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행표-14화 (14/37)

제7장: 용유진, 경사(京師)에 가다.

1.

길은 경사 순천부로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마차의 바퀴  자국은

그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애초의 목적지였던 관도현을 멀리 돌아서 순천부로 향하며 용유진

과 월령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바퀴  자국을 추격했다. 밤에는

식별을 하기 어려우니 낮에 쫓아갈 수밖에 없었고,  월령은 낮에 행

동하기 어려워 밤에 쉬고 낮에 움직이는 쪽으로 주기를 바꾸어야 했

다. 그 덕에 칙칙한 수의는 벗고 보통 소녀처럼 변장까지 해야 했는

데, 기공 수련 중에는 부적은 떼면 안되는 것이라고 해서 부적을 들

어올려 이마에 붙이고 큰 모자를 써서 얼굴의 반을 가려야 했다. 그

래도 월령의 초인적인 안목이 아니었으면 관도에  찍힌 수많은 자국

중에서 하나만을 추적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행히 마차

가 묵은 객잔을 찾아내어 외팔이 나뭇꾼(외팔이에 허리춤의 도끼 때

문에 이렇게 불린 모양이었으니 아마도  이게 황구이였을 것이다)이

모는 쌍두마차라는 특징을 알아내어 추격이  훨씬 손쉬워졌다. 그러

나 그 흔적이 순천부에 거의 닿을 즈음에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놈

들이 마부를 바꾼 것이다. 그들 중의 하나가 했으면 어찌 되었건 외

팔이나 외다리가 모는 것이니 눈에 띄었을 것인데 아무리 탐문을 해

도 그런 마차는 못 봤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전혀 다른 누군가가 교

대해 준 모양이었다.

"실수했어. 이쯤 오면 진짜 배후가 나타날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

하는데…!"

새로운 마부는 아마도 중주사견의  배후세력이 보낸 자일  거라는

월령의 추측이었다. 용유진도 그 추측에  동의했지만 그렇게 추측한

다고 해서 뭐 하나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그  말은 결국 그들이 마

차를 놓쳤다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지?"

용유진을 만난 뒤로 입버릇이 되다시피  한 말을 월령이 다시  했

다. 용유진은 별로 걱정하는 빛이 아니었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에겐 마차보다 더 뚜렷한 목표가  있어. 그걸

찾으면 돼."

"그게 뭐지?"

"중주사견!"

월령은 자신이 왜 미처 그걸 생각해내지 못했는지  이상해 스스로

머리에 알밤을 먹였다. 도적을 잡으면 장물도 찾을 수 있는 것이고,

마침 그 도적들은 너무나  알아보기 쉬운 놈들이지  않은가. 하지만

곧 월령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놈들을 어디 가서 찾지?"

"표국이 하는 일중에 도적 접대라는  게 있어. 평소 알고  지내던

도적이 표국에 찾아오면 안내인을 붙여서 그들이  먹고 마시고 놀도

록 보호해 주는거지. 길을 막지 않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하는 일이

니 일종의 거래지. 만약 이들이 관군에게 잡히기라도  하면 그 표국

은 접대를 잘못한 죄로 다시는 표국을 할 수가 없게 되는거야. 그러

니 문제는 간단하지. 표사들이  잘 가는 곳에 도적들도  있어. 우린

순천부에서 그런 곳을 찾으면 되는거지."

"그렇구나. 하지만 그런 곳에 여자도 들어갈 수가 있을까?"

"변장을 하자."

용유진은 간단히 대답하고는 이번엔 약간 망설이며 물었다.

"혹시 노래 부를줄 알아?"

순천부 환락가에 누나는 비파를 타면서 노래를  부르고, 남동생은

그릇을 들고 돈을 걷으러 다니는 오누이  가인(歌人)이 새로 나타났

지만 이들을 주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루에는  이런 쌍을

몇이나 고용하고 있고, 일반 주루에도  하룻밤에 몇쌍씩은 거쳐가는

것이 이런 가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용유진과 월령은 별 의

심을 받지 않고, 게다가 돈도 벌어가며 중주사견을  찾아다닐 수 있

었다. 그러나 수백곳이나 되는  순천부의 주루, 기원,  다원들을 다

돌아다니며 사람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행히 그들은

사흘만에 중주사견이 술을 마시는 주루를 찾아낼 수 있었는데, 이것

만으로도 어지간히 운이 좋은 것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백리제일루(百里第一樓)는 이름 그대로 인근 백리  안에서 제일가

는 주루는 아니었다. 그곳의 주인도 그렇게 얘기했다. 그런데 왜 이

름을 그렇게 정했느냐고 누가 물으면 유난히 턱이 길고 몸매가 얄상

한 중늙은이 주인은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말하곤  했다. 그의 이름

이 거창하게도 백리제일(百里第一)이었기 때문이었다.

시설이 그렇게 좋다거나 잔을 치는 기녀가 유달리  예쁘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인  자체가 호주가(好酒家)라 술맛  하나는 좋았

고, 신강식(新疆式) 양꼬치구이가 괜찮아 멀리서부터 찾아오는 손님

도 있었다. 그 백리제일루의 이층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술

을 퍼 마시는 무리가 문제의 중주사견임을  용유진은 단번에 알아보

았다.

용유진은 얼굴에 분칠을 하고 입술도 빨갛게 그려 이런 계통에 종

사하는 시동처럼 분장을 한 몸이었지만 혹시라도  그들의 눈에 본색

이 드러날까 두려워 월령의 뒤로 반쯤 몸을 감추고 속삭였다.

"어떻게 하지?"

다른 일에 있어서는 그가 앞장섰지만 싸우는 일에는  월령이 나은

것이다. 월령이 비파를 탈 준비를 하며 속삭였다.

"패거리가 더 있는지 일단 살펴보고 결정하자."

그녀는 비파를 타며 붉은 입술을 벌려 노래를 시작했다.

한가한 세월 천애(天涯)의 취객(醉客)

가을이 깊어가면 이몸 더욱 여위어.

묵은 분(粉) 남은 향기 꿈을 따라 식어가고

강물 위 낙화(落花)는 멀리 하늘로 흐르네….

월령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용유진은 백리제일루의 구조를  살폈

다.

넓은 일 층이 있고, 그 한쪽으로 나무 계단이 있어 이층으로 올라

올 수 있었다. 이층은 일층과 격리되어 지어진 것이 아니라 일층 위

에 선반을 두르듯이 만들어진 곳이어서 이층에  앉으면 일층을 내려

다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층에서는 다시 삼층으로도 올라갈 수

있는데, 삼층은 일층, 이층과  완전히 격리된 공간이었다.  흔히 이

삼층에서 기녀들이 몸을 파는 것이다.

중주사견이 앉은 곳은 이층의 동북방 모서리로 올라오는 계단에서

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옆에는 창문이 있어 올라오는 사람을 감

시하기에도 용이하고 혹시 만일의 사태에는 도망가기에도 편한 자리

였다. 어떻게든 생포해서 비단  오십 필을 토해내게  만들어야 하는

월령과 용유진으로서는 좋지 않은 일이었다. 창문을 막고 서면 일층

으로 뛰어내릴 수가 있고, 반대로 그쪽을 막으면  창문으로 튈 수가

있는 것이다. 어쨌든 두 명이 있어야 잡기 용이하다는 얘기인데, 월

령은 몰라도 용유진으로서는 그 한 명의 역할을 해내기 어려웠다.

용유진이 고민하고 있는 사이 몇 명의 사내가 이층으로 올라왔다.

무심코 바라본 용유진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풍도당의 싸

움에서 본 얼굴, 용유진은 모르지만 천자일호 위류향이라 불리는 사

내였다.

'동창의 고수랬지?'

용유진은 동창과 비룡표국이 협력해서 풍도당을  몰살시켰다는 중

주사견의 말을 잊지않고 있었다. 그 말대로라면 위류향은 동창의 고

수일 것이다. 혹시 아니라 하더라도 고수임에는  틀림 없었다. 용유

진은 눈을 빛내며 그들 일행을 향해 다가갔다.

"양포두(梁捕頭)님 오랜만입니다. 여기에서  만나게 되다니  정말

인연이군요!"

위류향이 움찔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양포두'라  불린

사내가 주변에 있는지 둘러보았다.  용유진은 조금 더  나아가 그의

면전에 대고 깊이 읍을 하며 다시 말했다.

"양포두님, 절 몰라보시다니 섭섭하군요.  저 용비룡(龍飛龍)입니

다. 풍도(豊都)에서 한 번 인사를 드렸었죠."

위류향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가볍게 손을 들어올렸다.

"아…, 그 용…형제로군. 그래, 그동안 잘 지냈나?"

용유진은 됐다고 생각했다. 위류향은 양포두라고 대충  지어 부른

그 칭호를 거절하지도 않고, 용비룡이라고  지칭한 그를 알아보기도

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위류향을 포함한 네 사람 모두 칼을 차고 있

고, 자세히 보니 그들 모두가 풍도당에서  본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복면을 하지 않은 네 사람이, 아마도  그들이 지휘관으로 보였는데,

그 네사람이 전원 여기 나타났다는 것은 하늘의 도움이라고 할 정도

였다.

"말도 마십시오. 그날 이후 온갖 일이 다 있었지요.  아 참, 쉬시

러 오셨는데 제가 가로막고  있어서 자리도 못  잡으시는군요. 제가

보아둔 자리가 있으니 이리 오시죠."

그는 팔을 들어 애매하게 동북방을 가리켰다. 구석에는 자리가 없

었지만 대충 그 방향에는 자리가 한두 개 는 있었다. 위류향은 동료

들과 얼굴을 마주 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용유진의 뒤를 따

랐다. 구석 자리에 다가가자 마침 거기 좋은 시비거리가 벌어지고있

었다. 낯짝이 희여멀건 개놈, 백구말이 월령의  얼굴과 예쁜 목소리

에 음심(淫心)이 동했는지 손목을 끌며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월령

은 입으로는 거부하는 듯하면서도 마치 힘에  못이겨 끌려가는 것처

럼 다가가 그들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용유진의  도움 없이 혼

자 상대하려고 결심하고 하는 행동이었다.  용유진이 속으로는 반색

하며, 그러나 겉으로는 분노에  가득한 얼굴로 그  사이에 뛰어들었

다.

"아니 이런 개같은 놈들이! 누이를 놔줘!"

"뭐? 개?"

황구이가 예민하게 반응하며 손을 흔들었다. '짝'  소리가 울려퍼

지며 용유진의 몸이 반대로 날려졌다. 얼굴을 감싼  손 사이로 피가

비쳤다. 호되게 따귀를 얻어맞은 것이다. 용유진은 그렇게 주저앉은

채 위류향을 가리켰다.

"이런 개같은 놈들! 중인 환시리에 아녀자를  희롱하다니…, 여기

포두님이 계신데도 두렵지 않으냐?"

"포두? 어떤 놈이 포두야?"

황구이가 약간은 켕기는 표정으로, 그러나 전혀 두려워 하지는 않

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손이 허리춤의 도끼를 감아 쥐었는데

그것이 신호역할을 했다. 위류향과 오대룡, 석소봉과 황자일호(黃字

一號)가 적의 위협에 대항해서 본능적으로 칼을  빼들었다. 네 사람

의 손이 하나가 된 듯 일사불란하고도 쾌속한 솜씨들이었다.

그와 동시에 월령의 손이 움직였다. 자신의 손목을 잡고있던 백구

말의 손을 다른 한손으로 가볍게 쥐더니 비틀었다. 술상이 엎어지며

백구말은 허공에서 완전한 한 바퀴 회전을 하고는 주루 바닥에 코를

박았다. 반구대가 심상찮은 기색을 느끼고 신속하게 발을 들어 술상

을 걷어차 날려보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잊은 것이 있었다. 한

쪽 다리가 이미 잘려나가 그에게는 발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원래는 이런 상황에서 한 발로 상을 차고, 다른 한발로는 뛰어 일어

나 도망을 가든지, 아니면 싸울 준비를 하든지 할텐데 한 발이 부족

한 바람에 상을 걷어차고도 의자에서 뭉개고 앉아 있어야 했던 것이

다. 월령은 그녀에게 날아오는 탁자를 오른팔 팔뚝으로 후려쳐 부숴

버리고 그때까지 의자에서 뭉개고 있는 반구대의  목덜미를 거머 쥐

었다. 그리고 뒤로 당겨 의자채 넘겨뜨려 버렸다. 반구대가 철수(鐵

手)를 들어 월령의 팔뚝을 할켰다. 날카로운 손톱에 몇 조각이 나야

마땅할 그녀의 손목에는 자국하나 남지 않았다. 대신  쇠와 쇠가 부

딪히는 듯한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너, 너는…!"

반구대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지만 그 입에 월령의 작은 발이 틀어

박히는 바람에 끝을 맺지 못했다. 월령은 그동안  고생한 대가를 받

아내려는 듯 심하게 손을 쓰고 있었다.

도망가는 데 빠른 놈은 황구이와 흑구삼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같이 생활했기 때문에 반구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금세 눈

치채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반구대의 손톱에 할퀴어 끄덕 없을 뿐만

아니라 쇠소리까지 내는 손이 누구에게 달려있는지  바로 얼마 전에

보았기 때문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 그 손의 임자가 그들을 잡

으러 왔다는 것 정도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니 도

망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다행히 그들을 가로막는  것은 멍청한 포

두 넷밖에 없다. 그들이 비록 강시당의 여강시에게야 상대가 안된다

하지만 좀도둑이나 잡으러 다니는 포두 넷쯤이 두려울 리가 없었다.

황구이는 뽑은 도끼를 휘두르며 눈을  부라렸고, 흑구삼은 경신술을

발휘해 그들 네명의 포두 사이로 뚫고 지나가려 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

네 명의 포두, 사실은 동창의 당두 네 명은 그들을 그냥 보내주지

않았다. 더욱이 그들에게  뚫리지도 않았다. 위류향이  칼을 휘둘러

황구이의 도끼를 찍었다. 문짝만큼 큰  개산대부와 버들잎처럼 호리

호리한 유엽도(柳葉刀), 힘으로나 무게로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같

은데 놀랍게도 개산대부가 눌렸다. 황구이의  거대한 도끼는 막대기

에 찍힌 뱀 머리처럼 바닥에 납작 붙었다. 황구이의 몸이 같이 앞으

로 쏠렸다.

"어어…!"

비명도 잠시, 오대룡이 황구이의 앞으로 숙여진 머리에 자기 머리

를 박았다. 돌과 나무가  맞부딪힌 것같은 둔탁한  소리가 퍼지더니

황구이는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져 정신을  잃었다. 마루바닥에 핏물

이 비치더니 곧 흥건히 고였다. 그가 나무였던 것이다.

흑구삼은 더욱 비참했다. 석소봉과 황자조장은 그들  사이로 미꾸

라지처럼 빠져나가려는 흑구삼이  괘씸했는지 조금 심하게,  그러나

간단하게 손을 썼다. 들고있던 칼을 돌려 보법(步法)을 밟고있는 흑

구삼의 발등을 찍어 마루바닥에 못을  박아놓았던 것이다. 흑구삼은

앞으로 달려가던 서슬에 칼 중동까지 발을  뽑아올리고는 나무에 매

달려 두들겨맞는 개나 낼만큼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석소봉이 그

소리를 막았다. 그는 흑구삼을 향해 발을 뻗어  낭심을 걷어차 버렸

다. 이제 흑구삼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렇다고 황구이처럼 편

하게 정신을 잃지도 못하고 지옥을 넘나드는  고통을 고스란히 감수

해야 했다.

점소이가 걸레를 들고 허둥지둥 달려왔다. 하지만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한쪽에서는 소녀가 두 장한을 밟고  서있고, 다른쪽에선 두

명이 보기에도 섬뜩한 모습으로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으니 탁자 치

우는 것이 전문인 그가 손댈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이걸 어쩌나, 이걸 어째?"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방정 떨지 마라. 아무 일도 아닌 걸 갖구."

돌아보자 거기 주인 백리제일의  긴 턱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합죽이 인상이라 웃는 듯한 모습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서도 웃고 있다는 건 무언가 이상했다.

"손님들 놀라실까봐…."

"네가 지금 제일 놀라고 있잖니."

그 말에 둘러보니 손님들은  전혀 동요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여흥으로 구경할 거리가 너무 빨리 끝난 것에 불만스러워 하는 빛이

었다.

"부서진 탁자와 그릇값은 어떻게 합니까요?"

"부순 사람들에게 받으면 되지. 넌 가서 일 보거라. 내가 잘 아는

애들이니까 안심하고."

그는 위류향 일행을 보고 있었다.

월령은 반구대의 얼굴을 밟고, 한편으로는 백구말의  손목을 꺾어

머리 뒤로 돌리고는 용유진이 데려 온 네  당두의 실력에 놀라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굳은 표정이 된 것은 네  명의 당두도 마찬가

지였다. 얼떨결에 사건에 끼어들어 손을 쓰긴 했지만 영문을 모르기

는 그들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위류향이 용유진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오랜만이군 용공자. 그렇잖아도 찾고 있었지."

정식으로 인사를 하려던 용유진이 멈칫하며 물었다.

"저를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물론 용건이 있어서지. 사실  내 상관이 자네를 찾으신다,  이런

간단한 일이지만, 그건  그렇고 그전에 지금  이 일을 설명해  보실

까?"

"제 표물을 강탈한 자들입니다. 중주사견이라는 이름의…."

위류향은 그 일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무라기들이군. 포도아문(捕盜衙門)에 넘기고 말을  해 놓겠네.

특별히 청할 말은?"

"제 표물 비단 오십필만 돌려받으면 그만입니다."

"좋아. 그렇게 되도록 하지. 그런데 저분 소저는 누구신지 소개해

줄 수 있겠나?"

"제 조력자입니다."

"좋아, 좋아."

위류향은 의미없이 고개를 몇번이나 끄덕이고는 다시 말했다.

"나와 함께 갈 수 있겠나?  미안하지만 자네 조력자는 말고  자네

혼자만."

용유진은 위류향을 한참이나 쳐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가 조

용히 말을 꺼내었다.

"이번 일은 제 첫 표행이었습니다. 첫 표행부터 표물을 털린거죠.

제 손으로 마무리를 짓고싶은 게 제 심정입니다만,  그럴 시간이 있

겠습니까?"

위류향은 용유진이 그랬던 것처럼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더니 갑자

기 칼을 들어 중주사견의  옷섶들을 들춰 보았다.  그리고는 월령의

발에 깔린 반구대의 품에서 전대를 찾아 벌려보았다. 상당한 액수의

은자와 전표(錢票)들이 있었다.

"비단 오십필이면 얼만가?"

"은자 천 냥쯤이죠."

위류향은 천냥짜리 전표와 백냥짜리 전표를 꺼내 용유진에게 내밀

었다.

"이런 놈들의 습성으로 보아 비단은 어차피 못  찾을걸세. 하지만

순천부에는 없는 것이 없다네. 이 돈이면 표물을  보상할 정도는 될

것 같은데 어떤가?"

"충분할 것 같군요."

"사흘이면 되겠지?"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사흘 후 정오에 북문 밖에서 기다리겠네. 괜찮겠지?"

"괜찮군요."

합죽이 백리제일이 그때에야 끼어들었다.

"손님, 여기도 계산을…."

오대룡이 잔뜩 인상을 긁고 백리제일을 바라보며 툴툴거렸다.

"아니, 우린 술도 못 마셨는데 무슨 계산이요?"

"저게 있잖아, 저게…."

백리제일은 중주사견을 가리켰다.

"술은 안 마셨어도 재미는 있었을테니 댁들이 계산해야지. 게다가

이쪽은 돈도 없어 보이거든."

"제길 돈 냄새는 잘 맡아가지구서는…."

오대룡은 툴툴대고 위류향이 전대를 풀며 물었다.

"얼마요?"

백리제일은 부서진 탁자와 의자, 그릇들이 자식이라도  되는 것처

럼 처량하게 바라보며 손가락을 꼽았다. 합죽이라는 것이 참으로 편

리한 것이라 입술 끝,  눈매, 눈썹 꼬리를 약간씩만  조정해도 웃는

얼굴에서 처량한 얼굴로 즉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유효적절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요즘 저렇게 재질도 좋고  튼튼한데다 잘 만들어진 탁자  구하기

어려워. 에구, 그릇들도 엇그제 새로 사서 처음 세상을 본 것들인데

…."

위류향이 쓴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얼마를 달라는거요?"

"만 냥만…."

위류향 일행의 안색이 굳었다. 백리제일은 스스로  생각해도 황당

한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돌렸다.

"줬으면 좋겠지만 그건 어렵겠지? 백냥만 주게나."

"날도둑은 여기 있었군. 같이 잡아가 버릴까보다…."

위류향은 웃는 듯 화내는 듯 중얼거리고는  열냥짜리 마제은(馬蹄

銀) 하나를 던져줬다.

"이거면 되겠지요? 더 달라고 하면 정말 잡아가 버릴거요."

백리제일은 요구한 액수의 십분의  일밖에 못 받았는데도  흐뭇해

하며 손을 저었다.

"아쉽지만 이걸로 참지 뭐. 다음에 또 오게나."

위류향과 오대룡들은 코웃음을 남기고는 중주사견을 개 끌  듯 끌

고 나가버렸다.

백리제일이 빈 탁자 하나를 가리키며 월령과 용유진에게 말했다.

"이왕 오셨으니 뭣 좀 먹고 가지?"

월령은 자리에 앉았지만 주문은 하지 않았다.

"잠시 앉았다가 바로 가지요."

백리제일이 실망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어 보이며 다시 물었다.

"술이라도 한 잔 하지?"

"술 못 마셔요."

"술도 못 마시는게 사람인가? 알았어, 하여간 탁자 사용료도 받아

야 하지만 오늘 특별히  무료로 해주지. 대신 빨리  가야해. 손님들

붐빌 시간이니까."

돌아가는 백리제일의 뒤를 향해 용유진이 혀를 내밀었다.

"야박한 영감!"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아. 하지만 그보다…."

월령은 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아까 그 사람들이야 말로 보통 고수들이 아닌데 누구지?"

"동창 사람들이야."

"동창!"

월령이 숨이 막힐 듯 놀라 외마디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더욱 걱

정스러운 소리로 물었다.

"약속을 지킬거야?"

"물론."

"그들은 좋은 사람이 아니야. 그래도 지킬거야?"

용유진은 월령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을 피할 수가 없으니까 약속을 지키는 수밖에 없겠지."

월령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말았다. 동창이 지목하면 살아있는 한

은 동창을 피할 수가 없었다. 표사를 하며 살아가려면 더욱 그랬다.

용유진의 말이 맞는 것이다. 그러나 월령은 다른  방법은 없을까 애

써 고민해 보았다.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하지?"

용유진은 눈을 껌벅거리며 월령을 바라보았다. 웬지  이상한 기분

이 들어 그냥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그는 힘겹게 말했다.

"일단 나와 함께 관도현으로 갔다가…."

"갔다가…."

"내가 그들을 따라간 뒤에 그 장소에서 매일 정오에 날 기다려줘.

한 달만…."

월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이 아니라 십 년을 기다릴 수도 있어. 살아만 있다면…."

"십 년을 기다려야 한다면 한달  후에 나와서 말을 해주지.  만약

안 나오면 우린 내기에 진거야."

"그런 일은 없어."

월령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살아나올 자신이 없으면 아예 들어가지 마. 난…, 우린… 어떻게

든 내기에 이겨야 해."

"약속하지."

용유진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우린 내기에 이겨. 꼭 그렇게 되도록 할거야."

월령이 마치 울 것같은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무어라  말을 하려

다가 참고, 다시 말을 하려다가 참더니 마침내 말했다.

"관도현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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