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행표-9화 (9/37)

2.

오늘은 용유진에게 매우 재수가 없는 날이었지만 그  주요 원인이

되었던 중주사견에게도 재수가 좋은 날은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하

게 일격을 당해 도주하고 있는 그들의 앞에 생각치도 않았던 장애물

이 나타난 것이다.

울퉁불퉁한 산 기슭을 따라 달리다가 다복솔 모여있는  작은 숲을

막 지나치려는 순간, 가장 앞에서 달리던 반구대가 무엇이라도 밟은

것처럼 펄쩍 뛰더니 공중에서 방향을 틀어  달려오던 방향으로 일장

여나 물러나서 내려 섰다.

"누구냐?"

일행이 줄줄이 그의 뒤로 멈춰  서는데 소나무 가지 아래에서  두

사람과 남여, 남여에 올라앉은  한 사람이 나왔다. 그늘  아래라 잘

보이지 않았고, 남여에 올라탄 사람은 일부러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

려고 부채로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에서  풍기는 기도가 범

상치 않아 반구대는 보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고 아연

긴장했다.

"당신은 누구요? 왜 우리 앞을 막는거요?"

평소같으면 말이 나가기 이전에 한  칼 먹이는 게 먼저였을  것이

다. 그러나 남여에 탄 사람은 이들이 그렇게  대우해주고 있다는 것

도 모르는 듯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건 알 것 없고…, 저기 저 집에서 뭘  봤는지, 뭘 들었는지

말해봐라.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하지만 하나도  빼놓지 말고 자세

히 고해야 한다. 우선 너희들 이름과 명호부터 불어 봐라."

너무 기가 막히면 화도  나지않는다. 황구이의 지금 상태가  그랬

다. 그는 실실 웃으며, 한 편으로는 도끼를  찾고, 다른 한편으로는

흉악한 말로 되물었다.

"이 개잡종 놈아, 우리가 네놈에게 그런 걸 말해줄 이유가 뭐냐?"

"둘째!"

반구대가 안색을 바꾸며 불러  막으려 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황구이는 벌써 도끼를 잡아 남여에 탄 인물을  향해 집어 던지고 있

었다.

"죽어랏, 개잡종아!"

원래 도끼 던지기는 황구이의 장기였다. 문짝만한  도끼를 집어던

지는데 파괴력도 파괴력이거니와 그 솜씨가 여간  정교하지 않아 이

십 보 밖의 개미 뒷다리도 맞춘다고 큰 소리를 치는 황구이였다. 그

러나 오늘 그의 도끼는 두  번이나 적의 손에 잡혀  버리고 말았다.

남여에 탄 인물은 가지에 달린 과일을 따듯이  간단히 손을 뻗어 도

끼를 받았다. 그리고 황구이에게 다시 던졌다.

크아악-!

황구이가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그의 팔은  어깨에서부터 잘려

나가 바닥에 떨어지더니 개구리처럼 펄떡 펄떡 뛰었다.

"이 부처님에게 흉한 물건을 던진 벌이다. 시간이 있으면 더 가혹

한 벌을 내렸겠지만 지금은…."

남여의 인물, 일승 고목대사는  사람의 팔 자르기를 모기  뒷다리

떼놓는 것처럼 쉽게 해놓고는 말을 멈추고 어딘가를 향해 귀를 세웠

다. 그의 얼굴에 다급한 표정이 떠올랐다.

"계집애가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다른데로 가야 겠는 걸."

그는 손을 뻗어 한 손은  하늘로 다른 한 손은 땅으로  가리켰다.

팔찌가 하나씩 그의 팔목을 벗어나서 양 손에  각각 잡혔다. 그리고

그 순간 조양과 명봉의 두 팔찌는 한 자루씩의 잘 만들어진 검이 되

어 그의 손에서 번뜩였다.

"이게 뭔지를 알아봤으면 나를 따라 오라!"

팔찌에서 검으로의 변신, 그렇게 만들어진 검이 하나는 붉게 타오

르는 듯하고, 다른 하나는 푸른 인광을 뿜고 있으니 직접 본적은 없

어도 조양과 명봉의 이름은 익히 아는 네  마리 개들이 꼬리를 내리

는 데에는 충분했다.

"분부 하시는대로!"

반구대가 제일 먼저 꼬리를 말고, 그 뒤를 나머지 세 마리가 따랐

다. 황구이까지 비명을 멈추고는 자기 팔과 도끼를  들고 눈물을 짜

면서도 일승 고목대사의 남여가 움직이는 그 뒤를 따랐다.

한 바위 그늘 뒤로 돌아가서  멈춘 고목은 남여를 밟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꼼짝말고 기다릴 것!"

달빛 아래 나르는 거대한 박쥐처럼 몸을 날린 고목이 제법 가지가

벌어진 소나무 줄기 위에 내려 앉을 때, 방금 황구이의 팔이 잘렸던

그 자리에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짙푸른 밤 공기 속에도 더욱 짙

게 드러나 보이는 흑공단 수의, 얼굴에 붙인 부적이 더욱 기괴한 월

령의 모습이었다.

월령은 예의 두 다리를 모아 뛰는 걸음걸이, 일명  저승사자가 저

승으로 가는 길을 여는 걸음걸이라는 개로보(開路步)로 장내를 이곳

저곳 살펴보며 뛰어 다니다가  핏자국이 있는 곳에  서자 멈추었다.

그 자리에서 월령은 귀를 모아 인기척을 들으려는 듯 한참이나 서있

더니 손을 들어 부적을 들고 하늘을 보았다.  여태까지의 뻣뻣한 동

작과 달리 극히 부드럽고, 우아한 손동작이었다.

부적 아래 드러난 얼굴도 그랬다. 원래는 창백한 낯빛,  텅 빈 동

공이었는데 눈을 한 번 깜박이자 그 멍한  눈은 사라져 버리고 영롱

한 눈동자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순식간에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

다. 그것을 시작으로 한 순간에 그녀는 시체에서 살아있는 사람으로

돌아온 듯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머리를 매만지고,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살

아있는 사람의 그것과 조금도 다름 없는 행동이었다. 그렇게 매무새

를 다듬고 나서 갑자기 하늘을 보며 말했다.

"월령은 이미 주인을 택했으니 고목 땡초는 욕심을 부리지 마요!"

숨어 있던 고목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월령이 그가 숨어  있는 것

을 알고 한 말일까?  아니면 그냥 짐작일까? 어느  쪽이든 그로서는

모양이 좋지 않게 된 것이다. 땡초라고 불리고도  조용히 코를 박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월령은 그 한 마디를 한  것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모양,  콧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걸어 사라졌다.

고목은 월령이 완전히사라져 안 보일 때까지 납작  엎드려 있다가

한덩이 작은 구름마냥 떠올라 남여로 돌아왔다.

"자 이제 시간이 났으니 천천히 말해봐! 이름부터."

고목의 말투는 그리 좋지 않았다. 월령에게 한 대 맞은 것같은 기

분을 반영하는 퉁명스러움이 거기 담겨 있었다.

반구대가 대표로 대답했다.

"동도들은 저희를 중주사견이라고 부릅니다."

"중주사견? 강호에 네 마리 똥개가 있다더니, 그게 너희들이냐?"

반구대의 눈가에는 붉은 점이 있다. 그냥 작은 점이  아니라 피부

아래의 살갗이 피부 바깥으로 드러난 것처럼 붉은 반점이 넓게 퍼져

있는 것인데, 지금 고목의 말에 점이 없는 부분도 몽땅 붉어져 버렸

다. 어느정도는 스스로를 비웃는 자학적(自虐的)  의미에서, 한편으

로는 그들을 개새끼라고 욕하는 무리에게 개가 어쨌다는 말이냐라는

식으로 되려 비웃는 의미에서 자기들 스스로  개라고 자칭하기는 하

지만 그것이 똥개를 말하는  것은 분명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처럼

면전에 대고 똥개라고 부르는 것은 분명 호칭이 아니라 욕설이지 않

은가. 보통은 이런 경우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것이다. 모욕은 피

로 갚는다는 것이 무림의 법칙이므로. 그러나 반구대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고 고개를 숙였다.

"예, 저희들입니다."

"좋아, 이제 말해봐. 그 폐묘에 왜 갔나?"

"저희들은 거기를 은신처로 삼은지  오래 되었습니다. 최근  악주

(岳州) 인근에서 한 건을 했기  때문에 피신도 하고, 분배도  할 겸

거기로 갔습니다."

말을 하며 그는 여태 옆구리에 끼고 온 짐보따리를  힐끗 쳐다 보

고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말하자면 그게 한탕한  물건인데 고목이

그것에 눈독을 들일까 염려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다행히 고목은 그

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거기에서 뭘 했고, 누굴 만났지?"

반구대의 눈가에 암암리에 안도의 빛이 스쳤다. 고목이 눈독을 들

일까 염려한 것은 기실 짐보따리가 아니라 또 하나, 그가 끼고온 사

람이었다. 거기에 관심을 갖지  않도록 하려고 일부러  짐에 주의를

돌린 것인데 다행히 고목은 짐에도, 사람에도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경과를 이야기했다.

"가던 길에 잡은 개도 한 마리 굽고, 식사를 하려는 참에 그 녀석

이 들어온 것이죠."

"그 녀석이란?"

"자칭 비룡표국의 이대국주라고 하는 놈입니다."

"그래 그 녀석이 오기 전에는  아무 것도 없었나? 아무리  사소한

일도 놓치지 말고 똑바로 말해봐."

"현판 하나와 강시 하나가 있었습니다."

"강시라…, 소녀의 강시였겠지?"

"그렇습니다."

"그걸 어떻게 했나? 그리고 그 강시가 어떻게 했나?"

"저… 그게…."

고목이 눈에 불을 켰다.

"거짓말 할 생각말고 똑바로 얘기해! 안 그러면  입을 찢어버리겠

다."

"저… 사실은…."

이들 중주사견 중에 백구말은 색(色)을 밝히는  놈이었다. 그것도

유부녀나 어린 소녀 등을 가리지 않고 밝히는데,  오늘 예쁜 소녀의

시체를 보고는 시간(屍姦)을 해볼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제단

아래에 만든 그들의 소굴에  가져다 두었던 것인데,  그것이 그렇게

대단한 괴물이었을 줄이야 몰랐다.

"개 같은 놈들…, 그래서?"

고목은 가볍게 욕설을 뱉었지만 이런  반인륜적(反人倫的) 범죄에

도 별반 의분을 느끼지는 않는지 그 다음  이야기만 채근했다. 용유

진을 만나고, 위협하고, 급기야 죽이려고 손을  썼는데 강시가 튀어

나오고, 죽은줄 알았던 용유진이 다시 일어섰다는 이야기를 대충 사

실 그대로 고하자 고목은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들었다. 특히 용유

진의 언행과 죽었다가 다시 일어난 이야기에 대해서는 몇 번을 다시

반복해서 말하게 했다. 그리고는 혼자 중얼거렸다.

"생사판 놈이 사기를 치진  않았군. 천마호심결을 제대로  전해준

모양…."

그러다가 갑자기 중주사견을 보고는 호통을 쳤다.

"아, 이야기 다 했으면 어서 꺼지지 않고 뭘하나!"

중주사견이 꼬리를 말고 사라져 버리자 고목은 부채를  접고 남여

에서 내려와 남여를 들던 두 여인에게 말했다.

"너희들 그동안 고생했다. 이제부턴 가마꾼 노릇은 그만 둬라."

두 여인이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물었다.

"그럼 이젠 무얼 하면…?"

"용유진이란 꼬마 놈을 따라다니며 감시해라. 놈이 어떻게 자라는

지, 공손강시가 수작을 부리진 않는지, 생사판과 상관오리가 접근하

지는 않는지."

"언제까지 하면 좋을지…?"

"기한은 앞으로 십 년, 그러나 만약 그 전이라도  놈이 월인의 비

밀을 밝혀내서 고루마공을 끄집어내면  즉시 연락해라. 그  때 너희

임무도 끝날 것이다."

그는 부채로 머리를 툭툭 쳐가며 생각에 잠기더니 아차 하는 표정

이 되었다.

"뭔가 허전하다 했더니 개놈들이 감춘 비밀을 캐내는  걸 잊었군.

놈들이 끼고 다니는 그 사람에게 무언가 비밀이  있을거야. 그 점박

이 놈 눈치가 그랬거든.  음… 단순히 몸값을  받으려는 인질이었을

까? 고문을 한 흔적이 있으니 그건 아닐테고. 무언가 알아내려 하거

나 얻어내려 한 것일텐데…."

그는 여인들에게 다시 명령했다.

"당분간은 별 일이 없을테니  하나는 용가 애를 감시하고  하나는

개놈들을 따라가 보아라.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어쩐지 심상

치 않은 느낌이 들어."

심상치 않다고 느낀 것은 고목만이 아니었다.  중주사견은 고목에

게서 떠난 후 일각도 지나지 않아 다시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잡혔

다. 그리고 그들은 고목과 마찬가지로 용유진과 월령에 관한 이야기

를 묻고, 흑구삼과 백구말의 팔까지 자른 후에 그 이야기를 들었다.

거기 더해서 그들은 고목처럼 성질이 급하지  않아 중주사견이 잡은

사람의 내력까지 밝혀내었다.

"팔비원후(八臂猿 )? 이 자가 팔비원후던가?"

생사교 팔대호교령(八大護敎令) 중 하나인 무면호(無面狐)는 눈코

입 하나씩 뜯어보면 잘생겼다고도 말할 수  있는 용모의 소유자이지

만 전체적으로는 대단히 지루하게 생긴, 개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

을 정도로 평범하게 생긴  인물이었고, 그 몰개성과  무표정이 그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얼굴에 지금 호기심을  담아서 들여다

볼 정도로 중주사견이 잡고 있는 인물은 유명한 자였다.

팔비원후, 여덟 개의 손을 지닌 원숭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그는

손 빠르기로 유명한 신투(神偸), 말하자면 소매치기였다. 그의 소매

치기 실력은 달인의 경지에 달했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래서 은

퇴한 후에는 웬만한 대부호 못지 않게 부유하게 여생을 보내고 있다

고 소문은 말해주고 있었는데,  재수 없게 중주사견에게  걸린 것이

다.

무면호는 지독한 고문으로 거의 숨이 넘어가고 있는 초라한 노인,

팔비원호를 내려다 보면서 물었다.

"이 불쌍한 원숭이에게서 뭘 긁어내려고 했나?"

반구대는 형제들과 함께 무면호의 뒤에 꿇어앉아  있었는데, 무면

호가 방금 던진 질문이 당연히 그에게 던진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

지만 그 대답은 죽어도 사실대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

들이 평생 온갖 나쁜 짓을 하면서 모은 재물 전부보다도 더 가치 있

는 것이 그 대답에 걸려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재산을 감춘 곳을 알아내려고…."

"흥!"

무면호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반구대의 얼굴이  이번엔 새파랗

게 질렸다. 뒤에서부터 다가오는 서늘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까도 무면호가 저렇게 웃고,  등 뒤로부터 서늘한  기운이 다가오

고, 백구말의 팔이 잘려져 뒹굴었었다. 반구대는 미친 듯 소리를 질

렀다.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  우린 팔비원후

에게서 한 권의 책을 얻고자 했습니다."

서늘한 기운이 점차 멀어져 갔다. 반구대는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우린 팔비원후와 원래 아는 사이였습니다. 일전에 그를 찾아갔을

때 그가 술을 대접했는데, 그는 술이 약했지요. 술김에 그는 자신이

최근에 얻은 책을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우린 그가  잠든 사이에 집

을 뒤졌습니다. 책은 그의 집에 없었습니다. 우린 책이 어디 있는지

듣고 난뒤에 일을 했어야 했다고  후회했습니다만 이미 늦었습니다.

팔비원후는 술이 깬 후엔 우리에게 당했다고 생각하고 책이 있는 곳

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잡아다가 고문을 했습

니다만 아직 털어놓지 않고 있습니다."

"무슨 책인데?"

"과거 유명했던 철장문(鐵掌門)이라는 곳에서  만들어진 무공비급

입니다. 그걸 익히면 손과  팔이 강철처럼 단단해진다고  해서 그만

욕심에 눈이 멀었습니다."

무면호는 이번엔 웃지 않았다. 대신 단호한 어조로 명령했다.

"그놈은 팔이 없으니 다리를 잘라버려라!"

멀어져 갔던 서늘한 기운이  다시 다가왔다. 반구대가 다시  외쳤

다.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 정말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용서가 없었다. 두 사람이 그의 어깨를  잡아 뒤

로 눕혔다. 한 사람이 칼을 휘둘렀다. 그의 왼쪽 다리가 떨어져나갔

다.

밤 하늘에 반구대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퍼져 나갔다.  무면호는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자, 이제 다시 말해볼까?"

반구대의 이마로 닭똥같은 땀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기절할 정도

로 아팠지만 대답하는 것이 더  급했다. 살아 남아야 기절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팔비원후는 저희들의 사숙(師叔)입니다. 우린 그의  집안을 그냥

뒤진게 아니라 일가친척 모두를  도륙하고 난 후에  뒤졌습니다. 그

책은 철장문의 무공비급이 아니라 무당파(武當派)에서  흘러나온 것

으로 태청수단진결(太淸修丹眞訣)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이젠 사실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진짭니다. 제발 믿어주십시오."

반구대는 한 순간에 세 가지나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무면호는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나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나무 그늘 아래 어두운 곳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명

성, 생사판이었다. 고목과 마찬가지로 그도 이곳을  떠나지 않고 있

었던 것이다.

생사판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청수단진결이라…, 나도 들은 적이 있다. 나같아도  욕심을 낼

만큼 중요한 책이지. 하지만 그 책이 돌아다닐  리가 없다. 그건 이

미 주인이 있단 말이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일어나서 팔비원후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그 배심에 손을 대고 진기를 주입시켰다. 저승 문턱에 거의 한 발을

디뎠던 팔비원후가 손가락을 움직이더니 번쩍  눈을 떴다. 생사판이

입을 벌려 물었다. 저승사자의 목소리같은  음침한 소리가 퍼져나왔

다.

"네가 가진 책은?"

팔비원후가 눈을 껌벅이더니 대답했다.

"태청… 수단… 진결…!"

생사판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일 리가 없어. 네가 가진 책 이름은?"

"태…청…수…단…진…결…!"

"그것일 리가 없다니까! 거기 태청강기(太淸 氣)가  수록되어 있

는 걸 봤나?"

팔비원후의 입에서 붉은 선혈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도 그 입을

벌려 생사판의 질문에 대답하려 노력했다.  생사판의 눈빛과 목소리

는 지금 일종의 섭혼대법(攝魂大法)을 사용한  것으로, 알고있는 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거기… 수록…되어 있습니…다."

생사판의 눈빛이 급변했다. 그는 진정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게 어디 있나? 태청수단진결을 어디 숨겨놨나?"

"그…건…, 순… 순…, 청… 청…!"

팔비원후의 눈과 귀, 코에서도 선혈이 뿜어졌다. 가득  피를 담아

놓은 가죽 부대가 찢어진 것처럼 한없이 피를 쏟아내더니 그는 고개

를 떨구어 버렸다. 모진 고문에 시달린 데다가  생사판이 마지막 기

력을 끌어냈기 때문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것이다.

생사판은 허탈하게 일어나더니 무면호를 향해 말했다.

"그 놈들을 끌고 가자. 더 조사해 볼게 있다."

생사판과 무면호의 주변으로는 검은 옷에 검은 피풍, 검은 천으로

얼굴까지 가린 자들이 십수명이나 서 있었다. 중주사견의 손발을 자

른 자들이 바로 이들이었고, 자객집단  생사교의 신도들이자 자객들

이 이들이었다. 그들이 줄줄이 걸어나와  중주사견의 팔다리를 잡아

들었다.

생사판이 다시 명령했다.

"팔호교령은 남아서 그 아이를 감시해라. 인원은 얼마를  써도 좋

다. 기한은 무기한."

팔호교령, 무면호는 고목의 두 수하 여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

런 이의없이 명령을 따랐다.

생사교의 무리들이 핏자국과 발자국까지 깨끗이 처리하고 떠난 자

리에 땅속에서 솟아오르듯이 두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도대체가 그

렇게 은밀하게 숨어 있었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고, 그렇게 귀신처럼

나타난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는 인물들이었다. 하나는  여자, 다른

하나는 남자였는데 둘 다 팔척이 넘는 거대한 덩치에, 키와 허리 둘

레가 비슷해 보일 정도로  비대한 몸매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여자는 거대한 태산도(泰山刀)를 등에  걸고 있었고, 남자는

항아리만한 머리를 가진 철퇴(鐵槌)를 허리에 차고 있어서 어느모로

보나 대장부요, 여장부지 염탐꾼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이

중의 마지막 하나, 북신 상관대부의 수하로 용유진의 일거일동을 감

시하기 위해 남긴 자가 다름아닌 그들이었다.

여자가 말했다.

"무슨 책이라고 했지요?"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태… 뭐라고 했는데 잘 못  들었네. 생사교 놈들이 너무  많아서

가까이 가지 못했고, 특히  생사판이 얘기할 땐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손을 쓴 모양일세."

체구 답지 않게 부드럽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대화를  해 나가는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용은 별로 부드럽지가 못했다.

"갑자기 일이 둘로 늘었군요. 용가 애새끼는 그냥  죽여버리면 될

텐데 대부께서는 왜  이런 귀찮은  일을 하라고 하시는지  모르겠군

요."

"그건 천랑(天娘)이 잘 모르고  하신 말씀일세. 공손조덕이  어떤

인물인데 후계자로 찍은 인물을 그냥 두겠나. 섣불리 건드렸다간 여

러모로 문제가 있을 게 틀림없어. 자네도 괜히 서툰 짓을 해서 대부

께서 하시는 일을 망치지 말고 조심하게나."

천랑이라 불린 여인은 비대한 몸집을 꼬면서 목소리를  더욱 가늘

게 해서 말했다.

"아이, 제가 어디 그런 허튼  짓을 하겠어요? 그저 두 가지  일을

하려니 적가가(狄哥哥)와 헤어져야  할 것같아서 투정을  조금 부린

것뿐이지요."

나름대로는 애교를 부린 것인데  믿어지지 않게도 이  남자에게는

통한 모양이었다. 적가가, 해석하자면 적씨 오빠라  불린 사내는 솥

두껑같은 손으로 말궁둥이만한 여인의 엉덩이를 어루만져 주며 콧소

리를 섞어 말했다.

"사랑엔 시련이 없을 수 없는  법이지. 나도 자네랑 떨어져  있기

싫은 마음은 마찬가지지만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도  드네 그려. 헤

어져 있다가 다시 만나면 기쁨도  두 배, 애정도 두  배로 깊어지지

않겠나."

"가가의 말씀이 맞아요. 제 소견이 좁았던 걸 용서해 주세요."

귀랑의 목소리에도 콧소리가 섞여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

안고 달빛 아래 서서 몇번이고 입맞춤을  하더니 한참만에야 아쉬운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다. 물론 다른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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