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용유진의 수레에 짐이 하나 늘었다. 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건
강하지도 않은 나귀의 부담을 늘여준 것같아 용유진은 미안해 했지
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새로 늘은 짐은 월령이 누워 쉬는 관이었기
때문이었다.
월령은 공손조덕으로부터 극히 일부분이긴 했지만 고루마공을 전
수받았다. 그것을 익히기 위해 하루의 반은 강시 상태로 운공을 해
야 하는 것이다. 보통의 무림인들처럼 운기조식 하는 동안 외부의
침범을 받으면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든다든가 하는 것은 아니었지
만 어쨌든 외부로부터 격리될 필요는 있었다. 특히 그때는 전적으로
강시상태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남의 눈에 띄어서는 곤란했다. 그
렇다고 그녀 때문에 하루의 반씩 쉬어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준비
한 것이 관이었다.
월령은 낮이면 관에 누워 수레에 실려가고, 밤에는 나와서 용유진
과 함꼐 걷고, 쉬면서 이야기를 했다. 용유진이 잠든 시간이면 옆에
앉아 그를 지켜주었다. 그녀는 용유진보다 한 살밖에 많지 않았지만
마치 어머니처럼, 누나처럼 그를 보살펴 주었다. 용유진은 싫은 척
하면서도 그 손길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그
를 무엇보다도 기쁘게 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보살핌에도 헛점은
있었다.
청주를 떠난 지 팔일째, 이제 하루 반나절만 가면 목적지에 도착
한다고 즐거워하고 있는 용유진의 앞에 새로운 도적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용유진이 잘 알고 있는 자들이었고, 그들도 용유진을 잘 알
고있었다. 그렇지 않고는 그런 계략을 꾸미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엔 무슨 일인지 몰랐었다. 용유진은 느끼지도 못하는 어떤 기
미를 눈치챈 월령이 대낮인데도 관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강시
상태로 운공중이었던 모양 창백한 얼굴로, 말도 없이 그녀는 어딘가
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것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네 명의 도적
이 용유진의 앞에 나타났다. 네 마리의 개들, 중주사견이었다.
"어이, 팔자가 좋군 그래. 미녀 강시와 유람중이라 이거지."
황구이가 건들건들 걸어오며 시비를 걸었다. 용유진은 무표정하게
그들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팔들은 어디 가져다가 팔아 먹었소? 다들 하나씩 없는걸 보니 같
이 가셔서 파신 모양이네요. 에구, 저분은 다리를 떼다 파셨네. 고
기값은 잘 쳐서 받으셨나 모르겠습니다."
여유자적하게 걸어오던 황구이의 얼굴이 똥색이 되었다. 뒤에서
보고있던 흑구삼의 얼굴은 시커멓게 죽어가고, 백구말의 얼굴은 더
욱 창백해졌다. '다리를 떼다 판 사람', 반구대가 이를 갈며 소리쳤
다.
"목숨은 살려둬라! 대신 팔다리를 잘라버려! 저 애새끼의 팔다리
를 육포로 만들어 두고두고 씹어야겠다."
"회쳐 먹는게 낫죠. 심장을 찔러도 죽지 않는 놈이니 간을 일부
잘라 회를 쳐도 살겠죠."
"뚜껑을 따서 골을 퍼 먹는게 제일 맛있겠지만, 그러면 죽겠죠?
그건 이 애새끼에게 너무 후한 일이라 못하는게 아쉽군요. 하여간
일단 팔을 자르고, 배를 갈라 간을 꺼낸 다음에…!"
저마다 흉악한 소리를 내뱉는 와중에 황구이가 요리사의 임무를
띠고는 앞으로 나섰다. 왼팔은 끊어진 데다가 도끼마저 잃었지만 오
른팔은 건재했고, 거기에는 예의 가짜 금도끼가 들려 있었다. 그걸
보고는 용유진은 상황에 맞지 않게 웃음을 흘렸다.
"도끼 하나는 어쩌셨소? 팔과 함께 팔았나요?"
황구이가 다시 뜨거운 콧김을 내 뿜었다. 용유진의 말이 무림인으
로서의 수치심을 자극했던 것이다. 대꾸도 않고 그냥 후려쳐 버리려
고 하는데 용유진이 결정타를 날렸다.
"제가 대신 알려드리지요. 도끼는 내가 팔아서 만두랑 바꿔 먹었
소. 비싼 것 좀 들고 다니지, 겉만 금이더군요."
"이 찢어 죽일 애새끼!"
황구이가 봄날의 곰처럼 흥분해서 도끼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용유진이 바란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원래 창칼에 다친 상처, 금창
(金瘡)을 입으면 일을 해서도 안되고 말을 너무 많이 하거나 웃어도
안되며, 짜고 맵고 시고 뜨거운 음식을 먹어도 안되고 데운 술, 뜨
거운 죽도 안되는 법이었다. 하물며 팔다리가 잘리는 중상을 입은
몸이 지금처럼 흥분하면 적을 죽이기도 전에 그 본인이 피를 토하고
쓰러지기 십상이었다. 주유(周瑜)가 제갈량(諸葛亮)의 편지 한 통에
죽은 이유가 바로 이것 아니었던가.
물론 약간의 도발로 황구이가 쓰러져 죽는다고는 기대하지 않았
다. 하지만 흥분하면 빈틈이 보이기 마련이고, 인간성으로는 몰라도
무공으로는 한참 아래인 그가 이길 수 있는 길은 빈틈을 찌르는 것
밖에 없었다.
번쩍 치켜 든 도끼, 활짝 열린 가슴, 만만한 꼴을 보면 이런 식으
로 공격하는 것이 가장 적당해 보이는 것인지 황구이의 자세는 묘하
게도 며칠 전의 도적과 닮았다. 용유진은 더 깊이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비장의 일초, 비룡승천을 펼쳤다. 보검은 아니지만 잘 갈려진
철검의 날이 스르릉 소리를 음미할 틈도 없이 검집을 빠져나와 푸른
섬광의 궤적을 허공에 그리며 황구이의 가슴으로 뻗었다.
그러나 황구이는 전날의 도적과는 달랐다. 그가 방심한 것도 맞
고, 용유진의 응수가 적절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 속도와 힘
에서 둘은 너무 차이가 났다. 전날의 도적이 치켜든 칼날을 내리치
려 생각도 못할 시간에 황구이의 도끼는 이미 용유진의 어깨죽지를
내리쳐 오고 있었고, 그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철검과 부딪쳤다. 그
리고 퉁겨내었다.
용유진은 검에서 시작된 진동이 손을 거쳐 어깨까지 울리게 하는
것을 느꼈다. 무어라 다음 대응을 생각할 틈도 없이 검은 그의 호구
를 찢고 빠져나가 버렸고, 그 또한 뒤로 나가 떨어졌다.
"이런 쥐새끼같은 것!"
황구이의 호통이 귀를 때리고, 도끼가 그 뒤를 이었다. 용유진은
방향도 확인하지 않고 일단 굴렀다. 귓가를 스치는 차가운 기운은
문짝만큼이나 큰 도끼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예리했다. 스치는 서슬만으로도 살갗이 찢겨질 것같았다.
용유진은 정신없이 구르고, 도끼는 그 뒤를 때렸다. 예리한 기운
이 그의 옷을 찢고 피부를 그었다. 도끼에 맞은 땅거죽이 한아름씩
벗겨져서 튀어올랐다. 예리함과 파괴력을 동시에 갖춘 공격이 폭우
처럼 쏟아졌다. 용유진은 그 폭우 속에서 요행히도 살아남고 있었
다.
사방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개놈들이!'
용유진은 경황중에도 중주사견에 대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
다. 황구이는 단번에 그의 팔을 자를 수도, 그를 죽일 수도 있을 것
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있지 않았다. 지금 이들은 그를 단번에
죽이지 않고 희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피하지 않을 수도 없었
다. 단칼에 맞아 죽는 것이 차라리 나을 수도 있었지만 이렇게 죽기
에는 너무나 아까운 삶이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값지게 죽고싶지
이런 개들의 손에 죽고싶지는 않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도끼의 공격이 갑자기 그쳤다. 대신 검은 채찍이 뻗어와서 용유진
의 목을 감았다. 갈고리처럼 강하고, 수초처럼 끈끈한 채찍이 그를
감아올려 공중에 띄웠다가 다시 땅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등에 와
부딪히는 흙바닥의 감촉이 마치 철판처럼 단단해 고통스러운데 스스
로의 무력함이 주는 고통은 그보다도 천 배는 강해 용유진을 괴롭혔
다. 채찍이 다시 그를 감아 올렸다가 내던지기를 몇 번, 용유진은
이를 악물고 비명을 지르지 않도록 노력했다.
"제법 뼈대가 있는 놈이네?"
흑구삼이 검은 얼굴에 충혈된 눈으로 용유진을 바라보며 한 마디
감탄사를 발했다. 그리고는 충혈된 눈에 한 층 살기를 더해 뇌까렸
다.
"난 이런 놈을 다루는 법을 알지. 뼈다귀까지 아작아작 씹어주는
거야."
흑구삼이 다시 채찍을 들어올리려 하는데 반구대가 막았다.
"자, 자, 됐어. 시간이 없다. 그 강시 계집애가 오기 전에 일을
끝내자구."
'이제 죽는건가?'
용유진은 길바닥에 널부러져 헐떡거리며 생각했다. 먼저 팔을 끊
고, 다음엔 다리, 그 다음엔 간을 끄집어 낸다고 했었다. 그 고통은
상상할 수도 없으니 어차피 상관 없었지만 첫 표행이 이렇게 비참하
게 끝난다는 것이 너무 억울했다. 도적들의 말처럼 그에겐 두 번째
세 번째 표행이 주어지지 않는 것도 억울했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
는 한줌의 힘도 남아있지 않아 도망갈 수도 없었다.
그런데 중주사견은 이상한 짓을 했다. 그는 더 돌아보지 않고 수
레를 끌고가는 것이었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생겼을까. 용유진은
필사적으로 기어가서 수레 바퀴를 잡았다.
"이건 안돼!"
"얼씨구? 살려주는 게 못 마땅한 모양일세? 목숨을 건져줬더니 짐
보따리까지 챙기겠단 말이지? 이거 도둑놈 심볼세 그려."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염두에도 없는 듯 황구이가 맘대로 지껄이
더니 수레에 실린 현판을 들어 용유진을 후려쳤다. 단단한 나무로
짠 현판이 산산이 부숴질 정도로 강하게 몇번이나 후려치고는 그 잔
해를 내던졌다.
"네놈 때문에 당한 걸 생각하면 정말…."
치가 떨린다는 표현이 지금의 황구이에게 정확하게 들어맞을 것이
었다. 그는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빨을 갈아부치고는 돌아섰다.
"살려두는 걸 다행으로 알아!"
용유진은 곤죽이 되도록 맞은 몸으로도 수레의 바퀴를 놓치지 않
았다.
"제발…, 이것만은…!"
"아니, 저것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황구이가 다시 다가가려하자 반구대가 말렸다.
"시간이 없다니깐! 그냥 깔아버리고 가자!"
수레가 움직였다. 용유진의 손이 수레를 따라 들어올려졌다가 깔
렸다. 뒤틀린 손가락들이 부러지는 소리가 귀에 사무쳤다. 수레는
떠나고 용유진은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따라가다가 기진해 멈추었다.
적잖이 어려움을 겪어보았지만 이때처럼 스스로의 무력함이 한스러
운 적이 없었다. 용유진은 땅바닥에 코를 박고 이를 갈았다. 부러진
손가락으로 땅바닥을 때렸다. 견딜 수 없을만큼 아파왔지만 회한과
분노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순간 그는 정신을 잃어버
렸다.
용유진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월령은 돌아와 그의 머리를 무릎
에 올려놓고 앉아 걱정스러운 눈길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 용유진이
머리를 들려하자 그녀는 손가락으로 밀어서 다시 눕혔다.
"조금 더 쉬어."
용유진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억지로 일어나 앉았다.
"표물…, 표물을 찾으러 가야해."
월령은 그를 더 붙잡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
고 조용히 앉아 있다가 눈물을 떨구었다.
"미안해. 내가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이런 일이…."
용유진은 그녀의 눈물을 보고 당황해버렸다. 스스로가 울었을 때
보다 더 가슴이 아파왔다.
"아니, 그렇게 생각할 필욘 없어. 내가 부족한 탓이야. 내게 조금
만 더 힘이 있었다면 그 개같은 놈들을…."
주먹에 힘이 들어가자 부러진 손가락들이 통증을 호소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월령이 눈물을 닦지도 않고 그의
손부터 들여다 보았다.
"아파? 내가 대충 치료하긴 했는데 아직 움직이면 안돼!"
"손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 없어. 놈들을 잡아야…. 그보다 어디로
갔었던 거지?"
월령은 고개를 저었다. 부끄러운 빛이 가득했다.
"가문 고유의 신호가 들렸어. 구조를 요청하는 소리였지. 날 유인
하려는 건줄은 알았어. 우리 가문 사람이 여기까지 와서 구원을 요
청하고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아는 누군가가,
아마도 세 사람 세력 중 하나의 짓일거라고 생각했어. 그들은 너를
건드릴 수는 없지. 내기가 걸려있으니까. 그래서 안심하고 유인책에
빠져준건데, 설마 네가 아니라 네 짐을 노릴 줄은 몰랐어."
"아니, 날 노린거야."
용유진은 고개를 젓고 이를 악물었다. 잠시 가라앉았던 분노와 회
한이 다시 밀려왔다.
"표물은 내 모든 것이니까."
월령이 부서진 현판을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고치면 다시 쓸 수 있을지도…."
"아니, 아니야."
용유진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첫 표행의 표물은 현판 따위와는 비교 할 수도 없이 중요해. 현
판은 다시 만들면 그만이지만 첫 표행의 표물은 잃으면 다시 보상할
수도 없어. 그건 정말로 내 모든 것이야. 그걸 잃으면 내 표사로서
의 삶은 끝난다구."
월령은 아무 말도 않고 있었다. 용유진의 지금 심정을 도무지 이
해할 수 없는 것이다. 물건을 잃으면 돈으로 보상하면 그뿐일텐데,
설사 그게 안되어 표사로서의 삶이 끝난다해도 그게 어쨌단 것인가.
세상에는 표사보다 훨씬 나은 삶이라고 인정되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곧 그녀는 마음을 돌렸다. 이 소년, 용유진에게 표사
가 되는 것, 그것도 좋은 표사가 되는 것은 지고지상의 목표인 것
같았다. 그녀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가치가 없다고는 할 수 없
는 것이다.
"이제 어쩔거야?"
용유진은 월령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힘있게 한 마디씩 끊어 말
했다.
"더 강해져야겠어."
"어떻게?"
"무공을 배워야지. 지금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무공을!
하지만 그 전에 표물을 찾아야겠어."
짐은 무거웠고, 덕분에 수레바퀴 자국도 깊었다. 얼마전에 비가
와서 땅이 물렀던 것도 용유진에게는 행운이었다. 그와 월령은 어렵
지 않게 수레바퀴 자국을 추적해서 한 시진이 넘어가기 전에 수레를
발견했다. 그리고 나귀의 시체도, 월령이 쉬던 관도 발견했다.
"지독한 놈들, 나쁜 놈들…. 나귀가 무슨 죄가 있다고…."
아무리 지독한 녹림도도 마부와 말은 죽이지 않는 법이었다. 그들
에겐 죄가 없으니까. 표사는 지키는게 직업이고, 도적은 훔치고 뺏
는게 직업인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죽어도 되지만 마부와 말은 죽
여선 안 된다. 그것이 불문율(不文律)이었다. 그런 불문율을 어긴
'지독하고 나쁜 놈들', 중주사견은 그 자리에 없었다.
"이상하네, 그들은 표물에 관심이 없어야할텐데…, 이상하게…."
월령이 두 번이나 이상하다는 말을 하는 이유는 표물을 뒤진 흔적
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그녀의 추측대로라면 이들은 일승, 명
성, 북신, 이 세 사람 중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표물을 강탈한 것이
어야 했다. 내기 때문에 직접 손은 못 대지만 이런 식으로 손을 써
서 고통을 주고, 방해한다고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
이었다. 물론 그들이 이렇게 치졸하게 일을 처리한다고는 생각하기
어렵지만. 달리 다른 범인이 생각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그들 세 사람 중 누가 시켜서 한 일이라면 표물에 당연
히 관심이 없어야 했다. 표물이 목적이 아니라 용유진을 괴롭히는
것이 목적이었어야 했을 것이므로. 그런데 저기 부서진 수레 옆에
떨어져 있는 비단쪼가리는 뭔가. 상자를 열고 비단을 뒤지다가 모서
리에 걸려 찢어진 것임이 분명했다. 그 비단 쪼가리는 그들 범인들
이 비단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는 증거였고, 동시에 그들이 관심을
가질 무언가가 표물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증거였다. 그게 무엇인
지는 용유진도 몰랐다. 그의 관심사는 비단 오십필 뿐이었다.
"표물 중에 주인이 몰래 운반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끼워넣는다거
나 할 경우는 어떻게 되지?"
"그건 없는 걸로 치지. 인수인계를 할 때 나는 확인한 비단 오십
필만 넘겨주면 그만이야. 그외의 무엇이 거기 끼어있든 난 알바가
없지. 없어져도 상관없다는 이야기고. 무엇보다도 그런 것이 끼어
있을 이유가 없어. 심대인이 이런 일 한 두 번 해본 것도 아니고
…."
말을 하다말고 용유진은 생각에 잠겼다. 심대인이 이런 일을 여러
번 하는 것은 아니었다. 표물 운송의뢰야 수없이 했지만 용유진에게
일을 맡기는 것은 처음인 것이다. 어제 욕하고 모욕을 준 상대에게
오늘 의뢰를 하는 것은 그로서도 처음일 것이다.
"아무래도 이번 표행 자체가 일성신 세 사람 중 한 사람의 의뢰였
던 것같은 생각이 드는군.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했을까?"
"한번 찔러보자는 행동인 것 같아. 표물을 운반시키고, 그걸 중도
에 강탈하면 도대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보고싶은 거겠지."
"그걸 봐서 무슨 유익이 있다는거지?"
"용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겠지. 어느 정도의 그릇인지,
과연 위협이 될만한 사람일지 아닐지…. 그건 그들에게도, 우리에게
도 대단히 중요한 일이야. 엄청난 내기가 걸려있는 일이니까. 장장
십 년의 세월동안 지켜봐야 결과를 알 수 있는 내기."
월령은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눈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생각해 보면 용공자에겐 정말 미안한 일이야.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짐을 지워 주었어. 어쩌면 생명도 위험할 정도로 무거운 짐
을…."
"글쎄…, 어떨까?"
용유진은 수레 주변을 샅샅이 훑어보며 한편 말했다.
"날 대단한 인재로 봐준 것에 고맙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월령의
말대로 졸지에 무거운 짐을 지게되어 불평을 해야 할까?"
월령도 수레주변을 살피며 대꾸했다.
"어느쪽이지?"
"난 표사야. 아무도 인정을 안해줘도 상관없지만, 난 날때부터 표
사고, 죽을 때도 표사로 죽고싶어. 표사라는 게 원래 다른 사람의
짐을 대신 지는 직업이지. 좋고 말고 할 것도 없다고 생각해. 그냥
그게 내 일일뿐이야."
월령은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어라 할 말을 생각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 할 말이 떠올랐어
도 말을 못할 것 같았다. 입을 열면 울음부터 터질 것 같은 묘한 감
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용유진이 말했다.
"찾았어!"
용유진이 찾아낸 것은 바퀴 자국이었다. 수레가 부서진 옆에 난
길가에 멈춘적이 있는 마차, 거기로 올때는 가벼웠지만 떠날 때는
무거워진, 그래서 바퀴 자국이 깊어진 그런 마차의 바퀴자국이었다.
중주사견이 비단 오십필을 짊어지고 길을 갈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결
과로 찾아낸 자국이고,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단서였다.
월령이 물었다.
"어떻게 하지?"
무공으로 치면 그녀는 용유진의 백 배나 강할 것이다. 그것은 더
강한 무공을 익혔다 어쨌다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 자체가 백 배로
강한 사람으로 단련되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용유진
에게 모든 결정을 맡기고 있었다. 단지 이런 일의 경험이 용유진쪽
에 많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보다 한 살 어리고, 백 배나 약한,
어제까지 표사였고, 지금도, 앞으로도 표사일 소년에게 어쩐지 모든
것을 의지하고 싶어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었다. 월령도 그 정체를
정확히 모르는 그런 기분이었다.
용유진은 그런 기분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지만 월령의 요구
에 맞는 답을 할줄은 알고 있었다. 그는 마차바퀴 자국이 이어진 길
을 따라 손을 들어 가리켰다.
"물론, 쫓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