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행표-19화 (19/37)

2.

술을 많이 마시고, 안 마시고는 체력과 의지력의  문제다. 적당히

체력이 있고, 마셔야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마실  수 있는

것이다. 술에 취하고 안 취하고는 경험의 문제다.  한 번 곤죽이 되

도록 퍼마셔본 사람은 취했을 때의 경험을 몸이 기억하기 때문에 어

지간해서는 안 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노력으로 어떻게든

발전 가능한 분야다. 그러나  술을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는 소질의

문제고, 깨달음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다. 생전  안 마셔보던 사람이

한 잔만 마시고도 빠져버리는 경우가 있고, 매일같이 마시던 사람도

술의 진미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버리는 일

도 있는 것이다. 또 어느날 우연히 마신 술 한 잔으로 대오각성하듯

깨달아 술을 깊이 사랑하고 경애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오늘 용유

진이 그런 경우였다.

백리제일루는 여전히 번창하고, 턱  긴 주인도 여전히  정정했다.

모든 것이 몇 개월 전과 변함이 없어 보이는데 용유진은 들어서면서

부터 무언가 빠진 듯한 상실감을 느꼈다. 무엇에  끌리기라도 한 듯

걸어들어가 자기도 모르게 이층 동북방 창가의  탁자에 앉자 용유진

은 '아'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모든 것은  전과 같지만, 같지 않아

도 느끼지도 못했겠지만 어딘가 빈 것같은, 무언가 빠진 듯한 느낌,

그 부재감(不在感)의 원인이 월령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녀를 만나서부터 헤어질 때까지의  기간이란 고작 보

름 정도. 그 짧은 기간동안 만들어진 기억이  이토록 아련한 그리움

의 원인으로 남을줄은 몰랐었다. 가슴이  저리도록 깊은 상실감으로

남을줄은 몰랐었다.

'월령은 잘 돌아갔을까?'

그날 월령을 만나 이별을 할 때, 떠나지 않으려는 그녀를 그는 억

지로 밀어서 집으로 돌려 보냈었다. 동창에 들어가면 얼마나 갇혀있

게 될지 몰랐고(당시 그는  영낙없이 갇히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

다),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행동이었다. 잘

못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에게 물어봐도 그때는 그럴 수밖

에 없었을 거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냥 밖에서 기다리

라고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월령이 보고 싶었다.

"뭘 드릴깝쇼?"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들자  거기 점소이가 서 있었다.  낯익은

얼굴, 전에 여기에서 소란을 피울 때 쫓아왔던 그 점소이였다. 용유

진은 미소를 지었다. 점소이는 왜 웃나 하는  표정으로 멀뚱멀뚱 쳐

다 보았다. 못알아보는 모양이었다. 용유진은 동전  한닢을 꺼내 탁

자에 올려놓았다. 점소이는 그걸 한참 내려다 보더니 다시 용유진을

보았다.

"이게 뭡니까요?"

"돈이잖아요."

"돈인줄은 아는데…, 이걸 왜 내놓으셨습니까요?"

"이 돈으로 먹을 수 있는 것만큼 가져다 달라는 뜻입니다."

"이 돈으로요? 이것만으로요?"

용유진은 애초의 여유를 잃고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자리가 불편

해졌다. 의자에서 가시가 돋아나와  점점 크게 자라고  있는 것같았

다.

"이 돈이면 술 한 잔은 마실 수 있다고 들었는데…?"

점소이는 손을 높이 들었다가 탕 소리를 내며 탁자에 올려놓았다.

동전이 펄적 뛰어올랐다가 떨어졌다.

"동전 한닢으로 마실 수 있는  술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요!  장난

치시는 겁니까요? 우리 백리제일루를 우습게 보는 겁니까요?"

점소이 특유의 말투에 강세가 들어가 적지 아니  우습게 들렸지만

용유진은 웃지 않았다. 웃을 여유가 없었다. 돈  없이 술 먹으러 왔

다가 창피를 당하고 있으니 옆에 쥐구멍이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

었다. 그때, 한 사람이 나타나 점소이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너 장사 망칠 일 있냐?"

백리제일이었다. 점소이가 비명을 질렀다.

"에고…, 턱으로 찌르진 말고 그냥 말씀하세요."

"이것이!"

백리제일은 점소이의 머리를 두들겨주고는 용유진을  향해서는 만

면에 미소를 지으며 굽신거렸다.

"미안하이. 교육을 잘못 시켰는지  영 버릇이 없어서…. 곧  술을

내오지."

용유진은 손을 저으며 일어섰다.

"아닙니다. 돈이 안되는줄 알면서도 온 제가  잘못한거지요. 그냥

가겠습니다."

"아니, 아니야. 한 푼은 돈이  아닌가? 아까 손님이 말한대로  한

푼어치만 드시면 되지. 한  푼어치를 원하는 분께는 한  푼 어치를,

두 푼어치를 원하시는 분꼐는  두 푼어치를 드리는 게  우리가 하는

일 아닌가."

백리제일은 손가락을 모아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며 웃었다.

"땅을 백 길 파봐도 반 푼도 안 나오는 게 세상인데, 손님을 가려

서야 무슨 수로 돈을 벌겠나. 손님도 이왕 오신 김에 팔아주고 가시

게나. 그동안 앉아 있었던게 아깝잖은가."

용유진은 고소를 지으며 주저 앉았다. 왔으니 한 푼어치라도 팔아

주고 가라는 강요 비슷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백리제일이 덧붙여

말했다.

"한 푼으론 정말 술 한  잔밖에 안되지만 오늘 우리 애가  실례를

했으니 간단한 안주  한 가지는 무료로  드리지. 어떤 걸  원하시는

가?"

아주 노랭이는 아니다 싶어서 용유진은 백리제일을 다시  보게 되

었다.

"낙화생(落花生 : 땅콩)이 술안주로 괜찮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걸로 주시겠습니까?"

아버지가 낙화생을 안주로 술을 마시는 걸 본 적이  있어서 한 소

리였다. 그런데 백리제일의 얼굴이 순식간에 울상이 되었다.

"음…, 낙화생이 중원에서는 재배가 안된다는 사실을 혹시 아시는

지?"

용유진은 정말로 그걸 몰랐기 때문에 놀랐다.

"그런가요? 그럼 어떻게 구하는거죠?"

"대월국(大越國 : 베트남)에서  수입해 오는거지. 그거  보기와는

달리 비싼 걸세."

원래 명나라 때까지는 중국에서 낙화생을 재배하지  않았다. 그래

서 남쪽 나라에서 배로 수입해 왔는데, 정확하게는 대월국이 아니라

간포채(柬 寨 : 캄보디아)에서 들여오는 것이었다. 아무나 먹을 수

있는 안주가 아니었다. 용유진은 황급히 손을 저었다.

"그럼 다른 걸로, 아무거나 주십시오."

"아무거나…? 그런 귀한 안주를?  차라리 낙화생을 드리지.  우리

집은 영세해서 아무거나라는 안주는 없다네."

백리제일이 점소이를 돌아보며 눈을 부라렸다.

"너랑 나랑 둘중에 누가 주인이냐?"

점소이가 뚱하니 서있다가 대꾸했다.

"물론 주인님이 주인님이시죠."

"그럼 왜 술이랑 낙화생 안가져와. 내가 그것까지 해야겠냐?"

"그냥 가져오라고 하면 될  일을 참 복잡하게도  말씀하십니다요.

노인네가 정력이 승(勝)하면  입으로만 모인다고 했는데,  주인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요."

되는대로 지껄이던 점소이는 백리제일의 표정이  점점 험악해지자

깜짝 놀라 도망갔다.

"가져오겠습니다요."

용유진은 주위가 조용해지자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었다.

"허주사님을 아십니까?"

백리제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용유진에게  가까이 와

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놈 얘기는 꺼내지도 말게. 난 그놈이랑 동기라는 게 창피한 사

람일세. 자네가 그놈 제자가 됐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자네도 신중

하게 한 번 다시 생각해 보는게 좋을걸세. 그놈 사기꾼이야."

그는 다시 허리를 세우고 물었다.

"그럼 자네 술 마시러 온 게 아닌가?"

"술이야 마시러왔지만…, 어르신께 한 가지 배울 것도 있지요."

"뭘? 내가 뭘 가르쳐줘? 난 아는게 없는 사람이야."

용유진은 아주 곤란해졌다. 이렇게  시치미를 떼는 걸 보면  쉽게

가르쳐줄 사람이 아닌 것이다. 뭘 배워야 할지  모르니 조르기도 어

려운 처지였다.

"그럼…?"

"술이나 마시고 가게."

백리제일은 모른척 사라지고, 술이 나왔다. 엄지 손가락 마디만한

작은 잔에 반쯤 담긴 술. 그리고 낙화생 한 알이 고작이었다. 그 낙

화생 한 알을 담고 나온 접시가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그 무엇보다

도 그런 걸 앞에 두고 앉아있는 그 자신이 불쌍해 눈물이 나올 지경

이었다. 용유진은 혹시 주변에 앉은 손님들이 볼까봐  고개를 푹 숙

이고 잔을 들었다. 단번에 마셔버리고  나갈까도 생각했지만 그래가

지고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든 버티고 앉아

있어야 기회가 나도 날 것이고, 불쌍해 보여도 보일 것이다. 용유진

은 술을 혓바닥으로 핥는 정도만 마시고는 다시  내려 놓았다. 낙화

생도 눈꼽만큼만 떼어 입에  넣었다. 처량하기 짝이  없었지만 맛은

있었다.

한 시진이 지나고 두  시진이 지났다. 대낮에 들어왔는데  어느새

황혼녘이 되었다. 용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비틀 헛 발걸음을

했다. 혀로 핥아만 먹었는데 어느새 술이  취한 모양이었다. 점소이

가 달려왔다.

"이상한 손님이네, 정말!"

용유진이 다시 비틀거리다가 손을 들어 점소이의 어깨를  잡고 겨

우 균형을 찾았다. 고개를 들어 점소이를 보는데  그 얼굴이 불콰한

것이 마치 말 술을 마신 사람같았다.

"기가 막혀서…!"

점소이가 그를 부축해서 계단을 내려와 출입구로 안내했다. 술 한

잔으로 한 말의 기분을 내는 이 인색한  손님을 얼른 쫓아버리고 싶

은 것이다. 계산대에 앉아있던  백리제일이 그 모습을  보고 일어났

다.

"어이, 자네 괜찮나?"

용유진은 점소이의 손을 뿌리치고 계산대를 짚었다. 술 취한 사람

의 행동 특유의 큰 동작으로 고개를 들어 백리제일을 바라보더니 다

시 손을 들어 그 어깨를 잡았다.

"하하!"

과장되게 웃고는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곤 한 마디 했다.

"맛있는 술이군요!"

용유진은 비틀거리며 출입구를 나가더니 곧 사라졌다. 백리제일은

용유진이 잡았던 어깨를 털고, 곤란한 듯 머리를 긁었다.

"재밌는 술꾼이 되겠군."

용유진은 비틀거리며 거리를 따라 걸었다. 누군가가  지금의 그를

보고 취했냐고 물으면 그는 '취하지 않았다. 단지 기분이 좋을 뿐이

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거리가  좁아 보이

고, 하늘은 손을 뻗으면  잡힐 것같이 가까워 보였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세상은 지금 그를  중심으로 도는

것 같았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같은 호기가  입을 뚫고 나올 것처

럼 부풀었다. 그때, 그게 보였다. 황금 사자상,  높은 돌계단, 청색

무복의 표사 둘이 창을 짚고  경계를 서는 대문에 가로  걸린 현판,

표국이었다.

용유진은 그 앞에 서서 한참을 올려다 보다가 아무 생각없이 대문

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고개를 쳐들고 현판을  올려다 보았다. 푸른

비단 바탕에 금박  글씨로 청화표국(靑華 局)이라고 쓰여  있었다.

비단은 원래 푸른 색이었는지도 몰라볼 정도로  색이 바래 있었지만

글씨는 광채가 번뜩일 정도로 새것이었다. 역사 깊은 표국의 현판은

대개 이런 식이었다. 바탕은 갈지 않고 글씨만 매년 새로 칠하기 때

문에 저런 모습이 되는 것이다. 현판과 거기 붙인 비단의 색을 보면

역사를 알 수 있다는 말이 그래서 가능했다.  무슨 보물이라도 보듯

이, 무지개를 쳐다 보듯이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보초을 서던

표사가 다가왔다.

"어이, 뭐하냐?"

용유진은 고개를 내려 표사를 보았다.

"멋진 현판이군요. 여긴 정말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겠지요?"

"백 년이 넘었지. 근데 넌 뭐하는 놈이냐?"

용유진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현판을 올려다 보았다.

"언젠가 이런 표국을 세우고 싶어하는 사람입니다."

표사가 어이 없다는 듯 웃었다. 그를 향해 용유진은  바보처럼 마

주 웃어보이고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잘 구경했습니다. 그럼 수고를…."

그리곤 돌아서려다가 문득 품 속에 손을 넣어 한  가지 물건을 꺼

내었다. 중주사견을 만난 날 폐묘에서 주은 물표였다.

"혹시 이런 거 보신 적 있습니까?"

표사는 그걸 받아들고 한참 살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게 뭔데?"

용유진은 다시 받아서 품속에 넣고는 히죽 웃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럼 전 이만…."

돌아서서 가는 용유진을 보며 표사가 중얼거렸다.

"별 미친 놈을 다…."

"방금 뭔가?"

표사가 놀라 돌아보았다. 청화표국의 대표두(大 頭) 만리표(萬里

飄) 해청(海淸)이 거기  서있었다. 표국을 나서다가  그가 용유진과

노닥거리는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표사는 얼른 변명을 늘어놓았다.

"별건 아닙니다. 술취한 꼬마놈이 대문 앞을 얼쩡거려서 혼내주느

라고…."

해청은 손을 저었다.

"그게 아니라 그 소년이 뭐라고 하면서 뭘 보여준  것 같은데, 그

게 뭐냔 말이다."

"글쎄요, 그게 나무 쪼가리인데…,  숫자가 새겨져 있더군요.  몇

번인지는 읽지 못했습니다만…."

까막눈인 표사가 그걸 알아볼  리 없었던 것이다. 해청은  인상을

그으며 명령했다.

"다음에 또 이 앞을 지나는 걸 보거든 내게 데려오도록. 알겠나?"

"예!"

시원스럽게 대답은 했지만 표사는 별로 머리에  담아두지 않았다.

백만이 넘는 사람이 사는 순천부, 하루에도 수천이 지나가는 거리에

서 같은 사람을 다시 본다는 것은 거의  있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

이었다.

용유진은 다음날도 백리제일루에 나타났다. 백리제일은 나와 보지

도 않았고, 점소이는 그가 내민 동전 한 닢을  보고 오만 가지 인상

을 쓰며 술 한 잔을 가져다 주었다.  오늘은 낙화생도 없었다. 그래

도 용유진은 좋았다. 소문대로 이곳의 술은  맛이 있었다. 두시진동

안 한 잔의 술을 마시니 더욱 맛이 있었다.  그는 술을 핥으며 상념

에 빠져들었다가 저녁이 되자 다시 강복사로 돌아갔다.

또 그다음날도 용유진은 백리제일루로 왔다. 그리고 그 다음날도,

다시 그 다음날도 나타났다. 그가 내미는 것은 항상 동전 한 닢, 그

대가로 받는 것은 술 한  잔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낸  어느날 술

대신 백리제일이 탁자 앞에 나타났다.

"우리집 술이 맛있는 모양이지?"

"그렇더군요."

"이렇게 자주 우리집을 이용해주고, 내 술을 사랑해주니  주인 이

전에 한 사람의 술꾼으로서 자네를 대접해주지 않을  수 없군. 혼자

마시는 것도 좋지만 같이 마셔도 좋은 것이 술이지. 나와 같이 가서

한 번 마셔 보겠나?"

용유진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지요."

백리제일을 따라 간 곳은 주방이었다. 십여명의  요리사들이 정신

없이 움직이는 한 구석에 상자와 단지로 자리를  만들고, 붉은 봉인

을 붙인 단지 하나를  조심스럽게 들고왔다.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봉인 가장자리가 부스러질 정도였다. 그걸  신주단지 모시듯 조심스

러운 손길로 뜯자 술향기가 주위를 감쌌다. 백리제일은 황홀한 표정

으로 코를 움찔 거리고, 숨을 들이 마셨다.  향기 한 줄기도 놓치기

싫은 기색이었다.

"정말 술을 좋아하시는군요."

"자넨 좋지 않나?"

"저야 이제 겨우 배우는 몸인데 노사(老師)의 경지를 짐작이나 하

겠습니까?"

백리제일은 칭찬에 만족한 듯 합죽이가 되도록 미소를 지었다. 그

리고 한 잔을 따라 주었다. 한 방울도 흘릴세라 극도로 조심하는 모

습이었다.

"안주는 물론 필요 없겠지? 진짜 술은 안주없이 먹는거라네."

용유진이 잔을 들어 술을 핥자 백리제일은 손을 저었다.

"그것도 물론 좋은 방법이지만 술을 마시는 백 가지  방법중에 한

가지에 불과하네. 특히 오늘처럼 술이 풍족할 땐  쓰지 않는 방법이

지."

"술을 마시는데 백 가지 방법이나 있습니까?"

"그보다 많이 말하려면 할 수도 있지만 그냥 원칙만  알아두면 되

겠지. 한 잔을 마셔도 백 잔을 마시듯하고 백  잔을 마셔도 한 잔을

마시듯 하는 걸세. 이렇게 말하면 무슨 대단한 이치라도 있는 것 같

지만 사실은 그냥 말해 얼마를 먹든 취하면 그만이라는 거야."

"이해가 가는군요."

"이해는 느낌만 못하고, 느낌은 경험만 못하지. 술은 먹어봐야 아

는거야."

백리제일은 잔을 들더니 목구멍에 붓듯이 털어넣었다.

"처음엔 이렇게 마셔 술의  호쾌함과 뜨거움을 경험하고,  중간쯤

가선 천천히 들이부어 풍성함을 찬미하지. 단지가 비어가면 우리 인

생도, 누릴 수 있는 향락의 시간도 줄어가는  것이니 그걸 애도하며

천천히 핥는거야. 그쯤 되면 대충 술을 즐겼다 볼 수 있겠지."

그는 다시 한 잔을 마시고 얘기를 이었다.

"우리가 술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것이야. 백 년도 못 사는  삶을 슬퍼하며, 그 속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향락을 이 술 한잔에 채워 마심으로써,  희노애락의 정화를 얻

는 것이지. 그리움을 잊어버리고, 티끌같이 사소한 것들은 날려버리

고, 억울함도 분노도  터뜨려 치워버리고, 인생의  슬픔과 괴로움을

이 술 한잔으로 씻어버리고, 그러고도 남는 것이  있으면 그건 정말

소중한 것이고, 나와 떨어지지 않는 것이니까 술에  녹여 같이 마셔

버리는 것이지."

말이 되는 것도 같고 안되는 것도 같은 백리제일의 술타령을 들으

면서 용유진도 적지 않게 퍼 마셨다. 이상한  것은 그렇게 마셨는데

도 한 잔을 마셨을 때보다 더 취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마시면 마실수록 정신이 더 밝아지는 것만 같았다.  저녁이 다 되어

갈 때쯤 단지의 밑바닥이 보이고, 백리제일도 적지 않게 취했다. 이

야기는 어떻게 되서인지는 몰라도 사랑 이야기로 넘어가 있었다.

"그러니까 사랑이란 말이야. 내가 해보니까, 불알도 없는 것이 무

슨 사랑이냐고 하겠지만 나도 한 때는 사랑을  했었지. 뜨겁고 열렬

한 사랑, 지고지순한 애정을 바쳤던 그런 사랑을 했었지. 환관도 사

람이고, 사람이면 누구나 사랑에 몸을 맡길 때가 있단 말이야. 하여

간 사랑을 해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군. 다시는  하지 말아야겠다

고. 이렇게 괴롭고 아픈 경험을 왜 다시 하겠느냐고. 그런데 세월이

또 지나니까 생각이 달라지는 거야. 정말 진정으로  사랑을 한 사람

만이 진정으로 아플 수도 있는 것이지. 사랑을  못해본 사람은 아파

보지도 못하는 것이지. 죽을 것처럼 괴로우면서도 달콤한 그 느낌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인거야."

용유진은 단지 밑바닥에 남은 술을 아쉽게 쳐다보며 물었다.

"그 여자분은 어떻게 됐습니까? 왜 헤어지셨죠?"

"잉? 무슨 여자?"

"어르신이 사랑했다는 분 말입니다."

"아…, 그 사람 남자였어.  아직 살아있지. 젊었을땐  미남자라서

좋아했었는데, 나이 드니까 배도 나오고 쭈글쭈글 해져서 보기 싫더

군. 정을 뗀 게 잘한 일이었어. 이 나이 되어서 추태를 부리는 것도

보기 싫고…."

용유진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같았다.

"남자를…, 좋아하셨습니까?"

"정확하게는 환관이지. 한 때는 정말 열렬히  사랑했었는데, 이제

는 죽이지 못해 안달해야 하다니, 인생이란 게 정말 우습지?"

"그럼…?"

"조홍이랑 한때 연애를 했었지. 그도 젊었을 땐 괜찮았거든."

용유진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 기색을 눈치챈 듯  백리제일은

의미가 담긴 미소를 흘렸다.

"누구에게나 나름의 사랑  방식이 있는 거야.  비웃을 이유는  없

지."

"비웃는 건 아니지만…, 단지 이해하기 어려울 뿐입니다."

"이해하려고도 않는 거겠지. 그냥 상대를 사람으로 보고, 그 사람

이 너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돼. 깊이  좋아하는거지. 누군가 나를

깊이 좋아해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비록  내가 그를, 그가 나

를 좋아하는 것만큼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그래서 그를 거절할

수는 있겠지만, 역시 비웃을 이유는 없는거야. 해서 안될 사랑은 없

는 것이니까."

백리제일과 용유진은 단지를 털어  남은 술을 모두 마셔  버렸다.

이야기는 끝났다. 백리제일은 조금도 취하지 않은 것처럼 눈을 반짝

이며 일어났다.

"자, 이제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다 가르쳤어. 내 말을 십분

의 일만 이해한다면 너도 훌륭한 술꾼이 될  수 있을거야. 마지막으

로 충고 한 마디 하지. 훌륭한 술꾼이 되려면  술을 잘 마셔야 할뿐

아니라 술을 안 마시기도 해야 해. 그러니  내일부턴 오지 마. 나중

에 일이 생기면 그때 다시 보기로 하지."

"저…."

"뭔가? 미련이 남은건가?"

"그게 아니라…, 스승님은 어르신에게서 손을 단련하는 법을 배워

오라고 하셨는데요."

"잉?"

백리제일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술을 배우러 온게 아니란 말이야? 진작  얘길하지. 괜히 귀

한 술 마셔가면서 애를 썼잖아."

용유진이야 말로 황당해 죽을  지경이었다. 묻지도 않고,  술부터

먹인 사람이 누군데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다행히 백리제일은 손

을 단련하는 법을 가르쳐 줄 모양이었다.

"내게 한 가지 잔재주가 있긴 하지. 심심해서 만든건데 이름을 취

타십팔방(醉打十八方)이라고 하는거야. 술꾼의 손짓이  십팔방을 지

배한다는 뜻이지."

"팔방이라는 건 알겠습니다만 십팔방이라는 말은 처음 듣는데요?"

"술꾼의 손짓은 원래 두 가지로 나뉘지. 잡아 당기는 것과 밀어버

리는 것이야. 밀고 당기는데 같은 방향이라 볼  수 있나? 그래서 구

방(九方)을 밀고, 구방을 당기니 합쳐서 십팔방이야."

"구방이라고 해도 하나 많지 않습니까?"

"스스로 자기 멱살을 잡으면  그건 어느 방향인가? 동북방?  서남

방? 중심을 가리키는 방향이지. 팔방에 그게 추가되어 구방이야. 잘

보라구."

백리제일이 벌떡 일어나더니 이리저리 손을 뻗쳤다.  입에서 구결

같은 것이 흘러나오나 했더니 구결이 아니라 헛소리였다.

"이것도 내꺼, 저것도 내꺼….  자네도 오고, 당신도 이리  오게,

모여서 같이 한 잔 먹세 그려."

그렇게 미친놈 손짓같은 동작을 마치고는 용유진을 향해 말했다.

"이게 취타십팔방의 전구식(前九式)이지. 후구식(後九式)은  내일

오면 가르쳐 주지."

용유진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백리제일이 다시 물었다.

"왜? 어려워서 배우기 어렵나?"

용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동작은 모두 외웠는데 무슨 목적으로 하는 동작인지 알  수가 없

군요."

백리제일은 감탄했다는 듯 입을 벌렸다.

"오! 제법 눈썰미가 있는 모양이지. 이 난해한  움직임을 다 보고

외웠단 말이지. 그럼 후구식도 마저 보게."

그는 다시 중얼거리며 미친놈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요건 떫어 싫고, 저건 짜서 싫네. 너는 나쁜  놈이니 꺼지고, 너

랑은 죽어도 같이 못 마신다. 다들 저리 꺼져라…."

말하자면 백리제일의 취타십팔방은 한 잔 같이 하자고  사람을 끌

어당기고, 혹은 너랑은  같이 마시기 싫다고  밀어버리는, 그야말로

술꾼의 손짓인 것이었다. 백리제일은 이번에는  제법 힘들었는지 땀

을 닦으며 물었다.

"이것도 외웠나?"

"예."

용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작이 난해하고 변화가  많긴 하지만

흉내를 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알고보면 그도 기억력과 눈썰미

가 보통 사람은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그뿐, 도대체 위력이

있는 손짓이라고는 생각되지가 않았다.

"당연히 지금 상태로는 위력이 없지. 하루 수천 번씩 연습을 해서

몸에 익어야 위력이 발휘되는게 무공인거야. 그래도 한 가지가 부족

한데, 그건 순전히 네 소질과 노력 여하에 따라  익힐 수도 있고 못

익힐 수도 있는거다."

"그게 뭡니까?"

백리제일은 곡식이 담긴 단지에 손을 대더니 다시 들어올렸다. 그

의 손바닥에 깨알 한웅큼이 쥐어져 나왔다. 놀라운 것은 손가락으로

움켜잡은 것이 아닌데도 그렇게 한웅큼이 딸려나왔다는 것이었다.

"돌아가서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고 물건을 잡는 걸  연습해봐. 그

게 가능해지면 된거야."

용유진은 백리제일루를 나왔다.  뒤에서 백리제일이 작별  인사를

했다.

"얼른 가고, 다시는 오지 마라."

"젠장!"

용유진은 비틀거리며 거리를 따라 내려왔다. 사부의  동기라는 자

들이 어째 저렇게 하나같이  이상한 자들만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조홍같은 인물과 친하기도 했던 모양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

며 한참 걸어가는데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어이!"

며칠 전 구경했던 청화표국, 그 문을 지키는 표사였다.

"이리 와봐!"

용유진이 다가가자 표사는 인상부터 찡그렸다.

"벌건 대낮에 술이나 먹고 돌아다니다니, 너도 싹수가  노란 놈이

군. 하여간 우리 대표두님이 널 좀 보자신다. 따라와라."

순천부 청화표국의 다섯 대표두중  하나인 만리표 해청은  다행히

안에 있었고, 전에 표사에게 지시한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용

유진을 보자 손부터 내밀었다.

"전날 우리 표사에게 보여준 게 있지? 그것 좀 볼 수 있을까?"

용유진은 품에서 물표를 꺼내 해청의 앞에 놓았다.

"이게 여기 물표가 맞습니까? 전날 물어봤을 땐 모른다고 해서 전

아닌줄로…."

해청의 인상이 굳어지는 걸 보고 용유진은 입을 다물었다. 해청은

물표를 세심히 뜯어보더니 아무 말없이 방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

다. 그는 상자 하나를 들고 들어왔는데 그 상자는 몇겹의 종이로 봉

해져 있고, 사슬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그리고 사슬을 연결한 자물

쇠에 용유진의 것과 비슷한  물표가 달려 있었다.  해청은 용유진의

물표를 거기 맞추었다. 하나로 만든 것을 두쪽으로 깬 것처럼 두 개

의 물표는 꼭 맞아 들어갔다. 그리고 글자도 이젠 의미가 통했다.

한 면에는 순천부 청화표국이라고 세로로 두 줄 새겨져  있고, 다

른 한 면에는 삼육일(三六一)이라는 숫자가  온전히 드러나 있었다.

용유진의 물표가 이곳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물표가 가

리키는 물건은 그 상자였다.

용유진은 이 우연의 일치에 잠시 어리둥절 해 했다.  천하에 순으

로 시작하는 지명이 그 얼마나 많은가. 또  천하에 청으로 시작하는

표국은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오늘 우연히 이곳을 지나가다 이렇게

찾았으니 우연의 일치라 아니할 수 없었다.

해청은 사슬을 풀고 상자를 내밀었다.

"가져가시오. 우리 청화표국은 지난 이년동안 이  물건을 맡았고,

그 대가는 이미 선불로 계산되었소. 오늘 물건을 돌려드리고 물표를

돌려받았으니 계산은 완전히 끝난 것이오. 다음에도 또 이용해 주시

면 성심성의껏 모시겠소이다."

용유진은 손을 저었다. 해청이 이맛살을 찡그렸다.

"무슨 뜻이오?"

"이 물건은 제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그럼?"

"물표를 우연히 주웠고, 저 또한 표국 출신이라 귀하게 다루는 물

표임을 알고 언젠가 주인을 만나면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해서 가지고

잇었던 것이지요. 오늘 주인을 만났으니  물표는 돌려드리되 물건은

받지 못하겠습니다."

해청은 어리둥절 해 하다가 용유진의 말을 듣고야 이해할 수 잇는

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도 표국 출신이라고요?"

용유진은 벌떡 일어나 포권했다. 보통의 포권이  아니라 손가락으

로 인(印)을 쥐어 보이는 표국 특유의 포권방법이었다.

"작은 곳이지만 산동에 비룡표국이 있습니다. 노합이 그곳의 이대

국주지요."

해청이 일어나 마주 포권했다. 그 역시 청화표국을 상징하는 독특

한 인을 쥐어 보였다.

"산동의 비룡표국이라면 노합도 들은 바 있소이다. 합하께서 그곳

의 국주이신줄은 몰랐구려."

두 사람이 다시 자리에 앉자 해청은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곳 형제들이 불행한 일을 당하셨다고 들었는데…?"

용유진은 씁쓸히 웃었다.

"힘이 모자라 당한 것이니 창피한 노릇입니다. 더구나 그 뒤를 이

은 저또한 힘이 모자라  아직 정상적인 영업을 못하고  있으니 전대

국주와 유명을 달리한 형제들에게 부끄러운 노릇이지요."

해청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맞잡아 보였다.

"능력은 없으나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언제든 연락하길  바라오.

형제의 정리로서 한 손을 거들지요."

그리고는 다시 상자 문제로 화제를 돌렸다.

"형제께서도 아시겠지만 이런 일에 있어서는 물표를  가진 사람이

곧 주인이오. 설마 저희가  일을 제대로 못하도록  방해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용유진은 당황해 버렸다.

"물론 잘 알고있습니다만, 원래 주인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원래 주인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소?"

"아마…,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습니다. 도적들

이 떨구고 간 물건 중에서 발견한 것이라…."

"그 도적들이란…?"

"중주사견입니다."

"과연…!"

해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더러운 놈들이군요. 사숙을  그렇게 죽여 길거리에  버리다

니."

팔비원후의 시체가 길거리에서 발견된지 이미 여러 달이  지난 것

이다. 해청은 맡은 물건도 있고 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데,

그 범인이 중주사견이라는 것은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중주

사견이라면 충분히 그런 일을 벌이고도 남을 것이다.

"놈들은 이게 물표라는 걸 모르고 버린 모양이오. 어쨌든 이 물건

이 형제의 손에 들어간 것도 인연, 형제께서 이 물건을 인수해 가는

것이 원 주인의 뜻에도 맞겠구려. 혹시 부담이  가시면 나중에 중주

사견을 죽여 원주인의 원한을 풀어주시면 되겠지요."

"중주사견은…."

용유진은 희미하게 미소를 흘렸다.

"다시는 햇빛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동창의 손에  체포되어 유황

도(硫黃島)로 유배를 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유황도는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만 보낸다는 최악의 유형지로

소문이 난 곳이었다. 세워진지 수십 년이 지났어도  아직 아무도 탈

출한 적이 없다는 현세의 지옥이었다. 죽이기도 더러워 그들을 그곳

으로 보냈다는 말을 위류향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아…!"

해청은 다시 감탄한 빛을 드러내었다.

"인과응보군요. 그놈들에겐 너무 후한 대접인 것 같긴  하지만 이

젠 안 보게 되었으니 다행이오. 하여간 이 물건은 형제가 인수해 가

시오. 우린 이것으로 이 책임을 벗고 싶소."

용유진은 하는 수없이 상자를 들고 강복사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

아가 봉한 종이를 뜯자 상자는 책을 꽂아  메고 다니는 책 상자라는

것이 드러났다.

"책 상자 하나를 표국에 맡겼단 말인가? 그 엄청난 비용을 감당한

걸 보면 대단한 가치가 있어야 할 것인데, 고작 책상자?"

귀한 책인가 몇 권 꺼내어  보니 하나같이 거리의 책  장수에게서

살 수 있는 흔한 것들이었고, 내용으로는 불경, 혹은 도가경전 따위

의 것이었다. 용유진은 책 상자를 구석에  밀어놓고 침상에 누웠다.

아까 마신 술이 이제야 취기를 발휘하는 듯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같이 방을 쓰는 위사, 양평중이 들어왔다. 동그란 얼굴이 귀여운 청

년 위사였다. 그는 들어오자 마자 코를 잡고는 말했다.

"어휴, 술냄새. 오늘은 딴 때보다도 더 지독한 걸?"

그는 침상에 누운 용유진을 보며 인상을 썼다.

"너 이 자식, 어린 것이 그렇게 매일 술만 마시고 다니니 정말 큰

일이다. 정신 좀 차리고 살어!"

용유진은 침상에 누은채 대답했다.

"그럴 일이 좀 있었어요. 내일부턴 마시고 싶어도 못 마시니 걱정

마세요."

양평중과는 그래도 반년 넘어 같이 지냈고, 성격이 좋아서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양평중은 대충 옷을 벗어던지고 침상에 누웠다.

"그렇다니 다행이다. 하여간 너도 곳간지기나 하며 세월을 죽이지

말고 뭔가 제대로 된 일을 해야 할텐데…. 위 당두님이 그렇게 내버

려 두고만 있는 것도 좀 이상하긴 해. 네가  먼저 말을 해서라도 좀

뭔가 배워라. 제대로 위사가 될 수 있도록 말이야. 근데…, 저건 뭐

냐?"

책상자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용유진은 아무렇게나 대꾸했다.

"우연히 생긴 책들이에요. 한가할 때 좀 보시죠?"

"관둬, 난 책만 보면 머리에 쥐가 나. 불이나 꺼라!"

양평중은 진저리가 난다는 듯 손을 젓고는 돌아누워 버렸다. 얼마

지나기도 전에 코고는 소리가 났다. 금세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용

유진도 아련히 꿈결 속으로 접어들려 할 즈음,  양평중이 벌떡 일어

나 외쳤다.

"누구냐?"

문이 열렸다. 거기 허신이 서 있었다.

"애를 데리러 왔지."

양평중은 다시 누워 버렸고 용유진은 허신을 따라 나섰다.

"오늘 취타십팔방이란 걸 배웠습니다. 그리고 내일부턴 오지 마라

는군요."

허신은 혀를 찼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럼 뭐가…?"

용유진은 입을 다물었다. 허신이 그를 데리고 가는 길이 아무래도

눈에 익었다. 그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물었다.

"조… 비홍에게 가는 겁니까?"

허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낮부터 너를 찾았다.  적당히 돌려 말하긴 했는데,  어쩄든

밤에 데리고 오라는 거야. 다시 네 생각이 났나보더라."

용유진은 몸을 떨었다. 생각만 해도 징그러웠다.

"어떻게 하죠?"

허신은 걸음을 멈추고 용유진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곤혹스러

운 표정이 서려 있었다.

"가장 좋기로는… 그를  유혹해서 옥로진기의 운용법을  알아내는

거다. 그러나 그게 잘 안되면, 당연히 잘  안되겠지만, 그때는 목숨

만이라도 건져서 나와라. 지금의 내게는 널 도와줄 힘이 없어. 하지

만 어떻게든 살아서 나오면 그땐 탈출을 시켜 주겠다."

용유진은 달빛을 빌어 사부의 얼굴을 보았다. 그 속에서 진정으로

그를 생각하는 마음을 보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자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

그때, 해청은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을 만나고 있었다.

청화표국은 역사가 깊은 표국이고, 그런 표국은 표물 운송 말고도

많은 일들을 한다. 오늘 용유진에게 한 것처럼  물건을 보관해 주고

돈을 받기도 하고, 요청이  있을 경우에는 표사를  파견해서 사람을

경호해 주는 일을 하기도 한다. 표물  운송이나 보관을 물보표(物保

)라 부르고 사람, 혹은 상점을 보호하거나 하는 일을 인보표(人保

)라고 부르는데, 둘 다 표국의 중심 사업이었다. 여기 청화표국은

두 가지 일에 모두 수주가 많은, 한 마디로 번창일로에 있는 표국이

었다. 그래서 보통 표국같으면 한 둘 있는  대표두가 여기에는 다섯

이나 있고, 그 다섯 대표두가 모두 정신없이  일들을 해야 했다. 그

중에서 만리표 해청은 싸움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세심하고 머리도

좋아 문서처리에도 유능했다. 이런 경우에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서

국주의 신임을 받는 것은 좋지만 일이 많아지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상례, 오늘도 밤이 깊어서야 만리표  해청은 일을 마치

고 표국을 나설 수 있었다.

그것이 초저녁부터 그를 기다리던 손님들을 불쾌하게 한 모양이었

다. 어두운 골목길에 갑자기  나타나 해청을 가로막은  자들은 매우

예의가 없었다.

"오늘 용가 꼬마를 만났지?"

그렇게 다짜고짜 질문을 던진 사람은 아무리 많이  봐줘도 서른을

겨우 넘겼을 듯한 청년이었다. 해청은 대답을 미루고  그 청년을 찬

찬히 뜯어보았다. 대단히 평범해서 기억에 잘 안  남는 종류의 용모

를 가진 청년이었다. 그래도  애써 기억을 더듬어서  혹시 거래하는

녹림도나 방파의 사람이 아닌가 생각해 봤지만 역시 기억에 없었다.

그러면 막 대해도 좋을 것이다. 해청은 뒷짐 진 손을 풀어서 늘어뜨

리며 대답했다.

"내가 그걸 알려줄 이유가 뭔가?"

청년, 생사교 팔대호교령 중  하나인 무면호는 짧은 말로  해청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었다.

"죽기 싫으면 대답해야지."

해청은 손을 들어 얼굴을 긁었다. 단단하고 긴 손가락이 평범하지

않게 빛이 났다. 강조(鋼爪). 손가락에 끼우는 가짜 손톱이었다. 해

청은 경신술과 할퀴기, 이른바 응사조법(鷹蛇爪法)이 특기인 사람이

었다. 은근히 자신의 주무기를 드러내 보인 것이다.

"나도 한 가닥 한다면 하는 사람이지. 귀하에게 나를 죽일 능력이

있을까?"

무면호는 피곤하다는 듯 두 손으로 관자노리를 문지르며 말했다.

"좋은 말로 하면 꼭 이렇게 말을 안들어요.  애들아, 일단 꿇어앉

히고 얘기하자."

무면호의 뒤쪽, 골목길 양옆으로 늘어서 있던 몇 명의 복면인들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여러 명이 동시에  움직이는데도 가벼운 옷자락

소리만 들리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수련을 쌓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만리표가 보기에는 그렇게 대단한 고수들은  아니었다. 그는 간단히

상대할 수 있을 것으로  계산하고 양손을 휘둘러 소매를  팔에 감았

다. 그의 열 손가락에 낀 강조들이 반짝 빛을 발했다.

골목은 좁지 않았지만 그리 넓지도 않았기 때문에 한 번에 공격해

올 수 있는 사람의 수는 두세명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혼자서 다수

를 상대해야 하는 해청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했다. 앞에 선 두사람씩

만 차례로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그의 계산대로 복면인들은  둘 씩

짝을 지어 덮쳐오고  있었다. 쇠꼬챙이처럼 가늘고  긴 협봉검(狹鋒

劍)을 옆구리에 대고 찌르기 일변도로 달려들고  있었다. 보통의 사

람에게라면 겁을 주기에도 충분하고, 실전적으로도  효과가 있는 자

세. 그러나 해청같은 고수에게는 통하지 않는 무리한 자세였다.

해청은 손을 내밀어 두 자루의 협봉검을 움켜 쥐었다.  예리한 소

리와 함께 검 두 자루가 부러져 나갔다.  그러나 복면인들은 물러서

지 않고 반토막의 검으로 계속 그를 찌르려고 했다.

"무리한 짓!"

해청은 검을 부러뜨린 그 손을 뒤집어 두 복면인의 가슴팍을 짚어

갔다. 이쯤되면 일단 물러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자들까지 함꼐  물러서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사태는 해청의 예상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두 복면인은 자살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대로 달려들어 해청의 손에 가슴팍을 맞았다. 해청

의 손이 그들의 가슴팍으로 파고 들었다. 손가락  둘째 마디까지 살

에 잠기도록 깊이. 이렇게 방어동작이라곤 전혀 없이 달려들줄은 몰

랐던 해청의 표정이 오히려 돌변하는데, 복면인들은 손을 내밀어 해

청의 팔뚝을 잡았다. 동귀어진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해청의 손

을 묶어두기 위한 희생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는 초식이었다.

"미친…!"

복면인들은 과연 미쳤다. 두  번째 줄에서 달려오던 두  복면인이

앞선 복면인의 등으로 칼을 찔러넣었다. 가늘고 긴 협봉검은 동료의

등을 뚫고 가슴팍으로  튀어나와 정확하게 해청의  손바닥에 박히었

다. 해청은 장심으로 부터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뒤로 물러나려 노

력했다. 그러나 적도 같이 전진했기 때문에 그의  이런 노력은 무위

로 끝났다. 그 순간 다시 뒤에서 달려나온 세  번쨰 두 명의 복면인

이 앞선 네 복면인의 머리를 밟고 뛰어 해청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

렸다. 아무리 경공의 고수라도 네 명에게 제압당한 상태에서 운신할

수는 없었다. 해청은 다시 두 개의 검으로 어깨를 꿰뚫리고 그 자리

에 주저 앉았다.

"너…, 너희들은 생사교?"

목숨을 바치면 진정한 생을 얻게 된다.  소위 살신득생(殺身得生)

의 교리를 믿는 생사교의 자객들이 아니고는  이렇게 무식한 방법으

로 공격하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무면호는 두

번이나 그의 궁금증을 풀어줄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용가 꼬마가 거기 갔었지?"

만리표는 이를 악 물었다.

"내가 말을 덜 했군. 날 죽이긴 쉬워도 내 입을 열게 하기는 어려

울 것이다."

무면호가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동료의 시신을  관통해서 해

청의 팔에 검을 꽂아넣은 두 복면인이 좌우로  벌려섰다. 해청의 팔

뚝에 세로로 박힌 검이 비틀어졌다. 해청은 입을 딱 벌렸다. 복면인

하나가 달려나가 그 입에 주먹을 박아넣었다. 이빨이 우수수 부러져

나갔다. 복면인의 손은 해청의  목구멍까지 찌를 정도로  깊이 박혀

그 목구멍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비명을 막아버렸다.

"부인을 않았으니 용가 꼬마를  만났다는 얘기겠지. 시간  없으니

다음으로 넘어가지. 그 꼬마가 뭘 갖고 왔던가? 아니, 그 꼬마가 표

국에서 들고나간 상자에 뭐가 있나? 왜 상자를 줬나?"

해청의 입을 틀어막은 복면인이 주먹을 뺐다.  해청의 목구멍으로

부터 긴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비명을 지를 수도 없을 정도로

강한 고통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단 고개부터 저었다.

"죽여라!"

무면호는 이번에는 손가락을 앞 뒤로 흔들었다. 해청의 어깨에 검

을 꽂은 두 사내가 앞으로 검을 그어내렸다.  해청의 어깨가 절반쯤

떨어져나가 대롱거렸다. 벌린 입에 다시 주먹이 꽂혔다.

"이젠 대답할 수 있을까?"

해청은 대답할 수없었다. 완전히 혼절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젠장!"

무면호는 머리를 긁었다.

"시간이 없지만 하는 수 없군. 데려가서 제대로 다뤄보자."

무면호와 생사교의 일당이 해청과 동료의 시체, 그리고 골목에 떨

어진 핏자국까지 지우고 사라진 자리에 두 여인이 나타났다. 예전에

는 고목의 남여를 들던 두 여인, 그러나 이제는 용유진의 뒤를 쫓으

라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두 여인이었다. 그중  하나가 투덜거렸

다.

"무식한 놈들. 꼭 저런 식으로 일을 처리해서 어렵게 만들어!"

다른 여인이 말을 받았다.

"늦은 우리가 잘못한 거지 뭐. 이젠 어쩌지?"

"용가 꼬마가 해청에게 뭘 보여준 건 분명해.  먼빛으로 보기에는

목패같은 거였는데, 하여간  그게 무슨 신표였겠지.  표국에 들어갈

땐 빈손이었는데 나올 땐 상자를 들고 있었지.  당연히 표국에서 가

지고 나온 물건이지. 우리가 여태 따라다녔지만 한  번도 표국에 물

건을 맡기는 걸 본적이  없으니 그 상자는 우리가  그를 따라다니기

이전에 맡은 물건이라는 의미야."

"그 용가 꼬마의 아버지가 맡긴 물건일 수도 있지."

"팔비원후가 맡긴 물건일 수도 있고."

"그런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조사해 보기 전에는 모르는 거지. 팔비원후가 무언가  귀중한 것

을 가지고 있었고, 그걸 뺏으려던 중주사견이 결국 그걸 못 뺐은 건

분명해. 그리고 그  물건은 용유진에게 넘어갔어.  뭔지는 모르지만

대단히 귀중한 거야. 저 교활하고 악랄한 무면호가 중주사견을 시켜

표물을 털고, 지금 해청을 닥달하는 이유가  그걸거야. 약속을 어기

면서까지, 용유진에게 들킬 위험을 무릅쓰고 찾는 물건이란 말야."

"그게 뭘까?"

"가서 조사해 봐야지."

"그러다가 들키면?"

"무면호도 저러는데 우리라고 안전하게만 할 순 없지.  모험을 해

보는 수밖에."

두 여인이 나름대로 결론을 맺고 사라진 자리에 이번에는 남녀 한

쌍이 나타났다. 남자는 철퇴를 달고있고, 여자는  태산도를 맨 한쌍

이었다. 남자가 말했다.

"저년들 참 친절하기도  하지. 내가 생각할  일을 다  대신해주는

군."

태산도의 여인이 말했다.

"우린 어쩌죠? 셋중에 우리가 제일 늦네요."

걱정스러운 어조인데 남자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달랬다.

"문제없어. 이제부턴 우리가 제일 빨라졌어."

"왜요?"

"용가 꼬마가 있는 곳이 우리 집이잖아."

"그럼…?"

"집으로 돌아가서 방법을 짜보기로 하지. 우선…."

남자는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저년들과 무면호가 용가 꼬마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겠어."

"그건 또 어떻게 할 거에요?"

"간단해. 애들을 풀지 뭐."

다른 생각, 다른 이익들이 분주히 얽혀 돌아가는 중에  밤은 고요

히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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