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용유진, 녹림(綠林)과 부딪히다.
1.
폐묘의 부서진 문틈으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었다. 용유진은 눈을
가리며 돌아누웠다가 번쩍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간밤의 어지러
운 꿈이 머리를 어지럽히던 참이라 일어나 앉은 후에도 한참동안이
나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꿈치고는 너무 생생하군!"
멍한 정신을 깨우듯 얼굴을 손으로 훑고 가슴을 만졌다. 지난 밤
여기를 흉기에 뚫리는 꿈을 꾸지 않았던가. 용유진은 순간 손을 멈
추었다. 너무나 생생한 꿈의 영향인 듯 가슴의 상처가 만져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설마…!"
어젯밤의 경험은 반드시 꿈이어야 했다. 그렇지 않고는 심장을 꿰
뚫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납득할 방법
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턱을 당겨 가슴을 확인한
용유진은 그것이 꿈이 아님을, 어젯밤의 일들이 몸으로 체험하고,
눈으로 본 생생한 현실이었음을 깨달았다. 가슴팍에는 분명 흉기에
찔린 구멍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단지 상처가 난지 여러 날이 지난
것처럼 거의 아물어 있고, 어젯밤 멈추었던 심장도 평소와 다름없이
힘차게 뛰고 있다는 것이 이상할 뿐이었다.
방안을 둘러본 용유진의 눈앞에 어젯밤의 일들이 꿈은 아니라는
또 하나의 증거가 나타났다. 중주사견이 먹고 마시던 흔적들이 그대
로 남아 있는 것이다. 불은 이미 꺼졌지만 거기 구워지던 짐승은 그
대로 남아 있고, 술병들도 어지러이 구르고 있었다. 어젯밤 그 광경
그대로였다.
용유진은 이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잠시 고민했다. 다른 일들은 그
대로 이해해도 그만이었다. 재수 없이 중주사견같은 악질들을 만났
다는 것, 그들이 평소의 악명대로 개놈답게 행동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 가지, 그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 아니 정확히 말해 심장을 꿰뚫리고도 죽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손바닥을 뚫고 나온 그 이상한 물체, 그의 몸에 나타난 그 이상한
현상들이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주저앉아서 한참을 고민하던 용유진은 머리를 스스로 쥐어박고는
불가에 다가앉았다. 고민해봐야 현재로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시간 낭비 말고 배나 채워야겠다."
다행히 고기는 숯처럼 타버리지도, 그렇다고 차갑게 식지도 않았
다. 다리도 하나는 남았다. 그는 남은 다리를 잡아 뜯은 다음 탐욕
스럽게 한 입 뜯어 물었다. 시장이 찬이라 고기는 꿀처럼 녹아 목구
멍으로 넘어갔다. 배가 고픈 참에 고기는 맛 있어서 '혀까지 먹어버
릴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렇게 다리 하나를 완전히 해 치운 다음에
몸통에 살이 붙은 곳을 찾으며 용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는 놈이네. 분명 황구(黃狗)일거야."
짐승의 정체를 한 입에 알아보았던 것이다. 맛있는 고기가 있는데
술이 없을 수 없었다. 용유진은 굴러 다니는 술병들을 하나씩 기울
여 보았다. 그중 하나에 술이 반쯤 남아 있었다. 그는 술병을 입에
대고 단숨에 마셔 버렸다.
"크으…, 산서(山西) 분주(汾酒)로군!"
고기에 술을 먹고나자 호기가 치솟아 올랐다. 그는 팔베개를 하고
누워 노래를 불렀다.
"십년간 칼을 갈았네. 보라 이 서릿발같은 칼날. 그대에게 먼저
보여주는 것이니. 말하라 베어 마땅한 놈을."
아버지가 술을 마시면 즐겨 부르던 노래였다. 대개 이쯤 부르고
나면 흥이 나서 칼을 빼어들고 나가 칼춤을 추곤 했었다. 아버지는
낮은 신분에서 표국의 국주까지 올라간 사람이라 거칠고 예의를 몰
랐지만 누구 하나 욕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진심 하나는 진짜라고
소문이 난 사람이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용유진은 벌떡 일어나 방안을 어슬렁 거리며 걸었다. 술과 아버지
가 그의 투지를 일깨우고 있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뜨겁게 했다.
"여길 비룡표국으로 하자! 내 집은 아니지만 괜찮을 것이다. 왜냐
하면 그 날도적놈들이 은신처를 여기로 삼을 정도면 이미 아무도 사
용하지 않는 곳이라는 얘기이므로. 내가 쓴다고 집값을 내놓으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혼자 있으면 말이 많아진다. 말조차 안하면 외로움이 사무치기 때
문이다. 용유진이 지금 그랬다. 그는 혼자 말하고 스스로 대답했다.
"그놈들이 돌아오면? 돌아올리 없을 것이다. 어제 충분히 당하고
도망갔으므로. 그럼 우선 저기부터 조사해보자."
그가 조사하기로 결정한 곳은 어젯밤 반구대가 나온 곳이었다. 원
래는 평범한 제단인줄 알았는데 거기 구멍이 있고, 그 아래에는 공
간이 있지 않았던가. 그의 영역으로 정한 곳에 미지의 공간이 남아
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용유진은 제단으로 뛰어 올
라가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역시 공간이 있었다. 제단은 나무로
짜 맞추어서 속이 빈 상태였다. 게다가 저 아래 지면에 또 하나의
구멍이 있고, 거기에는 사다리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그 속에 공간
이 또 있다는 이야기였다.
용유진은 다시 제단 아래로 뛰어내려와 어제 불을 피운 곳을 뒤졌
다. 잿더미 속에 불씨가 남아 있었다. 다행이었다. 이것이 없었다면
마을로 다시 가거나 가지를 비비고 앉아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는 방을 뒤져 마른 풀을 찾은다음 불씨를 옮겨 불을 일으키고,
그것을 다시 타다남은 장작에 붙여 횃불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에
제단 아래 뚫린 구멍으로 들어갔다.
사다리를 내려가자 거기는 방이었다. 사면이 반듯하게 흙을 파고
기둥을 세운데다가 판자를 대어서 방을 만들고 한쪽에는 침상까지
만들어 놓았다. 다시 한쪽 벽에는 문이 있고, 그 문 안쪽도 역시 방
이었다.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방이 세 개나 되는데, 마지막 방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용유진은 코를 감싸고 물러났다가 다시 들어갔다. 횃불에 비친 벽
은 온통 얼룩덜룩한데, 느낌으로 보아 피가 튀어 그렇게 된 것 같았
다. 이 방은 한쪽이 바위로 되어 있고 그 바위벽에는 위에 둘, 아래
에 둘로 족쇄가 달려있었다. 사람을 여기 매달고 고문을 한 모양이
었다. 어젯밤 잠깐 본 사람, 반구대의 옆구리에 끼어있던 사람도 여
기에서 고문을 당했을 것이다. 족쇄와 피만 보고도 이 방에서 터져
나왔을 절규가 귀에 들려오는 것 같아 용유진은 인상을 찌푸리고는
나오려고 했다. 그또한 저런 곳에서 당한 기억이 있기에 그 고통이
피부에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때 한 가지 물건이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방 한쪽에 고문에 사
용했던 도구들이 널부러져 있고, 그 옆에는 옷가지가 뭉쳐져 있었
다. 용유진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그것들을 뒤적여 보았다. 피에
절은 물건들이었다. 그리고 몇 가지 잡동사니들. 용유진은 내버려두
고 나가려다가 눈에 익숙한 물건 하나를 보고 집어 들었다. 평범한
나무 쪼가리. 한쪽에는 순(順)자와 청(靑)자가 가로로 새겨져있고,
다른 한쪽에는 삼(三)과 아마도 육(六)으로 짐작되는 깨어진 숫자
하나가 세로로 새겨져 있는 나무판이었다. 완전한 하나의 패도 아니
고 반으로 잘려진 것인데, 그것을 처음 본 사람들은 거기 어떤 의미
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용유진과 같이 표국의 일
에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게 바로 물표(物標)라는 것, 즉 물건을 표
국에 보관하고 그 대신 받아두는 신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중주사견이 잡아와 고문한 사람중 누군가가 이걸 지니고 있
다가 빼앗긴 모양이었다. 별로 중요한 물건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던
져버린 것일게다. 그러나 용유진의 눈에는 그것은 극히 중요한 물건
이었다. 나무는 보통 나무가 아니었다. 단단하기로는 철에 버금가며
그 가치는 같은 크기의 금보다도 오히려 열 배는 더 나간다는 사라
철목(絲羅鐵木)이 이것이었다. 게다가 나무에 묻은 손때에서 짐작되
는 세월은 결코 백년 이하는 아니었다. 이런 나무에 물표를 새겨 줄
정도면 그 표국은 보통 표국이 아닐 것이고, 그 물건의 가치 또한
평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용유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물표를 품속에 집어 넣었다. 실제로 이
물표가 지정한 물건이 있는지, 또 표국이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표
국을 하는 사람에게는 보물로 취급되는 이러한 물건이 이대로 땅속
에 묻히는 것이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조사는 이렇게 물표 하나를 줍는 것으로 끝났지만 성과는 적지 않
았다. 겉보기엔 폐허지만 내부에는 비밀의 방까지 있는, 지금의 그
에게는 고루거각보다도 더 좋아 보이는 장소가 생긴 것이다.
용유진은 현판을 들고나가 폐묘의 무너진 대문에다가 걸어놓고 흐
뭇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리 초라해도 표국은 표국, 아무리
그가 어려도 표사는 표사인 것이다. 그에게는 이제 표국이 있고, 그
스스로가 있으니 어떻게든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용유진은 다시 방에 돌아와 청소를 시작했다. 그제야 월령이 방
한구석에 굳은 듯 서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군데군데 찢겨진 옷이
지난밤의 활약을 증거해 주고 있었다. 용유진은 청소하던 손을 멈추
고 찢겨지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고쳐 주었다. 그리고 산 사람에게
하듯 말을 걸었다.
"네 덕분에 어제는 목숨을 건졌어. 정말 고맙다. 내게 여유가 있
으면 네게 새 옷을 사줬을텐데. 나중에 꼭 새 수의를 장만해줄테니
우선은 이걸로 견뎌."
월령의 멍한 눈 한구석에 따스한 빛이 스치는 걸 본 것같은 느낌
을 받았다. 용유진은 부적을 들고 자세히 살펴 보았지만 월령은 역
시 시체고, 눈은 초점없이 멍한 그대로였다.
"잘못 봤겠지."
용유진은 다시 청소에 열중했다. 그 와중에 그는 한 가지 물건을
더 발견했다. 어젯밤 황구이가 월령에게 던졌다가 찾지 못하고 그냥
두고 간 금도끼였다. 용유진은 문짝만큼이나 큰 그 도끼를 들고 귀
퉁이를 약간 물어보았다. 그리곤 침을 뱉고 내던져 버렸다.
"이것도 가짜군! 정말 가짜 천지로구나."
그것 역시 겉에만 금칠을 한 쇳덩이였던 것이다.
표국이 생기고, 현판이 내걸렸지만 손님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
다. 누가 여기 표국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일을 맡기러 올 것인가.
"표국이 생겼다고 거리에 나가 알리기라도 해야 할까보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 해도 별 효과는 없을 거라는 걸 그는 알고 있
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표국에 맡길 물건이 없을테고, 부자들은, 어
제 이미 만나보았지만 다들 웬만한 규모가 되는 표국에 일을 맡기려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앉아 있을수만은 없지. 월령아, 한 번 더 나갔다
와야 겠다. 이번에는 꼭 일을 맡아오마."
그렇게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말을 하고는 햇볕 따스한 계단에서
일어나는데 전혀 기대하지 않은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무너진
폐묘의 문 저편으로 한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한 사람, 그의 손에는 한줄기 밧줄이 잡혀있고, 밧줄 끝에는 한
마리의 나귀가 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나귀는 짐이 가득 실린 수
레를 끌고 있었다.
"설마…?"
보통 표국 앞에 저런 모습이 나타나면 당연히 표물을 맡기러 오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용유진은 그렇게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한사람과 나귀, 수레의 뒤로 한가하게 따라오
는 물주가 심대인인 것을 발견했을 때는 더욱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물건을 맡길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어제 이미 확
인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마부는, 그리고 수레는 폐묘의 문을 넘어서 용유진의 앞까
지 다가왔다. 용유진은 멍청히 선채 바라보기만 했다. 심대인은 대
문 위에 걸린 현판을 올려다 보더니 헛기침을 했다.
"여기 영업 안 하시는가?"
"영업은 합니다만…."
용유진은 엉거주춤 맞으러 나가며 대답했다.
"여기로 일을 맡기러 오실 분은 아닌 것 같은데요?"
심대인은 다시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어색함은 가시어지지 않았
다. 어제의 일은 지나쳤다는 것 정도는 그도 아는 모양이었다. 그래
도 노련한 장사꾼답게 말은 막히지 않았다.
"왜 아니겠나? 일을 맡기러 왔지. 용공자는 손님을 가려서 일을
받는 것은 아니겠지?"
용유진은 잠시 아무 말도 않고 심대인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무언
가 꿍꿍이 속이 있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일을 맡기러 온 손님이었
다. 그리고 지금 그는 일을 고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용유진
은 깊이 머리를 숙였다.
"어서오십시오. 먼곳까지 찾아와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머리를 들어 방을 돌아보고, 다시 정원을 보고는 용유진은 정원의
한 바위 위를 가리켰다.
"누추해서 손님 접대를 제대로 할 수가 없군요. 여기에라도 일단
앉으시지요."
심대인은 손을 저었다.
"아아, 일 얘기부터 하지. 난 얼른 맡기고 돌아가봐야 할 일이 또
있어서…."
"군량미 수송건입니까?"
용유진은 수레를 보며 물었다. 짐이 수북히 쌓여있었지만 전부 상
자에 넣어진 것을 보면 쌀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일말고는 없지
않은가.
심대인은 상자를 열어 보여주었다. 전부 비단이었다.
"상자가 열 개, 각 상자에 다섯필씩 들어있으니 총 오십필일세.
요즘 시세로 은자 천 냥은 되지. 이걸 관도현(關陶縣)의 지현(知縣;
현령)께 전해드리면 되는 일일세. 수고료는 이십분의 일이고, 전부
선불로 주겠네. 괜찮겠지?"
물론 괜찮았다. 사실은 극히 좋은 조건이었다. 표국의 운송료라는
것이 원래 물건 가치의 이십분의 일을 기준으로 하지만 대개는 그
아래에서 결정되기 마련이었다. 이름 없는 표국은 더욱 그랬다. 게
다가 반은 선불, 나머지 반은 후불이라는 것이 보통인데 지금 심대
인은 은자 오십 냥이라는 거금을 전부 선불로 주겠다는 것이다.
용유진은 그 저의를 생각하며 아무렇게나 대꾸했다.
"은자 오십 냥은 적은 돈이 아닌데요."
심대인은 손을 저었다. 그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흐르는 것을 용
유진은 놓치지 않았다.
"그럼 하겠다는 거지? 되었네, 되었어."
"아니요."
용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 하나를 내밀었다.
"요즘 관도로 가는 길에 녹림도(綠林徒)들이 극성을 부린다는군
요. 위험부담이 많은 길이니 백 냥은 내셔야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세."
심대인은 고민도 않고 대뜸 응낙하고는 무거운 짐을 던 것처럼 다
른 호의도 베풀었다.
"나귀와 수레는 이왕 가져온 것이니 빌려주기로 함세. 나중에 일
이 끝나면 돌려주게나."
그리고는 마부와 함꼐 가버렸다. 용유진이 말릴 틈도 없이 바쁜
걸음이었다.
뒤에 남은 용유진은 나귀와 수레, 무엇보다도 거기 실린 짐을 보
며 멍하니 서 있었다.
"고약하다, 고약해. 냄새가 나는구나."
돌아가는 심대인의 걸음걸이가 춤추듯 한 걸 보면 누구도 이런 생
각을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심대인에게는 용유진에게 물건을 맡길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일 터였다. 그리고 그것은 용유진에게 극
히 좋지 않은 어떤 이유에서일 것이다. 적어도 그를 돕기위해서 독
지가가 나섰다고 믿을만큼 용유진이 어리숙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는 수 없었다.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일이 없는 것
이다.
용유진은 손뼉을 치고 명랑하게 외쳤다.
"좋아! 어쨌거나 첫 표행이다. 이걸로 시작인거야!"
표행을 나가는 것은 좋지만 그 전에 처리할 일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로 걸리는 것이 현판이었다. 그냥 둘 수도 없고, 가져가자니 걸
치적거리는 것도 있지만 우선 모양이 우스웠다.
"에잇, 어차피 깃발도 없으니 그 대신으로 하자!"
그는 현판을 수레에 실었다. 표행을 나가게 되면 가장 선두에는
깃발이 걸리기 마련인데, 현판을 그 대신으로 하려는 것이었다. 그
리고도 남는 문제가 있었다. 월령이었다.
용유진은 월령을 보며 아까보다 훨씬 더 오래 생각에 잠겼다. 표
행을 하면서 강시까지 데리고 간다는 건 현판을 싣고 가는 것보다
더 우스운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싣고 갈 수도 없지 않은가.
"안되겠다. 월령아, 너는 여기 남아야겠다."
용유진은 결심하고는 일어섰다. 표행에 데려갈 수도 없고, 그게
아니더라도 언제까지나 강시와 함꼐 있을 수는 없었다. 죽은 자는
무덤에 묻히는 것이 가장 행복할 것이다.
용유진은 폐묘의 뒤로 돌아가 양지바른 곳에 무덤을 팠다. 방울을
울리자 월령이 뛰어왔다.
"이렇게 말을 잘 듣는데…."
시체에게, 그냥 시체도 아니고 강시에게 정을 느낀다는 것은 어딘
지 이상했지만 지금 용유진은 오랜 친구와 헤어지는 것처럼, 아버지
를 묻을 때처럼 슬퍼지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는 방울을 울
리며 무덤을 가리켰다.
"들어가!"
월령은 잠시 움찔했지만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의 명령을 처음
으로 어기는 것이다. 용유진은 다시 명령했다. 그러나 월령은 이번
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용유진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는 다르단다. 너는 내 생명을 구해주었
고, 그게 아니라도 너를 좋아하지만 이젠 헤어질 때야. 오늘을 잊지
않고 매년 네 무덤앞에서 지전(紙錢)을 태워줄께. 내가 여기 있는
날이면 매일 네 무덤 앞에 꽃이 없는 날이 없도록 해주고, 나중에
돈을 벌면 네 무덤 앞에 고승들을 데려와서 불경도 외도록 해줄게,
그러니 그만 들어가 쉬어라."
여전히 월령은 움직이지 않았다. 용유진은 월령을 직접 안아서 무
덤 안에 눕혔다. 월령은 고분고분했다. 사실은 그렇다기 보다는 빳
빳하게 굳어서 미동도 않았다. 이게 당연한 것이겠지만 어쩐지 용유
진의 생각에는 그가 이렇게 직접 무덤에 넣어주기를 바란 것같았다.
흙을 덮고, 봉분 앞에 월령이라고 돌로 새긴 기왓장을 꽂았다. 흙으
로 만든 봉분은 너무 작아서 더욱 처량했다. 용유진은 그 앞에서 합
장하고 명복을 빌어준 다음 수레로 돌아왔다.
이제 출발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