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용유진, 다시 개들을 만나다.
1.
하늘은 누런 똥빛이었다. 거기 떠있는 구름조차도 더러운 핏빛이
었다. 숲은 검게 죽어가고, 바위는 더러운 이끼에 덮여 칙칙한 암녹
색의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거기에, 개처럼 죽은 열 세구의 시체
가 널부러져 있는 거기에 수레가 있고, 나귀가 있고, 그것들을 지키
려 열 셋의 피를 묻힌 용유진이 누워 있었다.
용유진은 울고 있었다. 서러워서도 아니고, 분해서도 아니고, 어
딜 다쳐 아파서, 견딜 수 없도록 아파서 우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검 끝에 스러져간 열 셋의 생명, 열 셋의 이름들이 안타까워서, 열
세 개의 심장을 멈추게 한 그의 손이 미워서, 악귀처럼 날뛰며 피를
탐한 조금 전의 그가 부끄러워서, 그렇게 하고도 죽지않은 이 목숨
이 침을 뱉고싶도록 부담스러워서 우는 것이었다. 그렇게 울다가 일
어나 앉자 이번에는 창자가 뒤집혔다. 뼈가 노골거리도록 피로한데
도, 손끝하나 꿈쩍할 수 없을 정도로 기진한 상태인데도 창자는 격
하게 움직이며, 꿈틀거리며 그 안에 든 것을 전부 토해내도록 만들
었다. 노란물이 나올 때까지, 창자조차도 토해내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격렬하게 그는 토했다. 시체를 보는 것이 처음이 아니고, 검
과 검을 부딪혀 싸우는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가 직접 죽인 시체
들을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으므로, 그것을 받아들이기에는 시
간과 납득할만한 의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눈물로, 그 다음에는 구토로 나름의 위령제를 거행한 용
유진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나귀의 고삐를 잡았다. 자욱한 피비린내
탓인지 풀도 뜯지않고 기다리던 나귀가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용유
진은 첫 번째 싸움에서 승리하고도 패배자의 모습보다도 오히려 비
참한 몰골로 고갯마루를 넘어갔다. 아무 말없이. 슬금슬금 기어온
땅거미가 하늘과 땅을 같은 색으로 섞어 놓을 때까지.
부엉이가 울고, 멀리서는 이리의 울음소리가 밤 하늘을 기어다녔
다. 용유진은 길가에서 조금 들어가 발견한 공터에 불을 피우고 넋
을 잃은 듯 불속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이리 나와봐."
숲은 조용했다. 그가 부를 아무도 거기에는 없는 것같았다. 그러
나 용유진은 누가 거기 있는지 알고 있었다.
"거기 있는거 알고있어. 방울을 울리지 않아도 움직이는 것도 알
고."
수풀이 잠깐 흔들렸다. 바람이 건드린 것처럼. 월령이 어두운 숲
그늘에서 나와 불가에 섰다. 용유진의 건너편에.
용유진은 아까의 싸움을 다시 회상했다. 정신없이 셋을 죽이고 네
번째를 치려할 때, 다섯 번째 적은 이미 그의 등뒤로 돌아와 있었
다. 파풍도(破風刀)라 불리는 적의 칼이 바람 대신 용유진의 머리를
쪼개려고 내리쳐지고 있을 때, 용유진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 그
때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처럼 월령이 그 사이로 내려섰고, 다섯
번째의 도적은 월령의 손 아래 찢겨나갔다. 그녀의 신체에는 칼도
퉁겨져 나갔고, 그녀의 손은 사람의 가죽과 근육, 뼈를 종잇장처럼
찢어발길 수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용유진과 월령은 열 세 구의
시체 사이에 서있었다. 이것이 내곡산 싸움의 제대로 된 경과였다.
"왜 따라왔지? 어떻게 알고 날 따라왔지? 명령도 없었는데, 방울
을 흔들지도 않았는데."
월령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평소의 멍한 눈으로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바보가 아냐. 이 며칠동안 내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은 보통사
람에게는 거의,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들 뿐이었어. 비를 피해
우연히 들어간 폐묘에서 십대고수중 네 명을 만나고, 그들과 내기를
하고, 강시를 얻고, 다음날은 강호의 대악당들을 만났어. 하나 더
있군. 전날만 해도 나를 길거리의 개처럼 취급하며 모욕을 주던 사
람이 다음날이 되자 수레를 끌고와 일을 맡겼지. 내가 호리정(狐狸
精 : 여우 귀신)에게 홀린 것일까? 처음엔 나도 그런게 아닐까 생각
했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심장을 꿰뚫리고도 살아난다는 비상
식적인 일을 믿을 수 없었으니까."
용유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월령을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오늘 네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았지.
모든 것을 짐작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 중요한 것, 가장 중
요한 것은 알 수 있었어. 너와 네 주인이 나를 놓고 뭔가 음모를 꾸
미고 있다는거야!"
월령은 움직이지 않았다. 용유진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손만 내
밀면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왔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용유진이
방금 한 말이 모두 헛소리가 아닐까 생각하게 할 정도로 그녀는 움
직이지 않는, 단지 시체에 불과해 보였다.
용유진은 손을 내밀어 월령의 가슴팍 옷섶을 잡았다.
"네가 날 두 번이나 구해준 걸 알아. 고맙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이젠 고맙지가 않아. 왜냐면 너와 네 주인이 아니었으면 애초에 당
할 리가 없던 위험이었으니까. 네가 시체인줄 알았지. 피어보지도
못하고 꺾인 꽃이라고, 죽어서도 편히 쉬지도 못하고 불쌍하게도 강
시가 되어버린 가련한 아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이젠 가련하게 생
각하지 않아. 너는 죽지도 않고 죽은 척 하는 교활한 여우에 불과하
니까!"
용유진의 손이 거칠게 월령의 옷섶을 잡아당겼다. 천으로 만든 단
추가 떨어지고 가슴팍의 옷이 벌어졌다. 속저고리까지. 안을 가린
것은 네모 반듯하게 자르고 네 귀퉁이를 꼬매어 등뒤로 둘러 묶음으
로써 젖가슴을 가리도록 되어 있는 가리개 한 장 뿐이었다. 용유진
은 그것까지 잡았다.
"부끄럽지도 않아? 소리도 안 지르고, 뒤채지도 않고. 여긴 나밖
에 없으니 부끄럽지 않은 모양이지? 하지만 내일은 매우 부끄러워질
거야. 난 너를 그 상태로 시장거리로 끌고다닐테니까 말야. 그땐 계
속 강시인척 하진 못할걸? 이렇게 다 보여주는 몰골로는!"
용유진의 손이 한 장 남은 가리개마저 잡아 채었다. 달빛 아래 옥
을 깎아 만든 것같은 소녀의 가슴이 드러났다. 성숙한 여인의그것처
럼 풍만하지는 않지만, 그것 때문에 오히려 더욱 매력적인, 부끄러
운, 작은 밥공기 두 개를 엎어놓은 것같은 건강한 가슴이었다.
용유진은 그 모습을 힐끗 보고는 다시는 거기로 시선을 돌리지 못
했다. 이래서는 누구에게 창피를 주겠다고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
다. 그는 방금의 일로 정말 부끄러워 해야 할 사람은 월령이 아니라
그 자신임을 깨달았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한 것이 이상했
다. 이 작은 소녀에게 그렇게까지 폭력적인 행위를 한 그 자신의 야
만성에 고개를 들 수가 없을 정도로 부끄러워졌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제 정신이 아니었어."
그는 고개를 돌린채 뜯어낸 가슴 가리개를 월령의 가슴에 되돌려
놓으려고 했다. 그때, 월령이 뒤로 펄쩍 뛰어 물러났다. 뻣뻣한 손
을 들어 가슴을 가린채였다.
"그만둬. 내가 할께."
월령이 처음으로 그에게 한 말이었다. 여태까지, 옷을 그렇게 뜯
어내도록 가만히 있던 그녀가 다시 매무새를 다듬어주려 하자 처음
으로 강시의 가면을 벗고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용유진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월령이 뒤돌아 서서 옷매무새
를 고치자 얼굴을 붉히며 그또한 뒤돌아 섰다. 옷이 스치며 나는 부
스럭 소리가 천둥처럼 귀에 울리고 있었다. 설마설마 했는데 정말로
월령이 사람인 것이 밝혀지자 방금 한 일이, 그리고 전에 그녀에게
한 말들과 행동들이 하나하나 눈앞을 스쳤다. 이제 정말로 창피해
땅속으로라도 기어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네 말은 일부 맞았지만 또 일부는 틀렸어."
뒤에서 월령이 말하고 있었다. 용유진은 조심스럽게 돌아섰다. 월
령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그를 향해 돌아서 있었다. 묘한 것은 어디
한 구석도 강시 행세를 할 때의 그녀와 달라진 곳이 없어 보이는데
지금의 그녀와 강시 행세를 할 때의 그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산 닭과 죽은 닭이 다른 것처럼 그녀는 이전과
달랐다.
월령이 불가를 가리켰다. 용유진은 말 잘듣는 어린아이처럼 그녀
가 가리킨 곳에 앉았다. 그녀는 용유진의 앞에 조용히 다리를 모으
고 앉았다. 두 팔을 앞으로 내밀고, 두 다리를 모으고 뛸 때와 전혀
다르게 지금 그녀의 몸가짐은 훌륭한 교육을 받은 귀공녀(貴公女)처
럼 조심스럽고 우아했다.
"할아버지와 내가 널 속인 것은 맞지만 그건 음모라 부를 일은 아
니었어."
"그럼…?"
"그건 안배라 부르는게 더 옳을 일이라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네 할아버지라는 분이…?"
월령은 새삼스럽게 깨달은 듯 일어나 손을 모았다.
"인사를 안 했군요. 나는 공손영령(公孫玲玲), 강호에는 월인이라
알려진 산서 강시당 팔대 당주 공손조덕의 손녀입니다. 잘 부탁해요
용공자."
용유진도 경황중에 벌떡 일어나 손을 모았다.
"아니, 내가 잘 부탁하오. 공손소저."
월령은 빙긋 웃고는 다시 앉았다. 용유진도 어색하게 앉았다. 월
령, 공손영령이 말했다.
"내가 용공자보다 한 살 많은 것 같으니 말을 놓지. 용공자는 계
속 내게 대한 대로 말을 놓고. 괜찮지?"
"그래도 실례가 안된다면…."
"이미 실례는 충분히 했으니 더 한다고 문제될 건 없겠지."
용유진은 얼굴을 붉혔다. 월령이 손을 저었다.
"미안하라고 한 말이 아니야. 우린 더 가까워질 필요가 있다는 뜻
으로 말을 한거야."
"가까워질 필요가 있다?"
"그래, 그게 할아버지가 원하는 일이야."
"도대체 영조부께서 내게 원하는 일이란 게…?"
용유진이 물으려 하자 월령이 다시 손을 저어 입을 막았다.
"내가 처음부터 얘길 해주지. 그쪽이 빠를 거야."
당금 강호에 십대 고수가 있다. 일검이성삼군사이(一劍二聖三君四
異)가 그들이었다. 짧게는 십년 전부터 길게는 오십여년 전까지 거
슬러 올라가서 그 당시부터 천하제일의 고수로 불리던 인물들이 이
렇게 십대고수라는 이름으로 묶여 불리게 된 것이다. 간단히 말해
누가 최강인지 모를 정도로 강한 사람들이 열 명 있다는 것이다.
일검(一劍)은 가장 최근에 십대고수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지만 가
장 강한 사람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검치(劍痴) 섭광생(葉狂生)이
그였다. 검 한자루로 하늘 아래 최강이라고 불리운 사람, 천하제일
검(天下第一劍)의 칭호가 자연스러운 사람이 그였다.
이성(二聖)은 십대고수를 논의할 때면 항상, 당연으로 들어가는
소림장문인과 무당의 장문인이었다. 그들은 무학의 조종(祖宗)인 양
대문파의 장문인으로서 모든 분야에 있어서 최고의 명성을 받아 마
땅하지만 당금에 있어서는 각기 천하제일권(天下第一拳)과 천하제일
장(天下第一掌)으로 유명했고, 또 하나 천하구대극품기공 중 한 가
지씩의 주인으로서도 유명했다. 소림의 달마신공(達摩神功)과 선천
태극공(先天太極功)이 그것이었다.
삼군(三君)은 칠절신군(七絶神君) 서문하(西門蝦), 오행마군(五行
魔君) 동방척(東方剔), 유명사군(幽冥邪君) 혁련소산(赫連小山)을
이르는 단어였다. 이중 칠절신군은 금(琴), 기(棋), 서(書), 화
(畵), 사(射), 어(馭), 검(劍)의 칠절(七絶)로 유명한 정파의 명숙
(名宿)이었다. 이중 어느 것 하나 남에게 밀리는 것이 없었지만 특
히 검에 뛰어났는데, 불행하게도 검치 섭광생과 동시대에 태어난 탓
에 천하제일검의 명예는 받지 못하고, 천하제일 명궁의 이름으로 만
족해야 하는 신세였다.
오행마군은 당금 최강 흑도세력인 오행궁(五行宮)의 주인이며 천
하제일마(天下第一魔)로 알려져 있었고, 유명사군 혁련소산은 조정
이 금지한 사교(邪敎)인 유명교(幽冥敎)의 교주로 역시 천하제일사
(天下第一邪)였다. 이중 유명교는 방술(方術)과 사법(邪法)으로 유
명한 배교(排敎)의 후예라는 설이 유력한 사교로 생사판의 생사교와
함께 강호 이대 사교의 하나였다.
그리고 사이가 있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정파라고도 사파라고도
말하기 어려운 사람들이고, 세력인데 강시당이 그 이름과는 달리 정
파에 가깝고, 생사교는 그 해악이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살인청
부를 전문으로 한다는 점에서 사파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
같이 천하구대극품기공의 하나씩을 소유하고 있었다.
강시당은 처음 시작할 때부터 고루마공, 사실은 도가의 기공중 하
나로 고루천강신공( ?天 神功)이라는 고유의 내가기공을 기반으
로 선 가문이었다. 그 원류를 찾아가면 고루천강신공은 도가의 시해
선(屍解仙) 이론, 즉 죽어 육신은 남아 있어도 영혼은 승천하여 신
선이 된다고 하는 이론으로부터 파생되어 만들어진 내가기공의 일종
이었다. 자연 죽음과 삶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게 되고,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강시 제조의 기법에서부터 배워온 무공들도
연결되게 되어 오늘날의 고루마공이 만들어진 것이다. 월인 공손조
덕은 역대 강시당 주인 중에서도 가장 고루마공에 정통한 인물로 알
려져 있었다.
일승 고목대사는 젊어서 기연을 만나 천하구대극품기공 중에 대력
금황기(大力金皇氣)를 얻었다고 알려졌다. 천축으로부터 전래된 이
역사 깊은 기공은 시전할 때 온몸이 금빛을 내뿜는 것으로 유명하
고, 또 하나 그것을 익힌 사람은 몸에 한 오라기의 털도 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고목이 대머리인 이유가 그것이고, 일승이란 별
호가 붙은 이유가 그것이었다. 무공을 시전하면 이름 그대로 태양처
럼 되어 버린다고 소문은 전하고 있었다.
명성 생사판은 이제는 멸문한 것으로 알려진 마교의 무공을 익히
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천마불사신공(天魔不死神功)이라는 광오
하고 믿기 어려운 이름을 지닌 기공이 그것이었다. 이름 그대로 익
히면 사지가 떨어져 나가고 불에 타 재가 되지 않는 이상은 죽지 않
는다는 마공이었다. 생사판이 수 백번의 싸움과 청부살인을 하면서
도 죽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라고 말해지고 있었다.
북신 상관대부가 익힌 내가기공은 태청강기였다. 태청강기는 원래
무당파의 것으로 알려졌는데 사실은 내부의 갈등으로 멸문한 전진교
의 심법이었다. 전진교는 도교의 여러 종파 중에도 가장 원류에 가
까운 것이었고, 그래서 양생(養生)과 건신(健神)을 주 목적으로 하
는 도가의 내공심법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였던 문파이기도 했다. 그
래서 전진교가 몰락한 후에도 이리저리 전해진 전진교의 내공심법들
은 그 정순함과 위력으로 유명했는데, 그중 가장 강력하다고 알려진
태청강기가 무당파로 흘러들어갔던 것이다.
거기에는 또 이런 원인이 있었다. 명(明)나라가 세워지고 제 사대
황제인 영락제가 등극했을 때, 그는 천하의 사찰과 도관들을 중앙정
부의 통제 하에 두려고 계획했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도록사
(道 司). 전국의 도교종파와 도관을 모두 이 도록사의 아래에 두고
각 도교 종파마다 관리인을 보내 관리하도록 한 것이다. 초기에 이
도록사의 실권을 잡은 것이 바로 전진교였다. 기록에 의하면 전진교
의 도사를 보내어 무당파를 관리하도록 한 적이 있는데, 이때 태청
강기가 무당파에 전래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여간 이렇게 전래된 태청강기가 언제 어떻게 속세로 흘러나와
상관대부에게까지 전해졌는지는 알려져있지 않았다. 지금은 무당파
에는 태청강기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즉 실전되었다는 것과 상관대
부가 그것을 익혔다는 것만이 소문으로 들려올 뿐이었다. 일설에 의
하면 도교의 국가 통치시대에 대량의 비급과 도가경전들이 장경각에
서 탈취되어 황궁서고로 옮겨졌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때 전진교의
태청강기도 황궁으로 옮겨졌고, 조정의 고관인 상관대부가 황궁서고
에서 빼돌려 익혔을 것이다, 따라서 무당파로 전래된 태청강기와 상
관대부가 익힌 태청강기는 같은 것이라도 그 전래된 경로는 다르다
는 설도 있었다.
하여간 이렇게 해서 사이 사이에는 모종의 긴장관계가 성립되었
다. 십대고수 중에도 같은 항렬, 같은 이름으로 묶여진 데다가 그들
모두가 천하구대극품기공중 하나의 주인, 나이와 활동한 시간까지
비슷했기 때문에 여러모로 알력이 있을 소지가 충분했던 것이다. 그
러나 결국 그들이 부딪히게 된 것에는 다른 원인이 있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월인 공손조덕이 다른 세 사람에게 적지 않은 야심
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것을 막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것은 십년 전의 일이었다. 월인 공손조덕은 각각의 영역에서 활
동하던 그들 삼인과 차례로 부딪혀 그들 각각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들중 하나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것은 월인의 한계였고, 그들
네 사람을 상대로 싸워 모두를 패배시킨 것은 월인의 위대함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그들 세 사람은 월인에게 한 수 꺾
고 들어가야 했다. 일년에 한 번 그날 고루마공에 다친 상세를 치료
할 약을 먹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이다. 또한 일년에 한 번 그해에
한 일에 대해 점검을 받는 셈이니 섵부른 야망을 펼칠 수도 없게 되
었다.
"영조부의 위엄이 정말로 대단하구나. 그 한 손으로 세 사람을 꼼
짝 못하게 묶고 있다니.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그냥 당하고 있을 사
람들로는 보이지 않는데?"
이야기를 듣고있던 용유진이 감탄 반, 걱정 반으로 물었다. 월령
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리고 담담하게 덧붙여 말했
다.
"그들은 할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거야."
월령은 계속 설명했다.
"강호의 호사가(好事家)들이 전혀 쓸모 없는 사람들은 아니야. 일
검이성삼군사이라고 십대고수를 부르지만 그냥 부르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실제 무공수위를 말해주고 있는 면도 있어. 일검은 누가 뭐
래도 천하제일검이자 천하제일 고수라고 할아버지도 말씀하셨지. 이
성은 소림과 무당의 현 장문인이 아니야. 소림과 무당의 최고수를
말하는거야. 그들이 누군지는 안 알려졌지만 당금 소림과 무당의 최
고수라면 삼군과 사이의 누구라도 한 수 접어줘야 할 실력자라고 봐
야 해. 삼군 중에서는 지금 가장 잘 알려진 칠절신군과 생사판이 겨
뤄본 적이 있었는데, 생사판이 한 수 아래였어. 물론 그 차이래야
미세한 것이지만 그래도 생사판이 싸워본 사람중에는 가장 강한 적
이 그였지. 생사판의 얼굴에 난 칼자국을 남긴 사람이 바로 그야.
사이 중에는 할아버지가 반 수 가량 위인데 그래도 칠절신군에 비하
면 반수 아래라는 이야기지. 강호의 말은 정말로 정확해서 놀라워."
요컨대 사이라 불리는 네 사람의 실력차라는 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일 수는 있지만 그 사람도 죽음을 각오하거나 최소한 빈사
경에 이를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월인과 세 사람
의 싸움도 무공의 고하를 가리는 정도로 했기 때문에 서로 상처를
입는 정도에서 끝났지만 만약 서로 죽자고 싸우면 월인이 꼭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지금의 균형상태는 월인이 반수 가량 우위를 점한 상태
에서 서로 꺼리는 점이 있기 때문에 유지되는 긴장상태이지 월인의
절대 우위는 아니라는 것이다.
"생사판, 고목, 상관대부는 할아버지와 싸워 죽거나 다치는 것을
달가워할 정도로 야심이 작지 않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어떻게든 무
공을 유지하고 있어야 그들 세 사람을 다 견제할 수 있기 때문에 어
지간한 일로는 손을 쓰려고 하지 않는거야. 하지만 이제 곧 격돌하
지 않으면 안될 때가 되었어."
월령의 말은 놀라운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사실 십년 전부터 급속도로 쇠약해져 가고 있었어.
아무리 할아버지라고 한들 세 사람과 차례로 싸운다는 것은 무리였
던 거야. 그래서 할아버지는 후사를 맡길 사람을 필요로 했던거야."
"그걸… 그들 세 사람도 알고 있을까?"
"물론 알고 있지. 단지 확신하지 못할뿐이야."
"그래도…, 손을 쓸 유혹을 견디기 어려울텐데?"
"손을 쓸 수는 없지. 고루마공이 그들을 막고있으니까."
"아…! 그 상처 때문에?"
월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이건 무척 비겁한 일이야. 할아버지는 그들과 싸울
때 죽이기보다는 제압하기를 원하셨어. 그래서 고루제맥술( ?制脈
術)을 사용하셨지. 달리는 고루수음찬골대법( ?搜陰鑽骨大法)이라
고도 부르는 악독한 수법이야."
구대극품기공에는 각각의 기공에만 특유한 효용이 있었다. 예컨데
용유진에게 생사판이 심어준 천마호심결과 같은 것이 그것이었다.
진기의 일부를 타인에게 심어주어도 심맥을 보호해주는, 그래서 심
장이 꿰뚫리고도 죽지 않는 가공할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다.
그가 생사교의 교주로 군림하는 이유가 그것이었고, 그 교도들이 죽
음을 두려워 않고 그를 맹종하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를 믿으면
죽지 않고, 죽어도 다시 살아나며, 지금 죽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곧 더 행복하고 긴 삶으로 가는 길이라고 믿게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능력 중에는 목숨을 유지시키는 것만 있는 게 아니야. 고루
제맥술처럼 한 번 당하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하는 것도 있지. 세
사람은 거기 당한거야. 그래서 일년에 한 번씩 할아버지의 치료를
받지 않으면 점점 무공을 잃게 되고, 수족이 마비되어 결국엔 죽게
되는 거야. 다른 방법으로는 치료조차 할 수 없지. 오직 할아버지만
이, 그리고 고루마공만이 그걸 고칠 수 있는거야."
"아…, 그럼 그날 먹은 죽이?"
"그것도 그중 하나인거지. 할아버지의 치료법은 나도 몰라. 어떤
땐 직접 손을 대서, 어떤 때는 약으로, 또 어떤 때는 음식으로 치료
하지. 하지만 그날 먹은 죽은 내가 알기론 그냥 몸을 보(保)하는 약
죽이야. 먹어두면 몸에 좋은거지. 실제의 치료법은 어떤건지 몰라.
방에 들어설 때 향기로 맡았을 수도 있고, 모르는 사이에 손을 썼을
수도, 어쩌면 소리로 치료했을 수도 있어. 그걸 모르기 때문에 그들
이 할아버지를 어쩌지 못하는거고, 너를 어쩌지 못하는 거야."
"왜 나를…?"
월령은 한숨을 쉬었다. 이야기는 이제야 핵심을 향해 가고 있었
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에게나 용유진에게나 좋지는 않은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이년여 전부터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아채셨어. 생각
보다 훨씬 빨리 쇠약해져 가고 있는거지. 할아버지의 예상으로는 앞
으로 일이년 안에 돌아가실 거라고 예상하고 있어. 무공을 쓰면…."
"무공을 안 쓰면?"
"그보다는 오래 사시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무공을 모두 잃
어버린, 촌부가 되어 사셔야 하는거야. 그걸 세 사람이 보고만 있진
않겠지. 할아버지에게 직접 손을 쓸 순 없겠지만 위협할 방법은 얼
마든지 있는거야. 강시당의 전 식솔의 목숨이라든가…. 그래서 너에
게 고루마공을 넘긴거야."
이제야말로 용유진은 놀라버렸다.
"내게 뭘 넘겼다고?"
"고루마공. 네게 준 월인에 그게 새겨져 있어."
이제야 용유진은 사이가 월인을 탐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들
이 공손조덕의 말에 고분고분하게 따랐던 이유도. 그러나 아직은 몇
가지 확실하지 않은 점이 있었다.
"첫째, 왜 나를 죽여 월인을 빼가지 않을까? 네 할아버지가 무서
워서?"
"월인이 어떤 건지 모르기 때문이야. 그날 경험했겠지만 월인은
그냥 무기가 아니고 영(靈)적인 것에 가까워. 사람의 몸에서 다른
사람의 몸으로 스며들 수도 있고, 사람에 따라서 모양도 변할 수 있
는 무형의 것이란 말이야. 그런데 가령 너를 죽여 배를 갈라봤더니
월인이 없으면 어쩌지? 그럼 그들은 다 죽고마는거야. 그래서 널 건
드리지 못하는거지. 사실은…."
월령은 잠시 망설이더니 용유진을 손짓으로 불렀다. 그리고다가온
용유진의 귀에 대고 개미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할아버지는 내게도 말씀해주시지 않았지만 월인은 사실 할아버지
가 평생 모아온 고루마공의 정화(精華)일지도 몰라."
용유진은 그녀의 말보다도 그 입김이 귀를 간지르는 것에 더 예민
해졌다. 사람의 입김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향기로운 내음이 귀의 솜
털을 간지럽히고 얼굴로 흘러 코를 자극했다. 그러다가 그녀의 말이
의미하는 바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
월령은 더욱 가까이 다가와 용유진의 귀를 바짝 잡아당겼다. 용유
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월령은 혹시라도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듯 거의 입을 붙이다시피 하고 말했다.
"역대의 강시당주는 후대의 주인이 전대의 주인보다 강했어. 그것
도 비약적으로. 그게 왜일까? 난 고루마공의 전수자이긴 하지만 아
직 완벽히 익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걸 짐작만 할뿐이야. 하지만 나
는 고루마공에 그런 대법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 고루마공이 어느
경지에 이르면 그가 익힌 내공의 정화를 유형의 어떤 것으로 만들어
서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 있다는 걸. 난 월인이 할아버지의 것까
지 포함해서 역대 강시당주 여덟 명의 내공 정화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어. 월인에 고루마공이 새겨져 있다는 말은 월인의 비밀을 풀면
고루마공을 익힐 수 있다는 뜻이고, 그건 곧 월인 그 자체가 고루마
공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는거지."
"왜?"
두 번째 질문이었다.
"왜 영조부께선 내게 그걸 넘긴거지? 가령… 말하긴 뭣 하지만 영
조부께서 그대로 돌아가시면 그들 세 사람도 제거되는 거 아냐."
"그것도 가능한 이야기지만…, 할아버지는 그들 세 사람을 직접
죽이지 못하면 그 폐해가 엄청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래서 치료를 받지못한 그들이 고루마공의 영향으로
죽기까지는 적어도 오년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야. 그 사이에 죽음
을 선고받은 그들이 무슨 짓을 할지는 아무도 몰라. 그리고 사실은
할아버지는 우리를 걱정하시기도 하셨어. 나를 포함한 강시당의 식
솔들…, 그들이 더 이상 할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게되면 제일 먼저
우리에게 손을 쓰겠지. 그래서 후사가 필요했던 거야. 할아버지의
모든 것을 물려받아서 그들을 쓰러뜨려 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지."
"왜 하필 나였지?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있었을텐데. 강시당에는
나보다 뛰어난 인재들이 얼마든지 있었을 것 아냐. 너도 그렇고…."
"없었어."
월령은 고개를 저었다.
"인재는 그렇게 쉽게 찾아지지도 않고, 아무 곳에나 있는 것도 아
니지. 할아버지는 이 년이나 인재를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하셨어.
그러다가 너를 보았지. 재질도, 머리도 중요하고, 또 너는 거기에도
맞았지만 무엇보다도 할아버지를 감탄시킨 것은 성질이야. 무너진
표국을 어떻게든 되살리겠다는 끈질김, 고문을 당하면서도 표물을
내놓지 않는 지독함, 그리고 당당함. 그런 것이 마음에 드셨던 거
지. 그래서 그날 밤 길에 약간 수작을 부려서 너를 거기로 오게 하
고, 약간의 시험을 거쳐서 내기를 건거야. 월인과 월령을 건네주고.
다른 세 사람까지 끌어들였지."
"월인은 그렇다 치고 월령은 그럼 뭐야? 처음에 난 네가 월령인줄
알고…."
월령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아까 용유진이 잡아 뜯었던 옷고
름을 만지작 거리며 모닥불만 내려다 볼뿐 대답을 않으려 했다. 그
러다가 억지로 입을 벌려 말했다.
"원래는 이 방울이 월령이 맞아. 두 개의 방울이자 귀고리지. 하
지만 네가 나를 월령이라고 부른 순간부터 나도 월령이 됐어. 어디
에 쓰는 건지는 나중에 알게되겠지. 지금은 알아도 쓸 수가 없어.
잃어 버리지만 않고 있으면 언젠가 쓸 데가 생길거야."
수수께끼같은 말이었고, 자신과 귀고리에 대한 설명이 섞여 있었
지만 월령은 더 설명을 않으려 했다. 용유진도그걸 눈치채고 더 묻
지 않았다. 그는 모닥불 불빛에 비추인 탓인지 발그래하게 달아오른
그녀의 뺨을 안 보는 척 하면서 훔쳐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자신
의 눈길을 들킬까 두려워 그의 얼굴도 붉어지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서산에 달이 졌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세 사람은 왜 내기를 했을까?"
"월인이 할아버지에게 있는 것보다는 너에게 있는게 차지하기 쉽
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그럼 날 계속 주시하고 있겠군."
"아마 그럴거야."
"그럼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솔직한 대답을 원해?"
"물론이지."
"더 강해져야 해. 그래서 월인의 비밀을 풀면 그땐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시련이 닥쳐올거야. 그러니까 강해져야 해. 남들이 상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강해져야 해. 월령이 그걸 도울거야."
"방울이?"
"나도…."
"그때까지, 그러니까 십년 후까지 내 곁에서 날 도와줄거야?"
"원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