오늘의 조비홍은 여장(女裝)을 하지 않았다. 호화로운 탁자에 산
해진미를 준비하지도 않았고, 고풍스런 청동 향로에 향도 피우지 않
았다. 그는 푸른색 환관의 복장 그대로, 엷은 분을 바른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탁자 한쪽에 앉아 문을 열고 들어서는 용유진을 노려보
고 있었다.
용유진은 그 건너편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오늘은 술이 없습니까?"
"술을 마시고 싶나?"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이미 마신 것 같은데?"
조비홍은 토라진 아이처럼 여간해서는 술을 내 올 마음이 없어 보
였다. 용유진은 탁자에 팔을 괴고 다가앉아서 조비홍의 얼굴을 정면
으로 바라보았다. 조비홍이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둘은 마치 눈싸
움하듯 서로 노려보았다. 굳어있던 조비홍의 눈동자가 먼저 흔들렸
다. 그는 창백한 얼굴에 엷은 홍조를 띠면서 눈길을 돌렸다. 그러나
입으로는 욕설을 뱉어내었다.
"내가 네 놈의 눈을 뽑아내지 못할 줄 아느냐?"
용유진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나는 처음입니다."
"뭐가 처음이라는 거냐?"
"여자하고든 남자하고든, 또는 여자도 남자도 아닌 사람하고든 같
이 자본 적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조비홍의 얼굴에 흐르던 홍조가 약간 더 짙어졌다.
"그래서?"
"처음이니 당연히 어렵고, 준비가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해본
적이 없으니 잘할지 어떨지도 모르고요."
"잘 마음은 있는 모양이지?"
용유진은 역시 다른 소리를 했다.
"내가 좋습니까?"
조비홍은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인상을 썼다.
"뭐?"
"내가 좋으냔 말씀입니다. 나를 사랑합니까?"
"그럴 리가 없지 않으냐!"
"나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왜 나와 자려고 합니까?"
조비홍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성거렸다. 말도 안되는 질문을 들어
어이가 없다는 표시를 하는 것 같았지만 그보다는 용유진의 얼굴을
마주 보기 싫어서 그렇게 서성거리는 것 같았다. 용유진은 질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다그치지도 않았다. 그는 정말로 궁
금해서 그런다는 듯 담담한 어조로 계속 질문을 던졌다.
"저는 상대를 좋아한다면 그만큼 상대를 배려해 준다고 들었습니
다. 그렇다면 강제로 어쩌려고 하지는 않겠죠. 조 부내관령님은 절
좋아하는 게 아니면 그냥 소유하고 싶어하시는 겁니까? 제게 그만큼
의 매력은 있는 겁니까?"
"쓸데없는 소리! 이런 일에 말은 필요 없는 거다!"
조비홍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용유진의 멱살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침상으로 던진 다음 그 위로 올라탔다. 두 무릎으로 용유진의 허벅
지를 누르고 팔로는 용유진의 어깨를 눌러 반항하지 못하게 한 다음
입술을 탐했다. 그러나 그가 그럴 필요는 없었다. 용유진은 반항하
지 않고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조비홍은 용유진의 입술에
서 자신의 입술을 떼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용유진의 눈동자가 고
요하게, 흔들림 없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전처럼 반항하지 않는 거냐? 이번에도 내 입술을 물어뜯어 보
시지?"
"반항하면 이번에야말로 절 죽이실 거 아닙니까?"
조비홍은 잔인하게 웃었다.
"물론이다. 하지만 오늘은 반항하지 않아도 죽일 테다."
"제가 잘못 알았습니다. 조 부내관령님은 절 미워하셨던 거군요.
저를 능욕하고 죽이고 싶을 정도로…."
"잘 아는구나, 잘 맞춘 상이다."
조비홍은 다시 용유진의 입술을 탐했다. 용유진의 입술을 뚫고 조
비홍의 혀가 들어왔다. 용유진은 순순히 이를 열어주었다. 뜨겁고,
미끈미끈한 혀가 용유진의 이를 스치고, 혀를 핥았다. 혀끝을 희롱
하듯 민활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용유진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느낌
조차도 없었다. 그는 단지 반항하지 않을 뿐이었다. 조비홍의 혀가
돌아갔다. 입술이 떨어지고 대신 손바닥이 용유진의 뺨에 와 후려치
고 지나갔다. 조비홍은 용유진을 깔고 앉은 채 만족스러운 듯한 대
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그의 눈은 슬퍼보였다.
조비홍은 용유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랑한다, 욕심을 느낀다, 미워한다 떠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 너를 희롱하고, 네게 수치를 주는 것뿐이다. 나는 네게서
내 욕망을 풀 수 있으면 되는 거다. 오늘 내 욕망을 채우고, 내일
또 허탈해지면 다시 다른 이쁜 소년에게서 욕망을 풀고, 그러면 그
만이다. 이런 일에는 진실이란 정말 한 오라기도, 한 톨도 필요치
않지. 나는 네 입술을 빨아 마시고, 네 음경(陰莖)과, 내게는 없는
네 불알과 네 가슴을 맛보면 그걸로 만족이다. 네가 수치스러워 얼
굴을 붉히고, 몸을 뒤척이는 걸 보는 게 내 기쁨이다. 남자도 여자
도 아닌 것에게 희롱을 당하면서도 발기(勃起)해서 꿈틀대는 네 음
경을 조롱하는 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다."
"거짓말을 하는군요."
"뭐라고?"
용유진은 손을 들어 조비홍의 뺨에 대었다. 조비홍이 그 손을 쳐
서 떨어내었다. 용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조 부내관령님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눈동자는 불안하
게 움직이고, 뺨은 마음 속에 없는 말을 하느라 굳어있는게 증거입
니다. 조 부내관령님은 방금 말한 것이 아닌 다른 걸 제게 바라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조 부내관령
님이 하시는 것처럼 완력으로 해서는 얻을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건 알겠군요."
"건방진 소리!"
조비홍의 손이 다시 올라갔다가 용유진의 얼굴로 떨어졌다. 눈에
서 불똥이 튀길 정도로 강한 일격이었다.
"죽여버리겠다! 네까짓게 뭘 안다고 건방진 소리냐! 비틀어 죽여
버리겠다! 찢어죽여 버리겠어!"
조비홍의 손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고, 다시 또 올라갔다가 내
려와 용유진을 때렸다. 일방적인 구타였다. 여자의 손처럼 연약해
보이던 손이었지만 한 대씩 맞을 때마다 무거운 몽둥이에 두들겨 맞
는듯한 충격이 용유진에게 가해졌다. 내력(內力)이 몸에 충만해 있
어서 무의식중에 손끝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런 손을 마
음 먹고 휘두르면 사람 하나 죽여버리기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용유진은 아뭇소리 없이 두들겨 맞았다. 반항도, 방어도 하지 않
았다. 그러다가 조비홍이 잠깐 손을 멈추는 사이, 손을 내밀어 명치
를 쥐어 박았다. 조비홍이 '억' 소리를 내며 굳어졌다. 그 얼굴에
용유진의 두 번째 주먹이 꽂혔다. 조비홍은 피를 흘리며 옆으로 꼬
꾸라졌다. 용유진은 그 기회를 타서 침상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
나 조비홍이 그렇게 놔두지를 않았다. 불의의 일격에 당하긴 했지만
조비홍의 무공은 건재했다. 그리고 원래 그가 익힌 무공이라는 것이
이런 종류의 타격에 강한 것이었다. 두 번의 공격이 다 급소에 격중
했지만 옥로진기가 본능적으로 발동해 요혈을 보호했기 때문에 큰
타격은 받지 않았던 것이다.
조비홍은 코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용유진부터 잡기 위해 손을 뻗
었다. 용유진의 옷이 어깨죽지부터 찢어져 나갔다. 용유진은 조비홍
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둥거리다가 생각을 바꿔 당기는 대로 끌
려갔다. 그리고 그 탄력으로 팔꿈치를 휘둘러 조비홍의 배를 찌르려
했다. 조비홍은 자유로운 한 손으로 용유진의 팔꿈치를 잡아 비틀었
다. 이번엔 진짜로 내공을 사용한 손짓이었기 때문에 용유진은 침상
위에서 가랑잎처럼 돌아 얼굴부터 처박혔다. 그러나 용유진도 당하
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무릎을 치켜 올려 조비홍의 사타구니를 노
렸다. 침상에 엎드린채, 그것도 한쪽 팔꿈치를 제압당한 상태라 별
위력은 없었지만 노리는 장소가 장소라 조비홍은 다리를 오무려 그
공격에 대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소위 말하는 허
초(虛招), 속임수였다. 용유진의 진짜 공격은 오른손 수도(手刀)였
다. 오성밖에 익히지 않았지만 지금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최강의 공
격, 단혈철수(丹血鐵手)를 사용한 것이다. 붉게 달아오른 손 끝에
얼마 익히지는 않았지만 지금 그의 몸 속을 지배하는 가장 큰 힘,
옥로진기가 실렸다. 그 손끝이 조비홍의 어깨죽지를 후려갈겼다.
"큭-!"
조비홍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용유진의 이번 공격은 그에게도 상
당한 충격을 준 것이다. 최소한 오른쪽 어깨부터 그 아래로는 쓰지
를 못할 정도로 강한 타격이었다. 그 충격에 그는 잡고있던 용유진
의 팔꿈치를 놓아주어야 했다. 용유진은 그 기회를 틈타 조비홍으로
부터 떨어지기 위해 몸을 굴렸다. 그러나 방향이 좋지 않았다. 둘
다 침상에 누워있는데, 용유진이 몸을 굴려간 곳은 하필이면 침상이
벽과 맞닿아있는 쪽이었다. 실수를 깨닫고 몸을 일으키려 할 때 조
비홍의 진짜 일격이 그에게 가해졌다. 그의 왼쪽 손이 무거운 물건
을 밀 때처럼 펼쳐져서 천천히 다가왔다. 평소보다도 더욱 하얗게
보이는 그 손은 용유진에게 닿지 않고 중간에서 멈췄다. 그 순간 용
유진은 밝은 빛을 본 것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그것이 착각인지 아
닌지 알아보기도 전에 그는 가슴팍에 엄청난 충격을 느끼고 뒤로 날
아가 벽에 부딪혔다. 그리고 꼿꼿이 앞으로 쓰러졌다. 뜨끈한 피가
코와 귀, 입과 눈으로부터 쏟아지는 것 같았다. 눈앞은 캄캄해지는
데. 사방은 온통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그 상태로 용유진은 혼절해
버렸다.
***
용유진과 방을 같이 쓰는 번역, 양평중은 매우 심하게 코를 고는
사람이지만 잠귀는 또 매우 밝았다. 그래서 바로 옆방을 쓰는 당두
위류향의 심부름꾼 겸 경호원으로 지금 이 방에서 지내게 된 것이
다. 그도 천자조를 구성하는 열명의 위사중 하나였기 때문에 위류향
을 직속상관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가 그의 방을 중심으
로 벌어지는 이상한 낌새를 제일 먼저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고 눈을 번쩍 떴지만 코고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이불 밑에 감춘 칼 손잡이를
더듬어 잡고, 펄쩍 뛰어 일어났다. 이미 그의 손에는 검은 칼이 들
려서 어둠 속에 묵광을 감추고 있었다.
아까 허신이 왔을 때처럼 인기척을 느꼈을 때는 소리 질러 상대를
확인하는 것이지만, 지금처럼 심상찮은 기색이 감돌 때는 오히려 소
리를 내지 않는 것이 기본이었다. 혹시 아니라 해도 지금 소리를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일어나는 순간 이미 그는 누군가의 손에
제압당했던 것이다. 그 누군가는 그의 어깨를 감싸고 입을 막은 상
태로 그의 뒤에 서 있었다.
'누구…?'
의문을 느끼기도 전에 그의 귓속으로 모기소리같은 전음이 전해졌
다.
'코를 계속 골아라!'
위류향의 목소리였다. 양평중은 안심하고 코를 다시 골았다.
"꺽…, 꺽…, 크르르 퓨우…, 크르릉…!"
한참 코를 골다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낸 뒤 다시 코를 고는 시늉
을 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눈을 계속 깜박거렸다. 어둠에 익숙해
진 그의 눈에 방안의 모습이 들어왔을 때, 그는 정말로 숨이 넘어갈
뻔했다. 방 안에는 그와 위류향만 있는줄 알았는데 또 다른 사람들
이 있었다. 지금 그의 입을 막고있는 사람, 그리고 그의 정면에 위
류향과 나란히 서있는 덩치 큰 여인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방문을
지켜 보고 있었다.
왜 그러는지 양평중이 잔뜩 궁금해 하고 있는데 의문은 곧 풀렸
다. 문틈으로 얇은 물체가 하나 들어왔다. 종잇장처럼 얇은 칼날,
문틈으로 찔러넣어 빗장을 벗기거나 자르거나 할 때 쓰는 도구로 도
둑들이 구비하고 다니는 기본 장비 중 하나였다.
'여기 도둑이?'
양평중은 기가 막혀 넘어갈뻔했다. 어느 미친 도둑이 동창을 털려
고 한단 말인가. 그러나 분명 눈앞에 보이는 것은 도둑의 행동이었
다. 얇은 칼날이 빗장을 슬쩍 들어올려 걸쇠에서 빼내었다. 보통 이
렇게 되면 빗장이 떨어지기 마련, 그러나 빗장은 칼날이 자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대로 붙어 있었다. 칼날이 앞으로 더 찔러들고, 그
다음엔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빗장이 같이 아래로 내려가 바닥에
닿았다. 그제서야 칼날은 다시 문틈으로 빠져 나갔다. 양평중은 그
가 방금 도둑은 빗장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생생한
해결책을 본 것임을 알았다.
'불쌍한 놈!'
저렇게 열심히 문을 따고 들어와 봤자 훔쳐갈 것은 없고, 잡을 사
람만 바글거린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슬퍼할까 잠시 생각해 보는 양
평중이었다. 매우 희극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위류향과 큰 덩치를
가진 사람은 전혀 웃지 않았다. 오히려 매우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긴장은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할 때 한꺼번에
폭발해 버렸다.
문이 종잇장만큼 미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덩치 큰 사람이
문을 걷어차 날리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위류향이 그 뒤를 따랐다.
그의 손에는 이미 양평중이 든 것과 같은 검은 색 칼이 들려 있었
다. 양평중의 뒤에 서있던 사람이 한줄기 바람처럼 문을 통해 빠져
나갔다. 이렇게 쾌속한 신법은 한다 하는 고수가 수두룩한 동창의
위사 양평중으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평중이 정말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문을 열다가 그 문에 깔려버린 도둑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도둑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간 위류향과 두 사
람이었다. 그들이 긴장해서 기다린 것, 그리고 지금 쫓는 것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가…!'
양평중은 불의의 일격에 날아갔다가 지금에야 정신을 차리고 일어
나려 하는 도둑에게 다가가 그 가슴을 내질러버렸다.
'한참은 정신을 못 차리겠지!'
그렇게 간단히 도둑을 처리하고 바라본 뜰에서는 싸움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니, 싸움이라 할 수도 없는 이상한 풍경이 벌어지고 있었
다. 침입해 온 적들은 하나같이 복면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칼을
휘둘러 스스로의 가슴에 꼽거나 목을 베어가고 있고, 위류향과 두
사람은 그것을 막으려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양평중의
뒤에서 튀어나온 사람의 외침으로 밝혀졌다.
"한 놈이라도 생포해! 모두 죽여선 안돼!"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내에 서있는 사람은 그들 네 사
람뿐이었다. 침입해온 자들은 이미 모두 나름의 방법으로 자결해 버
린 것이다. 양평중의 뒤에 서있던 사람이 투덜거렸다.
"젠장, 지독한 놈들! 하나같이 독을 물고 있었군!"
목소리가 어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유심히 살펴본 양평중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여자였다. 그것도 곰처럼 거대한 덩치를 가진 여자,
위류향과 함꼐 서있던 그 덩치에 못지않은 덩치였다. 게다가 그 손
에 들린 거대한 칼은….
"아! 천당두(天 頭)님!"
동창 안에도 열 명밖에 없는 일급 당두 중 하나, 은신술의 달인인
천옥낭(天玉娘)이 바로 그 덩치였던 것이다. 게다가 나머지 덩치는
역시 일급 당두 중 하나인 추적술(追跡術)의 명인인 적중산(狄重山)
이었다.
"적당두(狄 頭)님도…!"
양평중은 과거 그들에게서 은신술과 추적술을 배운 적이 있었기
때문에 정체를 알아본 것인데, 그들이라면 자신의 방에 몰래 나타난
것을 납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적중산은 그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그래, 나다. 내가 돌아와서 불만이냐?"
"그럴리가요…!"
양평중은 급히 손을 저었다. 적중산과 천옥낭이 모종의 임무를 띠
고 돌아다니고 있다는 정도는 그도 알고 있었다. 사실은 일급 당두
전원이 그런 상태였다. 그들이 동창내에 모습을 보일 때는 간혹 후
배 위사들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혹은 황궁에 큰 일이 생
겼을 때 외에는 없었다.
'이번엔 뭔가?'
궁금해 하는 와중에 이변이 생겼다. 칼로 스스로의 가슴을 찔러
죽은 시체 중 하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쏜살같이 도망가기 시작한 것
이다. 적중산이 양평중을 돌아보고, 천옥낭이 시체들의 복면을 벗기
느라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틈에 벌어진 일이었다. 적중산이 소리쳤
다.
"저놈이다! 쫓아가!"
그 말이 떨어지기 전에 위류향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곧 부활한 시체와 위류향은 어둠의 그늘로 사라져 버렸다. 적중산이
다시 소리쳤다.
"조장이 갔는데 뭘하나?"
"아, 예!"
양평중이 위류향의 뒤를 따르려하자 적중산이 다시 소리쳤다.
"혼자 가서 뭘 하겠다는거야? 애들 데리고 쫓아가! 위당두가 표시
를 남겼을거다."
"예, 예!"
양평중이 지시대로 움직이기 위해 몸을 날려 사라지자 적중산과
천옥낭은 눈빛을 교환하더니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재빨리 양평
중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애초에 그들이 노린 것이 이것이었다.
책상자를 찾은 것은 천옥낭이었다. 어렵지 않았다. 그것은 용유진이
두고 간 대로 방 한 구석에 놓여 있었다.
"이건가봐요!"
적중산이 달려들어 책상자를 뒤집어 쏟아놓고 책장들을 넘기기 시
작했다. 천옥낭도 몇 권의 책을 들고 위에서부터 펴보았다. 역시 여
자라 적중산보다는 세심하게,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차근차근 읽
고 있는 것이다. 책은 서른 권 가까이 됐고, 사정상 불은 켤 수 없
었기 때문에 대충이라도 내용을 확인하는데 시간이 적지 않게 걸렸
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이게 뭐야!"
서른 권 남짓한 책들은 하나같이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책들
이었다. 불경, 도가 경전에 시서(詩書)나 문집(文集)들. 일반 문사
들이 들고 다니는 책상자의 내용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천옥낭
이 고개를 저었다.
"자세히 다시 보세요. 평범한 건 아니네요."
그녀가 펴서 보여준 책은 화엄경(華嚴經)이었다. 시중에서 흔히
살 수 있는 책, 그러나 그 내용은 전혀 화엄경이 아니었다. 콩알만
큼 작은 사람이 검을 들고 갖가지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그림. 말하자
면 무공도보(武功圖譜), 그 중에서도 검법의 투로(套路)를 그려놓았
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이건 난파풍검법(亂波風劍法)이잖아."
아미파(峨嵋派)의 비전이라는 난파풍검법을 해설해 놓은 난파풍검
법도보(亂波風劍法圖譜)가 화엄경이라는 제목을 달고 책상자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적중산은 얼른 다른 책도 펴서 살펴 보았다. 그가
든 책은 백거이(白居易)의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 중 한 권이었다.
이것도 무공비급이었다. 앞부분은 백거이의 시로 채워져 있었지만
중간부터는 검법비급, 화산파(華山派)의 이십사수매화검법도록(二十
四手梅花劍法圖錄)이었다.
적중산은 내 팽개친 책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하나같이 무공비급
이었다. 정확하게는 스물 일곱 권의 검법비급이었다.
"이런 거였군!"
팔비원후의 보물이란 이 스물 일곱 권의 검법비급이었던 것이다.
하나같이 각파의 비전으로 분류되는 검법들이었다. 중주사견이 노릴
만한 물건인 셈이다. 그러나 적중산과 천옥낭으로서는 실망스러운
물건이었다.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는 별로 중요한 것
이 아니었다. 그들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동창의 서고(書庫)에서 꺼
내 볼 수 있는 것이 이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설혹 구할 수 없는
것이라도 그들의 욕심을 자극할만큼 진귀한 것은 없었다. 천옥낭이
실망한 기색으로 말했다.
"별 것도 아닌 걸 갖고 호들갑을 떨었군요."
마찬가지로 실망해서 혀를 차던 적중산이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무면호만 불쌍하게 됐군."
아까 죽은 시늉을 하다가 도망간 시체가 바로 무면호임을 알아보
았기 때문에 하는 소리였다. 천옥낭의 표현대로 하자면 정말 별 것
도 아닌 것을 위해 수하들 전멸시키고 그 자신은 반쯤 죽어 도망가
야 했던 셈이었다.
"이젠 어쩌죠?"
"무면호를 골탕 먹인 걸 위안으로 삼아야겠군. 근데 뭘 어쩌자는
거요?"
"이 책들을 어떻게 하느냐는 거죠."
"아, 이거…."
적중산은 잠깐 궁리하더니 손을 저었다.
"그냥 두고 가지 뭐. 이런 하찮은 것들 때문에 경각심을 갖게 할
필요는 없지."
천옥낭은 아쉬운 빛을 띠고 바라보았다.
"그래도 꽤 귀중한 것들인데…."
적중산이 그녀를 위로했다.
"용가 꼬마녀석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훨씬 더 귀중한 것이니
아까워하지 말아요. 대부 어른의 병만 고치면 우리 손에 천하가 떨
어질 수 있으니까."
천옥낭은 그 말에 표정을 밝게 하고는 책을 모았다.
"근데 그 꼬마 놈은 어디 갔죠?"
"조비홍이 데려간 것 같은데…."
천옥낭이 깜짝 놀라 말했다.
"그럼 큰 일이잖아요. 물건에 금이라도 가면…."
"괜찮소. 죽이지만 않으면 고생 좀 시키는 건 차라리 괜찮지. 음
… 조비홍의 손에 죽어도 괜찮고. 내일 대부께 보고를 하겠지만, 아
마 대부 어르신도 그냥 두라고 할거요. 조비홍에게 경고했다가는 대
부어른의 정체가 새어나갈 위험이 크고, 또 조비홍이 죽인다 해도
거기에는 우리 손이 들어간 게 아니니까 돌아올 책임도 없으니 말이
오."
"꼬마가 죽어도 괜찮다고요?"
"죽으면 내기에서 우리가 이긴 것이니까 공손조덕에게 요구할 게
있지 않소. 그에게 타격을 입히는 효과도 있으니 좋고."
"그럼 우리 손으로 죽여 버리면 어때요? 그게 깨끗하잖아요."
"우리 손에 죽으면 안되지. 만에 하나라도 그 사실이 드러나면 나
머지 세 세력의 공동 목표가 되어버리잖소. 가만히 놔둬도 되는 걸
그런 위험 부담을 안고 손을 더럽힐 이유가 뭐 있겠소. 당신도 설마
그 녀석이 십년 안에 십대고수의 하나가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
지?"
"그렇군요. 가만히 놔둬도 내기는 이긴건데…, 우리가 손을 쓸 이
유가 없지요."
천옥낭과 적중산은 미소를 교환하며 밖으로 나갔다. 마침 위류향
이 돌아오고 있었다. 옆구리에 한 사람을 끼고서.
"그건 뭔가?"
위류향은 그 사람을 떨어뜨려 놓았다. 양팔이 완전히 잘려나간 사
내였다. 가늘게 가슴이 움직이는 걸로 보아 숨은 쉬는 모양이었다.
적중산은 그가 바로 아까 잡혀간 해청임을 알아보았다. 위류향이 말
했다.
"놈이 도망간 곳에 있었습니다."
"놈은 어떻게 됐나?"
"거기 다른 조력자들이 있어 결국 놓쳤습니다."
"조력자들 중에 하나라도 잡은 자가 있나?"
"없었습니다. 전원…."
위류향은 치를 떨었다. 그것으로 그가 방금 겪은 일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전원 죽었습니다."
"됐네, 수고했어. 이 자는 우리에게 맡기고 가서 쉬게. 아, 그리
고 오늘 밤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 신경쓰지 말게. 아마도 야간
경계를 강화하라는 지시는 내리겠지. 그건 진일동 당두와 상의해서
처리하도록 하고…."
적중산은 해청을 안고 돌아서다가 잊은 것이 생각났다는 듯 이마
를 치고는 돌아보았다.
"여기서 도망간 자 말고는 더 도망간 자는 없었나? 그 자보다 더
강해서 그냥 도망간 자는 없더냐는 것이지."
"있었습니다. 저보다 고수로 짐작되는 자가…. 그가 여기서 도망
간 자를 안고 도주했습니다."
적중산과 천옥낭이 마주 보았다. 그들의 눈빛이 교감을 이루고 있
었다. 적중산은 다시 위류향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제도 내가 해결할테니 자넨 잊게."
동창에서는 잊으라면 잊는 것이다. 적어도 잊는 흉내는 내야 한
다. 위류향은 고개를 숙여 명령에 따르겠다는 표시를 해 보였다. 그
러나 잊을 수는 없었다. 잊어서도 안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밤
의 일이 용유진과 관계 있는 것이 분명한 이상, 조만간 또 다른 일
이 생기고 말 것이므로. 그땐 또 싫어도 개입할 일이 생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