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뭐라고?"
조비홍은 의외로 재미있는 일을 만났다는 표정이었다.
"그녀석이 왔다고?"
"예. 약속시간에 정확히."
진일동은 욕이라도 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말해 주었다. 다 잡은
놈을 풀어줬다고 이 사흘동안 얼마나 구박을 당했던가. 위류향은 멍
청한 놈이고, 그런 수하를 둔 진일동도 마찬가지라는 심한 욕까지
들었었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그 앙갚음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
만 조비홍은 역시 의외라는, 그리고 재미 있다는 표정일 뿐 미안해
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놈이 멍청한건가? 아니면 천자일호가 사람 보는 눈이 있는건
가."
"둘 다죠."
조비홍은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고 명령했다.
"데려와 봐. 멍청이의 얼굴을 봐두고 싶군."
***
위류향은 강복사(降福寺) 후원 연못 위로 가로지른 다리난간에 기
대어 혼탁한 연못 물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검은 옷에 검은 가죽
장화, 허리에는 검은 칼집에 꽂힌 검은 칼. 온통 검정 일색의 복장
이었다. 그는 검정색이 그의 일상적인 활동에 최대한의 편의를 준다
고 해서 즐겨입었다. 특히 살인과 폭력에 편한 옷이었다.
살인과 폭력에 편하기로는 이 연못, 이 다리만한 것도 없었다. 위
류향은 반대쪽 난간에 피곤한 듯 팔을 걸치고 앉아있는 소년, 용유
진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 연못이 장명지(葬命池)라고 불리는 줄 모를 것이다. 이
다리가 생사교(生死橋)라고 불리는 줄도 모를 것이다. 연못 건너편
저쪽에 음침하게 자리잡은 건물에서 지금 그의 생사를 가름짓는 대
화가 오가는 줄도 모를 것이다. 이 다리는 생사교, 생과 사가 여기
에서 갈라지는 곳이었다. 두 사람이 이 다리 위에 서 있으면 하나는
집행자고 하나는 염왕 앞에 끌려온 죄인이 되었다. 건너편 건물의
문이 열리고 신호가 오면 집행자는 손을 써서 죄인의 목을 따고, 연
못으로 밀어넣으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스러진 생명이 얼마나 되는
지, 이 연못 바닥에 깔린 해골이 몇이나 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오늘 어쩌면 연못은 또 하나의 생명, 어린 소년의 혼백을 삼키게 될
것이다.
"너는…."
위류향은 주저하면서 말을 붙여보았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괜
한 일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제거하라
는 결정이 나오면 바로 죽을 녀석과 말을 나눈다는 것은 또 웬 허무
함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용유진이 흙먼지 묻은 피곤한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핏멍들과 화상자국 위로 뽀얀 흙먼지는 약
속을 지키기 위해 달려오느라 묻은 것일게다. 그 얼굴에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 조차도 흙먼지가 내려앉아 지저분했다. 하지만 머리
카락을 치우자 갑자기 해가 떠오른 것처럼 주위를 밝히는 듯한 눈이
있었다.
위류향의 느낌으로는 지나치게 맑은 눈동자였다. 고문을 당하고
아버지와 지인들을 잃은 소년의 눈치고는 지나치게 밝은 눈동자. 험
한 세파에 홀로 던져진 소년의 눈치고는 지나치게 희망찬 눈동자.
"너는 우리가 밉지 않으냐?"
용유진의 대답은 짧고 확실했다.
"아니요."
"왜? 우리가 네 아버지를 음모에 빠뜨렸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미워하지 않느냐? 내가 보기엔 넌 크게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바보다. 사실은 둘 다인 것 같지만."
용유진은 위류향의 시선을 피해 연못 물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다
가 불쑥 물었다.
"여기는 동창이지요?"
위류향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 말을 긍정했다.
"그렇다."
경사 순천부 황성(皇城)의 북동쪽에는 두 개의 사찰이 있었다. 백
탑사(白塔寺)와 여기 강복사가 그것인데, 백탑사가 순천부에 사는
서민들이 드나드는 곳이라면 강복사는 왕족, 귀족들과 관료들의 가
족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적어도 외부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사실 강복사의 후원에는 대규모의 비밀 공간이 조성되어 있
었다. 이곳이 드러나지 않은 동창의 본거지였던 것이다.
"동창인줄 알았다면 여기로 오지 않았겠지?"
용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몰랐어도 왔을거고, 실제로 알고 왔습니다."
"너는 동창이 살인귀들의 집단이라는 말도 못 들었느냐?"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들었죠. 지금 중원에 있는 세력 중 가장
강한 곳이 동창이라고."
위류향은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었다. 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
은 그가 짜증을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곤란할 때 짜
증이 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동창의 위사가 짜증을 내는 것
에는 중요한 결과가 따른다. 위류향은 좀 더 사무적으로 용유진을
대하기로 결심했다. 비록 그것이 위협으로 보인다고 해도 이 막무가
내인 어린애에게 겁을 먹게 하는 데에는 효과적일 수도 있을 것이
다.
"넌 우리 동창을 우습게 여기는 것같구나. 여기서는 그렇게 '유감
없습니다. 전 아무 것도 몰라요'라고 시치미를 떼봤자 넘어가는 곳
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여기는 미진한 것을 싫어하고 말이 도는 것
을 미워하는 곳이다. 풀을 뽑으면 뿌리까지 같이 뽑지, 괜한 잡초를
남겨뒀다가 말이 흐르는 걸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는 여기에 와선 안되는 거였다. 살아날 가능성보다는 죽
을 가능성이 더 높은 곳이 여기야."
"저는 약속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위류향은 말을 하다가 용유진의 성난 목소리에 흠칫 멈추었다. 용
유진은 불타오르는 것처럼 강렬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안 오려고 했다면 안 왔을 겁니다. 당신에게 오겠다는 소리를 애
초에 안했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오겠다고 했고, 그래서 왔습
니다. 죽을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습니다. 언제나 그렇죠. 전 길거
리에서 흙장난을 하는 평범한 어린애가 아닙니다. 전 언제나 죽음과
패망을 그림자처럼 달고 다니는 무가(武家)의 자손입니다. 비록 지
금은 패망한 가문의 자손이라 해도."
단숨에 말을 내뱉던 용유진은 상처입은 자존심을 달래려는 듯 잠
시 말을 멈추었다가 훨씬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표사였습니다. 그러다가 능력을 인정받아 표두가 되고,
총표두가 되고, 나중엔 여러 사람에게 돈을 빌려 비룡표국을 세웠
죠. 비록 표국을 운영하는데에는 별로 능력이 없어서 나날이 빚만
늘고, 결국엔 그렇게 돌아가셨지만 최소한 그분은 표사의 도리를 모
르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내력이 있든 임무를 맡았으면 그
와중에 생기는 일에 대해서는 전부 아버지 당신의 책임으로 생각하
셨지 결코 남에게 그 책임을 돌리진 않았습니다. 이번 일도 그 연장
선 상에서 생각할뿐 당신들에게 책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
다."
그리고는 위류향을 노려보며 한 마디씩 끊어 말했다.
"비록 당신들의 음모에 의한 일이라 해도."
그것이 마치 위협하는 것같아 위류향은 잠시 어이가 없어 했다.
위협을 하려다가 도리어 당한 셈이었다.
"너는, 이 건방진 꼬마놈아…, 젠장, 관두자!"
위류향은 용유진이란 이 건방진 꼬마와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기
로 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대단히 주관이 뚜렷하고, 어른스럽다, 의
지가 굳다, 이런 식으로 좋게 볼수도 있지만 위류향에게는 전혀 그
렇게 비쳐지지 않았다. 그와 같이 인생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사람
에게는 용유진이란 소년의 말이 거의 전부 가식으로 들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제 진일동과 조비홍의 상담 결과가 제거로 나온다고
해도 별 가책없이 용유진을 죽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미워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용유진을 미워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미안해 하는 것인가? 그건 조금 그럴지도 몰랐다.
그 아비를 미끼로 일을 했으니 그 아들에게는 조금 미안해 하는
것이 당연했다.
만약 용유진이 눈물 콧물 떨어뜨리며 아비의 시체를 잡고 울었다
면 더욱 미안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용유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놈은 어른이라도 그렇게 하지 못할 냉정함과 결단으로 홀로 서려고
했다. 나름의 원칙을 정하고, 그 원칙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위류향은 그런 것을 생각하면 용유진이 적잖게 위험한 아이라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어딘지 무서운 구석이 있는 아이, 어쩐
지 거부감이 드는 아이였다. 이제 그는 처음 봤던 그때에 죽이지 못
한 것을 후회하는 마음이 되었다.
연못 앞에 선 건물, 그들 동창의 위사들과 관련된 일들을 처리하
는 집무실이라 할 선무청(宣務廳)에서 진일동이 걸어나오는 것이 보
였다. 위류향은 허리에 찬 칼의 손잡이를 가볍게 쥐었다. 진일동이
신호만 보내면 단칼에 용유진을 베어버릴 참이었다. 그래서 저 물고
기들에게 뜯기기 전에 완전히 죽여줄 생각이었다. 고통 없이 죽여주
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자선이었다.
진일동이 손을 들었다. 위류향의 손에 힘이 갔다. 저 손이 아래로
떨어지면 용유진은 끝이다. 여기에서 그는 또 한 번 실수를 했다.
죽일 사람의 눈과는 마주치는 것이 아닌데, 지금 용유진을 힐끗 보
다가 그 눈과 마주쳤던 것이다. 놀랍게도, 마음에 들지 않게도, 놈
은 전혀 두려워 하고있지 않았다. 그가 내뿜는 살기를 몰라서도 아
닌, 아까 보았던 독기에 가득찬 눈빛도 아닌, 그냥 담담한, 전혀 두
려운 빛이라곤 없는 눈빛이었다.
진일동이 들어올린 손으로 땀을 닦았다. 살려둔다는 신호였다. 위
류향은 칼에서 손을 뗐다. 맥이 풀렸다. 사실은 진일동이 신호를 하
기 전에 이미 맥은 풀려있었다. 용유진의 눈빛이 그가 예상하지 못
했던 빛깔을 띠고 있을 때 이미 그랬다.
위류향은 용유진이 그가 생각하지 못하는 범위의 인물이라는 인상
을 그 순간 강하게 받았던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꼬마, 그것이
용유진에 대해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진일동은 땀을 닦은 손으로 다시 그들을 손짓해 불렀다. 다가가자
위류향을 기다리게 하고 용유진만을 데리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위류향은 다시 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판결은 아직 나지 않은 것
이다. 변덕이 하늘을 찌르는 조비홍이란 얄미운 태감은 직접 보고결
정을 내리려 하는 모양이었다. 위류향은 칼 손잡이를 쓰다듬었다.
"쓸 일이 없었으면 했는데, 다시 쓰게 될지도 모르겠군."
말을 해놓고 스스로 놀랐다. 결국엔 저 건방진 꼬마를 죽이고 싶
지 않다는 것이 그의 본심이었던 것이다.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았던
사실을 입이 말해버리는 당혹감을 씹으며 위류향은 선무청 문앞에서
서성거렸다.
***
"나는 말야…."
조비홍은 놀리듯 빙글거리며 용유진의 턱을 쥐고 이리저리 기울였
다.
"눈만 보고도 그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알아보는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지금 네 눈은 매우 기분 나쁘다 이런 눈이란
말이지."
용유진은 실제로 매우 기분나빠 하고 있었다. 소나 말을 품평하듯
이 가지고 노는 데 기분이 나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 것인가.
게다가 이 환관놈의 손가락은 어른답지 않달까, 아니면 남자답지 않
달까, 마치 어린아이의 손가락처럼 부드럽고 말랑말랑해서 곱절로
기분이 나빴다. 수초처럼 착 달라붙었다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마음
을 꿰뚫어보는 신기한 능력이라니…, 누굴 어린애로 생각하고 있는
건가라는 반감이 치밀어 올라 조비홍의 첫인상을 망쳐놓았다. 그렇
게 보면 조비홍이 신기한 능력을 지니고있는 셈이긴 했다. 단번에
싫어지는 능력이었다.
조비홍은 그런 용유진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용유진의
턱을 잡고 말했다.
"그러니 솔직히 말해봐. 우리에게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
지? 우리에 대해 누구에게 이미 말했지? 복수하기에는 너무 강하니
어쩔 수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분하긴 여전하지? 그렇지?"
"물론 분하지요."
"그래, 그렇지 역시?"
"당신 손에 이렇게 잡혀 있는게 분하단 말입니다. 당신은 내가 어
린애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조비홍이 처음에는 놀란 듯, 그 다음에는 재미 있다는 듯 용유진
의 눈을 쳐다보다가 턱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호…, 제법 뼈대가 있는 걸? 어린애가 아니란 말이지? 그럼 뭔
가? 사내 대장분가?"
"물론입니다."
"내 눈에는 어린애로만 보이는걸?"
"사내만이 사내를 알아볼 수 있는겁니다."
조비홍의 안색이 돌변했다. 진일동이 뒤에서 눈을 크게 떴다. 조
비홍에 대해 분노를 넘어서 원한까지 가지고 있는 그였지만 여태 이
렇게 대담하게 욕을 하진 못했었다. 환관에게 감히 사내가 아니니
어쩌니 약점을 찔러 버리다니. 한편 통쾌하면서 한편으로는 조마조
마해지는 진일동이었다.
'불쌍하게도 곧 죽겠구나!'
그의 눈에는 이미 용유진이 목 없는 시체로 보였다.
가장 둥근 것은 찌그러져 보이고, 가득 찬 것은 오히려 비어 보인
다는 말이 있다. 지금 조비홍의 상태를 보면 거기에 '지극히 분노한
자는 오히려 냉정해 보인다'라는 한 마디를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조비홍의 표정은 딱딱히 굳어져 있긴 하지만 그것은 무표정에 가까
운 것이었다. 모욕감을 느끼고 있다거나 분노했다거나 하는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단지 용유진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
민하는 것처럼 뒷짐을 지고 방안을 서성일 뿐이었다. 물론 그 모습
이 진일동에게는 어떻게 고통스럽게 죽여줄까를 고민하는 모습으로
비췄지만 실제 조비홍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의 기대 내지는 예상과
는 전혀 딴판이었다.
"사내란 말이지…. 좋아 그럼 내게 네 사내다움을 보여줘야겠다.
여기 머물면서…. 뭘 할 수 있을지, 어떤 방법으로 사내다움을 보여
줄지는 천천히 생각해 보지."
"갇히는 것입니까?"
"왜? 갇히는 건 두렵나?"
"싫지만 두려울 건 없지요. 하지만 그전에 잠시 나갔다 와야겠습
니다."
"왜? 밖에 연인이라도 있나?"
긴장된 상황에서도 용유진의 얼굴이 붉어졌다.
"연인은 아니지만…, 절 기다리는 소녀가 있습니다. 그녀에게 기
다리지 말라고 말해주고 와야합니다."
"갔다 와."
너무도 쉽게 조비홍의 승낙이 떨어졌다. 진일동이 놀라 눈을 부릅
떴다.
"그냥 보내주는 겁니까? 안 돌아오면…?"
"오늘도 꼭 돌아온다고 한게 진대주 아니었나? 한 번 돌아왔는데
두 번 안 돌아올 이유가 어디 있겠어."
조비홍은 진일동의 말을 간단히 묵살하고는 다시 용유진을 향해
말했다.
"만나거든 이렇게 말해라. 동창에서 위사가 되어 지내기로 했다
고. 갇히는게 아니라고 말이다. 그럼 네 소녀도 안심하겠지?"
***
선무청 문이 다시 열리고 진일동과 용유진이 걸어나왔다. 다리 위
에서 이를 본 위류향이 다가오자 진일동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보고 이녀석을 맡으라는군. 위사로 한 번 키워보래."
위류향은 진일동의 표정으로 '맡는다'는 말의 의미를 알아 들었
다. 그것은 '위험할 땐 베어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는 것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난 밖에서 살잖아? 그러니 자네가 맡아보게. 물
론 책임은 내가 지지. 좋겠지?"
말은 어찌 되었건 간에 책임은 간단히 진일동으로부터 위류향에게
넘어왔다. 위류향은 거부할 수 없었다. 조비홍의 말을 진일동이 거
부할 수 없었던 것처럼.
위류향은 용유진을 넘겨 받으면서 진일동의 표정도 그대로 넘겨받
은 모양이었다. 못 먹을 걸 먹은 것처럼 쓴 표정으로 용유진의 어깨
를 잡아 당겼다.
"가자!"
위사들의 숙소는 보통 절같으면 선방(禪房)이 있을 위치에 있었
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 위류향은 한 마디도 않고 있다가 그 자신이
숙소로 쓰는 선방 바로 옆에 다가가서야 그 멱살을 잡아 올린다음
얼굴을 가까이 대고 경고를 했다.
"이곳이 동창이라는 걸 기억해라. 엉뚱한 곳을 돌아다니다간 언제
죽어도 난 몰라. 나는 네가 살아서 무슨 짓을 저지르면 곤란해 지지
만 죽으면 아무 문제도 없어. 조금 더 살고싶으면 부르기 전에는 이
방 안에만 쳐박혀 있어!"
"명심해 두죠. 하지만 난 내일 또 나갔다 와야 합니다. 당신 상관
이 허락해 줬죠."
위류향은 그 자세 그대로 한참이나 있더니 내던지듯 놓아버리고
물러섰다.
"그 방이 이제부터 네 방이다."
돌아서서 몇걸음 걷더니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내일 내가 와서 밖으로 데려다 주지."
위류향이 가버리고 난 후 용유진은 방문을 열고 숙소를 들여다 보
았다.
방 양쪽에는 침상이 있고, 그중 하나에는 비단이불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벽에는 옷가지와 칼이 걸려있는데, 동창 위사의 복장
이었다. 빈 방이 아니라 누군가가 살고있는 것이다.
용유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방에 들어가 이불을 개어 침상 구석에
올려놓았다. 그리곤 한참 방안을 뒤져서 걸레 비슷한 물건을 찾아내
어 그걸로 대충 방안의 흙먼지를 쓸어내었다. 그런 다음에야 이불이
깔려져 있지 않은 침상에 드러누었다.
참았던 고통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용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상처는 아물지 않았고, 심신은 피로했다. 갑자기 바
뀐 환경과 아버지의 죽음, 첫 표행과 사이를 만난 것, 무엇보다도
월령과의 만남은 소년 용유진의 생활을 거친 바람처럼 흔들어 놓았
다. 거기다 이젠 동창이라 불리는 호랑이 굴에서 지내야 했다. 이들
이 그의 처리방법을 생각해 낼때까지, 조비홍이라는 변덕스러워 보
이는 환관놈의 손 위에서 불안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바늘 방
석 위에서 자도 여기보다는 편할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용유진은
피로에 지쳐 골아 떨어졌다.
방의 원래 주인인 번역 양평중(梁平重)이 들어왔을 때, 용유진은
그대로 웅크려 자고 있었다. 손톱 없는 손을 꽉 움켜쥔 채, 상처투
성이 얼굴에는 불안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그대로.
***
저녁이 될 때까지 조비홍은 업무에 여념이 없었다.
사람이 모이면 돈이 움직이고, 돈이 움직이는 곳에는 흐름이 생기
게 마련이었다. 사람과 돈, 물자의 흐름을 조정하는 것이 행정(行
政)이라는 것인데, 조비홍이 평소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무식한 위사들이 보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 같은 종이짝들
이 수북히 쌓여있다가 옮겨지고, 다시 쌓이고 하는 그 중심에 조비
홍이 있었다. 물론 그가 혼자서 그 재미없고 표도 안 나는 일을 하
고있는 것은 아니었다. 직제(職制) 상 그는 육품관(六品官)인 부내
관령(副內管領)에 해당하는데 팔품관(八品官)인 주사(主事)가 한 명
딸려있었다. 역시 태감이긴 하지만 일찍 출세한 조비홍과는 달리 나
이 마흔이 넘도록 먹물만 묻혀야 하는 늙은 태감이었다.
원래 모든 환관은 24아문(衙門)에 속해 있고, 수도 엄격히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환관 조직은 이 수에 그치지 않았고, 권한도
관서(官書)에 기재된 바를 훨씬 넘어섰다. 소위 24아문은 명나라 궁
정에 설치한 환관 아문의 주체인데, 12감(監) 4사(司) 8국(局)이 있
었다. 이 중에서도 12감, 거기에서도 다시 사례감이 권력의 핵심이
었는데, 조비홍과 그의 주사인 늙은 태감은 사례감으로부터 동창으
로 파견된 환관이었다.
둘 다 권력의 중추가 환관의 손에 들어가 있다는 증거였지만 또
두 사람의 신세에는 하늘과 땅같은 차이가 있었다. 조비홍은 젊은
환관들 중에서 재주를 인정받아 출세 가도를 달리는 중에 여기 동창
을 잠시 거치는 것으로 장래에 최정점에서 권력을 휘두르기 위한 수
업의 과정이었다. 그러나 늙은 환관은 인생의 종착점으로 제공된 자
리가 여기였다. 떠오르는 태양과 지는 별이 교차하는 자리인 것이
다.
떠오르는 태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숙소로 돌아가 쉬려는 모양
이었다. 하루종일 서류에 코를 처박고 있던 지는 별, 늙은 환관이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의 쪼글쪼글한 입술은 무엇을 말하
려는지 달싹거렸다. 조비홍이 그를 돌아봤다.
"뭐, 잊은게 있나?"
"아…, 저…, 그게… 없습니다."
조비홍이 입가에 비웃음을 물었다.
"아, 저, 그게 없습니까?"
"그…, 그게…, 없습니다."
"그, 그게, 그렇군요. 그럼 난 갑니다. 다음에도 이런 식으로 시
간을 뺏으면 이빨을 몽땅 빼버릴거요. 조, 조심, 조심 하시오!"
조비홍이 나가고 늙은 환관 허신(許愼)은 손을 들어 땀을 닦았다.
긴장만 하면 말을 더듬는 버릇은 수십년을 두고 고치려 했지만 여전
히 고쳐지지 않는 고질병처럼 그를 괴롭혔다. 재기에 넘치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조비홍이 그런 그를 얼마나 비웃고 있는지는 방금의 일
이 아니어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결국 그래서 오늘도 할 말을 못
하지 않았는가.
'결국, 제놈 손해지 뭐….'
용유진이 차고있는 팔찌가 아무래도 소문에 들려오던 그 일승 고
목대사의 것중 일부인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려 했었는데 제대로 들
으려 하지 않았으니 그만이었다.
'그보다…, 조비홍 이놈 그 꼬마가 좋아진 것 같지…?'
그는 조비홍의 남다른 취미를 알고 있었다. 소위 남색(男色)이었
다. 환관이 남색 취미라니 이상하지만 황궁에는 그런 취미를 가진
환관이 의외로 많았다. 어쩌면 그 자신에게는 없는 '남성'을 그런
식으로라도 충족시키고자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간 재미있는 녀석이 들어온건데….'
허신은 조비홍이 없는 집무실 안을 이리저리 거닐며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용유진의 출현은 그가 오랫동안 꿈꿔온 생각을 실천에
옮기게 하는 계기가 될 것같다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장장 오십
여년을 꿈꿔온 일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보고 결정하자.'
설레어 오는 마음을 달래며 허신은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가 다시
일어나 방안을 돌며 걸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져 가고, 등불도 켜지
않은 집무실에서는 허신의 눈이 신비한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