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행표-11화 (11/37)

2.

관도현은 같은 산동성에 있는 도시지만 청주가 바다에  가까운 반

면 관도현은 산동성의 가장 내륙쪽에 붙어 있었다. 관도현을 지나면

거기가 바로 경사 순천부(順天府). 수레를  끌고가면 열흘쯤 걸리는

거리였다.

어느 세계도 그렇지만 표국에도 표국에 통하는 관례, 규칙이 있는

것이다. 표물을 호송할 때 표사는 무리를  이끌고, 재물(財物)을 실

은 표거( 車) 위에다 표기( 旗)를 꼽는다. 처음에 표국을 나갈 때

는 마필을 끌고 갈 수만 있을 뿐 타고갈  수는 없었고, 사람들을 만

나면 주의를 주어 알렸다. 경계를 벗어나면 비로소  말에 올라탈 수

있었다. 길을 가다가 다른 지역의  표국 문 앞을 지날  때는 반드시

다시 말에서 내려야 했다. 인사를 한 후에 비로서  계속 길을 갈 수

있었다.

표국의 우두머리는 길을 가면서 반드시  "합오(合吾)"라는 소리를

계속 외쳐야 하는데 이것은 스스로가  강호인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특히 길모퉁이를 지날 때나 외진 곳에 있는  무덤이나 사당, 사람없

는 들판이나 외딴 곳에 있는 점포 등, 녹림도가 나타나기 쉬운 장소

에서는 더욱 조심해야 했다.

물론 그런다고 녹림도가 표행을 가로막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도

둑이 있으니 지키는 자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녹림도와 표국은 적대

관계이면서도 또한 공생관계라서  상대가 거래할만한지  지속적으로

확인을 하는 것이다. 길을 막고 표국의 위세를  보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그래서 용유진의 앞에도 녹림도가 나타났다. 청주를 떠난 지 사흘

째 낮, 제남부(濟南府)와  청주부(靑州府)의 경계를  이루는 내곡산

(來谷山) 고갯마루를 넘어갈 즈음이었다.

중턱쯤 올라갔을 때 길옆에 앉아있던 중늙은이가 염탐꾼이라는 정

도는 용유진도 눈치를 챘었고, 고갯마루 가까운 저만치 나무 그늘에

앉아 쉬고있는 왈짜한 사내들이 녹림도라는 것도  알아볼 수 있었으

니 용유진으로서는 마음의 준비를 할 충분한  시간여유를 가진 셈이

었다. 첫 표행에 첫 도적을 맞아 제대로 응대를  할 수 있을 것인지

가 용유진을 긴장하게 했을뿐이었다. 무엇보다  불안한 것은 혼자뿐

인 표행을 녹림도들이 인정해줄 것인가였다.  만약 인정해주지 않는

다면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싸우게 된다면  그가 이길 확률보

다는 질 공산이 컸다.

이기면 다행이지만 만약 진다면.

그때는 녹림도의 손에 죽거나, 혹시 표물만  빼앗기고 살아난다해

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다. 첫 표행에서  표물을 잃어버리면 다

시는 의뢰를 받아 장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용유진이 다가가자 한가하게 낮잠을 자고있는 것같던 사내들이 동

시에 일어났다. 그들의  어깨너머로 칼 손잡이가  도드라져 보이고,

거기 달린 두 개의 수실이 펄럭거렸다. 예전부터  이 산에서 장사를

하고있는 쌍룡곡(雙龍谷)의 무리라는 것을 그것으로 알아볼 수 있었

다.

용유진은 앞으로 나아가 포권하고 말했다.

"쌍룡의 형제들에게 비룡의 이대 자손 용유진이 인사드립니다."

쌍룡곡의 도적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그중 하나가 나와 성

의없이 포권했다.

"노합(老合; 강호인이 스스로를 칭하는 은어)이 길에 나선지 오래

되었지만 귀하는 처음 보는군. 또 내 듣기에 비룡의 자손은 모두 염

라전에서 밥을 먹고 있다던데 오늘 행차는 무슨 행차던가?"

"비룡의 형제들이 모두 몰한  것은 사실이지만 씨알이 하나도  안

남은 것은 아닙니다. 노합은 비룡의 이대 주인으로서  오늘 첫 일을

맡아 이렇게 쌍룡이 지키는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조사(祖師)가 우

리에게 밥을 내려 주시고, 형제인 당신들에게는 여기  저기 돌아 다

니는 것에 의지하고, 형제인  저는 한가닥 줄에  의지하도록 했습니

다. 쌍룡의 형제에게 청하건대 한가닥 줄을 남겨두시어 형제인 저를

가게 해주십시오."

이런 식의 응대 또한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이 아니라 표국과 녹림

양쪽이 무언중에 인정하는 바, 소위 흑화(黑話 : 은어)로 정해진 말

을 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용유진은 말을 끝내고 주머니  한 개를

품안에서 꺼내어 그들의 앞에 던졌다. 사내가 칼을  빼 들더니 칼끝

으로 주머니를 들어올려 그 내용을 확인했다. 은자 열 냥이었다. 이

른바 통행세인 것이다.

이 정도로 이야기를 하고 통행세를 바치면 서로  인사하고 보내주

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오늘 이 쌍룡곡의 도적들은 용유진에게서

약한 구석을 본 모양이었다. 칼을 든 놈은 받아든 주머니를 뒤로 넘

겨 챙기도록 하고는 건들건들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비룡의 형제여, 귀하가 정말 형제라면 우리 쌍룡의  형제들이 요

즘 장사가 되지 않아 모두 굶고있다는 것을 잘 알걸세. 또한 귀하가

정말 형제라면 이런 참상을 보고 그냥 가지는  않겠지. 귀하는 아직

젊고, 재기발랄하여 오늘의 표물을 우리에게  적선한다고 해도 다시

물건을 맡아 나오면 그만이겠지. 하지만 우리 불쌍한 쌍룡의 형제들

은 모두 굶고 있으니 오늘의 장사가 아니면 다들 쓰러져 죽고 말 걸

세. 은전을 베풀어주기 바라네."

용유진의 손이 표행을 떠나기  전 청주성에서 사온  철검(鐵劍)의

손잡이를 움켜 잡았다. 여차하면 싸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은 대충 세어도 십여명은 되었다. 싸우면 당연히 질 것이다. 어떻

게든지 싸우지 않고 해결해야 했다.

"첫 길에 실패하면 두 번째는  없다는 걸 형제도 잘 아실  것입니

다. 노합은 이 길에 목숨을 걸고 있으니  형제들이 봐주시기 바랍니

다. 오늘 길을 빌려주시면 두 번째는 만족하실 정도로 받을 수 있을

것이며, 세 번째는 더 많을 것입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라…."

도적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때? 저 어린 형제에게 두 번째와 세 번째를 받을 수 있을까?"

뒤에 서있던 도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을거야."

첫 번째 도적이 물었다.

"왜 없을거라고 생각하지? 어린 형제는 있다고 그러는데?"

두 번째 도적이 말했다.

"왜냐하면 오늘이 그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표행이 될테니까."

도적들은 함께 하늘을 보며 웃었다. 두 번째 도적이 말했다.

"자, 어떻게 할까?"

"무얼?"

"자네가 칼을 쓸텐가, 아니면 내가 할까? 칼이 두 개일 필요는 없

겠지? 닭 잡는 칼로도 충분할테니 역시 자네가 하는게 좋겠군."

"나야 물론 닭잡는 칼이지. 하지만 상대가 병아리니  역시 자네가

하는게 좋겠군. 병아리 잡는데 닭잡는 칼을 쓸 순 없잖은가."

이렇게 서로 주고받으며 희롱하는  것을 듣다가 용유진은  철검을

빼들었다.

"아무래도 형제들께서는 노합을 그냥  보내주실 것 같지  않군요.

그럼 저도 일제편탁(一齊鞭托)하여 편호당풍(鞭虎 風)할 수밖에 없

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일제편탁은 채찍을 휘두른다는 뜻이고 편호당풍은  호랑이를 때리

고 바람을 막는다, 즉 적을 쫓아버린다는 뜻이다. 죽이면 원한을 맺

게되니 쫓는 것으로 만족하겠다는 의사표현인데,  이것 역시 표국에

서 쓰는 신호였다. 하지만 지금 그런 말은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아무리 격식을 차려본들 도적들을 이길 수  없는 한은 아

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표국에 들어가면 사부를 모시고  무예를 배우는데 보통  삼황포추

(三皇暑椎)라는 권법과 육합도(六合刀)를  연마한다. 그  다음 대창

(大槍)을 연마하고 십팔반(十八般) 무예를 대충 모두 익힌 후, 물에

서 싸울 때를 대비해서 분수람(分水擥), 아미자(峨嵋刺), 안월자(雁

月刺), 매화자원필(梅花壯元筆) 등의  병기를 익힌다.  이런 무공을

모두 익힌 다음에 비표(飛 ), 비황석자(飛蝗石子)  등의 암기를 사

용하는 법을 익힌다. 최후로 경공술과 마상전투술(馬上戰鬪術)을 익

힘으로써 한 사람의 표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용유진은 나이가

어려 십팔반 무예를 겨우 보다가 말았을뿐 완숙하게 익혔다고 할 수

가 없고, 다수의 적을 상대로는 승산도 없었다. 그래도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처지였다.

용유진은 이왕 싸우려면 잘 싸워야 하고, 표사의 격식에도 맞추어

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

각하고 있는 것이다.

"제법…!"

첫 번째 도적이 입가의 웃음을 지우지 않은채 앞으로  나섰다. 그

의 칼이 예고도 없이, 그리고 격식도 없이  마구잡이로 휘둘러져 용

유진의 머리를 노렸다. 철저히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용유진에게는 적지아니  다행이었다. 가장 앞에서  문답을

한다는 것은 표국에게나 도적에게나 마찬가지로 우두머리가 하는 일

이었다. 즉 이 첫 번째 도적이 여기 십수명의 도적 중에서는 우두머

리라는 이야기. 우두머리라는 것이 제비 뽑아서 되는  것이 아닌 이

상 그만큼 실력도 갖추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자가 방심하고

있을 때, 일격을 먹여 기선을 제압한다면 그 뒤가 사뭇 편해질 것이

었다.

용유진은 그런 계산으로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가 아는 가장 뛰어

난 검법, 그리고 가장 익숙한 검법을 발휘했다. 아버지가 전해준 비

룡검법(飛龍劍法)의 제일초, 비룡승천(飛龍昇天)이었다.

아버지는 젊어 표사로 돌 때 이인을 만나 이  검법을 얻었다고 했

다. 그리고 이 검법 하나로 동료 중에 두각을 나타내어 결국 표국까

지 세우게 되었다. 비록 명문 정파의 이런저런  무공에 비하면 한참

처지지만 시중에 떠도는 마구잡이 흉내내기 검법에  비하면 한두 단

계 위에 있는 것이 이 검법이었다. 그래서 지금 용유진의 기습도 상

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어느 검법, 어느 권법도 마찬가지지만  제일초, 기수식(起手式)은

상대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상례였다. 널리 알려진 동자배불(童子排

佛)이 그렇고, 선인지로(仙人指路)가 그랬다.  비룡승천도 기수식의

하나라 높이 뛰어오르면서 발검하여 그 기세를  상대에게 보이는 정

도의 초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도적은 마음 놓고 칼을 휘

둘러 가슴을 열어놓은 상태였고, 키도 용유진보다 훨씬 컸다. 이 두

원인이 기수식에 불과하던 비룡승천을 살초(殺招)로 바꿔놓았다. 도

적보다 키가 한 자나 작은 열네 살의  용유진이 도적의 가슴팍에 뛰

어들며 검을 뽑는 서슬로 길게 칼 자국을 내 주었던 것이다.

도적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통증은 나중이었다. 자기 눈으로

자기 가슴팍이 갈라져 피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면 시각적 충격만

으로도 쓰러지지 않고 배길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도적이 썩은 나

무등걸같이 쓰러지고, 그 앞에 용유진이 당당히 섰다. 피 묻은 철검

의 끝이 가볍게 떨리는 것은 첫 살인의  충격이 남긴 흥분상태의 반

영이었다. 아직은 자기 손에 스러진 생명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만큼

여유롭지가 않았다.

"아니, 저놈이…! 아니, 저놈이…!"

두 번째 도적이 의미없는  말을 반복했다. 용유진의 검망(劍   :

칼끝, 劍鋒)이 그를 향했다.

"수련이 서툴러 손속에 사정을 두지 못했습니다. 형제께서도 주의

하시길…."

도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어깨에 맨 칼을  뽑아들며

소리쳤다.

"주노두(周老頭)의 복수다. 밟아 죽여!"

십여개의 칼날이 동시에 뽑혔다. 햇빛 아래 번뜩이는 칼날들이 문

자 그대로 도산(刀山)을 이루었다.

용유진은 긴장된 눈으로 그것을 주시했다. 칼빛이 눈을 찔러 감겨

지려 했다. 귓속에 벌레가 들어간 것처럼 앵앵 소리가 났다. 손바닥

에 땀이 흥건이 고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검을 판 점원

이 권한대로 손잡이를 가죽끈으로 동인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게 하

지 않았으면 한 번만  휘둘러도 검이 손에서 빠져나가  버릴 것이었

다. 단 한 번, 단 한 번 휘둘렀을 뿐인데  하루종일 도끼질을 한 것

처럼 어깨가 아픈 것은  생명을 죽인 부담이 거기  얹혀있기 때문일

것이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호흡이 턱에 닿도록 거칠었다.

이 모든 것이 한 순간 사라진 것은 첫 번째 칼빛이  그의 눈을 찔

렀을 때였다. 용유진은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러 그 빛을  베었다.

'쨍'소리가 귀를 때렸다. 귓  속의 벌레가 사라졌다.  빛이, 사실은

그를 노린 칼날 하나가 퉁겨나갔다. 눈에 가득했던 칼빛들이 사라졌

다. 우둘투둘 곰보처럼 구멍이 난 얼굴 하나가 그의 얼굴 바로 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의 코에서 뿜어져 나오는 콧김이  역한 냄새를 가

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릴 정도로  강한 긴장이 한 번

의 마주침으로 사라지고, 감각이 되돌아왔다. 이제  검은 무겁지 않

았다. 눈앞에는 그가 상대해야  할, 그가 죽여야 할  적들로 가득차

있었다. 용유진은 두 손으로 검을 쥐고 풀을 베듯 베어나갔다. 비룡

검법 제 오초식, 비룡휘운(飛龍揮雲)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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