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용유진, 스승을 모시다.
1.
강복사 뒷뜰 장경각(藏經閣) 앞에는 탑(塔)이 두 개 나란히 서 있
고, 한쪽에는 약수터가 있었다. 중이 없는 절 장경각에 불경이 있을
이유가 없다. 그래서 이 강복사의 장경각은 그 넓고 쾌적한 조건으
로 해서 식당으로 쓰이고 있었다.
용유진이 동창에 들어와 제일 처음 맡은 일은 약수터 옆에 앉아
있다가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와 약수터에서 입가심을 하는 사람들
에게 물 떠마실 표주박을 주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와서 물을 마시
고 표주박을 던져두고 가면 그 표주박을 씻어서 다음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사람이 많이 몰릴 때면 당연히 곱게 기다리지 않는다. 그래
서 표주박은 열 개가 있었지만 정신없이 씻어서 바로바로 다음 사람
에게 넘겨야 했다. 늦으면 욕설이 날아오는 것은 물론이었다. 하루
세 번, 그렇게 두달간이었다.
강복사가 동창의 본영이긴 하지만 일천 위사들이 모두 여기에 있
는 것은 아니었다. 며칠에 한 번 왔다갔다 하는 사람도 있고, 몇십
명씩 교대로 나갔다가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통상 반쯤
은 밖에 나가있고, 나머지 반만 여기에서 지낸다고 봐야 했다. 그래
도 오백 명이나 되는 위사들에게 꼬박꼬박 표주박을 씻어 바치는 일
은 그리 쉬운게 아니었다. 게다가 물가에 앉아 일을 하기 때문에 사
람들이 마시고 버리는 물로 온몸이 젖은 채 일해야 할 때가 많았다.
그나마 이런 일을 하는 것도 다행이라고 용유진은 생각하고 있었
다. 처음 동창에 들어왔을 때는 하루종일 방에서만 있어야 했다. 위
류향이 나가는 것을 금지시켰기 때문이었다. 답답함을 참지 못해 무
언가 일을 시켜달라고 하자 시킨 것이 바로 이것, 표주박 씻기였다.
처음에는 무언가 일을 한다는 것이 갇혀있는 증거는 아니라고 생
각되어 좋았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그는 이 일이 원래는 없었던
거라는 걸 깨달았다. 표주박을 씻어 바치자 위사들이 미친 놈 보듯
했던 것이다. 이 일은 위류향이 그를 위해 만들어준 일이었고, 일종
의 괴롭히기였다.
용유진은 그걸 알고 한달여간은 이를 갈며 일했다. 열심히 했다는
것이 아니라 위류향을 원망하면서 일을 하니 이가 갈리는 것이다.
원래 없던 일, 안해도 좋을 일, 그가 있으나 없으나, 표주박을 닦든
말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을 한다는 것은 용유진에게는 고문에 가
까웠다. 그런 일을 하며 보내는 나날은 하루하루 그를 쓸모없는 인
간으로 만드는 것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달째 접어들면서 그는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우
선은 좀더 일하기 편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하루종일 개숫물에
만 코를 박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무엇보다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
는 약수터에서 밖으로 대롱을 연결하고, 거기에 반으로 가른 대롱들
을 다시 연결해서 낙차가 큰 수로를 만들었다. 그리고 표주박을 거
기에 헹궈 위사들에게 내밀었다. 훨신 편하고, 이젠 젖지 않아도 되
었다.
그 다음으로 한 것이 위사들의 얼굴을 익히는 일이었다. 물론 누
구도 그에게 자신을 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름과 얼굴을 연결시
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나름의 방법으로
해결했다.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지만 위사들끼리는 서로 부
르고 대답하기 마련, 일을 하면서 귀를 곤두세워 그 하나하나의 이
름과 별명, 직책까지 외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가 오백
여명의 이름과 얼굴을 대충 익히기까지 다시 한 달이 걸렸다.
무슨 필요가 있어서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효과는 놀라웠다. 그
가 잔을 내밀며 이름을 불러 인사하기 시작하자 위사들의 반응이 달
라졌다. 그 전에는 지나가는 사람에 불과했던 그들이, 또 용유진이
얼굴을 익히고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자 찾아오는 사람이 되었다. 의
미 없던 하나하나의 얼굴들에 의미가 담기기 시작했다. 용유진이 꼭
필요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니지만, 위사중 하나로 인정받는 것도 아
니지만 적어도 이제는 표주박 씻는 아이가 아니라 용유진으로 인정
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허신을 만났다.
혼잡한 점심시간이 끝나고, 용유진도 식당 구석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온 약수터에 늙수그레한 환관 한 명이 약수를 뜨려하고 있었다.
용유진은 얼른 달려가 새 잔을 내밀었다.
"이 잔으로 드시지요, 허주사(許主事)님!"
허신은 잔을 받아 약수 한 모금을 떠서 마시고는 감탄성을 질렀
다.
"어, 시원하다. 과연 옛부터 소문난 물맛이군."
그는 표주박을 돌려주고는 말을 걸었다.
"여기 경사에는 이렇게 맹물을 마셔도 좋은 곳이 여기밖에 없다는
걸 알고있나?"
용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던 일이었다.
"여기뿐이야. 다른 곳에서는 다 차를 끓여 마시지. 물이 혼탁하거
든."
"그랬군요."
건성으로 대꾸하고 돌아서려는데 허신이 다시 말을 걸었다.
"다행이잖아?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차를 마셨으면 그 찻잔 씻기란
보통 일이 아니었을 거야."
실제로 그랬겠다 싶었지만 그땐 또 그때 나름대로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용유진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렇군요."
허신은 아는 건 많은데 막상 얘기하면 들어줄 사람은 없는 노인이
흔히 그러듯이 또 엉뚱한 얘기를 꺼냈다.
"왜 동창이 여기에 있는지 아나? 불경스럽게도 부처님을 모시는
사찰에 이런 단체가 들어와 있는지…?"
"남들이 모르도록 하려고 한 모양이지요?"
"여기 동창이 들어온지 백년이 넘어가네. 그세월동안 여기가 동창
인지 모른다는 건 우습지. 처음에는 용공자 말대로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원인이 하나 있었지. 동창을 만
든게 도연(道衍)이란 중놈이었거든. 부처를 팔아 권력을 잡은 땡초
였지."
"그랬군요…."
이번 얘기는 조금 더 재미있었지만 역시 그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
다. 그러나 허신이 왜 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해서는 흥
미가 있었다. 허신은 그 의문을 풀어주기 보다는 오히려 질문을 했
다.
"일이 재미 있나?"
"별로 재미는 없군요."
"꽤 열심히 하던걸? 여기 위사들 이름도 외우고…."
"그렇게 않으면 시간이 아까워서요."
"시간이 아깝다…, 그건 뭔가 하고싶은 일이 있는 사람만이 하는
말이지. 자넨 뭘 하고싶은 건가?"
"하고싶은 일은 있지만…."
용유진은 허신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의미를 담은 미소였
다. 사실은 더 말하기 싫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어색
한 미소였다.
"별게 아니라 말씀드릴만한 것도 못되는군요."
허신은 재빨리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그또한 어색한 웃음을 흘리
며 자리를 뜨려했다. 그러다가 한 마디 더 남겼다.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때로는 아무 것도 않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네."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허신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위당두(魏 頭)가 왜 자네에게 이 일을 시켰는지 아나?"
용유진의 허를 찌르는 질문이었다.
"모르겠군요."
"위사들이 자네 얼굴을 모르면 자넬 죽일테니까."
"위사들이 왜 절 죽입니까?"
"가면 안되는 곳에 가니까."
"제가 가면 안되는 곳에 왜 가겠습니까?"
"얼굴을 모르는 사람에겐 가면 안되는 곳만 있는 곳이 이곳이라
네."
용유진이 더 물어보려 했지만 허신은 손을 젓고 돌아섰다. 몇 걸
음 가다가 문득 깨달았다는 듯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더니 다시 그에
게 다가왔다.
"유시(酉時; 오후 5시에서 7시) 초에 여기로 다시 나오게."
"왜 그러십니까?"
"조비홍 부내관령의 지시이니 그냥 나오면 되네."
허신은 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보며 용유진은 투덜거렸다.
"이상한 늙은이…."
유시 초, 약수터 옆에는 허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용유진을
데리고 강복사 후원에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 사이로 걸었다. 용유진
이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지 물으려 하자 손가락을 입에 대어 말
문을 막았다. 그러나 그 본인은 마음대로 말을 했다.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상처 중에 가장 깊은게 뭔지 아나?"
용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허신이 스스로 정의를 내렸다.
"사랑의 상처일세. 마음을 바쳐 사랑했는데 거절 당하면 그 상처
는 깊고도 깊지."
이쯤 되면 말을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사소한 일이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긴다는 것은 믿기 어렵군
요."
허신이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자넨 안 그럴지 몰라도 조내관령은 그럴걸세."
조비홍이 그렇다는 것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고 묻고싶었지만 허
신은 이미 돌아섰고, 그들의 앞에는 작은 집, 불켜진 창문이 나타나
있었다. 허신은 손짓으로 그 집에 들어가라고 표시하고는 돌아가 버
렸다. 집앞에 홀로 남은 용유진은 무언가 좋지않은 예감을 느끼고
집앞을 서성거렸다. 그때, 문이 열렸다.
"어서 드세요."
높게 땋아올린 머리에 황금 용잠(龍簪)을 꽂고, 용과 봉황을 수노
은 비취빛 구슬관을 쓰고 있었다. 구름과 용의 무늬를 수놓은 비단
겹옷을 걸치고, 다시 승천하는 용의 무늬를 둔 하피(霞 ; 날개옷이
라고도 부르는 여성용 상의)를 걸쳤다. 치마는 길어서 발끝까지 덮
는 주름진 치마를 입었는데, 용유진은 알아보지 못하지만 이런 종류
의 치마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24주름 옥군(玉裙)이었다. 황후
나 귀비(貴妃)같은 궁정의 여인이나 입을 수 있는 이런 화려한 복장
이 용유진을 얼떨떨하게 했다. 그런 그의 손을 여인이 끌어 안으로
들어갔다. 만지면 묻어나올 것처럼 폭신하고 부드러운 손가락이었
다.
방안의 광경은 용유진을 더욱 놀라게 했다. 주렴(珠簾) 드리운 침
상이 한쪽을 장식하고, 벽에는 고서화(古書畵)와 미인도(美人圖)가
속물스럽지 않게 걸려있었다. 방안에는 은은한 향내가 감돌고, 중앙
의 탁자에는 붉은 촛불 밝혀놓은 아래에 이름도 모르는 요리가 가득
차려져 있었다. 의자는 둘, 여인은 그중 하나에 그를 앉히고 자신이
반대편에 앉았다.
"저.., 전 조 부내관령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만..."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니냔 말씀이시지요? 공자가 용유진, 용공자
님이 맞다면 여기 의자는 제대로 주인을 맞은 것이니 안심하시고 편
히 요리를 맛 보시어도 좋겠네요."
그녀가 권한 요리는 광동 생선회였다. 한족(漢族)은 원래 생선을
날것으로 먹는 법이 없는데, 광동의 경우에는 만족과 바다 건너에서
온 이국 사람들의 영향으로 생선을 날로 먹는 요리가 발달해 있었
다.
"광동에서는 다리 네 개 달린 것 중에서는 탁자와 의자, 다리 두
개 달린 것 중에서는 사람을 빼고는 뭐든지 먹는다고 하지요. 여기
있는 것들도 그래서 황궁 주방에서가 아니면 만들지도 못했을 것들
이지요."
그렇게 말하며 소개한 음식은 용유진이 들어보지 못했던 것들이었
다. 상 맨 가운데에는 얼음판이 있고, 생선회는 그 얼음 위에 올려
져 있었다. 주위에는 열댓가지나 되는 작은 접시들이 가득 놓여 있
었다. 생선회와 함께 먹는 말린 홍당무, 기름에 튀긴 전병(澱餠)과
밀병(蜜餠), 소금, 설탕, 참기름, 후추 등의 양념이었다. 머리카락
처럼 가늘게 채를 쳐놓은 굴나무 잎사귀가 있고, 과자로는 당박취
(糖薄脆), 매괴차양권( 穰捲), 백당만수고(白糖萬壽 )같은 것
이 있었다. 용유진으로서는 처음 보는 것들, 자연 선뜻 손이 나가지
않는데, 여인이 섬섬옥수로 은젓가락을 들어 생선 살 한점을 집어
내밀었다.
용유진이 크게 당황해서 손가락으로 받으려 하자 여인은 아미를
찡그렸다.
"그냥 받아 드세요."
용유진은 처음 받아보는 황송한 대접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입을
벌려 받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여인은 만족한 듯 미소를 짓고 당
박취 하나를 집어 다시 내밀었다. 밀전병처럼 얇은 떡인데 입에 넣
자마자 녹아 버리는 것으로 보아 밀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여인이
다시 술을 한잔 따르더니 내 밀었다. 용유진은 이번에야말로 손을
저었다.
"술은 잘 못합니다."
"사내대장부가 술을 못해서야 사내대장부라 할 수 있나요? 독한
것도 아니니 훌쩍 들이키세요."
사내대장부…, 자주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는 말이지만 지금 여인
의 입에서나온 그 단어에는 묘한 울림이 있었다. 용유진은 번쩍 정
신이 들어 여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가는 눈썹과 긴 속눈썹, 우수
에 젖은 눈동자와 윤곽이 뚜렷한 얼굴…, 천하절색까지는 아니라도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그러나 용유진은 안색이 돌변해 자리를 박차
고 일어났다.
"당신은…?"
여인은 조비홍이었다. 용유진은 당황해서 말도 잘 못할 정도로 놀
라버렸다.
"당신…, 당신은 원래 여인이었습니까?"
조비홍은 쓸쓸하게 웃으며 잔을 들어 마시고 비단 수건으로 입술
을 눌렀다. 붉은 연지가 묻어나왔다. 묘하게 도발적인 모습이었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고맙겠지요."
긍정으로도 부정으로도 들리는 애매한 대답. 조비홍은 거기에 덧
붙여 말했다.
"난 원래 여자로 태어났어야 옳아요. 그렇게 태어나지 못한 것은
하늘이 실수한거죠. 운명이 장난을 쳤던 것일 수도 있고. 커가면서
그걸 알았죠. 난 원래 여자였구나라는 것을. 그래서 환관이 됐어요.
완전한 여자가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잘못 내게 덧붙여진 것은 없
애야겠다고 생각했죠. 지금 나는 이전보다는 훨씬 여자에 가까워
요."
용유진은 눈만 깜빡거리고 서 있었다. 여태까지 온갖 이상한 이야
기를 들었지만 지금 조비홍이 하는 말처럼 이상하고 어려운 이야기
는 없었다. 여자로 태어났어야 옳았다는 이야기는 뭐고, 이전보다
훨씬 여자에 가까워졌다는 이야기는 뭐란 말인가.
용유진은 재우쳐 물었다.
"그래서 남자란 이야깁니까, 아니면 여자란 이야깁니까?"
조비홍은 다시 술을 들이켰다. 그녀의 눈가에 깊은 그늘이 어렸
다.
"둘 다 아니죠. 당신이 볼땐 그저 환관일뿐이겠죠. 사내면서 사내
가 아닌…, 인간도 아닌…, 그저 환관일뿐이겠죠? 하지만 나는 이렇
게 말하고 싶어요. 나는 여자가 못될 바에야 차라리 무성(無性)의
인간으로 남고싶다고."
역시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였다. 용유진은 아까부터 이미 그렇게
느끼고 있었지만 점점 더 자리가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그렇다고 환관으로 불리기도 싫어하는 이상한
사람과 한 자리에 앉아 있는다는 것이 적지아니 불편했던 것이다.
조비홍이 그를 바라보는 끈적끈적한 눈길은 그를 불안하게 만들기까
지 했다. 용유진은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전혀 바뀌지 않
았다.
"도대체 절 왜 오라고 하신겁니까? 그 이야기를 듣지요."
조비홍이 눈을 깜박거리더니 다시 술을 들이키고 탁 소리가 나도
록 강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용유진을 보며 웃었다. 방금까지처
럼 쓸쓸하지만 따스한 그런 웃음이 아니라 입꼬리에 매달린 조소였
다. 여인 조비홍이 사라지고 거기에는 환관 조비홍이 돌아와 있었
다.
"너랑 놀고싶어서 부른거다."
조비홍의 목소리도 돌아와 있었다. 가늘긴 하지만 남자의 목소리,
끈적끈적함은 더욱 강화된 그런 목소리였다.
"너는 내가 오랜만에 보는 미소년이구나. 남자다운 면도 있고…,
그러면서도 피부는 이렇게 부드러우니…."
조비홍이 용유진의 얼굴을 건드렸다. 용유진은 한 걸음 크게 뒤로
물러났다. 집에 들어올 때 잡았던 조비홍의 손은 단지 부드럽고 따
스하기만 했는데, 지금 그의 손은 벌레의 촉수처럼 끈끈하고 징그러
웠다. 한 사람이 이렇게 순간적으로 완벽하게 바뀐다는 것을 그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조비홍의 눈가에 노여움이 떠올랐다.
"죽고싶으냐? 감히 내 손길을 거절하다니…!"
용유진은 더욱 더 혼란스러워졌다. 이 작자는 왜 그에게 색정을
느끼는 것일까?
"환관이라지만 엄연히 남잔데 남자에게 지분거리다니…, 당신 제
정신이오?"
짝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퍼졌다. 용유진은 얼굴을 감싸고 뒹굴었
다. 조비홍의 발길이 그의 배를 크게 질렀다. 용유진은 그대로 공중
에 떠서 침상에까지 날아갔다. 조비홍도 정체를 감춘 고수임을 그제
서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도대체 그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용유진은 아직도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조비홍은 반쯤 광분상태가 되어 달려오더니 침상의 주렴을 찢어버
리고 침상에 뛰어올라 용유진의 옷섶을 잡아 뜯어버렸다. 상반신이
온전히 드러났다. 조비홍은 용유진의 목덜미를 눌러 꼼짝도 못하게
하고는 고개를 숙여 입술을 탐했다. 용유진은 손발을 버둥거렸지만
조비홍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뜨겁고 끈적끈적한 조비홍의
혀가 그의 입술을 핥는 것이 느껴졌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입
술이 그의 뺨과 눈 위, 코와 입술에 마구 와서 비벼졌다. 자유로운
한 손은 그의 사타구니로 파고들었다. 용유진의 구역질이 더욱 심해
졌다. 말 위에 오래 있었을 때처럼 현기증이 밀려오고 창자가 꿈틀
거렸다. 그러나 그는 구토를 참았다. 대신 조비홍의 입술을 물어뜯
어 버렸다.
"악-!"
조비홍이 벌떡 일어났다. 애써 성장한 그의 머리와 옷은 미친년처
럼 헝클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불타는 눈빛이야말로 진정으로 광
기에 휩싸여 있는 것 같았다. 조비홍은 침상 아래에서 채찍을 꺼내
더니 그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용유진의 몸이 펄떡펄떡 뛰었다. 그
러나 그는 신음 한 마디 내 뱉지 않았다. 차라리 이것이 편했다. 조
비홍의 입술보다는 채찍이 견디기 쉬웠다.
"이래도? 이래도 내 손을 거절해?"
조비홍이 외치고 있었다. 용유진은 조비홍의 채찍을 잡았다. 조비
홍의 눈이 그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용유
진은 입술을 벌려 말했다.
"더러운 짐승!"
조비홍이 입술을 깨물었다. 채찍이 꿈틀거렸다. 용유진의 손아귀
가 찢어져 나갔다. 채찍은 용유진의 목을 감아 그대로 문밖으로 던
져버렸다. 문짝이 깨어지는 소리와 함께 밖으로 뒹구는 용유진의 뒤
로 조비홍의 호통이 들려왔다.
"나한당(羅漢堂)에 넘겨버려!"
"그러지요."
허신이 나무 그늘 아래에서 조용히 걸어나와 용유진을 일으켰다.
그가 용유진을 데리고 사라지자 조비홍은 떨어진 문을 달지도 않고
침상으로 돌아가 엎드렸다. 나직한 울음소리가 방안에 퍼지기 시작
했다.
"사랑에 거절당한 상처가 가장 깊다고 내가 그랬지?"
용유진은 상처에 신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그게 그말이었습니까? 정말 몰랐습니다."
허신은 혀를 찼다.
"몰라도 상관은 없지. 이미 늦었으니까. 그나 저나 자네 이제부터
고생 좀 하겠군. 나한당은 심한 곳이라네."
나한당은 과연 심한 곳이었다. 어느 절에 가도 나한당은 있기 마
련이지만 강복사의 나한당만큼 심한 곳은 없을 것이었다. 이곳은 바
로 동창의 고문실과 감옥으로 쓰이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무로
만든 나한상들은 단지 장식일 뿐이고, 그 아래 열린 통로의 계단으
로 내려가면 침침한 복도가 팔방으로 뚫려있고, 각 복도 마다에는
와 두터운 철문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하나하나에 누군가가 갇혀
있는 듯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런 복도 하나를 끝까지 걸어간
다음에 닿은 장소는 제법 넓은 방이었다. 중앙에는 부젓가락이 꽂혀
있는 화로가, 벽에는 족쇄와 여러 가지 고문기구들. 용유진은 허탈
하게 웃었다.
"운도 없지. 이게 몇번째냐…."
열네살 나이로 세 번이나 고문실 구경을 한다는 것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닌 것이다. 여기까지 따라온 허신이 흥미롭다는 듯 그를
보았다.
"꽤 침착한걸. 자넨 여기가 무섭지 않나?"
"이미 경험이 있습니다."
허신은 그제야 그의 손톱 빠진 손가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손가락이 그모양이더라니…. 고문을 당한거였군."
용유진은 손가락을 내려다 보았다.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뾰
족한 집게를 손톱 아래로 밀어넣을 때도 고통스러웠었다. 그 찝게로
손톱을 단단히 잡을 때도 기절할 것 같았었다. 그러나 그렇게 잡고
일부러 고통을 더 주기 위해 비틀어 잡아 뽑을 때야 말로 정말 고통
스러웠다. 그다음 손가락 끝을 불로 지질 때는 오히려 시원하게 느
껴질 정도였다.
"한 가지 다행한 것은 있군요."
"그게 뭔데?"
웃통을 벗은 건장한 사내가 한쪽 문으로 천천히 들어오며 물었다.
"뭐가 다행이라는 거냐?"
"손톱을 빼는 고통은 더 이상 안 겪어도 되겠다는 거지요. 이미
다 빠졌으니까."
"그럼 발톱을 빼면 되지 뭐. 고통을 줄 방법은 하고도 많아."
용유진은 히죽 웃었다. 사내의 표정이 야릇하게 변했다.
"설마…?"
"손톱을 빼는 놈들이 발톱은 안 뺏겠습니까? 안 됐군요."
"젠장!"
사내는 투덜거리며 한편으로는 웃었다.
"제일 쉬운 고문을 못하게 됐군. 좀 더 귀찮은 걸 할 수밖에 없는
걸?"
그는 허신을 보며 징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조가의 손님인가?"
"내 손님이야. 자넨 잠시 나가 있게."
사내의 표정이 변했다.
"오… 그렇군! 영감 손님이라…, 비켜줘야지 그럼."
사내는 싱겁게 나가버리고 허신과 용유진만 남았다.
"미, 믿어질지는 모르지만…."
허신은 갑자기 말을 더듬고 있었다.
"내, 내가 자네를 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미, 믿겠
나?"
용유진은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대꾸했다.
"거짓말이라면 좀 더 부드럽게 했겠죠. 믿겠습니다."
허신은 얼굴을 붉혔다. 창피해서가 아니라 기분 좋은 듯 상기된
것이었다.
"말이 통하는 공자로군. 먼저 자네 얘길 해줘야겠네. 하나도 남김
없이, 숨기지 말고."
용유진이 입을 열려고 하자 허신은 다시 손을 들어 경고했다.
"특히 자네 팔에 찬 팔찌 얘기는 자세히 말해주게. 이미 보았으니
거짓을 말하려 하지 말라는 얘길세. 선의의 거짓말이라도…. 그런
것이 있으면 신뢰에 금이 가거든."
용유진은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그것까지 말하라고 하면 문제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조금 더 확신을 주셔야겠군요. 허주사님은 저를 통해 뭘 하려고
하시는겁니까? 아니, 어르신 본인이 원하는 일은 뭡니까?"
"내 이야기부터 하라는 얘기군."
허신은 빙긋이 웃었다.
"하지만 내 이야기는 길고 지루하네. 알맹이도 없고. 그러니 이걸
로 참아주기 바라네. 나는 여기 동창을 변화시키려는 사람일세."
"어르신의 힘으로 그게 가능합니까?"
허신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말했다.
"간략하게 이야기를 해주지. 오십여 년 전에 함께 환관이 된 네
친구가 있었네. 같은 때, 같은 장소에서 거세를 한 스무 명의 소년
중에 살아남은 단 네 사람이었지. 그들은 의기투합해서 결의 형제가
되었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고 했지. 그런데 그중
하나가 대단히 뛰어난 사람이었어. 그들 네 사람은 약속하길 그 하
나를 밀어서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자. 그 다음엔 그 영광을 함께 나
누자고 했지. 오십년이 지난 지금 그는 성공했네. 그러나 나머지 사
람들은 영광을 함께 누리지 못하고 있지."
"그 한 사람이 누굽니까?"
"지금의 제독태감일세. 조홍(趙鴻)이란 인물이지. 조비홍의 양아
버지이고…."
용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배신당한, 혹은 성공한 뒤에 무
시당한 세 사람의 복수극이구나. 이런 일에 낄 필요가 있나? 그 상
념은 허신의 마지막 말로 깨어졌다. 그리고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강호에는 상관조홍, 북신 상관대부라고 알려진 자가 그 친구일
세."
"상관대부가 조홍? 환관이라고요? 제가 본 상관대부는 수염이 멋
진 사람이었는데요?"
"가짜 수염이었겠지."
어이 없다는 표시로 쓴 웃음을 한 번 지어 보이고용유진은 이야기
를 시작했다. 허신은 조용히 앉아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하고,
그의 팔찌와 상처들을 살펴보았다.
"기연이로세, 기연이야."
허신은 기꺼운 표정이었다.
"우리는 공통의 적을 가지고 있군. 자네가 내기에 이기기 위한 가
장 큰 적은 상관조홍이 될걸세. 그는 자신이 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야. 공손조덕이 아무리 그를 견제해도 그는 하고자 하는 일은
하고 말지. 그에게는 일천, 일만의 손과 발이 있다네. 정말 무서운
것은 상관대부가 제독태감이라는 것을 무림인들은 알지 못한다는 점
이야. 그게 그에게 무한의 힘을 준다네."
"정말 어려운 적이군요."
"다행한 것은!"
허신은 웃고 있었다. 그에게는 정말로 이길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만났다는 것일세. 만약 따로였다면 정말 힘들었겠지. 그
러나 우리가 만남으로 해서 가능성은 반을 넘어섰네."
용유진은 물었다.
"이제 제가 해야 할 일은 뭡니까?"
"이제, 이제 자, 자네가 할 일은…, 제, 제일 먼저 할 일은…."
허신이 다시 말을 더듬었다. 그의 얼굴도 다시 붉어졌다. 용유진
은 이렇게 수줍음이 많은 노인네를 음모의 동반자로 믿어도 되는 것
일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허신은 그보다 더 한 것을 요구하고 있
었다.
"나, 나를 스승으로 모시게. 그게 시작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